추운 바람이 불고
비행기 소리 요란한 공항
지나는 차들처럼
지나는 사람도 많기도 하지
지나는 차 속에 시간도 덤으로 묻어가고
떨어지는 별 같은 비행기도 양미리 두름처럼 묶여
하얀 궤적을 그린다
구름 속으로 사라지듯 마음에서 지워질 때까지
네가 잎을 떨구지 못하고 서 있둣
너를 보이지 않는 끈으로 잡고 서서
날 춤 추던 생선에 소금 뿌리듯 절여진 마음에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방황하는 발길만
썰렁해진 이태원 좁은 골목길에 머물며
허망한 외마디 소리침만 바람을 타고
#작가의 변
내가 이민을 오던 1995년은 1994년 성수 대교 붕괴 사건과 501명의 사망자를 낸 삼풍 백화점 붕괴 사건 등 사건이 많이 났다. 사건들은 늘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났다. 기억에 많이 남는 KAL기 폭발 사고 때는 비행기를 한 번도 타 본 적이 없는 터라 소련 상공을 날다가 소련의 공격으로 민간 항공기가 추락했다는 것이 이해도 되지 않았고 현실 감이 별로 없었다. 성수대교 사건 때 난 인천에서 서울 홍은동으로 출근하고 있었으니 성수 대교와 상관이 없었지만, 신도림역의 푸쉬맨에 밀려 몸이 저절로 공중 부양하거나 창에 일그러진 얼굴로 기대고 그 순간을 버티던 나날들. 대형 사고는 늘 주변을 서성대고 있었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
1988년 그러니까 올림픽이 열리던 서울 하늘에 올림픽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았던 내가 거기 있었다. 군을 제대하고 서울로 올라와 노량진 독서실에서 새우잠을 자면서 요리학원 다니며 조리사 자격을 취득 후에 처음으로 취직하게 된 곳은 신림역 사거리의 양식당이었고 주인은 숙식하는 우리 주방 식구들을 안에 둔 채 밖에서 가게 문을 걸어 잠갔다. 화장실은 식당 밖에 있었다. 오븐은 아래서 여닫는 오븐 하나인데 피자 오더가 정말 많이 들어 왔던 것 같다. 산처럼 쌓이는 설거지도 해야 하고 샐러드와 피자 등은 물론 스테이크에 채소 등도 준비해야 했는데 일하면서 힘든 것을 참는 것보다 가게 문을 밖에서 걸어 잠궈 갇혔다는 사실이 나를 견디기 힘들게 했다. 소변은 케첩 통에서 모아 두고 큰 것은 참아야 했다. 그리고 일주일을 못 견디고 나는 그만두고 다시 노량진 요리학원에 가서 다른 일자리를 소개해 달라 말했고 요리학원에서는 이태원의 소방서 골목의 미군 클럽이 있는 곳의 스탠드바 주방에 취직시켜주었는데 낮에는 자고 저녁부터 아침 6시까지 영업하는 올빼미 생활이 시작되었다.
찹스케이크나 돈까스 등의 메뉴도 있지만 대부분은 마른안주와 과일이 많았고 생선 마른 것을 구워 주기도 했다. 대부분은 양주를 놓고 앉아서 직원들하고 술 마시다 가는 아저씨들이 주 고객이었는데 지하에는 홍길동, 조용필, 남진 등의 이름표를 달고 다니는 웨이터들이 있는 나이트클럽이었다. 아침에 영업이 끝나고 주방 위에 딸린 허리도 펴지 못하는 다락방에서 잠자려고 하면 지하에서 매질하는 소리가 들려와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는데 저녁에 장사를 시작하기 전에 입구에 내려가서 가게 앞에 서 있는 기도에게 아침에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보면 애들이 말을 안 들어서 군기를 좀 잡았다고 한다.
월급 때가 되어도 월급을 줄 생각을 안 하는 사장, 슬리퍼 찍찍 끌고 시장에 가서 가게에 필요한 식자재 사 올 때도 젊은 캐셔와 함께 갔는데 가끔씩 캐셔와 사장의 관계가 심상치 않음을 보게 되었고 눈부시게 이쁜 마누라를 두고 뭐 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그리고 손님 접대하던 아가씨들은 툭하면 나에게 담배 있냐고 물어 오고, 오래 있으면 안 된다는 판단이 들어 예비군 훈련이 나왔다는 핑계를 대고 시골에 가서 짱박혀 있으니 학원을 같이 다니던 친구가 프라자호텔 철도 그릴에 일할 생각 없느냐고 연락이 와서 서울로 다시 올라오게 된다.
나의 이태원 스탠드바 생활은 아주 짧았지만, 평생을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트라우마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10.29참사를 맞아 다시 그 수십 년이 지난 다락방과 담배 연기를 하염없이 뿜어내던 아가씨들, 그리고 아침마다 들리던 몽둥이로 엉덩이 때리는 소리는 잊히지 않는다. 당시엔 올림픽이 뇌리에 있었는지 의심스럽다.
물론 지금은 그때의 이태원이 아닐 것이다. 술 먹고 흔들리던 아저씨들이 걷던 이태원 거리가 아닐 것이다.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거리로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거리로 변했을 테니까? 하지만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이 있다.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게 있다. 그것은 소중한 생명이다. 사람들은 때때로 자기 가족이나 자기가 기르는 애완견과 다른 사람들을 저울에 달아 자기 또는 우리라는 단어의 무게 추를 아주 무겁게 양심에 매다는 경우가 많다.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고 소중하다는 사실을 잊기도 한다. 물론 참사 순간 많은 시민이 자발적으로 인공호흡에 참여하고 주변의 사람들을 살리려고 노력한 것을 안다. 정부는 없고 다만 시민만이 있던 이태원 골목길은 지금도 유가족들의 오열이 끊이지 않고 정부는 어떤 관련한 담화나 사과도 없었다.
소중한 나의 애완견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자녀이기 때문에 아픈 마음을 나누는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많다. 정치적 이해득실로 계산하고 지워버리고 싶은 사건인지도 모른다. 나의 이태원에서 아주 짧은 근무 기억도 오래 남는데 참사 가족은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세월을 악몽 같은 나날로 살아갈까?
사람은 홀로 있을 때 외로움을 느끼지만, 군중이나 무리에서도 소외되고 공감하지 못하면 외로움을 더 느끼게 된다. 불행도 남이 행복하고 내가 불행하면 더 불행함을 느끼게 된다. 남들은 다 자기 집을 가졌는데 나면 가지지 못했다면 얼마나 불행함을 느끼게 되겠는가? 때로 저택 같은 집에 초대받아 가서 써늘한 느낌에 좁아도 가족이 함께 즐겁게 사는 집이 좋아하는 느낌을 받기도 하다가 돈 때문에 싫은 소리를 하고 마음이 찢어질 듯 아플 땐 ‘나는 왜 돈이 없는 가난한 사람일까’ 하고 나를 원망하게 되기도 한다. 돈도 명예도 하루아침에 없어질 수 있다는 명제를 잊고 산다. 아들이 “나도 늙은 것 같아”하고 말해서 “네가 나이 먹은 것만큼 아빠 엄마도 나이를 들어서 앞으로 2~30년 살아야 잘 살 수 있을 거야” 하고 말하니 슬프다고 말한다. 우린 사랑하는 사람들이 늘 함께 할 거라는 착각 속에 산다. 언제든 떠날 거라는 전제 조건을 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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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은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사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 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 학원에 다니며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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