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다원주의에 대한 오해
하나님은 많은 이름을 가졌다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오해
하나님은 많은 이름을 가졌다
  • 이은 기자
  • 승인 2011.09.15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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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용도 폐기된 문법으로 다원주의에 접근하다 ①

【집안에 폭탄이 터졌다. 거의 핵폭탄 수준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집안 식구들이 꽤 많은데, 비상벨을 누르고 비명을 지르고 누가 다쳤는지 뛰어다니고 응급약을 구하고 어떻게 사고를 수습할까 마음을 쓰는 이는 고작해야 다섯 손가락을 넘지 못한다. 나머지는 도무지 반응이 없다. 생각주머니가 텅 빈 사람들처럼, 모든 감각기관의 작동이 멈춰 선 사람들처럼, 풍비박산된 집에서 그저 주는 대로 먹고 자고 뒹굴고... 할 뿐이다. 기이한 풍경이다.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오해라는 소재로 3회에 걸쳐 연재한다.

독자 여러분들의 반론을 기대한다. 】

「하나님은 많은 이름을 가졌다(God has many names)」. 영국 태생의 미국 종교다원주의 신학자 존 힉(John Hick)이 낸 책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찬수 교수(강남대)가 번역해 1991년 도서출판 ‘창’을 통해 나왔다.

‘하나님은 많은 이름을 가졌다’라는 책의 이름만큼 (기독교 외의)다른 종교를 보는 힉의 시각과 이해를 분명하게 드러내주는 것도 없다. 그 자신 책의 첫 장 ‘영적인 순례’에서 밝혔다시피 힉은 다양한 종교 경험과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던 영국 이민자사회에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 다인종 다종교 현실에 눈뜬다. 특히 타종교에 대해 좀 더 깊이 연구할 목적으로 일 년 동안 인도와 스리랑카에 머문 적이 있는데, 이때의 경험이 훗날 힉의 종교다원주의 철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존 힉의 종교다원주의는 임마누엘 칸트의 인식론을 배경으로 한다. 칸트의 인식론의 근본 특징은 인간경험 저 편에 있는 물자체(物自體, 감성과 별개라고, 즉 우리 정신의 외부에 있다고 여겨지는 사물을 가리키는 칸트의 용어)의 세계와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현상세계를 구별하는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사물보다 정신의 상태나 활동이 앞서며 더 근본적이라고 주장하는 철학 이론을 관념론이라고 한다. 칸트는 자신의 이론을 ‘선험적 관념론’이라고 일컫는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공간과 시간, 어떤 개념은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칸트는 이를 ‘현상계’라고 불렀다.)의 특징이지 경험과 무관하다고 여겨지는 세계 자체(본질계 혹은 ‘실재계’라고도 번역됨. 칸트의 용어)의 특징이 아니다.
- 『철학의 책』. 윌 버킹엄 외. 지식갤러리. 2011년 p.169

칸트에 따르면, 인간은 본질계(the noumenal world) 그 자체를 이해하거나 인식할 수 없다. 단지 현상계(the phenomenal world)를 통해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본질계는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훨씬 초월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존 힉은 칸트의 인식론을 자신의 종교 경험이해에 그대로 수용한다. 그리고 자신의 다원주의 이론의 핵심이 되는 하나의 형이상학적인 가설을 세우게 된다. 세계 종교전통을 초월해 “하나의 궁극적인 실재”, 무한하고 신비로운 힘을 지닌 신적(神的) 실재가 존재해 왔다는 주장이다.

또 현상계의 이해를 통해 본질계를 유추할 수 있듯이 현상계에 해당하는 종교현상을 통해 ‘실재 그 자체(the Real An sich)’가 존재하고 있음을 존재론적으로 유추할 수 있다고 힉은 보았다.

그런데 만약 실재(the Real)는 한 분인데 그 실재에 대한 우리 인간의 지각이 다원적이고 다양하다면 우리는, 다양한 인간 정서(metalities)에 의해 다양하게 감지되고 다양한 문화적 역사에 의해서 형성된, 동일하고 무한한 초월적 실재에 대해 다양하게 감지한다는 가정의 기초를 갖게 된다.

