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2012년 1월 2일 <불교닷컴>에 고 이건희 회장의 부친인 삼성그룹 창업주 고 이병철 회장께서 타계하기 한 달 전에 작성한 “영(靈)적 질문”이라는 24개 항에 대해 답변 형식의 글을 등재한 적이 있습니다. 그 연장선 본 글을 작성합니다.
고 이건희 회장의 사십구재가 청정도량에서 여법하게 봉행되었습니다. 조계종단의 대덕스님들께서 법력으로 영가를 극락세계로 인도하셨습니다.
죽음은 현상계에서의 온갖 차별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찾아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두렵고 공포가 밀려오는 현상이 아닐까 합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죽음에 대해 깊이 사유하여 그 필연적인 현상을 담담히 수용하는 이가 있는 반면, 절대자에 의지함으로써 평안을 얻는 이도 있습니다.
스님의 가사(衣)와 공양 그릇(鉢盂)을 의발(衣鉢)이라 하는데, 불가에서는 스승이 제자에게 법(法-깨달음/지혜)을 전한다는 의미에서 의발(衣鉢)을 전수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발우(그릇)를 전수한 데서 독특한 상징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법기(法器)라는 말이 있으니 “부처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수행할 수 있는 소질이나 근성이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우보익생만허공 중생수기득이익(雨寶益生滿虛空 衆生受器得利益)」 즉, “허공(온 세상)에는 우리를 위한 보배비가 가득한데 우리는 자신의 그릇 만큼만 받는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사람을 그릇에 비교한 사례입니다. 큰 그릇, 큰 사람이 되라는 의미일 것이나 결국에는 그릇도 경계가 있으니 진인이 되기 위해서는 그 경계마저도 깨야 할 것입니다.
소위 원시시대부터 인간은 물에 대한 의구심과 애착이 있었을 것이라 추측해 봅니다. 생명유지에 필요한 근본적인 것이 물이고, 갈증을 해소해 주며 일상에서 세척 등 다양한 용도에 필요한 물질이기 때문입니다.
멀고도 알 수 없는 하늘에서 물(비와 눈)이 내려와 땅에 고이기도 하고 흐르기도 하며 또한 가물고 메말라서 수목을 죽이기도 합니다.
이 물과 음식을 담고자 한 것이 최초의 토기인 그릇입니다. 이 토기를 발명한 선사인(先史人)은 오늘날로 치면 첨단의 전자기기를 발명한 그 이상 기뻤을 것입니다.
선사인들은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에 하늘은 물을 담고 있는 그릇이라 여겼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구름이 모이고 천둥 번개가 치며 마치 하늘이 열리는 듯 비가 내리는데 풍향에 따라서 좌우로 빗겨서 떨어지기도 하며, 큰 빗줄기는 빗방울이 간혹 보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땅에 물이 고이거나 흐르며 또는 사라지고 하니 하늘과 세상은 순환하면서 물을 담고 있는 그릇으로 생각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토기에 물이나 음식물을 담아서 저장이 가능하니 이 토기도 하늘이나 구름과 같다는 생각을 또는 물을 내려주어서 고맙다는 감사의 마음을 담아서 하늘과 구름과 빗줄기와 땅 등을 표현해서 소위 빗살무늬 등 기하학적 무늬가 탄생되었고, 시간이 지나고 변형을 거듭해서 구름으로 직접 표현하거나 각종 식물과 꽃, 물고기 등의 문양으로 변형시켰다는 이론에 공감하며, 이러한 이론을 제기하는 극히 소수의 학자들에 동조합니다.
제대로 된 언어와 문자가 없던 선사시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림으로 표현하는 즉 조형언어일 수밖에 없으며 당연한 현상입니다. 이후 더욱 아름답게 발전 계승된 조형언어를 제대로 읽어낼 때 옛 사람들의 생각과 세계관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선사시대 사람들에게 물을 담는 토기그릇이 당시로서는 첨단의 기술이었을 것이고 현대의 첨단과학인 반도체 제조공정에서도 물은 필수입니다. 물중에서도『초순수(UPW, Ultra Pure Water)』입니다.
