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150. 삼식이
[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150. 삼식이
  • 전재민 시인
  • 승인 2024.02.19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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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got a blister on my lip”

여행 때문에 피곤한지 입술이 붓고 터졌어요.
치과 진료왔는데 전염성일 수 있다고 나으면 오라고 돌려보내네요.

중요한 일을 앞두거나 또 치르고 나면 입술이 부르트는 경험을 해본 분들이 많을 텐데요.
입술에 생긴다고 해서 구순포진(Herpes labialis) 또는 입술 포진이라고 하죠.

보통 입술 한쪽에 물집이 생기는 이 질환을
일반적으로 누적된 피로가 원인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실업자가 더 바쁘고 피곤하게 다녔나 봐요.

아내는 그래서 무슨 일을 하겠어 그러더라고요.
입병 피곤하면 날 수도 있지 했는데 약도 26불이나 하네요.







#작가의 변

아내가 전에 다니던 기내식 회사에 일하는 한국 아줌마 이야기를 한다. 주 7일을 일하기도 하고 하루 14시간 일을 하기도 하는데 도무지 피곤하지가 않다면서 그 언니도 마찬가지여서 이곳저곳에서 일을 한단다. 은퇴해야 하는 나이가 지났지만 놀면 뭐 하냐고 70까지 일을 하겠다고 한다고 말하면서, 당신도 그런 여자가 부럽지 않냐고 한다. 남편은 둘 다 골프나 치고 놀고 먹는다면서 말이다.

오늘 친구에게 전화하니 나에게 아침은 뭘 먹었냐고 물어본다.

아침 아메리칸 스타일 블랙퍼스트를 먹었다고 했더니, 셀프로 해 먹었냐, 누가 해주었냐고 물어서 아내가 해주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내가 해주는 밥을 먹는 것은 행복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도 일도 못하고 집에서 있는 삼식이 주제에 밥을 챙겨 주는 아내가 있다는 것은 모두가 부러워하는 모습이라고 말했다.

그럼 우리 자리를 바꿀까? 했더니, 바꾸는 것도 힘들 것 같으니 그냥 살자고 한다. 그러지 말고 내 자리가 부러우면 스위치 오버하자고 했더니 극구 사양한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것을 안다.

아내에게 운전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는데 아내가 브레이크를 급하게 밟는다, 전방을 주시해라, 주위가 산만하다고 잔소리한다고 말했다. 어쩌면 나하고 그리 똑같을까? 나도 아내가 앞을 봐야지 먼 곳에 뭐가 있다고 먼 곳을 쳐다보냐고 잔소리한다. 그리고 브레이크를 살살 밟아도 상체가 움찔하면 운전이 과격하네, 와일드 턴이네 한다. 딸도 차를 타면 잔소리하는 것은 똑같다. 그래도 운전할 일이 생기면 내 차지다. 운전도 못 하면 정말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 버릴 것 같아 운전을 도맡아서 하지만 사실 전철 타거나 버스 타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

다운타운 같은 곳은 일방통행 도로가 많아 잘못 들어 가면 마주 보는 곳에서 차가 오기도 한다.

그리고 주차하기도 힘들고 주차비도 비싸다. 다운타운 갈 땐 차를 안 가지고 가려 하고 아내는 남들은 다 차를 가지고 가는데 유난스럽게 차를 안 가지고 간다고 불평한다.

이민 1세대로 영어를 아무리 오래 써오고 있어도 겨우 생활 영어 정도만 할 수 있지 법정에서 말하거나 변호사와 상담하거나 할 때는 아들이 도와주었으면 한다. 이런저런 신청 서류 등 서류 작성은 좀 도와주었으면 하고 말하게 된다. 아들한테 아쉬운 소리 해서 늘 퇴짜 맞고 딸한테 부탁해서 겨우 해내기도 하는데 딸은 딸대로 왜 항상 나한테만 부탁하냐며 아들에게 이야기하라고 하고 아들은 30년 동안 캐나다 살면서 영어 공부도 안 하고 뭐 했냐, 핀잔 아닌 핀잔을 준다. 먹고 사느라 그리되었다고 말하면 다른 아빠들은 영어 잘하는 사람도 많고 좋은 직장을 가진 사람도 많다면서 뭘 하나 도와주어도 쉽게 응하는 법이 없다.

가끔 관공서에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학생이 부모를 따라와서 통역을 해주는 것을 보면 부러울 때가 있다. 아이들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학부모 상담이 있어서 선생님하고 상담할 때면 사실 아이들이 도와주었으면 하기도 했지만 안 되는 영어로 주섬주섬 상담했던 기억이 있다. 물론 그때는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있었던 시절도 아니고 이민 온 지 얼마 안 돼 더욱 그랬다.

