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輪回)
윤회(輪回)
  • 강병균 교수(포항공대)
  • 승인 2015.11.16 10:37
  • 댓글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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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강병균 교수의 '환망공상과 기이한 세상'-74.

영원히 이어져야 하는 것은 중생의 행복이지 나의 존재가 아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반드시 ‘나’라는 느낌이나 생각이 있어야만 내가 한 것인가? 반드시 내가 했다는 생각이나 느낌이 있어야만 유의미한 것인가?

보통 불교신자들은 자기들의 전생을 자각하거나 기억하지 못해도 선행을 하며 산다. 전생의 그가 현생의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자각하지 못해도, 현생의 그가 선을 행함에는 조금도 문제가 없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자신의 어떤 행이 선함의 극(極)에 이르러, 몸의 반사행동처럼, 그 행을 의식함이 없이 하는 현상에 대해서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이런 사례는 종교와 관계없이 나타난다. 인간이 지닌 본래 선한 모습의 발현이다: 벌 받을까봐 혹은 피해를 볼까 두려워 악행을 억누르고, 상을 받으려고 혹은 이익을 보려고 선행을 하는 것은 낮은 수준의 선이다; 이에 비해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선은 절대적인 선이다. 현대 진화생물학과 뇌과학의 발전은, 권선징악적인 인과론(因果論)이나 윤회론이 아니더라도, 인간이 보통의 선행과 악행을 하는 이유를 설명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이들은 우리가 걸어온 길을 즉 ‘왜 우리가 지금의 우리인지’를 설명해주지만, ‘우리가 갈 길’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진화에는 정해진 방향성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46억 년 전에 지구가 생긴 시점에서, 그리고 35억 년 전에 지구상에 최초의 생명이 생긴 시점에서, 지금의 인간이 생기기로 미리 정해진 바가 없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우리가 배워야할 것은 절대적인 선이다. 그런데 자연계가 지닌 놀라운 쌍대성으로 인하여, 인간이 지닌 본래 악한 모습은 전범, 흉악범, 학살범, 연쇄살인범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지극히 선한 행과 지극히 악한 행은 놀랍게도 평범한 사람들 중에도 생각보다 흔하게 나타난다. 소위 선과 악의 평범성(banality of good and evil)이다.)

내가 뿌린 선행이라는 씨앗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회와 국가와 지구와 우주에 이익이 된다면 의미가 없는 것인가? 거기다 그 씨앗을, 내가 나 자신도 모르게 뿌린 것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의미가 없는 것인가? (내가 별생각 없이 한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큰 이익이나 불행이 된 경험을 한 적은 없으신가? 그래서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 당사자로부터 감사나 원망의 말을 들은 적은 없으신가? 우리 ‘신구의 삼업(身口意 三業)’은 우리가 의식함이 없어도 ‘자체의 힘’으로 작동한다. 윤회를 거듭한다. 내가 한 망어·악구·기어·양설(妄語·惡口·綺語·兩舌 거짓말·험담·꾸민말·이간질)은 상대방 입을 거쳐 변형되어 다른 사람들의 망어·악구·기어·양설로 진화하고 윤회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끝없이. 인과장(因果場)과 연기장(緣起場)의 작동원리이다.)

