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다원주의에 대한 오해
왜 여럿이 아니고 하나여야 하는가?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오해
왜 여럿이 아니고 하나여야 하는가?
  • 이은 기자
  • 승인 2011.09.15 17: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요컨대, 기독교적 시각에서 서구학자들에 의해 종교신학을 주창하면서 이루어진 종교다원주의는 종교적 신념에서의 공통점을 찾거나 상충되는 면을 회피하기 위한 것이며, 유신론적 전제 하에 신중심주의에로의 수렴을 추구한 것으로, 결국 신중심적 포용주의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 「종교다원주의와 종교윤리」. 류성민. 서울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앞 책 p.108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존재한다. 이슬람, 불교, 기독교만이 종교가 아니다. 그것이 ‘진리’라고도 표현되는 것이든 뭐든, ‘하나의’ 궁극적 실재를 주장하는 종교철학에서는 모든 종교경험을 ‘진실된(authentic)'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 각각의 종교를 동일한 근원의 다양한 표현으로 보기 때문에 - 종교경험의 진실과 거짓을 분별할 수 있는 판단기준이 모호하다. 이러한 입장은 다원주의가 아니라, ‘종교경험의 가치 판단을 배제하는 포괄주의적 입장’에 더 가깝다. (힉은 자연종교는 거의 배제한 채 대부분 세계종교에 대해서만 다룬다.)

종교적 포괄주의(inclusivism, =포용주의)는 제2바티칸 공의회(1962-1965) 이후 전통적으로 카톨릭 교회가 취해 온 입장이다. 포괄주의는 세상의 모든 종교를 궁극적으로 자신의 종교로 수렴한다. 쉽게 말해서 남의 것까지 내 것으로 포괄해 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과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칼 라너(K. Rahner)다. 라너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은총’을 토대로 하여 기독교는 타종교인들을 단순히 비기독교인으로 볼 것이 아니라, “익명의 그리스도인”으로 대해야’ 할 것을 제안하였다. - 이에 대해 한 일본인 학자는 “기독교인은 과연 익명의 선불교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한 적이 있다. - 「기독교와의 대화:타종교의 입장」. 김종서. 앞 책 『종교다원주의와 종교윤리』p.233

자신의 도덕적 양심에 따라 살며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들은 그 자신의 종교가 무엇이든 누구라도 - 설혹 무신론자라 하더라도 - 하느님에 의해 받아들여져 하느님의 은총 안에 있는 엄연한 하느님의 자녀들이다. 다만 아직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 부를 처지에 있지 못할 뿐, 언젠가는 교회 안에서 명시적으로 신앙고백을 하는 단계로 상승될 것이다. 이것이 ‘익명의 그리스도’론의 주요 골자다. 어떤 이는 이 ‘익명의 그리스도인’론에 대해 '은폐된 종교제국주의'라고 비판하였거니와, 폴 니터, 존 힉과 같은 ‘신중심적’ 다원주의자들은 ‘선험적(先驗的) 다원주의(多元主義)’라고 불러왔다.

그러나 하나의 가설일 뿐인 자신들의 주장을 가지고 모든 입장을 통솔할 수 있는 ‘설명체계’를 주장한다는 면에서, 그 자신들 - 신중심적 다원주의자들 - 역시 ‘선험적인 해석의 틀(a priori interpretation)'을 가지고 모든 종교경험을 그 틀에 맞추어 해석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 김재영. 앞 책 p.170∼171

그렇다면 선험적인 해석의 틀에 맞춘 종교다원주의가 구체적으로 어떤 논리의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지 ‘21세기 아쇼카 선언’이 언급한 다음 문장을 토대로 살펴보자.

다원주의적 태도에는 ‘하나’의 진리에 이르는 다양한 길을 인정하는 경우도 있고, 백색광이 프리즘을 통과하여 다양한 색채로 분광되는 현상을 다종교적 상황에 비유하여 이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 21세기 아쇼카 선언문(초안, 이하 ‘아쇼카 선언문’), (2) 종교다원주의의 진정한 실천

자아와 타자의 관계에 대해 모든 종교사상은 이른바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를 해석하는 맥락 안에서 서로를 이해한다고 한다. 기독교는 절대자(神)라는, 불교는 진리로서의 불법(佛法)이라는, 각각 서로 다른 궁극적 실재를 이해하는 맥락 안에서 자아와 타자를 인식한다는 것이다. 여기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이름하여 ‘일자형(一者型)’과 ‘최종실재형(最終實在型)’이 그것이다.

