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불교교류 비망록 이제, 다시 본다] 34. 2008년 개성관광 중단사태
[남북불교교류 비망록 이제, 다시 본다] 34. 2008년 개성관광 중단사태
  • 이지범 북한불교연구소 소장
  • 승인 2022.09.13 12: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개성 유적, 빛을 잃다”

1392년 조선이 개국한 이래로 여러 왕이 개성을 찾았다. 1909년 대한제국 순종 황제의 개성 행차는 선왕들의 행차와도 달랐다. 많은 대신과 함께 며칠씩 걸쳐 가던 곳을 기차를 타고, 이곳저곳을 들러 몇 시간 만에 도착한 일정이었다. 순종의 서북 순행은 본인 의사로 결행한 것이 아니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조선통감이 기획한 행사였다는 점도 달랐다. 이토 통감은 순종 옆에 늘 자리를 잡고 총지휘했다.

민심을 회유하고, 강제 병합의 명분을 찾으려는 일본의 목적에서 추진된 순종의 순행은 1909년 1월 경상도와 충청도에 이어, 그해 1월 27일부터 2월 3일까지 7박 8일 동안 경성 → 평양 → 의주 → 신의주 → 정주 → 평양 → 개성 → 경성으로 돌아왔다. 이 순행에는 이토 통감을 비롯해 궁내부 201명・내각 49명・통감부 29명 등 총 279명의 호종원이 참가했다. 그중 일본인이 81명, 내국인이 198명이었다. 서북 순행의 실제 과정을 촬영하기 위해 사진사 3명과 무라카미사진관 점원 2명이 궁정열차에 탑승했는데, 현재 전하는 《순종황제 서북순행 사진첩》의 사진이 그것이다.

매서운 한파가 몰아친 1909년 2월 3일 오전 10시, 단발에 신식 군복 차림의 순종 황제는 두툼한 망토까지 걸치고 개성의 행재소(왕이 임시로 머무는 곳)를 나섰다. 순종이 전용 마차에 오르자 수십 명의 대한제국 관료들과 이토 통감을 비롯한 통감부 관료들은 각기 인력거에 나눠 탔고, 말을 탄 무관들은 순종과 관료들을 호위하며 송악산 남록으로 향했다. 만월대 초입에서 마차는 더는 갈 수 없어 순종은 준비된 남여(藍輿)로 옮겨 앉았다. 남여꾼 여덟 명은 순종이 탄 남여를 메고, 일산을 든 하급관리는 송악산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을 막기 위해 이리저리 방향을 바꿔가며 애를 썼다.

일제강점기 때 《황성신문》(1909.2.5.)에는 “1909년 2월 3일 순종 황제가 만월대를 관람했다.”고 썼다. 개성 황궁 터의 완만한 구릉지를 지나 회경전 앞 가파른 33계단을 오르면서 순종은 천년의 세월을 간신히 버틴 채 군데군데 남아 있는 석축, 다 허물어진 고려 황궁터를 보았다. 이날 폐허가 된 만월대를 본 순종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떤 말을 했는지는 기록에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허물어진 만월대를 걸어 내려오는 사진 속 순종의 꽉 다문 입술에서 그의 마음을 짐작게 한다.

그때로부터 94년 만에 다시 열린 개성관광은 찬 바람이 불던 2007년 12월에 처음 시작돼 2008년 11월 전면 중단됐다. 같은 해 8월 금강산관광이 멈춘 후에도 4개월간 지속되던 개성관광 길도 닫혔다. 또한 개성의 천년 유적에도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일 년 동안 열렸던 개성과 개성역사유적지구의 뒷이야기를 통해 개성관광의 길을 다시 살펴본다.

개성 만월대에서 내려오는 순종 황제(1909.2.3.). 사진: 국립고궁박물관 '순종황제 서북순행 사진첩'





순종 황제 등 개성역 출발 장면(1909.2.3.). 사진: 국립고궁박물관 '순종황제 서북순행 사진첩'





54년 만에 열린 개성관광의 길(DMZ, 2007.12.5.). 사진출처: 다음블로그 '정란수'(2015.10.28.)