이 세상에 전생을 기억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고 해야 할 정도로 극소수다. 관세음보살의 환생이라고 추앙받는 달라이라마조차도 기억하지 못한다. 설사 누가 자기 전생이 누구누구라고 주장해도 사실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다. 정신병동이나 기도원에 가면 자신이 전생에 예수였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수천 명이나 볼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는 수만 명에 이를 것이며 역사상 누계를 내면 수백만 명은 족히 될 것이다. 최영, 사명당, 원효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심지어 달마는 물론이고 부처였다고 고백하는 사람조차 있다: 그것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당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더운 입김을 내뿜으며 말한다. 정신이 멀쩡한 사람들 중에도 있다. 정말로 그러했는지 진실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다. 누가 자신이 어젯밤에 하나님과 대화했다고 주장하면, 그 진위를 가릴 방법이 있는가? 필자가 “본인이 우주를 창조했다”고 주장하면, 그게 아니라고 증명할 수 있는가? 통일장이론을 증명하는 것은 가능할지 모르나, 이 일은 불가능하다. 종교적인 주장이나 선언의 특징이다. 마찬가지로 자기가 “전생에 육조혜능이었다”고 주장하면 무슨 수로 사실인지 아닌지 가릴 것인가? 대한민국 제3대 내무부장관이 바로 그런 분이다. 믿어지시는가? 누가, 특히 젊잖게 생긴 수행자가, 자신이 돌아가신 당신의 증조부라고 주장하면서 금전적으로 도와달라고 부탁하면 어떻게 하실 것인가?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가장 집착하는 것이 개인의 정체성이라는 점이다. 진화론에 의하면 생명이 출현한 것은 45억년도 안 되므로 지구상 윤회의 역사도 그 정도이다. 1겁에도 못 미친다. 진화초기의 생물인 단세포 생물, 다세포 생물, 삼엽충과, 지렁이, 굼벵이, 무당벌레 같은 벌레와, 송사리, 피라미, 붕어, 가물치, 모래무지, 메기, 뱀장어 등의 어류가 (지구상에서의) 전생을 기억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도롱뇽, 도마뱀, 이구아나, 뱀 등의 파충류는 어떠하고, 박쥐, 돌고래, 향유고래, 펭귄, 개, 늑대, 하이에나, 사자, 누, 물소, 치타, 안경원숭이, 오랑우탄, 침팬지, 고릴라, 보노보 등의 포유류와 영장류는 또 어떠한가? 중요한 것은 전생의 기억 여부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의 나의 삶, 즉 행과 말과 마음(씀씀이)이다.

내가 하는 행·말·마음씀씀이가 가족, 친지, 동료, 마을, 사회, 국가, 우주에, 한 마리 작은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을 몰고 오듯이, 연쇄적으로 연기적으로 선한 결과를 가져 오는 것이다. 내가 죽은 후, 그 결과를 내가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선한 결과를 가져오면 되는 것이다. (전생의 당신은 현생의 당신의 행을 의식하지 못한다. 그리고 현생의 당신은 미래의 당신의 행을 의식하지 못한다.) 의식하고 못하고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내 행이 씨앗이 되어 더 많은, 수많은, 선을 낳는 것이 훨씬 더 ‘산수비유소불능급(算數比喩 所不能及)’으로 중요한 문제이다. 연기법에 의하면 내 행은 물결치는 연기장(緣起場 field of co-dependent origination)에, 선하거나 악한 혹은 무기(중립)의, 무한한 요동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칠불통계(七佛通戒)에 의하면 '제악막작 중선봉행 자정기의(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선한 일은 뭐든지 행하고, 악한 일은 뭐든지 행하지 말며, 자기 마음을 깨끗이 하라)'가 모든 부처님의 공통된 가르침이다. 꼭 내세가 아니더라도 과거·현재·미래의 내 모든 행은 연기장 안에서 시공을 통해서 끝없이 윤회한다. 한번 지은 행은 일파만파를 일으키며 가족, 직장, 사회, 지구, 우주에서 모습을 바꿔가며 윤회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의사와 무관하게 제 맘대로. 그리고 마침내 엉뚱한 모습으로, 갑자기 자기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면 우리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예를 들어, 내가 퍼뜨린 소문이 사람들 사이를 돌고 돌아 몹시 뒤틀리고 변형된 모습으로 다시 내게 전달될 때, 처음에는 못 알아보고 “그래요? 어떻게 그런 일이? 정말 나쁜 놈이군요!” 하고 놀라며 분개하다가 불현듯 깨닫는다. 그 소문의 진원지가 바로 자기였다는 것을! 그런데 그 소문은 이미 괴이하고 흉측하고 커다랗게 진화했고(육식공룡처럼), 소문의 대상은 이미 크게 피해를 입은 후이다(육식공룡의 먹이처럼). 그리고 통상 그런 피해는 불가역(不可逆)이다. 진화론의 무서운 면이다. 윤회 역시 불가역적이다. 현생(현재)은 내생(미래)에만 영향을 미치지 전생(과거)에는 절대로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불교에 의하면 시간은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 불교교리 상 시간여행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과(果)는 인(因)에 후행(後行 follow)하기 때문이다.

