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중흥·대중화 목적으로 기관지 ‘선원’ 창간
선 중흥·대중화 목적으로 기관지 ‘선원’ 창간
  • 이창윤 기자
  • 승인 2023.05.30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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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원’의 간행과 지방 선원 소식 소개

선학원의 기관지인 《선원》은 1931년 재기를 도모하면서 선의 중흥과 대중화를 목적으로 그해 10월 6일에 창간되었다. 이 잡지는 1931년 10월 창간호부터 1935년 10월 제4호까지 총 4권이 발행되었는데 편집 겸 발행인이 모두 적음 스님이다. 그런 까닭에 이 잡지에는 적음 스님의 생각과 선학원 운영 방침이 잘 담겨 있다고 하겠다.

《선원》의 발간은 창간호(1931. 10. 6.)와 제2호(1932. 2. 1.), 제3호(1932. 8. 16.)가 간행되어 해마다 출간되었지만 제4호는 3년 뒤인 1935년 10월에 간행되었다. 제4호의 간행이 늦어지게 된 까닭을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제4호 <속간사(續刊辭)>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을 알 수 있다. “심전개발 종교부흥의 소리 높은 때 대애자(大愛者) 세존의 불멸의 심어(心語)를 천양(闡揚)하여 죄에 더럽힌 지상(地上)을 정화하려는 너의 재거(再擧)는 의기가 새로 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속간사>의 내용을 미루어 짐작하건대 《선원》이 발간되지 못한 것은 선학원 내부의 문제라기보다는 외압에 의해 발간되지 못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1) 이러한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기록으로는 <편집여언(編輯餘言)>에 ‘이번 호는 좀 제때 나와야 할 것이었으나 편집 도중에 편집자의 경질 등 제반 사정으로 부득이하게 되었다’고 한다.2)

‘지방선원소식(地方禪院消息)’. 《선원》 2호.



일제 강점기 불교계는 전통 불교는 쇠퇴하였으며, 사찰령 체제하에서 모든 것이 행정관청의 통제 하에서 검열되는 상황이었다. 《선원》은 일본 불교의 침투로 왜색화 되어 가는 경향을 막고 비구 선승들 거처인 선학원의 소식과 수행하는 면모를 불교계에 알리기 위하여 창간되었다. 따라서 《선원》은 비구승들의 수행 공간 확보를 위한 노력과 그들의 수행 과정과 이력, 그리고 고승들의 설법에 관한 내용을 비교적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선학원에서 시행하는 각종 사회사업과 부인선우회의 활동 등도 자세하게 수록하여 불자들과 일반 대중들에게 알림으로써 포교지로서의 역할도 수행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불교계는 현실을 개혁하고, 혁신하여 근대 사회로 진입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교단 조직의 혁신을 통한 새로운 포교의 방법을 찾아야 했고, 대중들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수행 공간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선학원의 기관지 《선원》의 필진들은 36명으로 집계되는데 주로 개혁적인 성향의 승려들이 참여하였다. 36명 필진의 노선과 성향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백용성, 박한영, 한용운, 방한암, 권상로, 김태흡 등 당대의 고승과 지식인이었으며 불교계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사람들이다.3)



방한암 스님.



《선원》의 편집 도중에 편집자가 교체되어 잡지의 발행이 지연되었다는 사실로 외압이 있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그럴 가능성도 배제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왜냐하면 일제 강점기 모든 출판물은 사전검열을 받아야 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기사의 수정과 삭제는 매우 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4) 《선원》지에 게재된 기고문과 여러 글들을 유형별로 분류해 보면 다음의 여섯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선(禪)에 관한 글, 둘째는 선종사(禪宗史), 셋째는 시조, 넷째는 불교 교리, 다섯째는 선학원의 제반 활동, 여섯째는 소설을 중심으로 한 불교 문학이다. 34편에 이르는 선에 관한 글은 선 논설(17편), 선사 어록과 조선 후기 추사 김정희와 백파 긍선 스님 사이에 오고 간 선 논쟁을 번역한 글(3편), 선의 대중화와 중흥을 위한 논설(4편), 화두(10편)에 관한 글이다.5)

기고문을 싣고자 할 때는 사전에 서면으로 정중하게 원고 청탁서를 전달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내용은 창간호에 실린 한암 선사의 선의 요체에 관한 내용을 소개하는 글의 말미에서 확인된다. 아래는 한암 선사가 써 보낸 서신이다.

