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피면 어릴 적 동무 생각
꽃 피면 어릴 적 앞산 생각
진달래 붉게 물들어 타들어 가던 산.
꽃 피면 하이얀 옷깃 교복 입은 동무 생각
버스에서 마주치고 얼굴 붉히던
세월 강물 위에 흘러간 꽃잎 같은 시간들.
꽃 피면 기억 속에 당신 생각
같은 듯 다른 다른 듯 같은 당신 모습
시간 속에 묻혀 버린 날들.
#작가의 변
우리가 사는 지금 지구의 계절은, 아니 북반구의 계절은 겨울에서 봄으로 가는 길목이다.
여러분 인생의 계절은 어떤가요. 어떤 사람은 파릇파릇한 새싹이 돋아나는 봄이고, 왕성한 활동을 하는 여름인 분도 있을 것이다. 지금 나의 인생 계절을 거울에 비추어 보면 가을에서 겨울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이 세상에 올 때는 아무런 생각이 없이 온다. 내가 무엇을 할거라든지, 누구를 만나야겠다든지, 무엇이 되겠다든지, 이런저런 집착이나 목표 같은 걸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이 세상에 왔다.
낳자마자 부잣집에 태어나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든지, 가난하고 부모 없는 천애의 고아로 난 환경의 다름은 있을 수 있지만 태어난 아이가 양손에 뭘 들고 태어난 것도 옷을 입고 태어난 것도 아니다. 다만 부잣집에 태어나서 공주처럼 왕자처럼 크고 남들보다 고생을 덜하고 자라고 가난한 사람들과는 성격이 다른 경쟁과 또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는 규칙을 배우게 된다.
인생의 목표를 부로 잡고 달리다 보면 부의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니 인생을 목표를 얻고 나서 다음 목표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사람도 있다.
부가 살아가는데 편리하고 쉬운 게 사실이나 절대 인생의 목표가 돼서는 안 된다. 내 평생 목표가 마당이 딸린 조그만 주택을 가진 거라고 늘 말하는 아내에게 그 작은 소망을 하나 이루어 주지 못한 나의 무능을 탓하면서도 그 소박한 꿈을 가진 아내가 다른 인생의 목표를 가지기를 늘 기도한다.
사람은 일상에서 사용하는 지각 능력보다 잠재된 무의식의 세계가 훨씬 크고 깊다. 그것은 빙산의 일각처럼 바다 밑에 보이지 않는 잠재 능력을 숨겨 두고 찾지 조차 않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계발하고 능력을 쓰면 쓸수록 그 능력치가 늘어나는 걸 경험한 적이 많다. AI처럼 사람이 반복 학습을 시키고 나서야 혼자 스스로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로봇이 되어 가지만, 사람은 개발하면 할수록 점점 능력이 는다. 사람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사람들에게 주는 인건비도 아까워서 로봇에게 점점 사람의 일을 맡기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즉 사람이 점점 로봇에 밀려 그 자리를 잃어 가고 있다. 자동차 공장의 라인이 그렇고 최근엔 주방에서 닭 튀기는 로봇과 떡볶이를 만드는 로봇은 물론 탕을 만드는 로봇까지 생겨나고 있다. 그 로봇이 고장 나면 사람이 고쳐야 하고 프로그램도 사람이 만들어야 한다. 그 프로그램조차도 로봇에게 시킨다고는 하지만 말이다.
사람이 모든 일에서 배제가 되고 로봇이 모든 걸 대신해 주는 세상에 살면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살까? 사람들은 여유가 넘칠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과거 주부들은 꽝꽝 언 개울을 깨고 빨래하고 우물을 길어다 불을 피워 밥을 하고 청소기 없이 오롯이 손과 발로 청소를 하고 바느질하고 농사를 짓고 하던 시절이 있었다. 불과 100년도 지나지 않는 시간이 흘렀고 아직도 그렇게 사는 사람들은 이 지구에 많이 있다. 로봇이 청소하고 세탁기가 빨래하고 드라이어가 말리고 로봇이 커피를 만들어 주는 지금 가정주부는 만족하면서 살까? 시간의 여유가 생겼지만, 주부는 아이들의 육아를 위해 그리고 자기 계발과 수입을 위해 직장을 찾거나 집안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음을 느끼게 된다.
며칠 전 고등학교 동창의 부고를 보았다. 감정이 미묘했다. 얼마 전에도 그가 밴드에 올린 글을 보았고 일상생활의 연장이었던 그가 갑작스럽게 떠났다는 것이 믿겨 지지 않았다.
아들과 딸에게 그 이야기했더니 자기들과는 상관이 없단다. 상관없다. 그 동창처럼 나도 갑자기 홀연히 떠날 수도 있음을 말하려고 한 것인데, 그런 나의 마음을 읽지 못하는 아들과 딸이 무심하게 느껴졌다. 뭐 안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사람이 무한한 생명을 가진 것이 아닌 유한한 생명을 가진 동물이고 탐욕을 쫓다가 보면 어느새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호사다마라고 사람들은 늘 좋은 일이 있을 때 조심하라고 말한다. 그것은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가장 불행은 건강을 잃는 거다. 건강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명예를 잃거나 권력을 잃거나 돈을 잃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이 있지만, 건강을 잃으면 아무것도 소용도 없다. 건강을 잃으면 자연히 다른 걸 잃게 된다.
우리가 자라던 시대에는 라디오를 듣고 어머니가 도란도란 옛날이야기를 해주고 동네 부잣집에 흙 묻은 발과 코를 훌쩍이던 아이들이 모여 앉아 드라마 ‘전우’의 ‘라시찬’을 보던 시기엔 라시찬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가 가장 의롭고 정의로웠다. 만화방에서 만화를 보다가 시간이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빠르게 흘러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포켓몬 카드에 열광하는 아들을 위해 카드를 사주다 어느 날부터 컴퓨터 ‘마리오’ 게임에 푹 빠진 아이들이 서운하기도 했다. 이젠 어른이 된 아이들이 지금도 가족과의 대화보다는 컴퓨터 게임을 더 좋아하는 것을 보면 게임을 만든 사람을 원망하게 되기도 한다. 세상은 또 그렇게 흘러가는 것인데 과거를 놓지 못하는 집착을 붙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구가 사계절에 의해 돌아가듯이 인생도 계절이 바뀌고 사람도 바뀐다. 그것이 인생이다. 그것을 놓지 못하고 집착하면서 불행은 늘 우리의 주변을 맴돌게 된다. 꽃망울이 달리고 꽃이 피고 나면 열흘이 안 돼 떨어지게 된다. 화무십일홍이란 말처럼 말이다. 잎이 나고 여름의 짙은 태양을 거쳐 열매를 맺게 된다.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무의식은 잊고 그곳에 보물을 숨겨 놓고 차지조차 않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무의식을 찾는 것은 깊은 명상을 통하거나 꿈으로 만나 볼 수 있다. 오늘 밤 우리가 잊고 있는 빙산의 대부분 무의식에서 우리가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던 그것을 찾고 싶다. 우리가 멈추는 순간에 행복이 찾아오기도 한다. 달리는 순간엔 의식하지 않았던 것들이 멈추고 눈높이를 맞추어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
#전재민(Terry)은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사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 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 학원에 다니며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이 기사에 대한 반론 및 기사 제보 mytrea7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