개성관광, 1년의 시간

개성 육로관광은 2000년 8월 22일 양측 협의로 추진돼 현대아산과 북측 개성명승지관광총국의 합의로 2005년 8월 26일 1차 개성 시범관광에 이어 3차까지 1,484명이 시범관광을 했다. 현대아산은 2007년 11월 3일 개성・백두산관광에 관한 합의서 체결로 빛바랬다. 같은 해 12월 5일 1차 개성관광을 시작으로 2008년 10월 15일에 10만 명을 돌파했다. 그러나 그해 7월 11일 새벽에 금강산 민간인 피격사건이 발생하면서 북측은 11월 24일에 개성관광 전면 중단을 통보했다. 2008년 11월 28일 관광객 239명이 하루 일정으로 개성을 다녀온 후, 개성관광 1년의 시간은 멈추었다.

경의선 육로관광 시작 1년 만에 남측 112,000명이 다녀온 개성관광은 동해안의 금강산과 더불어 남북문화교류의 장이었다. 2008년 7월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사건으로 금강산관광은 즉시 중단됐다. 그 당시에 개성관광마저 끊기면 기껏 시작한 햇볕정책이 물거품이 된다는 공론에 따라 북측(DPRK)의 통보에도 불구하고 몇 달간 계속 유지됐다. 관광사업 주최한 남측 현대아산은 하루 일정의 개성관광에 대한 다양한 상품개발과 함께 자남산여관 등 숙박이 가능한 체류형 관광사업을 개발한 단계였다. 하지만 2008년 한 해를 넘기지 못하고, 11월 28일 마지막 관광객을 끝으로 개성관광 길은 닫혀버렸다.

이때 남북한 관광사업은 국민의 정부 때 햇볕정책의 추진으로 1998년 11월 금강산관광이 처음 시작되고, 금강산관광이 성공적으로 정착하면서 참여정부 때인 2007년 12월 개성관광을 추가로 시행했으나, 이명박 정부에 의해 모든 관광 길이 막혔다. 당시에 서울과 경주처럼 명승고적과 문화재가 많아 관광도시의 잠재력이 있는 개성은 심리적으로 멀게 느껴지지만, 지리적으로 가까워서 금강산보다 좋은 접근성을 강점한 관광지였다. 박연폭포와 대흥산성 북문・관음사, 선죽교와 숭양서원, 고려 성균관과 박물관, 태조 왕건릉(현릉)과 공민왕릉・노국대장공주릉(현정릉) 등을 둘러보는 코스였다. 현대아산 홈페이지에 소개되었던 2008년 당시에 요금은 식사와 가이드 비용이 포함된 당일 개성관광 성인 188,000원이고, 초중고등 학생은 170,000원이었다.

지난 시기 개성관광을 한 경험으로 본다면 향후, 개성은 관광이 새로 시작되거나 통행이 자유로워진다고 할 때 서울 및 수도권에서는 평소 쉽게 오갈 수 있을 만큼 가깝기에 수학여행보다는 소풍 목적지가 될 가능성이 크다. 분단 이전에도 서울 보통학교(중고등학교) 학생들의 단골 소풍코스였다. 개성으로 수학여행은 남부지방 학생들이 주로 가게 될 가능성도 있다. 중북부 지방 학생들도 경주・부산・제주도 등과 함께 개성으로 수학여행을 갈 수 있다. 또 남측에서 걷기와 답사 문화의 확대로 인해 고려왕조 문화재의 보고인 개성은 수학여행과 역사기행, 학술답사지로 인기 1순위가 될 뿐만 아니라 숙박이나 요식업 등 관광 관련 사업의 상당한 발전이 예상된다.



개성 선죽교와 해설봉사원. 사진: 남북역사학자협의회, '개성만월대남북공동발굴디지털기록관' 홈페이지





개성 고려성균관 명륜당 뜰과 동재. 사진: '일본 JSTOURS' 홈페이지





개성 오관산 영통사. 사진: 남북역사학자협의회, '개성만월대남북공동발굴디지털기록관' 홈페이지



고려 개경에 남은 유적

‘열린 도읍지’란 뜻을 가진 개경의 이름과 달리 지금의 개성은 상호 왕래가 사라진 닫힌 회색빛 도시로 되돌아갔다. 조선 개국으로 고려의 황금빛을 잃은 개성은 ‘개성상인’의 이름으로 다시 세상에 드러냈다. 근세기까지 빛났던 그 이름도 6.25 전쟁으로 말미암아 옛날이야기로만 전해진다.