위 인용문 가운데, “‘하나’의 진리에 이르는 다양한 길을 인정하는 경우”가 일자형(一者型)에 속하고, “백색광이 프리즘을 통과하여 다양한 색채로 분광되는 현상을 다종교적 상황에 비유하여 이해하는 경우”가 최종실재형(最終實在型)에 속한다.

• 일자형(一者型, Oness-type)
“하나”인 궁극적 실재가 종교들마다 각각 달리 해석되고 있으며, 따라서 “어떤 종교이든 각각 그 교리가 의미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같은 것이다.” 라는 주장이다. 마치 거대한 산의 정상은 하나이기 때문에 정상에 이르는 길은 여러 갈래이지만 모두는 궁극적으로 하나의 정상에 닿는 것과도 같다. 따라서 모든 종교인들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진리, 하나의 실재를 추구하고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에 배척하지 말고 서로 대화를 해야 마땅하다는 논지다.

이 신념은 기본적으로 연역적(演繹的)이다. 하나의 궁극적 실재가 다양하게 이해되고 표현된 결과가 여러 종교로 나타난다고 보기 때문이다. 앞서 밝혔다시피 폴 니터나 존 힉과 같은 ‘신중심적’ 다원주의자들이 이 입장을 따른다. - 이제 여기에 조계종 결사추진본부와 화쟁위원회를 추가해야 하나?

얼른 보기에 매우 설득력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입장은 커다란 논리적 모순을 갖는다.

① 이 가설이 ‘참’이기 위해선, 세계인이 지향하는 궁극적 실재(U.R.)는 하나이어야 한다는 사실이 요청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 하나인 궁극적 실재가 무엇인지는 누구도 설명할 수 없다. - 이 의문에 대해 어느 포스트모던 신학 전문가는 “(궁극적 실재가) 왜 여럿이 아니고 하나이어야 하는가? 왜 하나의 동일한 실재에 대한 다양하고 서로 다른 경험과 응답인가?”라고 되묻고 있다. - 김영태. 앞 책 p.141

② 궁극적 실재를 이해한 결과로서의 개별 종교들의 실재관(實在觀)은 불완전한 인간의 인식과 언어체계에 담겨진 것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이처럼 상대적인 것을 궁극적이라고 확신하는 것은 특정 종교의 신념을 이념화하는 과정을 걷는 것이다.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경험적 접근」. 윤이흠. 앞 책 p.44

③ 그러므로 개별 종교들이 궁극적인 실재라고 해석하는 것은 결국 역사적으로 상대적인 자신의 교리를 투사(投射)한 것이다. 이것은, 모든 종교가 그로부터 나오고, 또 그로 돌아가야 할 궁극적 실재는 다름 아니라 자기 종교의 신조(信條)에 불과하다는 의미가 아닌가! - 윤이흠. 앞 책 p.45

John. Cobb은 힉(Hick)과 니터(Knitter)가 기독교의 전통적 폐쇄성, 배타성을 극복하고자 함에는 전적으로 찬동하지만, 그들의 다원주의는 불충분한, 거짓된 입장이라고 비판하면서 특히 힉-니터가 상정하는 “세계종교들 배후의 어떤 공통본질”에 대하여 신랄하게 논박하고 나선다. 즉 Cobb에 따르면, 힉-니터는 기독교 신앙의 빛에서 해석된 ‘神(창조주)’ 개념이 모든 종교들에게 타당하다는 교만한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으며, 자기들이 신 중심주의 모형을 선택했기 때문에 모든 종교를 평가함에 있어서 ‘중립적’ 위치에 서 있다는 환상에 빠져 있는데, 실제로 역사 속에 존재하는 어느 누구에게도 그러한 중립지점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종교신학의 두 기준」. 홍정수. 1992년. 『종교다원주의와 한국적 신학』 p.177

종교는 절대가치신념체계다! 절대가치신념체계를 상대화시켜 버리고나면 신앙이 설 자리는 없다! ‘진리’라는 궁극적 실재의 한 소박한 표현일 뿐인 불교는 개종을 위한 전법활동을 당연히 중지하여야 한다. 절대성의 부정과 전법의 포기는, 이를테면 동전의 양면인 것이다. 그래놓고 아쇼카 선언은 ‘내 믿음의 참됨’을 보여주라고 한다.

