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불교교류 비망록 이제, 다시 본다] 39. 2011년 고려대장경 천년의해 기념사업
[남북불교교류 비망록 이제, 다시 본다] 39. 2011년 고려대장경 천년의해 기념사업
  • 이지범 북한불교연구소 소장
  • 승인 2022.12.01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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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경 천년의 해를 열다”

2011년 음력 2월 보름은 아주 특별했던 날이다. 그날은 우리나라에서 대장경을 처음 판각하기 시작한 날이다. 1011년 2월 보름(음력) 충북 청주행궁에서 연등회 특별행사로 고려의 8대 현종 왕이 신하들과 함께 대장경 판각을 발원한 날이다. 즉, 《초조대장경》의 탄생일이다. 그로부터 11년 후, 고려 왕조는 1차 장경 판각 완성을 기념하기 위해 1022년 10월 개경 현화사에서 문하시랑평장사 강감찬이 판각 기문(제문)을 지어 올리는 등 대장경 판각 경축법회를 처음 열었다.

‘전쟁을 진압하는 대장경’이란 뜻의 진병대장경이라 불린 《초조대장경》이 세상에 첫선을 보인 다음, 고려 숙종 때인 1096년 전후 시기와 예종 때인 1120년경 대구 팔공산 부인사에 한역대장경 판본이 옮겨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불력(佛力)으로 국난 극복 등 기존의 조성 목적과도 다른 해석에서 그 타당성을 엿볼 수 있다. 즉, 필자는 《초조대장경》 판각 사업이 왕권 강화를 위한 고려 왕조의 국가재건프로젝트로 76년에 걸쳐 대장경 조성사업을 추진했다고 분석한다. 선재(禪齋)란 법명을 가졌던 현종 왕이 전라도 나주까지 피난한 후, 환도하던 때 청주에서 조성을 발원하며 시작돼 고려의 13대 선종 때에 완성됐다.

그러나 개경 흥왕사 대장전에 보관한 《제종교장》과 함께 1232년 6~9월 사이에 몽고의 침략으로 불에 타고 말았다. 그 후 《재조대장경》이 다시 판각되었지만, 《초조대장경》은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하나의 고려(One Korea)’를 위한 고려 왕실의 오랜 꿈과 고려 백성들의 착한 DNA가 팔만대장경에 다시 이식돼, 고려대장경으로 재탄생한 것은 천운인 동시에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그로부터 해인사판 팔만대장경은 고려대장경의 대명사가 됐다. 목판으로 만든 현존 최고의 대장경이다.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하게 남아 있는 완질의 목판 한역대장경이다. 그 시작은 971년 중국 북송의 《개보칙판대장경》에 이어서 두 번째로, 1011년 고려의 《초조대장경》 판각 사업으로 새로운 지식정보의 시대가 열렸다. 붓다의 말씀에 대한 제각기 해석과 비방을 방지하고, 영구 유통을 위한 불교경전의 결집에 이은 대장경 판각은 단순한 유통의 단계를 넘어 천년 동안 인쇄매체의 혁신을 이뤄냈다.

2011년에 시대를 아우르던 문화선진국의 위상을 제고하고, 문화민족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는 국가대표 상징물로 자리매김해온 대장경의 천년맞이 기념행사가 열렸다. 중국은 천년이 된 목판 대장경이 남아 있지 않아서, 일본은 결국 목판 대장경을 만들지 못해 대장경 천년 기념행사를 열지도 열 수도 없었다. 남과 북은 함께 대장경 천년 기념행사를 가졌다. 우리는 2011년도에 어떠했는가? 다시 반문해 볼일도 있겠지만, 남북은 대장경 천년의 해를 기념해 공동행사를 열었다. 대장경 천년의 시대를 맞이한 그때 남북불교 교류의 현장을 찾아본다.

