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값 급등 뻔한데 경내지까지 14만평 긴급 처분?
땅값 급등 뻔한데 경내지까지 14만평 긴급 처분?
  • 이혜조
  • 승인 2021.11.08 12:5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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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전 소송 쟁점] ③ 봉은사 땅 매각에 비췬 정권의 그림자
1970년 봉은사 토지 매매 와중에 감정을 위해 촬영한 봉은사 전경. ⓒ2021 불교닷컴



1970년대초 봉은사 땅을 판 이유와 과정이 석연치 않다. 

강남 개발 광풍이 예고돼 땅값 폭등이 불보듯 뻔했고, 당시 불교계 사정을 감안하면 불교회관 건립은 그리 급한 과업이 아니었다. 3차례에 걸쳐 14만3천평을 불교재산관리법 등을 위반하면서 까지 경내지까지 마구잡이 팔 이유가 없었다.

권력의 힘이 작용했다고 단정하는 이유다.

제3한강교, 경부고속도로 개통했는데도 14만5천평 처분

1969년 12월 26일 제3한강교가 준공됐다. '단군 이래 최대 토목공사'인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된 것은 1970년 7월 7일이었다. 이미 1966년 서울시의 요청으로 건설부가 결정한 이 일대 800만평의 개발과 동시에 땅값 폭등은 시간 문제였다.

현대건설의 사보 <현대> 1967년 9월호에 따르면 교량공사(제3한강교) 전 한 평에 200원에 지나지 않았던 압구정 등의 땅값이 1년만에 평당 3천원을 호가했다고 한다. 2년 뒤 다리에 이은 경부고속도로 완공은 상승을 부채질 했다. 봉은사 토지 처분을 반대한 스님 신도들의 진정서, 성명서 등에서 모두 향후 땅값 급등을 지적했다. 법정 스님은 1969년 12월 18일 중진 및 기관장 회의에서 "제3한강교가 놓이게 되면 봉은사 토지가 고가로 처분될 것도 감안해달라"며 반대의사를 밝힌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문공부의 봉은사 토지 처분 및 전환 허가 내역을 보면, 1970년 6월 26일 95,278평, 12월 23일 20,683평, 1971년 4월 14일 17,342평 등 3차례 합쳐 133,303평이다. 1973년 3월 조계종 감찰원이 작성한 '봉은사재산처분에 대한 조사서'에 따르면 추가처분 등을 합하면 실제 처분한 땅은 14만5,491평에 이른다.

10만평 가량을 확보한 정부가 발톱을 드러낸 것은 1970년 11월 5일이었다. 양택식 서울시장 특별기자회견을 통해서다. 상공부 산하 12개 업체가 들어갈 건평 28,000평의 대형 종합청사 조감도, 영동 제2구획정리지구 도면도를 발표했다. 봉은사 소유였던 삼성동 산25번지 5만평 부지에 한국전력(주) 등 12개 국영기업체 이전을 선포한 것이다.

윤진우 후임 국장인 손정목은 저서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에서 이날 회견을 이렇게 회고했다.

"이 특별기자회견 기사를 읽으면서 그것은 시정의 홍보라기 보다는 오히려 호소에 가까운 것을 느낀다. 양택식 시장 입장에서도 이때의 소원은 단 한 가지, 영동2지구내 윤진우가 청와대 청치자금으로 구입해둔 땅값이 하루 빨리, 보다 많이 올라 소리없이 처분하고 종결시키는 것이었다. (중략) 이 발표를 계기로 전체 시민의 강남지향은 시작되었고 강남의 땅값은 크게 오르게 된다."



경부고속도로의 일부 구간인 서울~수원 간 32km 노선이 확정되면서 김현옥 시장이 양재동 말죽거리를 시찰하고 돌아오는 모습이다. 한남동을 기점으로 한남대교~잠원동~양재동 말죽거리~광주군 낙생면~용인 신갈리에 이르는 이 고속도로 건설 계획이 알려지면서 3.3㎡당 1,400원 하던 땅값이 2,500원으로 올랐다. 이 여파로 말죽거리를 중심으로 남부서울 일대는 때 아닌 부동산 투자 붐이 일어 당국이 적잖은 고심을 했다.(1967.12.9) ⓒ서울역사박물관





1970년 11월 5일 특별기자회견을 통해 한강 이남에 ‘제2서울’ 개발을 발표하는 양택식 서울시장. ⓒ서울역사박물관



예산 1,400만원 시대 5억들여 불교회관 건립. 왜?

조계종 중앙종회 자료에 따르면 불교회관 건립을 위해 봉은사 땅을 팔기로 결의한 1969년도 조계종 예산은 13,469,280원이었다. 530,000,000원 이상이 필요한 중앙공무원교육원을 매입해 불교회관으로 사용하겠다는 발상은 무리 그 자체였다.

