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극적 실재’가 어떻게 하나의 인격적인 존재면서 비인격적인 원리일 수 있는가? 어떻게 우리의 가장 깊은 자아와 하나가 되면서 영원한 ‘타자’일 수 있는가? 어떻게 사랑하는 존재면서 철저히 무관해 질 수도 있는가? 어떻게 선하면서 도덕성을 초월하는가? 어떻게 인식할 수 있으면서 인식할 수 없는 것일 수 있는가? 어떻게 충만한 존재면서 공일 수 있는가?” - 캐롤라인 F. 데이비스. 『화이트헤드철학과 자연주의적 종교론』. 데이빗 R 그리핀 저. 도서출판 동과서. p.456
기독교라는 단일 종교의 울타리 안에서 오랫동안 안주해 온 서구사회가 자신들이 알고 있던 종교경험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동양종교와 처음 만났을 때, 그들이 얼마나 곤혹스러워 하고 혼란스러워 했는지 엿보이는 고백이 아닐 수 없다.
불교나 힌두교, 유교, 도교 같은 동양종교를 처음 만났을 때 서구의 종교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이 혼란과 갈등을 겪은 것은 그들이 “궁극적 실재로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틀림없이 하나이면서 동일한 것이어야 한다.”는 전제에 매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종교를 왜 선택하는가?
왜 이 종교에 헌신하는가?
주지하다시피 영국의 신학자이자 종교철학자 존 힉(John Hick)은 하나의 통일적 원리 아래 유신론적 전통과 비유신론적 전통을 모두 수렴하는 - 정상에 오르는 여러 갈래 길로서의 세계종교들을 규정짓는 - ‘실재중심적(=신중심적) 종교다원주의’를 구상하는 것으로 이 갈등을 해소한다.¹
그리고 1986년 봄, 미국 클레어몬트 대학에서 열린 심포지엄을 중심으로 힉과 니터는 책 한 권을 펴냈다. 기독교의 ‘유일성’은 더 이상 문자적 진실이 아니며, 그것은 ‘신화’요, 따라서 재해석될 때에만 다시금 진리일 수 있다는 것이 책의 핵심이었다. 이 책의 기고자 12명은 각각 다른 시각에서 보기는 하지만, 기독교의 배타적 유일성은 포기해야 한다는 같은 주장을 담고 있었다. 그들은 바야흐로 종교신학이 ‘루비콘 강’을 건너가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종교의 역사적 상대성과는 무관하게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그러한 주장은 과연 얼마마한 정직성을 담보한 것이었을까.
‘종교 간의 대화’와 ‘복음의 증언’이라는 과제는 정녕 어느 한 쪽을 선택하면 다른 한 쪽은 버려야 하는 모순관계인가? 다양한 종교가 결국 하나의 진리에 이르는 서로 다른 길일뿐이라면 “나는 이 종교를 왜 선택하는가?” “나는 왜 이 종교에 헌신하는가?” 하는 질문에 들은 명쾌한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 이러한 다원주의 이론은 불가피하게 가치중립적인 상대주의로 빠질 위험을 안고 있다. 논리의 불완전성과 종교적 효용성에 대한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면서 실재중심주의자들은 곧 신랄한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다원주의 - 예!”
“특유성 포기 - 아니오!”
‘하나의 궁극적 실재’는 존재하지 않았다.
