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부처와 팔정도-수행과 삶이 통일되는 수행론
본래 부처와 팔정도-수행과 삶이 통일되는 수행론
  • 지리산 야단법석
  • 승인 2009.08.18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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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지리산 야단법석- 도법 스님 강의

도법 스님

1. 글 쓰는 이유와 문제에 대한 성찰

오늘의 한국 불교 현실은 비연기적 사고인 실체론적 불교관과 비중도적 실천론인 이분법적 수행론에 빠져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초기불교다 대승불교다, 교학불교다 참선불교다 하고 비연기적 사고로 서로를 분리시켜 선후․경중․우열을 따지는 왜곡된 불교관으로 인해 참불교, 정법 불교가 무엇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이론과 실천, 수행과 일상의 삶, 수행과 깨달음, 자리행과 이타행, 개인 수행과 현실 참여 등을 이분법적으로 분리시키는 비중도적인 양극단의 수행론으로 인해 수행자들의 회의와 갈등과 방황이 확대 심화되고 있습니다.

이에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교학 불교와 참선 불교, 불교 수행과 생활, 수행과 깨달음, 자리행과 이타행, 자기 수행과 현실 참여가 연기 중도적으로 통일되는 길을 열어가고자 본래 부처와 팔정도론을 접목시켜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먼저 불교관과 수행론의 실상에 대한 이분법적인 이해와 인식으로 인해 어떤 문제가 야기되고 있는지 예를 들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일찍이 백운선사는 당신의 불교관과 수행론을 한 마디로 ‘막학불법 단자무심거(莫學佛法 但自無心去)’라고 했습니다. 번역을 하면 ‘특별하게 불법을 따로 배울 것 없다. 다만 스스로 무심하게 살아가라’가 됩니다. 이 글은 백운화상의 직지심체요절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백운선사의 선 가풍을 무심선이라고 하는데, 당신의 선불교 정신과 실천론을 매우 함축적이면서도 단순명쾌하게 잘 표현했습니다.

무심이란 진리에 일치하는 마음씀과 삶을 뜻합니다. 즉 ‘활동하는 것도 참선이요, 앉아있는 것도 참선이다’, ‘눈 뜨고 감는 것 그대로 문수의 눈이요, 발 들고 내려놓는 것 그대로 보현의 행이다’ 등으로 표현되듯이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선불교와 교학불교, 수행과 일상의 삶, 자리행과 이타행, 자기 수행과 현실 참여가 분리되지 않고 연기 중도적으로 통일되는 활발발한 불교적 삶의 또다른 이름입니다.

불교관과 수행론의 진면목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무심’하면 활발발하고 역동적인 불교적 삶과는 거리가 먼 비연기중도, 즉 극단적 사고인 내면적이고 은둔적이며 사고의 정지 또는 정적인 상태를 떠올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실적으로 볼 때, 외면과 분리된 내면, 현실과 분리된 은둔이 있고 사고가 정지되거나 고요한 상태에 고정되어 있다면 그것은 현실에서 아무 쓸모 없는 목석이지 대비원력을 역동적으로 실천하는 무심도인이라고 할 수 없지요.

한번 불교 역사에 있었던 무심도인들을 찾아봅시다. 과연 누구누구이겠습니까? 대표적인 인물이 부처님․가섭․아난․원효․진묵 이런 분들이겠지요. 그 분들이 목석처럼 살아갔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지요. 그야말로 끊임없이 진리에 일치하는 대비원력의 정신으로 역동적인 사고와 실천, 만남과 대화, 배움과 가르침의 삶을 통일적으로 활발발하게 살았습니다. 옛 스승들의 예로 볼 때, ‘무심’의 상태가 단순히 내면적이고 은둔적이며 사고의 정지 또는 정적인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무심’의 참 뜻을 왜곡시켜 내면적이고 은둔적이거나 사고의 정지 또는 정적인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무심의 개념에 대하여 잘못 이해하고 있고, 왜곡되게 알고 있는 것이지요. 그 결과 대승불교와 초기불교, 교학 불교와 참선 불교, 수행 이론과 실천, 자리행과 이타행 등이 하나로 통일되는 활발발한 진리의 삶과는 정반대로 수행과 삶이 이원화되는 내면적이고 은둔적이며 소극적이고 정적인 삶이 마치 불교의 참모습인 것처럼 여기는 무지와 오류가 일반화되고 있습니다. 실로 문제가 대단히 심각하고 위험합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일차적으로 무심, 깨달음, 수행 등 우리가 사용하는 불교 개념들을 중생과 언어의 속성이 가진 한계, 문제를 잘 모르고 그 속성대로 다루기 때문이지요. 달리 말하면, 보편적 진리인 존재의 실상을 언어로 표현한 중도, 수행, 깨달음, 무심 등의 개념, 즉 불교 언어를 연기 중도적으로 다루지 않고 한계와 문제를 안고있는 중생과 언어의 속성대로 다루기 때문인 것입니다.

2. 언어 문자의 함정에 빠진 우리의 문제

언어를 중도 또는 실사구시적으로 다루지 않음으로 인하여 생기는 문제가 어떤 경우인지 좀 더 사실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생명평화운동 단체에서 만든 생명평화경에 ‘하느님’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느님이라는 말이 나오면 기독교인들은 좋아하는데, 불교인들은 싫어합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평화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부처라는 말을 쓰나 , 하느님이라는 말을 쓰나, 전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기가 익숙하고 좋아하는 개념이냐 아니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반응합니다. 말을 통해 전하려는 실제 내용과는 관계없이 본인의 선입견이나 익숙한 관념에 따라 전혀 엉뚱하게 판단해 버립니다. 말에 놀아나고, 말에 속고, 말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생각과 말과 지식이 쌓이고 넘쳐남에도 불구하고 삶의 문제가 풀리지 않고 계속 혼란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언어를 중도적으로 다루지 않고 극단, 즉 관념적으로 다루기 때문인 것이지요.