다시 말해, ‘모든 종교의 배후에는 하나의 영, 하나의 신적 실재, 혹은 하나의 절대자, 하나의 로고스가 존재하되, 역사적 · 문화적 혹은 심리학적 맥락에 따라 동등한 가치를 지닌 계시적인 종교 경험들이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발생해 왔으며, 그것은 모두 동일한 실재에 대한 인간의 다양한 응답’이라는 주장을 펴기에 이른 것이다. - 「존 힉의 종교다원주의 철학의 기초」. 김영태. 서울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1994. 『종교다원주의와 종교윤리』p.132

이 가설을 바탕으로 획은 세계 종교들의 ‘실재’ 이미지를 ‘인격적으로 경험되는 신’ 개념(personal)과 ‘비인격적으로 경험되는 절대자’ 개념(Absolute) 두 가지로 유형화시킨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 힌두교의 박티전통, 불교의 대승전통이 전자에 속하고, 힌두교의 베단타전통, 도교의 도(道), 선불교와 상좌부불교의 무(無), 다르마(法), 공(Sunyata) 같은 개념은 후자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 「존 힉의 종교다원주의 철학연구」. 김재영. 앞 책 p.160~167

힉(Hick)은 종교적 숭배, 혹은 체험의 대상이 되는, 그 자신이 가정한 ‘실재’를 어떻게 묘사해야 할 지 고민한 끝에 ‘영원한 一者(the Eternal One)'라는 말을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하느님(God)’이라는 칭호를 유신론적 의미를 초월해 사용하면서 기독교가 새롭게 거듭나고 타종교와의 공존을 통해 세계 평화에 기여하려면 ‘기독교가 그리스도 중심으로부터 신(神)중심주의에로 방향의 대전환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에 이른다. - 김영태. 앞 책 p.122

J. 힉을 비롯 폴 니터, 레이몬드 파니카,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 S. 사마르타 등이 ‘신중심적’ 모델을 내세워 1980년대 다원주의 종교신학을 이끌며 종교대화에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주도했다고 자처한 사람들이다.

폴 니터(P.Knitter, 진제스님 일행이 찾아가는 미국 유니온신학대학의 바로 그 폴 니터) 교수에 따르면, 힉은 ‘실재’에 대한 유신론적 해석이 불교 같은 종교에는 적합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제 ‘實在하는 것(the Real)', '참된 것(the True)', 혹은 간단히 '실재'와 같은 용어를 더 좋아한다.” - 「존 힉의 종교다원주의 철학의 기초」. 김영태. 앞 책 P.134

힉에 따르면 본질적으로 모든 종교언어는 그 언어를 통해 ‘궁극적인 실재’를 표현해 주고 있다. 즉 종교인들이 각각 다른 삶의 공동체 속에서 다양한 종교언어를 사용한다고 할지라도 자세히 분석해보면 그 모든 종교 언어는 ‘초월적인 실재’를 ‘가리키고 있을(pointer)’ 뿐만 아니라 그 ‘실재’를 나타내주려는 ‘의도(intentions)’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곳, 가리키고 의도하는 곳인 ‘하나의 무한한 신적 실재’에 초점을 두어 종교언어를 연구하면 상이한 종교언어라고 할지라도 하나의 근본적인 공통점을 갖게 될 것이며, 바로 그 공통점에 근거해서 종교인들은 서로 진실된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힉의 견해다. - 김재영, 앞 책 P.162

자, 이쯤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이른바 ‘21세기 아쇼카 선언문’ 초안의 최대 쟁점을 살펴보자.

- 불교는 이웃종교에도 진리가 있음을 인정합니다. 진리에 대한 표현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 부처님께서는 당신의 가르침을 진리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진리를 가리키는 손가락이요, 생사윤회의 고해를 건너는 뗏목이라고 하십니다. 불교, 그 자체가 진리가 아니라 진리에 이르는 길이라는 가르침입니다.

- 전통마다 진리에 대한 표현은 다를 수 있으며 진리에 이르는 방법 또한 다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문화적, 역사적 배경에 따라 자신들이 가장 좋아하는 표현과 방법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표현하는 말과 그에 이르는 길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기 때문입니다.

