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굴로 떨어진 사찰관리인들의 깨달음
귀신굴로 떨어진 사찰관리인들의 깨달음
  • 우희종 교수(서울대)
  • 승인 2015.09.12 06:31
  • 댓글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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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희종] 현응 스님의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에 대한 반박

조계종단 교육원장인 현응 스님의 글은 내용의 옳고 그름을 떠나 언제나 종단 현실에 있어서 솔직하기에 납득되는 면이 있다. 일전에 종단 승려를 사찰관리인 내지 불교자본가로 규정함으로써 대승불교를 표방하면서도 <화엄경> 보원행원품으로 상징되는 회향 자체를 상실한 한국불교의 현주소를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것으로부터도 잘 알 수 있다.

이번에는 선종을 표방하는 조계종단의 대표적 가치인 깨달음에 대한 생생한 육성 고백을 하고 있어 반갑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에 의해 드러난 깨달음의 현주소는 우리를 진정 슬프게 한다. 또한 많은 수행승들과 더불어 선학을 거론하는 교계 학자들이 종단 교육원장이 제시한 깨달음에 대하여 침묵하는 모습도 건강하게 보이지는 않기에 재가불자로서 의견을 말하고자 한다. 

한국불교의 깨달음이 관념화되고 우상화되어 삶의 현장으로 회향되지 못하고 있는 한국불교의 현실적 문제점은 개인적으로나 이끌고 있는 ‘바른불교 재가모임’에서나 늘 강조해 왔다. 그렇기에 종단 주류에 속한 현응 교육원장스님의 유사한 문제의식은 매우 공감된다. 그동안 종단이 산 속 깨달음만이 불교의 모든 것인 양, 사람 손이 닿을 수 없는 하늘 높이 올려놓고 소위 환타지로 변모시킨 것은 그 누구의 탓도 아니요, 불교자본가로서의 주류 승려들이다. 그 이유는 깨달음이라는 하늘 높은 환상으로서의 상품은 효능이나 유효기간에 대한 검증도 할 수 없는 수익 좋은 종교 장사의 밑천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국내 불교가 내세우는 허상으로서의 깨달음에 대한 현응 스님의 공감되는 지적이 정작 본인의 ‘이해로서의 깨달음’을 말하기 위한 전제로 사용된 것은 바른 불교에 대한 심각한 왜곡을 가져올 수 있어 매우 우려스럽다.

그는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도대체 어떤 것이기에 평생을 노력해도 성취할 수 없는가?’라고 하면서 평생 참선 수행해도 깨달은 사람을 보기 힘들다고 하는 매우 타당한 인식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그의 깨달음이란 ‘마음을 확실히 깨닫는 것’이고, 이는 ‘몸과 마음의 완성된 경지이자 모든 번뇌를 끊고 고매한 인격을 이룬 높은 경지’이다. 이는 분명 그의 지적처럼 추상적이고 모호하지만, 그런 깨달음이야말로 실참 수행에 의한 정의가 아니라 한국불교가 깨달음을 하늘 높이 올려놓으면서 만들어 놓은 종교 사업용의 관념적 깨달음이다. 

현응 스님은 이렇게 사찰관리인 집단인 만든 관념적인 깨달음을 전제한 후, 초기경전에서의 깨달음은 ‘연기관(緣起觀)의 이해를 확립함이며, 삶의 괴로움의 문제를 이러한 통찰과 이해로서 해결하는 것’이라 하면서 깨달음은 ‘잘 이해하는 것’이나 ‘올바른 이해’라고 정의한다, 이는 맞는 표현이다.

그런데 정작 이후의 논지에서는 깨달음을 ‘통찰과 이해’나 ‘잘 이해’, ‘올바른 이해’가 아닌, 단지 ‘이해’ 하나로만 변형, 축소시킨다. ‘통찰이나 잘, 올바른’ 등이 전제되어야 할 이해가 사라지고 스마트폰 등으로도 알 수 있는 단순한 이해가 되어 버린다.

선정 등의 삼매도 불필요한 손쉬운 이해의 깨달음 사례로서 부처님 당시 질문과 대화로 깨달은 제자들 경우를 언급한다. 그러나 그렇게 손쉬운 이해를 말하면서도 당시 부처님 회상에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떠나간 승려들에 대한 많은 사례들은 무시하고 있다. 더욱이 부처님이 강조한 팔정도에서의 선정도 간과되고 있다.