2년 한국식당에서 일을 하고 서양 회사인 기내식 회사에 입사해서 일을 하면서 직원회의 할 때 알아듣는 것이 반도 안 될 때는 정말 답답했다. 그때마다 나의 사수였던 홍콩 출신의 조리사가 따로 자세하게 이야기를 해주어 잘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오버타임을 했는데 오버타임을 쳐주지 않고 사수는 먼저 퇴근하고 그런 때에는 정말 억울해서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이제는 모두 은퇴한 회사 동료들이 보고 싶기도 하다. 대부분이 중국, 홍콩 출신이었던 그들과 함께한 젊은 날의 직장 생활은 희망이 가득한 젊은 청춘의 나날이어서 더욱 희망에 차 있었고 매니지먼트인 백인들에 대한 불만도 많았던 시기였다.

한국에서 학교에 다니다 온 아이들은 캐나다에서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리고 영어도 힘들어하는 아이들도 있다. 하지만 끈기는 캐나다에서 자란 아이들보다 높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나중에 와서 힘든 환경을 이겨내고 좋은 직장을 가진 이민 1.5세대도 많다.

아들은 이민 온 지 똑같이 30여 년인데 왜 우리만큼 아빠는 영어를 못하냐는 거였는데, 어릴 때 와서 배우는 영어와 나이 들어 와서 배우는 영어는 차이가 많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러면 너는 한국말을 못 하지 않느냐면서 반발해 보지만, 사실 영어 쓰는 국가에 와서 마음대로 언어를 구사해야 원하는 직장을 얻기 쉬운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캐나다에서 학교에 다니지 않으면 아무리 오래되었어도 대학에 들어가려면 외국에서 온 학생들처럼 영어 토플을 보고 영어 테스트를 하고 해야 직업 학교라도 갈 수 있다. 그러니 나이 들어 이민 오면 자식들에게도 늘 지적을 받고 배우자에게도 지적받는다.

그래도 일을 하러 다닐 때는 가장의 의무를 경제적으로 하는 중이니 상관없지만 직장이 없고 병들거나 퇴직하고 하루 세 끼 식사를 집에서 먹는 삼식이가 되고 나면 천덕꾸러기도 그런 천덕꾸러기가 없다.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산다고 젊어서는 죽을 듯 일을 해서 가족을 부양하다 나이 들어 병들고 은퇴한 몸이 되면 구박을 받는 것이 가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경제적인 여유가 있고 자식들에게 물려 줄게있는 가장은 대우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가진 거 없고 병들면 아무도 반기지 않는 존재가 된다. 그래서 서글픔이 한꺼번에 몰려들기도 한다.







캐나다는 연금 제도가 한국보다는 잘되어 있어서 자식들에게 버림을 받아도 어쨌든 살아 갈 수는 있다. 하지만 한국은 은퇴와 동시에 새로운 직장을 찾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연금으로 살아 갈 수 없으니 죽을 때까지 일해야 한다는 뉴스도 종종 본다. 아니면 부모의 재산을 상속받고는 부모를 제주도 같은 곳을 여행하고 버리고 자기들만 돌아가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병들지 않고 건강하다면 나이 들어서도 적당히 취미 활동도 하고 적당히 일도 할 수 있다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좋다. 캐나다의 많은 요양원과 시니어 홈에 보면 움직이지 못하고 삼시세끼 만들어 주는 음식에 즐거움을 느끼면서 사는 노인들이 많다. 그만큼 운동량이 떨어지고 정신적으로도 갇혀 있다는 느낌을 받으니 건강하기는 힘들다.

조그만 돈이라고 벌고 행복할 수 있다면 노인 건강에 그만한 게 없다. 삼식이로 살아가고 싶지 않은 많은 가장이 홀로 공원을 떠도는 이유도 어찌 보면 조금의 해방구를 만들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함께 나이 들어 가면서 서로를 위하면서 살아도 부족한데 당신 때문에 돈 없는 부모 때문에 내가 우리가 이렇게 힘들게 산다고 원망하면 원망할수록 삶은 힘들어진다.

우리가 이 땅에 온 이유는 즐겁게 살기 위해서 오지도 슬프게 살기 위해서 오지도 않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처럼 계절의 순환같이 우리의 삶도 윤회를 통해 우리의 업을 갚아 나가고 있을 뿐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얻어먹은 것이 많으면 후생에 우리는 그 업을 갚아야 하는 운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일을 시키고 손가락 까딱하지 않았다면 후생에 소나 말로 태어나 누군가를 위해 일하거나 노비가 되어 수발을 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번 생에 내가 부자라고 내가 지위가 높다고 누군가를 막 부리고 막 대하는 것은 미래에 올 나의 삶에 검은 먹구름을 부르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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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got a blister on my lip”

여행 때문에 피곤한지 입술이 붓고 터졌어요.
치과 진료왔는데 전염성일 수 있다고 나으면 오라고 돌려보내네요.