경성 안국동 41번지에서 선원이란 소지(小誌)를 간행한다고 선에 대하야 직절평범(直截平凡)하게 해설하여 보내라는 통지서가 래부(來付)함을 바드매 자연이 감상이 발하야 문사(文辭)의 황졸(荒拙)과 어조의 실격(失格)을 도라보지 아니하고 약간 이까직 것을 초(艸)하야 송정(送呈) 하나이다.6)

《선원》은 선학원의 기관지로서 그해의 주요 행사를 월별로 날짜순으로 행사의 내용과 강사 또는 주관자와 주요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해서 2쪽 정도의 지면에 소개하고 있다. 창간호와 제2호는 <선학원일기요초(禪學院日記要抄)>라는 제목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정리한 사람의 이름은 창간호 목차에는 ‘노파(老婆)’라고 되어있으나 본란에는 ‘노자(老姿)’라고 되어있는데 ‘노자’의 오기인 듯하다. 제2호 목차 <선학원일기요초>의 필자는 일파(日波)라고 되어있는데 정작 본란에는 필자 이름이 없다.

제3호 목차는 <본원일기란(本院日記欄)>이라고 되어 있으니 본란은 <선학원일기요초>〔제2호 속(續)〕로 표기하고 필자는 이름이 없는데 아마 편집자가 작성한 듯하다. 내용은 1932년 12월 23일자 가행정진(加行精進)으로 행사를 여법(如法)하게 마쳤다는 것과 동지(冬至) 행사를 운현궁에서 진행했다고 하며, 오후 2시에 백용성 화상의 설법이 있었다는 내용을 싣고 있다.

제4호는 <선원소식(禪院消息)>이라 하여 1935년 지방 선원의 하안거 대중들 가운데 대표자의 이름과 안거 참여자들의 수가 기록되어 있는데 모두 22개처에서 368명의 납자들이 여름 안거 수행을 마친 것으로 나타난다.7)

뿐만 아니라 《선원》지에는 <지방 선원 소식>이라 하여 전국 지방 선원의 소식을 간략하게 전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선리참구원이 중앙에서 전국 선원에 연락망을 갖추고 총괄하는 역할을 수행한 선원의 본산 역할을 자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선원》은 선학원의 기관지로 당시 불교계의 선에 대한 인식 부족을 비판하고 선의 부흥과 선 수행에 투철한 납자들의 안정적인 수행 생활을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논설을 자주 수록하였다. 뿐만 아니라 비구승들이 선 수행할 수 있는 청정도량을 할애해 줄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하였다. 전국 선원의 본산으로서 선학원에서 시행하였던 각종 사업 현황과 역할을 소개하였다.

2. 전국 규모의 선원과 선승의 증가

선학원의 재기는 선의 대중화와 직결되었고 또 전국 선원들과 연결망을 형성하게 되었고 지방 선원의 소식은 《선원》지를 통하여 수행 납자들과 공유되었다.

선을 대중화하려는 선학원의 지속적인 노력으로 전국의 유서 깊은 사찰에 선원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곳에 주석하는 조실 선승들이 납자들을 지도함에 따라서 선원과 수행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선원》에 소개된 자료를 살펴보면 해마다 선원의 수가 늘어나고, 수행하는 선승들의 숫자도 증가하고 있었는데 그 현황을 정리해 보면 다음의 <표 3>과 같다.

<표 3>에서 보이듯이 《선원》지에 소개된 전국 사찰의 선원의 수와 수행 중인 대중들이 해마다 증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비구승 중심의 선학원이 창설될 당시부터 인적·물적 자원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사람들이 많았으며 사찰 또한 적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8)



‘조선불교계의 선원과 납자수의 통계’, 《선원》 3호.



<표 3>에서 보이듯이 선원의 수는 1931년 5개에서 1935년 22개로 4년 사이에 4.4배 증가하였음을 볼 수 있다. 수행 대중의 수는 1931년 160명에서 1935년 368명으로 2.3배 증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선원의 분포 지역 또한 1931년 강원도와 경북 지역 두 개 도(道) 권역이었지만 1935년에는 함남 지역에서부터 경남 지역에 이르기까지 전국으로 확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선학원이 1934년 재단법인 선리참구원으로 개편된 것은 수좌들의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재정을 제도적으로 보호하고 관리하기 위한 조치였다. 재단법인으로 개편된 이후 선학원은 각 선원들과 연락을 활발히 하였고, 선원을 증설하고 선승들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진력하였다. 또한 선종을 독립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포교사들을 지방으로 파견하여 설법포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9)

이러한 사실은 일본 불교의 영향으로 대처승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지만 불교계 운영이 선 수행에 전념하는 비구승 중심으로 이루어지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지방선원소식(地方禪院消息)’. 《선원》 2호.