한번 ‘본래 부처’라는 말을 가지고, 중도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본래 부처라는 말이 갖는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다루어 봅시다. 우리 시대에 우리와 함게 살았던 불광사를 창건하신 광덕스님은 언제나 ‘구원성불(久遠成佛)’, 즉 본래부처론을 가르치셨습니다. ‘일체 중생이 본래 성불했다. 지금 여기에서 본래 부처의 광명이 빛나고 있다. 지금 여기 현존하는 자신 밖에 그 어디에도 따로 부처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 자신을 떠나 특별하게 따로 있지도 않는 부처를 찾노라 헛고생하지 말고 지금 당장 본래 부처로 살아라. 본래 부처의 삶이 어떤 것인가? 바로 동체대비행인 보현행원의 삶이요 대무심행의 삶이다’라고 했습니다.

법회할 때, 신도들에게 “본래 부처라는 가르침을 들었는가?” 하고 물어보면 다들 들었다고 합니다. “지금 자신이 본래 부처임을 알고 있는가?” 하고 물어보면 대답이 없습니다. 다른 것은 다 믿는데, 자기가 본래 부처라는 사실은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본래 부처론이 불조의 핵심적인 가르침인데 왜 안 받아들여질까 하고 짚어보면 그 이유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분리시키고 고정시키는 언어의 속성입니다. 이 세상 그 무엇도 일단 언어로 표현되면 그 자체는 관념화됩니다. 실상은 분리되지 않았는데 분리된 것으로, 고정되지 않았는데 고정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관념화된 언어를 중도, 즉 구체적 실상에 직결시켜 다루지 않고 극단, 즉 실상과 분리시켜 관념적으로 다루면 본질이 왜곡되고 나아가 혼란스럽게 됩니다. 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존재의 실상을 여실지견(如實知見), 즉 있는 사실대로 알아본 내용을 언어로 표현한 것이 불교이지만 일단 언어로 표현되면 관념화됩니다. 그 불교 언어를 실상과 일치되도록, 즉 중도적으로 다루지 않고 관념적으로 다루면 불교의 본래의도가 왜곡되어 버립니다. 그것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언어와 모양을 좇는 중생의 속성입니다. 사람들 대부분이 부처는 아주 특별히 거룩하고 신비하고 불가사의한 존재라는 말과 모양에 속고 지배받고 있습니다. 마음․부처․중생이 본래 차별이 없다고 하는 본래 부처의 실상과는 관계없이 전도몽상, 즉 부처는 특별하고 거룩하고 신비한 존재라는 사고, 즉 자기선입견 또는 관념대로 생각하고 믿고 있습니다. ‘부처는 아주 특별한 존재, 신비한 존재, 거룩한 존재인데, 업장 덩어리인 내가 감히 부처라니, 말도 안돼!’, ‘맨날 미워하고 욕심 부리는 하찮은 존재인 내가 어떻게 거룩한 부처일 수 있단 말인가’하고 전도, 즉 비중도적 사고로 스스로를 비하합니다. 본래 부처의 구체적인 실상과는 관계없이 부처는 특별한 존재, 거룩한 존재, 신비한 존재라고 하는 사고, 즉 자신의 관념에 지배받고 있는 것입니다. 굳이 불교 언어를 사용한다면 전도몽상의 불교를 하고 있는 셈이지요. 중생 스스로가 언어와 모양을 좇는 이런 사고방식과 태도 때문에 자신이 본래 부처임을 사실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가 되고 있는 중생들의 관념들, 즉 허망한 분별망상을 타파하기 위해 옛 선사들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착각하지 마. 부처? 부처가 별것 아니야. 부처도 눈이 두 개야. 너희들도 눈이 두 개잖아. 보고 걸어다니는데 눈 두 개, 발 두 개면 충분하잖아. 부처도 너희들처럼 두 눈으로 보고 두 발로 걸어 다니는 거야. 너희들과 아무 것도 다를 것이 없어.” 하고 중도의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실상과 분리된 극단, 즉 관념이 아니고 중도적으로 보면 부처도 우리들과 전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가르침을 믿지 않습니다. 부처는 특별한 존재라는 관념, 즉 전도몽상들이 우리를 주눅들게 하고 사실을 사실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상을 알고 보면,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모두가 한계와 문제를 안고 있는 중생과 언어의 문제를 중도적으로 다루지 않고 실상과 분리된 극단, 즉 관념적으로 다룬 결과입니다. 중생과 언어의 실상을 잘 모르고 잘못 다루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인 것이지요.

사실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개념들은 반드시 그대상이 있습니다. 사실이든 관념이든, 현상이든 본질이든, 내면이든 외면이든 대상에 의지해서 개념이 만들어 집니다. 그러니까 모든 개념은 나름대로의 역사가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부처님은 범신을 믿는 문제에 대해 ‘친구여, 그대는 범신을 본 적이 있는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대의 아버지, 할아버지가 보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구체적으로 본 적이 없는 것을 사실적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은 무지요, 어리석음일 뿐이다.’라고. 그러니까 언어로 표현된 개념을 다룰 때에는 그 개념의 역사를 알고 그 역사에 맞게 해야 합니다. 개념이 만들어진 구체적 사실과 일치되도록, 그리하여 개념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뜻이 드러나도록, 즉 중도적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만 언어가 사상과 정신을 담는 거룩한 그릇, 삶의 문제를 풀어내는 유익한 도구가 되는 것이지요. 금강경에서 부처를 여어자, 실어자, 불이어자, 불광어자(如語者, 實語者, 不異語者, 不誑語者)라고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지, 언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명쾌하게 잘 보여준 경우를 찾는다면 아마도 금강경의 부처님 언어, 즉 여어자, 실어자, 불이어자, 불광어자가 아닐까 싶습니다.

3. 실상에 일치하는 수행론의 필요성

오늘의 중심 주제가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수행과 삶이 통일되는 수행론’입니다. 보통 불교는 깨달음과 수행의 종교라고 합니다. 너나없이 깨달음과 수행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합니다. 너무나 당연하고 훌륭한 일입니다. 하지만 깨달음과 수행에 대해 지나치게 신비한 의미 부여를 하는 것 때문에 깨달음과 수행의 본뜻이 심각하게 왜곡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깨달음과 수행에 대한 이분법적인 이해와 인식이 한국불교의 많은 모순과 혼란과 폐단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먼저 깨달음과 수행에 대한 일반적인 사고 방식을 간추려보겠습니다.

