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삼귀의 그 가운데 세 번째 귀의승중중존(歸依僧衆重尊)의 우리 말 번역에 관해서 이야기가 많아서 생각해봅니다. 지난번에 ‘한글 삼귀 제대로 된 것이다’라는 글에서 이미 주장한 것이기는 하지만 조계종의 종회 결의와 허정 스님의 이의 제기, 진흙속의 연꽃 등의 반대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어서 다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듯이 우선 한글 삼귀의가 문제라는 의견을 내는 분들 가운데는 외국어를 잘 알거나 검색능력이 뛰어난 분들이 있는 듯합니다. 영어, 일어, 중국어, 독일어, 프랑스어, 빠알리어, 산스크리트어 등을 잘 아는 분들이 우리말을 좀 더 살폈으면 하는 바람을 저는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들의 주장 가운데 상당수의 의견이 한글 삼귀의가 잘못되어서 현재 특정종단을 중심으로 한 한국불교 승단이 타락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주장인가 하는 생각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결론으로 말하면 승려들의 타락은 승단의 분위기, 사회의 분위기 그리고 개인의 일탈행위 등 원인과 배경이 있습니다. 그것을 한글 삼귀의 가운데 세 번 째 승귀의 해석이 잘못되어서 그렇다고 한다면 너무 안이한 해석이 아닐까요? 그런 주장에서 제기하는 적용의 문제는 우리말을 제대로 아는 이들이라면 하기 어려운 주장이기도 하기에 그렇습니다.
초기불교의 시각을 가졌다는 이들이 말하기를, 빠알리어 경전에서 말하는 상가(sangha), 중국 한자의 우리말 발음인 승가(僧伽)는 스님이 속한 집단이라고 합니다. 승단(僧團), 교단(敎團)이라고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냥 스님이 아니라 성스러운 스님들을 승단의 구성원이라 한다고 합니다. 저는 그 견해에는 별 다른 견해가 없습니다. 경전에도 분명하게 성스러운 승가라고 하였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스님들이라고 하는 번역이 잘못되었거나 범계의 원인이 한글 승귀의에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근래에는 한글 삼귀의 번역과 작곡자가 불교를 모르는 초심자였다는 주장에는 사려 깊지 못함이 배어있다고 생각합니다. 스님들에는 둘 이상이면 들이므로 승가의 구성요건인 4인 이상에 맞지 않으므로 잘못이라는 견해도 바른 것이 아닙니다. 둘 이상이면 넷 이상에도 해당되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적용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린 것을 원칙으로 주장한 것입니다. ‘이상, 이하’는 ‘그 자체도 포함되지만 그 보다 많은 또는 그 보다 적은‘ 이라는 뜻도 들어있습니다.
알다시피 삼귀의는 삼보에 귀의한다는 뜻입니다. 삼보는 부처님, 가르침, 스님들을 뜻합니다. 빠알리어는 붓다(Buddha), 담마(dhamma), 상가(sangha)입니다. 중국 한자어의 우리말 발음은 불타(佛陀), 달마(達摩), 승가(僧伽)입니다. 빠알리어의 띠사라나가 붓당 사라낭 가차미, 담망 사라낭 가차미, 상강 사라낭 가차미입니다. 이를 중국에서 번역하고 우리가 발음하기를 나모 붓다야, 나모 담마야, 나모 상가야 또는 나무 불타야중, 나무 달마야중, 나무 승가야중 이라고 합니다. 또는 귀의불양족존(歸依佛 兩足尊), 귀의법이욕존(歸依法 離欲尊), 귀의승중중존(歸依僧 衆重尊)이라고도 합니다. 붓당, 담망, 상강의 인도말은 인도 고어를 아는 빠알리어 상용자들은 그저 이해가 되므로 다른 설명을 붙이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붓다와 담마와 상가의 특징이나 뛰어난 점을 <깃발경> 등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래9덕, 담마6특징, 4쌍8배의 성향 등이 그 내용이지요. 그런데 중국을 거쳐서 왔는지, 그린로드나 씨로드를 거쳐 왔는지 더 살펴야 하겠으나 한국에 전래되면서 중국 한자어를 쓰다가 근래에 한글로 번역하면서는 문제가 되지 않다가 최근의 어지러움과 다툼의 과정 가운데 한글 삼귀의 그 가운데 승귀의 문제가 불거진 것은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 주장을 하는 상황적 배경에는 인도, 중국불교가 아닌 현재 한국불교 승려들의 범계행위가 들어있습니다. 저는 제가 소속한 종단이거나 특정 종단이거나 또 다른 종단이거나 범계와 관련하여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비판하거나 변호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계를 줄 때에 전계사께서 하는 말씀과 율장에 의하면 때때로 주의를 기울이고 함께 되새기면서 지계의식을 일깨우는 것은 바람직하고 권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이 포살입니다. 모여 살면서 스스로의 부족함과 다른 이의 모자람을 살펴서 반성하고 바로잡아주는 것은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자자입니다. 그 때 새겼던 말씀 가운데 ‘지킨다 자랑 말고 못 지킨다 비난말라’는 말씀과 ‘남 할 일과 못 할 일 살피지 말고 제 할 일과 못 할 일 살피는 슬기로운 이가 되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신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개혁하는 일에 의견을 내거나 나서면 될 일입니다.