팔만대장경 천년기념 조국통일기원 남북불교도 합동법회(2011.9.5. 묘향산 보현사). 사진: 합동취재단





팔만대장경 천년기념 남북불교도 합동법회(2011.9.5. 묘향산 보현사 대웅전). 사진: 합동취재단



고려대장경 천년의 해

2011년은 고려대장경 천년을 기념하는 한 해였다. 고려 시대에는 1011년부터 《초조대장경》(진병대장경), 1091년부터 《제종교장》(속장경), 1236년부터 《재조대장경》(팔만대장경)이란 3종의 대장경이 만들어졌다. 그 합친 이름이 ‘고려대장경’이다. 고려 때 만들어진 3종의 대장경을 한꺼번에 묶어 부르는 명칭이다. 목판에다 처음 새겼다고 하여 붙인 초조본은 1011년 2월 15일(발원일), 경・율・논의 주석서를 새긴 교장본은 1101년 10월 5일(완료일)이다. 초조본과 교장본이 소실된 다음, 다시 새겼다고 하여 붙인 재조본은 1251년 9월 25일(완성일)로 그 음력 날짜가 탄생일이다.

‘2011년 고려대장경 천년의 해’는 《초조대장경》의 탄생일을 기준으로 했다. 원칙적으로 고려 초조대장경 천년의 해가 맞은 제목이다. 그해 동안 각종행사에 제목으로 쓰인 고려대장경 천년의 해 등 ‘고려대장경’이라 쓴 것은 바른 표현이었다. 하지만 경남 합천군이나 해인사 측에서 《재조대장경》을 중심으로 ‘팔만대장경 천년 기념’이란 명칭들을 쓴 것은 분명 잘못된 표기였을 뿐만 아니라, 국민들을 호도한 것이다. 탄생일로 할 때 760년이, 판각 개시일로 할 때도 775년이 더 남아 있던 시점이기 때문이다. 또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은 고려대장경이라고 할 수 있지만, 고려대장경을 팔만대장경이라고만 부르지 않는 사실은 별칭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안타깝게도 2011년 고려대장경 천년의 해와 관련한 국내 행사는 이원화됐다. 대구광역시와 고려대장경연구소를 중심으로 한 《초조대장경》 인경본 복원사업과 학술대회, 기념 퍼레이드, 일본 남선사 등과의 국제교류는 원래 기념사업의 취지에 부합했다. 경상남도와 해인사를 중심으로 한 기념관 건립사업 및 기념행사는 겉으로 고려대장경 이름을 사용했지만, 내용적으로는 해인사와 팔만대장경 홍보사업에 더 치중됐다. 더욱이 ‘팔만대장경 천년’이란 제목을 사용하거나, 각종 행사를 개최한 것은 잘못된 기록으로 역사의 선택적인 오점을 남기게 됐다.

천년 행사의 시작은 고려대장경연구소 주최로 2007년 4월 2일 서울시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열린 ‘2011년 고려대장경 천년의 해 선포식’을 통해 첫걸음을 뗐다. 이날 선포식에서 이어령 문화부 초대 장관(2022.2.26. 타계)은 “고려대장경 천년은 단순한 천년이 아니고, 인간이 경험할 수 없는 세계이다. 이를 기념하는 일은 우리 민족의 행운이자 염원입니다. 종교를 넘어 국가 차원에서 문화예술계가 함께해야 할 사업이고, 우리나라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절호의 경축행사로 준비해야 합니다.”라고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2010년 6월 7일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중앙홀에서 열린 ‘한일 공동 초조대장경 복원간행위원회 발족식’ 축사에서 “신라 천년이니, 조선 오백 년이니 하는 시간은 아주 극히 드문 예로서 흔히 한 왕조는 백 단위로밖에 계산이 안 되는데, 천 단위로 계산되는 것이 바로 국력을 넘어선 불력(佛力), 문화의 힘, 종교의 힘입니다. 몽고병의 무력보다 우리는 더 긴 시간인 문화의 소프트 파워로 국난을 극복한 것입니다.”라고 천년의 해를 기념하는 초조대장경 복원사업에 대해 경축했다.

