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다원주의 성공의 필요충분조건
종교다원주의 성공의 필요충분조건
  • 이은 기자
  • 승인 2011.10.13 13:07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은 기자의 종교다원주의 샐러드 3-2
1991~92년, 기독교와 전통종교와의 관계에 주목하여 토착화 신학을 제창한 이후 힉-니터의 실재중심주의에 근거한 종교 간 대화, 특히 불교와의 대화에 열의를 쏟았던 감리교신학대학 변선환 학장이 종교재판에 회부되고 끝내 교단으로부터 출교(黜敎) 처분을 받은 사태가 있었는데, 이 때 변선환 교수와 더불어 출교 처분을 받은 신학자가 한 명 더 있었다. 변선환 교수 은퇴기념 논문집에 ‘종교신학의 두 기준’이란 제목으로 실린 그의 논문을 통해 종교 집단에서 종교다원주의를 성공적으로 전개하기 위한 조건이 무엇인지 들어보자.

종교다원주의 성공의 필요충분조건
개방성 / 신앙의 충실성

(1) 종교 일반이 지니고 있는 ‘종교적 배타성’ - 필자는 어떤 종교든 이 같은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보며, 이것이 종교와 일반 사상, 일반 단체나 세속의 체계 사이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라고 생각한다. - 을 철저히, 진지하게 여기면서, (2) 다른 사람들의 신앙을 향하여 역시 충분히 열린 마음과 행동을 견지할 수 있어야 한다.

신앙인들은 대개 전자에 대하여는 민감하나 후자에 대하여는 거의 무관심하며, 반면에 학자들은 - 일반 신앙인들의 눈에는 - 후자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나머지 전자의 ‘기준’에 대하여는 소홀하다.

여기서 필자가 강조하는 바는 우리 시대의 종교신학의 두 기준은 하나(세계 평화 / 개방성)가 아니라, 둘(그리고 신앙의 충실성 / 본래성)이라고 하는 점이다. - 홍정수. 『종교다원주의와 한국적 신학 』. 한국신학연구소. 1992년. p.165

‘종교신학’에 ‘종교다원주의’를 대입하여 읽는다면 글쓴이가 무엇을 말하는지 보다 선명해 질것이다. 신앙에 대한 각 개인의 ‘고백’의 의미를 간과한 종교다원주의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당시 기독교 신학계는 절감했다. 여기서 우리는 90년대 이후 기독교 신학계가 종교다원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실재중심주의를 거부하는 전혀 다른 유형의 종교다원주의 대화론에 대해 조심스럽게, 그러나 폭 넓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다르기 때문에 대화한다!

힉-니터가 종교들 간의 공통 본질에 초점을 두었다면,¹ 새로운 유형의 종교다원주의는 종교 간의 차이를 공통기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며 대화를 전개시켜 나간다. 이 그룹에게 종교 간의 만남과 대화는 상호간에 어떤 공통 기반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도 아니고, 그래서 더 효과를 보는 것도 아니다. 각 종교들은 공통점을 미리 말할 수 없을 만큼 현저히 다를 뿐만 아니라, 다르기 때문에 더욱 대화가 필요하고, 그래서 더욱 효과적이며 생산적이다.

이들에게 공통 본질이라는 것은 미리 전제되는 것이 아니라, 대화의 결과로 발견되어지거나 서로 배움으로써 생산될 수 있는 것이다. 이 만남의 목적은 “상호변혁(mutual transformation)”에 있다. 서로 다르다는 것은 서로로부터 배울 것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서로로부터 배운다는 것은 만남을 통해 변화하고 성숙하고 변혁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한인철. 「종교다원주의의 유형」. 한국기독교연구소. 2005년. pp.54~55

종교다원주의의 또 다른 관점 - ‘열려 있는 다원주의’

홍정수 교수는 그의 논문에서 이 유형에 대해 쓰면서 ‘열려 있는 다원주의’라고 표제를 달았다. 과정신학자들의 이야기다.

과정신학자 캅(John B. Cobb)에 의하면 - 그는 오랫동안 일본의 뛰어난 선불교 승려 및 정토진종 종교인들과의 진지한 대화를 통해서 얻게 된 결론을 토대로 자신의 신학이론을 발전시켰다.