불교회관 건립 안건이 처음 거론된 것은 1967년 12월 제17회 중앙종회에서다. "행정부와 교섭 후 차기 종회에서 상정키로 하다."라고 짧게 언급된다. 이후 18, 19회 종회에서는 거론조차 않는다.

20회 종회에서는 조계사 구내에 짓되 점진적인 사업이라는 점을 확인한다. 종회는 "조계사 구내에 현대식으로 건립할 것"을 전제로 "총공사비의 반액 승니의 특별의무적 성금과 가능한 사찰재산 전환조치분, 반액은 신도 성금으로 충당할 방침...기금 조성에 따라 점차적으로"라는 내용의 규약을 만든다. 

종회의장도 "회관 건립은 점차적인 것이고, 결국은 완성된다는 것이 거종단적이니..."라며 "추진 방법은 총무원에 일임하는 것에 이의 없는지요?"라고 물었고 전원 동의했다.

그해 9월 1일 21회 종회는 월산 스님을 총무원장으로 선출했고, 불교회관 건립을 핑계로 봉은사 토지처분이 급물살을 탄다. 3개월 후 열린 22회 종회에서 '종단 재산 정비에 관한 건'이 상정됐고, 설명, 동의, 재청, 삼청으로 가볍게 통과한다. 불교회관 건립을 위해 사찰 처분권한을 총무원에 주자는 거지만 안건이나 발언에서 봉은사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이날 결의가 10만평 이상의 봉은사 토지를 팔고, 엄청난 후폭풍을 불러올지 아무도 모르는 분위기였다. 결의 16일만인 12월 18일 종무회의에서 종회결의를 이유로 "봉은사 소유 별지 재산을 처분하여 불교회관을 건립(매입)할 것"을 결의한다. 같은 날 같은 내용에 대해 중진 및 산하기관장들의 동의서가 작성되고 이후락 등이 서명 날인한다.

봉은사 주지 서운 스님 몰래 토지 측량 등 매매작업이 빠르게 진행됐고, 서운 스님을 비롯한 스님과 신도, 인근 소작농 등의 극렬한 반발이 이어진다. 특히 대처승과 신도, 소작농들은 1970년 3월 진정서를 통해 봉은사 재산형성에 기여한 점 등을 들며 토지매매를 비토하면서 "백보 양보해 한국불교 내일을 위해 부득이 팔아야 한다면 전답 경작자 또는 봉은사를 위한 희생자들에게 동일한 가격이라면 파는 것이 스님들의 양심"이라는 점을 강조했으나 먹혀들지 않았다.

경내지까지 넘겨 봉은사 사라질 뻔

각종 기록에 엿볼수 있는 사실은 불교회관 건립이 아니라 봉은사 토지 처분에 방점이 찍혔다는 점이다. 심지어 경내지를 무더기로 넘긴 사실도 기록에 나타난다.

3차례 처분 이후 봉은사 토지는 거의 남지 않게 된다. 심지어 투기억제세 92,987,070원이 부가돼 법당터까지 압류되기도 했다. 다행히 1974년 억제세를 결손처분한 뒤 16,022평의 경내지를 어렵사리 매수하게 된 것은 1977년 11월 6일 136,217,000원을 상공부 등에 지급하고서다. 돈이 없던 조계종은 자금을 빌린 곳에 2,500평 등 3,000평이상의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팔 때보다 훨씬 비싼 평당 10,478원꼴로 되산셈이다. 

팔려나간 토지가 경내지임을 알 수 있는 기록은 여러군데 나타난다. 



1970~1971년 사이 3차례 대규모 토지를 처분하면서 봉은사가 통째로 넘어갈 위기에 처하자 그 중 일부를 돌려달라고 상공부에 보낸 공문의 일부. '봉은사 경내지'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2012 불교닷컴



1970년 7월 15일 개회한 중앙종회 23회 회의록에 따르면 "많은 재산을 처분해야 되는 사찰측에서는 사찰의 존속과 관련 중대한 문제로 대처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임을 종회 스스로 인정했다. 유휴재산을 처분했더라면 나타날 수 없는 반응이다.

1972년 2월 총무원 감찰원이 작성한 '봉은사 재산처분에 대한 조사 보고서'에는 "중앙종회의 유휴지 처분결의와는 반대로 10만평을 확정, 졸속 불리하게 당국의 허가도 받기 전에 구속력 있는 계약을 한 점"을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유휴지만 판 게 아니라 경내지도 무더기 팔았음을 종단도 시인한 것이다. 

이 문건에는 "(중진 및 기관장회의에서)서운 스님과 법정 스님의 우려를 도외시하고 봉은사를 처분토록 영향력을 행사하여 놓고 오늘날 봉은사 경내지가 위기에 처하도록 방관하였다는 무책임성"을 지적했다.

