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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지난 5월 28일에 이른바 '자성과 쇄신 결사'의 장래를 염려하면서 '진정성이 대중을 설득하고 동참시키는 힘이다.'라는 제목의 글을 교계 언론에 발표한 적이 있다.
금년 1월 26일 총무원장 스님이 담화문 형식으로 '자성과 쇄신 결사'를 제안하였고 4월에는 자성과 쇄신 결사 지침서를 발간하며 대중적 전파를 기대하였을 것이나, 필자는 그런 방식이 그다지 바람직하지도 유용하지도 않다는 입장이 있었기에 충언을 한마디 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어 6월 28일 '자성과 쇄신 결사본부 설치령'이 통과되고, 7월 5일 '자성과 쇄신 결사본부' 사무실 개소식을 가졌으니 이때야 비로소 결사본부는 활동을 위한 뼈대를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필자가 이런 전차를 구구절절 쓴 이유는 결사본부의 활동은 이제 5개월 남짓 되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봉은사문제, 화쟁위원회의 종교평화선언 등과 시간적으로 병렬시키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점을 일단 말하고 싶다.
예를 들어 "지난 2년간 봉은사 문제와 아쇼카 선언으로 허비했습니다."라고 하여, 이것이 곧 '자성과 쇄신결사는 아무것도 못하고요'라는 것과 등치되는 것처럼 오해하게 표현하는 것은 사실관계의 불일치라는 것이다. 최근 사업을 무리하게 과거와 연결시키지 말았으면 좋겠다.
자성과 쇄신결사 이야기부터 시작해보자. 필자는 법응 스님이 '총무원장 스님께 지난 2월 7일 밤을 세워가며 작성한 A3용지 18매의 의견서'를 제출했다는데 대해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필자는 그런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다.
참고로 필자는 지난 7월 중순 경 결사본부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결사기획소위원회'를 만들고자 하는데 거기 참여해달라는 거였고, 참여 이후에는 '상임기획위원' 역할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필자는 소임을 맡았고 그리고 필자가 하고자 한 것은 법응 스님의 탁견이 배어있을 18쪽의 문건을 수 백, 수 천 명의 대중들이 스스로 토론해서 작성하는 길은 없을까 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그 토론(대중공사)을 친절히 안내하기 위해서 어떤 수단이 필요한가를 고민하면 되는 것이었고, 그를 위한 선행 토론을 우리가 먼저 해보는 것이었다. 이제 그 다양한 방법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니 너무 서두르지 마시라. 결사를 1~2년 내에 성공시켰다는 역사는 없지 않은가!
결정적인 것은, 항시 '전략의 부재'가 화를 부른다는 것이다. '대중을 믿고 그들의 말문을 열게 하라. 강호에는 의사(義士)들도 많고 고수(高手)들도 많다!'필자는 이 말을 믿는다.
최근 도법스님은 <종교평화선언>에 대하여 종정 스님께서 "불조혜명의 본의와 종지를 잃을까 걱정되니 더 다듬어서 완성하라"고 하신데 대해 처음엔 많이 놀랐다고 하시는 등의 내용이 담긴 '예경실장께 보내는 편지'를 공개했다.
필자는 '깜짝 놀랄' 일은 아니었다고 보는데, 스님께서 그러하시다니 달리 할 말은 없겠다. 조계종 종헌은 '第2條 本宗은 釋迦世尊의 自覺覺他 覺行圓滿한 根本敎理를 奉體하며 直指人心 見性成佛 傳法度生함을 宗旨로 한다.'고 명기하고 있다. '불조혜명'이란 것은 종헌 어디에 적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니 필자는 알 도리가 없다.
필자는 이번의 경우처럼 조계종 종헌의 종지라는 것이 종정예경실을 통하여 종책적으로 살아있는 지침'이 되는 경우를 거의 처음 보았다. (참고로 필자는 1994년부터 종단과 지근거리에서 일해 왔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이제부터 비로소 토론(대중공사)이 시작되어야 한다고 본다.
법응 스님은 도법 스님의 그 글이 '종정예하를 겨눈 화살'이며(불법을 향한 화살인지 종권을 향한 화실인지를 구분하여 설명해 주었으며 좋았을 것이다.), 결사본부의 총재는 총무원장이므로 (이런 이유라면 총무원장은 책임질 일이 너무 많다. 사실 무한책임일 것이지만...), 이것은 결국 '총무원장 스님의 종정예하에 대한 불충 그 이상'이라며, 망연자실하다고 표현했다.
실로 망연자실하다. 도대체 '불조혜명과 종지'에 어긋난다는 해석은 과연 종정 스님의 언명인지 예경실장의 해석인지, 아니면 종정 스님의 의중을 현실적으로 해석하여 전달하는 것이 예경실장의 임무이기 때문에 그런 임무를 수행했을 따름인 것인지, 항차 예경실장은 종정 예하에게 종도의 의견을 충실히 전달하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그에 앞서 '불경과 무례'를 먼저 판단하고 통제하는 것이 더 큰 임무라고 인정할 것인지 등등 예경실의 언행에 대해 어찌 해석할 것인지 너무 망연자실하다.
이 망연자실을 끝내려면 이제 정신을 빠짝 차리고, 법응 스님 글처럼 "도법스님! <종교평화선언>은 종정예하의 유시에 따라 차분하게 진행하시면 될 것입니다."라고 슬쩍 눙치고 갈 일이 아니라, <종교평화선언>이 '불조혜명과 종지'에 어긋나는 것이 무엇인지를 놓고 진정한 토론을 시작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라'는 어느 보험회사의 선전문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종정예경실의 언급에 대해 그 사실과 진정성을 묻는 것이 불충(불경)이 되는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오직 스스로 생각하여 이것을 그대로 따라 행하면 해롭고 괴롭게 된다고 판단된다면, 그것을 버리도록 하라. 또 이것을 그대로 따라 행하면 이롭고 행복하게 된다고 판단된다면, 받아들여 행하도록 하라.”(칼라마경)는 그 가르침에 충실하여야 할 때가 되었다.
끝으로 필자가 이해하기에 '우리 종도'들은 <종교평화선언>이 더욱 현실적이고 유익하면서도 실현가능하다고 생각할지언정, 법응 스님께서 <종교평화선언>은 놔두고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주장한 '종단개혁', '중진스님들의 도덕성 회복', '계파정치의 해체'등과 같은 것들이 더욱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격상 후자는 직접적인 참여를 통해 바꾸지 않으면 안 될 일로 받아들여질 것이기 때문이다. 참여의 길이 봉쇄된 조직의 내적 변화는 불가능하다. 그런 차원에서 필자는 법응 스님이 기회가 된다면 결사본부의 소임을 맡았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다수 대중의 왕성한 참여를 이끌어 내는 훌륭한 리더가 될 것이라 믿는다.
아무리 좋은 쇄신안이 몇 백 페이지가 있다 해도 무슨 소용인가. 현실을 바꿀 수 없다면 그건 단 한 장의 격문보다 못하다. 대중의 심금을 울리는 가장 절박한 격문은 언행일치의 진정성이 배인 것이다. 스스로에게 진실해야 한다. 자기 자신에게 진실했는가는 자기 자신 만이 가장 확실히 알 수 있다는 것 조차도 자만이다.하물며 '불조혜명과 종지'가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을 놓고 불경과 무례를 거론하는 분의 진정성에 대해서 우리가 더이상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초겨울 하늘은 희고 바람은 찬데 용암사 쌍미륵은 시립묘지의 무덤들만 바라보고 서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