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불교교류 비망록 이제, 다시 본다] 36. 2009년 금강산 합동법회
[남북불교교류 비망록 이제, 다시 본다] 36. 2009년 금강산 합동법회
  • 이지범 북한불교연구소 소장
  • 승인 2022.10.17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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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이 함께 촛불 켜다”

조선중앙통신사가 발간한 1950년판 《조선중앙연감》에는 “1945년 12월 26일 북조선불교도련맹이 창립했다.”고 기록했으나, 출범식 장소에 관해 명기하지 않았다.

그 연맹의 〈강령〉에는 “첫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과 정부 정강을 받들고, 이것을 철저히 실천 실현하기 위하여 투쟁하며, 조국의 국토 완정과 완전 자주독립을 위하여 적극 노력한다. 둘째, 조국의 통일독립과 민주 발전을 조해하는 일체 외래 제국주의 침략 세력과 그 앞잡이인 친일파 민족 반역자 및 교단 반역자들과 과감히 싸우며, 일본제국주의 사상 잔재와 봉건 유습을 철저히 숙청하기 위하여 투쟁한다. 셋째, 민주주의 민족통일 전선의 강화를 위하여 노력하며, 그 일환으로서 모든 민주 과업을 성실히 실천한다. 넷째, 조국의 국토를 방위하며, 인민의 이익을 옹호하는 인민군대에 대하여 극력 원조한다. 다섯째, 세계의 평화를 사랑하며, 다른 민족의 독립을 존중하는 쏘베트 국가 및 제민주주의 국가의 인민들과의 친선을 위하여 적극 노력한다. 여섯째, 불교도들에게 노력 정신을 앙양시킴으로써 조국 부강을 위한 인민경제 부흥발전에 적극 참여한다. 일곱째, 불교문화를 민주주의 방향으로 이끌며 시대에 적응한 신교학(新敎學)을 수립함으로써 민족문화 발전에 기여한다.” 또 연맹의 중앙지도기관에는 “위원장 김세률, 부위원장 한춘・장상봉, 위원 김세률・김해진・장법섬 외 30명”으로 기록됐다.

이것은 조불련의 탄생과 성격, 조직을 엿볼 수 있는 유일한 기록이다. 〈강령〉 내용의 차이는 북측 정권이 1948년 9월 9일(9.9절)에 수립됐으나, 1945년 9월 2일 이전까지를 자국이 잇는 역사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또한 남북불교 교류의 대상으로 파트너십을 이루는 조불련의 정체성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는 근거이다. 다시 말해서 북측 조불련은 공화국의 사회주의 건설에 복무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로서 조국 통일과 새로운 불교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1945년 12월 조불련의 결성 목적에 따른 표본들은 2000년대를 전후해서 추진한 통일사업과 남북불교 교류에 있다. 여기에 단체의 정체성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분단 이후 최대의 남북공조 협력사업으로 추진된 금강산 신계사 및 개성 영통사 복원사업을 위한 합의서 등에서도 북한이란 용어는 없고, 북측만이 등장한다.

휴전선 이북 지역이라는 뜻의 국가 명칭으로 쓰는 북한이란 용어에 대해 북측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국가로서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해석하고, 북한이라 부르고 쓰는 것을 일절 용인하지 않는다. 그간 양국간의 외교 또는 문화 교류 등에서는 ‘남측’(대한민국)과 대비하여 ‘북측’(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호칭을 사용했다. 북측에서는 자국을 공화국・조국 등으로 부르고, 북측 지역을 공화국 북반부 혹은 북조선이라 표현한다.

국가와 단체들의 정체성은 국가 명칭과 목적사업 등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남북불교 교류 초기에 주로 통일운동과 협력사업에서 볼 수 있던 정체성은 2008년 7월 금강산 민간인 피살사건을 계기로 전면 중단된 금강산관광에서 더욱 공고화됐다. 그해 10월에는 남북협력사업의 모델로 꼽히는 금강산 신계사 복원 1돌 기념법회까지 열지 못할 만큼, 이때 출구전략을 확실하게 마련하지 못한 남북교류는 지금까지도 꽁꽁 묶여 있다.

