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총림 창설·봉암사결사로 발전…청정교단 수립 ‘길잡이’
가야총림 창설·봉암사결사로 발전…청정교단 수립 ‘길잡이’
  • 선학원백년사편찬위원회
  • 승인 2024.02.29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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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경론.
유교경론.

당시 법회에서는 대승계를 강설한 것 외에도 우리나라 조계종의 종지를 설하기도 하였다.

세존께옵서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꽃을 드시니 가섭존자(迦葉尊者)께서 미소지음으로부터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신 조조상승(祖祖相承)의 정법(正法)이 이로부터 비롯되어 33조사로 내지 역대전등(歷代傳燈)이 서로서로 계승하여 오늘의 법회를 이루었습니다. 삼가 생각하오니 세존이 아니시면 염화(拈花)가 염화(拈花) 아니시며 가섭(迦葉)이 아니시면 미소(微笑)가 미소(微笑) 아니십니다. 염화(拈花)와 미소(微笑)가 아니면 정법(正法)이 아닙니다. 정법이 없는 세상은 말세라 일렀나이다. 세존이시여. 삿된 마귀는 나날이 치성(熾盛)하며 정법은 시시로 괴멸하는 이 말세를 당하여 제자 등이 어찌 비분(悲憤)의 피눈물을 뿌리지 아니하오며 어찌 용맹(勇猛)의 본지(本志)를 반성하지 아니 하오리까. 오직 원하옵나이다. 대자대비(大慈大悲)의 삼보(三寶)께옵서는 자감(慈鑑)을 굽어 살피시어 제자 등의 미미한 정성을 살피시옵소서. 세존의 넓고 넓은 서원을 본받아 고개 숙여 발원하오니 성스러운 힘의 가치를 내리시어 염화(拈花)와 미소(微笑)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이 천하총림(天下叢林)에 다시 떨치게 하시오며, 여래(如來)의 혜일(慧日)이 사해선천(四海禪天)에 거듭 빛나게 하시옵소서. 세존이시여. 사자는 뭇 짐승의 왕입니다. 그를 당해 낼 자가 그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자기 털 속에서 생긴 벌레가 비록 적지만 사자의 온몸을 다 먹어도 제 어찌 하지 못하나이다. 천하무적의 큰 힘도 쓸 곳이 없습니다. 그와 같이 이제 여래정법(如來正法)이 그 목숨이 실끝 같은 금일(今日)의 위기를 당한 것도 그 누구의 허물이겠습니까. 엎드려 비나이다. 정법(正法)을 사자(獅子)라면 제자 등이 벌레가 아니리까. 이제 천하의 정법이 금일의 위기에 빠진 것이 오로지 제자 등이 여래의 가르침을 받들어 행하지 않는 불초의 죄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 불초의 죄상은 뼈를 뿌시고 골수를 바쳐 올려도 오히려 다하지 못할 줄 깊이 느껴 이제 참회대회(懺悔大會)를 열고 제자 등이 이미 저지른 허물을 참회하오며 뒷날의 과오를 다시 짓지 아니하고자 깊이 맹세하오며 발원하오니 이로부터 본분사의 서원(誓願)을 등지며 삼보(三寶)를 기만하여 위로 사중대은(四重大恩)을 저버리며 아래로 삼도(三途) 극한 고통을 당하는 자 있거든 금강철추(金剛鐵椎)로 이 몸을 부시여 미진(微塵)을 만들지라도 감히 어찌 원망을 품겠습니까. 차라리 신명(身命)을 버려도 마침내 정법에 물러서지 않겠사오니 오직 원하옵나이다.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본사석가모니불(本師釋迦牟尼佛)과 시방삼보자존(十方三寶慈尊)께옵서는 자감증명(慈鑑証明)하시옵소서” 끝이 없는 중생을 맹세코 제도(濟度)하기를 원하옵나이다. 다함이 없는 번뇌(煩惱)를 맹세코 끊어 없애기를 원하옵나이다. 한량이 없는 법문(法門)을 맹세코 배우기를 원하옵나이다. 위가 없는 불도(佛道)를 맹세코 성취하기를 원하옵나이다. 이 인연 공덕으로 널리 법계중생(法界衆生)과 더불어 한가지 아뇩다리삼먁삼보리를 이루어지이다.10)

1935년 3월 7일 창종을 선언한 조선불교 선종은 “본종(本宗)은 불조정전(佛祖正傳)의 심법(心法)을 종지(宗旨)”로 하였다. 석가세존의 근본 종지를 봉체(奉體)하여 정법안장(正法眼藏)을 호지하며,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전법도생(傳法度生)을 주취(主取)로 한다고 천명하고 있다. 전통 조계·임제 가풍의 “견성성불(見性成佛), 요익중생(饒益衆生)”의 종지와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때문에 유교법회에서 설해진 조계 종지 또한 이러한 사상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불교계는 일찍이 임제종운동에서 그 종지와 정체성을 확인한 바가 있다.