이러한 고려대장경 천년의 해에 관한 남북 공동행사는 2005년 9월에 처음 논의됐다. 원택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명진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상임본부장 등과 함께 평양을 방문한 종림 고려대장경연구소 이사장은 묘향산 보현사에서 향후 남북 공동행사에 대해 처음으로 운을 뗐다. 남측 방문단은 심상진 조불련 부위원장과 리영호 책임부원, 청백 보현사 부주지 등 30여 명과 보현사 대웅전에서 함께 예경하고 간담회를 가졌다. 그때 종림 이사장은 다가오는 2011년에 고려대장경 천년의 해를 기념할 수 있는 남북 공동사업을 진행할 수 있도록 북측에 처음 알렸다. 고려대장경연구소는 2005년 10월 중국 심양에서 북측 조선사회과학원과 공동으로 ‘팔만대장경 번역에 관한 국제학술회의’를 처음 가지면서 교류를 이었다. 결실은 2011년 9월에 맺혔다.

하지만 조계종 총무원과 해인사 주도로 팔만대장경의 위상만이 주목받음으로써 ‘초조대장경 판각 천년의 해’ 기념사업은 뒷전이었다. 당시 북녘에서도 묘향산 보현사 팔만대장경보존고에 실물 인쇄본으로 남아 있는 해인사판 팔만대장경의 위상으로 말미암아 초조대장경에 관한 교류는 일절 거론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초조대장경》의 본향인 개성이나 팔공산 부인사에서도 그 의미를 못 살린 것은 물론, 또 축소됐다. 심지어 북측 조불련에서도 《초조대장경》 판각 의의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했다. 더 안타까운 사실은 남북 당국과 학계에서조차 초조대장경의 가치와 문화콘텐츠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그 천년의 해를 맞는 국가적인 문화정책 부재까지 드러냈다는 점이다.

천년 만에 온 기회, 절호의 찬스였던 ‘고려대장경 천년의 해’에 관한 국가적인 사업은 영영 할 수 없게 됐다. 단일 품목의 천년 기록유산을 간직한 나라는 그 사례를 찾아볼 수 없다.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고려대장경과 같은 완제품의 문화유산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중국과 일본이 대장경 천년 기념행사를 개최할 수 없었던 진짜 이유다. 후손들에게도 천년 후에나 있을 법하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다시 누릴 수 없는 가까운 옛날의 미래적 유산으로 남게 됐다.



묘향산 보현사 방문(2005.9.21. 좌로부터 청운 최형민 보현사 주지, 원택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종림 고려대장경연구소 이사장). 사진: 이지범 제공





평양 인민학교 학생들의 묘향산 력사박물관 방문(2007.9.30. 묘향산 수충사). 사진: Moravius 페이스북





반야심경 목판 전달식(2011.9.4. 평양 조불련 청사. 좌로부터 선각 해인사 주지, 자승 조계종 총무원장, 심상진 조불련 위원장). 사진: 합동취재단



대장경 천년기념 남북법회

고려대장경 천년을 기념하는 남북 합동법회가 묘향산 보현사에서 처음 열렸다. 2011년 9월 5일 오전 10시 묘향산 보현사 대웅전에서 열린 ‘팔만대장경 판각 1000년 기념 조국통일기원 남북불교도 합동법회’에는 남측 방문단 37명을 비롯한 조불련 중앙위원회, 묘향산 보현사 승려들과 평북 향산군 향산읍 불자 등 150여 명이 참가했다.

그해 9월 초, 조계종과 해인사 측이 낸 보도자료에 표기한 ‘팔만대장경 판각 1천년 기념 보현사 고불법회’라는 행사 명칭에서부터 ‘팔만대장경 판각 천년’이란 생뚱맞은 행사 제목이 묘향산 보현사 대웅전 처마에 걸렸다. 그 당시에 760년이란 연도 차이가 있는 팔만대장경 대신에 역사 기록대로 ‘고려대장경 판각 천년’이란 명칭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양측에게 남은 역사적 오점이다. 단순한 착각이나 오류가 아닌 조계종 총무원과 해인사 측에서 더 돋보이려고 한 기획적 명칭과 북측이 헛갈리도록 하려는 의도가 반영되었다면 분명 잘못된 과거이고, 참회해야 할 일이다.