이런 국면에서도 금강산 신계사와 개성 영통사에서 개최한 복원 2돌 기념법회는 남북교류를 잇고, 인적교류의 가교를 열었다. 조국분단 이후, 미증유(未曾有)의 교류 기록으로 남아 있는 남북한 합동법회와 그때 인도적 지원사업에 대해 다시 살펴본다.

금강산 신계사 표석과 복원불사 현장(2005.7.12.). 사진 =금수강산(2021년 4월호)





금강산 신계사 복원 2돌 합동법회(2009.10.13.), 사진=민추본 홈페이지





금강산 신계사 합동법회 발원문 낭독(2009.10.13. 좌측 김명희 조불련 전국신도회 상무위원, 우측 손안식 조계종 중앙신도회 상임부회장), 사진=민추본 홈페이지



또 만남을 이룬 남북불교

2008년 7월 11일 새벽에 발생한 금강산 민간인 피살사건은 모든 남북관계를 빨아들인 블랙홀(Black hole)이었다. 이런 징후는 그 이전부터 균열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조계종단에서 파견한 금강산 신계사의 제정 불사도감이 2007년 11월 14일 외금강산에서 철수한 다음, 지관 조계종 총무원장은 2008년 2월 25일 금강산 신계사 복원추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신계사 공동운영에 대해서는 더 이상 북측에 어떤 요구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 상태에서는 앞으로 어떤 대북사업도 할 수 없다.”고 북측의 과도한 요구에 대한 교류 중단을 선언할 만큼 강경 입장으로 급선회했다. 그 배경에는 북측의 신계사 공동운영 거부와 무관치 않음을 시사했다.

그러나 지관 조계종 총무원장은 2007년 6월 22일 첫 내금강 순례를 하면서 《불교신문》(2007.6.27.)과의 인터뷰에서 “어찌 됐든 자주 접촉해야만, 통일이 가까워지는 법이다. 예를 들면 5년간 신계사 공사를 하면서 북측과 남측 인부가 함께 일을 했는데, 초기에는 점심을 따로따로 먹었단다. 그런데 남측에서 라면을 끓여 함께 먹자고 하니, 처음에는 서먹서먹하다가 그 맛과 사람이 좋아. 이제는 함께 라면을 끓여 먹으며 가까운 사이가 됐다고 들었다. 그런 면에서는 남북은 더욱 가까워져야 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자꾸 멀리하면 가까워질 새가 없다.”라고, 그때 일화를 소개하는 등 민간의 인적 교류에 관한 중요성을 일깨운 바 있다.

그 당시에 남북불교계의 보이지 않은 밀당은 2009년 3월 28일 중국 장쑤성 우시(無錫)에서 열린 제2차 세계불교포럼 회동으로, 부처님오신날 봉축 행사로 남북 공동발원문 채택과 동시발표 등을 비롯해 평양, 금강산과 개성에서 또 만남의 결실을 이루게 됐다.

2009년 5월 중순, 북측 조불련 중앙위원회는 공석이던 부위원장에 연암 리규룡 책임부원을 선출하는 등 내부정비를 단행했다. 남측 조계종 중앙신도회와 조선왕실의궤 환수위원회는 2008년 8월에 이어서 2009년 5월 19일~23일 제2차 평양방문단을 파견하고, 그해 5월 22일 오전 10시 평양 대성산 광법사에서 ‘일제가 략탈해 간 문화재 반환촉구 북남불교도 합동법회’를 개최하는 등 남북공조 연대사업을 추진했다.

금강산관광이 2008년 7월 12일부터 전면 중단된 가운데, 같은 해 10월 13일 금강산 신계사에서 남북한 합동법회를 열고 함께 촛불을 켰다. 이날 금강산 신계사 합동법회는 첫째, 남측 인사들의 금강산 방문이라는 점과 둘째, 연암 리규룡 조불련 부위원장과 진각 송정심 신계사 주지를 비롯한 절에 상주하는 삭발 승려들의 데뷔(Début) 무대였다. 이날 오후 2시에 열린 ‘금강산 신계사 복원 2돐 조국통일기원 북남불교도 합동법회’는 연암 조불련 신임 부위원장과 남측의 정념 조계종 사회부장을 좌장으로 하여 조불련 측의 15명과 남측의 진관・해혜・탁연 등 종단 승려와 소임자, 현대아산 직원 등 50여 명이 참가했다.