중요한 일을 앞두거나 또 치르고 나면 입술이 부르트는 경험을 해본 분들이 많을 텐데요.
입술에 생긴다고 해서 구순포진(Herpes labialis) 또는 입술 포진이라고 하죠.

보통 입술 한쪽에 물집이 생기는 이 질환을
일반적으로 누적된 피로가 원인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실업자가 더 바쁘고 피곤하게 다녔나 봐요.

아내는 그래서 무슨 일을 하겠어 그러더라고요.
입병 피곤하면 날 수도 있지 했는데 약도 26불이나 하네요.





“I got a blister on my lip”

여행 때문에 피곤한지 입술이 붓고 터졌어요.
치과 진료왔는데 전염성일 수 있다고 나으면 오라고 돌려보내네요.

중요한 일을 앞두거나 또 치르고 나면 입술이 부르트는 경험을 해본 분들이 많을 텐데요.
입술에 생긴다고 해서 구순포진(Herpes labialis) 또는 입술 포진이라고 하죠.

보통 입술 한쪽에 물집이 생기는 이 질환을
일반적으로 누적된 피로가 원인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실업자가 더 바쁘고 피곤하게 다녔나 봐요.

아내는 그래서 무슨 일을 하겠어 그러더라고요.
입병 피곤하면 날 수도 있지 했는데 약도 26불이나 하네요.







#작가의 변

아내가 전에 다니던 기내식 회사에 일하는 한국 아줌마 이야기를 한다. 주 7일을 일하기도 하고 하루 14시간 일을 하기도 하는데 도무지 피곤하지가 않다면서 그 언니도 마찬가지여서 이곳저곳에서 일을 한단다. 은퇴해야 하는 나이가 지났지만 놀면 뭐 하냐고 70까지 일을 하겠다고 한다고 말하면서, 당신도 그런 여자가 부럽지 않냐고 한다. 남편은 둘 다 골프나 치고 놀고 먹는다면서 말이다.

오늘 친구에게 전화하니 나에게 아침은 뭘 먹었냐고 물어본다.

아침 아메리칸 스타일 블랙퍼스트를 먹었다고 했더니, 셀프로 해 먹었냐, 누가 해주었냐고 물어서 아내가 해주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내가 해주는 밥을 먹는 것은 행복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도 일도 못하고 집에서 있는 삼식이 주제에 밥을 챙겨 주는 아내가 있다는 것은 모두가 부러워하는 모습이라고 말했다.

그럼 우리 자리를 바꿀까? 했더니, 바꾸는 것도 힘들 것 같으니 그냥 살자고 한다. 그러지 말고 내 자리가 부러우면 스위치 오버하자고 했더니 극구 사양한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것을 안다.

아내에게 운전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는데 아내가 브레이크를 급하게 밟는다, 전방을 주시해라, 주위가 산만하다고 잔소리한다고 말했다. 어쩌면 나하고 그리 똑같을까? 나도 아내가 앞을 봐야지 먼 곳에 뭐가 있다고 먼 곳을 쳐다보냐고 잔소리한다. 그리고 브레이크를 살살 밟아도 상체가 움찔하면 운전이 과격하네, 와일드 턴이네 한다. 딸도 차를 타면 잔소리하는 것은 똑같다. 그래도 운전할 일이 생기면 내 차지다. 운전도 못 하면 정말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 버릴 것 같아 운전을 도맡아서 하지만 사실 전철 타거나 버스 타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

다운타운 같은 곳은 일방통행 도로가 많아 잘못 들어 가면 마주 보는 곳에서 차가 오기도 한다.

그리고 주차하기도 힘들고 주차비도 비싸다. 다운타운 갈 땐 차를 안 가지고 가려 하고 아내는 남들은 다 차를 가지고 가는데 유난스럽게 차를 안 가지고 간다고 불평한다.

이민 1세대로 영어를 아무리 오래 써오고 있어도 겨우 생활 영어 정도만 할 수 있지 법정에서 말하거나 변호사와 상담하거나 할 때는 아들이 도와주었으면 한다. 이런저런 신청 서류 등 서류 작성은 좀 도와주었으면 하고 말하게 된다. 아들한테 아쉬운 소리 해서 늘 퇴짜 맞고 딸한테 부탁해서 겨우 해내기도 하는데 딸은 딸대로 왜 항상 나한테만 부탁하냐며 아들에게 이야기하라고 하고 아들은 30년 동안 캐나다 살면서 영어 공부도 안 하고 뭐 했냐, 핀잔 아닌 핀잔을 준다. 먹고 사느라 그리되었다고 말하면 다른 아빠들은 영어 잘하는 사람도 많고 좋은 직장을 가진 사람도 많다면서 뭘 하나 도와주어도 쉽게 응하는 법이 없다.

