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학원 활동의 주체인 전국 수좌들의 조직체 ‘선우공제회’
선학원 활동의 주체인 전국 수좌들의 조직체 ‘선우공제회’
  • 선학원백년사간행위원회
  • 승인 2023.02.24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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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공제회 취지서.
선우공제회 취지서.

1. 선우공제회의 설립 취지

선학원은 1921년 12월에 준공이 완료되어 서울 중심부(서울, 안국동)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창설 이후 선학원은 민족불교의 기치 아래 그 정체성과 운영상의 독자성을 표방하면서 창설된 4개월 후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선학원의 본격적인 활동의 주체는 전국 수좌들이었다. 이들이 조직체로 만든 것이 선우공제회(禪友共濟會)였다.

1922년 3월 30일∼4월 1일 이틀에 걸쳐 안국동 선학원에서 창립 정신에 동의한 각처의 수좌들이 모여 회의를 통해 자신들이 나아갈 방향을 수립하였다. 선우공제회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는데 참석한 인물은 송만공, 오성월, 김남전, 한설제 등 선학원 건립을 주도한 인물들을 비롯하여 임석두, 이고경, 기석호, 김남전, 한설제 등 35명이었다. 출석 인원은 다음과 같다.

백학명(白鶴鳴) 오성월(吳惺月) 이설운(李雪耘) 김남전(金南泉) 김법계(金法界) 전남옹(全南翁) 정석암(鄭石庵) 권남경(權南鏡) 박혜명(朴慧明) 기석호(奇石虎) 신환옹(申幻翁) 구송계(具松溪) 황용음(黃龍吟 김성민(金性玟) 이해산(李海山) 이일허(李一虛) 김재규(金載奎) 이계봉(李戒奉) 윤상언(尹祥彦) 강은학(姜恩鶴) 김성경(金性敬) 방묘법(方妙法) 강나롱(姜懶聾) 송만공(宋滿空) 김송월(金松月) 한설제(韓雪濟) 윤철지(尹鐵只) 나병규(羅炳奎) 최도현(崔道玄) 임석두(林石頭) 마응허(馬應虛) 조동호(曺東湖) 이고경(李古鏡) 박고봉(朴古峰) 박보선(朴普善)

창립총회에 참석한 35명이 선우공제회를 움직인 실질적인 주역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회의를 갖고 임시의장 황용음(黃龍吟)의 낭독으로 <선우공제제회 취지서(禪友共濟會趣旨書)>를 발표하여 그들의 지향과 목적을 밝히고 있다. 사찰령 반포 이후 선승이 줄어든다는 문제의식 속에서 선학원을 창설한 이후 첫 사업이 선우공제회(禪友共濟會)의 창립이었던 셈이다. 선우공제회는 자립 활로를 찾고 중생구제를 모토로 하여 용성․성월 스님 등 81명이 발기하여 창립하였다.

현재 1922년 3월 30일 작성된 <선우공제제회 취지서> 필사본 원문이 남아있다. 취지서의 오탈자를 바로 잡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거성(去聖)이 미원(彌遠)에 대법(大法)이 침윤(沈淪)하야 교도(敎徒)가 효성(曉星)과 여(如)한 중(中)에 학자(學者)는 실(實) 인각(麟角)1)과 여(如)하야 여래(如來)의 혜명(慧命)이 잔루(殘縷)를 보존(保存)키 난(難)하도다. 다소(多少)의 학자(學者)가 유(有)하다 할지라도 진정(眞正)한 발심납자(發心衲子)가 소(少)할 뿐 아니라 진안(眞贋)2)이 상잡(相雜)하야 선려(禪侶)를 등시(等視)하는 고(故)로 선려(禪侶) 도처(到處)에 군박(窘迫)이 상수(相隨)하야 일의일발(一衣一鉢)의 운수생애(雲水生涯)를 지지(支持)키 난(難)함은 실(實)노 금일(今日)의 현상(現狀)이라. 그러나 인(人)을 원(怨)치 말고 기(己)를 책(責)하야 맹연반성(猛然反省)할지어다. 원래(元來)로 생수(生受)를 인(人)에게 의((依)함은 자립자활(自立自活)의 도(道)가 아닌즉 학자(學者)의 전생명(全生命)을 인(人)에게 탁(托)하야 타인(他人)의 취식(臭息)을 사(俟)함은 대도활명(大道活命)의 본의(本意)에 반(反)할지라. 오배(吾輩) 선려(禪侶)는 경성분려(警醒奮勵)하야 명(命)을 도(賭)3)하야 도(道)를 수(修)하고 따라서 자립(自立)의 활로(活路)를 개척(開拓)하야 선계(禪界)를 발흥(勃興)하고 대도(大道)를 천명(闡明)하야 중생(衆生)을 고해(苦海)에 구(救)하고 미륜(迷倫)을 피안(彼岸)에 도(度)할지니 만천하(滿天下)의 선려(禪侶)는 자립자애(自立慈愛)할지어다.