한편, 현응 스님의 입장처럼 기억하고 사유한다는 것을 부정할 이는 없다. 그러나 이를 언제나 ‘잘’ 기억하고 사유해야 한다는 것과 혼동하면 안 된다. 현응 스님 발제문에 있듯이 사띠는 단순히 ‘기억하여 사유함(念, 憶念)’이 아니라, ‘잘 기억하며 사유하는 것(正念)’이다. 누구나 기억하고 사유하지만, 어떻게 하면 부처님 가르침을 잘 기억하고 제대로 사유할 것인가가 남는다.

이 지점에서 수행이 거론되는 것이며, ‘자등명 법등명’의 수행이 바탕 되는 깨달음도 자리 잡는다. 불교자본가라는 종교장사치들이 만들어 놓은 하늘 위의 환타지 깨달음에 대한 부정은 타당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선정 수행을 통한 깨달음을 단지 연금술 내지 환타지로 허구화해도 같은 과오를 범하는 셈이다.

이러한 발제자의 근본적 오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연기실상’이 아닌 ‘연기법’이라고 이해하는 데에 있다. 근대학문에서 다루는 세상의 단순 인과율로서의 ‘연기법’에 대한 이해는 그가 지적한 것처럼 시대에 따라 변하지만, ‘연기실상’이란 시대와 문화를 떠나 변하지 않는다. 같은 원인과 결과를 다루지만, 안이비설신의라는 육근에 의해 형성된 이성(理性)과 이에 근거한 과학 내지 학문에 의한 연기적 모습과 부처님이 제시한 육근을 넘어서는 체험으로의 연기 실상과의 차이다.

연기실상은 지식으로서의 학문에서 다루는 직선적인 과거 현재 미래의 인과가 아니며, 시공간을 뛰어넘은 중중무진의 연기세계다. 이를 육근으로는 이해하기 어렵기에 많은 이들이 단순히 책을 공부하는 것을 넘어 수행을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부처님 이후 진화되어왔던 다양한 모습의 연기론을 알기 위한 요령과 다양한 독서와 노력을 선행해야 할 것’이라는 우스운 결론에 도달한다.

승려임에도 불구하고 종교로서의 불교와 다른 사상이나 철학과 비교하여 질적인 차이를 언급하지 못하고 단지 이해에 대한 차이로 파악한다. 그에게 불교는 기본적으로 여타 철학이나 사상과 다를 바 없으며, 따라서 깨달음도 이해에 불과하다. 그가 모를 뿐이지 세상을 연기적 모습이나 실체 없음으로 본 그리스 철학의 또 다른 변형일 뿐이다.

특히 그가 말하는 ‘몸과 마음의 완성된 경지이자 모든 번뇌를 끊고 고매한 인격을 이룬 높은 경지’라는 관념적 깨달음은 철저히 검토되어야 한다. 실참 수행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것은 존재에 있어서 도달해야 할 완성이란 없으며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지금 이대로 온전한 것임을, 번뇌를 끊어 사라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번뇌의 무상함 속에 들어있는 여래심으로 보는 것을, 특히 무엇보다 고매한 인격이 아니라 철저히 인간 본연의 모습이다.

인간 본연의 모습을 되찾는다는 것은 인간이 지닌 동물보다 더 지독한 갈애의 탐욕마저 직시하여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정함으로써 그런 갈애가 또 다른 생명력이 됨을 알게 되며, 더 이상 탐진치의 노예가 아니라 주인됨을 의미한다. 그런 면에서 깨닫는다 해도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고매한 인격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불매인과(不昧因果)’가 되어 스스로의 삶에서 자유롭되 너와 나의 이고득락을 위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일 뿐이다.

한편, 시대와 문화에 변하지 않는 가르침을 바탕으로 역사적 실천 행위를 언급한 현응스님의 문제의식은 매우 좋지만, 평등, 평화라는 지혜가 역사적 관점으로 펼쳐지는 자비와 분리되면서 그의 관점은 양변으로 분열되어 버린다. 진정한 깨달음이란 자비와 함께 드러나게 되는, 서로 상의상존하여 둘이 아닌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언어의 표면적 이해를 바탕으로 깨달음과 별도로 나뉘는 자비를 언급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그의 발제문에서 평등, 평화와 윤리, 정의 등을 동등하게 언급하는 것 자체가 지식적 이해임을 보여준다).

실참한 이들은 그것을 해오(解悟)라 하며, 그에 의한 지혜를 마른 지혜(乾慧)라 부른다. 자신 개인은 편안하지만 절절한 중생의 고통과는 분리된, 소위 귀신 굴에 들어앉은 상태임은 많은 선사들이 지적한 바와 같다. 이렇게 깨달음과 자비에 대한 분열된 인식을 바탕으로 하는 해오를 깨달음이라고 간주한 현응 스님은 불가에서는 낯선, 실재와 비실재를 구분하는 논리까지 등장시킨다.

