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 정화는 대처승이 만연에서 탈피해 비구가 주류로 바로 선 계기였다. 대처는 일제강점기 유입된 것으로 알려지고, ‘대처=왜색불교’라는 인식이 지금도 남아있다.
한 연예인이 최근 TV프로그램에 출연해 “아버지가 대처승이었다”고 밝힌 것이 그 본보기이다. 그는 대처승 아버지를 둔 이유로 어린 시절 친구로부터 따돌림 당했다고 했다.
제점숙 교수(동서대)는 한일불교유학생교류회가 12일 부산 설법전에서 ‘불교정화운동과 범어사’를 주제로 개최한 ‘불교정화 60주년 기념 제1회 세미나’에서 발제했다.
제 교수는 ‘근대기 대처승 문제를 둘러싼 한일 불교계의 동향’을 통해 일본 대처승 제도가 어떻게 출발했고, 식민지 조선에 어떤 경로로 유입됐는지, 근대 선지식이던 용성‧만해는 대처승을 어떻게 바라봤는지를 설명했다.
메이지 이전, 일본불교 대처 금지 제 교수는 일본 진종의 종조 신란이 ‘대처를 했다’며 대처승의 시작으로 봤다. 그러면서 일본 정부의 대처승 허용은 1872년 ‘육식처대승수령’ 이후라고 했다. 그 이전인 에도막부 시절에는 승려의 여범‧대처가 금지돼 있었다고 했다. 여범은 승려 신분으로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말한다.
메이지 시대에 이르러 승려의 대처가 자유롭게 됐다. 이를 모리오카 키요미는 “일본 승려는 그 신분의 고유 의미를 박탈당하고, 승려라는 직업상 지위를 갖게됐다”고 했다.
제 교수는 “메이지 초 부상한 승려의 대처문제는 시행착오 끝에 오늘날 일본불교의 일상적 풍경으로 자리잡았다. 1940년대에는 일본불교의 각 종파와 무관하게 대처문화가 일상이 됐다”고 했다.
용성과 만해, 대처 두고 의견 달라
근대 한국불교 선지식이라 불리던 용성 스님과 만해 스님은 대처에 대한 생각이 달랐다. 만해는 일본 당국 등에 승려 결혼을 허용해 달라고 건의했고, 용성은 대처 금지 조항을 유지해 달라는 탄원을 냈다.
제 교수는 “만해는 일본 대처를 모델로 조선불교 부활을 꿈꿨다. 용성은 대처를 파계로 여기고, 조선불교에 있어서는 안 될 악으로 봤다. 대처에 대한 둘의 견해는 상반됐지만, 조선불교의 중흥을 꿈꾼 것은 같았다”고 했다.
유마 거사가 대처승
논평을 맡은 윤종갑 교수는 “<소품반야경>을 지은 법사들은 반승반속에 속하는 부류로 오늘날 대처승에 비유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대처적 인물로 유마 거사를 꼽았다.
윤 교수는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신라 승려 광덕과 엄장도 본보기로 들었다.
절친한 사이였던 광덕과 엄장은 둘 가운데 먼저 깨달음을 얻어 서방정토에 가게되면 알려주기로 했다. 어느 날 광덕이 먼저 깨달음을 얻어 열반에 들었다. 엄장은 광덕의 아내와 결혼해 청정한 결혼생활을 했고, 깨달음을 얻어 서방정토에 갔다는 내용이다.
윤 교수는 “원효 역시 승려였지만 요석 공주와 결혼해 아들도 낳았다”고 했다.
일본 진종은 재가종단
발표 후 총평한 도경 스님(화엄사 한주)는 “진종은 재가불교 종단이다. 한국의 진각종과 같다”고 했다.
스님은 “계를 받는 출가종단 구성원이 대처를 한다면 파계에 해당한다. 재가종단은 계를 받지 않기 때문에 파계라고 할 것도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진종에서 승려 부인의 위치는 주지보다 높다. 종단에서 수개월 교육도 하고 진산식도 봉행한다”며 “한국도 승려 부인 문제가 해결됐다면 대처승 문제가 다르게 해결됐을 것”이라고 했다.