가끔 관공서에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학생이 부모를 따라와서 통역을 해주는 것을 보면 부러울 때가 있다. 아이들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학부모 상담이 있어서 선생님하고 상담할 때면 사실 아이들이 도와주었으면 하기도 했지만 안 되는 영어로 주섬주섬 상담했던 기억이 있다. 물론 그때는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있었던 시절도 아니고 이민 온 지 얼마 안 돼 더욱 그랬다.

2년 한국식당에서 일을 하고 서양 회사인 기내식 회사에 입사해서 일을 하면서 직원회의 할 때 알아듣는 것이 반도 안 될 때는 정말 답답했다. 그때마다 나의 사수였던 홍콩 출신의 조리사가 따로 자세하게 이야기를 해주어 잘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오버타임을 했는데 오버타임을 쳐주지 않고 사수는 먼저 퇴근하고 그런 때에는 정말 억울해서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이제는 모두 은퇴한 회사 동료들이 보고 싶기도 하다. 대부분이 중국, 홍콩 출신이었던 그들과 함께한 젊은 날의 직장 생활은 희망이 가득한 젊은 청춘의 나날이어서 더욱 희망에 차 있었고 매니지먼트인 백인들에 대한 불만도 많았던 시기였다.

한국에서 학교에 다니다 온 아이들은 캐나다에서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리고 영어도 힘들어하는 아이들도 있다. 하지만 끈기는 캐나다에서 자란 아이들보다 높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나중에 와서 힘든 환경을 이겨내고 좋은 직장을 가진 이민 1.5세대도 많다.

아들은 이민 온 지 똑같이 30여 년인데 왜 우리만큼 아빠는 영어를 못하냐는 거였는데, 어릴 때 와서 배우는 영어와 나이 들어 와서 배우는 영어는 차이가 많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러면 너는 한국말을 못 하지 않느냐면서 반발해 보지만, 사실 영어 쓰는 국가에 와서 마음대로 언어를 구사해야 원하는 직장을 얻기 쉬운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캐나다에서 학교에 다니지 않으면 아무리 오래되었어도 대학에 들어가려면 외국에서 온 학생들처럼 영어 토플을 보고 영어 테스트를 하고 해야 직업 학교라도 갈 수 있다. 그러니 나이 들어 이민 오면 자식들에게도 늘 지적을 받고 배우자에게도 지적받는다.

그래도 일을 하러 다닐 때는 가장의 의무를 경제적으로 하는 중이니 상관없지만 직장이 없고 병들거나 퇴직하고 하루 세 끼 식사를 집에서 먹는 삼식이가 되고 나면 천덕꾸러기도 그런 천덕꾸러기가 없다.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산다고 젊어서는 죽을 듯 일을 해서 가족을 부양하다 나이 들어 병들고 은퇴한 몸이 되면 구박을 받는 것이 가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경제적인 여유가 있고 자식들에게 물려 줄게있는 가장은 대우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가진 거 없고 병들면 아무도 반기지 않는 존재가 된다. 그래서 서글픔이 한꺼번에 몰려들기도 한다.







캐나다는 연금 제도가 한국보다는 잘되어 있어서 자식들에게 버림을 받아도 어쨌든 살아 갈 수는 있다. 하지만 한국은 은퇴와 동시에 새로운 직장을 찾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연금으로 살아 갈 수 없으니 죽을 때까지 일해야 한다는 뉴스도 종종 본다. 아니면 부모의 재산을 상속받고는 부모를 제주도 같은 곳을 여행하고 버리고 자기들만 돌아가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병들지 않고 건강하다면 나이 들어서도 적당히 취미 활동도 하고 적당히 일도 할 수 있다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좋다. 캐나다의 많은 요양원과 시니어 홈에 보면 움직이지 못하고 삼시세끼 만들어 주는 음식에 즐거움을 느끼면서 사는 노인들이 많다. 그만큼 운동량이 떨어지고 정신적으로도 갇혀 있다는 느낌을 받으니 건강하기는 힘들다.

조그만 돈이라고 벌고 행복할 수 있다면 노인 건강에 그만한 게 없다. 삼식이로 살아가고 싶지 않은 많은 가장이 홀로 공원을 떠도는 이유도 어찌 보면 조금의 해방구를 만들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함께 나이 들어 가면서 서로를 위하면서 살아도 부족한데 당신 때문에 돈 없는 부모 때문에 내가 우리가 이렇게 힘들게 산다고 원망하면 원망할수록 삶은 힘들어진다.

