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무문관: 황룡삼관(黃龍三關)
신무문관: 황룡삼관(黃龍三關)
  • 박영재 명예교수
  • 승인 2024.02.28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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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선도회 박영재 교수와 마음공부 68.

성찰배경: 바로 앞글에서 임제-흥화-남원-풍혈-수산-분양 선사의 법을 이은 임제종(臨濟宗)의 석상초원(石霜楚圓, 986-1039) 선사께서 제창한 <무문관> 제46칙 ‘간두진보(竿頭進步)’ 공안을 중심으로 다루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석상 선사께서 선종(禪宗)이 다섯 갈래[五宗]에서 일곱 갈래[七家]로 분파하게 되는 주역들인 임제종 양기파의 양기방회(楊岐方會, 996-1049) 선사와 황룡파의 황룡혜남(黃龍慧南, 1002-1069) 선사를 길러냈기에 이들 두 선사를 중심으로 다루고자 합니다. 

한편 <무문관> 48칙 가운데에는 이분들과 직접 관련된 공안이 포함되지 않았으나, 무량종수 선사께서 <무문관>을 집필하신 무문혜개 선사의 노고를 치하드리며 부록에 황룡 선사를 대표하는 ‘황룡삼관(黃龍三關)’ 공안을 인용하며 게송을 붙였습니다. 그런데 이때 제2관인 ‘내 다리가 당나귀[驢]의 다리와 닮은 것은 왜일까?’에 붙인 게송 가운데 양기 선사가 제창한 ‘세 발 달린 당나귀[三脚驢子]’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두 선사에 관한 위와 같은 내용들을 포함해 <오가정종찬(五家正宗贊)>을 중심으로 보충하고자 합니다.

◇ 석상과 양기의 인연

양기방회 선사는 냉씨(冷氏)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고향은 강서성(江西省) 원주(袁州) 의춘현(宜春縣)입니다. 석상[慈明] 선사께서 남원(南原)에 머무실 때 양기 스님은 그곳에 가서 석상 선사께 의탁(依託)하며 참문했습니다. 그러다 석상 선사께서 석상사(石霜寺)로 옮겨가자 스님도 함께 따라가서 자청해 절의 사무를 도맡아 하는 감사(監寺) 소임을 수행하였습니다. 
한편 석상 선사께서는 공양을 마치면 늘 산책을 하셨습니다. 어느 날 양기 스님이 석상 선사께서 아직 멀리 가지 않은 것을 보고 즉시 북을 쳐서 대중을 모이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석상 선사께서 급히 돌아와 ‘무슨 일이 났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이에 양기 스님이 ‘만참(晩參) 시간입니다.’하고 아뤄었습니다. 이에 석상 선사께서는 마침내 (예정에도 없던) 대중법문을 하셨는데 총림에서는 이때부터 양기 스님을 ‘만참’이라고도 불렀다고 합니다.

◇ 양기의 개당문답 일화

훗날 세상으로 나아가 개당(開堂)해 법좌(法座)에 오르자마자 한 승려가 즉시 앞으로 나섰습니다. 이에 양기 선사께서 ‘늙은 어부가 아직 낚싯줄을 던지지도 않았는데 물 위로 뛰쳐 오른 물고기가 물결을 일으키며 다가오는구나.[漁翁未擲釣 躍鱗衝浪來.]’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이 승려가 즉시 ‘악!’하고 할(喝)을 하였습니다. 
이에 양기 선사께서 ‘그대는 내 말을 믿지 않느냐?’라고 말씀하시니, 이 승려가 박장대소하며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그러자 양기 선사께서 ‘용왕처럼 태풍(颱風)과 훈풍(薰風)을 자유자재하게 멈추거나 불게 하는구나.[消得龍王多少風.]’라는 게송을 읊으셨다고 합니다. 

◇ ‘삼각려자(三脚驢子)’ 공안

어느 때 한 승려가 ‘무엇이 부처입니까?[如何是佛.]’하고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양기 선사께서 ‘세 발 달린 당나귀가 절룩거리며 잘도 걷는구나.[三脚驢子弄蹄行.]’라고 응대하셨습니다.

