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종교인들의 '시장상황'
착한 종교인들의 '시장상황'
  • 이은 기자
  • 승인 2011.11.13 13:4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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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불교포커스 마성 스님의 글을 읽고
최근 <불교포커스>에 실린 마성스님의 글 「종교다원주의에 근거한 아쇼카 선언」을 읽었습니다. 스님의 글이 대부분 제가 <불교닷컴>에 올린 연재물을 인용하며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냥 지나쳐버리자니 스님께서 곡해한 부분들이 그대로 기정사실로 고착될까 염려가 됩니다. 공적 여론을 조성하는 언론 매체에 실린 게시물이라 다른 사람들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 미숙하고 서툰 글을 관심을 가지고 보아 주신 스님께도 그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몇 번의 망설임 끝에 글을 읽은 소회를 밝힙니다.

우선, 종교다원주의라는 개념이 본래 기독교 종교신학에서 배태된 것임에는 분명하지만 오늘날 종교다원 상황 하에서 그것은 특정 종교의 종교용어나 교리개념이 아니라, 사회학적 · 윤리적 · 종교문화적 측면에서 다루어지는 보편적 개념이 되었다는 사실부터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제가 첫 연재물의 제목을「종교다원주의에 대한 오해」라고 잡은 것은 어느 독자가 짚어내 주신 것처럼, 불교적 관점에서 종교다원주의로 수용해선 안 되는 이론을 이른바 「21세기 아쇼카 선언문」이 종교다원주의 이념의 틀로 받아들여 차용한데 대한 문제제기였습니다. ‘용도 폐기된 문법’이라는 수사를 사용한 것은 그 이론이 시대사조에도 전혀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난 수십 년 동안의 종교 간 대화운동에도 불구하고 그 이론을 바탕으로 한 접근 방식이 갈등 상황을 해소하는 데 별반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종교다원주의가 제기된 두 가지 경로

‘종교다원주의’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은 1960년대였습니다. 그 이전에는 종교대화(religions dialogue) 혹은 종교대화운동이란 개념이 친숙하게 사용되었지요.

종교대화운동의 필요성이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인류사회의 문화적 거리가 급속도로 좁아지면서 일어나게 된 지성적 각성과 기독교의 선교학적 맥락이란 두 가지 경로를 통해서였습니다. 한 국가, 한 사회에서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구조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지 않으면 안 되게 된 역사적 현실에 대한 자각이 ‘공존의 윤리’를 모색하는 지성적 흐름을 만들어 냈다면, 피선교지에서의 전통 종교인들과의 마찰을 줄이고 문화적 접근을 시도하고자 한 선교사들의 노력이 후자의 흐름을 만들어 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선교정책에 전환이 일어나고 동양의 전통종교인들이 방어적 입장에 놓이며 시작된 종교 간 대화가 건강하게 전개될 리 없습니다. 그 동안 종교대화의 마당에서 대화를 주도한 것은 거의 언제나 기독교였고 다른 종교들은 수동적으로 끌려 다니는 양상이었습니다. 김종서 교수(서울대 종교학과)는 “기독교는 대화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지배하려 한다.”는 말로 이 상황을 지적하셨지요. 제가 「기독교의 실패 불교가 되풀이해선 안 된다」를 통해 “일그러진 모습 그대로”라고 표현한 것은 바로 여기에 연유합니다.

그런 점에서 근래 들어 원불교가 대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불교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어젠다 선점”이란 화쟁위원회의 말이 시대착오적 넌센스로 다가올망정, ‘불교계 또한 앞으로 종교 간 대화를 주도하는 입장이 되어 보겠다’ 하는 각오로도 읽혀지니 그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높이 평가할 일입니다. 잇달아 터지는 훼불 사건과 사회 각처에서 교묘하게 벌어지고 있는 조직적 종교편향으로 인한 갈등이 위험 수위에 이르고서야 적극적인 행보를 보인다는 점에서 비록 늦은 감이 있지만 말입니다.

종교다원주의에 어떻게 접근할 것이냐가 관건

그렇다면 이제 불교가 종교다원주의에 어떻게 접근할 것이냐가 관건입니다. 「종교평화 실천을 위한 불교인 선언문」, 이른바 ‘21세기 아쇼카 선언문’은 그 방향을 설정하는 기본 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엔 불교의 타종교 · 타문화를 보는 시각, 무엇보다 불교의 종교적 ‘진리’를 규정하는 조계종의 입장이 담길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언론 보도 후 선언문 초안 전문을 입수해 확인하면서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당연히 그럴 것이라는 짐작대로 연기론을 다원주의적 관점에서 해설하고 화엄사상의 일부를 대입하고는 있었으나, 그것이 너무나도 명백하게 기독교 대화신학의 실재중심주의와 구원중심주의의 토대 위에서 전개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종교다원 상황이 던져준 두 가지 과제 가운데 한 가지에 대한 안목이 고의적으로 완전히 배제되어 있었습니다.