1. 수행과 깨달음이란 정직하고 성실한 일상적 삶과 다른 특별하고 신비한 어떤 것이다. 2. 깨달음이란 수행한만큼 즉시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10년, 20년, 세세생생을 지난 다음에 이루어진다. 3. 수행과 깨달음이란 심오하고 신비하고 특별한 경지이기 때문에 평범한 일상적 삶을 떠나 별도의 장소, 별도의 시간을 내어 용맹정진을 해야 한다. 4. 수행의 결과인 깨달음만 이루어진다면 과정상의 비인격, 비현실적인 불성실과 과오들도 모두 정당화된다.

한국불교 사회에 일반화되어 있는 깨달음과 수행에 대한 사고 경향을 정리해보면 수행과 일상의 삶, 수행과 깨달음, 깨달음과 현실의 삶이 하나로 통일되지 않고 따로따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이 문제를 현상적으로만 보면 대수롭지 않다고 할 수 있겠지만 본질적으로 보면 불교계 모든 문제의 원인으로 작용한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오늘날 불교계 문제의 심층적 원인을 찾아보면 수행과 일상의 삶, 수행과 깨달음, 깨달음과 현실 삶의 불일치가 많은 수행자들로 하여금 회의와 갈등, 위선과 자기도취, 좌절과 타락의 길로 빠져들게 하고 있습니다. 매우 심각하고 절실한 문제입니다. 문제의 원인이 되고 있는 비연기중도, 즉 삶을 갈등과 분열의 함정으로 빠지게 만드는 이원론적인 수행론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도 한국 불교의 희망적인 미래를 열어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나무에 올라 고기를 잡으려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문제가 되고 있는 양극단의 사고, 즉 이원론적인 수행론을 극복하고 통일된 수행론을 확립해야 마땅합니다. 이에 대승불교의 핵심사상인 본래부처론으로 그 실마리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실제 본래부처론으로 접근하면 수행과 삶, 수행과 깨달음, 깨달음과 현실의 삶, 자리행과 이타행, 개인 수행과 현실 참여의 삶이 분리되지 않고 저절로 통일됩니다. 본래 부처의 사상에 입각한 수행론의 실상이 어떤 것인지 함께 살펴봅시다.

우선 불교가 무엇인지 짚어봅시다. 불교란 나는 누구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내 생명은 어떤 존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인류의 보편적 물음, 즉 인생의 화두에 대한 대답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그 해답을 한 마디로 유아독존이라고 했고 대승불교에서는 본래부처라 했으며 선가에서는 본래면목이라고 했습니다. 같은 맥락으로 본래 부처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짚어봅시다. 본래 부처란 1. 천하에 제일 귀한 존재임 2. 천하에 제일 고마운 존재임 3. 천하에 제일 원만 구족한 존재임 4. 천하에 제일 주체적인 존재임을 뜻합니다. 왜 그럴까요? 온 우주를 다 뒤져봐도 지금 여기 내 생명, 그대 생명은 천하에 그 무엇으로도 비교하거나 대신할 수 없는 유일무이하게 귀한 존재입니다. 온 우주의 낱낱 존재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지금 여기 그대와 내 생명을 낳고 길러주는 너무나 귀하고 고마운 존재입니다. 온 우주의 그 무엇도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지 못하는데 생명의 존재인 그대와 나는 자유자재로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원만 구족한 존재입니다. 그 누구, 그 무엇도 내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습니다. 죽으나 사나 자기 삶을 스스로 창조해가는 매우 주체적인 존재입니다. 이보다 더 거룩하고 신비로우며 불가사의한 존재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들은 매 순간 순간을 신비, 기적, 불가사의 속에 살고 있습니다. 아니, 존재 자체가 신비, 기적, 불가사의입니다. 어찌 대단하지 않습니까. 매 순간 순간 천하에 귀하고 고맙고 대단한 존재들과 함께 하고 있으니 어찌 날마다 뿌듯하지 않겠습니까. 매일 매일 만나고 있는 존재 하나 하나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그대와 나의 생명을 존재하도록 해주는 너무나 귀하고 고맙고 대단한 존재들인데 어찌 지극히 모시고 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들을 본래 부처로 잘 모시고 섬기는 것이야말로 가장 확실하게 본래 부처답게 사는 일입니다. 그렇게 하면 저절로 날마다 좋은 날이 됩니다. 스스로 천하에 제일 귀하고 고맙고 원만 구족한 본래 부처의 존재이므로 당연히 그 무엇 하나 부족할 것도 부러울 것도 없습니다. 무한한 자부심을 갖고 본래 부처답게 살아야 마땅할 터입니다.

짚어본 바대로 본래부처론으로 보면 수행해서 다시 부처되려고 하는 분리된 사고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본래 부처인데 무엇 때문에 다시 부처되려고 해야 합니까? 지금 여기에 현존하고 있는 존재의 실상, 즉 그대와 내가 본래 아무 것도 부족함 없는 원만 구족한 부처이므로 새삼스럽게 다시 더 추구하고 더 얻고 더 소유하고 더 빨리 깨달을려고 해야 할 것이 애초부터 있지 않습니다. 본래 부처이므로 수행해서 다시 깨닫겠다고 하는 분리된 사고를 할 것 없이 그냥 그 자리에서 끊임없이 만나는 당신들을 본래 부처로 지극하게 섬기고 모시는 본래 부처의 삶을 살면 되는 것입니다. 본래 부처인데 새삼스럽게 수행을 해서 다시 부처 되려고 하는 것 그 자체가 전도된 사고방식입니다. 마치 소를 타고 있으면서 다시 소를 찾으려고 하는 것처럼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습니다. 속담에 “업은 아기 삼년 찾는다”는 말처럼 헛되고 헛된 헛수고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옛 스승들은 한결같이 본래 부처임을 모르고 다시 더 추구하고 더 깨닫고 더 얻고 더 소유하고 더 빨리 깨달아서 부처 되려고 하는 어리석은 생각들이 수행 문제의 심각한 병통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거듭거듭 내려놓고 또 내려놓아라 또는 쉬고 또 쉬어라, 버리고 또 버려라, 비우고 또 비우라고 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본래 부처에 대해 제대로 따져보지도 않고 어렵게 생각합니다. 본래 부처란 특별한 경지에서만 알 수 있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보통 사람, 보통 경지에서는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심오한 경지라고 믿습니다. 우리들의 관념처럼 본래 부처의 실상이 정말 그런 것일까요? 실상을 사실적으로 알고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번 차근차근 짚어봅시다. 본래 부처란 정말 어떤 것인지 논리적으로 정리해봅시다.

