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관·전법의지 문제제기는 불교 근본주의다?
대중공사는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21세기 아쇼카 선언’ 초안의 수정 보완을 위한 절차적 의미에 무게를 두고 진행됐다.
찬반 토론 없이 수정보완 위한 의견 수렴만
대중공사는 아쇼카 선언의 찬반 토론은 없었다. 수정 보완을 위한 대중공사였다. 참석자들은 종교평화에 대한 취지는 공감했다. 하지만 내용의 해석은 완전히 갈렸다. 문제제기 한 법응 스님(불교정책연구소)과 이학종 대표(미디어붓다) 외에는 아쇼카 선언 문제를 지적할 인물의 참여도 없었다. 대부분 아쇼카 선언을 입안하고 기획, 초안을 마련한 실무 관계자들이 대중공사에 참석했다.
초안을 작성한 박경준 동국대 교수의 사회로, 초안을 최종 마무리한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 선언 초안 중 불교도 서원 부분을 작성한 명법 스님, 아쇼카 선언 찬성 입장을 가진 심산 스님이 종단 측 토론자로 참가했다.
시민단체 대표로 참석한 정웅기 불교시민사회네트워크 집행위원장은 대부분 선언문의 긍정적 부분을 강조하면서 실천방안 마련에 무게를 두었다. 그는 종교평화선언이 깃발을 잘들었다는 말로 긍정적 측면을 부각했다. 정우식 대불청 회장은 시민단체 활동가 입장만 앞세워 종교평화를 위한 불교도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원론적 입장을 강조하고, 부제의 폐기를 요구했다.
대중공사는 조계종 총무원 주변의 인물들만 참여했다. 기자들과 총무원 직원을 제외하면 청중은 불과 5명도 채 안됐다. 몇몇 청중이 현실론을 앞세워 아쇼카 선언의 문제점을 지적했지만, 울림은 작았다.
교육원 이석심 차장이 대중공사에 참석한 패널들의 발언이 아쇼카 선언을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입장에서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모두 찬성하면서 수정 보완해 가자는 입장인지 정리되지 않아 혼란스럽다는 의견을 보였다.
하지만 이 차장의 질문은 우리사회에서 잠복한 종교갈등이 문제가 되면 크게 불행질 수 있는 상황에서 마련한 초안을 내놓고도 최종선언문을 발표하지 않으면 우스운 상황이 되고, 최대한 의견을 수렴해 좋은 안을 만들자는 대중공사이기 때문에 선언문의 찬반을 토론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며 다루지 않았다.
열린 진리관·전법 원칙 문제제기가 불교근본주의?
<불교닷컴>은 아쇼카 선언’보다 ‘21세기 전법선언’의 필요성을 제기했고, 사적 공적영역에서의 종교편향과 불교폄훼에 대한 대응방안이 없는 선언은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또 종교다원주의를 바탕으로 한 종교평화 노력은 이미 용도 폐기된 문법이라고 근본적 문제를 제기했다.
종교평화가 하나의 봉우리에 오르는 여러 갈래의 길이 아니라는 문제도 제기했다. 부제의 문제점도 지적했다. 아쇼카 왕에 대한 불교의 적극적인 관심과 표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공평무사한 왕의 명령, 보편타당한 담마(법, 부처님의 담마와는 다르다)로서의 칙령을 필요 이상으로 확대 해석해 종교평화의 기치를 높이 세운 인물로 여기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전법 의지를 꺾는 선언이라는 지적은 교인 수를 늘리는 것을 전법의 목적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의 비판일 뿐인 것으로 치부됐다. 아쇼카 선언 부제의 문제 역시 좋은 브랜드가 없는 불교계에 브랜드 파워로 내밀 수 있는 호재라는 논리를 앞세워 아무 문제가 없는 적절한 선택으로 여겨졌다.
대중공사는 아쇼카 선언의 필요성 등 취지를 다루는 것은 아예 배제했다. 아쇼카 선언의 전면 재검토나 폐기는 애초부터 고민이 아니었다. 화쟁위원회가 야심차게 준비한 불교의 대사회적 역할과 이슈 선점 및 주도에 무게가 실려 취지를 살펴보는 시간은 준비하지도, 배려하지도 않았다.
또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21세기 아쇼카 선언’ 초안의 ‘열린 진리관’과 ‘전법 의지’ 실종, 아쇼카 선언 부제의 부적절성을 이미 지적한 이들이 그동안 들어온 불교 근본주의자라는 비판은 대중공사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문제제기를 ‘발목잡기’로 모는 화쟁위 태도가 문제
아쇼카 선언의 열린 진리관을 지적한 법응 스님과 이학종 대표는 자신들의 문제제기를 ‘발목잡기’나 ‘대안 없는 비판’으로 몰고 가는 화쟁위원회의 태도가 의견을 수렴하는 자세가 아니라고 비판했다.