중진회의후 작성된 동의서에는 이후락 신도회장의 자필 서명이 들어 있다. <불교닷컴>은 이후락의 가족으로부터 1969년 주일대사로 발령 받은 지 2개월 여 지난 12월 일본에서 한국으로 귀국한 사실을 확인했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가족들에게 미리 주고 한국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이후락의 서명일자는 12월 24일로 돼 있어 자필서명일 가능성이 더 높아졌다. 조계종 스스로 "봉은사를 처분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한 집단으로 중진 및 기관장회의를 언급한 문건도 이번에 처음 확인됐다. 



1972년 2월 종단 조사보고서의 일부. 이후락이 포함된 중진 및 산하기관장 회의에 대해 "봉은사를 처분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2021 불교닷컴



 



1969년 12월 18일 열린 중진 및 기관장 회의록. 봉은사 주지 서운 스님이 경내지가 넘어갈 것을 염려하고 있다. 이 회의에서 결의된 동의서에 이후락 조계종 중앙신도회장이 자필서명했다. ⓒ2021 불교닷컴



회의록을 보면 서운 스님은 "봉은사 경내구역을 약속조건이라고 하나 여기선 말로만 가지고 처분 승낙을 할 수 없다"면서 "능선내라고 하나 경내지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으니 찬성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봉은사 주지도 경내지가 팔려나간다는 사실을 알고 처분을 반대한 것이다.

팔려나간 토지가 경내지임을 알 수 있는 또 다른 문건도 있다. 1970년 9월 18일 봉은사 주지가 총무원장에게 보낸 공문이다. 봉은사 경내를 관통하려는 서울시 도로개발을 총무원 차원에서 막아달라는 요청서다. 

너비 35m 도로가 봉은사 옹호문과 일주문 사이를 지나게 돼 봉은사가 반대했으나 서울시는 계획을 변경할 수 없다고 회신한 때문이다. 봉은사는 "도로 예정지 내에 오백여년의 보호목 수십본이 있"으며 "경내지 8,000여평이 도로화하며 사찰문화제 가치가 상실됨"을 우려했다.

옹호문은 사천왕문의 다른 이름이다. 옹호문과 일주문 사이에 너비 35m의 도로가 가능하고, 수십본의 오백년 이상 나무가 있고, 훼손되는 면적이 8,000평에 이른다면 봉은사 일주문은 코엑스보다 더 남쪽이어야 한다. 반대에도 불구하고 1972년 너비 35m의 '봉은로'는 뚫렸다. 1969년 항공사진과 1970년 감정을 위해 촬영한 전경 사진에는 없던 길이 봉은사와 현 코엑스 사이로 개설된다. 이 도로는 현재 '봉은사로'로 개칭됐다. 1970년 팔려나간 토지 상당부분이 경내지라는 방증이다. 일주문도 토지가 팔려나가고 도로가 개설되던 당시 현재의 봉은사 진여문 근처로 이전된 것으로 보인다.



옹호문과 일주문 사이 관통도로를 막아달라며 봉은사가 총무원에 보낸 공문. 1970년 일주문이 현재의 진여문이 아니라 코엑스 근처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 2021 불교닷컴





항공사진을 통해 1969년에는 없던 봉은사 앞 도로가 1972년에 개설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옹호문과 일주문 사이에 도로가 개설됐으므로, 당시 일주문은 봉은사 앞쪽에서 한참 떨어진 현재의 코엑스 근처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021 불교닷컴



 


고 손정목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의 저서


정차자금 마련 위해 필요했던 봉은사 10만평

이런 황당한 봉은사 토지 매매 이유를 손정목 국장의 증언에서 찾을 수 있다. 

1969년말과 70년 초 사이 김현옥 서울시장과 윤진우 과장이 헬기를 타고 강남 일대를 돌며 발전 가능성 있는 지역을 판단해보라고 했다. 그날 곧바로 박종규 청와대 경호실장 집을 찾았다. 박 실장도 투자가치가 가장 높은 곳을 물었고, 윤 과장이 '탄천을 경계로 서부지역 일대'를 지목하자 박 실장은 "그쪽 땅을 사모으지"라고 지시한다. 탄천 서부 지역은 대부분 봉은사 소유 토지였다.

2주 뒤 윤 과장은 김 시장의 지시로 찾은 제일은행 고태진 전무로부터 341,386,983원이 든 통장을 건네받았다. 고 전무는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을 마치고 주일대사로 발령난 이후락과 같은 울산 출신의 금융계 거물이었다.

"높은 곳에서 나온 자금으로 땅을 사모으고 땅값이 어느 정도 상승하면 되팔아 갖다 바친다. 청와대에서 근무하는 매우 높은 분 한둘과 서울시장 그리고 자기만이 알고 있는 비밀사항이다" 손 과장이 평가한 윤 과장은 '노련한 토지매입자' 이자 정치자금 제조기였다.

윤 과장이 토지로 정치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세운 계획을 보면 "① 매입은 최저 4천 원 최고 6천 원 한도 내로 한다~ ④ 소유자금은 계약금(10분의 1), 중도금(총액의 2분의 1)까지만 마련토록 한다." 등 4가지 조건이다. 