나의 삶 전체의 모습을 통해, 그리고 내가 속한 교단 전체의 실천적 활동을 통해 내 믿음의 참됨을 보여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 선언문, (3) 전법의 원칙

상대적인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환원하는 논리적 모순, 아쇼카 선언문의 치명적 결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1893년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종교회의에서 라다크리슈난은 개회사를 통해 “신(神) 안에서 우리는 형제”라고 갈파했다. 그러나 우리는, ‘신(神)’이라는 같은 용어를 쓰지만 그 해석에 있어서는 힌두교와 기독교가 서로 다른 신념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일원론(一元論)적 맥락에서 해석되는 힌두이즘의 신과 기독교의 절대타자(絶對他者)로서의 신이 같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종교인들은 이처럼 각기 자신들의 사상적 맥락에서 상대방을 형제로 이해하고 그러한 자기중심적 이해를 근거로 대화한다. - 윤이흠. 앞 책 p.45

자기중심적 태도가 ‘익명의 그리스도인’을 낳고 예수를 ‘보살’로 부르게 한다. 그처럼 타종교인들을 자신의 종교적 신념체계에 입각해 해석하는 선험적 태도를 고수하는 한 진정한 대화는 이루어질 수 없다. 어떤 형태로든지 거리감이 만들어지고 대화의 신뢰성이 의심 받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지금까지 한국에서 종교인들이 대화운동을 전개했지만 비판적 거리(距離)를 넘어서기가 그렇게도 어려웠던 까닭이다. 윤이흠. 앞 책 p.46

이런 문제를 의식한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쇼카 선언문은 완곡하게 다음과 같은 어법을 사용해서 타종교와의 만남에 임하는 규범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웃종교에 대한 인정과 관용은 필요한 덕목이지만 진정한 대화를 위해서는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내 종교의 관점과 언어로 타 종교를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입장과 언어로 그들의 종교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이웃종교를 진정으로 존중하는 종교인의 태도입니다. - 선언문 ‘(2) 종교다원주의의 진정한 실천’에서.

내 종교의 관점과 언어로 이웃종교를 판단하지 않겠습니다. 그들의 입장과 언어로 그들의 종교를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선언문 ‘<종교평화를 위한 불교인의 서원>’에서.

“그들의 입장과 언어로 그들의 종교를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모든 종교에서 이 약속이 대중적으로 확산된다면 그 얼마나 헌신적이고 낭만적인 일일까? 유감스럽게도 이 대목에서 나는 “선험주의자들은 지상에서 살아가는 더럽혀진 영혼이 아니라 하늘을 나르는 천사의 모습만을 보는 것이다.”라는 글귀가 떠오른다.

그렇다면 최종실재형은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해 줄까?

• 최종실재형(最終實在型, the Last-Reality-type)
최종실재형은, 모든 종교들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공통점들을 추적하다 보면 모든 종교가 공유하는 궁극적 실재를 찾을 수 있다고 보는 확신에서 비롯된다. 모든 종교들이 가진 공통점들을 모으면 종교의 보편성을 찾을 수 있고, 이렇게 찾아진 보편성이 곧 궁극적 실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종교들은 보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설혹 외형적으로는 서로 다르게 보일지 몰라도 보편성의 입장에서 보면 서로 배척해야 할 이유가 없으며, 따라서 마땅히 종교들은 서로 대화를 해야 한다는 얘기다.

선언문의 내용 중에도 이러한 논리를 지지하는 뉘앙스를 풍기는 구절이 있다.

서로의 차이와 다름을 존중할 때 서로의 공통점들이 더욱 빛나 보일 것이며 각 종교 모두가 진리를 향한 동반자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 선언문 ‘(2) 종교다원주의의 진정한 실천’에서.

앞서 일자형(一者型)이 연역적이라면, 최종실재형은 다분히 귀납적이다. 다양한 종교사상의 공통점을 찾아 끝까지 추적하면 ‘마지막 실재(the laop reality)'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 마지막 실재가 곧 ‘궁극적 실재’라는 논리에서 출발하는 것이 귀납적 태도이다.