깨달음이란 분명히 연기실상으로의 인식의 전환이기는 하지만, 인식 전환이란 제한된 의식의 확대라는 인식전환으로부터 사람의 삶 자체가 변화하는 인식의 전환까지 넓은 범위의 뜻을 지닌다. 이해에 의한 인식의 전환이란 대부분 ‘아, 그렇구나’ 정도의 인식 확대나 관점의 풍요로움으로는 이어지지만, 여전히 현실 삶의 전환으로 이어지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점에서 깨달음이 전제하는 ‘삶’으로의 체화된 이해와 단순한 문자적 ‘앎’의 이해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경제를 가르치는 경제학교수가 갑부가 되지 못하는 것처럼 불교를 잘 이해하는 불교학자가 깨달은 이가 되지 못하는 이치와 같다. 모르던 것을 이해하는 ‘앎’과 무명 속에 살던 이의 삶이 전환되는 ‘삶’으로서의 깨달음의 간극은 여전히 존재한다. 단지 이해해서 안다고 해서 삶은 변화하지 않는다. 아니 단지 ‘앎’으로서의 이해는 오히려 깨달음에 의한 ‘삶’의 변화를 방해하기도 한다. 소위 ‘안다’고 하는 이해가 있기 때문에 근본적인 인식의 변화를 통한 삶의 변화를 막기 때문이다. 연기 법칙을 안다는 이해(understanding) 수준으로 깨달음을 말하는 것은 착각이다.

철저한 통찰에 의한 이해를 통해 삶의 전환으로 이어질 때, 다시 말하면 통찰이 역사적 실천인 자비와 함께 자리 잡을 때 우리는 비로소 이를 깨달음(enlightenment)라 부르게 되며, 이를 위한 수행이 요구된다. 다시 말하면 이해가 단순한 ‘앎’이 아닌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통찰로 되게 하려고 우리는 수행을 한다. 이는 몸으로 행하여 삶으로 체화된 이해이기에 이해(understanding)가 아닌 통찰(deep contemplation and illumination)이라고 부르며, 이런 과정을 통해 삶 속에서 살아있는 깨어있음(full awareness)을 얻는다. 깨달음이 깨어있음으로 이어지는 대오각성(大悟覺醒)의 이러한 통찰은 그냥 문자나 지식 내지 논리적 이해로 오는 것은 아니다.

불행히도 신처럼 우상화된 깨달음으로 인해 반쪽 불교, 변태(변형된 형태)불교로 전락한 한국선불교에 대한 문제의식이 이 정도 수준에서 머물러 버린 것은 한국불교에 있어서 또 다른 불행이다. 종교로서의 불교를 단지 조금 더 뛰어난 또 다른 철학이나 사상으로 전락시키는 그의 관점이 어디에서 기인하는 가는 실참으로서의 간절한 수행 체험이 없기에 그런 것으로 보이지만, 무엇보다 그는 그가 비판하는 한국불교의 관념적 깨달음에 스스로 철저히 물들어 있기 때문에 진정한 깨달음에 대한 통찰을 놓치고 단지 이해에 의한 깨달음인 해오를 제시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팔만대장경을 외우고 이해하는 것보다는 경전의 단 한 줄이라도 체화시켜 자신의 삶으로 이어지는 것이 중요하다. 단지 스마트 폰으로 도달할 수 있는 깨달음이 종단 주류 스님으로부터 제시된 것 자체가 한국불교의 깨달음 지상주의라는 환타지가 만들어 낸 또 다른 기형적 관점이다. 그동안 사찰관리나 하면서 깨달음을 팔아 불교자본가로 변신한 이들이 얻게 된 자업자득의 결과가 스마트폰으로 접근 가능한 이해의 깨달음인 셈이다.

하늘 위로 올라가 환타지가 되었던 깨달음이 이렇게 자비와 분리된 해오(解悟)라는 귀신 땅굴로 추락했지만, 분명한 것은 진정한 깨달음은 우리들 삶의 현장인 땅위에서 철저히 삶의 문제로서 펼쳐져야 한다. 불교 자본가들이여, 깨달음을 하늘 위의 환상이나 머리 속 귀신 굴에 가두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고, 삶의 현장인 저자거리로 나오라. 깨달음 안에 이미 세상 고통에 대한 파사현정과 동체대비의 자비심이 없이 분리되어 있다면 그것은 알음알이에 불과하다. 평생 쫓아도 잡을 수 없는 천상에서 스마트폰으로도 붙잡을 수 있다는 지하 땅굴로 굴러 떨어진 한국불교의 깨달음, 언제쯤이면 삶이 변화하는 ‘회향’이란 소중한 가치를 되찾아 땅위에 살고 있는 우리 곁에 올 것인지 착잡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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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 2015-09-19 15:47:05
읽으면 읽을수록 맛이 있는 글이다. 현응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잘 비판하면서도 깨달음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깨달음이 끝이 아니라 깨어있는 회향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 정도 되니 부족한 스님들의 모습을 보면서 바른불교라는 재가모임을 만들 수 밖에 없었겠군. 그만한 행동력이 있다는 것은 윗 글에서 말한 것이 머리 속에서만이 아니라 실천되고 있다는 것이다. 학인들이여, 배울 바가 많으니 새겨 읽기를.