1970년 5월 20일까지 윤 과장이 청와대 정치자금용으로 매입한 토지가 237,366평, 동원된 대금이 1,270,885,250원이었다고 손 과장은 책에서 주장했다.

마침 1970년 1월 전후 이낙선 상공부장관이 김현옥 시장을 찾았다. 곧바로 제2서울 지구에 상공부 및 산하기관이 모두 들어갈 수 있는 대규모 종합청사 건립을 위해 부지 10만평을 평당 4,500~5,000원에 물색하라는 지시가 윤 과장에게 떨어졌다.

손정목의 책에 언급된 내용들은 1970년 1월 18일부터 1971년 4월 14일까지 월산 총무원장과 윤태진간 계약과 해약, 서영철 등과 3자 계약 등 3차례 거래 조건과 흡사하다. 평당 4,200원~6,100원, 계약금 5,000만원, 중도금 1억 게다가 윤태진은 윤 과장이 매매계약 때 주로 사용한 가명이었다고 손정목은 주장했다. 평수도 10만평이다. 

조계종은 정부가 원하는 10만평에 맞춰주기 위해 1970년 9월 29일 상공부로부터 매각대금 전액을 수령하면서 "매각평수 10만평이 미달될 경우에는 사사지라도 부족평수를 대체 양도키로 한다."는 조항을 넣는 바람에 경내지도 넘겨버린다. 사사지는 종교용지를 말한다.



상공부 약정서 ⓒ2021
1970년 봉은사 토지 매매 와중에 감정을 위해 촬영한 봉은사 전경. ⓒ2021 불교닷컴

1970년대초 봉은사 땅을 판 이유와 과정이 석연치 않다. 

강남 개발 광풍이 예고돼 땅값 폭등이 불보듯 뻔했고, 당시 불교계 사정을 감안하면 불교회관 건립은 그리 급한 과업이 아니었다. 3차례에 걸쳐 14만3천평을 불교재산관리법 등을 위반하면서 까지 경내지까지 마구잡이 팔 이유가 없었다.

권력의 힘이 작용했다고 단정하는 이유다.

제3한강교, 경부고속도로 개통했는데도 14만5천평 처분

1969년 12월 26일 제3한강교가 준공됐다. '단군 이래 최대 토목공사'인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된 것은 1970년 7월 7일이었다. 이미 1966년 서울시의 요청으로 건설부가 결정한 이 일대 800만평의 개발과 동시에 땅값 폭등은 시간 문제였다.

현대건설의 사보 <현대> 1967년 9월호에 따르면 교량공사(제3한강교) 전 한 평에 200원에 지나지 않았던 압구정 등의 땅값이 1년만에 평당 3천원을 호가했다고 한다. 2년 뒤 다리에 이은 경부고속도로 완공은 상승을 부채질 했다. 봉은사 토지 처분을 반대한 스님 신도들의 진정서, 성명서 등에서 모두 향후 땅값 급등을 지적했다. 법정 스님은 1969년 12월 18일 중진 및 기관장 회의에서 "제3한강교가 놓이게 되면 봉은사 토지가 고가로 처분될 것도 감안해달라"며 반대의사를 밝힌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문공부의 봉은사 토지 처분 및 전환 허가 내역을 보면, 1970년 6월 26일 95,278평, 12월 23일 20,683평, 1971년 4월 14일 17,342평 등 3차례 합쳐 133,303평이다. 1973년 3월 조계종 감찰원이 작성한 '봉은사재산처분에 대한 조사서'에 따르면 추가처분 등을 합하면 실제 처분한 땅은 14만5,491평에 이른다.

10만평 가량을 확보한 정부가 발톱을 드러낸 것은 1970년 11월 5일이었다. 양택식 서울시장 특별기자회견을 통해서다. 상공부 산하 12개 업체가 들어갈 건평 28,000평의 대형 종합청사 조감도, 영동 제2구획정리지구 도면도를 발표했다. 봉은사 소유였던 삼성동 산25번지 5만평 부지에 한국전력(주) 등 12개 국영기업체 이전을 선포한 것이다.

윤진우 후임 국장인 손정목은 저서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에서 이날 회견을 이렇게 회고했다.

"이 특별기자회견 기사를 읽으면서 그것은 시정의 홍보라기 보다는 오히려 호소에 가까운 것을 느낀다. 양택식 시장 입장에서도 이때의 소원은 단 한 가지, 영동2지구내 윤진우가 청와대 청치자금으로 구입해둔 땅값이 하루 빨리, 보다 많이 올라 소리없이 처분하고 종결시키는 것이었다. (중략) 이 발표를 계기로 전체 시민의 강남지향은 시작되었고 강남의 땅값은 크게 오르게 된다."