부처님이 깨달은 법을 연기법이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얻은 다음 우주의 존재법칙인 연기법은 석가가 출현하고 출현하지 않고에 관계없이, 싯타르타가 깨닫고 깨닫지 않고에 관계없이 본래부터 있는 법, 스스로 존재하는 법이라고 했습니다. 부처님 말씀에 의하면 세상은 본래부터 스스로 존재하는 연기법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이 소식을 초기 경전에서는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면 이것이 있다’라고 했습니다. 서로 의지하고 서로 도움을 주고 서로 변화하면서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이 내용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라는 것이 먼저 있고, 나중에 ‘저것이 있다’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대단히 위험합니다. 분명한 것은 이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관계로 존재하는 것이고, 저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관계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마음이라고 하더라도 관계로 존재하고, 몸이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이 세상 그 어떠한 것도 결국 보편적 진리인 연기법에 의해서 이루어진 진리의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 나도 당신도 본래부터 있는 우주의 보편적 진리인 연기법에 의해서 이루어진 원만 구족한 진리의 존재입니다. 영원에서 영원 끝까지 본래부터 스스로 존재하는 보편적 진리로 이루어진 존재가 지금 여기 나요 그대요 우리들인 것입니다. 저간의 소식을 인격화시켜 초기불교에서는 유아독존, 화엄에서는 비로자나불, 법화에서는 본래 부처, 선가에서는 본래면목이라고 했습니다.

불조의 말씀처럼 지금 여기 내가 진리의 존재, 유아독존, 즉 본래 부처의 존재라면 그 내용은 어떤 것인가? ‘이 세상 그 무엇도 본래 분리되어 있지 않고 고정되어 있지 않다. 본래부터 서로 의지하고 서로 변화하면서 존재한다. 본래 나이면서 너와 함께이고, 너이면서 나와 함께이다. 개체이면서 전체와 함께이고, 전체이면서 개체와 함께이다’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주체적으로 따로이면서도 함께의 길을, 함께이면서도 따로의 길을 잃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잘 알다시피 대승불교의 핵심 사상은 ‘본래부처론’입니다.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누구나 할 것 없이 지금 바로 국가, 종교, 이념, 선악시비, 이해득실을 넘어서는 평등의 길, 즉 대무심, 대자비, 대자유의 길이 열릴 수 있습니다. 또는 수행 문제의 모든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간화십종병(看話十種病)과 같은, 즉 더 소유하고(所有心) 더 추구하고(所求心) 더 얻고(所得心) 더 빨리 이루려고 하는 마음(速效心)의 병에서 벗어나는 것도 본래부처론으로 접근할 때 비로소 가능하게 됩니다. 같은 맥락에서 승찬선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지극한 도는 어려울 것이 없다. 오직 분리시켜 차별하는 마음씀을 꺼려한다. 다만, 분리시켜 미워하거나 애착하지 말라. 그러면 확 트인 하늘처럼 명명백백하다(至道無難 唯嫌揀擇 但莫憎愛 洞然明白).”라고. 누가 말했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데 “이 문 안에 들어와서는 분리시켜 차별하는 사고를 하지 말라. 다만 범속하게 분리시켜 차별하는 마음이 없을 뿐 특별히 성스러운 견해가 따로 있지 않다(入此門內 莫存知解 但盡凡情 別無聖解).”라고 했습니다. 이런 점이 부처님이 뜻하신 중도 정신을 잘 계승한 대승불교의 특징이고 탁월성입니다. 초기불교를 강조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만, 이 논리를 초기불교와 연결시켜서 보아도 틀리지 않다고 봅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4. 중도에 대한 올바른 관점

존재의 실상, 생명의 실상, 유아독존, 비로자나불, 본래 부처, 본래면목 등으로 표현되고 있는 개념들을 실상에 일치하도록, 즉 중도적으로 이야기해봅시다. 존재의 실상을 논리적으로 개념화한 것이 연기법이라면, 실천적으로 개념화한 것이 중도입니다. 존재의 실상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면 연기법이고, 실천해야할 수행론으로 설명하면 중도인 것이지요. 잘 알고 있듯이 중도의 내용은 팔정도입니다. 정견․정사유․정어․정업․정명․정정진․정념․정정이지요.

여기에서 제일 먼저 명확하게 정리해야할 것이 중(中) 또는 바름(正)의 뜻입니다. 한국불교인들은 중도 또는 팔정도의 중요함을 끊임없이 강조하지만, 개념과 실상이 일치되도록 제대로 천착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중도, 정도라는 개념을 중도적으로 실상에 직결시키지 않고 생각과 말만 갖고, 즉 극단의 사고로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엄밀하게 볼 때, 중, 정 즉 바름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팔정도를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팔정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바름의 뜻이 절대적으로 중요함을 명심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중도’를 설명할 때, 이것과 저것․있음과 없음 등의 극단을 벗어난 상태라고 합니다. 영혼절대주의, 육체절대주의, 물질만능주의, 정신만능주의, 국가, 체제, 제도만능주의, 이타(利他)절대주의, 자리(自利)절대주의 등 분리 고정된 모든 견해들이 모두 문제의 극단이지요. 중도, 정도라는 개념도 실상과 분리시켜 언어와 개념만을 절대화하면 바로 극단에 빠지는 것이지요. 극단이 왜 문제가 되지요? 극단은 실상을 왜곡시키기 때문이지요. 극단에 빠져서는 안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극단은 존재의 실상인 진리에 어긋나기 때문이지요. 극단을 벗어나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지요? 실상에 일치되도록 하기 위함이지요. 왜 실상에 일치되도록 해야 하지요? 실상대로 해야 문제가 해결되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볼 때 팔정도에서의 ‘바름’이란 보편적 진리인 연기법으로 이루어진 존재의 실상, 생명의 실상, 유아독존, 비로자나불, 본래면목, 본래 부처 정신에 근거하여 제시한 수행론인 사성제를 사실대로 알아보고(如實知見) 사실대로 실천함(如實知見行)을 뜻하지요. 즉 중도적 실천입니다.

