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으면 읽을수록 맛이 있는 글이다. 현응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잘 비판하면서도 깨달음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깨달음이 끝이 아니라 깨어있는 회향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 정도 되니 부족한 스님들의 모습을 보면서 바른불교라는 재가모임을 만들 수 밖에 없었겠군. 그만한 행동력이 있다는 것은 윗 글에서 말한 것이 머리 속에서만이 아니라 실천되고 있다는 것이다. 학인들이여, 배울 바가 많으니 새겨 읽기를.
현응 교육원장의 글에 언짢은 이들이 한 둘이 아니니 우교수는 굳이 하나하나 들어 논리적으로 비판할 필요 없을 듯 하오. 어차피 수준이 안되니 친절한 우교수 글을 이해할 수도 없을 것이고. 교육원장 같은 이들은 언제나 있었고 그저 승복만 걸쳤지 어차피 옳바른 스님과는 다르지요.
현응= 깨달음은 고매하고 높은 어떤 정신의 경지가 아니다, 연기법등 경전에 대한 이해가 깨달음이다. 왜 그런고 하니 선방에서 오랜동안 수행했다는 수좌들 가운데 깨달았다는 사람 없고, 깨달았다는 분들도 생활하는 모습을 보면 과연 깨달은 분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부족했다.
요약하면, 선방수좌들 가운데 돈오했다는 자가 별로 없고 일부 돈오했다고 하는 분들 역시 실망스러웠다. 나는 오래동안 이 문제를 천착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깨달음이란 조사스님들이 말한 고매하고 높은 어떤 정신적 경지가 아니라 경전에 대한 이해여부다, 라고. 조사스님들이 말한 깨달음은 환타지라고 확신한다. 대승경은 시대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경이고 초기경에 의거해 보면 부처님은 선정을 가르치지도 않았다.
우교수= 선방수좌 스님들의 깨달음 지상주의, 경전공부 등한시, 대사회적 소통 내지는 입전수수에 입각한 깨달음의 사회화 과정 빈약한 부분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현응승려가 말한 깨달음이란게 단지 경전에 대한 이해 정도로 평가절하될 수 없다. 이해하는 것과 내면화,체화되는 것은 질적으로 다른 문제다. 자비가 어떤 것인지 이해하는 것과 자비가 내면화 되어 실제 행동으로 나오는 것은 다른 문제다. 이해하는 것은 [앎]의 문제지만 불교는 [앎]이 => 내면화 되어 [삶]으로 나타야 하는 것이다. 4성제 연기법을 잘 이해해서 [앎]이 생긴, 범계로 얼룩진 사찰관리인들(승려)을 봐라. 현응승려는 경전을 이해한 그들이 깨달은 자로 보이는가.
허정스님= 이해에도 깊이와 폭이 있다. 부처님이 선정을 가르치지 않았다는 말은 근거가 없다. 그리고 8정도를 잘 실천하면 수다원~아라한등으로 깨달음의 성과가 나타난다고 하셨지 실천하지 않았는데 단지 부처님과 대화를 나눴다고 해서 깨달음이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계정혜 삼학을 8개 단계로 늘리면 8정도가 된다. 삼학 가운데 "정", 8정도 가운데 "정정"이 명시됐는데 왜 부처님이 선정을 가르치지 않았다고 말하는지 모르겠다. 부처님과 함께한 5비구도 이미 선정력이 높은 자들이고 이들의 선정수행이 경전에 직접적으로 기록되지 않고 짧은 대화만 기록된 것을 보고 부처님이 선정을 가르치지 않았다는 근거로 삼는 것은 경전을 전체적으로 보는 눈이 없는 거 아니냐...
이 정도 되니 부족한 스님들의 모습을 보면서 바른불교라는 재가모임을 만들 수 밖에 없었겠군. 그만한 행동력이 있다는 것은 윗 글에서 말한 것이 머리 속에서만이 아니라 실천되고 있다는 것이다. 학인들이여, 배울 바가 많으니 새겨 읽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