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 상량문의 서기(西紀) 독자표기 유감
숭례문 상량문의 서기(西紀) 독자표기 유감
  • 이련 기자
  • 승인 2012.03.07 14:07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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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하여 서소문(西小門)을 고쳐 짓도록 하고, 석장(石匠)인 중[僧]의 머리를 베어 그 위에 매달아 그 나머지 사람들을 경계하였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3년(1394년) 2월 15일(을유)자에 나오는 기록이다. 조선 개국 후 30여년이나 계속된 신도(新都) 건설의 노역은 혹독했다. 고통을 견디다 못해 도망하는 인부들이 속출하자 무리 중에 석장승(石匠僧)을 잡아 참형하고 그 머리를 서소문 꼭대기에 매달아 경계시켰다는 내용이다.

대한민국 사람치고 한양 정도에 얽힌 태조 이성계와 무학 대사의 이야기를 모르는 이는 별로 없다. 조선 개국과 새 도읍 건설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삼봉 정도전의 원대한 계획에 대해 전문가 못잖은 식견을 드러내는 이도 적지 않다. 공역에 동원된 일반 백성과 승려들의 괴로움이 얼마나 컸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는지, 장인(匠人) 승려들의 공로와 헌신이 어느 정도였는지 등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이는 많지 않은 것 같다.

기록에 따르면 천도 후 곧바로 시작된 성곽 축성 공사 49일 동안만 해도 전국에서 11만8,000여 명의 인원이 동원되었고, 사대문과 사소문의 완성을 본 2차 공사 때는 7만9,400명, 세종 4년에 이루어진 개축 때는 무려 32만2,400명의 장정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새 도읍 초창기 한양의 인구를 대충 5만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으니 얼마나 엄청난 수의 노동력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승려들의 피땀과 헌신, 대목 각희 스님의 꿈

숭례문 건설은 태조 5년에 시작되어 2년 후 태조 7년 2월에 완공되었다. 1962년도에 숭례문을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 건립 당시의 상량문이 발견됐다. 숭례문 건립 당시의 대목장이 법륜사의 ‘각희(覺希)’ 스님이었음이 드러났다. 설계부터 시공까지 공사 현장을 총체적으로 지휘 감독하는 이가 바로 대목이라는 사실에서 도성의 정문을 책임진 그의 출중한 능력을 헤아리게 된다.

조선 조정은 승려들을 거의 마음대로 동원했다. 숭유억불을 국시로 개창한 왕조에서 처자식이 없고 다방면에 걸쳐 기술과 솜씨가 뛰어난 승려들은 어느 계층보다 쉽게 동원할 수 있는 고급 노동력이었다. 어디 도성 축성뿐이었는가. 전국에 흩어진 산성이나 문루의 역사를 살펴보면 스님들의 부역으로 완성되지 않은 곳이 있을까 싶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승려들은 단지 공역에 수동적으로 끌려 다닌 것만은 아니었던가 보다.

와장승(瓦匠僧), 의승(醫僧) 등도 도성의 건설을 도왔다. 새로 건설한 도성이었지만 백성들의 집은 모두 초가였다. 즐비한 초가를 기와로 바꾸려고 노심초사한 승려가 있었으니, 곧 해선(海宣)의 경우다. 화재를 예방하고 왕경의 격조를 높이고 미관을 아름답게 하려는 노력이었다. 해선이 200여 명의 승려를 이끌고 태종 6년부터 시작했던 이 사업은 몇 년 만에 기와집이 반을 넘을 정도의 성과를 거두었다. 태조 5년 도승통 종림(宗林)은 판교에 원(院)을 세워서 도성 건설로 오가는 사람들의 숙식을 무료로 제공하고 환자들을 돌보기도 했다. 의승 탄선(坦宣)은 세종 4년 도성에 구료소를 설치하고 승려 300명을 인솔하여 축성으로 병들고 다친 군인들을 치료하기도 했다. 이처럼 신도 한양의 건설에는 승려들의 땀이 스며있었다. 강제로 사역 당한 경우든 백성들의 고통을 들어주기 위해 스스로 나선 경우든 간에. - 동국대 김상현 교수, ‘숭례문을 세운 대목 각희의 꿈’, <법보신문>, 2008-02-15