조금 2015-09-16 05:13:58
현응 교육원장의 글에 언짢은 이들이 한 둘이 아니니 우교수는 굳이 하나하나 들어 논리적으로 비판할 필요 없을 듯 하오. 어차피 수준이 안되니 친절한 우교수 글을 이해할 수도 없을 것이고. 교육원장 같은 이들은 언제나 있었고 그저 승복만 걸쳤지 어차피 옳바른 스님과는 다르지요.

현응이 개 껌 씹는 소리에 2015-09-15 00:25:10
현응아 ~ 댓글들에 진정 佛敎갈침이 있구나(其 中 하나 복사전재함).
갱식이는 봐도 개눈이라 먼말이지 모를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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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늘 깨어있어 다다르게 되는 경지...

자비와 지혜가 저절로 작동하는 경지...

정리 2015-09-14 15:26:14
현응= 깨달음은 고매하고 높은 어떤 정신의 경지가 아니다, 연기법등 경전에 대한 이해가 깨달음이다. 왜 그런고 하니 선방에서 오랜동안 수행했다는 수좌들 가운데 깨달았다는 사람 없고, 깨달았다는 분들도 생활하는 모습을 보면 과연 깨달은 분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부족했다.

요약하면, 선방수좌들 가운데 돈오했다는 자가 별로 없고 일부 돈오했다고 하는 분들 역시 실망스러웠다. 나는 오래동안 이 문제를 천착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깨달음이란 조사스님들이 말한 고매하고 높은 어떤 정신적 경지가 아니라 경전에 대한 이해여부다, 라고. 조사스님들이 말한 깨달음은 환타지라고 확신한다. 대승경은 시대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경이고 초기경에 의거해 보면 부처님은 선정을 가르치지도 않았다.

우교수= 선방수좌 스님들의 깨달음 지상주의, 경전공부 등한시, 대사회적 소통 내지는 입전수수에 입각한 깨달음의 사회화 과정 빈약한 부분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현응승려가 말한 깨달음이란게 단지 경전에 대한 이해 정도로 평가절하될 수 없다. 이해하는 것과 내면화,체화되는 것은 질적으로 다른 문제다. 자비가 어떤 것인지 이해하는 것과 자비가 내면화 되어 실제 행동으로 나오는 것은 다른 문제다. 이해하는 것은 [앎]의 문제지만 불교는 [앎]이 => 내면화 되어 [삶]으로 나타야 하는 것이다. 4성제 연기법을 잘 이해해서 [앎]이 생긴, 범계로 얼룩진 사찰관리인들(승려)을 봐라. 현응승려는 경전을 이해한 그들이 깨달은 자로 보이는가.

허정스님= 이해에도 깊이와 폭이 있다. 부처님이 선정을 가르치지 않았다는 말은 근거가 없다. 그리고 8정도를 잘 실천하면 수다원~아라한등으로 깨달음의 성과가 나타난다고 하셨지 실천하지 않았는데 단지 부처님과 대화를 나눴다고 해서 깨달음이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계정혜 삼학을 8개 단계로 늘리면 8정도가 된다. 삼학 가운데 "정", 8정도 가운데 "정정"이 명시됐는데 왜 부처님이 선정을 가르치지 않았다고 말하는지 모르겠다. 부처님과 함께한 5비구도 이미 선정력이 높은 자들이고 이들의 선정수행이 경전에 직접적으로 기록되지 않고 짧은 대화만 기록된 것을 보고 부처님이 선정을 가르치지 않았다는 근거로 삼는 것은 경전을 전체적으로 보는 눈이 없는 거 아니냐...

배거사= 수좌들 왜 반론 없어 실망이야, 현응됐고 범계하지나 말지 응?

우와~ 2015-09-14 12:47:00
현응은 너무 많은 다섯이나 가지고도 둘이라 우기니, 언제나 모자란 자들은 오해를 이해라고 주장하지.
우교수 글 정도는 이해 좋아하는 현응이 깨달아야 오해 안할 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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