하나의 예로 정법불교와 삿된 불교를 갖고 바름의 의미를 다시 천착해 보겠습니다. ‘삿된 불교’란 정법불교에 대한 상대적 개념입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삿된 견해’란 중생의 견해이고 ‘바른 견해’란 부처의 견해입니다. 부처의 견해와 중생의 견해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바른 견해, 부처의 견해는 매 상황․매 순간마다 직면한 존재의 실상에 대해 사실대로 알아보는 견해입니다. 실상을 있는 사실 그대로 보는 것이 부처의 견해이고 정견입니다. 중생의 견해, 삿된 견해는 어떤 것일까요? 전도, 즉 실상을 있는 사실대로 보지 않고 극단 즉 자기 색안경으로 왜곡되게 보는 견해입니다. 실상을 뒤집어서 거꾸로 보는 견해가 중생의 견해이고 삿된 견해입니다. 여기에서 명확하게 정리되어야할 것이 있는 그대로 알아야 할 실상의 내용입니다.

먼저 보편적 진리를 공간적 입장에서 드러낸 개념인 ‘무아’에 대해 말해봅시다. 보편적 진리인 연기법으로 이루어진 존재의 실상이 공간적으로 분리 독립된 실체가 없음을 당시 사람들이 앓고 있는 분리 독립된 영원 불멸의 아트만이 있다는 병을 치유하기 위해 개념화시킨 것이 무아입니다. ‘이 세상 그 무엇도 분리․독립되어 있지 않다. 시간․공간, 이것․저것, 내면․외면, 정신․물질, 개인․전체, 인간․자연 등을 어떻게 봐도 실상은 따로따로 분리․독립되어 있지 않다. 마치 그물의 그물코처럼 서로 의지하고 도움을 주고받으며 존재하고 있다’ 저간의 소식을 화엄경에서는 ‘제망중중 무진연기법(帝網重重無盡緣起法)’이라고 했습니다. ‘제망’은 제석천의 구슬 그물의 비유입니다. 즉 ‘인드라망’입니다. 그 내용은 모든 존재들이 상하․전후․좌우 겹겹으로 무궁무진하게 상호 의지해서 존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다음은 보편적 진리를 시간적 입장에서 드러낸 개념인 ‘무상’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우리들은 보통 ‘무상’하면 “인생이 허무해, 가을은 쓸쓸해” 등 감상적인 느낌을 말하는 데, 그렇지 않습니다. 본래의 뜻은 보편적 진리인 연기법으로 이루어진 존재의 실상을 시간적으로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음을 당시 사람들이 앓고 있는 영원 불멸의 정신, 영혼이 따로 있다고 하는 병을 치유하기 위해 개념화시킨 것이 무상입니다. ‘이 세상 그 어디에도 고정․불변한 것은 없다. 그 무엇도 영원 불멸하지 않다. 모든 존재들이 서로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무상과 무아는 동전의 양면처럼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무상이 드러나면 무아가 보이지 않지만 함께하고, 무아가 드러나면 무상이 보이지 않지만 함께하고 있습니다. 무상․무아인 존재의 실상을 있는 사실대로 보는 것이 정견이며, 부처의 견해이고, 정법불교입니다. 실상은 분리․독립되지 않았는데 분리․독립되었다고 극단적으로 생각하고, 고정․불변하지 않은데 고정․불변하다고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삿된 견해이고 중생의 견해이며 삿된 불교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들은 부처님이 수행을 해서 존재의 실상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존재의 실상을 깨닫고 보니 세상은 본래부터 있는 보편적 진리인 연기법으로 이루어져 있더라’ 연기법으로 이루어진 존재의 내용은 뭔가 하고 보니 ‘분리․독립되어 있지 않고, 고정․불변하지 않더라’ 이런 이야기이지요. 그 연기법으로 이루어진 존재를 논리적으로 개념화한 것이 존재의 실상․생명의 실상이고 인격 또는 주체적으로 개념화한 것이 유아독존, 비로자나불, 본래 부처, 본래면목입니다. 옛 스승들께서는 본래 부처․본래면목․존재의 실상․생명의 실상 등을 ‘일원상(○)’으로 형상화했습니다. 지금은 일원상을 원불교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본래는 옛 스승들이 즐겨 사용해 왔습니다. 여기에서 한걸음 나아가 더 구체화시킨 것이 생명평화 로고입니다. 생명평화 로고는 생명평화 운동가들이 보편적 진리인 화엄의 인드라망 세계관 또는 인드라망적 존재의 실상을 시각화한 것입니다. 보편적 진리를 시각화한 일원상 또는 생명평화 로고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서로 의지해서 존재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서로 고정되어 있지 않고 서로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화엄경에서는 ‘제망중중무진연기법’이라 하고, 초기불교, 대승불교, 선불교에서는 인격화, 주체화해서 유아독존, 비로자나불, 본래 부처, 본래면목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표현의 차이들이 있지만, 부처님 말씀대로 말에 의지하지 않고 뜻에 의지해서 보면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연기론과 화엄경에서 말하는 연기론, 교에서 말하는 본래 부처와 선에서 말하는 본래 면목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초기불교에서는 연기법을 평면적으로 설명하고, 인간 존재에 적용시켜 설명하기 때문에 좀 단순해 보입니다. 화엄경에서는 입체적으로 온 우주에 적용시키고 나아가 인격화시켜서 묘사하기 때문에 훨씬 더 복잡해 보입니다. 하지만 초기불교든 대승불교든, 교이든 선이든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같은 것입니다. 다만 화엄경에 오면 논리적 개념으로는 중중무진연기법이라 하고 인격적 개념으로는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라고 하는 등 훨씬 더 풍부해집니다. 또 화엄철학으로 십현연기설(十玄緣起說)․육상원융설(六相圓融說)․사무애법계설(四無礙法界說)이 있습니다. ‘십협연기설’은 존재의 연기를 열 가지로 설명하고, ‘육상원융설’은 존재의 원융함을 여섯 가지로 설명하며, ‘사무애법계설’은 존재의 무애를 네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체적 설명은 너무 복잡하므로 여기에서는 생략하겠습니다.