전환기의 혼란을 통합과 화합
고려가 이룩한 문화역량 기술
조선 신도(新都) 건설 밑거름

유교의 실천덕목 중 으뜸은 ‘예(禮)’이다. 새 도읍은 새 왕조를 세운 위정자들에 의해 철저히 유교적 질서에 따라 축조되었다. 중국의 주례(周禮)를 참고하고, 궁궐과 도성은 물론 관아와 일반 주택까지도 모두 예제(禮制)에 맞춰 들어섰다. 당시 최첨단의 기술과 최고의 장인들이 대역사에 참여했다. 이 대역사에 승려 장인들의 공로와 노동력이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기반이 되었다는 사실은, 고려를 무너뜨린 새 왕조의 신도 건설에 그동안 고려가 이룩해 놓았던 문화역량과 기술이 총동원되고 집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설이다.

숭례문은 한양 도성의 정문으로써 다른 어떤 건축물보다 상징성이 큰 문루이다. 고려에서 유교사회 조선으로 넘어가는 초기 단계의 국가적 상징이자, 정치적 전환기의 혼란을 딛고 백성들을 새로운 사회질서에로 통합 ‧ 편입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담긴 ‘통로’인 건축물이다. 바로 여기에 성곽과 더불어 여러 희생을 딛고 창건된 숭례문의 역사적 의의가 있다.

참담했던 4년 전 그날 밤의 기억과
쓰러져 내린 후에야 살아난 5천만의 숭례문

어느 첩첩 산중도 아니고, 정부기관과 첨단 시설이 집중된 수도 한복판에서 화마에 휩싸인 숭례문이 무너져 내렸다. 참담했던 마음을 어찌 다 형언할 수 있을까? 600년의 역사가, 아니 5천년 문화민족으로서의 자긍심과 자존심도 함께 무너져 내렸다. 온몸을 불살라 다가올 어둠의 시대를 예고하듯 온 국민이 보는 앞에서 숭례문은 그렇게 무너져 내렸다. 국보 1호가 그저 관리를 위한 숫자식 병기에 불과하다고 냉소를 보내던 사람들도 어이없는 상실감에 상처를 입고 함께 고통스러워했다.

참담하게 쓰러져 내린 후에야 비로소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에 생생하게 살아난 숭례문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이 다시 세우는 숭례문에 후손된 자들이 마땅히 담아야 할 정신일 것이며, 오래 전 창건의 역사적 의의를 진정으로 새롭게 복원하는 것일 터이다.

두 말할 나위 없이, 오는 8일 다시 세우는 숭례문의 들보에 안치할 상량문은 그 정신의 총화이어야 한다.

상량문의 서기 연호, 굳이 그래야 했나

어제 숭례문 재건의 내력을 담은 상량문이 발표되었다. 조계종 화쟁위원회 성태용(건국대 교수) 위원이 지었다고 한다. 아마도 ‘국민화합과 통합’이라는 차원에서 문화재청에서 새 상량문의 소임을 화쟁위원회에 넘겼으리라 사료된다. 600년 전의 희생과 헌신의 역사를 갈음하는 양 불교계로서는 영광이 아닐 수 없고 뜻 깊은 감회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저것은...... 필자의 눈길이 기사에 실린 사진 속 한 곳에 가 박힌다.

西紀二千十二年三月八日復舊上樑(서기 2012년 3월 8일 복구 상량)!

서예가 정도준씨가 지붕 꼭대기에 올라갈 소나무 재목에 써내려간 먹글씨다. 그제야 성태용 교수가 썼다는 상량문을 다시 들여다본다. 역시나 연대 표기가 ‘서기’로 되어 있다.