설사 통속적인 윤회가 없더라도, 지금 이 자리에서, 내 행이 가져올 밝고 행복한 내일의 또는 미래의 세상을 마음의 화면에 그려보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말인가(설사 그때는 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당신이 교통사고로 뇌에 충격을 받고 코마에 빠졌다가 50년 만에 깨어났는데, 당신이 50년 전에 한 발명으로 인류가 그동안 엄청난 혜택을 입었다면 그동안 당신의 의식이 없었던 것이 문제가 되는가? 당신의 업적은 꼭 당신의 의식이 있어야만 의미가 있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당신의 업적은 당신이 의식을 되찾는 순간에 생기는 것인가? 만약 그렇지 않다는 것이 당신의 답이라면, 즉 그 업적은 당신이 깨어나기 전에 이미 존재했다면, 당신이 영원히 코마에서 깨지 않아도, 즉 당신이 실제적으로 영원히 사라져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생을 기억하는 능력은 지금 이 자리에서 칠불통계를 실천하는 것에 비해서 ‘산수비유소불능급’으로 하찮은 일이다. (인류의 과거는, 개인들의 전생기억에 의해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통해서 집단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윤회론이, 즉 개인의 전생기억이 고인류학, 고대역사, 지구역사, 고생물학, 진화론 등 연구에 기여한 바는 전무하다. 문자 그대로 전무하다. 무수한 리시(rishi, seer, 천리안 천안통)와 요기(yogi)를 자랑하는 인도나, 선불교 조사(祖師)들을 자랑하는 중국에도, 그런 일은 없었다. 한국 역시 대수행자들을 배출했으나 한국고대사는 오리무중이다. 그래서 온갖 괴이한 이론들이 난비(亂飛)한다. 정말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대수행자들은 한없는 과거생(過去生)을 다 기억할 수 있다’고 하기 때문이다.

중국은 고래(古來)로 공룡뼈를 용뼈(龍骨)인 줄 알고 가루로 만들어 복용했다. 한약방은 공룡화석의 보고였다. 도인(道人), 선사(禪師), 조사(祖師)들이 지구생명계의 비밀과 역사를 알았더라면 절대 벌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천지만물, 삼라만상, 우주, 삼천대천세계의 시원(始原)과 종말을 논하면서도, 한약방에 굴러다니는 큰 뼈가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멀쩡히 두 눈을 뜨고도 못 본다’는 말이 바로 이런 경우이다. 이 면에서 고대의 수행자들과 현자들은 당달봉사였다.) 인류 경제제도·정치제도 발전과 인권향상과 과학·문명 발달은, ‘윤회를 믿지 않거나, 믿어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음을 기억하시라. 그들은 그들의 마음의 화면에 자신들의 행이 사회와 인류에 가져올 복된 미래를 그렸기 때문이며, 자신들이 불교신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칠불통계(七佛通戒)를 실천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불교인들의 공 역시 크다. 서양인들이 선행만 했다는 뜻은 아니며 그에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하게 악행을 한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 아메리카대륙(북미, 중미, 남미)에서의 원주민학살,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태즈메이니아(Tasmania)인 멸종시킴,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식민지화, 20세기의 두 차례의 세계대전 발화, 민간인에게 원자폭탄투하 등이 있다. 참으로 나쁜 짓을 많이 했다. 지난 500년간의 지구상의 인위적인 대참사는 거의 다 서양인들이 저지른 짓이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선행에 대한 생각(교리)보다는, 선행 그 자체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인류역사상, 서로 다른 종교와 서로 모순되는 교리를 지닌 사람들의 선행(善行)이 낳은 선과(善果)를 부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렇게 부정할 자신이 있으신가?

