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가 현재에만 문제를 일으킨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달을 위해서는 야훼 유일신 교리에 정면 배치되는 왜놈 마귀에게 무릎꿇어 참배하고 교회에 돌아와서 다시 야훼께 기도하고 … 양다리 걸치기 2중간첩 노릇도 서슴치 않았다. 기독교 친일행각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자료를 써본다.
◎ [일제시대 기독교 마귀참배 일지]
- ○ 민족문제연구소 편찬 [친일파 99인]에서 인용 -
★ [1] 박희도 감리교 목사 - 3. 1 독립선언 민족대표33인중 1인이었다가 변절한자
친일잡지 [동양지광]을 창간하면서창간사에 쓴 글
- 이때에 반도 2천만 동포의 가슴속에 일본정신을 철저히 하고, 황도정신을 앙양하고, 천황
폐하의 적자로서, 황국 일본의 공민으로서 예외없이 국체의 존엄을 체득하고, 황국 일본의
대사명을 준봉하고 - - - 어쩌구 저쩌구-
생각컨대 이 대의를 이해하고 이 이념을 체득할 때 일본국민으로서의 영광과 긍지를 감득
치 않을 자 누가 있겠습니까.
이 개X끼는 해방 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가 독재자 이승만에 의하여 구명도생 하였다.
★ [2] 정춘수 감리교 목사 - 3. 1 독립선언 민족대표33인중 1인이었다가 변절한자
1) 1940. 10. 감리교 교권을 장악한 후 [감리교 혁신안] 발표 내용 중
- 교도로 하야금 지원병(왜군)에 다수 참가하게 할것 - 까지 규정
2) 1941. 10. 10.에는 교역자와 신도대표 50여명을 이끌고 [부여신궁] 조영근로봉사를
하고 돌아왔다.
3) 1941. 10. 21. 교회의 철문, 철책 등을 뜯어 헌납하도록 하는 이른바 "종교보국 5개
항"을 결의 실천케 하였다.
4) 1942. 2. 13. 감리교 각 교구장에게 공문을 보내어,
"교회 종도 헌납하야 성전(왜놈제국주의 2차대전) 완수에 협력 할 것" 을 요구.
5) 1944년 감리교단을 이끌면서,
상동교회에 [황도문화회관] 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교역자들에게 일본정신 주입에 광분
6) 머리 이마빡에 일장기 두건을 두르고 교인을 인솔하여 남산의 조선신궁(왜놈신사)까지
뛰어가 단체로 신사참배 강행 !
(대부분의 사람들은여기에서 입을 벌린채 할 말을 잊게 된다. X팔 !)
- 정춘수의 더러운 행동은 소설이 한권 되므로 여기에서 생략 -
7) 해방 후 낯짝을 들고 다닐 수 없게 되자 1949. 10월 어느날 명동성당의 노기남 주교를
찾아가 [카톨릭]으로 개종한 후 삶을 마치다.
1942년 2월에 창간된 '기독교신문'의 논설위원을 지내며 친일논설을 기고하거나 친일좌담회에 참석하기도 했던 백낙준 조선야소교서회 편집총무는 "황금만능주의 밑에서 운전되는 것이 미국이다. 선전만 잘하면 전국적으로도 지위를 얻을 수도 있는 것이다.
미국은 침략의 마수를 뻗어왔던 것이다. 이 형세를 그대로 방임해 두면 대동아공영권의 장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는 불을 보기보다 명백한 것이다. 영원히 광만 뻗도록 그동안 날과 달을 거듭할수록 더욱 감개 깊이 생각되는 것은 이 싸움이 가진 도의적인 성격과 위대한 이상이다. 이렇게 숭고하고 위대하고 엄숙한 한낱의 전쟁을 가진적이 없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해방 이후 문교부 장관과 연세대학 총장을 역임했다.
1936년 6월 29일 총독부에서는 양주삼 조선성서회 행정총무 감리교 목사에게 "감리교가 총회에서 신사 참배 결의를 해달라"고 요청하자 양주삼 목사는 "국민의 의무일진데 누구나 참배할 것이니 구태어 결의할 필요가 없다"라고 하였다.
복음교회 감독인 최태용 목사는 "조선을 일본에 넘긴 것은 신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을 섬기듯이 일본 국가를 섬겨야 한다고 나는 생한각다."고 주장했으며 채필근은 "국민 정신 총동원이 필요한 이때 종교인들도 국가에 충성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이단이라고 말하는 자야말로 도리어 이단이다." 라고 단정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달을 위해서는 야훼 유일신 교리에 정면 배치되는 왜놈 마귀에게 무릎꿇어 참배하고 교회에 돌아와서 다시 야훼께 기도하고 … 양다리 걸치기 2중간첩 노릇도 서슴치 않았다. 기독교 친일행각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자료를 써본다.
◎ [일제시대 기독교 마귀참배 일지]
- ○ 민족문제연구소 편찬 [친일파 99인]에서 인용 -
★ [1] 박희도 감리교 목사 - 3. 1 독립선언 민족대표33인중 1인이었다가 변절한자
친일잡지 [동양지광]을 창간하면서창간사에 쓴 글
- 이때에 반도 2천만 동포의 가슴속에 일본정신을 철저히 하고, 황도정신을 앙양하고, 천황
폐하의 적자로서, 황국 일본의 공민으로서 예외없이 국체의 존엄을 체득하고, 황국 일본의
대사명을 준봉하고 - - - 어쩌구 저쩌구-
생각컨대 이 대의를 이해하고 이 이념을 체득할 때 일본국민으로서의 영광과 긍지를 감득
치 않을 자 누가 있겠습니까.
이 개X끼는 해방 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가 독재자 이승만에 의하여 구명도생 하였다.
★ [2] 정춘수 감리교 목사 - 3. 1 독립선언 민족대표33인중 1인이었다가 변절한자
1) 1940. 10. 감리교 교권을 장악한 후 [감리교 혁신안] 발표 내용 중
- 교도로 하야금 지원병(왜군)에 다수 참가하게 할것 - 까지 규정
2) 1941. 10. 10.에는 교역자와 신도대표 50여명을 이끌고 [부여신궁] 조영근로봉사를
하고 돌아왔다.
3) 1941. 10. 21. 교회의 철문, 철책 등을 뜯어 헌납하도록 하는 이른바 "종교보국 5개
항"을 결의 실천케 하였다.
4) 1942. 2. 13. 감리교 각 교구장에게 공문을 보내어,
"교회 종도 헌납하야 성전(왜놈제국주의 2차대전) 완수에 협력 할 것" 을 요구.
5) 1944년 감리교단을 이끌면서,
상동교회에 [황도문화회관] 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교역자들에게 일본정신 주입에 광분
6) 머리 이마빡에 일장기 두건을 두르고 교인을 인솔하여 남산의 조선신궁(왜놈신사)까지
뛰어가 단체로 신사참배 강행 !
(대부분의 사람들은여기에서 입을 벌린채 할 말을 잊게 된다. X팔 !)
- 정춘수의 더러운 행동은 소설이 한권 되므로 여기에서 생략 -
7) 해방 후 낯짝을 들고 다닐 수 없게 되자 1949. 10월 어느날 명동성당의 노기남 주교를
찾아가 [카톨릭]으로 개종한 후 삶을 마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