다른 주장에 의하면 현재 한국불교의 꽤 많은 승려들이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대로 의식을 해서 의식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합니다. 의식(儀式)이 의식(意識)에 상당부분 영향을 주므로 의식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주장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제가 가끔 쓴 ‘의식 있는 의식을 해야 한다’ ‘교화의식에서 수행의식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에도 맞는 부분이 있어서 환영합니다.
그렇더라도 ’삼귀의가 아니라 이귀의’라는 말이나 ’스님들에게 귀의하면 안 된다’거나 ’승가에, 상가에 귀의한다’는 표현에는 더 살펴야 할 것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취지의 글을 몇 군데 사이트에 쓴 적이 있습니다.
우선 단체라는 것은 별도로 생긴 것이 아니라 일반 승려든, 성스러운 승려든 승려들의 모임입니다. 이는 여러 초기불교론을 주장하는 이들이 경문을 통해 확인한 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어떤 이들의 글에서는 재가자도 승단에 포함된다 하기도 합니다. 재가자는 승단에 포함시키지 않는 것이 그동안의 관례였습니다. 그리고 율장을 중심으로 한 개념 규정도 그렇습니다.
아리야상가 즉 성승(聖僧)은 수다원~아라한 과위를 얻은 성스러운 스님들이라는 것이 <깃발경(다작가숫따)> 등에 나오는 말씀이지요. 대승불교의 여래 10호와 초기 상좌부불교의 여래 9덕 ,그리고 법보와 4쌍8배의 아리야상가의 덕성들이 그곳에 설해져 있습니다. 아리야상가를 주장하는 이들이 현재의 한국승가를 부정하면서 재가자들을 포함시켜 말하는 것은 더더욱 넌센스입니다. 여기에 재가불자가 들어갈 틈은 없습니다. 다만 민주주의 시대에 종단이라는 이름의 사회 기구의 역할을 하면서 신도들의 신행도 영향을 주기 때문에 의사결정을 하는데 신도들도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신도들을 승단에 넣자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재가종단을 지향하는 종단에서도 신도는 제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리야상가 즉 훌륭하신 성인 반열에 오르지 못한 일반스님들은 어디에 속합니까? 경전에 나오는 보통스님들의 법랍은 대개 10년 미만이고,그 이상은 스승이 될 수 있어서 화상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른바 아사리(아짜리야)입니다. 15년 이상이면 장로(테라,테리)라고 불렀습니다. 경전 상의 테라가 요즘의 눈높이에서 보면 그리 높은 스님이 아닌 것입니다. 그 가운데 교진여(콘단냐)처럼 부처님을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라한이 된 이들도 있지만 시간이 더 필요한 이들이 더 많았습니다. 끝내 아라한이 못된 이들이 더 많았을 것입니다.
우리말 삼귀의는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로 되어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빠알리어나 중국 한자어에는 들어있지 않은 ‘거룩한’이라는 말이 셋 다 들어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작사자가 꽤 많이 생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승귀의에 문제 있다고 주장하는 일부 논자들은 앞의 둘은 동의하는데 뒤의 세 번 째는 동의하지 않고 있습니다. 둘은 그대로 두고 세 번 째만 "거룩한 승가에 귀의합니다"라거나 "거룩한 상가에 귀의합니다"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대중들’이라는 표현을 하거나 자귀의 법귀의 개념을 도입해 스스로에게 귀의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아니면 제대로 된 우리말 표현을 찾아내지 못한데다가 현 한국 승려들의 문제점을 인지하여 귀의할 수 없다는 표현을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대개의 현 한국 승려들은 이런 주장들을 위험시하거나 애써 도외시 하고 있습니다. 물론 현재의 승려들은 그 어떤 주장에도 그저 가만히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하기도 합니다.