청담 류인명 조불련 책임부원, 재안 조계종 사회국장의 공동 사회로 개회한 이날 신계사 복원 2돌 합동법회는 진효 조계종 민추본 사무총장과 신계사 신임 주지(관리인)를 맡은 진각대사가 종각에서 5번의 범종 타종을 함께했다. 삼귀의・반야심경 봉독과 헌화, 찬불가 등 입재 의례에 이은 연암 부위원장의 인사말과 정념 사회부장의 기념사에 이은 정서정 조불련 서기장의 공동선언문 낭독, 손안식 조계종 중앙신도회 상임부회장(2022.9.13. 타계)과 성죽 김명희 조불련 전국신도회 상무위원이 공동발원문을 낭독했다. 이어 그간 통일운동에 매진해온 진관 불교인권위원회 대표, 신계사 법기암에서 출가한 경주 흥륭사 회주인 비구니 해혜 선사(2020.5.29. 열반)의 덕담을 듣는 순서와 사홍서원을 끝으로 마쳤다.

금강산 합동법회가 열린 다음, 2009년 11월 개성 영통사에서 남북합동 다례재가 다시 봉행됐다. 대한불교천태종과 조불련이 공동 추최한 이날 남북합동 다례재는 2007년 11월 14일 남측에서 300여 명이 참석한 ‘6.15공동선언실천 개성 영통사 대각국사 의천스님 906주기 열반 다례재’ 법회의 역사를 이었다. 영통사에서 남북 합동법회를 개최하지 못한 2008년 11월 14일에는 남측의 무원 천태종 총무부장과 경천 사회부장 외 2명이 육로 방북을 통해 개성에서 조불련과 회동하고, 향후 교류사업에 대해 협의했다.

2009년 11월 21일 오전 10시 30분 개성 영통사 경선원에서 봉행한 ‘영통사 복원 5주년 및 대각국사 의천스님 열반 908주기 남북합동 다례재’는 2009년 11월 10일 서해 대청해전이 발발한 그날 개성에서 가진 실무회담 합의를 통해 성사됐다. 또한 영통사 주지(관리인) 혜명과 정각대사 등 상주하는 삭발 승려의 데뷔 무대였다. 이날 남북합동 다례재에는 남측 천태종에서 13명과 조불련에서 서화 정서정 서기장, 소명 차금철 책임지도원, 혜명 영통사 주지, 정각 영통사 부전 등 조불련 인사 10여 명이 참석했다.

거홍 천태종 섭외국장의 사회로 진행된 합동 다례재는 남측의 헌화에 이어 정서정 조불련 서기장과 혜명 영통사 주지가 의천 대각국사 진영에 헌향을 했다. 삼귀의・반야심경 봉독을 한 다음, 정서정 서기장은 인사말에서 “대각국사 의천스님 열반 908주기를 맞아 북남 관계가 긴장된 가운데서도 통일애국의 의지로 다례재에 참석한 천태종 스님들에게 조불련과 영통사의 이름으로 열렬히 환영합니다. 특히, 서해에서 불미스러운 충돌이 발생한 뒤 열려, 이번 다례재는 단순한 행사가 아니다.”라며, “다례재를 계기로 개성관광이나 금강산관광이 잘 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합동 다례재의 의미를 강조했다. 무원 천태종 총무부장의 남측 연설과 축원, 발원문 낭독, 사홍서원 등으로 진행됐다.

서해교전이 다시 발발하고 금강산 길이 닫힌 상황에서도 남북불교 교류는 민간교류라는 이름으로 북녘에 촛불을 켰다. 하지만 2009년도 겨울 찬바람은 여전히 추웠을 뿐 아니라 휴전선을 넘나들던 만남의 기쁨과 해우의 웃음소리마저 쫓아내고 있었다.



DMZ 철책과 그 너머 개성 화장산과 오관산 원경(2016년 촬영). 사진=페이스북 Nico Ronner





조계종단 지원물품 인도인수식(2009.12.18. 금강산 온정리, 가운데 좌측 차금철 조불련 서기장, 우측 혜경 조계종 사회부장 등). 사진=민추본 홈페이지



남녘 선물과 MB의 대북몽니

금강산 신계사와 개성 영통사에 다시 켠 촛불은 마음을 전하는 작은 선물이었다. 그 대열에 서울 봉은사・도선사, 구례 화엄사가 조계종 민추본을 경유해 쌀 40kg 300가마니와 의약품 115박스, 5천만원 상당을 직접 대형트럭에 싣고 들어가서 북측 조불련에 기증했다. 민추본과 조불련은 2009년 12월 18일 금강산 온정리에서 쌀과 의약품 인도인수식을 가졌다.

