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삼귀의에 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있어서 생각해봅니다.
우선 한글 삼귀의가 문제라는 의견을 내는 분들 가운데는 외국어를 잘 알거나 검색능력이 뛰어난 분들이 있는 듯 합니다. 영어, 일어, 중국어, 독일어, 프랑스어, 빠알리어, 산스크리트어 등을 잘 아는 분들이 우리말을 좀더 살폈으면 하는 바람을 저는 가지고 있습니다.
초기불교의 입장을 가졌다는 이들이 말하기를, 빠알리어 경전에서 말하는 상가(sangha), 승가(僧伽)는 스님이 속한 집단이라고 합니다. 승단(僧團), 교단(敎斷)이라고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냥 스님이 아니라 성스러운 스님들을 승단의 구성원이라 한다고 합니다. 저는 그 견해에는 별 다른 이견이 없습니다.
삼귀의는 삼보에 귀의한다는 뜻입니다. 삼보는 부처님, 가르침, 스님들을 뜻합니다. 빠알리어는 붓다(Buddha), 담마(dhamma), 상가(sangha)입니다.중국 한자어는 불타(佛陀), 달마(達摩), 승가(僧伽)입니다.
붓당 사라낭 가차미
담망 사라낭 가차미
상강 사라낭 가차미
나모 붓다야
나모 담마야
나모 상가야
나무 불타야중
나무 달마야중
나무 승가야중
여기에서 다른 것은 문제삼지 않고 승보에 귀의한다는 것만 문제 삼고 있습니다.
그런 주장을 하는 상황적 배경에는 인도불교가 아닌 현재 한국불교 승려들의 범계행위가 들어있습니다. 저를 포함한 현재 한국불교의 꽤 많은 승려들이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삼귀의가 아니라 이귀의’라는 말이나 ’스님들에게 귀의하면 안된다’거나 ’승가에, 상가에 귀의한다’는 표현에는 더 살펴야 할 것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취지의 글을 몇군데 사이트에 쓴 적이 있습니다.
우선 단체라는 것은 별도로 생긴 것이 아니라 일반 승려든, 성스러운 승려든 승려들의 모임입니다. 이는 여러 초기불교론을 주장하는 이들이 경문을 통해 확인한 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어떤 이들의 글에서는 재가자도 승단에 포함된다 하기도 합니다.
아리야상가 즉 성승(聖僧)은 수다원~아라한 과위를 얻은 성스러운 스님들이라는 것이 <깃발경(다작가숫따)> 등에 나오는 말씀이지요. 대승불교의 여래 10호와 초기 상좌부불교의 여래 9덕 ,그리고 법보와 사쌍팔배의 아리야상가의 덕성들이 그곳에 설해져 있습니다.
아리야상가를 주장하는 이들이 현재의 한국승가를 부정하면서 재가자들을 포함시켜 말하는 것은 더더욱 넌센스입니다. 여기에 재가불자가 들어갈 틈은 없습니다.
그런데, 아리야상가 즉 훌륭하신 성인 반열에 오르지 못한 일반스님들은 어디에 속합니까? 경전에 나오는 보통스님들의 법랍은 대개 10년 미만이고,그 이상은 스승이 될 수 있어서 화상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른바 아사리(아짜리야)입니다. 15년 이상이면 장로(테라,테리)라고 불렀습니다. 테라가 요즘의 눈높이에서 보면 그리 높은 스님이 아닌 것입니다. 그 가운데 교진여(콘단냐)처럼 부처님을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아 아라한이 된 이들도 있지만 시간이 더 필요한 이들이 더 많았습니다. 끝내 아라한이 못된 이들이 더 많았을 것입니다.
우리말 삼귀의는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로 되어 있습니다.
초기불교를 주장하는 일부 론자들은 앞의 둘은 동의하는데 뒤의 세번째는 동의하지 않고 있습니다. 둘은 그대로 두고 세번째만 "거룩한 승가에 귀의합니다"라거나 "거룩한 상가에 귀의합니다"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아니면 제대로된 우리말 표현을 찾아내지 못한데다가 현 한국 승려들의 문제점을 인지하여 귀의할 수 없다는 표현을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대개의 현 한국 승려들은 이런 주장들을 위험시하거나 애써 도외시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견해들을 접하고 여러차례 여러 곳에서 주장했습니다. 단체인 상가나 승가를 귀의대상인 승보로 하든, 성인의 반열에 오른 사쌍팔배를 승보로 하든 우리말로 옮길 때는 앞의 불보, 법보처럼 다 옮겨야 한다고 말입니다.