2011년 9월 5일 묘향산 보현사에서 열린 남북 합동법회는 북측 조불련이 조국통일기원에 방점을 두었다면, 남측에서는 팔만대장경 천년 기념에 더 의미를 둔 각기 지향점을 달리했던 행사였다. 하지만 이날 합동법회는 이명박 정권이 2010년에 대북 제재로 결행한 5.24조치 이후, 처음으로 방북을 허용했다는 점과 고려대장경 천년맞이를 위해 남북불교계가 함께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의의가 있다. 이 합동법회가 개경 현화사・흥왕사 등이 폐사지로 남은 개성지역이 아닌 묘향산 보현사에서 개최된 것은 첫째, 묘향산 용주봉의 진신사리탑과 팔만대장경・삭발한 승려와 불자들이 있는 북녘의 삼보사찰로 그 위용을 갖춘 현존하는 사찰이다. 둘째, 1978년 건립된 팔만대장경보존고에 해인사판 팔만대장경 인쇄본과 다수의 목판 등을 보존하는 상징적인 사찰이다. 셋째, 외국인과 남측 관광객에게 이미 개방된 명승지라는 점 이외에도 향산호텔・청천려관 등 숙박시설과 제1, 제2의 국제친선전람관을 비롯한 묘향산 관광자원이 풍부하고 개발된 곳이라는 점에서 남북불교계 합의로 선정됐다.

그해 9월 5일 북측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한 남북 합동법회는 조불련 심상진 위원장을 비롯한 리규룡 서기장 등과 보현사 관리인(주지) 청운 최형민, 금강굴 백운・취봉, 하비로암 진명 등을 비롯한 향산읍내 주민 150여 명이 참석했다. 남측에서는 자승 총무원장을 비롯한 영담 총무부장(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상임공동대표), 혜경 사회부장 등 조계종 총무원 집행부, 토진 조계사 주지와 선각 해인사 주지 등 7개 교구본사 주지 등을 비롯해 인명진 갈릴리교회 담임목사, 박남수 동학민족통일회 대표의장, 곽진만 세계평화재단 부이사장 등 37명이 참가했다.

묘향산 보현사에서 열린 남북불교도 합동법회는 2011년 9월 5일 오전 9시 40분경 대웅전 앞마당에 도열한 향산읍내 불자들의 환영 박수를 받으며, 남북측 대표단이 함께 입장하고, 류인명 조불련 책임부원과 혜경 조계종 사회부장의 사회로 개막했다. 청백 보현사 부주지의 집전에 맞춰 삼귀의와 반야심경 봉독에 이어 남북 대표들의 헌향, 혜자 도선사 주지의 고불문이 낭독됐다. 심상진 조불련 위원장은 환영사에서 “오늘 합동법회가 민족의 화해와 단합, 협력과 연대를 강화하고, 조국통일을 앞당겨나가며 팔만대장경을 더 잘 보존하고 빛내는 데 기여하는 또 하나의 통일불사가 되리라는 확신을 표명한다.”고 말했다. 그다음, 자승 조계종 총무원장이 봉행사를, 청운 보현사 주지와 선각 해인사 주지가 기념 인사를 했다. 차금철 책임부원과 토진 조계사 주지는 “우리 민족끼리의 기치 밑에 불심 화합하여 역사적인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을 철저히 고수 이행할 데 대하여”를 강조하는 공동발원문을 낭독했다. 대웅전 돌계단에서 다 같이 기념촬영을 마친 남측 대표단은 팔만대장경보존고 수장고 관람 및 수충사・영산전・관음전 등을 참배했다. 이어 만폭동으로 이동해 하비로암을 순례한 후, 평양으로 출발하면서 마무리됐다.