조계종 민추본은 앞선 2008년 4월 22일 인도적 물품지원과 그해 9월에도 평양 양묘장 사업 지원을 추진했다. 평불협과 천태종의 나누며하나되기 등 불교통일 교류단체에서는 2009년까지 지속으로 인도적 지원사업을 추진하며 남녘의 온기를 전했다.

이런 남측 불교계와 민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용정부를 표방한 이명박 정권은 정반대의 길을 걸으며, 민간교류에 몽니를 부렸다. 당시 MB정권은 《삼국지》 〈오지여몽전〉에 나오는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새로워지고, 성장했음을’(非復吳下阿蒙) 비유하는 섬김의 정치를 울부짖었지만, 그 실상은 독선과 아집으로 남북관계를 모두 파탄 내고 말았다.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11월 29일 금강산관광 중단을 선언하면서 남북교류에 ‘정치적인 멍에’를 덧씌웠다. 지금 SY정권마저 남북관계를 모두 단절시켜버린 MB정부 때로의 회귀는 곧, 통일과 교류의 포기를 의미하고 있다. 그래서 대통령과 용와대 참모들은 MB의 인과응보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 같다.

# 다음 편은 ‘2010년 평양 남북불교회의’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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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신계사 표석과 복원불사 현장(2005.7.12.). 사진 =금수강산(2021년 4월호)
금강산 신계사 복원 2돌 합동법회(2009.10.13.), 사진=민추본 홈페이지
금강산 신계사 복원 2돌 합동법회(2009.10.13.), 사진=민추본 홈페이지
금강산 신계사 합동법회 발원문 낭독(2009.10.13. 좌측 김명희 조불련 전국신도회 상무위원, 우측 손안식 조계종 중앙신도회 상임부회장), 사진=민추본 홈페이지
금강산 신계사 합동법회 발원문 낭독(2009.10.13. 좌측 김명희 조불련 전국신도회 상무위원, 우측 손안식 조계종 중앙신도회 상임부회장), 사진=민추본 홈페이지

또 만남을 이룬 남북불교

2008년 7월 11일 새벽에 발생한 금강산 민간인 피살사건은 모든 남북관계를 빨아들인 블랙홀(Black hole)이었다. 이런 징후는 그 이전부터 균열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조계종단에서 파견한 금강산 신계사의 제정 불사도감이 2007년 11월 14일 외금강산에서 철수한 다음, 지관 조계종 총무원장은 2008년 2월 25일 금강산 신계사 복원추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신계사 공동운영에 대해서는 더 이상 북측에 어떤 요구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 상태에서는 앞으로 어떤 대북사업도 할 수 없다.”고 북측의 과도한 요구에 대한 교류 중단을 선언할 만큼 강경 입장으로 급선회했다. 그 배경에는 북측의 신계사 공동운영 거부와 무관치 않음을 시사했다.

그러나 지관 조계종 총무원장은 2007년 6월 22일 첫 내금강 순례를 하면서 《불교신문》(2007.6.27.)과의 인터뷰에서 “어찌 됐든 자주 접촉해야만, 통일이 가까워지는 법이다. 예를 들면 5년간 신계사 공사를 하면서 북측과 남측 인부가 함께 일을 했는데, 초기에는 점심을 따로따로 먹었단다. 그런데 남측에서 라면을 끓여 함께 먹자고 하니, 처음에는 서먹서먹하다가 그 맛과 사람이 좋아. 이제는 함께 라면을 끓여 먹으며 가까운 사이가 됐다고 들었다. 그런 면에서는 남북은 더욱 가까워져야 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자꾸 멀리하면 가까워질 새가 없다.”라고, 그때 일화를 소개하는 등 민간의 인적 교류에 관한 중요성을 일깨운 바 있다.