그로부터 54년 만에 열린 개성관광은 2013년 6월 23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개성역사유적지구에 관한 남북한의 관광사업이다. 고려의 도읍지 개성에 새빛을 더한 개성관광은 분단에 의한 정치・군사적인 대립이 아닌 역사・문화적 교류의 모범 답안으로 채택, 시작됐다. 당시 개성관광은 조선의, 대한제국의 마지막 개성순방이던 순종 황제의 서북 순행처럼 단순한 일정이었다. 순종의 개성 방문은 이토 통감이 짜놓은 1909년 2월 3일 오후 1시 개성역 출발 일정에 따라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목청전에 가지 못하고, 태종 이방원의 잠저였던 경덕궁에만 들릴 수 있었다. 조선 왕들이 개성 방문 때에 꼭 찾아가 참례를 하던 목청전도 가지 못한 일정임에도 불구하고, 순종 황제가 이토 통감에 의해 개성 만월대에 간 이유와도 오버랩된다.

일찍이 순종 황제도 구경하지 못한 개성의 유적지는 옛 고려의 도읍지 개경에 남은 유적들이다. 개성성벽 5개 구역, 만월대와 첨성대 유적, 개성 남대문, 고려 성균관, 숭양서원, 선죽교와 표충사, 왕건릉과 7개 왕릉과 명릉, 공민왕릉을 포함한 12곳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고려의 정치, 문화를 간직하는 ‘개성역사유적지구’이다.

① 개성 성벽은 고려 건국 이전, 896년 송악에 축조된 발어참성을 기반으로 축성한 내성의 성벽 다섯 곳이 지정됐다. ② 만월대와 개성 첨성대로 만월대는 919년에 세워진 고려왕조의 궁궐터로, 궁궐은 1361년 홍건적의 난 때 소실됐다. 만월대 서북쪽에 있는 첨성대는 천체와 기상 관측소인데, 919년경에 건립됐다. ③ 개성 남대문은 1393년 축조된 내성의 남문으로, 한반도의 성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④ 고려 성균관은 만월대 동쪽 약 2.5km에 있다. 원래 국자감으로 고려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다. 현재 고려박물관으로 쓰인다. ⑤ 숭양서원은 고려 말 포은 정몽주의 집터에 세워진 조선 시대의 서원으로, 현재 건물은 1573년 세운 것이다. 정몽주와 화담 서경덕을 비롯한 고려와 조선 유학자들의 사당이다. ⑥ 선죽교와 표충비로 원래 선지교이던 선죽교는 정몽주의 집(훗날 숭양서원)에서 500m 떨어진 곳에 있는 화강암 돌다리로 폭 3.36m, 길이 8.35m이다. 정몽주가 최후를 맞이한 장소로 유명한 선죽교 옆에 그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이 표충비다. 두 개의 표충비 가운데 북쪽 것은 1740년, 남쪽 것은 1872년에 세웠다. 만해 한용운은 1921년 12월 조선불교청년회 주최로 기독청년회관에서 열린 〈철장철학〉 강연에서 “개성 송악산에 흐르는 물은 만월대의 티끌은 씻어가도 선죽교의 피는 못 씻으며, 진주 남강에 흐르는 물은 촉석루의 먼지는 씻어가도 의암에 서려 있는 논개의 이름은 못 씻는다.”고 말미에 했던 말이 전한다. ⑦ 태조현릉(왕건릉)・칠릉군・명릉군으로 현릉은 만월대 서쪽 3km 지점에 태조 왕건과 신혜왕후 류씨의 합장 능묘로 1994년에 개건됐다. 칠릉군은 현릉 북서쪽에 위치한 일곱 기의 왕릉을 묶어 일컫는데, 12~13세기에 걸쳐 조성됐다. 현릉 남서쪽 1km에 고려 충목왕의 능묘인 명릉을 위시한 세 개의 무덤 떼를 명릉군이라 부른다. ⑧ 공민왕릉(현정릉)은 경효왕과 왕비 노국대장공주의 합장 무덤이다. 개성시에서 서남쪽으로 14km 떨어진 개풍군 해선리에 위치한다. 공민왕이 사망하기 2년 전인 1372년에 완성됐다. 두 봉분이 서로 붙어 있는 왕릉의 등록 면적은 51.6ha이다.

