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허 스님 민족주의 면모 확인할 일기 발간
태허 스님 민족주의 면모 확인할 일기 발간
  • 이혜조 기자
  • 승인 2012.02.27 11:1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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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가져와 3.1절 단행본 내기로 "사상 주류는 불교"
태허 스님이 1964년에 쓴 친필 일기를 엮어 3.1절에 <운암김성숙 혁명일기>라는 제목으로 책을 발간한다.

단행본으로 첫 선을 보이는 이 책은 중국에 있던 태허 스님의 세 아들이 보관하던 일기 중 일부를 스님의 친손자인 김덕천(金德川. 73)씨가 2008년 국내로 가져와 보관하던 것을 운암김성숙선생 기념사업회(회장 민성진)가 찾아내 출간하게 됐다.

이 단행본에서 1960년대의 사회상황과 태허 스님의 투철한 삶의 의지, 박정희 군사정권에 대한 비판, 가족애, 정치현실비판, 6.25 전쟁과 한일협정에 대한 비판 등을 읽을 수 있다.

▲ 중국에서 발굴한 태허 스님(운암 김성숙 선생)의 친필 일기. ⓒ운암사업회 제공
스님은 사회주의 진영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점이 부각된 나머지 지금까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크게 조명받지 못했다.

이번에 공개되는 일기에는 그간의 평가와 달리 좌우 대립을 넘어 남북통일을 추구한 민족주의자의 면모가 곳곳에 나타난다고 기념사업회는 설명했다.

단행본에서는 김성숙의 1960년대의 사회상황과 투철한 삶의 의지,
남북통일이라는 민족주의의 실현, 박정희 군사정권에 대한 비판, 가족애, 정치현실비판, 6.25 전쟁과 한일협정에 대한 비판 등을 읽을 수 있다.

사회주의 진영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점이 부각된 나머지 지금까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크게 조명받지 못했다.

공개되는 일기에는 그간의 평가와 달리 좌우 대립을 넘어 남북통일을 추구한 민족주의자의 면모가 곳곳에 나타난다고 기념사업회는 설명했다.

6월 25일자 일기에서 6.25전쟁의 성격을 놓고 “남.북한의 외세 의존주의자들이 미.소를 대리해 동족전쟁을 감행한 역사적으로 가장 무가치하고 추악한일”이라며 남.북한 정권을 모두 비판했다.

스님은 일기에서 ‘북괴’라는 표현을 여러 차례 쓰는 등 북한 정권에 우호적인 태도를 드러내지 않는 점 등을 미뤄볼 때 스님에게 붙은 좌익 독립운동가라는 수식어는 잘못됐음을 파악할 수 있다.

12월 23일자 일기에는 “나의 일관한 주장은 우리나라가 아직 독립이 되지 못하고 외국 세력하에서 전 민족이 신음하고 있으므로 독립운동을 계속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직은 논공행상할 때가 아니다”라며 독립유공자 표창 소식에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는 한편 당시 한반도 상황을 평가했다.

▲ 운암사업회가 3.1절에 발간하는 태허 스님의 친필 일기. ⓒ운암사업회 제공

스님은 3월1일자에서 “30여년간 목숨을 걸고 지켜오던 태극기와 삼일절을 친일파 민족 반역자들에게 빼앗겼다”며 “나는 매년 삼일절에 참석하지 않고 그 기념식을 마음속에서 저주하게 됐다”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야당과 대학생들의 한일협정 반대 시위를 박정희 정권이 탄압하자 스님은“5.16 이후 금일까지 군인들이 저지른 죄과는 반드시 국민 대중의 정당한 심판을 받게될 것”(6월3일), “계속 고조되는 학생 데모의 역사적 의의와 본질을 정당하게 이해하려 들지 않고 오직 권력으로 억압하면 된다는 파쇼적 사고방식”(6월4일), “외교적으로는 미국 일변도, 국내적으로는 독재”(10월 20일) 등 군사정권에 대한 비판을 쏟아냈다.

신운용 김성숙연구소장은“철저한 민족주의자였던 김성숙에게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는 민족주의 실천의 방법론이었고 그의 사상을 지배한 것은 불교였다”며 “민족주의 좌. 우파의 단결을 이끌어 낸 김성숙과 같은 이들이 해방 후 한국사회를 이끌었다면 6.25의 비극과 독재, 인권유린의 역사를 겪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민성진 회장은 발간사를 통해 “이 단행본을 시작으로 중국에 있는 해방 이전부터 1969년까지 작성된 운암 선생의 친필일기를 전집으로 출간할 예정이다"며 "발간되면 한국 독립운동사, 근대사에 새로운 자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운암 김성숙 선생(태허 스님)은?
중국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혁명가 전기인 님 웨일즈의 <아리랑>에서 ‘금강산에서 온 붉은승려 김충창’으로 더 잘 알려진 운암 김성숙.

운암 김성숙(법명 太虛 스님)은 출가 후 불교의 중도관과 민족주의에 입각해 일제하 독립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민초의 시대적 아픔을 함께하고 독립투쟁에 전력했다. 독립 후에는 극단적인 좌우 대립을 극복해 분단을 막기 위해 중도적인 노선을 견지하며 좌, 우익의 정치세력으로부터 핍박과 배척을 받기도 했으나 오직 우리 민족의 행복을 위한다는 일념을 결코 꺽거나 굽히지 않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평안북도 철산에서 1898년 태어난 스님은 대한독립학교에서 호국 위인들의 생애를 공부했다. 그는 독립학교가 문을 닫고 일본의 보통학교가 들어서자 학교에 가지 않고 조부로부터 직접 한문을 배워 학문의 밑거름을 삼았다. 이후 독립운동에 뛰어든 삼촌에게 독립군 이야기를 들으며 독립운동에 가담할 것을 결심한 그는 만주 신흥학교로 가기위해 무작정 집을 떠나 1916년 우연한 기회에 용문사(龍門寺. 경기도 양평) 풍곡 신원 선사를 만나 출가를 결심하고 월초 노스님으로부터 성숙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운암은 태허라는 법명을 받고 봉선사(奉先寺. 남양주 진접)에서 출가사문의 길에 들어선 후에 손병희, 한용운, 김법린 등과 인연을 맺으며 3.1운동에 가담했다. 몇몇 스님들과 함께 경기도 양주, 포천 지역에서 독립선언서를 돌리고 만세를 부르다 일본경찰에 체포돼 2년의 옥고를 치러야 했다.

1923년 5명의 스님과 함께 북경으로 건너간 스님은 북경민국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연구하는 등 학문적 기틀을 다졌고, 장건상, 양명, 장지락 등과 함께 창일당을 조직해 <혁명>이라는 잡지를 발행했다.

상해에서 항일운동을 계속하던 중 중국 각지에 흩어져있는 동지들을 규합해 1936년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조직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했다. 이어 1938년에는 약산 김원봉과 함께 조선의용대를 조직해 지도위원 겸 정치부장으로 활동하는 등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펼쳤다.

1942년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차장에 취임한 그는 1945년 대한민국임시정부국무위원으로 귀국해 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했다. 스님은 1946년 임시정부 인사들이 미군정 자문기관인 민주의원에 참가하는 것을 반대하면서 임시정부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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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허 2012-02-29 13: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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