타종교에는 열린 자세를 보이면서 내부 지적은 왜 닫는 자세를 취하냐는 것이었다. 나아가 종교평화 선언 초안이 굳이 대안을 제시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정도의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선언에 동의하지 않으면 ‘닫힌’ 진리관이고, 닫힌 사람이냐고 물었다. 아쇼카 선언 초안 발표 후 야심차게 추진하는 종교평화선언을 왜 막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한 화쟁위원회의 대응 태도에 불쾌감을 드러낸 것이다.
대중공사의 쟁점은 ‘열린 진리관’과 ‘전법 원칙’의 문제, 아쇼카 선언 부제의 부적절성이었다.
#논란 1, 열린 진리관
“불교를 믿어야 할 이유가 어딨나” VS “어떻게 믿느냐가 중요하다”
열린 진리관은 접점을 찾지 못했다. 해석과 접근법은 극명히 갈렸다.
법응 스님은 “종교는 절대적 신념의 세계라는 점을 간과했고, 기독교 종교학자들이 견지한 선험적 태도를 답습하고, 신학중심의 종교다원주의 선언인 바아르 선언과 닮았다”고 지적했다. “기독교의 열린 진리관은 제 종교의 하나님으로 귀결되는 데, 고정불변인 절대적 신을 인정하는 것이 열린 진리관이 아니다”고 했다.
이학종 미디어붓다 대표는 “열린 진리관이 종교간 서로 잘 지내자는 선의의 취지 이외에는 납득하기 어려운 내용을 다수 담고 있는 아쇼카 선언에 대한 정당한 비판을 ‘발목잡기’로 몰아가기 위한 계산된 장치가 아닌지 의문”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불교 진리가 이웃종교에 있다는 내용, 즉 표현이나 문법이 다를 뿐이라는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며 “그렇다면 반드시 불교를 믿어야 할 이유가 어딨나”라고 반문했다.
이에 조성택 고려대 교수는 “열린 진리관이란 진리가 열려있다는 뜻이 아니라 진리를 보는 눈이 열려 있어야 한다는 의미”라고 맞받았다.
또 조 교수는 “종교는 절대적 신념 체계라 하는 데 그렇지 않다. 이를 강조하는 게 종교평화선언”이라며 “불교는 언어의 실제성을 믿지 않는다. 다종교 다문화 사회를 배경으로 이야기 하는 데 기독교만 이야기 한다. 기독교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반박했다.
조 교수는 또 사랑의교회 전도사의 바아르 선언 관련 의견을 소개하며, “한국 기독교 대부분이 하나님을 팩트로 믿는다. 한국 기독교만 그렇다. 어떻게 믿느냐가 중요하다”고 했다.
이에 대해 이학종 대표는 “한국에서만 기독교가 그렇다는 데 선언문이 국내용인가? 아니면 세계용인가?”라고 묻고 “종교평화선언은 학자용 선언이 아니라 불교도들의 선언이기에 기독교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한다면 토론하기 어렵다”고 맞받았다.
심산 스님은 “열린 진리관이 원론에서는 수용하기 어려운 면도 잇지만 다종교 사회의 입장에서는 긍정적”이라며 “창조론도 궁극의 행복을 위한 방편설이 아니겠냐”며 한발 더 나아갔다.
명법 스님은 “종교평화선언의 열린 진리관은 바눌교적인 것이 아니며 야욕다라삼먁삼보리조차 고정된 것이기를 거부하는 불교적 정신에 가장 부합하는 것”이라며 “불교 역사에서 타자를 수용하고 통합하는 전통이 오래전부터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고 했다.
정웅기 위원장은 “불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진리가 아닌 것을 볼 수 있어야 하고 다른 종교 울타리 안에서도 진리인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며 “삶을 선한 쪽으로 윤회에서 벗어나는 쪽으로 남을 위하는 쪽으로 이끌어 주는 것이면 어떤 종교든 다르마이자 진리일 가능성은 얼마든지 열려 있다”고 말했다.
정우식 회장은 다종교 다문화 사회 진입과 사회통합 지혜의 필요성, 대승불교에 부합한다는 이유로 열린 진리관을 찬성했다.
#논란2, 전법 원칙의 문제
“제2의 전도명령이 선포되어야 마땅” VS “교인수 늘리는 게 전법이라고 생각”
전법의 원칙에 대한 의견도 갈렸다. 전법은 타종교인을 개종시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원칙에 대해 법응 스님과 이학종 대표는 “전법 대상은 차별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전법은 불교를 믿지 않는 모든 대중을 대상으로 한다”며 “이교도 심장부까지 들어가 목숨을 건 전도를 행한 부처님 뜻과 평생을 전법 여정으로 보낸 삶과 동떨어진 선언”이라고 비판했다.
이학종 대표는 “오늘날 한국의 종교상황은 오히려 부처님의 전도명령 정신을 되살린 제2의 전도명령이 선포되어야 마땅하다”고 강조했다.
이들 주장에 조성택 교수는 강하게 반박했다.