이 밖에도 개성직할시 고려동의 안화사를 비롯한 박연동의 관음사와 대흥사, 용흥동의 영통사 등 4개 사찰이 현존한다. 엄밀하게 보면 안화사는 개성 시내 사찰인 데 반해, 나머지 3개소 사찰은 개성 외곽에 위치한다.

① 송악산 안화사는 930년 8월 왕건의 아우 왕신의 원당으로 창건된 ‘안화선원’이다. 1118년 4월 중창해 정국안화사로 개칭한 안화사는 1931년 대규모로 중창됐다가 1951년에 파괴돼 1989년 7월 복원되고 보존유적 제1646호로 지정됐다. 2015년 4월 독일대사관의 지원으로 보수됐다. ② 천마산 관음사는 970년 고려 탄문대사가 창건한 다음,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돼 1646년 정명대사가 세 번째 중창했다. 지금의 대웅전은 1797년 성훈대사가 중수한 건물로 1935년에 중수해 국보유적 제142호로 지정됐으며, 2018년 독일대사관의 지원으로 보수했다. ③ 대흥산성 대흥사는 921년 10월 태조 왕건의 명으로 이엄 왕사를 모시기 위해 창건됐다. 1690년 처점선사가 중수한 대흥사는 1940년 초에 발생한 산불과 전쟁 때 소실됐다. 그 후 폐사된 대흥사는 옛터에서 1km 아래쪽에 남아 있던 대승당 건물로 1990년 초 이전해 보존유적 제529호로 지정됐다. 2019년 봄 대흥사 옛터에 대한 발굴조사가 진행됐다. ④ 오관산 영통사는 1027년 고려 현종의 왕명으로 창건돼 태조 왕건 등 선대의 원찰이다. 1065년 5월 의천 대각국사의 출가 사찰로, 또 1101년 10월 사후에 머무는 열반지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2005년 10월 남북공동으로 복원돼 국보유적 제192호로 지정됐다.

남북분단 이후, 휴전선 서북쪽 개성지역의 사찰은 2005년 8월 개성 시범관광 때 처음 개방된 이래로 2007년 12월부터 2008년 11월까지 남측 관광객에 열렸다가 다시 닫혀있다. 안화사와 대흥사는 2000년 이후 처음 독일, 미국 등 외국인들에 개만 간혹 공개됐을 뿐이다. 관음사는 1999년부터 박연폭포를 찾은 내외국인들에게 개방되었다가 2005년부터 전면 개방된 사찰이다. 영통사는 1998년 봄, 영통사지 발굴조사로 폐사된 지 400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았다. 2003년 봄부터 복원공사를 하면서 남측에 알려진 다음, 2015년 11월 ‘영통사 복원 10돐 기념 조국통일기원 북남불교도 합동법회’까지 북측 조불련과 남측 천태종단의 복원 기념행사 장소로 이용되었으나 일반인 관광 코스에서는 제외됐다.

아직도 열린 적이 없는 개성의 불교 유적으로 주목받는 곳은 태조 왕건의 명으로 건립한 법왕사・왕륜사・대선원・통사 등 개경 열 곳의 사찰이다. 음력 11월 팔관회가 처음 열린 법왕사, 음력 2월 보름 연등회가 처음 열린 왕륜사, 1038년 2월부터 개경 궁성과 대봉은사 구간에서 연등행렬이 행해진 지내산 봉은사를 비롯한 고려 천태종을 창종한 국청사 터가 자리하고 있다. 또한 1022년 10월 《초조대장경》 판각기념 경축행사가 처음 봉행된 영취산 현화사, 1056년~1068년까지 2,800칸을 건설한 고려 문종의 원찰로 창건된 흥왕사는 《고려교장》(일명 속장경)을 완성, 봉납한 절이다. 1101년 10월 의천 국사가 입적한 개경 총지사 등은 다시 찾아야 할 불적들이다.