우리가 이 땅에 온 이유는 즐겁게 살기 위해서 오지도 슬프게 살기 위해서 오지도 않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처럼 계절의 순환같이 우리의 삶도 윤회를 통해 우리의 업을 갚아 나가고 있을 뿐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얻어먹은 것이 많으면 후생에 우리는 그 업을 갚아야 하는 운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일을 시키고 손가락 까딱하지 않았다면 후생에 소나 말로 태어나 누군가를 위해 일하거나 노비가 되어 수발을 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번 생에 내가 부자라고 내가 지위가 높다고 누군가를 막 부리고 막 대하는 것은 미래에 올 나의 삶에 검은 먹구름을 부르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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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변

아내가 전에 다니던 기내식 회사에 일하는 한국 아줌마 이야기를 한다. 주 7일을 일하기도 하고 하루 14시간 일을 하기도 하는데 도무지 피곤하지가 않다면서 그 언니도 마찬가지여서 이곳저곳에서 일을 한단다. 은퇴해야 하는 나이가 지났지만 놀면 뭐 하냐고 70까지 일을 하겠다고 한다고 말하면서, 당신도 그런 여자가 부럽지 않냐고 한다. 남편은 둘 다 골프나 치고 놀고 먹는다면서 말이다.

오늘 친구에게 전화하니 나에게 아침은 뭘 먹었냐고 물어본다.

아침 아메리칸 스타일 블랙퍼스트를 먹었다고 했더니, 셀프로 해 먹었냐, 누가 해주었냐고 물어서 아내가 해주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내가 해주는 밥을 먹는 것은 행복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도 일도 못하고 집에서 있는 삼식이 주제에 밥을 챙겨 주는 아내가 있다는 것은 모두가 부러워하는 모습이라고 말했다.

그럼 우리 자리를 바꿀까? 했더니, 바꾸는 것도 힘들 것 같으니 그냥 살자고 한다. 그러지 말고 내 자리가 부러우면 스위치 오버하자고 했더니 극구 사양한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것을 안다.

아내에게 운전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는데 아내가 브레이크를 급하게 밟는다, 전방을 주시해라, 주위가 산만하다고 잔소리한다고 말했다. 어쩌면 나하고 그리 똑같을까? 나도 아내가 앞을 봐야지 먼 곳에 뭐가 있다고 먼 곳을 쳐다보냐고 잔소리한다. 그리고 브레이크를 살살 밟아도 상체가 움찔하면 운전이 과격하네, 와일드 턴이네 한다. 딸도 차를 타면 잔소리하는 것은 똑같다. 그래도 운전할 일이 생기면 내 차지다. 운전도 못 하면 정말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 버릴 것 같아 운전을 도맡아서 하지만 사실 전철 타거나 버스 타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

다운타운 같은 곳은 일방통행 도로가 많아 잘못 들어 가면 마주 보는 곳에서 차가 오기도 한다.

그리고 주차하기도 힘들고 주차비도 비싸다. 다운타운 갈 땐 차를 안 가지고 가려 하고 아내는 남들은 다 차를 가지고 가는데 유난스럽게 차를 안 가지고 간다고 불평한다.

이민 1세대로 영어를 아무리 오래 써오고 있어도 겨우 생활 영어 정도만 할 수 있지 법정에서 말하거나 변호사와 상담하거나 할 때는 아들이 도와주었으면 한다. 이런저런 신청 서류 등 서류 작성은 좀 도와주었으면 하고 말하게 된다. 아들한테 아쉬운 소리 해서 늘 퇴짜 맞고 딸한테 부탁해서 겨우 해내기도 하는데 딸은 딸대로 왜 항상 나한테만 부탁하냐며 아들에게 이야기하라고 하고 아들은 30년 동안 캐나다 살면서 영어 공부도 안 하고 뭐 했냐, 핀잔 아닌 핀잔을 준다. 먹고 사느라 그리되었다고 말하면 다른 아빠들은 영어 잘하는 사람도 많고 좋은 직장을 가진 사람도 많다면서 뭘 하나 도와주어도 쉽게 응하는 법이 없다.

가끔 관공서에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학생이 부모를 따라와서 통역을 해주는 것을 보면 부러울 때가 있다. 아이들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학부모 상담이 있어서 선생님하고 상담할 때면 사실 아이들이 도와주었으면 하기도 했지만 안 되는 영어로 주섬주섬 상담했던 기억이 있다. 물론 그때는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있었던 시절도 아니고 이민 온 지 얼마 안 돼 더욱 그랬다.

2년 한국식당에서 일을 하고 서양 회사인 기내식 회사에 입사해서 일을 하면서 직원회의 할 때 알아듣는 것이 반도 안 될 때는 정말 답답했다. 그때마다 나의 사수였던 홍콩 출신의 조리사가 따로 자세하게 이야기를 해주어 잘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오버타임을 했는데 오버타임을 쳐주지 않고 사수는 먼저 퇴근하고 그런 때에는 정말 억울해서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이제는 모두 은퇴한 회사 동료들이 보고 싶기도 하다. 대부분이 중국, 홍콩 출신이었던 그들과 함께한 젊은 날의 직장 생활은 희망이 가득한 젊은 청춘의 나날이어서 더욱 희망에 차 있었고 매니지먼트인 백인들에 대한 불만도 많았던 시기였다.