그때 남측 대표단의 평양방문에 대해 MB정권의 통일부는 “순수 종교적 목적의 방북이라는 점과 올해가 민족유산인 팔만대장경 판각 1천 년이라는 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방북을 승인했다.” 남측 방북단 37명은 그해 9월 3일 중국 베이징을 경유해 오후 4시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 고려호텔에서 조불련이 주최한 저녁 환영만찬을 시작으로 첫 일정을 가졌다. 4일 대표단은 평양 조불련 청사를 방문해 해인사 측에서 새로 제작한 해인사본 《금강경》 목판본 1질(9판)과 《반야심경》(10판), 바람방울(風磬) 을 전달했다. 이어 대성산 광법사를 참배했다. 5일 날은 보현사 합동법회를 개최하고, 6일에는 백두산 천지관광 등을 진행하고, 7일 중국 선양을 거쳐 귀국했다. 심상진 조불련 위원장 등은 4박 5일 일정 가운데 첫날 평양 공항에 마중 나온 것을 시작으로, 백두산 천지 관광을 제외한 주요 일정에 동행했다.

지난 2011년 고려 초조대장경 판각 천년의 해는 남북이 함께 문을 열었지만, 서로 다른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나라만이 누릴 수 있는 천년의 기회를 궁색하게 만들어 버렸다. 고려인들이 만들어 준 천년의 시간으로도 조국 통일의 문을 열어내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후회할 일이다.

# 다음 편은 ‘2011년 평양 7대 종단방문단’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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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대장경 천년기념 조국통일기원 남북불교도 합동법회(2011.9.5. 묘향산 보현사). 사진: 합동취재단
팔만대장경 천년기념 남북불교도 합동법회(2011.9.5. 묘향산 보현사 대웅전). 사진: 합동취재단
팔만대장경 천년기념 남북불교도 합동법회(2011.9.5. 묘향산 보현사 대웅전). 사진: 합동취재단

고려대장경 천년의 해

2011년은 고려대장경 천년을 기념하는 한 해였다. 고려 시대에는 1011년부터 《초조대장경》(진병대장경), 1091년부터 《제종교장》(속장경), 1236년부터 《재조대장경》(팔만대장경)이란 3종의 대장경이 만들어졌다. 그 합친 이름이 ‘고려대장경’이다. 고려 때 만들어진 3종의 대장경을 한꺼번에 묶어 부르는 명칭이다. 목판에다 처음 새겼다고 하여 붙인 초조본은 1011년 2월 15일(발원일), 경・율・논의 주석서를 새긴 교장본은 1101년 10월 5일(완료일)이다. 초조본과 교장본이 소실된 다음, 다시 새겼다고 하여 붙인 재조본은 1251년 9월 25일(완성일)로 그 음력 날짜가 탄생일이다.

‘2011년 고려대장경 천년의 해’는 《초조대장경》의 탄생일을 기준으로 했다. 원칙적으로 고려 초조대장경 천년의 해가 맞은 제목이다. 그해 동안 각종행사에 제목으로 쓰인 고려대장경 천년의 해 등 ‘고려대장경’이라 쓴 것은 바른 표현이었다. 하지만 경남 합천군이나 해인사 측에서 《재조대장경》을 중심으로 ‘팔만대장경 천년 기념’이란 명칭들을 쓴 것은 분명 잘못된 표기였을 뿐만 아니라, 국민들을 호도한 것이다. 탄생일로 할 때 760년이, 판각 개시일로 할 때도 775년이 더 남아 있던 시점이기 때문이다. 또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은 고려대장경이라고 할 수 있지만, 고려대장경을 팔만대장경이라고만 부르지 않는 사실은 별칭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안타깝게도 2011년 고려대장경 천년의 해와 관련한 국내 행사는 이원화됐다. 대구광역시와 고려대장경연구소를 중심으로 한 《초조대장경》 인경본 복원사업과 학술대회, 기념 퍼레이드, 일본 남선사 등과의 국제교류는 원래 기념사업의 취지에 부합했다. 경상남도와 해인사를 중심으로 한 기념관 건립사업 및 기념행사는 겉으로 고려대장경 이름을 사용했지만, 내용적으로는 해인사와 팔만대장경 홍보사업에 더 치중됐다. 더욱이 ‘팔만대장경 천년’이란 제목을 사용하거나, 각종 행사를 개최한 것은 잘못된 기록으로 역사의 선택적인 오점을 남기게 됐다.