천 년 전, 송나라 때 서긍은 고려 왕궁에 필적할 규모의 사찰은 10곳이 넘었다고 했다. 16세기 말 차천로는 《오산설림초고》에서 “고려 수도 개성에만 300여 곳 이상의 사찰이 있었다.”라고 했다. 이처럼 개성에 남은 불적들은 우리나라 국명이 만들어진 고려 오백 년의 빛과 그림자이다. 그간 만월대와 금속활자에만 집중된 개성유적발굴조사가 고려의 겉모양과 상징을 다루었다면, 이를 잉태하여 문화로 만들어 낸 고려의 진면목은 사라진 절터에 묻혀 있다. 금강산관광이 멈춘 후에 4개월 지속됐던 개성관광도 사상과 이념, 체제의 장벽을 넘지 못했다. 그래서 남북이 공유할 수 있는 핏줄과 같은 공감 콘텐츠를 재현할 수 있는 개경의 절터 찾기와 같은 일을 시작할 때다.

# 다음 편은 ‘2009년 중국 세계불교포럼’이 이어집니다.

-------------------------------------------------------------------------------------
개성 만월대에서 내려오는 순종 황제(1909.2.3.). 사진: 국립고궁박물관 '순종황제 서북순행 사진첩'
순종 황제 등 개성역 출발 장면(1909.2.3.). 사진: 국립고궁박물관 '순종황제 서북순행 사진첩'
순종 황제 등 개성역 출발 장면(1909.2.3.). 사진: 국립고궁박물관 '순종황제 서북순행 사진첩'
54년 만에 열린 개성관광의 길(DMZ, 2007.12.5.). 사진출처: 다음블로그 '정란수'(2015.10.28.)
54년 만에 열린 개성관광의 길(DMZ, 2007.12.5.). 사진출처: 다음블로그 '정란수'(2015.10.28.)

개성관광, 1년의 시간

개성 육로관광은 2000년 8월 22일 양측 협의로 추진돼 현대아산과 북측 개성명승지관광총국의 합의로 2005년 8월 26일 1차 개성 시범관광에 이어 3차까지 1,484명이 시범관광을 했다. 현대아산은 2007년 11월 3일 개성・백두산관광에 관한 합의서 체결로 빛바랬다. 같은 해 12월 5일 1차 개성관광을 시작으로 2008년 10월 15일에 10만 명을 돌파했다. 그러나 그해 7월 11일 새벽에 금강산 민간인 피격사건이 발생하면서 북측은 11월 24일에 개성관광 전면 중단을 통보했다. 2008년 11월 28일 관광객 239명이 하루 일정으로 개성을 다녀온 후, 개성관광 1년의 시간은 멈추었다.

경의선 육로관광 시작 1년 만에 남측 112,000명이 다녀온 개성관광은 동해안의 금강산과 더불어 남북문화교류의 장이었다. 2008년 7월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사건으로 금강산관광은 즉시 중단됐다. 그 당시에 개성관광마저 끊기면 기껏 시작한 햇볕정책이 물거품이 된다는 공론에 따라 북측(DPRK)의 통보에도 불구하고 몇 달간 계속 유지됐다. 관광사업 주최한 남측 현대아산은 하루 일정의 개성관광에 대한 다양한 상품개발과 함께 자남산여관 등 숙박이 가능한 체류형 관광사업을 개발한 단계였다. 하지만 2008년 한 해를 넘기지 못하고, 11월 28일 마지막 관광객을 끝으로 개성관광 길은 닫혀버렸다.

이때 남북한 관광사업은 국민의 정부 때 햇볕정책의 추진으로 1998년 11월 금강산관광이 처음 시작되고, 금강산관광이 성공적으로 정착하면서 참여정부 때인 2007년 12월 개성관광을 추가로 시행했으나, 이명박 정부에 의해 모든 관광 길이 막혔다. 당시에 서울과 경주처럼 명승고적과 문화재가 많아 관광도시의 잠재력이 있는 개성은 심리적으로 멀게 느껴지지만, 지리적으로 가까워서 금강산보다 좋은 접근성을 강점한 관광지였다. 박연폭포와 대흥산성 북문・관음사, 선죽교와 숭양서원, 고려 성균관과 박물관, 태조 왕건릉(현릉)과 공민왕릉・노국대장공주릉(현정릉) 등을 둘러보는 코스였다. 현대아산 홈페이지에 소개되었던 2008년 당시에 요금은 식사와 가이드 비용이 포함된 당일 개성관광 성인 188,000원이고, 초중고등 학생은 170,000원이었다.