서기(西紀)가 아무리 현재 우리 사회가 공식적이고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법적 연호 표기라 할지라도, 무너진 민족정기를 다시 세우고 문화유산의 소중함을 각인시키며 국민화합을 기원하는 국가문화재 상량문에까지 굳이 서기 연호만을 독자적으로 써야 했을까. 아쉬움이 밀물처럼 몰려온다. 단기(檀紀) 연호와 병기하는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오래 전엔 대대로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였고, 일제강점기엔 일본의 연호를 따라가다가 미군정기에는 서력기원을 쓰고, 1961년 12월 당시 박정희 정권의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서력기원을 대한민국의 공용연호로 한다’는 법률을 발표했다 이후 국제적 ‘대세’에 따라 서구열강의 연호를 사용하는 것이 이제껏 우리나라가 연대기를 표기해온 방법이다. - 물론 짧은 한 때 독자 연호를 사용한 시기도 있었다.

“다민족 다문화시대에 무슨 시대착오적 단기 연호 병기냐?” 하고 따져 묻는 이가 있다면, 나는 나의 식대로 소박하게 이렇게 반문할 수밖에 없다.

‘제국의 힘’이 세계 표준시간 정해!?
반동하는 정서적 공감은 어쩌라고!

“시대상을 반영할 수밖에 없는 것이 연대기 표기법이라고는 하지만, 유엔에 제출할 문서나 무슨 무역 관계 계약서도 아니고 날마다 꺼내어 쓰는 일지도 아닌데, 독특한 문화를 일궈온 제 나라의 문화재 상량문에까지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편리성과 실익성이라는 명분 아래 그것은 결국 팽창주의를 지향하는 ‘제국의 힘’이 세계의 표준시간을 정한다는 강자의 논리를 국가적으로 인정하는 것 아닌가?” 하고......

‘숭례문 복구 상량문’에 담긴 서력기원 독자 표기. 오지랖을 넓게 잡아보려 애써 보지만, 도무지 정서적 공감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극락’이 고전소설 속 어느 골짜기에서 삭아갈 동안 ‘천국’이 세계의 하늘이 되어버린 세태를 경험하는 일만큼이나 서글퍼진다. 너무 많은 오래된 것들이 힘의 논리와 언어의 헤게모니 앞에 사라져 가고 있다.


참고 ⇒ 1948년 이래 사용해온 단군기원 공용연호를 폐지하고 서기 공용연호에 관한 법률을 새롭게 제정 ‧ 공포한 이유에 대해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이렇게 말했었다.

“국내외 문서가 단기 연호를 사용하고 있는데 반해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 선진국가와 내왕하는 대외문서에는 서기를 사용함으로 인해 연호사용상 통일을 기할 수가 없으며, 이에 따라 양년연호 간의 환산에 불필요한 노력과 시간을 낭비하여야 한다. 그 밖에도 역사 등 교육에 있어 연대에 관한 개념이 혼란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1961년 11월 13일자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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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 2012-03-10 11:41:10
문화재청에 공식질의해서 답변들어 보자 뭐라하는지..

보리향기 2012-03-08 15:46:43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시류에 끄달려 그저 헛개비처럼 살아가는 이 시대 대중들이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소위 철학자며 불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의 사물인식이 저 수준이니 이를 어찌할꼬. 하루에 10분이라도 마음을 돌보는 사람이라면 저런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아니할 터인데...명색만 불자인 성 교수여! 그대의 정신줄을 붙잡고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오? 주(酒)이오? 색(色)이오? 전(錢)이? 명(名)이오? 내가 여러번 그대의 나타남을 보면서 '좀 부족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한심한 사람인 줄은 몰랐소. 제발 이제는 대중 앞에 나타나는 일은 그만두고 자신을 돌아보는 일에 좀 더 열중하기 충고하오.

원불사 단현 2012-03-07 16:59:20
성태용 교수 화쟁위 한 자리 받았다고 자승에게
일찍이 이런 일은 없었다며 이렇게 대화의 장을 만들어 주신 총무원장님께 영광돌린다고
어용교수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신 분이시지.
참여불교재가연대부터 하는 것마다 불교말아먹는 짓을 그치지 않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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