5. 본래 부처와 팔정도

이쯤에서 언어의 길과 마음의 길이 끊어진 자리인 보편적 진리를 응병여약(應病與藥)의 차원에서 언어로 표현한 개념인 법의 실상․존재의 실상․생명의 실상․유아독존․비로자나불․본래 부처․본래면목․인드라망 존재 등을 시각화한 일원상, 생명평화 로고를 팔정도로 설명해보겠습니다. 그 뜻이 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첫째가 ‘정견’이지요. 일원상 또는 생명평화 로고로 표현되고 있는 지금 직면한 존재의 실상인 본래 부처를 있는 사실대로 보고 이해하는 견해입니다. 즉 연기적 존재이므로 그 무엇이든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음을 뜻하는 무상, 그 어떤 것도 분리․독립된 실체가 없음을 뜻하는 무아를 있는 그대로 알아보는 것이 정견이지요. 정견이 바로 부처의 견해이지요.
대부분 정견을 거쳐서 부처의 견해로 발전해간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정견 자체가 부처의 견해입니다. 그 밖에 부처의 견해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수행의 관점에서 말하면 지금 여기 직면한 현장의 일상적 삶에서 매 순간 순간마다 견해를 바르게 갈고 다듬는 것이 정견 수행이요, 그대로 깨달음의 수행입니다.

두 번째는 ‘정사유’입니다. 정견의 경우처럼 실상대로 사유하는 것이 정사유이고 그것이 부처의 사유입니다. 그 밖에 부처의 사유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수행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직면한 현장의 일상적 삶에서 사유를 바르게 갈고 다듬는 것이 정사유 수행이요, 그대로 깨달음의 수행입니다.

세 번째는 ‘정어’입니다. 실상에 근거하고 그 이치에 맞게 말하는 것이 정어이지요. 금강경에 ‘여래는 진리대로 말하는 자, 사실대로 말하는 자, 진리와 다르지 않게 말하는 자, 진실에 근거하지 않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자’라고 했습니다. 물론 구체적으로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폭언을 하지 않는다’ 등의 설명을 합니다. 앞에서처럼 실상대로 말하는 정어가 그대로 부처의 언어입니다. 그밖에 부처의 언어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수행의 관점에서 말하면 직면한 현장의 일상적 삶에서 언어를 바르게 또는 중도적으로 갈고 다듬는 것이 정어 수행이요, 깨달음의 수행입니다.

네 번째는 ‘정업’입니다. 실상에 맞게 행위하는 것을 뜻하지요. 앞에서처럼 실상에 맞게 행위하는 것이 정업인데, 그것이 바로 부처의 행위이지요. 그밖에 부처의 행위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수행의 관점에서 보면 직면한 현장의 일상적 삶에서 행위를 바르게 갈고 다듬는 것이 정업 수행이요, 깨달음의 수행입니다.

다섯 번째는 ‘정명’입니다. 실상의 정신에 일치하는 생활을 위한 직업, 또는 실상에 일치하는 직업생활을 의미하지요. 앞에서처럼 실상에 맞게 생활을 하는 것이 정명입니다. 부처님의 생활도 마찬가지이지요. 그밖에 부처의 생활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수행의 관점에서 말하면 직면한 현장의 일상적 삶을 바르게 갈고 다듬는 것이 정명 수행이요, 깨달음의 수행입니다.

여섯 번째는 ‘정정진’입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실상에 일치하는 바른 견해․사유․언어․행위․생활․깨어있음․흔들리지 않음을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히 갈고 다듬는 노력을 ‘정정진’이라고 하지요. 바른 견해를 위시로 해서 흔들리지 않음을 보다 더 선명해지도록 줄기차게 노력하는 것이 정정진 수행이요, 그것이 바로 부처의 정진이기도 하지요. 그밖에 부처의 정진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수행의 관점에서 보면 직면한 현장의 일상적 삶을 법에 맞도록 하는 노력을 꾸준하게 갈고 다듬는 것이 정정진 수행이요, 깨달음의 수행입니다.

일곱 번째는 ‘정념’입니다. 정념은 무엇일까요? 실상에 대해 깨어있음․알아차림․정신차림 등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어릴 때에는 존재의 실상에 대해 항상 잊지않음, 또는 기억함이라고 배웠습니다. 요즘 ‘부처님께서 직접하신 수행은 위빠사나다’ 또는 ‘사마타다’라고 주장하는 경향이 많은데, 그렇게 분리시켜서 어느 하나를 특화시키고 절대화시켜 생각하는 것은 옳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존재의 실상에 입각해서 병에 따라 약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특별히 어느 하나만을 분리시켜 절대화시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굳이 부처님이 몸소 실천하시고 가르치신 수행을 말해야 한다면 ‘팔정도’라고 해야 마땅하지요. 앞에서처럼 실상에 맞게 언제나 적재적소에 따라 깨어있음․알아차림․정신차림․기억함․잊지 않음을 실천하는 것이 정념인데, 그것이 그대로 부처의 깨어있음입니다. 그 밖에 부처의 깨어있음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수행의 관점에서 보면 직면한 현장의 일상적 삶에서 깨어있음이 생활화되도록 갈고 다듬는 것이 정념 수행이요, 깨달음의 수행입니다.