경부고속도로의 일부 구간인 서울~수원 간 32km 노선이 확정되면서 김현옥 시장이 양재동 말죽거리를 시찰하고 돌아오는 모습이다. 한남동을 기점으로 한남대교~잠원동~양재동 말죽거리~광주군 낙생면~용인 신갈리에 이르는 이 고속도로 건설 계획이 알려지면서 3.3㎡당 1,400원 하던 땅값이 2,500원으로 올랐다. 이 여파로 말죽거리를 중심으로 남부서울 일대는 때 아닌 부동산 투자 붐이 일어 당국이 적잖은 고심을 했다.(1967.12.9) ⓒ서울역사박물관
경부고속도로의 일부 구간인 서울~수원 간 32km 노선이 확정되면서 김현옥 시장이 양재동 말죽거리를 시찰하고 돌아오는 모습이다. 한남동을 기점으로 한남대교~잠원동~양재동 말죽거리~광주군 낙생면~용인 신갈리에 이르는 이 고속도로 건설 계획이 알려지면서 3.3㎡당 1,400원 하던 땅값이 2,500원으로 올랐다. 이 여파로 말죽거리를 중심으로 남부서울 일대는 때 아닌 부동산 투자 붐이 일어 당국이 적잖은 고심을 했다.(1967.12.9) ⓒ서울역사박물관
1970년 11월 5일 특별기자회견을 통해 한강 이남에 ‘제2서울’ 개발을 발표하는 양택식 서울시장. ⓒ서울역사박물관
1970년 11월 5일 특별기자회견을 통해 한강 이남에 ‘제2서울’ 개발을 발표하는 양택식 서울시장. ⓒ서울역사박물관

예산 1,400만원 시대 5억들여 불교회관 건립. 왜?

조계종 중앙종회 자료에 따르면 불교회관 건립을 위해 봉은사 땅을 팔기로 결의한 1969년도 조계종 예산은 13,469,280원이었다. 530,000,000원 이상이 필요한 중앙공무원교육원을 매입해 불교회관으로 사용하겠다는 발상은 무리 그 자체였다.

불교회관 건립 안건이 처음 거론된 것은 1967년 12월 제17회 중앙종회에서다. "행정부와 교섭 후 차기 종회에서 상정키로 하다."라고 짧게 언급된다. 이후 18, 19회 종회에서는 거론조차 않는다.

20회 종회에서는 조계사 구내에 짓되 점진적인 사업이라는 점을 확인한다. 종회는 "조계사 구내에 현대식으로 건립할 것"을 전제로 "총공사비의 반액 승니의 특별의무적 성금과 가능한 사찰재산 전환조치분, 반액은 신도 성금으로 충당할 방침...기금 조성에 따라 점차적으로"라는 내용의 규약을 만든다. 

종회의장도 "회관 건립은 점차적인 것이고, 결국은 완성된다는 것이 거종단적이니..."라며 "추진 방법은 총무원에 일임하는 것에 이의 없는지요?"라고 물었고 전원 동의했다.

그해 9월 1일 21회 종회는 월산 스님을 총무원장으로 선출했고, 불교회관 건립을 핑계로 봉은사 토지처분이 급물살을 탄다. 3개월 후 열린 22회 종회에서 '종단 재산 정비에 관한 건'이 상정됐고, 설명, 동의, 재청, 삼청으로 가볍게 통과한다. 불교회관 건립을 위해 사찰 처분권한을 총무원에 주자는 거지만 안건이나 발언에서 봉은사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이날 결의가 10만평 이상의 봉은사 토지를 팔고, 엄청난 후폭풍을 불러올지 아무도 모르는 분위기였다. 결의 16일만인 12월 18일 종무회의에서 종회결의를 이유로 "봉은사 소유 별지 재산을 처분하여 불교회관을 건립(매입)할 것"을 결의한다. 같은 날 같은 내용에 대해 중진 및 산하기관장들의 동의서가 작성되고 이후락 등이 서명 날인한다.

봉은사 주지 서운 스님 몰래 토지 측량 등 매매작업이 빠르게 진행됐고, 서운 스님을 비롯한 스님과 신도, 인근 소작농 등의 극렬한 반발이 이어진다. 특히 대처승과 신도, 소작농들은 1970년 3월 진정서를 통해 봉은사 재산형성에 기여한 점 등을 들며 토지매매를 비토하면서 "백보 양보해 한국불교 내일을 위해 부득이 팔아야 한다면 전답 경작자 또는 봉은사를 위한 희생자들에게 동일한 가격이라면 파는 것이 스님들의 양심"이라는 점을 강조했으나 먹혀들지 않았다.

경내지까지 넘겨 봉은사 사라질 뻔

각종 기록에 엿볼수 있는 사실은 불교회관 건립이 아니라 봉은사 토지 처분에 방점이 찍혔다는 점이다. 심지어 경내지를 무더기로 넘긴 사실도 기록에 나타난다.