조 교수는 “전법 원칙에 대한 비판은 교인수를 늘리는 것을 전법의 목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라며 “전법 목적은 중생의 안락과 행복에 있다. 종교는 상품을 파는 행위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선언에서는 실천적 활동을 통해 내 믿음의 참됨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며 “이것이 올바른 종교활동이고 한국불교의 어른스러운 모습”이라고 덧붙였다.
명법 스님은 “전법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교를 비방하고 폄하하는 공격적 포교를 하지 않겠다는 이야기”라며 조 교수를 지지했다.
정웅기 운영위원장은 “최상의 전법은 다르마로 가득찬 삶이란 이런 것이라고 보여주는 것”이라며 “선언은 전법을 삶의 기준으로 놓는 쪽으로 한발 더 나아갔다는 점에서 충분히 긍정적인 시도”라고 평가했다.
반면 심산 스님은 “포교 전략이 변해야 하지만, 양적 팽창이 목표가 돼서는 곤란하다”면서도 “전법이 개종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표현은 재고했으면 한다”고 밝혔다.
#논란3, 부제-아쇼카 선언 적절성
“21세기 아쇼카 선언은 견강부회” VS “불교에 아주 좋은 브랜드 파워”
아쇼카 명칭에 대해서도 의견이 엇갈렸다.
법응 스님과 이학종 대표는 “21세기 아쇼카 선언이라는 견강부회에 해당한다”며 용어 사용 폐기를 요구했다.
이학종 대표는 “아쇼카 대왕 생존시절 ‘아쇼카 선언’을 한 적이 없고, 어기면 죽임을 당하는 황제의 ‘칙령’과 모두가 함께 했으면 좋을 ‘선언’은 전혀 다른 것”이라고 했다.
정우식 회장은 “종교평화선언을 특정종교와 연관이 깊은 인물과 사례로 모델을 제시하며 제목에 준하는 부제로 한 것은 선언의 정신에 어긋난다”며 “아쇼카는 이웃종교의 논리적 정서적 공감을 얻는 장애가 되며, 아쇼카왕이 현 시대에 전륜성왕의 모델이 가능한지 긍정적 답을 얻을 수 없다”며 부제 페기를 주장했다.
반명 조성택 교수는 아쇼카 선언이라는 부제도 문제가 안된다고 맞섰다. 그는 “좋은 결론을 위해 아쇼카 선언의 장점을 이야기 하자”며 “아쇼카 칙령의 선진성과 현대성에 감복했다. 불교에는 브랜드 파워가 없었다. 이명박이 없었다면 아쇼카에 매달리지 않았을 것 같다”고 했다.
정웅기 위원장은 “아쇼카 선언 부제 잘했다고 생각한다. 드라마틱한 반전과 성불 가능성을 보였듯이 자기 힘으로 개종시킬 수 있었음에도 관용을 베풀었던 것이 불교에 맞는 것 같다”며 “불교도들이 아쇼카 왕의 삶을 필요 이상으로 폄하하는 것은 극단적인 비하에 다름 아니다”고 주장했다.
개인적 경험이 앞세워지기도 했다. 한 스님은 타종교를 믿는 가까운 인물의 느닷없는 죽음에 불교적 가르침을 줄 수 없었다는 경험을 고백했다. 극한 상황에서 타종교인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은 어렵다는 고백이 이해되지만 전법의 책임을 진 출가자의 고백으로는 적절치 않아 보였다.
“선언문은 방향 길 제시하는 것 실현 방법 기술은 만들어 가자”
도법 스님은 이날 종교평화선언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불교는 현실적으로 평화롭지 않다. 평화롭게 사는 길과 방법을 제시하는 게 종교평화선언”이라며 “불교가 할 일이 뭔지, 사회에 종교에 관한 한 평화롭게 문제를 다룰 수 있는 흐름을 선도하자는 것”이라고 했다.
또 “종교평화선언은 불교인을 위한 것이다. 실현해 가는 방법 기술은 고도화해 만들어 가자. 선언문은 방향과 길을 제시하는 정도에서 이해해 달라”고 했다.
도법 스님은 이웃종교와 함께하는 종교평화선언 작업 추진도 공개했다. 스님은 “개신교의 진보아 보수가 다 참여하고, 7대종교가 자기 입장에서 종교평화선언 초안을 만들고, 각 종교의 초안을 발표하고, 공동의 평화선언으로 완성해 가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했다.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21세기 아쇼카 선언’ 초안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한 대중공사는 중앙종무기관의 연찬회와 교구본사 주지협의회, 중앙종회, 직영사찰, 직할 교구 별로 대중공사를 열고, 중앙신도회 등 신도단체와 동국대 승가대 강원 교역자 등의 대중공사도 추진한다.
하지만 종교평화선언에 대한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 선언의 필요성과 내용, 문제의 핵심 등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 지는 미지수다. 아쇼카 선언 초안을 만든 화쟁위가 주최한 대중공사에도 관심은 없었다.
대중공사를 통해 어느 정도의 의견들이 모아질 지 회의적이다. 다만 수정 보완을 위한 절차적 의미 쌓기에 머무른다면 종교평화선언 최종안이 마련돼도 그 의미는 퇴색될 수 밖에 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