천년 행사의 시작은 고려대장경연구소 주최로 2007년 4월 2일 서울시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열린 ‘2011년 고려대장경 천년의 해 선포식’을 통해 첫걸음을 뗐다. 이날 선포식에서 이어령 문화부 초대 장관(2022.2.26. 타계)은 “고려대장경 천년은 단순한 천년이 아니고, 인간이 경험할 수 없는 세계이다. 이를 기념하는 일은 우리 민족의 행운이자 염원입니다. 종교를 넘어 국가 차원에서 문화예술계가 함께해야 할 사업이고, 우리나라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절호의 경축행사로 준비해야 합니다.”라고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2010년 6월 7일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중앙홀에서 열린 ‘한일 공동 초조대장경 복원간행위원회 발족식’ 축사에서 “신라 천년이니, 조선 오백 년이니 하는 시간은 아주 극히 드문 예로서 흔히 한 왕조는 백 단위로밖에 계산이 안 되는데, 천 단위로 계산되는 것이 바로 국력을 넘어선 불력(佛力), 문화의 힘, 종교의 힘입니다. 몽고병의 무력보다 우리는 더 긴 시간인 문화의 소프트 파워로 국난을 극복한 것입니다.”라고 천년의 해를 기념하는 초조대장경 복원사업에 대해 경축했다.

이러한 고려대장경 천년의 해에 관한 남북 공동행사는 2005년 9월에 처음 논의됐다. 원택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명진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상임본부장 등과 함께 평양을 방문한 종림 고려대장경연구소 이사장은 묘향산 보현사에서 향후 남북 공동행사에 대해 처음으로 운을 뗐다. 남측 방문단은 심상진 조불련 부위원장과 리영호 책임부원, 청백 보현사 부주지 등 30여 명과 보현사 대웅전에서 함께 예경하고 간담회를 가졌다. 그때 종림 이사장은 다가오는 2011년에 고려대장경 천년의 해를 기념할 수 있는 남북 공동사업을 진행할 수 있도록 북측에 처음 알렸다. 고려대장경연구소는 2005년 10월 중국 심양에서 북측 조선사회과학원과 공동으로 ‘팔만대장경 번역에 관한 국제학술회의’를 처음 가지면서 교류를 이었다. 결실은 2011년 9월에 맺혔다.

하지만 조계종 총무원과 해인사 주도로 팔만대장경의 위상만이 주목받음으로써 ‘초조대장경 판각 천년의 해’ 기념사업은 뒷전이었다. 당시 북녘에서도 묘향산 보현사 팔만대장경보존고에 실물 인쇄본으로 남아 있는 해인사판 팔만대장경의 위상으로 말미암아 초조대장경에 관한 교류는 일절 거론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초조대장경》의 본향인 개성이나 팔공산 부인사에서도 그 의미를 못 살린 것은 물론, 또 축소됐다. 심지어 북측 조불련에서도 《초조대장경》 판각 의의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했다. 더 안타까운 사실은 남북 당국과 학계에서조차 초조대장경의 가치와 문화콘텐츠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그 천년의 해를 맞는 국가적인 문화정책 부재까지 드러냈다는 점이다.

천년 만에 온 기회, 절호의 찬스였던 ‘고려대장경 천년의 해’에 관한 국가적인 사업은 영영 할 수 없게 됐다. 단일 품목의 천년 기록유산을 간직한 나라는 그 사례를 찾아볼 수 없다.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고려대장경과 같은 완제품의 문화유산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중국과 일본이 대장경 천년 기념행사를 개최할 수 없었던 진짜 이유다. 후손들에게도 천년 후에나 있을 법하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다시 누릴 수 없는 가까운 옛날의 미래적 유산으로 남게 됐다.