여덟 번째는 ‘정정’입니다. 불교인들이 정정을 정신집중․정신통일이라고 설명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정신집중과 정신통일하고는 무엇이 다르지요? 불교에서 삿된 선정․바른 선정이라는 말은 왜 생겼을까요? 부처님도 수행과정에서 고도의 정신집중․정신통일을 통해 마음의 평화와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런데도 존재의 실상이 드러나지 않았고, 고통으로부터의 해탈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길을 버리고 새로운 길로 중도의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왜 그랬을까요? 원인이 무엇일까요?

가장 대표적인 원인이 바로 수행과 삶이 이원화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단순한 정신집중․정신통일을 ‘삿된 선정’이라고 합니다. 삿된 선정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 ‘마왕 파순’입니다. 반면 언제 어디에서나 한결같이 정견․정사유․정어․정업․정명․정정진․정념의 흔들림 없는 상태를 ‘바른 선정’이라고 합니다. 바른 선정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 법왕, 즉 부처입니다. 마왕파순과 부처의 경지를 보면, 마왕은 다섯 가지 신통을 하고 부처는 여섯 가지 신통을 합니다. 다섯 가지 신통은 마왕과 부처가 똑같습니다. 다만 번뇌가 다 소멸된 상태인 ‘누진통’ 또는 미세한 번뇌가 없는 상태인 ‘무루통’ 한 가지만 다릅니다.

마왕은 삶을 고통과 불행의 함정으로 몰고 갑니다. 부처는 고통으로부터의 해탈, 즉 자유․평화․행복의 삶을 살게 합니다. 삿된 선정과 바른 선정의 결과가 이처럼 하늘과 땅만큼 차이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삿됨의 문제, 즉 소유심, 소구심, 소득심, 속효심에 입각하여 실천하는 단순한 정신집중․정신통일은 삿된 선정이고, 그 결과는 파멸의 마왕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반대로 올바름, 즉 무소유, 무소구, 무소득, 무속효심에 입각하여 실천하는 집중․통일은 바른 선정이고, 그 결과는 해탈 자재의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삿된 선정이 얼마나 잘못되고 위험한 것인지, 바른 선정이 얼마나 중요하고 확실한 것인지가 확연합니다.
앞에서 일관되게 바름의 의미는 존재의 실상, 즉 연기법에 근거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존재의 실상에 근거하지 않는 견해를 위시로 한 집중 등이 모두 중생의 살림살이요, 삿된 살림살이에 불과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위험한 일이기도 합니다. 반복됩니다만, 올바른 선정이란 언제 어디에서나 존재의 실상에 일치하는 견해․사유․언어․행동 등이 한결같이 흔들림없는 상태를 뜻합니다. 실상에 맞게 언제나 흔들림 없음․동요하지 않음, 즉 성성하게 깨어있음이 여여부동한 상태가 바른 선정이요, 그것이 바로 부처의 선정입니다. 그 밖에 부처의 선정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수행의 관점에서 보면 직면한 현장의 일상적 삶에서 법(팔정도)에 대한 흔들림 없음․동요하지 않음이 생활화되도록 바르게 갈고 다듬는 것이 정정 수행이요, 깨달음의 수행입니다. 불교 수행을 실상대로 관찰해보면, 직면한 존재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사유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생활하고 노력하고 깨어있고 흔들림 없음이 부처의 삶입니다.

아무리 따져 보아도 선과 교, 대승불교와 초기불교, 자리와 이타, 개인 수행과 현실 참여, 일과 수행, 삶과 수행, 수행과 깨달음을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습니다. 분리되면 이미 불교가 아니며, 불교를 잘못하는 것이지요. 분리되면 온전한 삶이 되지 않기 때문에 수행을 한 만큼 불안과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지요. 나날이 확신이 깊어지고, 흔들림이 없고, 삶이 더 단순소박해질 수가 없지요. 이유가 무엇일까요? 대승불교와 초기불교․선과 교, 불교와 수행․수행과 일․수행과 삶․수행과 깨달음, 자리와 이타, 개인 수행과 현실 참여가 하나 되지 않기 때문이지요. 하나 되지 않고 분리되는 한, 아무리 불교공부와 수행을 열심히 한다고 해도 그 자체가 또 다른 전도몽상에 불과함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6. 바람직한 수행론

이제 수행에 대해 정리해 봅시다. 도대체 ‘수행, 수행’ 하는데,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수행일까요? 실제 수행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많은 설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그래, 이것이야!”하고 와 닿는 내용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대승불교 사상가들에 의해서 제시되어진 의해기행 기행절해(依解起行 起行絶解)입니다. 우리말로 풀어보면 ‘본래 부처에 대해 논리적으로 잘 이해하고, 그 이해의 내용에 의지해서 실천하면 실천한 만큼 그 즉시 분별 논리를 벗어나 해탈의 삶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대혜종고선사의 생처방교숙 숙처방교생(生處放敎熟 熟處放敎生)입니다. 뜻풀이를 해보면 ‘생소하기만 한 본래 부처의 삶을 익숙하게 하고, 익숙하기만한 무명업식의 중생살이를 생소하게 한다.’가 됩니다. 수행에 대한 수많은 정의들이 있지만, 이만큼 명쾌한 정의는 없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논리적으로 체계있게 제시한 수행이론을 잘 이해하고 그 수행론에 따라 실천해가는 것’ 또는 낯설기만 한 더 소유하고 더 추구하고 더 깨닫고 더 얻을 것이 없는 본래 부처의 삶을 거듭거듭 친숙한 것이 되도록 하고, 친숙하기만 한 더 소유하고 더 추구하고 더 깨닫고 더 얻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중생의 삶을 거듭거듭 생소한 것이 되도록 하는 것이 수행의 전부라는 이야기지요. 그러면 대혜종고가 제시한 수행론을 팔정도에 적용시켜 봅시다.