그 당시에 남북불교계의 보이지 않은 밀당은 2009년 3월 28일 중국 장쑤성 우시(無錫)에서 열린 제2차 세계불교포럼 회동으로, 부처님오신날 봉축 행사로 남북 공동발원문 채택과 동시발표 등을 비롯해 평양, 금강산과 개성에서 또 만남의 결실을 이루게 됐다.

2009년 5월 중순, 북측 조불련 중앙위원회는 공석이던 부위원장에 연암 리규룡 책임부원을 선출하는 등 내부정비를 단행했다. 남측 조계종 중앙신도회와 조선왕실의궤 환수위원회는 2008년 8월에 이어서 2009년 5월 19일~23일 제2차 평양방문단을 파견하고, 그해 5월 22일 오전 10시 평양 대성산 광법사에서 ‘일제가 략탈해 간 문화재 반환촉구 북남불교도 합동법회’를 개최하는 등 남북공조 연대사업을 추진했다.

금강산관광이 2008년 7월 12일부터 전면 중단된 가운데, 같은 해 10월 13일 금강산 신계사에서 남북한 합동법회를 열고 함께 촛불을 켰다. 이날 금강산 신계사 합동법회는 첫째, 남측 인사들의 금강산 방문이라는 점과 둘째, 연암 리규룡 조불련 부위원장과 진각 송정심 신계사 주지를 비롯한 절에 상주하는 삭발 승려들의 데뷔(Début) 무대였다. 이날 오후 2시에 열린 ‘금강산 신계사 복원 2돐 조국통일기원 북남불교도 합동법회’는 연암 조불련 신임 부위원장과 남측의 정념 조계종 사회부장을 좌장으로 하여 조불련 측의 15명과 남측의 진관・해혜・탁연 등 종단 승려와 소임자, 현대아산 직원 등 50여 명이 참가했다.

청담 류인명 조불련 책임부원, 재안 조계종 사회국장의 공동 사회로 개회한 이날 신계사 복원 2돌 합동법회는 진효 조계종 민추본 사무총장과 신계사 신임 주지(관리인)를 맡은 진각대사가 종각에서 5번의 범종 타종을 함께했다. 삼귀의・반야심경 봉독과 헌화, 찬불가 등 입재 의례에 이은 연암 부위원장의 인사말과 정념 사회부장의 기념사에 이은 정서정 조불련 서기장의 공동선언문 낭독, 손안식 조계종 중앙신도회 상임부회장(2022.9.13. 타계)과 성죽 김명희 조불련 전국신도회 상무위원이 공동발원문을 낭독했다. 이어 그간 통일운동에 매진해온 진관 불교인권위원회 대표, 신계사 법기암에서 출가한 경주 흥륭사 회주인 비구니 해혜 선사(2020.5.29. 열반)의 덕담을 듣는 순서와 사홍서원을 끝으로 마쳤다.

금강산 합동법회가 열린 다음, 2009년 11월 개성 영통사에서 남북합동 다례재가 다시 봉행됐다. 대한불교천태종과 조불련이 공동 추최한 이날 남북합동 다례재는 2007년 11월 14일 남측에서 300여 명이 참석한 ‘6.15공동선언실천 개성 영통사 대각국사 의천스님 906주기 열반 다례재’ 법회의 역사를 이었다. 영통사에서 남북 합동법회를 개최하지 못한 2008년 11월 14일에는 남측의 무원 천태종 총무부장과 경천 사회부장 외 2명이 육로 방북을 통해 개성에서 조불련과 회동하고, 향후 교류사업에 대해 협의했다.

2009년 11월 21일 오전 10시 30분 개성 영통사 경선원에서 봉행한 ‘영통사 복원 5주년 및 대각국사 의천스님 열반 908주기 남북합동 다례재’는 2009년 11월 10일 서해 대청해전이 발발한 그날 개성에서 가진 실무회담 합의를 통해 성사됐다. 또한 영통사 주지(관리인) 혜명과 정각대사 등 상주하는 삭발 승려의 데뷔 무대였다. 이날 남북합동 다례재에는 남측 천태종에서 13명과 조불련에서 서화 정서정 서기장, 소명 차금철 책임지도원, 혜명 영통사 주지, 정각 영통사 부전 등 조불련 인사 10여 명이 참석했다.