궁극적 실재에 대한 이러한 귀납적 태도는 언듯, 매우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도 또한 커다란 논리적 모순이 존재한다.

① 현존하는 모든 종교들은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이들은 상대적이다. 왜냐하면 절대적인 것은 하나여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들이 각각 자신의 신념체계가 절대적이라고 주장하지만 그 주장들은 다종교사회에서는 이미 상대적인 것이 되고 만다.

② 이렇게 서로 상대적인 종교들에서 찾아낸 공통점으로부터 유추해 낸 종교의 보편성은 상대적인 것들의 공통점일 뿐이지 절대적인 것은 될 수 없다. - 윤이흠. 앞 책 p.45

물론 논리적 유추가 때로 지성적인 매력을 느끼게 하고, 일부의 사상가들에 의해 숭앙되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다시 말하거니와) 종교는 절대가치신념체계이다. 단지 추론의 결과일 뿐인 추상개념은 신앙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 이처럼 논리적인 유추를 통하여 궁극적인 실재를 합리적 실체로 환원시킨다는 데 귀납적 태도의 커다란 약점이 있다. - 윤이흠. 앞 책 p.46

여기서 하나의 근본적인 문제점이 나타난다. 즉, 만일 힉이 주장한 대로 ‘실재 자체’는 인간의 인식 범위 밖에 존재하고 있어서 도저히 알 수 없다고 한다면 어떤 근거에 의해서 세계종교 전통을 배경으로 하여 일어나는 종교경험이 실재의 경험이라고 증명하거나 확증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의 궁극성을 잴 수 있는 잣대가 없다. - 김재영. 앞 책 p.169

명백한 논리적 모순에도 불구하고 귀납적 입장은 주로 종교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학자들과 신종교 운동가들 사이에 인기가 높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이러한 관점은 종교다원주의가 아니라 일종의 ‘종교통합’이라고 봐야 한다. - 「종교적 다원주의와 상대주의」. 손봉호. 『계간 철학과 현실』1992년 여름호. p.70

이렇게 교리의 신념체계나 교리에 근거한 대화는 불완전한 결과에 이를 수밖에 없다. 선험적 태도는 종교대화의 필요성을 강조할 수는 있으나 대화를 지속적으로 유지시키고 발전시킬 수 있는 이념적 근거, 곧 다원주의의 틀이 되기에는 부적당하다. 왜냐하면 선험적 태도는 어떤 경우에든지 대화에 참여하는 모든 종교인들을 포괄적으로 만족시킬 수 있는 신념체계를 제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위 “일자형”이나 “최종실재형” 어느 경우도 모든 종교들이 다 만족할 수 있는 ‘궁극적 실재’의 내용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이 사실을 직시하지 못할 때, 위의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택하고 그것이 절대적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오늘날까지 종교대화운동이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하게 된 것이다. - 윤이흠. 앞 책 p.48

아니, 도대체 자신이 귀의한 종교를 절대적인 신념으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요구가 신앙인에게 어디 가당키나 한 것인가?

불교인이 여래, 천인사, 응공, 정변지, 세간해, 무상사, 조어장부, 세존이신 석가모니부처님의 독특성을 긍정하고 그 가르침을 절대적 신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종교 간 대화에 걸림돌이 된다는 주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것은 기독인에게 우리와 대화하려면 그가 가진 절대 믿음, 곧 ‘예수를 신의 유일회적인 성육신이요 인류의 유일한 구주’라고 믿는 그들의 종교적 확신을 버려야만 한다고 요구하는 것과 같다. 세상에 이보다 더 대화에 장애가 되는 논리도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종교다원주의 논쟁에 있어 방법론적 전환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 ** -

"이 기사를 응원합니다." 불교닷컴 자발적 유료화 신청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11길 16 대형빌딩 4층
  • 대표전화 : (02) 734-7336
  • 팩스 : (02) 6280-2551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석만
  • 대표 : 이석만
  • 사업자번호 : 101-11-47022
  • 법인명 : 불교닷컴
  • 제호 : 불교닷컴
  • 등록번호 : 서울, 아05082
  • 등록일 : 2007-09-17
  • 발행일 : 2006-01-21
  • 발행인 : 이석만
  • 편집인 : 이석만
  • 불교닷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불교닷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asan2580@gmail.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