‘제악막작 중선봉행 자정기의 시제불교(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이다. 도대체 무엇을 더 바라시는가?

부처님이라는 살아있는 무량대수 와트 등대(bio-light house)가 없는 무불(無佛)시대에도, 인간은 생사(生死)의 고해(苦海)를 헤쳐 나가며 살아야한다. 그때 인간을 받쳐주는 것은 인간이 가진 본래의 심성(心性)이다. 그러나 이 심성은 불변의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끝없이 진화하는 심성이다.

종교(교리)와 관계없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원초적(原初的)인 선함의 ‘발현과 발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인류는 희망이 없다. 인류를 35억년 동안 단세포 아메바에서 100조 개 다세포 호모사피엔스로 이끈 것은, 부처님이 아니라, 바로 이 원초적인 선함의 발현·발전과 그것을 담는 그릇인 의식의 진화이다.

이런 의식의 진화를 우리 역사에서도 목격할 수 있다. 다산 정약용은 오랜 유배생활 중에, 병든 아내가 보내준 시집올 때 입었던 낡은 다홍치마에, 두 아들을 위한 교훈을 써 하피첩(霞帔帖)을 만들었다. “화와 복의 이치에 대해서는 옛날 사람들도 오래도록 의심해 왔다. 충과 효를 한다고 해서 꼭 화를 면하는 것도 아니고, 방종하여 음란한 짓을 하는 사람이라고 꼭 박복하지만은 않다. 그러나 착한 행동을 하는 것은 복을 받을 수 있는 당연한 길이므로 군자는 애써 착하게 살아갈 뿐이다.” 세상에 만연한 부조리에 짓눌리거나 잡아먹히지 않고 오히려 당당한 자세로 맞서 부조리를 때려잡으려 했던 조선말 위대한 지식인의 신산(辛酸)한 삶을 지탱한, 한겨울 눈바람 속에 서 있는 푸른 소나무 같은, 사상을 엿볼 수 있다. 그는 만년에 호를 사암(俟菴)이라 지었다. 먼 훗날 성인이 와서 보셔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자신의 학문과 수양에 자신감이 있다는 뜻이었다(百世以俟聖人而不惑). “군자는 애써 착하게 살아갈 뿐이다.” 참으로 그러했다. 

   
서울대 수학학사ㆍ석사, 미국 아이오와대 수학박사. 포항공대 교수(1987~). 포항공대 전 교수평의회 의장. 전 대학평의원회 의장. 대학시절 룸비니 수년간 참가. 30년간 매일 채식과 참선을 해 옴. 전 조계종 종정 혜암 스님 문하에서 철야정진 수년간 참가. 26년 전 백련암에서 3천배 후 성철 스님으로부터 법명을 받음.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며,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아사상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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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라는 이름으로 2018-05-12 13:16:06
전생의 예를 꼭 정신병자예를 드는건 고의적인거지요?
평범한 예도 우리주변에 얼마든지 있어요

아무리 전생에 화두들고 참선한 스님이라도 그때 자칫 엉뚱하게 살면 다음생에 무명의 나락으로 한순간에 떨어집니다 찰나생찰나멸 번뇌가 수시로 치고 올라 오기에 이게 방법은 하나 끊임없이 이중생의 길을 벗어나기 위해
방일하지 말고 붓다가신 그길을 (깨달음의 최상의 지름길) 죽 따라가려고
죽어라고 노력하고 정진하고 보시하고 육바라밀을 딱아야함