군더더기: <무문관> 부록인 무량종수 선사의 게송을 포함한 ‘황룡삼관(黃龍三關)’은 나중에 다시 전체를 다루겠지만, 제2관 게송을 보면 ‘삼각려자(三脚驢子)’와 관련된 대목이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내 다리가 (거친) 당나귀의 다리와 닮은 것은 왜일까?/ 아직 한 발자국도 내디디지 않았는데 이미 (목적지에) 도착해 있고/ 마음먹은 대로 천하[四海]를 자유롭게 활보[橫行]하네/ 양기(楊岐)의 세 다리로 절뚝거리며 걷는 당나귀의 등위에 거꾸로 걸터타고서!
[我脚何似驢脚. 未舉步時踏著. 一任四海橫行 倒跨楊岐三脚.]”

한편 무량 선사의 ‘삼각려자’를 언급한 위 대목이나 ‘양기 선사가 세 발 당나귀를 타고 천하의 사람들을 밟아 죽였다.’[跨三脚驢 踏殺天下人]라는 구절은 마침내 임제종 양기파가 중국 선종을 평정하였다라는 의도가 담겨있다고 사료됩니다. 덧붙여 사실 마음의 눈이 열린 사람이라면, ‘절뚝거리며 걷는 당나귀의 세 다리’와 같은 언구에도 결코 걸림이 없겠지요.

◇ 석상과 황룡의 시절인연

황룡혜남 선사는 석상 선사의 인가를 받은 사법(嗣法) 제자로 신주(信州) 장씨(章氏) 자손이며 회옥산(懷玉山)에서 출가하여 처음에는 운문종(雲門宗)의 늑담회징(泐潭懷澄) 선사로부터 인가를 받았습니다. 그 뒤 한동안 우쭐거리며 제방(諸方)을 행각을 하다가 만난 운봉문열(雲峯文悅, 997-1062) 선사와의 문답을 통해 미숙함을 간파당하고 ‘그대가 대사(大事)를 결단코 밝히고자 한다면 반드시 석상 선사를 친견(親見)해야 할 것이다.’라는 충고를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석상 선사를 찾아뵙기 위해 길을 떠났는데 도중에 ‘석상 선사께서는 이제 주지직을 맡지 않는다.’라는 소문을 듣고서 뵙기를 중단하고, 마침내 복엄사(福嚴寺)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이때 복엄사의 주지인 현(賢) 선사께서 혜남 스님에게 서기(書記) 직(職)을 맡겼습니다. 그러다 현 선사 입적 후 그 지역 군수(郡守)가 석상 선사로 하여금 주지 직을 승계(承繼)하도록 하였는데, 석상 선사께서 만참 법문에서 제방 선사들의 삿된 견해들을 통렬하게 질타하셨습니다. 그러자 이를 목격한 혜남 스님은 즉시 ‘대장부가 이 일대사(一大事)를 해결하기 위해 결택(決擇) 하려는데 어찌 가슴 속에 의심의 여지를 남겨두겠는가!’하고 다짐을 하고는 즉시 혜남 스님은 경건하게 향을 사른 다음 석상 선사께 나아가 가르침을 구했습니다. 

그러자 석상 선사께서 ‘그대는 스님들을 거느리고 행각한 일도 있으니 함께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견처(見處)를 확인해 볼 만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 혜남 스님에게 ‘서기는 운문종의 선을 익혔으니 필시 그 종지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가령 보기를 들면 운문 선사께서 제자인 동산 스님에게 보통은 몽둥이찜질 삼십 대[三頓棒]를 치겠지만 때릴 가치도 없어 면제해 주겠다고 하셨는데 삼십 대를 맞는 것이 합당한가, 아니면 합당하지 않은가?’하고 물으셨습니다. 