3차례 처분 이후 봉은사 토지는 거의 남지 않게 된다. 심지어 투기억제세 92,987,070원이 부가돼 법당터까지 압류되기도 했다. 다행히 1974년 억제세를 결손처분한 뒤 16,022평의 경내지를 어렵사리 매수하게 된 것은 1977년 11월 6일 136,217,000원을 상공부 등에 지급하고서다. 돈이 없던 조계종은 자금을 빌린 곳에 2,500평 등 3,000평이상의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팔 때보다 훨씬 비싼 평당 10,478원꼴로 되산셈이다. 

팔려나간 토지가 경내지임을 알 수 있는 기록은 여러군데 나타난다. 

1970~1971년 사이 3차례 대규모 토지를 처분하면서 봉은사가 통째로 넘어갈 위기에 처하자 그 중 일부를 돌려달라고 상공부에 보낸 공문의 일부. '봉은사 경내지'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2012 불교닷컴
1970~1971년 사이 3차례 대규모 토지를 처분하면서 봉은사가 통째로 넘어갈 위기에 처하자 그 중 일부를 돌려달라고 상공부에 보낸 공문의 일부. '봉은사 경내지'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2012 불교닷컴

1970년 7월 15일 개회한 중앙종회 23회 회의록에 따르면 "많은 재산을 처분해야 되는 사찰측에서는 사찰의 존속과 관련 중대한 문제로 대처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임을 종회 스스로 인정했다. 유휴재산을 처분했더라면 나타날 수 없는 반응이다.

1972년 2월 총무원 감찰원이 작성한 '봉은사 재산처분에 대한 조사 보고서'에는 "중앙종회의 유휴지 처분결의와는 반대로 10만평을 확정, 졸속 불리하게 당국의 허가도 받기 전에 구속력 있는 계약을 한 점"을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유휴지만 판 게 아니라 경내지도 무더기 팔았음을 종단도 시인한 것이다. 

이 문건에는 "(중진 및 기관장회의에서)서운 스님과 법정 스님의 우려를 도외시하고 봉은사를 처분토록 영향력을 행사하여 놓고 오늘날 봉은사 경내지가 위기에 처하도록 방관하였다는 무책임성"을 지적했다.

중진회의후 작성된 동의서에는 이후락 신도회장의 자필 서명이 들어 있다. <불교닷컴>은 이후락의 가족으로부터 1969년 주일대사로 발령 받은 지 2개월 여 지난 12월 일본에서 한국으로 귀국한 사실을 확인했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가족들에게 미리 주고 한국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이후락의 서명일자는 12월 24일로 돼 있어 자필서명일 가능성이 더 높아졌다. 조계종 스스로 "봉은사를 처분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한 집단으로 중진 및 기관장회의를 언급한 문건도 이번에 처음 확인됐다. 

종단 감사보고서의 일부  이후락이 포함된 중진 및 산하기관장 회의에 대해 "봉은사를 처분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2021 불교닷컴
1972년 2월 종단 조사보고서의 일부. 이후락이 포함된 중진 및 산하기관장 회의에 대해 "봉은사를 처분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2021 불교닷컴

 

중진 및 기관장 회의록. 봉은사 주지 서운 스님이 경내지가 넘어갈 것을 염여라고 있다. 이 회의에서 결의된 동의서에 이후락 조계종 중앙신도회장이 자필서명했다. ⓒ2021 불교닷컴



회의록을 보면 서운 스님은 "봉은사 경내구역을 약속조건이라고 하나 여기선 말로만 가지고 처분 승낙을 할 수 없다"면서 "능선내라고 하나 경내지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으니 찬성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봉은사 주지도 경내지가 팔려나간다는 사실을 알고 처분을 반대한 것이다.

팔려나간 토지가 경내지임을 알 수 있는 또 다른 문건도 있다. 1970년 9월 18일 봉은사 주지가 총무원장에게 보낸 공문이다. 봉은사 경내를 관통하려는 서울시 도로개발을 총무원 차원에서 막아달라는 요청서다. 

너비 35m 도로가 봉은사 옹호문과 일주문 사이를 지나게 돼 봉은사가 반대했으나 서울시는 계획을 변경할 수 없다고 회신한 때문이다. 봉은사는 "도로 예정지 내에 오백여년의 보호목 수십본이 있"으며 "경내지 8,000여평이 도로화하며 사찰문화제 가치가 상실됨"을 우려했다.

옹호문은 사천왕문의 다른 이름이다. 옹호문과 일주문 사이에 너비 35m의 도로가 가능하고, 수십본의 오백년 이상 나무가 있고, 훼손되는 면적이 8,000평에 이른다면 봉은사 일주문은 코엑스보다 더 남쪽이어야 한다. 반대에도 불구하고 1972년 봉은사로는 개설됐다. 팔려나간 토지 상당부분이 경내지라는 방증이다.



