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내 못다 한 말
꽃으로 피워
찬바람 때문에
하지 못한 말
향기로 피워
켜켜이 쌓아 놓은
창고 책들처럼
눈 속에 쌓였던
진심을 들킨 듯
살포시 수줍게 걷던
분홍한복 처음 입은 누이같이
머뭇머뭇하다
세상을 온통 물들인다.
오래되어 지워진 기억처럼
상처투성이 도시 나뭇등걸에도
새살 같은 꽃이 핀다.
#작가의 변
며칠 전 결혼 32주년 기념일,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 아무것도 안 해줄 거면 결혼기념일이라는 말조차 꺼내지 말라는 아내와 엄마를 화나게 하는 아빠가 미운 아이들은 그래 아빠 아무 말도 하지 마. 그래도 꽃 화분 하나는 사줬는데 올해는 이사할지도 모른다며 그것도 마다한다. 꽃을 선물하는 것도 좋아는 하지만 꺾인 꽃이 마르면 마음이 아프다는 아내 말이 듣고 보니 기쁨보다 꽃이 마를 때 애틋함이 더 큰 것이 맞는 것도 같다. 3월은 만물이 생동하는, 겨울이 봄을 싹 틔우는 계절이다. 새싹이 나고 꽃이 피고 시샘하는 봄바람이 아무리 흔들어 대도 봄은 기어코 오고야 만다.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되도록 살겠냐는 결혼 주례사처럼 우린 어느새 검은 머리가 반백이 되도록 살아왔다. 30년이 넘는 동안 강산이 3번 변하고 나도 변하고 1.2 1.5킬로그램이던 태중 아이들의 몸무게도 100킬로가 넘는 거구가 되었다. 결혼을 축하해 주던 많은 지인이 세상을 떠났고 양가 부모님도 그렇다.
결혼할 때는 한국의 스위스 그랜드 호텔에 있었다. 1987년에 제대 후 아무것도 없이 빈손으로 서울에 올라와 독서실과 자취방을 전전하던 내게는 출산은 커다란 모험이었다. 연탄을 피우는 단칸방에서 시작해서 인천 가좌동 빌라로 이사 가면서 작지만 내 이름으로 된 집에 살던 인생 처음의 내 집을 가졌다.
임신인 걸 알게 된 건 결혼하고 몇 달 뒤 그리고 쌍둥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입덧이 시작되면서 아무것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아내는 음료수를 많이 마셨다. 아직 포도가 나오려면 멀었는데 포도가 먹고 싶다고 해서 마트에서 청포도 통조림을 사다 줬다고 평생을 원망했다.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 가면 하우스에서 기른 포도가 나왔을 거라면서.
하루하루가 두려움에 떨다가 입덧의 시기가 지나고 배가 불러오던 아내에게 갑자기 이상 징후가 찾아왔다. 임신이라 그런 줄로 알았던 아내가 붓고 통증을 호소해서 인천 집에서 가까운 길 병원으로 간 날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것저것 검사하고 산부인과 과장인 여자 의사가 나를 따로 부르더니 지금 아주 최악이다. 신장염에 임신 중독인데 산모라 주사도 어떤 처방도 할 수 없다. 아내든 아이 들이든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이들을 선택하면 산모가 희생되겠지만 산모를 선택하면 다시는 임신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말도 했다.
날 보고 어떻게 하라고 이런 시련을 주나 하는 생각이 들다 가도, 소변 주머니를 찬 아내의 소변이 피가 섞여 나오는 걸 보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내를 살려 달라고 할 수밖에.
그렇게 며칠을 길 병원에서 치료하고 있는데 산부인과 과장이 다시 나를 불러서 지금 상태가 좀 나아졌으니 빨리 더 큰 병원으로 옮기라고 자기들은 자신이 없다고 했다. 아내의 사촌인 가정의에게 연락해서 서울대 병원에 후송하게 아는 분 좀 연결해 달라고 했더니 연결이 돼 옮길 수 있었다. 그렇게 아내는 서울대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병실로 옮기고 나는 병원 입원 수속을 마쳤다. 그렇게 서울대 병원에서 한 달의 입원 생활이 시작되었다. 아직 아이들이 너무 작아서 지금 낳으면 인큐베이터에 들어 가게 될 거라고 했다. 신장염과 임신 중독은 자기들이 최대한 치료하면서 아이들이 좀 더 성장해 질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대학교 때 같은 집에서 자취와 하숙을 하던 한의사인 형에게 아내의 이야기를 했더니 한약을 지어서 물약으로 만들어 왔다. 병원 창가에 커튼 뒤에 숨겨 두고 아내에게 한약을 먹이기 시작했다. 만약 한약을 먹는 걸 알면 병원에서 못 먹게 할 것 같아서 숨겨 두고 먹이는데 날마다 조금씩 소변색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병실을 순회하던 산부인과 과장도 담당 의사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현상 유지하는 약만 쓰고 있는데 상태가 호전되고 있으니 이상했나 보다.