이에 혜남 스님이 ‘삼십 대를 맞는 것이 합당합니다.’라고 아뢰었습니다. 그러자 석상 선사께서 얼굴빛이 굳어지며 ‘삼십 대를 치겠다는 소리만을 듣고서 매를 맞는 것이 합당하다고 한다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까마귀나 까치 울음소리, 종이나 목어나 북이나 운판 소리 따위를 듣고서도 응당 삼십 대를 맞아야만 할 것이다. 그렇다면 자네는 삼십 대씩이나 맞을 짓을 언제쯤이나 그만두게 되겠는가?’하고 다그치셨습니다. 이때 혜남 스님은 얼굴이 화끈거리고 식은땀을 흘렸는데, 직후에 곧 선지(禪旨)를 깊이 깨우치셨다고 합니다.

군더더기: 훗날 황룡혜남 선사는 황룡산에 머물면서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부처의 손[佛手]’, ‘당나귀의 다리[驢脚]’, ‘태어난 인연[生緣, 本來面目]’이란 ‘황룡삼관(黃龍三關)’으로 수행자들을 시험하였는데, 구체적으로 <무문관> 부록에 들어있는 ‘황룡삼관’ 공안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1관: 내 손이 부처님 손과 닮은 것은 왜일까?[我手何似佛手.]
제2관: 내 다리가 당나귀의 다리와 닮은 것은 왜일까?[我脚何似驢脚.]
제3관: 사람에게는 제각기 태어난 인연이 있다는데 어떤 인연일까?[人人有箇生緣.]”

참고로 이 투과하기 매우 어려운 삼관에 대해 (대부분은 침묵할 뿐이고) 겨우 견해를 밝히는 이들이 있어도 황룡 선사는 늘 가부(可否)를 말하지 않고 다만 눈을 감고 정묵위좌(靜默危坐)할 뿐이었다고 합니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자명한 그의 의도는 사람들이 그 뜻을 몰라 물었을 때 ‘삼관을 투과한 자는 일러줄 필요도 없고, 투과하지 못한 자는 일러줘도 모르기 때문이다.’였다고 사료됩니다.

한편 황룡파는 중국에서 소동파, 왕안석, 황정견, 장상영 등 뛰어난 재가 거사들을 다수 배출하기도 했지만 잠시 번창하다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비록 중국에서는 자취를 감추었으나, 남송 때 황룡혜남 선사의 8대손인 허암회창(虛庵懷敞) 선사로부터 인가를 받은 일본 유학승이었던 명암영서(明庵榮西, 1141-1215) 선사가 귀국 후 일본 임제종 건인사파(建仁寺派)를 열었는데, 번창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끝으로 요즈음 ‘의료분쟁(醫療分爭)’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돌이켜 보면 심각한 이공분야 쏠림 현상을 포함해 의료 분야의 제반 문제점들을 진보 정권이든 보수 정권이든 누가 국정을 운영하든지 불문하고 해당 정부 부처 관계자들과 의료인들이 위기가 닥치기 전에 제 때 지혜롭게 미리 대비했었다면, 아픈 이들을 볼모로 한 심각한 의료분쟁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비단 어디 의료 분야뿐이겠습니까? 결국 모든 문제는 남 탓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짓는 공업(共業)이겠지요.

따라서 우리 모두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삼독(三毒), 즉 탐욕[貪]과 분노[瞋]와 어리석음[癡]에 중독되어 각자 있는 제 자리에서 맡은 바 할 일들을 제대로 못한 결과임을 뼈저리게 반성하고, 일상 속에서 틈날 때마다 참나[本來面目] 찾기를 병행하며 삼독의 중독에서 철저히 벗어나 할 일 제대로 할 수 있기를 간절히 염원해 봅니다. 

박영재 교수는 서강대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3년 3월부터 1989년 8월까지 강원대 물리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1989년 9월부터 2021년 2월까지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현재 서강대 물리학과 명예교수이다.
1975년 10월 선도회 종달 이희익 선사 문하로 입문한 박 교수는 1987년 9월 선사의 간화선 입실점검 과정을 모두 마쳤다. 1991년 8월과 1997년 1월 화계사에서 숭산행원 선사로부터 두 차례 독대 점검을 받았다. 1990년 6월 종달 선사 입적 후 지금까지 선도회 지도법사를 맡고 있다. 편저에 <온몸으로 투과하기: 무문관>(본북, 2011), <온몸으로 돕는 지구촌 길벗들>(마음살림, 202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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