한국에서 학교에 다니다 온 아이들은 캐나다에서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리고 영어도 힘들어하는 아이들도 있다. 하지만 끈기는 캐나다에서 자란 아이들보다 높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나중에 와서 힘든 환경을 이겨내고 좋은 직장을 가진 이민 1.5세대도 많다.

아들은 이민 온 지 똑같이 30여 년인데 왜 우리만큼 아빠는 영어를 못하냐는 거였는데, 어릴 때 와서 배우는 영어와 나이 들어 와서 배우는 영어는 차이가 많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러면 너는 한국말을 못 하지 않느냐면서 반발해 보지만, 사실 영어 쓰는 국가에 와서 마음대로 언어를 구사해야 원하는 직장을 얻기 쉬운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캐나다에서 학교에 다니지 않으면 아무리 오래되었어도 대학에 들어가려면 외국에서 온 학생들처럼 영어 토플을 보고 영어 테스트를 하고 해야 직업 학교라도 갈 수 있다. 그러니 나이 들어 이민 오면 자식들에게도 늘 지적을 받고 배우자에게도 지적받는다.

그래도 일을 하러 다닐 때는 가장의 의무를 경제적으로 하는 중이니 상관없지만 직장이 없고 병들거나 퇴직하고 하루 세 끼 식사를 집에서 먹는 삼식이가 되고 나면 천덕꾸러기도 그런 천덕꾸러기가 없다.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산다고 젊어서는 죽을 듯 일을 해서 가족을 부양하다 나이 들어 병들고 은퇴한 몸이 되면 구박을 받는 것이 가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경제적인 여유가 있고 자식들에게 물려 줄게있는 가장은 대우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가진 거 없고 병들면 아무도 반기지 않는 존재가 된다. 그래서 서글픔이 한꺼번에 몰려들기도 한다.





“I got a blister on my lip”

여행 때문에 피곤한지 입술이 붓고 터졌어요.
치과 진료왔는데 전염성일 수 있다고 나으면 오라고 돌려보내네요.

중요한 일을 앞두거나 또 치르고 나면 입술이 부르트는 경험을 해본 분들이 많을 텐데요.
입술에 생긴다고 해서 구순포진(Herpes labialis) 또는 입술 포진이라고 하죠.

보통 입술 한쪽에 물집이 생기는 이 질환을
일반적으로 누적된 피로가 원인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실업자가 더 바쁘고 피곤하게 다녔나 봐요.

아내는 그래서 무슨 일을 하겠어 그러더라고요.
입병 피곤하면 날 수도 있지 했는데 약도 26불이나 하네요.







#작가의 변

아내가 전에 다니던 기내식 회사에 일하는 한국 아줌마 이야기를 한다. 주 7일을 일하기도 하고 하루 14시간 일을 하기도 하는데 도무지 피곤하지가 않다면서 그 언니도 마찬가지여서 이곳저곳에서 일을 한단다. 은퇴해야 하는 나이가 지났지만 놀면 뭐 하냐고 70까지 일을 하겠다고 한다고 말하면서, 당신도 그런 여자가 부럽지 않냐고 한다. 남편은 둘 다 골프나 치고 놀고 먹는다면서 말이다.

오늘 친구에게 전화하니 나에게 아침은 뭘 먹었냐고 물어본다.

아침 아메리칸 스타일 블랙퍼스트를 먹었다고 했더니, 셀프로 해 먹었냐, 누가 해주었냐고 물어서 아내가 해주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내가 해주는 밥을 먹는 것은 행복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도 일도 못하고 집에서 있는 삼식이 주제에 밥을 챙겨 주는 아내가 있다는 것은 모두가 부러워하는 모습이라고 말했다.

그럼 우리 자리를 바꿀까? 했더니, 바꾸는 것도 힘들 것 같으니 그냥 살자고 한다. 그러지 말고 내 자리가 부러우면 스위치 오버하자고 했더니 극구 사양한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것을 안다.

아내에게 운전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는데 아내가 브레이크를 급하게 밟는다, 전방을 주시해라, 주위가 산만하다고 잔소리한다고 말했다. 어쩌면 나하고 그리 똑같을까? 나도 아내가 앞을 봐야지 먼 곳에 뭐가 있다고 먼 곳을 쳐다보냐고 잔소리한다. 그리고 브레이크를 살살 밟아도 상체가 움찔하면 운전이 과격하네, 와일드 턴이네 한다. 딸도 차를 타면 잔소리하는 것은 똑같다. 그래도 운전할 일이 생기면 내 차지다. 운전도 못 하면 정말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 버릴 것 같아 운전을 도맡아서 하지만 사실 전철 타거나 버스 타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

다운타운 같은 곳은 일방통행 도로가 많아 잘못 들어 가면 마주 보는 곳에서 차가 오기도 한다.