묘향산 보현사 방문(2005.9.21. 좌로부터 청운 최형민 보현사 주지, 원택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종림 고려대장경연구소 이사장). 사진: 이지범 제공
묘향산 보현사 방문(2005.9.21. 좌로부터 청운 최형민 보현사 주지, 원택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종림 고려대장경연구소 이사장). 사진: 이지범 제공
평양 인민학교 학생들의 묘향산 력사박물관 방문(2007.9.30. 묘향산 수충사). 사진: Moravius 페이스북
평양 인민학교 학생들의 묘향산 력사박물관 방문(2007.9.30. 묘향산 수충사). 사진: Moravius 페이스북
반야심경 목판 전달식(2011.9.4. 평양 조불련 청사. 좌로부터 선각 해인사 주지, 자승 조계종 총무원장, 심상진 조불련 위원장). 사진: 합동취재단
반야심경 목판 전달식(2011.9.4. 평양 조불련 청사. 좌로부터 선각 해인사 주지, 자승 조계종 총무원장, 심상진 조불련 위원장). 사진: 합동취재단

대장경 천년기념 남북법회

고려대장경 천년을 기념하는 남북 합동법회가 묘향산 보현사에서 처음 열렸다. 2011년 9월 5일 오전 10시 묘향산 보현사 대웅전에서 열린 ‘팔만대장경 판각 1000년 기념 조국통일기원 남북불교도 합동법회’에는 남측 방문단 37명을 비롯한 조불련 중앙위원회, 묘향산 보현사 승려들과 평북 향산군 향산읍 불자 등 150여 명이 참가했다.

그해 9월 초, 조계종과 해인사 측이 낸 보도자료에 표기한 ‘팔만대장경 판각 1천년 기념 보현사 고불법회’라는 행사 명칭에서부터 ‘팔만대장경 판각 천년’이란 생뚱맞은 행사 제목이 묘향산 보현사 대웅전 처마에 걸렸다. 그 당시에 760년이란 연도 차이가 있는 팔만대장경 대신에 역사 기록대로 ‘고려대장경 판각 천년’이란 명칭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양측에게 남은 역사적 오점이다. 단순한 착각이나 오류가 아닌 조계종 총무원과 해인사 측에서 더 돋보이려고 한 기획적 명칭과 북측이 헛갈리도록 하려는 의도가 반영되었다면 분명 잘못된 과거이고, 참회해야 할 일이다.

2011년 9월 5일 묘향산 보현사에서 열린 남북 합동법회는 북측 조불련이 조국통일기원에 방점을 두었다면, 남측에서는 팔만대장경 천년 기념에 더 의미를 둔 각기 지향점을 달리했던 행사였다. 하지만 이날 합동법회는 이명박 정권이 2010년에 대북 제재로 결행한 5.24조치 이후, 처음으로 방북을 허용했다는 점과 고려대장경 천년맞이를 위해 남북불교계가 함께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의의가 있다. 이 합동법회가 개경 현화사・흥왕사 등이 폐사지로 남은 개성지역이 아닌 묘향산 보현사에서 개최된 것은 첫째, 묘향산 용주봉의 진신사리탑과 팔만대장경・삭발한 승려와 불자들이 있는 북녘의 삼보사찰로 그 위용을 갖춘 현존하는 사찰이다. 둘째, 1978년 건립된 팔만대장경보존고에 해인사판 팔만대장경 인쇄본과 다수의 목판 등을 보존하는 상징적인 사찰이다. 셋째, 외국인과 남측 관광객에게 이미 개방된 명승지라는 점 이외에도 향산호텔・청천려관 등 숙박시설과 제1, 제2의 국제친선전람관을 비롯한 묘향산 관광자원이 풍부하고 개발된 곳이라는 점에서 남북불교계 합의로 선정됐다.