지난 시기 개성관광을 한 경험으로 본다면 향후, 개성은 관광이 새로 시작되거나 통행이 자유로워진다고 할 때 서울 및 수도권에서는 평소 쉽게 오갈 수 있을 만큼 가깝기에 수학여행보다는 소풍 목적지가 될 가능성이 크다. 분단 이전에도 서울 보통학교(중고등학교) 학생들의 단골 소풍코스였다. 개성으로 수학여행은 남부지방 학생들이 주로 가게 될 가능성도 있다. 중북부 지방 학생들도 경주・부산・제주도 등과 함께 개성으로 수학여행을 갈 수 있다. 또 남측에서 걷기와 답사 문화의 확대로 인해 고려왕조 문화재의 보고인 개성은 수학여행과 역사기행, 학술답사지로 인기 1순위가 될 뿐만 아니라 숙박이나 요식업 등 관광 관련 사업의 상당한 발전이 예상된다.

개성 선죽교와 해설봉사원, 사진: 남북역사학자협의회, '개성만월대남북공동발굴디지털기록관' 홈페이지
개성 선죽교와 해설봉사원. 사진: 남북역사학자협의회, '개성만월대남북공동발굴디지털기록관' 홈페이지
개성 고려성균관 명륜당 뜰과 동재. 사진: '일본 JSTOURS' 홈페이지
개성 고려성균관 명륜당 뜰과 동재. 사진: '일본 JSTOURS' 홈페이지
개성 오관산 영통사, 사진: 남북역사학자협의회, '개성만월대남북공동발굴디지털기록관' 홈페이지
개성 오관산 영통사. 사진: 남북역사학자협의회, '개성만월대남북공동발굴디지털기록관' 홈페이지

고려 개경에 남은 유적

‘열린 도읍지’란 뜻을 가진 개경의 이름과 달리 지금의 개성은 상호 왕래가 사라진 닫힌 회색빛 도시로 되돌아갔다. 조선 개국으로 고려의 황금빛을 잃은 개성은 ‘개성상인’의 이름으로 다시 세상에 드러냈다. 근세기까지 빛났던 그 이름도 6.25 전쟁으로 말미암아 옛날이야기로만 전해진다.

그로부터 54년 만에 열린 개성관광은 2013년 6월 23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개성역사유적지구에 관한 남북한의 관광사업이다. 고려의 도읍지 개성에 새빛을 더한 개성관광은 분단에 의한 정치・군사적인 대립이 아닌 역사・문화적 교류의 모범 답안으로 채택, 시작됐다. 당시 개성관광은 조선의, 대한제국의 마지막 개성순방이던 순종 황제의 서북 순행처럼 단순한 일정이었다. 순종의 개성 방문은 이토 통감이 짜놓은 1909년 2월 3일 오후 1시 개성역 출발 일정에 따라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목청전에 가지 못하고, 태종 이방원의 잠저였던 경덕궁에만 들릴 수 있었다. 조선 왕들이 개성 방문 때에 꼭 찾아가 참례를 하던 목청전도 가지 못한 일정임에도 불구하고, 순종 황제가 이토 통감에 의해 개성 만월대에 간 이유와도 오버랩된다.

일찍이 순종 황제도 구경하지 못한 개성의 유적지는 옛 고려의 도읍지 개경에 남은 유적들이다. 개성성벽 5개 구역, 만월대와 첨성대 유적, 개성 남대문, 고려 성균관, 숭양서원, 선죽교와 표충사, 왕건릉과 7개 왕릉과 명릉, 공민왕릉을 포함한 12곳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고려의 정치, 문화를 간직하는 ‘개성역사유적지구’이다.