- 진리에 대한 표현은 다양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진리는 더 큰 진리의 한 조각일 뿐이라는......

문장의 경전적 근거는 차치하고, 힉이 ‘하나의 궁극적 실재’ 혹은 ‘영원한 일자’라고 일컬었던 것이 ‘진리’라는 말로 대체되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누구라도 알 수 있다.

한국사회 종교 간 갈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조계종단 명의로 발표하는 ‘불교인 선언문’의 근본 틀이 ‘신중심적’ 종교다원주의 대화신학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비록 선언문의 총론에서 연기법을 언급하고는 있으나 다루고 있는 사안에 과연 적합한 적용이었는지, 또 그것이 얼마나 설득력을 갖는 것인지에 대해 따로 냉철한 비판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객관적인 입장에서 윤리 ‧ 종교학계 전문가들은 이러한 종교신학적 관점의 종교다원주의에 대해 어떤 견해를 내놓고 있을까,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먼저, 많은 종교학자들이 신중심적 모델은 유일신론적 전통에 속한 종교에서는 통용될 수 있으나, 불교나 도교, 유교의 경우처럼 초월적 인격신의 관념을 가지지 않는 종교 전통에 대해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둔다.

기독교에서 타종교에 대한 관심이 어떻게 일어났던가부터 따져 보기로 하자. 적어도 기독교도 독불장군이 아니라 여러 종교들 중에 하나임을 인식했던 슐라이어막허(F.Schleiermacher)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초월적이고, 유한한 것들과 동일시 될 수 없으나, 신성(神性)도 역사 속에 주어졌을 때는 상대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던 트뢸치(E.Tröltsch)의 역사적 상대주의(historical relativism)는 기독교 전통의 절대성에 대한 충격적 도전이었다고 하겠다. 기독교의 성공과 영성을 토대로 우월성을 강조했던 초기 입장을 넘어서 나중에는 심지어 기독교의 우수성이 서구인들에게만 해당되고, 동양인들에게는 동양종교가 같은 역할을 해왔다고까지 트뢸치는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타종교에 대한 태도가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역시 에딘버러 회의 이후 전개되어 온 선교학의 맥락에서였다. 선교를 하려면 우선 타종교를 알고 또 그들과 대화는 해야 하므로 그들을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궁극적 의미에서 그들을 완성시켜 주는 것은 바로 기독교라는 소위 “성취학파”의 이론이 등장하였다.
-「기독교와의 대화 : 타종교의 입장」. 김종서. 『종교다원주의와 종교윤리』 p.231

트뢸치 사상의 문제점은 기독교라는 역사적 종교의 상대성을 명확히 한 사실에 있기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성을 어떤 의미에서든 견지하려고 했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중략) 그가 말한 제종교의 가치객관적인 비교론은 결국 서구적인 인격주의가 동양적인 비인격주의보다 우월하다는 논증 불가능한 전제에 기초하고 있는 하나의 종교철학이며 또한 기독교의 절대성을 전제로 한 논의에 불과한 것이다. 트뢸치는 장기간에 걸쳐 역사를 연구한 결과, 기독교를 종교라는 일반 개념으로 다루지 않게 된다. 기독교는 철저하게 역사적이므로 독특한 역사적 개체이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를 역사적 현실(즉 유럽문명과의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다루었다. 트뢸치에 따르면 기독교의 절대성은 이러한 역사적 현실 안에서 추구되어야만 했다. 그리고 하나의 역사적 개체이자 문화종합으로서의 유럽문명 바로 여기에 기독교의 운명이 걸려 있었다. ...(중략) 트뢸치는 단자론적인 이해에 바탕을 두고, 순수 역사적인 형이상학적 절대성에의 참여를 구분해 낸 후 그것을 주관적 절대성으로 규정하였다.
- 「기독교의 절대성에 대한 비판적 고찰」. 위거찬. 앞 책 p.488~489

트뢸치가 이렇게 절대성을 주관성의 영역으로 되돌리기까지 계속 지니고 있으려고 하였던 것은, 절대성이 종교신앙의 필연적인 요소이며 또 그것이 없이는 종교신앙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 위거찬. 앞 책 p.4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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