암사동 유적지에서 발굴된 토기에서부터 조선의 사기그릇까지 온갖 문양에는 이러한 선조들의 세계관이 배어 있으며 현대에까지 유전되어 왔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잠시 중국의 어느 스님의 오도송 하나를 소개합니다.
盡日尋春不見春(진일심춘불견춘)
芒鞋踏破隴頭韻(망해답파농두운)
歸來笑拈梅花嗅(귀래소접매화후)
春在枝頭已十分(춘재지두이십분)
하루 종일 봄을 찾아 헤매었으나 봄을 보지 못했네,
짚신이 다 닳도록 구름 덮인 농두산 꼭대기까지 헤매었지만,
돌아와 뒤뜰의 활짝 핀 매화꽃 향기를 맡으니
봄은 이미 매화나무 가지 위에 십분 무르익어 있더라.
도와 진리는 멀리에 있는 것도 새로운 것도 아니며, 뒤뜰도 아닌 나 자신 즉 마음에 있음을 표현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이 게송과 더불어서 삼성그룹은 <리움 미술관> 등 몇 군데 굴지의 미술관과 수장고를 갖고 있음을 상기합니다.
그 <리움 미술관>의 단 한 점의 분청사기 편병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 의미하는 바를 실천한다면 최고의 지혜와 경영철학을 얻는 한 방편이 될 수 있다고 생각 합니다. 그러할 때 유물들의 진정한 가치와 소장의 의미가 살아날 것입니다. 본 지면을 빌어서 공개적으로 제안해 봅니다.
우선 삼성가의 미술관과 수장고에는 불상이나 탱화 등 무한가치의 불교성보들이 있습니다. 한 구의 불상이나 불화에는 그 안에 삼천대천세계와 부처님과 그 가르침을 녹여내야 했던 사람들의 수행과 노력과 정성 그리고 당시의 첨단 기술이 배여 있습니다.
분청사기 한 점의 그림에도 천년 이상 이어져 내려온 도공의 정신과 이 땅을 살다간 선조들의 세계관이 배어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오늘의 기업에서 첨단의 제품을 생산하는 기술력 그리고 경영능력과 견주어도 결코 뒤처지지 않을 것입니다. 수장고에 만점이 있다면 만 명의 스승이 백만 점이 있다면 백만 명의 스승과 지혜가 있음입니다.
분청사기편병은 14, 15세기에 주로 유행했다 합니다. 당시 도공들은 선사시대의 토기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문양을 답습해서 편병에 구름과 비의 현상, 삼라만상의 화생의 원리, 천지의 기를 받아서 만물이 상호 조응해서 생명을 유지하는 의미로 무늬를 새겼다고 필자 또한 그렇게 생각합니다.
비록 그 문양들의 출발선이 불교가 들어오기 전 선사시대의 것이라 해도 불교적 입장에서 보면 편병의 모란 잎이나 구름이 서로 간 연계돼 있고 활동적인 모습은 사물과 사물이 거침없이 연계, 융섭하는 화엄의 세계입니다. 유교적 세계관에서는 편병의 외곽과 중심의 겹 원은 이(理)와 기(氣)로써 상호간 작용을 의미하지 않나 하는 해석도 해 봅니다.
편병 중앙의 겹 원은 천문을 의미하고 외부의 겹 원은 먼 허공의 미지의 더 큰 세계를 암묵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 안에서 소위 모란이나 풀싹이 나오는 것은 기 즉 구름(또는 만물)이 생성(영기화생)되거나, 비가내릴 준비가 된 것으로서 그 과정을 여러 형태도 문양 화 했다고 생각합니다. 향후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나 이 이론을 제기하는 학자들의 이론에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가나 기업 등 조직은 차등적으로 기능과 구성을 형성하고 있는데 이는 효과를 창출하기 위해 나눈 것에 불과 하니 “일체와 원형의 철학과 세계관”을 수용하는 것이 인류가 대기업들이 추구해 나갈 길이라 생각합니다. 바로 편병의 문양들에서 읽히는 내용입니다.