힉-니터가 말하는 ‘다원주의’는 (1) 모든 주요 종교들이 어느 정도는 배타적 주장, 보편적 주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 (2) 그리고 각각의 종교들은 사실상 독특한 역사를 살아왔다고 하는 현실을 무시하고 있으며, (3) 따라서 세계의 ‘종교들’ 배후에 어떤 공통 본질이 있다고 상정하는데,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 홍정수. 앞 책 p.178

실재중심주의자들은 세계의 모든 종교가 화해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하기 위해 모든 종교가 하나의 궁극적 실재를 공통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가설을 세움으로써 각 종교들의 독특성을 약화시켰다. 신적(神的)인 존재에 대한 믿음과 관련된 ‘종교’의 정의는 아시아 종교들의 관점에서는 매우 적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상이한 그들의 전통에 억지로 부과한 서구적 범주일 뿐이다. 모든 종교적인 고백의 다양성을 포괄하려는 하나의 공통기반을 제시하는 것보다 각자의 유산과 가르침으로부터의 진리를 밝히는 것이 훨씬 정직하고 열린 태도이다.” - 최세나. 「종교다원주의의 그리스도론적 근거」. 이화여대 신학대학원 석사논문. 2007년. p.79

각기 다른 목표들을 향해 응답하고
서로 다른 길을 만들어 간다.

자기기만과 자기방어로부터 벗어나라
대화의 목적은 “쌍방향적인 변혁!”

캅의 핵심은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서로 다른 종교전통들은 각기 다른 목표들을 향해 응답하고, 또 서로 다른 길을 만들어 간다.” - 캅(Cobb). 「종교다원주의와 오직 예수」. 조명문화사. 강성도 옮김. 1992년. p.85

캅이 보기에 전통 그리스도론의 오류는 “예수가 중심이라는 것에 있는 게 아니라 예수를 중심으로 한 그 범주가 너무나 협소하다”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타종교에 속한 신앙인들을 거부하는 조그만 원을 그리는 게 아니라, 그들에게도 나를 개방하는 것”을 함축한다. 때문에 캅은 타종교의 진리로부터 배움으로써 기독교 전통의 지혜와 통찰에 통합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믿음에 더 충실한 것이라 보았다. 종교 간의 대화와 다원주의를 주장함에 있어 자기기만과 자기방어로부터 벗어나라고 캅은 충고한다. - 최세나. 앞 책 p.71

그가 “자신의 종교에 대한 성실성과 정직성”에 얼마나 큰 무게 중심을 두는 지는 교토학파²의 지성 아베 마사오(阿部正雄)가 불교와 기독교를 중심으로 대화를 시도하고 책으로 엮어낼 때 책의 서문에서 대화에 임하는 그의 태도를 높이 평가하며 긍정적으로 찬사를 보내는 데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그리스도를 대할 때 아베 마사오가 취하는 태도의 장점은 그가 신을 부정함에서 보이는 비타협성이다. 교토학파의 다른 이들은 하느님(God)이라는 단어를 긍정적으로 사용한다. 아베 마사오는 이런 태도가 그리스도교를 잘못 판단하여 제대로 된 비판을 약화한다고 지적한다. 더욱이 아베 마사오 자신은 준신론적 형태의 불교(정토신앙을 말함) 안에서 성장해 왔고 이 불교에서 진정하고 순수한 형태의 불교로 회두했다고 확신한다. 그는 신론을 불교 안에서 이해했으며, 여전히 신론적 이해에 매달려 있는 이들을 해방하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나오는 신앙과 아베 마사오의 이해는 철저히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을 법신이나 공과 동일시하고 따라서 차이를 넘어 공통의 대상을 재확인함으로써 서로의 차이를 너무 쉽게 해결하려는 시도³는 아베 마사오의 엄격하고도 명료한 설명에 직면함으로써 더욱 어려워졌다. - 존 캅. ‘우리신학연구소 종교 간 대화총서Ⅱ’ 「텅 빈 충만 : 空의 하느님」. 2009년. p.19

이러한 다원주의에 있어 종교 간 만남의 목적이 개종에 있지 않음은 명확하다.⁴ 다원주의가 배타주의나 포괄주의와 비교하여 그 패러다임에 있어 근본적으로 달라진 점은, 바로 대화의 목적이 일방적인 개종으로부터 쌍방향적인 변혁에로 바뀐 데 있다. 이들에게 있어 대화는 더 이상 ‘개종의 수단’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를 보다 잘 이해하고 보다 잘 협력하는 것을 배우는”, 그리고 궁극적으로 “서로의 생각과 통찰을 배워 각각의 서로 다른 길들을 성숙시키는 통로”이다. - 최세나. 앞 책 p. 33

하지만, 이렇게 완전히 열려진 대화에 있어서는 사람에 따라 대화의 과정에서 개종이 일어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 또한 자연스럽게 용인되고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태도가 캅의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과정-관계적 접근법’이다.