번뇌를 생기면 그즉시즉시 쳐내고 한마디로 수다원 될때까진 처절하게
자신의 번뇌와 싸우는 전사 되야함

무명의 불자 2018-05-12 13:04:33
락에 흔들리고 살아요 불교근처에도 가지 않고 웬떡이냐 하면서 퀘락의 길로
접어들고 살고 있음

또 한여자는 자신이 분명 남자였던것 같다 왜냐면 가정살림에 필요한것
즉, 요리,빨래,육아 이런것이 너무 생소하고 무섭고 하기 싫기에 전생에 남자였던것 같다라고 하며 여자라는존재 자체를 염오합니다

사유해보면 전생에 불교적인 환경에서 살았다하더라도 철저한 언행일치의 삶
을 살고 윤리적 도덕적으로 높은 점수의 실천을 한경우 남자로 태어날 가능성이 커지고 아닌경우 여자로 태어난다는 결론이 납니다
수도생활은 남자일경우에 더 유리하지요

불교에 충성 2018-05-12 12:55:44
제 주변에 자신이 첫번째전생에 스님이었다는 사람이 있어요
그사람은 전생에 좋은 스님은 아니였고 땡초였다고 하며 지금은 여자로 살고 있고
많은 남자를 섭렵하며 결혼에도 뜻이 없고 ,그렇다고 출가에도 뜻이없이 그냥 맘내키는대로 살다가 지금은 그냥 어서 죽음의 침상에 들기만을 바란다고 말로는 그래요

또 한사람은 전생에 비구니였는데 그전생을 처가 봤어요 (처가 영적인 영성이 맑음)
그남자는 전생에 비구니로 살면서 어떤 수도 생활을 했길래 전생에 여자였다가
현생에 남자로 태어났을까? 사유해 봅니다
물론 현생엔 바람도 피우고 감각적퀘

무암 2017-02-20 21:05:03
웃으면 웃는 것이 기뻐하면 기뻐하는 것이
생각하면 생각하는 것이 이것이 이어져 인생이
되니 연기가 이롭게 일어나도록 바르게 보고
배우고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연기가 무아이고
무상이고 공 이지만 이것이 세상의 전부이기 때문에 어떤 연기의 연속으로 자기를 구성하다 사라질
것이냐 이게 중요하지 전생 내생 이런 망상에
매달리면 바른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식물. 동물은 자손으로 이어지는 유전이고 사람도
같으며 문화 문명을 이어 받고 물려 줍니다
인간은 뇌가 발달한 동물일 뿐입니다.착한 일을 하면 좋은 결과가 주로 오눈 것은 인간의 ㅁ

초기경전_불교신자 2015-11-18 13:29:57
고따마 부처님의 가르침은
"윤회를 믿어라!"가 아니고
"윤회에서 벗어나라!"입니다.

"그 시작을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윤회다.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여서
치달리고 윤회하는 중생들에게
[윤회의] 처음 시작점은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
<막대기 경(S15:9)>

경의 말씀을 반대로 뒤집어 본다면...

'무명과 갈애를 벗어나,
윤회를 벗어난 사람들에게
윤회의 처음 시작점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가 되겠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윤회란
'나의' 전생_현생_내생과
전혀 다른
'세상의' 전생_현생_내생의
'반복_성'의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예를 들면
우주_팽창_수축의 반복_성
인류_역사의 반복_성
생명_진화의 반복_성
경제_위기의 반복_성


과거의 패턴pattern이
현재에 반복됨이
윤회라는 것이지요.

오늘날
과학자, 경제학자들 조차도
패턴pattern이 있음을
분명하게 감지하고는 있어도

과거 언제의 패턴pattern이
오늘 어떻게 시작되고 있는지를 아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 시작점을
분명하게 보는 경제_관료가
우리나라에도 있다면
우리나라의 경제에도
큰 보탬이 되겠지요.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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