그리고 주차하기도 힘들고 주차비도 비싸다. 다운타운 갈 땐 차를 안 가지고 가려 하고 아내는 남들은 다 차를 가지고 가는데 유난스럽게 차를 안 가지고 간다고 불평한다.

이민 1세대로 영어를 아무리 오래 써오고 있어도 겨우 생활 영어 정도만 할 수 있지 법정에서 말하거나 변호사와 상담하거나 할 때는 아들이 도와주었으면 한다. 이런저런 신청 서류 등 서류 작성은 좀 도와주었으면 하고 말하게 된다. 아들한테 아쉬운 소리 해서 늘 퇴짜 맞고 딸한테 부탁해서 겨우 해내기도 하는데 딸은 딸대로 왜 항상 나한테만 부탁하냐며 아들에게 이야기하라고 하고 아들은 30년 동안 캐나다 살면서 영어 공부도 안 하고 뭐 했냐, 핀잔 아닌 핀잔을 준다. 먹고 사느라 그리되었다고 말하면 다른 아빠들은 영어 잘하는 사람도 많고 좋은 직장을 가진 사람도 많다면서 뭘 하나 도와주어도 쉽게 응하는 법이 없다.

가끔 관공서에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학생이 부모를 따라와서 통역을 해주는 것을 보면 부러울 때가 있다. 아이들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학부모 상담이 있어서 선생님하고 상담할 때면 사실 아이들이 도와주었으면 하기도 했지만 안 되는 영어로 주섬주섬 상담했던 기억이 있다. 물론 그때는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있었던 시절도 아니고 이민 온 지 얼마 안 돼 더욱 그랬다.

2년 한국식당에서 일을 하고 서양 회사인 기내식 회사에 입사해서 일을 하면서 직원회의 할 때 알아듣는 것이 반도 안 될 때는 정말 답답했다. 그때마다 나의 사수였던 홍콩 출신의 조리사가 따로 자세하게 이야기를 해주어 잘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오버타임을 했는데 오버타임을 쳐주지 않고 사수는 먼저 퇴근하고 그런 때에는 정말 억울해서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이제는 모두 은퇴한 회사 동료들이 보고 싶기도 하다. 대부분이 중국, 홍콩 출신이었던 그들과 함께한 젊은 날의 직장 생활은 희망이 가득한 젊은 청춘의 나날이어서 더욱 희망에 차 있었고 매니지먼트인 백인들에 대한 불만도 많았던 시기였다.

한국에서 학교에 다니다 온 아이들은 캐나다에서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리고 영어도 힘들어하는 아이들도 있다. 하지만 끈기는 캐나다에서 자란 아이들보다 높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나중에 와서 힘든 환경을 이겨내고 좋은 직장을 가진 이민 1.5세대도 많다.

아들은 이민 온 지 똑같이 30여 년인데 왜 우리만큼 아빠는 영어를 못하냐는 거였는데, 어릴 때 와서 배우는 영어와 나이 들어 와서 배우는 영어는 차이가 많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러면 너는 한국말을 못 하지 않느냐면서 반발해 보지만, 사실 영어 쓰는 국가에 와서 마음대로 언어를 구사해야 원하는 직장을 얻기 쉬운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캐나다에서 학교에 다니지 않으면 아무리 오래되었어도 대학에 들어가려면 외국에서 온 학생들처럼 영어 토플을 보고 영어 테스트를 하고 해야 직업 학교라도 갈 수 있다. 그러니 나이 들어 이민 오면 자식들에게도 늘 지적을 받고 배우자에게도 지적받는다.

그래도 일을 하러 다닐 때는 가장의 의무를 경제적으로 하는 중이니 상관없지만 직장이 없고 병들거나 퇴직하고 하루 세 끼 식사를 집에서 먹는 삼식이가 되고 나면 천덕꾸러기도 그런 천덕꾸러기가 없다.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산다고 젊어서는 죽을 듯 일을 해서 가족을 부양하다 나이 들어 병들고 은퇴한 몸이 되면 구박을 받는 것이 가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경제적인 여유가 있고 자식들에게 물려 줄게있는 가장은 대우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가진 거 없고 병들면 아무도 반기지 않는 존재가 된다. 그래서 서글픔이 한꺼번에 몰려들기도 한다.