먼저 익숙한 것이 무엇일까요? 존재의 실상은 무상․무아요 원만 구족한 본래 부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반대로 봅니다. 존재의 실상이 ‘분리되어 있다. 고정되어 있다, 불완전한 중생이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본래 중생이라고 믿습니다. 너 따로 나 따로 분리시켜서 자기 중심의 이기적 사고를 합니다. 변화하는 것과 변화하지 않는 것이 있다고 믿습니다. 변화하지 않는 영원한 자아를 붙잡으려고 합니다. 무상과 무아인 본래 부처의 길과는 정반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무도 가르쳐준 적도 없고, 배운 적도 없는 데도 당연히 그런 것처럼 그렇게 합니다. 익숙해도 너무 익숙합니다.

다음, 생소한 것은 무엇일까요? 익숙한 것과 정반대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실상이 무상․무아요 원만 구족한 본래 부처임을 사실대로 보는 것이지요. 실상을 실상대로 보고 대하는 것은 너무 생소합니다. 낯설고 이해도 잘 안됩니다. 연기무아․중중무진연기․연기중도․팔불중도․유식무경․유아독존․본래 부처․본래면목으로 표현되어진 존재의 실상을 사실대로 보고 생각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습니다. 실상을 사실대로 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생활하고 노력하고 깨어있고 흔들림 없는 것이 너무 낯설고 생소하지요. 맨날 배우고 듣고 하지만, 왠지 친숙해지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영원히 불가능할 것처럼 잘 안됩니다. 낯설어도 너무 낯섭니다.

수행이란 익숙한 중생의 삶을 생소하게 하고, 생소한 본래 부처의 삶을 생활화․체질화해서 익숙하게 하는 것이지요. 즉 본래 부처의 삶인 팔정도를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학습하고 수련하여 익숙하도록 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여 충분하게 익숙해지면, 얼음이 저절로 녹아 흐르듯이, 흙기와가 저절로 해체되듯이 무명 업식도 저절로 녹아나고 해체됩니다. 이런 상태를 일러 깨달음을 얻었다, 부처되었다고 합니다. 그 밖에 다른 길이 있을 수 없고, 있지도 않습니다.

7. 맺음의 글

결론적으로 정리해야할 때까지 왔습니다. 최종적으로 정리해서 매듭을 지어 봅시다. ‘세상은 연기법, 즉 관계의 진리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지금 여기 너니 나니 하는 모든 존재들도 관계의 진리에 의해서 이루어진 존재다. 이 사실을 인격화시켜 표현한 것이 본래면목․본래 부처 이다. 진리에 의해 태어난 본래 부처인 지금 여기 너와 ‘나’는 어떤 존재인가? 무상․무아의 존재요, 원만 구족한 본래 부처이다. 무상․무아의 존재인 본래 부처의 존재이므로 그 사실을 제대로 보는 것, 사유하는 것, 말하는 것, 그것이 본래 부처가 현재의 삶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다시 새롭게 부처되는 것이 아니다. 본래 부처인 무상․무아대로 보는 것, 사고하는 것, 행동하는 것, 이것이 본래 부처의 삶이 현현함이다’ 이 소식을 관계론적으로 말하면 동체대비의 삶이고, 주체화시켜 말하면 대무심의 삶이 됩니다.

정리한 내용을 놓고 보면, 선과 교,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삶과 수행, 일과 수행, 수행과 깨달음, 깨달음과 삶, 자리와 이타, 개인 수행과 현실 참여 등은 결코 분리시켜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내용이 이런데도 선과 교,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수행과 일, 삶과 수행․수행과 깨달음, 깨달음과 삶, 자리와 이타, 개인 수행과 현실 참여 등이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불교수행을 잘못 이해하고 잘못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도 자신이 했던 6년 고행과 선정 수행을 “성스러운 길이 아니다”라고 하며 버리고 떠났습니다. 삶과 수행․일과 수행․수행과 깨달음, 자리와 이타, 개인 수행과 현실 참여 등이 일치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수행이란 늘 지금 여기 직면한 현실의 실상을 사실대로 잘 보고 사실대로 잘 다루는 것입니다. 거듭되지만, 그 실상은 연기무아․유아독존․본래면목․본래 부처․인드라망․한 몸 한 생명입니다. 분명한 이 사실을 사실대로 보고 사유하고 음미해야만 삶의 문제를 제대로 다루는 것이 됩니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자리가 이타가 되고 이타가 자리가 되며, 삶이 수행이 되고 수행이 그대로 삶이 됩니다.

한가지 더 짚어야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자리가 중요하므로 이타는 그 다음에 해야 한다, 현실 상황이 절박하므로 이타행이 더 중요하다 하고 논란을 합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가 연기법의 사상과 정신에 대한 확고한 이론에 의지해서 실천하고, 실천함으로써 분별논리로부터 자유로워진다고 하는 바람직한 수행론의 관점과 태도에 대해 무지하고 간과하기 때문입니다. 또는 실질적인 수행을 하는 것이 중요하지 이론은 중요하지 않다고 하거나, 실질적인 수행을 간과하고 지식을 탐구하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여기는 경우들이 허다합니다.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굳이 비유를 들어 말해보면 불교를 이론적으로 천착하고 실천하려는 이성적 모색은 물위에 떠있는 쓰레기를 처리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고, 참선․염불․진언 등을 집중 수행하는 것은 물밑에 깔려있는 쓰레기를 근본적으로 처리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실천을 전제한 이론, 이론에 근거한 실천만이 올바르고 바람직한 태도입니다. 어느 하나만을 선택하는 이분법적인 사고와 태도를 버리고 늘상 이론과 실천이 함께 균형을 이루도록 해야 합니다. 이론이 없이 길을 가는 것은 길을 모르면서 맹목적으로 길을 가는 격이 되고, 이론만 있고 실천이 없는 것은 길을 알지만 길을 가지 않고 제자리에 앉아있는 것과 같습니다. 모래를 쪄서 밥을 지으려는 것처럼 어리석은 수행이요, 갈 곳이 동쪽인데 서쪽으로 향해 가는 것처럼 어리석은 정진입니다. 명심하고 명심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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