옹호문과 일주문 사이 관통도로를 막아달라며 봉은사가 총무원에 보낸 공문. 1970년 일주문이 현재의 진여문이 아니라 코엑스 근처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 2021 불교닷컴



 


고 손정목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의 저서


정차자금 마련 위해 필요했던 봉은사 10만평

이런 황당한 봉은사 토지 매매 이유를 손정목 국장의 증언에서 찾을 수 있다. 

1969년말과 70년 초 사이 김현옥 서울시장과 윤진우 과장이 헬기를 타고 강남 일대를 돌며 발전 가능성 있는 지역을 판단해보라고 했다. 그날 곧바로 박종규 청와대 경호실장 집을 찾았다. 박 실장도 투자가치가 가장 높은 곳을 물었고, 윤 과장이 '탄천을 경계로 서부지역 일대'를 지목하자 박 실장은 "그쪽 땅을 사모으지"라고 지시한다. 탄천 서부 지역은 대부분 봉은사 소유 토지였다.

2주 뒤 윤 과장은 김 시장의 지시로 찾은 제일은행 고태진 전무로부터 341,386,983원이 든 통장을 건네받았다. 고 전무는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을 마치고 주일대사로 발령난 이후락과 같은 울산 출신의 금융계 거물이었다.

"높은 곳에서 나온 자금으로 땅을 사모으고 땅값이 어느 정도 상승하면 되팔아 갖다 바친다. 청와대에서 근무하는 매우 높은 분 한둘과 서울시장 그리고 자기만이 알고 있는 비밀사항이다" 손 과장이 평가한 윤 과장은 '노련한 토지매입자' 이자 정치자금 제조기였다.

윤 과장이 토지로 정치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세운 계획을 보면 "① 매입은 최저 4천 원 최고 6천 원 한도 내로 한다~ ④ 소유자금은 계약금(10분의 1), 중도금(총액의 2분의 1)까지만 마련토록 한다." 등 4가지 조건이다. 

1970년 5월 20일까지 윤 과장이 청와대 정치자금용으로 매입한 토지가 237,366평, 동원된 대금이 1,270,885,250원이었다고 손 과장은 책에서 주장했다.

마침 1970년 1월 전후 이낙선 상공부장관이 김현옥 시장을 찾았다. 곧바로 제2서울 지구에 상공부 및 산하기관이 모두 들어갈 수 있는 대규모 종합청사 건립을 위해 부지 10만평을 평당 4,500~5,000원에 물색하라는 지시가 윤 과장에게 떨어졌다.

손정목의 책에 언급된 내용들은 1970년 1월 18일부터 1971년 4월 14일까지 월산 총무원장과 윤태진간 계약과 해약, 서영철 등과 3자 계약 등 3차례 거래 조건과 흡사하다. 평당 4,200원~6,100원, 계약금 5,000만원, 중도금 1억 게다가 윤태진은 윤 과장이 매매계약 때 주로 사용한 가명이었다고 손정목은 주장했다. 평수도 10만평이다. 

조계종은 정부가 원하는 10만평에 맞춰주기 위해 1970년 9월 29일 상공부로부터 매각대금 전액을 수령하면서 "매각평수 10만평이 미달될 경우에는 사사지라도 부족평수를 대체 양도키로 한다."는 조항을 넣는 바람에 경내지도 넘겨버린다.



상공부 약정서 ⓒ2021
1969년 12월 18일 열린 중진 및 기관장 회의록. 봉은사 주지 서운 스님이 경내지가 넘어갈 것을 염려하고 있다. 이 회의에서 결의된 동의서에 이후락 조계종 중앙신도회장이 자필서명했다. ⓒ2021 불교닷컴

회의록을 보면 서운 스님은 "봉은사 경내구역을 약속조건이라고 하나 여기선 말로만 가지고 처분 승낙을 할 수 없다"면서 "능선내라고 하나 경내지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으니 찬성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봉은사 주지도 경내지가 팔려나간다는 사실을 알고 처분을 반대한 것이다.

팔려나간 토지가 경내지임을 알 수 있는 또 다른 문건도 있다. 1970년 9월 18일 봉은사 주지가 총무원장에게 보낸 공문이다. 봉은사 경내를 관통하려는 서울시 도로개발을 총무원 차원에서 막아달라는 요청서다. 

너비 35m 도로가 봉은사 옹호문과 일주문 사이를 지나게 돼 봉은사가 반대했으나 서울시는 계획을 변경할 수 없다고 회신한 때문이다. 봉은사는 "도로 예정지 내에 오백여년의 보호목 수십본이 있"으며 "경내지 8,000여평이 도로화하며 사찰문화제 가치가 상실됨"을 우려했다.