① 개성 성벽은 고려 건국 이전, 896년 송악에 축조된 발어참성을 기반으로 축성한 내성의 성벽 다섯 곳이 지정됐다. ② 만월대와 개성 첨성대로 만월대는 919년에 세워진 고려왕조의 궁궐터로, 궁궐은 1361년 홍건적의 난 때 소실됐다. 만월대 서북쪽에 있는 첨성대는 천체와 기상 관측소인데, 919년경에 건립됐다. ③ 개성 남대문은 1393년 축조된 내성의 남문으로, 한반도의 성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④ 고려 성균관은 만월대 동쪽 약 2.5km에 있다. 원래 국자감으로 고려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다. 현재 고려박물관으로 쓰인다. ⑤ 숭양서원은 고려 말 포은 정몽주의 집터에 세워진 조선 시대의 서원으로, 현재 건물은 1573년 세운 것이다. 정몽주와 화담 서경덕을 비롯한 고려와 조선 유학자들의 사당이다. ⑥ 선죽교와 표충비로 원래 선지교이던 선죽교는 정몽주의 집(훗날 숭양서원)에서 500m 떨어진 곳에 있는 화강암 돌다리로 폭 3.36m, 길이 8.35m이다. 정몽주가 최후를 맞이한 장소로 유명한 선죽교 옆에 그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이 표충비다. 두 개의 표충비 가운데 북쪽 것은 1740년, 남쪽 것은 1872년에 세웠다. 만해 한용운은 1921년 12월 조선불교청년회 주최로 기독청년회관에서 열린 〈철장철학〉 강연에서 “개성 송악산에 흐르는 물은 만월대의 티끌은 씻어가도 선죽교의 피는 못 씻으며, 진주 남강에 흐르는 물은 촉석루의 먼지는 씻어가도 의암에 서려 있는 논개의 이름은 못 씻는다.”고 말미에 했던 말이 전한다. ⑦ 태조현릉(왕건릉)・칠릉군・명릉군으로 현릉은 만월대 서쪽 3km 지점에 태조 왕건과 신혜왕후 류씨의 합장 능묘로 1994년에 개건됐다. 칠릉군은 현릉 북서쪽에 위치한 일곱 기의 왕릉을 묶어 일컫는데, 12~13세기에 걸쳐 조성됐다. 현릉 남서쪽 1km에 고려 충목왕의 능묘인 명릉을 위시한 세 개의 무덤 떼를 명릉군이라 부른다. ⑧ 공민왕릉(현정릉)은 경효왕과 왕비 노국대장공주의 합장 무덤이다. 개성시에서 서남쪽으로 14km 떨어진 개풍군 해선리에 위치한다. 공민왕이 사망하기 2년 전인 1372년에 완성됐다. 두 봉분이 서로 붙어 있는 왕릉의 등록 면적은 51.6ha이다.

이 밖에도 개성직할시 고려동의 안화사를 비롯한 박연동의 관음사와 대흥사, 용흥동의 영통사 등 4개 사찰이 현존한다. 엄밀하게 보면 안화사는 개성 시내 사찰인 데 반해, 나머지 3개소 사찰은 개성 외곽에 위치한다.

① 송악산 안화사는 930년 8월 왕건의 아우 왕신의 원당으로 창건된 ‘안화선원’이다. 1118년 4월 중창해 정국안화사로 개칭한 안화사는 1931년 대규모로 중창됐다가 1951년에 파괴돼 1989년 7월 복원되고 보존유적 제1646호로 지정됐다. 2015년 4월 독일대사관의 지원으로 보수됐다. ② 천마산 관음사는 970년 고려 탄문대사가 창건한 다음,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돼 1646년 정명대사가 세 번째 중창했다. 지금의 대웅전은 1797년 성훈대사가 중수한 건물로 1935년에 중수해 국보유적 제142호로 지정됐으며, 2018년 독일대사관의 지원으로 보수했다. ③ 대흥산성 대흥사는 921년 10월 태조 왕건의 명으로 이엄 왕사를 모시기 위해 창건됐다. 1690년 처점선사가 중수한 대흥사는 1940년 초에 발생한 산불과 전쟁 때 소실됐다. 그 후 폐사된 대흥사는 옛터에서 1km 아래쪽에 남아 있던 대승당 건물로 1990년 초 이전해 보존유적 제529호로 지정됐다. 2019년 봄 대흥사 옛터에 대한 발굴조사가 진행됐다. ④ 오관산 영통사는 1027년 고려 현종의 왕명으로 창건돼 태조 왕건 등 선대의 원찰이다. 1065년 5월 의천 대각국사의 출가 사찰로, 또 1101년 10월 사후에 머무는 열반지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2005년 10월 남북공동으로 복원돼 국보유적 제192호로 지정됐다.