이승만 “대처는 왜색불교” 이재헌 교수(금강삼종대)는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와 불교정화 운동의 전개’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7차에 걸친 유시 전문을 소개했다.
이 대통령의 유시는 ①1954년 5월 20일 ②1954년 11월 4일 ③1954년 11월 19일 ④1954년 12월 16일 ⑤1955년 6월 16일 ⑥1955년 8월 4일 ⑦1955년 12월 8일 있었다.
이 교수는 “이 대통령의 7차에 걸친 유시는 불교정화운동을 이끌어갔던 동력이었다. 핵심 내용은 비구승은 곧 애국승려이니 대처승을 몰아내고 문화유산인 사찰재산을 지키며 수리‧개량하라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비구승에게는 총궐기해 적극 행동에 나설 것을 주문했고, 대처승에게는 무조건 항복하라는 위협적 통첩이었다”고 했다.
정화 당시 여론은 비구 편
이 교수는 “수세적 입장이던 비구승에게는 대통령 유시가 유일한 무기였다. 어려운 일이 있을때마다 비구승들은 경무대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대통령은 이에 화답해 유시를 발표했다”고 했다.
이어 “대처승도 대통령 뜻을 받드는 태도를 보였다. 이는 절대권력 아래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 교수는 “불교가 정화돼야 한다는 대의명분에서는 비구-대처는 물론 국민 여론까지도 모두 부인할 수 없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다”고 했다.
유시 의존=관제불교 이 교수는 “이 대통령의 개입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있을 수 없는 행동이었다. ‘종교의 자유’와 ‘정교분리 원칙’이라는 헌법정신을 무시하고, 특정 종교 문제에 제왕처럼 명령을 하달하는 식으로 개입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대통령이 불교계 분쟁에 개입한 것은 친일 기독교 세력을 보호하기 위한 여론 무마용인 측면도 있다”고 했다.
"정화는 무슨...종권 다툼"
이 교수는 “정화운동에는 종권다툼의 성격이 크다는 자성도 필요하다”고 했다. “국가권력에 의지한 종권다툼이었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동산 스님이 대처승 비판을 수용하며 했던 “비구승이 한사람도 없다는데 대해 우리도 시인한다. 다만 앞으로 비구승이 될 것을 목표로 하려는 것”이라는 발언을 소개했다.
이 교수는 “정화 이후 조계종에서 계속된 종정과 총무원장 간 종권 갈등은 비구승 종단 면모가 갖춰지면서 비구승 가운데 현실에 안주하거나 타협해 기득권 유지에 급급하는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고 했다.
이어 “비구 측이 종권획득 과정에서 사찰 점유에 필요한 인적자원을 보충하기 위해 급조한 승려들이 사찰 운영을 파행으로 이끌었다. 이들이 정화 정신을 무색하게 했고, 지속적인 불교 분규에도 일정 부분 영향을 끼쳤다”고 했다.
대처가 '태고'라니 비구는 '보조'라고? 이 교수는 정화 도중 불거져 나온 환부역조 논리도 문제 삼았다. 대처 측이 종조로 태고를 내세우자, 비구는 차별성을 보이기 위해 보조를 종조로 모신 것을 설명했다.
이 교수는 “종조문제를 정하지 못하고 후일 전문학자 고증을 들어 처리키로 하고 보류한 점, 현재까지도 정리하지 못하는 점 등은 정화를 종권다툼으로 보이게 한다”고 했다. (관련 기사 이어집니다)
[불교중심 불교닷컴, 기사제보 cetana@gmail.com]
부처님은 어느 종단 사람만
성불 할 수 있다고 대장경에 얘기했나
참된 수행자는 종단에 구애받지 않는다
오직 성불을 위해 정진 할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