삼성그룹의 회장은 우리사회에서 공인중의 공인으로 그 무거운 책임 및 존경과 더불어 사회로부터 지탄도 받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룹을 창업하고 번창시킨 고 이병철, 고 이건희 회장에 대한 진정한 천도재(사십구재)는 후손들이 편병의 문양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평등성과 일체성의 세계관과 철학으로 어느 한 분 노동자는 물론이거니와 저 멀리 아프리카의 어느 한 소비자까지도 나와 내 가족이라는 마음가짐으로 경영을 할 때 또 다른 의미로 완성된다 할 것입니다.
기업이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당연하나 예측 불가능하게 급속히 변화하는 세상으로 좀 손해를 본다 해도 세상이 처할 위험을 예측하며, 구세를 위한 비상의 의약품 및 장비 등의 상품연구와 개발에도 지금보다도 더더욱 관심을 가지면 좋을 것입니다.
삼성가의 수장고에 잠자고 있는 불교 관련 성보 및 각종 유물을 공개해서 학자에게는 연구의 기회를, 사람들에게는 관람의 즐거움을, 관련 종교인에게는 신앙심을 고취시킨다면 기업과 가문에도 의미 있는 일이 분명합니다. 필자는 기 언론에 보도된 엄청난 양의 그 유물의 소장 경위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공개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유물 중 불상 등 불교성보는 애초에 신앙의 대상으로 조성된 것으로 각종변란으로 흩어져서 신앙과 봉대에서 소외되고 개인소장이 된 것입니다. 일 년에 한번이라도 이 성보들에 대하여 불교신앙의 의미와 더불어 조성 당시의 정성을 기리는 불공을 올린다면 좋을 것입니다.
이일은 아직은 이건희 회장의 상징성이 남아 있는 지금의 시기에 시작해야지 시간이 지나면 의미가 퇴락하거나 아예 불가능할 것입니다. 아끼는 유물일수록 그 공개는 역사와 지혜를 세상과 함께 깊고 넓게 공유함과 같습니다.
특히 개태사와 소송까지 간 『개태사금동탑』은 <대한불교조계종>에 장기 임대 형식으로라도 대여하여서 신앙의 대상으로 매일 염불공양을 받도록 하기를 희망해 봅니다. 그 공덕은 삼성가와 세상에 만대로 회향될 것입니다.
대기업들이 세상에 공헌한 바도 크나 성장 과정에서 개인과 세상에 피해를 준 것도 적지 않습니다. 앞으로는 단 한사람의 노동자에게도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어느 기업이든 만일 선대가 한 그러한 일이 있다면 후손으로써 이제라도 참회하고 진정으로 보상을 할 때 공덕이 넘치고 세상과 역사에 남는 진정한 의미의 천도재가 될 것입니다.
선조들은 사발 하나에도 자연과 우주 그리고 창조적 예술성을 담았으니 오늘의 삼성을 비롯한 기업들의 기술력 저변에는 분명 선대로부터 유전된 우리의 유산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극락왕생을 발원합니다.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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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應/불교사회정책연구소
사람 이 죽으면 반드시 가게되는 어떤 하나의 빛을 따라 가게ㅣ되고 일정기간 동 안 중음 의 세상에서 떠돌다가
각자 나름 가고싶은 세상 즉 빛이라고 여겨지는것을 따라 방황하다 생명 있는 암컷의 자궁속으로 수태되어 들어간다는 내용
즉 여기서 도를 마이 닦은 수행자는 자기가 가고싶은 길을 선택할수 잏다고 함
그래서 가보지 않은 두갈래길 즉 다음생 이 행복한길 다음생 이 고난이 있고 행복하지 않은길 두갈 래 길 어느것
할 래? 하면 후자의 힘든 길 을 선택 한다네요
왜? 그래야 거기서 깨달음 얻을수 있다고 .
한번 읽어 보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