1990년 인도의 가톨릭 신학자 드코스타(Gavin D'Costa)는 실재중심주의 유형의 신학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일단의 신학자들을 모아 책을 펴낸다. 흥미로운 것은 원고를 기고한 14명의 신학자들이 한결같이 “다원주의 - 예!” “기독교의 특유성 포기 - 아니오!”라는 입장을 견지했다는 것이다. 이들 가운데 오랫동안 일본의 선불교 및 정토진종의 뛰어난 불교인들과 나눈 진지한 대화를 통해 얻어낸 결론을 토대로 종교경험을 해석하는 미국의 저명한 과정신학자 존 캅(John B. Cobb Jr.)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니터를 포함한 ‘다원주의자들’의 논리는 뭔가 ‘종교의 공통본질’에 속하는 것이 있다는 가정 하에 출발하고 있다.² (오랜 기간 선불교 승려들과 대화를 나눈 결과에 따르면) 기독교 신앙과 불교 신앙 사이에는 ‘하나의 궁극적 실재’가 존재하지 않았다. 기독교는 유한한 현상 세계의 ‘기저(underlying) 실재’를 말하나, 불교는 유한 세계 ‘자체의 실재성’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신’으로 바꾼다고 하여, 그것 자체가 종교신학의 ‘모형 전환(parading shift)'은 아님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즉 아무리 신을 중심으로 생각한다고 할지라도,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적 방식으로 신을 생각할 것이며, 회교도들은 회교적 방식으로 신을 생각할 것이다. - 홍정수. 「종교신학의 두 기준」. 『종교다원주의와 한국적 신학』. 한국신학연구소. 1992년. p.173
(힉-니터와 같은 실재중심주의자들은) 모든 종교가 하나의 궁극적 실재에 중심을 두고 있다고 전제하면서, 너무 쉽게 그 실재에 대한 자신의 정의를 다른 종교들 위에 적용함으로써 개별 종교의 역사적 독특성을 놓쳐 버렸으며, 이는 역설적으로 비다원주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 이정배. 「한국 개신교 전위(前衛) 토착신학 연구」. 대한기독교서회. 2003년. p.320
이에 대해 니터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니터의 항변,
‘공통 근거’를 부정한다면, 대화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왜 대화해야 하는가?
모든 종류의 ‘공통 근거’를 부정한다면, 종교들 사이의 대화 가능성은 어디서 오는가? 대화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만일 정말로 어느 두 종교가 사과와 오렌지 사이 같다면, 그들은 어떻게 대화할 수 있는가? 아니, 왜 대화해야 하는가? 종교간의 대화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은 적어도 암묵적으로는 “세계 종교들을 묶어주는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긍정하는 사람들이다. - 홍정수. 앞 책 p.172
자신을 이렇게 변호한 니터는 예수의 메시지의 핵심이자 비전의 상징이 ‘하나님의 나라(the Reign of God)'라는 것에 주목하여 ‘세계의 궁핍하고 억압받는 자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함’이라는 해방신학의 기초 위에 이른바 ‘구원중심주의’를 펼쳐나간다. 종교의 “실천”을 대화의 전면에 올림으로써 찬사를 받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터는 여전히 하나의 신적(神的) 실재 아래 모든 종교를 수렴하는 제국주의의 틀을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다원주의가 아니라 사실상 포괄주의의 길을 가고 있다.
그런데 다원주의에 호응하면서도 힉과 니터의 주장에 심한 거부반응을 보이는 존 캅은 대체 누굴까? 과정신학이 주장하는 종교다원주의는 어떤 유형일까? 그것이 지금 혼란을 겪고 있는 불교계에 주는 의미는 또 무엇일까?
모든 것은 흐른다!
모든 현실적 존재는 변하는 과정 속에 있다.
두 개의 궁극자 - 창조성 그리고 신
과정신학은 “과정”이란 말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유기체철학)을 바탕으로 하는 신학이다.
화이트헤드 철학은 난해하기로 유명하다. 그가 지은 어떤 책을 펼쳐도 곤혹스러움을 피할 수 없다. 현실적 존재, 현실적 계기, 연장적 연속체, 합생, 파악, 등 등... 그 문장의 난해성은 그가 운용하고 있는 개념과 용어의 난해성에서 유래한다. 하지만 그 난해한 용어의 구름을 한거풀 벗겨내면 마치 다락방 청소 중에 오래된 동양의 고전을 한 권 발견한 느낌을 받게 된다.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을 꿰뚫으며 전개되는 사상의 요체는 고대 직관의 합리적 재해석에 있다.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가 “모든 사물은 흐른다(all things flow).”고 했다던가? 이것을 화이트헤드는 “모든 사물은 변한다.”와 같은 의미로 해석했다. 변하는 속도가 문제일 따름이지 전혀 변하지 않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것,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모두 변한다. 세상의 모든 것이 이렇게 변한다면 완전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봐야 한다. 그렇게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끊임없이 새로 생겨나고 또 사라진다. 모든 현실적 존재는 변하는 과정 속에 있다.