반대가 격렬히 일어났으니 실상은 다 같은 선종이지만, 조동은 그 계통이 다른 파이고 임제는 자가(自家)라고 하는 데서 생겨난 반감으로 인한 것이고, 종지(宗旨)의 역사가 분명하지 않아 당파(黨派)사이에 암투가 이어서 일어났던 것이다. 박한영(朴漢永), 진진응(陳震應), 김종래(金鍾來) 등이 문자와 언설로서 제방(諸方)으로 하여금 격렬히 일어나게 하여 경술년 음력 10월 5일 광주 증심사(證心寺)에서 모임을 열기로 하였다. 그러나 개회 날짜가 되었지만 와서 모이는 이가 없어 대회를 시행할 수조차 없었다.11)

임제종운동의 발단은 임제와 조동은 동일한 선종이지만, 그 계파는 엄연히 다르다는 지적에서 비롯되었다. 박한영 역시 “조선 현재 불교의 연원이 임제종에서 발하였음은 즉, 일본 조동종과는 연합할 수 없다는 취지로 반대하였다.”12) 결국 조동종과의 연합은 조선불교를 일본불교에 부속시킨다고 인식하여 조약의 반대를 분명히 하고, 한국불교의 연원을 임제종으로 천명하였다. 이와 같은 1910년대 불교계의 사건은 그 종지를 더욱 선명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유교법회 역시 조계종의 종지를 강의하는 과정에서도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선명히 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유교법회의 주역들은 1935년 조선불교선종 창종 당시에 선언했던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천명하고, 당시 한국불교계가 직면하고 있는 비불교적인 상황을 정확히 지적하고 극복하고자 했다. 예컨대 정법이 시시각각으로 괴멸하는 말세에 염화미소의 정법안장이 조선의 불교계에 떨치기를 발원한 것이다. 결국 유교법회는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참회하고 일본불교와는 다른 한국불교가 지닌 위상과 가치를 실현시키고자 하였다.

유교법회는 《범망경》과 《유교경》을 강설하고 자비참법을 실시하면서 현재 조계종이 지향할 바를 교시한 것이라 하겠다. 이는 가야총림의 창설과 1947년 봉암사 결사로 발전돼 청정교단 수립의 길잡이가 됐다. 하지만 1921년 창건된 선학원의 활동이 없었다면 한국불교가 조계종으로 활로를 개척할 수 없었을 것이다. 조계종이 현금의 대종단으로 결속되고 전법을 계승하고 불조혜명의 본지를 선양하는 직지인심(直旨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인 선지(禪旨)의 당간을 휘날리는 것도 선학원으로부터 연유한다고 하면 틀린 말이 아니다. 선학원 창립, 선우공제회 결사, 유교법회 개최는 조계종이 교단 정화로 나아가는 데 기초가 됐다. 이는 현재도 면면히 이어져 지난 2007년 봉암사 결사 60주년 기념 법회와 수행종풍 진작을 위한 대중 결계와 포살 갈마로 구체화되고 있다.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였던 목정배 선생이 2008년 유교법회(遺敎法會)를 조명하는 연찬회에서 주장한 내용의 일부이다. 유교법회를 전후한 일련의 선학원 활동이 현재 한국불교의 이정표가 되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발표자였던 당시 해인사 승가대학장 법진13) 스님은 유교법회 당시 참여했던 스님들에 대해 “유교법회에 동참한 독신 수행승들은 일제 때는 물론 해방 후 조계종의 형성과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1962년 통합종단이 출범할 때까지 비구승 중심의 여론을 주도하거나 종단 주요 기구를 운영하는 스님들은 유교법회 동참자들이었다.”고 했다. 결국 독신 비구승과 선 수행 전통을 계승하고 살려낸 유교법회 참석자는 당시 불교의 문제점을 타파하기 위해 율장 정신과 수행자의 청정성, 경건성, 위의(威儀) 회복을 대안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유교법회가 근현대 한국불교사에서 일정한 위상을 지니고 있는 점은 또 한 가지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보조장삼(普照長衫)을 입었다는 점이다. 당시 근래에 볼 수 없었던 큰스님이자 선장(禪匠)들의 법회를 본 신도들이 다투어 공양하겠다고 했지만, 정해진 10일로는 신도들의 요청을 다 수용할 수 없어서 비단으로 장삼을 지어드리겠다고 했다 한다. 스님들이 무명으로 해달라고 하자 40여 명의 장삼을 지을 무명이 없어서 인천까지 가서 사오기도 했다. 당시 최범술(崔凡述) 스님이 이왕이면 이 기회에 보조장삼으로 지어 입는 것이 좋겠다 하여 그 제의가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석주 스님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스님들은 팔이 도포와 비슷하게 생긴 두루마기식의 장삼을 입고 있었다고 한다. 보조장삼은 우리나라에서 사라진 지 이미 오래되었지만, 스님은 각종 문헌을 참고하고, 직접 가위를 들고 무명으로 마름질을 하는 등 특이한 재질을 보여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고 한다.

유교법회 이후 스님들은 선학과 계율의 종지를 선양하고자 계속해서 범행단(梵行團)을 조직하고, 독신 비구승을 중심으로 선학원에서 《유마경(維摩經)》 강의를 지속하자고 결의하기도 했다. 결국 1941년 선학원에서 열린 유교법회는 일제강점기에 있었던 우리 불교의 마지막 민족적 성격의 법회로 한국불교의 정통성과 그 전통을 회복하자는 의미가 절실하게 담겨 있었던 것이다.

[주] -----

10) 禪宗中央宗務院(1935), <宣誓文>, 조선불교선리참구원, 1~2쪽.

11) 이능화(1918), <범어일방임제종지>, 《조선불교통사》 하, 민속원, 938~939쪽.

12) 정광호(2001), <불교계 항일운동의 유형과 투쟁>, 《일본 침략기의 한일불교 관계사》, 서울 : 아름다운세상, 217쪽.

13) 한국불교선리연구원장 법진과는 다른 스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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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숫디막가 2024-03-02 09:26:38
고따마 부처님의 원음이 보석처럼 촘촘히 박혀있는 빠알리 율장 경장 논장의 근거한 종교가 불교라고 한다면 이 나라에 불교는 없다 있다면 조사교 큰스님교만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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