남북분단 이후, 휴전선 서북쪽 개성지역의 사찰은 2005년 8월 개성 시범관광 때 처음 개방된 이래로 2007년 12월부터 2008년 11월까지 남측 관광객에 열렸다가 다시 닫혀있다. 안화사와 대흥사는 2000년 이후 처음 독일, 미국 등 외국인들에 개만 간혹 공개됐을 뿐이다. 관음사는 1999년부터 박연폭포를 찾은 내외국인들에게 개방되었다가 2005년부터 전면 개방된 사찰이다. 영통사는 1998년 봄, 영통사지 발굴조사로 폐사된 지 400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았다. 2003년 봄부터 복원공사를 하면서 남측에 알려진 다음, 2015년 11월 ‘영통사 복원 10돐 기념 조국통일기원 북남불교도 합동법회’까지 북측 조불련과 남측 천태종단의 복원 기념행사 장소로 이용되었으나 일반인 관광 코스에서는 제외됐다.

아직도 열린 적이 없는 개성의 불교 유적으로 주목받는 곳은 태조 왕건의 명으로 건립한 법왕사・왕륜사・대선원・통사 등 개경 열 곳의 사찰이다. 음력 11월 팔관회가 처음 열린 법왕사, 음력 2월 보름 연등회가 처음 열린 왕륜사, 1038년 2월부터 개경 궁성과 대봉은사 구간에서 연등행렬이 행해진 지내산 봉은사를 비롯한 고려 천태종을 창종한 국청사 터가 자리하고 있다. 또한 1022년 10월 《초조대장경》 판각기념 경축행사가 처음 봉행된 영취산 현화사, 1056년~1068년까지 2,800칸을 건설한 고려 문종의 원찰로 창건된 흥왕사는 《고려교장》(일명 속장경)을 완성, 봉납한 절이다. 1101년 10월 의천 국사가 입적한 개경 총지사 등은 다시 찾아야 할 불적들이다.

천 년 전, 송나라 때 서긍은 고려 왕궁에 필적할 규모의 사찰은 10곳이 넘었다고 했다. 16세기 말 차천로는 《오산설림초고》에서 “고려 수도 개성에만 300여 곳 이상의 사찰이 있었다.”라고 했다. 이처럼 개성에 남은 불적들은 우리나라 국명이 만들어진 고려 오백 년의 빛과 그림자이다. 그간 만월대와 금속활자에만 집중된 개성유적발굴조사가 고려의 겉모양과 상징을 다루었다면, 이를 잉태하여 문화로 만들어 낸 고려의 진면목은 사라진 절터에 묻혀 있다. 금강산관광이 멈춘 후에 4개월 지속됐던 개성관광도 사상과 이념, 체제의 장벽을 넘지 못했다. 그래서 남북이 공유할 수 있는 핏줄과 같은 공감 콘텐츠를 재현할 수 있는 개경의 절터 찾기와 같은 일을 시작할 때다.

# 다음 편은 ‘2009년 중국 세계불교포럼’이 이어집니다.

-------------------------------------------------------------------------------------

#이지범
경북 경주 출생으로 1984년부터 불교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참여하다가 1990년 초, 법보종찰 해인사에 입산 환속했다. 1994년부터 남북불교 교류의 현장 실무자로 2000년부터 평양과 개성·금강산 등지를 다녀왔으며, 현재는 평화통일불교연대 운영위원장과 북한불교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남북불교 교류 60년사’ 등과 논문으로 ‘북한 주민들의 종교적 심성 연구’ 등이 있다.

[이 기사에 대한 반론 및 기사 제보 mytrea70@gmail.com]

"이 기사를 응원합니다." 불교닷컴 자발적 유료화 신청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11길 16 대형빌딩 4층
  • 대표전화 : (02) 734-7336
  • 팩스 : (02) 6280-2551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석만
  • 대표 : 이석만
  • 사업자번호 : 101-11-47022
  • 법인명 : 불교닷컴
  • 제호 : 불교닷컴
  • 등록번호 : 서울, 아05082
  • 등록일 : 2007-09-17
  • 발행일 : 2006-01-21
  • 발행인 : 이석만
  • 편집인 : 이석만
  • 불교닷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2 불교닷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asan2580@gmail.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