독특성을 강조하고 고집하는 동시에
다양성과 고유한 가치를 인정하며
각 종교의 차이를 열어둠으로써
보다 근본적인 다원주의를 시도하다

자신들의 이론에 근거해 캅은 기독교 신학자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며 이른바 ‘그리스도 중심적 다원주의’⁵를 발전시킨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예수에 대한 신적 혹은 메시아적 칭호가 아니라, 신과 세계의 상호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창조적 변혁의 이미지’로서의 그리스도이다.

캅의 ‘그리스도 중심주의’는 기독교의 독특성을 강조하고 고집하는 동시에 각 종교의 차이를 열어둠으로써 보다 근본적인 다원주의를 시도하였다는 데 의의가 있다. 캅의 접근법은 다원주의에 대한 보수적인 한국교회의 잘못된 시각을 바로잡아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끌어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받고 있다.

니터 유형의 다원주의는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형태의 신앙 자체를 상대화시킴과 동시에 ‘비규범적 기독론’을 요구함으로써⁶ 역시 타종교의 독특성을 충분히, 진지하게 대하지 못한다는 단점을 안고 있다. 반면, 캅의 대화 접근법은 타종교인들을 기독교로 포섭하려는 시도를 극복하고, 진정한 대화의 가능성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그 방향만은 제대로 잡아주고 있다고 하겠다. - 홍정수. 앞 책 p.181

대화론의 두 관점 중에 특정의 하나를 선택한 이유
불자들은 해명을 들을 권리가 있다!

필자는 이른바 ‘종교평화 불교인 선언문(이하 ‘선언문’)’이 다원주의의 정신을 21세기에 새롭게 받아들여야 할 정법으로 규정하면서 대화론의 두 관점 중에서 특정의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하나를 버린 이유와 명분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이 땅에서 지난 30여 년 간 진행되어 온 종교 간 대화의 논리가 바로 힉-니터의 실재중심주의에 근거한 대화였다. 그 결과가 오늘날 불교계가 처한 상황이고, 한국 종교계가 처한 현실이다. 대화신학의 실재중심주의는 이미 오래전부터 “신학을 위한 신학”, “교회로부터 유리된 신학”이라는 비판을 받아 왔다. 일부 유파의 종교 엘리트 그룹 외에 도무지 현실에서 적용이 되지 않는 이론이었다. 한 두 해도 아니고 무려 30년 동안 현장 검증에서 실패한 이론이란 얘기다.

불교는 종교다원주의
이념의 틀이 되기에 부적당한가?

선언문이 몇 몇 개인이나 사설 단체 명의가 아니라 종단에서 직접 만들어 ‘불교인 선언문’이란 명칭으로 발표되는 거라면 불자인 우리는 마땅히, 선언문을 작성하고 추인한 화쟁위원회가 기독교 신학에 근거한 종교다원주의 대화론의 두 관점 중에서 특정의 하나를 선택한 이유와 명분에 대해 설명을 들을 권리가 있다.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 보자.
불교는 종교다원주의 이념의 틀이 되기에 부적당한가?⁷

남의 집 보자기를 빌어다가 불교의 용어와 세속의 언어를 뒤섞어 싸매 놓고 이것이 “불교의 다원주의”라고 우기는 격이다. 주객이 전도되었다. 호혜의 원칙을 설명하기 위해 성경 구절까지 인용한 것 정도는 귀엽게(?)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 위에서 언표 되어지는 이념의 틀 만큼은 안 된다. 그것은 불교가 아니다!

...............................................................................................................................

각주]
1. 물론 이 외에도 신비주의자 프리쵸프 슈온처럼, 보다 심층적이며 ‘내밀한’ 차원에서 종교들은 모두 동일하게 영원한 (혹은 원초적)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많다. 이들에게 신은 완전히 선하면서 전능하다. 전능한 신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제1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세계는 완전하다. - 종교평화운동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현실 사회에서 종교 간 갈등은 종교들 사이의 “초월적 일치”를 주장하는 이들, 신비주의자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2. 교토학파 - 현대 일본의 선구적 철학자 니시다 기타로(1878~1945)가 창립한 교토학파는 서양철학 및 종교와의 대화에서 대승불교 사상을 전개했다. 아베 마사오는 교토대학의 불교청년회를 이끌며 도반들과 ‘FAS’라는 단체를 창립하고 오랫동안 지도자로 활동했다. FAS, ‘형태 없는(Formless) 자아를 깨닫고, 모든(All) 인류의 관점에 서며, 초(Supra) 역사적으로 역사를 창조한다.’는 단체 슬로건의 약자모음. 아베 마사오는 이후 미국으로 유학하여 뉴욕 컬럼비아대학과 연합신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여러 대학의 강단에 서며 30년 넘게 불교적 관점에서 종교 간 대화에 매진한다.