붓다, 담마, 상가로 하든지 불타, 달마, 승가로 하는 것은 제 의견과는 다르지만 통일성이 있으므로 주장자체는 문제가 없어서 저는 이견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거룩한 부처님,거룩한 가르침이라고 옮긴데 이어서 귀의승 부분만 거룩한 상가라 옮기거나 거룩한 승가라 하는 것은 어울리지도, 바르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생각합니다.
비판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한국인이지만 우리말, 우리글을 제대로 모르는 이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원래 있는 삼귀의를 이귀의로 주장하는 것은 더욱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리말 삼귀의는 탄생 배경은 더 살펴야겠으나 말과 문장구조, 교리적으로 보아도 잘한 옮김 입니다. 그냥 스님이나 스님들이 아니라 거룩한 스님이나 스님들은 귀의의 대상임에 틀림 없습니다.
이는 이미 부처님의 보기에도 나와 있습니다. 부처님이 둘이라서 존경, 귀의의 대상이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잘 아다시피 아라한 다섯을 배출하고 이 세상에는 아라한이 여섯이라고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부처님도 아라한이기에 그렇습니다. 붓다와 아라한의 구별이야기는 다른 곳에서 다루기로 합니다.
현재의 승려, 승려들, 승단에 관한 지율, 수학, 수행에 관한 비판은 몰라도 우리말 삼귀의의 세번째 승귀의를 부정하는 것은 다시 살피기를 또 한 번 더 제안합니다. 한글 삼귀의 문장에는 부처님과 가르침에도 들어있는 ’거룩한’이 스님들께에도 똑같이 들어 있습니다.
그냥 스님이 아니라 거룩한 스님 그것도 단수의 스님이 아니라 복수의 거룩한 스님에게 귀의하는 것은 빠알리어의 상가와 견주어 어긋남이 없습니다.
우리말 삼귀의를 다 긍정하는 견해에서 한국승단, 한국불교를 바르게, 제대로 세우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를 불교, 한국불교에 관한 애정을 가지고 연구해서 대안을 제시하는데 힘쓰면 어떨까 생각해봅니다. 계,정,혜...의 측면에서... 이리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라 제안하는 것은 어떨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불교의 구성을 부처님과 가르침과 스님들(승단,승가,상가)에 관한 믿음의 종교, 따름의 종교라고 정의할 때 삼귀의를 온전히 하고 5계를 수지하는 이를 일러 불자라고 합니다. 더 나아가 10계를 지니면 예비 승려인 사미, 사미니라 하고 250, 348등 구족계를 수지하는 이를 비구, 비구니라 합니다.
초기불교, 상좌부 불교의 입장이든 대승불교, 대중부 불교의 입장이든 자신의 지향점과 소속을 가지게 되면 스스로 그 교단의 계율을 지니고 따르면 됩니다.
남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살피는 것은 어리석다고 <법구경>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스스로의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살피는 이가 슬기롭다고 했습니다.
/ 무상 법현(열린선원 원장)
[불교중심 불교닷컴. 기사제보 dasan2580@gmail.com]
어느 신행을 하든지 삼귀의를 합니다.
귀의 자체가 약간의 타력이지요.
긴 토론보다...한글 삼귀의 가운데 불,법 이귀의는 문제가 없다하니 승귀의를 소재로 삼아야겠군요.
같은 한글이어도 이해가 이렇게 편향적입니다.
깔라마숫따에서 처럼 불,법도 살펴보니 도움되고 좋아서 따르는 것입니다.
승,승가,상가도ㅡㅡㅡ승으로 하거나,승가로 하거나,상가로 하는 것은 제 글에서처럼 다른 생각이 없습니다.
승,승가,상가만 한글 대신 승.승가,상가로 표현해도 된다는 사람들은 어느 나라 사람의 의식,어문일지 궁금합니다.
전재성박사는 참모임이라 했습니다.그 의견은 본인 의견이니 중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