종교다원 상황이 종교계에 던진 두 가지 과제
공존의 윤리 / ‘시장상황’

종교다원 상황이 각 종교계에 던진 두 가지 과제, 즉 공존의 윤리를 모색해야 한다는 임무에 지나치게 충실한 나머지, ‘어쩔 수 없이’ 경쟁체제에 놓여 버렸다고 하는 종교의 엄연한 ‘시장상황(market situation)’을 스스로 배제시켜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만 것입니다. 깊은 정신적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이 그런 일은 없었노라고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도망쳐 자신이 만들어 낸 환상 속에 안주해 살아가듯이 말이지요. 불교인 선언문이 불자들에게 자긍심과 행복감을 주기는커녕 좌절감과 패배감, 자존감의 상실을 맛보도록 만든 것은 여기에 연유합니다.

이른바 ‘궁극적 실재’라는 용어 대신 ‘진리’라는 말을 사용한다고 무엇이 달라지는가요? 같은 맥락의 문장에서 단어 하나 바꾸었다고 해서 종교다원주의에 접근하는 방법 자체가 다르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거칠게 표현해서 “말장난”에 불과한 것일 테지요.

닮은꼴 문제의 재연

불교인 선언문(초안) 발표 후 제기된 문제들은 거의 모두, 기독교 종교신학에서 실재중심주의와 구원중심주의가 처음 주창되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제기되어 온 문제들의 불교판 재연입니다. 불교에서 이것이 더욱 큰 문제가 되는 것은 교의의 핵심이 흔들린다는 데 있을 것입니다.

실재중심주의와 구원중심주의는 실체론적 형이상학을 추구하는 관념이 배태시킨 종교 해석학의 한 갈래입니다. 이른바 ‘궁극적 실재’를 실체론적으로 접근하는 데서 불교의 ‘공(空)’을 기독교 성서의 ‘하느님’ 개념과 동일시하는 사고가 나옵니다. 서광 스님께서 댓글에서 언급하신 에크하르트도 그러한 사람들 중의 하나지요. 덧붙이자면, 이 이론을 주창한 기독교계에서는 ‘실재중심적’이란 말을 거의 쓰지 않습니다. 분명하게 ‘신중심적’ 혹은 ‘하나님중심적’이란 용어를 더 즐겨 사용하지요.

이 논리를 역으로 바꾼다면, 모든 종교의 실재, 곧 여호와, 알라, 도(道), 태극, 브라만 등은 정토신앙의 아미타불과 같이 세계종교의 궁극적 바탕인 ‘공(空)’ 혹은 ‘법신(法身)’의 초역사적 화신일 뿐이라는 가정도 성립할 수 있습니다. 교토학파의 아베 마사오가 이것을 주장하고 있어요. 그래서 동국대 김용표 교수는 “공(空)마저도 공하다”고 하신 부처님 말씀에 기대어 실재중심적 종교다원주의와 아베 마사오의 주장을 같은 맥락에서 비판하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하나의 참 진리”를 말하는, 제국주의의 잔영을 벗어나지 못하기로는 마찬가지니까요.

신비주의를 뭐라 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영역에 속하는 거지요. 그러나 객관적이고도 엄격하게 말해서 불교가 진리에 대해 실체론적 접근을 이야기 하는 종교는 아니지 않습니까. 또 설사 신비주의자들의 주장이 진실이라 하더라도 그러한 논리가 한국사회의 종교 간 갈등 상황을 해소하는데 도대체 무슨 도움이 되는 것입니까? 모든 종교의 신앙인들을 신비주의자로 만들겠다는, 그야말로 “야심찬” 계획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탁월한 지적 이해, 인품과 호의가
사상의 완전함까지도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의 훌륭한 인품과 불교에 대한 탁월한 지적 이해, 호의가 그 사람의 사상의 완전함까지도 보증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한 면으로만 보자면 아직까지 기독교 신학계에서 고 변선환 교수를 능가할 사람은 없다고 봅니다. 스위스 바젤대학 유학 시절 5년 동안 이 분은 불교서적만 읽으셨다고 하더군요. 박사학위 주제도 선불교와 관련한 것이었어요. 동국대 고 이기영 교수와 교류하며 나눈 대화는 종교 간 대화의 모범이 될 만 하다고 평가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 변 교수를 학생 시절에 딱 한 번 안암동 개운사에서 뵌 적이 있습니다. “아, 저 분이구나!” 그 때 받은 감동이 그랬지요. 제가 아마 기독인이었다면 아주 열렬한 실재중심주의 지지자가 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고 변선환 교수의 애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지난 10월 하순 사회통합위원회(이하, 사통위)가 주관한 ‘종교평화법(증오방지법)’ 제정 관련 토론회에 개신교계 대표로 참석하신 감신대 이정배 교수입니다. 변 교수가 불교를 공부했다면 이 분은 유교를 철저히 파고들어 기독교 생명/생태신학으로 수용하고 발전시키는데 커다란 공헌을 하셨지요. 신학계에서 사실상 이 분야의 선두에 있습니다.