그렇게 상태가 호전되니까 아이들을 출산하기 위한 수술 날짜를 잡았다. 11월 11일 9시로 그동안 휴가를 다 쓰고 호텔에 다시 출근하던 나는 낮에 아내를 돌보던 장모님과 교대해서 퇴근 후에 아내를 돌보고 보호자 간이침대에서 생활했다. 병실엔 전국에서 산모들이 모여 있었다. 제주에서 온 산모의 보호자는 제주 감귤을 한 상자 가지고 와서 병실 식구들끼리 나누어 먹기도 하고 동병상련이라고 아내들이 어떻게 서울대 병원에 오게 되었는지 이야기하다 보니 쌍둥이를 가진 환자도 있었는데 시험관 아기라고 했다. 날마다 병원으로 퇴원해서 병원 밥을 먹고 살다 보니 의사들이나 간호사들과도 친하게 되었다. 병원이 집처럼 느껴졌으니 말이다. 호텔에서는 딱한 우리 사정을 노조 대자보에 올려서 모금해서 병원비에 보태기도 했다. 시골에 알려봐야 걱정할 테니 알리지 않았다. 아내가 임산부라서 화장실을 자주 가게 되었고 씻기는 것도 쉽지 않았다. 몸무게가 늘어 70킬로가 넘었고 조심조심 씻겨야 했으니 말이다. 낮에 일하고 퇴근 후에도 아내를 돌보다 잠이 들어 아내가 날 깨우는 걸 듣지 못해 베개를 던져 날 깨우기도 했다.
드디어 수술 날이 되어 수술장으로 간 아내가 수술 시간에 응급 환자가 들어와 수술하는 바람에 수술 시간이 11시 50분대로 늦춰졌다. 그래서 아이들 출생은 11월 11일 52분 53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들이 내 모습하고 아주 똑같이 닮았다고 같은 병실 사람들이 다들 복사판이라고 했다. 심장에 작은 구멍이 있어서 두고 봐야 한다던 아들, 그리고 문제가 심각했던 딸은 일주일 후에 전신 마취를 하고 수술실에 들어갔는데 꼬물꼬물한 발가락을 움직이면서 발길질을 해대던 딸이 수술 전날 우유를 먹이지 않아 울다가 지쳐서 자다가 다시 울고를 반복했다. 나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데다 수술실로 가기 위해 내가 안고 수술장으로 가서 간호사에게 넘겨주니 죽는다고 울어 댄다. 배고픈 걸 못 참는 딸은 그날도 얼마나 울어 댔는지 모른다. 수술실로 들어간 딸과 수술실 밖에서 딸의 울음소리를 듣던 난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그렇게 시작된 딸의 수술은 이민 오기 전까지 3번이나 더 있었고 특별히 강남에 전문크리닉을 다니느라 인천에서 강남으로 또 종로의 서울대 병원으로, 덕분에 한 달을 아팠던 아내는 산후조리도 하지 못하고 병원을 전전해야 했다. 딸을 데리고. 장모님은 아들을 집에서 보느라 딸이 병원 갈 때 아내와 나의 차지였지만 출근할 때도 많아 차가 있던 손위 처남이 병원 가는 걸 많이 도와줬다. 밤새 하나가 울면 다른 아이가 따라 울어 하는 수 없이 아들은 아내와 내가 돌보고 딸은 장모님이 돌보는 생활이 시작됐다. 인천 서구 가좌동에서 서울 스위스 그랜드 호텔까지 전철과 버스를 갈아 타면서 출퇴근해야 했던 난 집에서도 쉬지 못해 늘 피곤한 상태였다. 그래도 그 불행한 순간이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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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은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사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 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 학원에 다니며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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