그해 9월 5일 북측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한 남북 합동법회는 조불련 심상진 위원장을 비롯한 리규룡 서기장 등과 보현사 관리인(주지) 청운 최형민, 금강굴 백운・취봉, 하비로암 진명 등을 비롯한 향산읍내 주민 150여 명이 참석했다. 남측에서는 자승 총무원장을 비롯한 영담 총무부장(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상임공동대표), 혜경 사회부장 등 조계종 총무원 집행부, 토진 조계사 주지와 선각 해인사 주지 등 7개 교구본사 주지 등을 비롯해 인명진 갈릴리교회 담임목사, 박남수 동학민족통일회 대표의장, 곽진만 세계평화재단 부이사장 등 37명이 참가했다.

묘향산 보현사에서 열린 남북불교도 합동법회는 2011년 9월 5일 오전 9시 40분경 대웅전 앞마당에 도열한 향산읍내 불자들의 환영 박수를 받으며, 남북측 대표단이 함께 입장하고, 류인명 조불련 책임부원과 혜경 조계종 사회부장의 사회로 개막했다. 청백 보현사 부주지의 집전에 맞춰 삼귀의와 반야심경 봉독에 이어 남북 대표들의 헌향, 혜자 도선사 주지의 고불문이 낭독됐다. 심상진 조불련 위원장은 환영사에서 “오늘 합동법회가 민족의 화해와 단합, 협력과 연대를 강화하고, 조국통일을 앞당겨나가며 팔만대장경을 더 잘 보존하고 빛내는 데 기여하는 또 하나의 통일불사가 되리라는 확신을 표명한다.”고 말했다. 그다음, 자승 조계종 총무원장이 봉행사를, 청운 보현사 주지와 선각 해인사 주지가 기념 인사를 했다. 차금철 책임부원과 토진 조계사 주지는 “우리 민족끼리의 기치 밑에 불심 화합하여 역사적인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을 철저히 고수 이행할 데 대하여”를 강조하는 공동발원문을 낭독했다. 대웅전 돌계단에서 다 같이 기념촬영을 마친 남측 대표단은 팔만대장경보존고 수장고 관람 및 수충사・영산전・관음전 등을 참배했다. 이어 만폭동으로 이동해 하비로암을 순례한 후, 평양으로 출발하면서 마무리됐다.

그때 남측 대표단의 평양방문에 대해 MB정권의 통일부는 “순수 종교적 목적의 방북이라는 점과 올해가 민족유산인 팔만대장경 판각 1천 년이라는 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방북을 승인했다.” 남측 방북단 37명은 그해 9월 3일 중국 베이징을 경유해 오후 4시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 고려호텔에서 조불련이 주최한 저녁 환영만찬을 시작으로 첫 일정을 가졌다. 4일 대표단은 평양 조불련 청사를 방문해 해인사 측에서 새로 제작한 해인사본 《금강경》 목판본 1질(9판)과 《반야심경》(10판), 바람방울(風磬) 을 전달했다. 이어 대성산 광법사를 참배했다. 5일 날은 보현사 합동법회를 개최하고, 6일에는 백두산 천지관광 등을 진행하고, 7일 중국 선양을 거쳐 귀국했다. 심상진 조불련 위원장 등은 4박 5일 일정 가운데 첫날 평양 공항에 마중 나온 것을 시작으로, 백두산 천지 관광을 제외한 주요 일정에 동행했다.

지난 2011년 고려 초조대장경 판각 천년의 해는 남북이 함께 문을 열었지만, 서로 다른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나라만이 누릴 수 있는 천년의 기회를 궁색하게 만들어 버렸다. 고려인들이 만들어 준 천년의 시간으로도 조국 통일의 문을 열어내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후회할 일이다.

# 다음 편은 ‘2011년 평양 7대 종단방문단’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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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범
경북 경주 출생으로 1984년부터 불교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참여하다가 1990년 초, 법보종찰 해인사에 입산 환속했다. 1994년부터 남북불교 교류의 현장 실무자로 2000년부터 평양과 개성・금강산 등지를 다녀왔으며, 현재는 평화통일불교연대 운영위원장과 북한불교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남북불교교류 60년사’ 등과 논문으로 ‘북한 주민들의 종교적 심성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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