종교다원주의 논의의 새 경향
동도동기론 / ‘열린 배타주의’의 등장

종교다원주의의 한국적 이해와 관련하여 이정배 교수가 소개하고 있는 ‘동도동기론’을 살펴보는 것은 현재 한국기독교의 진보적 신학계가 어떤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단서가 될 것입니다.

이제까지 한국 사회에서 논의된 종교다원주의는 모두 서구의 잣대로 해석된 종교 이해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실재중심’이니, 혹은 ‘그리스도중심’이니, 혹은 ‘구원중심’이니 하는 것들의 그 중심주의에는 서구의 문화우월주의, 오리엔탈리즘이 내포되어 있어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차이와 다름을 인정하는 시각이 어느 사이엔가 차별로 귀결되고 마는 오류가 생겨나게 된 이유지요.

모든 문화 속에는 그것이 만들어지고 구성되는 원리와 세계관이 내재되어 있기 마련입니다. 이 점을 자각한 진보적 신학자들 사이에서 동양의 텍스트를 동양의 시각에서, 한국의 텍스트를 한국의 시각에서 해석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생겨났습니다.

동도동기론은 우선 동서간의 엄청난 경험의 괴리를 인정하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같아지려고 하기보다는 먼저 다름에 대한 통찰로부터 서로 다른 종교를 이해하고자 하는 거지요. 그러니 개별 종교들의 차이에 근거하여 자신의 종교가 절대적이라고 하는 상호간의 배타적 주장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이때의 배타적 요구는 기존의 배타주의와는 달리 공존이 가능한 열린 특성을 지닙니다. 바로 “열린 배타주의”로 말미암아 우리들 각자는 자신의 전통을 지키면서도 외부로부터 신선한 문화적 수혈을 받는 일도 모순 없이 진행시켜 갈 수 있습니다. 개방성을 지니면서도 정체성을 지키고, 보편성을 추구하면서도 특수성을 잃지 않는 고금동서의 교착점을 살아가고자 하는 태도가 가능한 것입니다. 이러한 종교다원주의의 동도동기론적 해석학의 한 사례가 시인 김지하의 율려(律呂) 사상과 그의 충고를 수용한 율려신학입니다. - 이정배 「한국 개신교 전위 토착신학 연구」. 대한기독교서회. pp.313~329

“선의의 경쟁마저 종교 갈등이라 매도하지 말라”

기사를 보니 사통위 토론회에서 불교계의 종교평화법 제안에 대해 이정배 교수가 “오늘날 종교는 백화점 진열대의 상품처럼 사람들에 의해 선택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며, “선의의 경쟁마저 종교 갈등이라 매도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라고 지적한 대목이 있더군요. 종교다원 상황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는 발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참고로 이것은 종교사회학자 피터 버거의 말입니다.

‘착한 종교인’이 되기 위해 조계종화쟁위가 의도적으로 배제시켜버린 것을 일깨워 주는 발언이죠. 그런 분에게 천도교계 토론자로 참석하신 한양대 윤석산 교수가 기독교계에서도 ‘21세기 아쇼카 선언’과 같은 선언을 할 가능성이 있는지를 물으셨다지요.

1980, 90년대식 다원주의 사고를 하시는 분들이 2010년대식 다원주의 사고를 하는 사람들을 설득하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불교인 선언문의 종교다원주의에 접근하는 방법은 반드시 수정되어야 하고 보완되어야 합니다. 무엇이 문제이며 어떤 방향으로 수정되고 보완되어야 하는지를 밝히고자 한 것이 제가 <불교닷컴>에 올린 여섯 편의 글이었습니다.

답답증이 쌓여버린 탓에 매번 지루할 정도로 길게 쓰고 말았지만 - 이번에도 그렇군요. - 그러고도 하고픈 말은 다 담아내지 못했습니다. 불교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 급선무여서 「연기적 종교다원주의」를 소개하는 것으로 연재를 마무리했습니다.

다원주의가 제기된 실질적인 배경
민주주의와 상식이란 관점에서 논의되어야

저 개인적으로 종교다원주의는 종교의 교리해석적 차원이 아니라 다원주의가 제기된 실질적인 배경에 주목하여 민주주의와 시민사회의 상식이란 관점에서 논의되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교리해석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종교 간 대화는 개인의 영역, 학문의 영역으로 남겨두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어떤 종교에 의한, 어떤 방식의 해석학적 접근도 모든 종교, 모든 종파들을 다 만족시켜주지는 못합니다. 지금까지 그러하였듯 특정 입장을 지지하는 유파를 만들어 내거나 소수 종파의 난립을 가져오기는 하겠지요.