저는 이런 견해들을 접하고 여러 차례 여러 곳에서 주장했습니다. 단체인 상가나 승가를 귀의대상인 승보로 하든, 성인의 반열에 오른 사쌍팔배를 승보로 하든 우리말로 옮길 때는 앞의 불보, 법보처럼 다 옮겨 같은 기준, 같은 표현으로 써야 한다고 말입니다.
붓다, 담마, 상가로 하든지 불타, 달마, 승가로 하는 것은 제 의견과는 다르지만 통일성이 있으므로 주장자체는 문제가 없어서 저는 이견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거룩한 부처님, 거룩한 가르침이라고 옮긴데 이어서 귀의승 부분만 거룩한 상가라 옮기거나 거룩한 승가라 하는 것은 어울리지도, 바르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생각합니다. 비판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한국인이지만 우리말, 우리글을 제대로 모르는 이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원래 있는 삼귀의를 이귀의로 주장하는 것은 더욱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리말 삼귀의는 탄생 배경은 더 살펴야겠으나 말과 문장구조, 교리적으로 보아도 잘한 옮김입니다. 그냥 스님이나 스님들이 아니라 거룩한 스님이나 스님들은 귀의의 대상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저 ‘스님’이 아니라 ‘거룩한 스님들’이므로 단체를 규정한다는 개념에도 맞습니다.
혹시 둘이나 셋을 빼자고 한다면 그 부분은 논의할 필요가 있겠지요.
이는 이미 부처님의 보기에도 나와 있습니다. 부처님이 둘이라서 존경, 귀의의 대상이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잘 알다시피 아라한 다섯을 배출하고 이 세상에는 아라한이 여섯이라고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부처님도 아라한이기에 그렇습니다. 삼마삼붓다, 붓다와 아라한, 벽지불의 구별이야기는 갈라서 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곳에서 다루기로 합니다.
현재의 승려, 승려들, 승단에 관한 지율, 수학, 수행에 관한 비판은 필요할지 몰라도 우리말 삼귀의의 세 번째 승귀의를 부정하는 것은 다시 살피기를 또 한 번 더 제안합니다. 한글 삼귀의 문장에는 부처님과 가르침에도 들어있는 ’거룩한’이 스님들께도 똑같이 들어 있습니다. 그냥 스님이 아니라 거룩한 스님 그것도 단수의 스님이 아니라 복수의 거룩한 스님에게 귀의하는 것은 빠알리어의 상가와 견주어 어긋남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재성 박사는 참모임이라는 말을 번역어로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의식문에 참 모임을 쓸 때는 고민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반드시 아리야상가, 성승가만을 뜻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승려를 포함한 불자들의 지계의식의 저하는 다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승속 모두에게 금하고 있는 행위들을 승속 모두 내놓고 하거나 숨기고 하거나 그런 것들은 우리들이 스스로 바로잡아야 합니다. 5계인 살도음망주는 승속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인데 지키는 이들이 많다고 보기는 쉽지 않다는 분석입니다. 바르게 잡아가야 하겠지요.
우리말 삼귀의를 다 긍정하는 견해에서 한국승단, 한국불교를 바르게, 제대로 세우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를 불교, 한국불교에 관한 애정을 가지고 연구해서 대안을 제시하는데 힘쓰면 어떨까 생각해봅니다. 계, 정, 혜...의 측면에서... 이리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라고 제안하는 것은 어떨까 하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불교의 구성을 부처님과 가르침과 스님들(승단, 승가, 상가)에 관한 믿음의 종교, 따름의 종교라고 정의할 때 삼귀의를 온전히 하고 5계를 수지하는 이를 일러 불자라고 합니다. 더 나아가 10계를 지니면 예비 승려인 사미, 사미니라 하고 250, 348등 구족계를 수지하는 이를 비구, 비구니라 합니다. 초기불교, 상좌부 불교의 입장이든 대승불교, 대중부 불교의 입장이든 자신의 지향점과 소속을 가지게 되면 스스로 그 교단의 계율을 지니고 따르면 됩니다.
부디 한글 삼귀의는 그대로 두고 다른 것을 주제로 삼아 비판하였으면 합니다. 그리고 대안을 제시했으면 합니다.
/ 법현스님(열린선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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