일제 강점기 불교계는 전통 불교는 쇠퇴하였으며, 사찰령 체제하에서 모든 것이 행정관청의 통제 하에서 검열되는 상황이었다. 《선원》은 일본 불교의 침투로 왜색화 되어 가는 경향을 막고 비구 선승들 거처인 선학원의 소식과 수행하는 면모를 불교계에 알리기 위하여 창간되었다. 따라서 《선원》은 비구승들의 수행 공간 확보를 위한 노력과 그들의 수행 과정과 이력, 그리고 고승들의 설법에 관한 내용을 비교적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선학원에서 시행하는 각종 사회사업과 부인선우회의 활동 등도 자세하게 수록하여 불자들과 일반 대중들에게 알림으로써 포교지로서의 역할도 수행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불교계는 현실을 개혁하고, 혁신하여 근대 사회로 진입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교단 조직의 혁신을 통한 새로운 포교의 방법을 찾아야 했고, 대중들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수행 공간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선학원의 기관지 《선원》의 필진들은 36명으로 집계되는데 주로 개혁적인 성향의 승려들이 참여하였다. 36명 필진의 노선과 성향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백용성, 박한영, 한용운, 방한암, 권상로, 김태흡 등 당대의 고승과 지식인이었으며 불교계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사람들이다.3)

방한암 스님.
방한암 스님.

《선원》의 편집 도중에 편집자가 교체되어 잡지의 발행이 지연되었다는 사실로 외압이 있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그럴 가능성도 배제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왜냐하면 일제 강점기 모든 출판물은 사전검열을 받아야 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기사의 수정과 삭제는 매우 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4) 《선원》지에 게재된 기고문과 여러 글들을 유형별로 분류해 보면 다음의 여섯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선(禪)에 관한 글, 둘째는 선종사(禪宗史), 셋째는 시조, 넷째는 불교 교리, 다섯째는 선학원의 제반 활동, 여섯째는 소설을 중심으로 한 불교 문학이다. 34편에 이르는 선에 관한 글은 선 논설(17편), 선사 어록과 조선 후기 추사 김정희와 백파 긍선 스님 사이에 오고 간 선 논쟁을 번역한 글(3편), 선의 대중화와 중흥을 위한 논설(4편), 화두(10편)에 관한 글이다.5)

기고문을 싣고자 할 때는 사전에 서면으로 정중하게 원고 청탁서를 전달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내용은 창간호에 실린 한암 선사의 선의 요체에 관한 내용을 소개하는 글의 말미에서 확인된다. 아래는 한암 선사가 써 보낸 서신이다.

경성 안국동 41번지에서 선원이란 소지(小誌)를 간행한다고 선에 대하야 직절평범(直截平凡)하게 해설하여 보내라는 통지서가 래부(來付)함을 바드매 자연이 감상이 발하야 문사(文辭)의 황졸(荒拙)과 어조의 실격(失格)을 도라보지 아니하고 약간 이까직 것을 초(艸)하야 송정(送呈) 하나이다.6)

《선원》은 선학원의 기관지로서 그해의 주요 행사를 월별로 날짜순으로 행사의 내용과 강사 또는 주관자와 주요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해서 2쪽 정도의 지면에 소개하고 있다. 창간호와 제2호는 <선학원일기요초(禪學院日記要抄)>라는 제목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정리한 사람의 이름은 창간호 목차에는 ‘노파(老婆)’라고 되어있으나 본란에는 ‘노자(老姿)’라고 되어있는데 ‘노자’의 오기인 듯하다. 제2호 목차 <선학원일기요초>의 필자는 일파(日波)라고 되어있는데 정작 본란에는 필자 이름이 없다.

제3호 목차는 <본원일기란(本院日記欄)>이라고 되어 있으니 본란은 <선학원일기요초>〔제2호 속(續)〕로 표기하고 필자는 이름이 없는데 아마 편집자가 작성한 듯하다. 내용은 1932년 12월 23일자 가행정진(加行精進)으로 행사를 여법(如法)하게 마쳤다는 것과 동지(冬至) 행사를 운현궁에서 진행했다고 하며, 오후 2시에 백용성 화상의 설법이 있었다는 내용을 싣고 있다.