불교적 관점에서도 각 종파의 소의경전에 따라 종교다원주의에 접근하는 또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종교 또한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끊임없이 형성과정 중에 있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주지하다시피 불교인 선언문은 “현실적 마지노선” 운운하며 이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논리가 유일하며 그 논리에 잘못이 있을 수 없다는 확신, 곧 무오류주의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마성스님의 곡해와 비약
논의가 생산적으로 진척되기를

제가 종교다원주의와 구분하기 위해 계속해서, 실재중심적 종교다원주의를 간단히 ‘실재중심주의’라는 용어로 바꿔 사용했음에도 마성스님께서는 ‘종교다원주의’와 제가 비판한 ‘실재중심주의’를 동일한 의미로 해석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한 곡해가, 제가 종교다원주의의 위험성을 말하고 있다는 논지로 나아가게 했고, 심지어는 종교다원주의를 종교가 나설 일이 아니라고 했다는 비약 아닌 비약까지 하시게 된 배경이 아닌가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아직 거센 폭풍우 휘몰아치는 강 한복판에 있습니다. 강 저편은 까마득하게 멀고...... 우리가 배를 버려야 하는 때는 강을 모두 건넌 이후의 일이겠지요.

부처님의 말씀을 끝까지 붙들고자 하시는 스님의 결기를 이해합니다. 저 또한 그러합니다. 그러나 그런 만큼 불교의 종교다원주의 논의가 보다 생산적으로 진척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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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사 단현 2011-11-16 00:04:16
언론 보도 후 선언문 초안 전문을 입수해 확인하면서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짐작대로 연기론을 다원주의적 관점에서 해설하고
화엄사상의 일부를 대입하고는 있었으나,
그것이 너무나도 명백하게 기독교 대화신학의 실재중심주의와 구원중심주의의 토대 위에서 전개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종교다원 상황이 던져준 두 가지 과제 가운데 한 가지에 대한 안목이 고의적으로 완전히 배제되어 있었습니다.

불교인 선언문이 불자들에게 자긍심과 행복감을 주기는커녕
좌절감과 패배감, 자존감의 상실을 맛보도록 만든 것은 여기에 연유합니다.

이른바 ‘궁극적 실재’를 실체론적으로 접근하는 데서 불교의 ‘공(空)’을 기독교 성서의 ‘하느님’ 개념과 동일시하는 사고가 나옵니다.
서광 스님께서 댓글에서 언급하신 에크하르트도 그러한 사람들 중의 하나지요.
덧붙이자면, 이 이론을 주창한 기독교계에서는 ‘실재중심적’이란 말을 거의 쓰지 않습니다.
분명하게 ‘신중심적’ 혹은 ‘하나님중심적’이란 용어를 더 즐겨 사용하지요.

격랑의 강을 다 건너기도 전에 배를 버리는 우를 범하지 말라!!!

남산 2011-11-14 15:30:25
바로 맞추셨습니다.
불자든 크리스챤이든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현실이나 정서와는 무관한
아쇼카 선언문이란 걸 화쟁위가 내놓았습니다.
울 나라 종교 현실과도 동떨어진 거 아닝가요?

학자 나부랭이들 말고, 대체 어느 종교 어느 신자들이
우리 진리와 니네 진리는 사실 다 같다. 그러니 우리 잘 지내보자..
이 딴 걸 주장한답니까?
잘 지내보자... 그걸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죠. 거부할 사람도 없구
문제는 고작 그 /딴 말 하자고 이런 풍파를 일으켜요????
이게 학자들이 지들 잘났다고 머리 맞대고 벌인 거 아닙니까?
그럼 니네들 잘난 머리로 벌여 놓은 게 뭐에 근거한 건지
일반 불자들을 물로 보는 니네들의 오만을 내가 밝혀 주마..
그래서 기자가 저렇게 줄줄이 연재한 거 아닐까요?
알아보니 기독교계에선 종교다원주의 논쟁이 진부할 정도더라구요.
오래 전부터 논쟁이 된 건데 불교계에선 이번 아쇼카 선언으로 겨우 눈 뜬 정도
그만큼 불교가 사회현실에 굼뜨다는 야그죠.
일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 중심이 뭔지 모르겠는데
학자나부랭이들이 전체 불자들의 정서와는 무관하게
학문적 이론에 근거해서 벌여 놓인 일을 근본적으로 지적하자면
그 학문 속으로 들어가는 길 밖에 없다고 봅니다만,
왜?? 일반 상식 가지고는 저네들한테 씨알도 안 먹힐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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