불응화(佛應化) 2949년 3월 30일 발기인(發起人) 〔무순(無順)〕

오성월(吳惺月) 이설운(李雪耘) 백학명(白鶴鳴) 김남전(金南泉) 이대련(李大蓮) 김법계(金法界) 전남옹(全南翁) 한용운(韓龍雲) 정석암(鄭石菴) 권남경(權南鏡) 박혜명(朴慧明) 기석호(奇石虎) 김성민(金性玟) 신환옹(申幻翁) 구송계(具松溪) 황용음(黃龍吟) 윤철공(尹鐵空) 윤상언(尹祥彦) 강나롱(姜懶聾) 이해산(李海山) 김재규(金載奎) 이계봉(李戒奉) 김송월(金松月) 이일허(李一虛) 김성경(金性敬) 송만공(宋滿空) 임석두(林石頭) 김함원(金涵園) 최도현(崔道玄) 조동호(曺東湖) 강도봉(康道峰) 이혜월(李慧月) 박보광(朴寶光) 조예운(趙禮雲) 정운암(鄭雲巖) 백용성(白龍城) 정초암(鄭草菴) 한설제(韓雪濟) 박창수(朴昌洙) 신은봉(申隱峰) 심원전(沈園田) 권일봉(權一鳳) 전서경(全西耕) 김금초(金錦超) 이지암(李芝巖) 서제봉(徐霽峰) 박금산(朴金山) 정현파(鄭玄坡) 박주연(朴周演) 윤퇴운(尹退雲) 천보암(千普菴) 박호산(朴湖山) 김보월(金寶月) 박한구(朴漢九) 박고봉(朴古峰) 김석두(金石頭) 정운문(鄭雲門) 신은봉(申隱峰) 홍수암(洪秀菴) 안월송(安月松) 이무념(李無念) 이석운(李石雲) 이청초(李靑草) 김연담(金蓮潭) 추천원(秋天園) 최일하(崔日荷) 양태희(梁泰熙) 길호연(吉浩然) 이초월(李初月) 김두병(金斗炳) 김구옹(金舊翁) 김수광(金修光) 정영신(鄭永信) 이춘성(李春城) 이계환(李啓煥) 이고산(李杲山) 마연등(馬燃燈) 김경석(金慶奭) 박기소(朴耆昭) 김초안(金初眼) 김취송(金翠松) 윤경운(尹倞雲)

선우공제회 취지서를 현대문으로 번역해 보면 다음과 같다.

성인이 가신 지 머지않아 대법이 무너져 종교를 믿는 무리가 샛별과 같은 가운데 배우는 자는 기린의 뿔처럼 극히 드물어 여래의 혜명이 무너져 내려 보존하기 어렵도다. 다소의 배우는 자가 있다 할지라도 진정으로 발심한 납자가 적을 뿐 아니라 진짜와 가짜가 서로 섞여 선려(선승)를 등한시하는 까닭에 선려들이 도처에서 핍박을 받아 옷 한 벌 바리때 하나의 운수 생애를 지키기도 어려움은 실로 오늘날의 현상이라. 그러나 남을 원망치 말고 나를 책망하여 맹렬히 반성할지어다. 원래 먹고 사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의지함은 자립자활의 길이 아닌즉 배우는 사람의 모든 생명을 남에게 의탁하여 다른 사람의 입김을 기다림은 큰 깨달음과 생명을 살리는 본뜻에 거슬리는 것이라. 우리들 선려는 크게 깨닫고 분발하여 생명을 걸고 도를 닦고 따라서 스스로 살 길을 개척하여 선계를 일으키고 대도를 밝혀 중생을 고통의 바다에서 구하고 미혹한 인륜을 피안에 이르게 할지니 온 세상의 선려는 자립 자애할지어다.

1922년 봄 선우공제회 발기인은 81명이다. 기존의 연구에서 선우공제회 발기인을 82명으로 잘못 파악하고 있는데, 이는 발기인 가운데 신은봉(申隱峰)의 이름이 두 번 나와 중복된 것을 간과하였기 때문이다.