옹호문은 사천왕문의 다른 이름이다. 옹호문과 일주문 사이에 너비 35m의 도로가 가능하고, 수십본의 오백년 이상 나무가 있고, 훼손되는 면적이 8,000평에 이른다면 봉은사 일주문은 코엑스보다 더 남쪽이어야 한다. 반대에도 불구하고 1972년 너비 35m의 '봉은로'는 뚫렸다. 1969년 항공사진과 1970년 감정을 위해 촬영한 전경 사진에는 없던 길이 봉은사와 현 코엑스 사이로 개설된다. 이 도로는 현재 '봉은사로'로 개칭됐다. 1970년 팔려나간 토지 상당부분이 경내지라는 방증이다. 일주문도 토지가 팔려나가고 도로가 개설되던 당시 현재의 봉은사 진여문 근처로 이전된 것으로 보인다.

옹호문과 일주문 사이 관통도로를 막아달라며 봉은사가 총무원에 보낸 공문. 1970년 일주문이 현재의 진여문이 아니라 코엑스 근처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 2021 불교닷컴
옹호문과 일주문 사이 관통도로를 막아달라며 봉은사가 총무원에 보낸 공문. 1970년 일주문이 현재의 진여문이 아니라 코엑스 근처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 2021 불교닷컴
항공사진을 통해 1969년에는 없던 봉은사 앞 도로가 1972년에 개설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옹호문과 일주문 사이에 도로가 개설됐으므로, 당시 일주문은 봉은사 앞쪽에서 한참 떨어진 현재의 코엑스 근처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021 불교닷컴
항공사진을 통해 1969년에는 없던 봉은사 앞 도로가 1972년에 개설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옹호문과 일주문 사이에 도로가 개설됐으므로, 당시 일주문은 봉은사 앞쪽에서 한참 떨어진 현재의 코엑스 근처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021 불교닷컴

 

고 손정목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의 저서
고 손정목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의 저서

정차자금 마련 위해 필요했던 봉은사 10만평

이런 황당한 봉은사 토지 매매 이유를 손정목 국장의 증언에서 찾을 수 있다. 

1969년말과 70년 초 사이 김현옥 서울시장과 윤진우 과장이 헬기를 타고 강남 일대를 돌며 발전 가능성 있는 지역을 판단해보라고 했다. 그날 곧바로 박종규 청와대 경호실장 집을 찾았다. 박 실장도 투자가치가 가장 높은 곳을 물었고, 윤 과장이 '탄천을 경계로 서부지역 일대'를 지목하자 박 실장은 "그쪽 땅을 사모으지"라고 지시한다. 탄천 서부 지역은 대부분 봉은사 소유 토지였다.

2주 뒤 윤 과장은 김 시장의 지시로 찾은 제일은행 고태진 전무로부터 341,386,983원이 든 통장을 건네받았다. 고 전무는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을 마치고 주일대사로 발령난 이후락과 같은 울산 출신의 금융계 거물이었다.

"높은 곳에서 나온 자금으로 땅을 사모으고 땅값이 어느 정도 상승하면 되팔아 갖다 바친다. 청와대에서 근무하는 매우 높은 분 한둘과 서울시장 그리고 자기만이 알고 있는 비밀사항이다" 손 과장이 평가한 윤 과장은 '노련한 토지매입자' 이자 정치자금 제조기였다.

윤 과장이 토지로 정치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세운 계획을 보면 "① 매입은 최저 4천 원 최고 6천 원 한도 내로 한다~ ④ 소유자금은 계약금(10분의 1), 중도금(총액의 2분의 1)까지만 마련토록 한다." 등 4가지 조건이다. 

1970년 5월 20일까지 윤 과장이 청와대 정치자금용으로 매입한 토지가 237,366평, 동원된 대금이 1,270,885,250원이었다고 손 과장은 책에서 주장했다.

마침 1970년 1월 전후 이낙선 상공부장관이 김현옥 시장을 찾았다. 곧바로 제2서울 지구에 상공부 및 산하기관이 모두 들어갈 수 있는 대규모 종합청사 건립을 위해 부지 10만평을 평당 4,500~5,000원에 물색하라는 지시가 윤 과장에게 떨어졌다.

손정목의 책에 언급된 내용들은 1970년 1월 18일부터 1971년 4월 14일까지 월산 총무원장과 윤태진간 계약과 해약, 서영철 등과 3자 계약 등 3차례 거래 조건과 흡사하다. 평당 4,200원~6,100원, 계약금 5,000만원, 중도금 1억 게다가 윤태진은 윤 과장이 매매계약 때 주로 사용한 가명이었다고 손정목은 주장했다. 평수도 10만평이다. 

조계종은 정부가 원하는 10만평에 맞춰주기 위해 1970년 9월 29일 상공부로부터 매각대금 전액을 수령하면서 "매각평수 10만평이 미달될 경우에는 사사지라도 부족평수를 대체 양도키로 한다."는 조항을 넣는 바람에 경내지도 넘겨버린다. 사사지는 종교용지를 말한다.

상공부 약정서 ⓒ2021
상공부 약정서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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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반 2021-11-12 09:3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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