제4호는 <선원소식(禪院消息)>이라 하여 1935년 지방 선원의 하안거 대중들 가운데 대표자의 이름과 안거 참여자들의 수가 기록되어 있는데 모두 22개처에서 368명의 납자들이 여름 안거 수행을 마친 것으로 나타난다.7)

뿐만 아니라 《선원》지에는 <지방 선원 소식>이라 하여 전국 지방 선원의 소식을 간략하게 전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선리참구원이 중앙에서 전국 선원에 연락망을 갖추고 총괄하는 역할을 수행한 선원의 본산 역할을 자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선원》은 선학원의 기관지로 당시 불교계의 선에 대한 인식 부족을 비판하고 선의 부흥과 선 수행에 투철한 납자들의 안정적인 수행 생활을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논설을 자주 수록하였다. 뿐만 아니라 비구승들이 선 수행할 수 있는 청정도량을 할애해 줄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하였다. 전국 선원의 본산으로서 선학원에서 시행하였던 각종 사업 현황과 역할을 소개하였다.

2. 전국 규모의 선원과 선승의 증가

선학원의 재기는 선의 대중화와 직결되었고 또 전국 선원들과 연결망을 형성하게 되었고 지방 선원의 소식은 《선원》지를 통하여 수행 납자들과 공유되었다.

선을 대중화하려는 선학원의 지속적인 노력으로 전국의 유서 깊은 사찰에 선원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곳에 주석하는 조실 선승들이 납자들을 지도함에 따라서 선원과 수행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선원》에 소개된 자료를 살펴보면 해마다 선원의 수가 늘어나고, 수행하는 선승들의 숫자도 증가하고 있었는데 그 현황을 정리해 보면 다음의 <표 3>과 같다.

<표 3>에서 보이듯이 《선원》지에 소개된 전국 사찰의 선원의 수와 수행 중인 대중들이 해마다 증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비구승 중심의 선학원이 창설될 당시부터 인적·물적 자원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사람들이 많았으며 사찰 또한 적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8)

‘조선불교계의 선원과 납자수의 통계’, 《선원》 3호.
‘조선불교계의 선원과 납자수의 통계’, 《선원》 3호.

<표 3>에서 보이듯이 선원의 수는 1931년 5개에서 1935년 22개로 4년 사이에 4.4배 증가하였음을 볼 수 있다. 수행 대중의 수는 1931년 160명에서 1935년 368명으로 2.3배 증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선원의 분포 지역 또한 1931년 강원도와 경북 지역 두 개 도(道) 권역이었지만 1935년에는 함남 지역에서부터 경남 지역에 이르기까지 전국으로 확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선학원이 1934년 재단법인 선리참구원으로 개편된 것은 수좌들의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재정을 제도적으로 보호하고 관리하기 위한 조치였다. 재단법인으로 개편된 이후 선학원은 각 선원들과 연락을 활발히 하였고, 선원을 증설하고 선승들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진력하였다. 또한 선종을 독립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포교사들을 지방으로 파견하여 설법포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9)

이러한 사실은 일본 불교의 영향으로 대처승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지만 불교계 운영이 선 수행에 전념하는 비구승 중심으로 이루어지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주] -----

1) 선학원(1935), <續刊辭>, 《禪苑》 제4호, 2쪽.

2) 선학원(1935), <編輯餘言>, 《禪苑》 제4호, 46쪽.

3) 오경후(2008), <일제하 《禪苑》誌의 창간과 그 性格>, 《한국 사상과 문학》 44, 한국사상문화학회, 241쪽.

4) 문한별(2020), <일제 강점기 도서과의 소설 검열과 작가들의 대응 방식-출판 검열 체계, 화기(1926~1938) 검열 자료를 중심으로>, 《현대소설연구》 79, 한국현대소설학회, 228~229쪽.

5) 오경후, 앞의 논문 245쪽.

6) 방한암(1931), <一塵話>, 《禪苑》 창간호, 선학원, 14쪽.

7) 선학원(1935), <禪院消息>, 《禪苑》 제4호, 선학원, 42-43쪽.

8) 오경후(2006), <선학원 운동의 정신사적 기초>, 《선문화연구》 창간호, 361-362쪽.

9) 위와 같음.

선학원백년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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