화이트헤드에게 있어 신은 창조에 앞서 있지 않고 창조와 더불어 있다. 그는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움직임을 만드는 부동의 동자로서의 신 개념을 거부한다. 신은 세계 없이는 존속할 수 없다. 신은 세계와 더불어 끊임없이 변화를 주고받으며 모든 피조물을 향해 창조적인 사랑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불교적 사고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거 불교사상을 컨닝한 거 아냐?” 하는 의심을 갖게 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화이트헤드가 본격적으로 철학가의 길로 들어서기 전에 영국과 미국에서 매우 탁월한 수학자요 물리학자로 유명세를 탔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의 철학 이론을 긍정하고 이해하기가 훨씬 쉬워질 것이다.
과정철학과 화엄형이상학의 만남
과정철학과 화엄불교의 유사성과 상이성을 비교분석한 세계 지성인들의 연구물들이 국내에 소개되어 있다. 그 가운데 종교 간 대화와 관련한 것으로는 존 캅이 지은 「Beyond Dialogue(대화를 넘어서)」가 있다. 작년에 이문출판사에서 나왔다. 이 책에서 캅은 불교적 실재와의 첫 만남을 “충격”이란 용어로 표현하고 있다.
화해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하기 위해 세운 논리를 거부한다!
캅은 힉과 니터를 비롯한 실재중심주의자들이 세계의 모든 종교가 화합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하기 위해서, 모든 종교는 하나의 궁극적 실재를 공통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가설을 세워야만 했다고 비판한다.
캅이 과정철학에 동조하는 신학자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가 이런 식의 본질주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을 예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주지하다시피 삼라만상의 모든 사물은 실체나 본질 혹은 본체를 가지고 있지 않고, 단지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생성만이 있을 뿐이라는 입장을 강조하는 것이 과정사상이다. 이런 과정사상의 빛에서 볼 때, 모든 존재자들의 배경에는 변하지 않는 공통 본질로서의 물자체나, 혹은 선험적이고 자기 동일적인 궁극적 실재가 자리잡고 있다는 철학적 가설을, 캅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특히 이러한 본질주의 이론은 양자역학이나 소립자 물리학과 같은 현대의 신과학에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낡은 이론이므로, 그런 이론을 종교에 적용하는 실재중심적 다원주의의 본질주의적 접근을 캅은 끝까지 신뢰할 수 없었을 것이다. - 장왕식. 「종교적 상대주의를 넘어서」. 대한기독교서회. 2009년. p.113
모든 종교의 가르침은 결국 동질의 진리체험을 위한 여러 갈래의 길일뿐이므로 서로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주장은 어쩌면 종교간 갈등과 그로 인해 파생되는 불행을 막기 위한 가장 효율적이고 쉬운 방법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의를 잃어버린 무차별적인 관용이 기득권자들의 자기합리화를 위한 논리로 악용되어질 수 있듯이, 가장 쉬워 보이는 것이 가장 옳은 것은 아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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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존 힉이 가정의 기초를 세우고 폴 니터에 의해 확산된 이 이론을 필자는 보다 표기를 쉽게 하기 위해서 간단히 ‘실재중심주의’라고 부른다.
2. 세계종교들은 모두 공통의 본질을 갖고 있으며, 하나의 신적 실재가 역사 · 문화적 배경에 따라 각각 달리 표현되었다고 보는 견해에 대해서는 신화와 꿈에 관한 미르치아 엘리아데의 저작물이나 조셉 캠벨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등을 참고하시라.
* 이 연재는 3회에 걸쳐서 종교다원주의에 대해 연재 합니다.
그건 기자가 좀더 친절하게 글쓰기 할 수 있는데도 안한다고 느껴져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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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러들과 얘기하자고 댓글을 쓴건 아니고 기자가 좀 확실히 느꼈으면 하고 강하게 어필한 것입니다.
기자 본인도 자기의 기사가 많이 읽혀지는게 좋지요.
기자에게도 좋으라고 쓴 소리한 것이니 이해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