3. ‘하느님을 법신이나 공과 동일시하고 따라서...’ 이 부분과 관련하여 ‘우리신학연구소 종교 간 대화총서Ⅰ’ 「대승불교, 그리스도를 말하다(존 키난 지음)」를 참고하시라.

4. ‘종교평화 불교인 선언문 - 21세기 아쇼카 선언문’의 개종을 위한 포교 금지 대목은 그 용법이 잘못 쓰였다. 종교 간 대화에 임하는 자세에서 언급되어야 할 문구가 엉뚱하게 전법활동 금지라는 족쇄로 오용되었다.

5. 캅의 ‘그리스도 중심주의’ 또한 비판을 받는 부분이 있는데, 그 결함을 니터가 말한 ‘전지구적 위기에 대응하는 세계종교들의 역할과 과제’로부터 보완할 것을 요청받고 있다.

6. 이 문장을 불교인의 입장에서 읽으면 ‘비규범적 불교론’을 요구받는다는 말이기도 한다. 이른바 ‘21세기 아쇼카 선언문’이 불자들에게 바로 이것을 요구하고 있다. 규범의 기능은 하나의 절대적인 기준, 표준, 모범 같은 것을 제시하고 그것에 따르라고 권유하거나 명령하는데 있다. 따라서 ‘규범’과 ‘다원주의’ 개념은 서로 배척되는 성격을 갖는데, 그렇다고 두 개념이 모든 경우마다 대립하고 배척되는 것은 아니고 상황에 따라서는 서로 반듯하게 어울리기도 한다.

7. ‘종교평화 불교인 선언문(초안)’에 나오는 종교다원주의에 관한 상당 부분이 - 사실상 거의 전부인 것으로 파악됨. - 한 사람의 연구 결과물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부분은 완전히 간과했다.

- ** -

"이 기사를 응원합니다." 불교닷컴 자발적 유료화 신청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과객 2011-10-14 17:22:30
알겠오! 알겠오! 확실히 알겠오!
장담하건데,,,,
쪼개종이 아쇼카 선언을 그대로 발표하는 그 순간
한국불교는 완전 Stone-boy가 될 거이요.
특히 총무원장이 짝퉁 어쩌고 저쩌고 했던 그 일본불교 석학들로부로부터
조롱거리로 전락하고 말 것이오.

화쟁위는 기자님이 말한
종교다원주의 또 다른 관점'을 버린 게 아니오
그들은 아예 모르고 있어소! 그래서 지네들이 알고 있는 게
진짜 종교다원주의인줄 착각하고
.그런 말도 안돼는 선언문이란 걸 내놓은 거요.

그리고,,, 무례가 될지도 모르겟는데...

내 보기엔,,, 기자님도 그 사실을 알고 있소!!!

바로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말하지 않고 말하기 위해,,,,
그동안 이 긴 글을 써왓던 것이오. 안 그렇소????

당신이 이 문제를 주제로 이토록 끈질기게 연재하는 이유는
일반 독자들을 위한 게 아니오.
일반 독자들을 위한 것이엇다면
일일이 원문을 인용하고 출처의 토를 다는 수고로움을 할 필요강 없어오.
그냥 당신이 이해하는 그 순준 그,대로 쉽고 짭ㄹ게 갓을 것이오.

당신은 화쟁위가 자신들이 어떤 함정에 빠져 있느지...
전문가들의 입을 빌어,
바로 그 사실을 알리고 시펐던 것이오.
이은 기자님, 아니 그렇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11길 16 대형빌딩 4층
  • 대표전화 : (02) 734-7336
  • 팩스 : (02) 6280-2551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석만
  • 대표 : 이석만
  • 사업자번호 : 101-11-47022
  • 법인명 : 불교닷컴
  • 제호 : 불교닷컴
  • 등록번호 : 서울, 아05082
  • 등록일 : 2007-09-17
  • 발행일 : 2006-01-21
  • 발행인 : 이석만
  • 편집인 : 이석만
  • 불교닷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불교닷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asan2580@gmail.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