선우공제회 창립총회는 참석하였지만 발기인 명단 81명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도 있다. 강은학(姜恩鶴), 방묘법(方妙法), 윤철지(尹鐵只)4), 나병규(羅炳奎)5), 마응허(馬應虛), 이고경(李古鏡)6), 박보선朴普善 등 7명이 보인다. 따라서 선우공제회 창립 발기인 명단은 창립총회 이전에 이미 작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는 은사스님이 발기인 명단에 있어 이에 싣지는 못하고 대신 창립총회에 참석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한편 선우공제회 발기인 81명 가운데 한국 불교계의 선사들로 이름이 드날린 인물들로 오성월(吳惺月)․백학명(白鶴鳴)․김남전(金南泉)․한용운(韓龍雲)․기석호(奇石虎)․송만공(宋滿空)․강도봉(姜道峰)․백용성(白龍城)․김석두(金石頭)․정영신(鄭永信)․이춘성(李春城) 등이 주목된다. 이들 81명 가운데 <조선총독부관보> 등을 통해 주지를 역임한 승려들은 13명이 확인된다. 13명 가운데 본사 주지를 역임한 오성월과 수덕사 주지 송만공, 내소사 주지 백학명, 개운사 주지 안송월 등을 제외하고 대부분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말사주지를 역임하고 있을 뿐이다.

오성월(吳惺月) 본사 범어사 주지(1911. 11∼1917. 12)
송만공(宋滿空) 충남 예산군 보덕사 주지( ?∼1921), 수덕사 주지(1931∼1933), 금강산 마하연 주지(?∼1935), 본사 마곡사 주지(1935∼1938)
백학명(白鶴鳴) 전북 부안군 내소사 주지(1912∼1915), 월명암 주지(1915∼1923) 전북 정읍군 내장사(1923∼1929)
박혜명(朴慧明) 황해도 신천군 월정사(月精寺) 주지(1919), 봉림암 주지(1921)
김성민(金性玟) 경북 선산군 약사암 주지(1939)
김재규(金載奎) 황해도 신천군 월정사 주지(1924)
김송월(金松月) 범어사 부산 수정포교당 포교사(1920)
이일허(李一虛) 경기도 이천군 영월암 주지(1912)
이대련(李大蓮) 강원도 고성군 건봉사 말사 조제암(鳥啼庵) 주지(1920)
김법계(金法界) 강원도 회양군 장안사 말사 지장암․중관음암․하관음암․영원암 주지(1916)
이해산(李海山) 강원도 고성군 미륵암 주지(1931)
안월송(安月松) 고양군 숭인면 개운사 주지(1918)
김석두(金石頭) 경기도 진위군 만기사 주지(1915. 4. 15∼1918. 6. 5.)

본사 범어사 주지를 역임한 오성월(吳惺月, 1865∼1943) 스님과 1921년 1월 충남 예산군 보덕사 주지를 마친 송만공(宋滿空, 1871∼1946) 스님은 이후 수덕사 주지(1931. 9. 26∼1933.9. 15). 금강산 마하연 주지 사직(1933∼1935. 8. 15.), 본사 마곡사 주지(1935. 10. 9∼1939.1.)를 역임하며 이판과 사판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들 오성월과 송만공 스님 및 백학명(白鶴鳴, 1867∼1929) 스님은 조선 불교계에서 저명한 고승이었다.

또한 백용성(白龍城, 1864∼1940) 스님은 봉익동 대각사를 운영하면서 포교사로 등록은 되어 있지만 일제는 대각사를 끝내 사찰로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백용성(白龍城), 한용운(韓龍雲), 기석호(奇石虎), 김남전(金南泉), 강도봉(康道峰), 이춘성(李春成) 및 전강(田岡)으로 알려진 정영신(鄭永信, 1898∼1975)을 포함한 나머지 스님들은 일제 강점기 말사 주지조차 역임하지 않았다. 따라서 선우공제회 발기인 81명 가운데 13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68명은 작은 암자의 주지조차 맡지 않은 선승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는 사암의 주지를 맡지 않음으로써 선승의 올곧은 길을 가고자 한 것이자 동시에 은연중에 일제의 사찰령 체제에 저항하고 있는 셈이다.

[주] -----

1) 원문은 ‘인각(獜角)’으로 오식.

2) 원문은 ‘진응(眞膺)’으로 오식.

3) 원문은 ‘볼 도(覩)’로 오식.

4) 윤철지(尹鐵只)는 발기인 명단의 윤철공(尹鐵空)의 오기일 가능성이 있다.

5) 나병규(羅炳奎는 나병구(羅炳龜)의 오기일 가능성이 크다.

6) 이고경(李古鏡, 1882~1943)은 석왕사 원산포교당 포교사(1916∼1921), 조선불교청년회 상무간사(1922. 5), 해인사 주지(1933. 9∼1938. 4.) 등을 역임하였고, 해인사 홍제암에 주석하며 1942년 12월 24일 경남 합천경찰서에 치안유지법위반으로 체포된 후 고문으로 1943년 1월 21일 순국하였다. 2011년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선학원백년사간행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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