거홍 천태종 섭외국장의 사회로 진행된 합동 다례재는 남측의 헌화에 이어 정서정 조불련 서기장과 혜명 영통사 주지가 의천 대각국사 진영에 헌향을 했다. 삼귀의・반야심경 봉독을 한 다음, 정서정 서기장은 인사말에서 “대각국사 의천스님 열반 908주기를 맞아 북남 관계가 긴장된 가운데서도 통일애국의 의지로 다례재에 참석한 천태종 스님들에게 조불련과 영통사의 이름으로 열렬히 환영합니다. 특히, 서해에서 불미스러운 충돌이 발생한 뒤 열려, 이번 다례재는 단순한 행사가 아니다.”라며, “다례재를 계기로 개성관광이나 금강산관광이 잘 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합동 다례재의 의미를 강조했다. 무원 천태종 총무부장의 남측 연설과 축원, 발원문 낭독, 사홍서원 등으로 진행됐다.

서해교전이 다시 발발하고 금강산 길이 닫힌 상황에서도 남북불교 교류는 민간교류라는 이름으로 북녘에 촛불을 켰다. 하지만 2009년도 겨울 찬바람은 여전히 추웠을 뿐 아니라 휴전선을 넘나들던 만남의 기쁨과 해우의 웃음소리마저 쫓아내고 있었다.

DMZ 철책과 그 너머 개성 화장산과 오관산 원경(2016년 촬영). 사진=페이스북 Nico Ronner
DMZ 철책과 그 너머 개성 화장산과 오관산 원경(2016년 촬영). 사진=페이스북 Nico Ronner
조계종단 지원물품 인도인수식(2009.12.18. 금강산 온정리, 가운데 좌측 차금철 조불련 서기장, 우측 혜경 조계종 사회부장 등). 사진=민추본 홈페이지
조계종단 지원물품 인도인수식(2009.12.18. 금강산 온정리, 가운데 좌측 차금철 조불련 서기장, 우측 혜경 조계종 사회부장 등). 사진=민추본 홈페이지

남녘 선물과 MB의 대북몽니

금강산 신계사와 개성 영통사에 다시 켠 촛불은 마음을 전하는 작은 선물이었다. 그 대열에 서울 봉은사・도선사, 구례 화엄사가 조계종 민추본을 경유해 쌀 40kg 300가마니와 의약품 115박스, 5천만원 상당을 직접 대형트럭에 싣고 들어가서 북측 조불련에 기증했다. 민추본과 조불련은 2009년 12월 18일 금강산 온정리에서 쌀과 의약품 인도인수식을 가졌다.

조계종 민추본은 앞선 2008년 4월 22일 인도적 물품지원과 그해 9월에도 평양 양묘장 사업 지원을 추진했다. 평불협과 천태종의 나누며하나되기 등 불교통일 교류단체에서는 2009년까지 지속으로 인도적 지원사업을 추진하며 남녘의 온기를 전했다.

이런 남측 불교계와 민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용정부를 표방한 이명박 정권은 정반대의 길을 걸으며, 민간교류에 몽니를 부렸다. 당시 MB정권은 《삼국지》 〈오지여몽전〉에 나오는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새로워지고, 성장했음을’(非復吳下阿蒙) 비유하는 섬김의 정치를 울부짖었지만, 그 실상은 독선과 아집으로 남북관계를 모두 파탄 내고 말았다.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11월 29일 금강산관광 중단을 선언하면서 남북교류에 ‘정치적인 멍에’를 덧씌웠다. 지금 SY정권마저 남북관계를 모두 단절시켜버린 MB정부 때로의 회귀는 곧, 통일과 교류의 포기를 의미하고 있다. 그래서 대통령과 용와대 참모들은 MB의 인과응보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 같다.

# 다음 편은 ‘2010년 평양 남북불교회의’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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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범
경북 경주 출생으로 1984년부터 불교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참여하다가 1990년 초, 법보종찰 해인사에 입산 환속했다. 1994년부터 남북불교 교류의 현장 실무자로 2000년부터 평양과 개성·금강산 등지를 다녀왔으며, 현재는 평화통일불교연대 운영위원장과 북한불교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남북불교 교류 60년사’ 등과 논문으로 ‘북한 주민들의 종교적 심성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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