캐나다는 연금 제도가 한국보다는 잘되어 있어서 자식들에게 버림을 받아도 어쨌든 살아 갈 수는 있다. 하지만 한국은 은퇴와 동시에 새로운 직장을 찾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연금으로 살아 갈 수 없으니 죽을 때까지 일해야 한다는 뉴스도 종종 본다. 아니면 부모의 재산을 상속받고는 부모를 제주도 같은 곳을 여행하고 버리고 자기들만 돌아가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병들지 않고 건강하다면 나이 들어서도 적당히 취미 활동도 하고 적당히 일도 할 수 있다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좋다. 캐나다의 많은 요양원과 시니어 홈에 보면 움직이지 못하고 삼시세끼 만들어 주는 음식에 즐거움을 느끼면서 사는 노인들이 많다. 그만큼 운동량이 떨어지고 정신적으로도 갇혀 있다는 느낌을 받으니 건강하기는 힘들다.

조그만 돈이라고 벌고 행복할 수 있다면 노인 건강에 그만한 게 없다. 삼식이로 살아가고 싶지 않은 많은 가장이 홀로 공원을 떠도는 이유도 어찌 보면 조금의 해방구를 만들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함께 나이 들어 가면서 서로를 위하면서 살아도 부족한데 당신 때문에 돈 없는 부모 때문에 내가 우리가 이렇게 힘들게 산다고 원망하면 원망할수록 삶은 힘들어진다.

우리가 이 땅에 온 이유는 즐겁게 살기 위해서 오지도 슬프게 살기 위해서 오지도 않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처럼 계절의 순환같이 우리의 삶도 윤회를 통해 우리의 업을 갚아 나가고 있을 뿐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얻어먹은 것이 많으면 후생에 우리는 그 업을 갚아야 하는 운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일을 시키고 손가락 까딱하지 않았다면 후생에 소나 말로 태어나 누군가를 위해 일하거나 노비가 되어 수발을 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번 생에 내가 부자라고 내가 지위가 높다고 누군가를 막 부리고 막 대하는 것은 미래에 올 나의 삶에 검은 먹구름을 부르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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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는 연금 제도가 한국보다는 잘되어 있어서 자식들에게 버림을 받아도 어쨌든 살아 갈 수는 있다. 하지만 한국은 은퇴와 동시에 새로운 직장을 찾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연금으로 살아 갈 수 없으니 죽을 때까지 일해야 한다는 뉴스도 종종 본다. 아니면 부모의 재산을 상속받고는 부모를 제주도 같은 곳을 여행하고 버리고 자기들만 돌아가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병들지 않고 건강하다면 나이 들어서도 적당히 취미 활동도 하고 적당히 일도 할 수 있다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좋다. 캐나다의 많은 요양원과 시니어 홈에 보면 움직이지 못하고 삼시세끼 만들어 주는 음식에 즐거움을 느끼면서 사는 노인들이 많다. 그만큼 운동량이 떨어지고 정신적으로도 갇혀 있다는 느낌을 받으니 건강하기는 힘들다.

조그만 돈이라고 벌고 행복할 수 있다면 노인 건강에 그만한 게 없다. 삼식이로 살아가고 싶지 않은 많은 가장이 홀로 공원을 떠도는 이유도 어찌 보면 조금의 해방구를 만들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함께 나이 들어 가면서 서로를 위하면서 살아도 부족한데 당신 때문에 돈 없는 부모 때문에 내가 우리가 이렇게 힘들게 산다고 원망하면 원망할수록 삶은 힘들어진다.

우리가 이 땅에 온 이유는 즐겁게 살기 위해서 오지도 슬프게 살기 위해서 오지도 않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처럼 계절의 순환같이 우리의 삶도 윤회를 통해 우리의 업을 갚아 나가고 있을 뿐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얻어먹은 것이 많으면 후생에 우리는 그 업을 갚아야 하는 운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일을 시키고 손가락 까딱하지 않았다면 후생에 소나 말로 태어나 누군가를 위해 일하거나 노비가 되어 수발을 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번 생에 내가 부자라고 내가 지위가 높다고 누군가를 막 부리고 막 대하는 것은 미래에 올 나의 삶에 검은 먹구름을 부르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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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got a blister on my lip”

여행 때문에 피곤한지 입술이 붓고 터졌어요.
치과 진료왔는데 전염성일 수 있다고 나으면 오라고 돌려보내네요.

중요한 일을 앞두거나 또 치르고 나면 입술이 부르트는 경험을 해본 분들이 많을 텐데요.
입술에 생긴다고 해서 구순포진(Herpes labialis) 또는 입술 포진이라고 하죠.

보통 입술 한쪽에 물집이 생기는 이 질환을
일반적으로 누적된 피로가 원인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실업자가 더 바쁘고 피곤하게 다녔나 봐요.

아내는 그래서 무슨 일을 하겠어 그러더라고요.
입병 피곤하면 날 수도 있지 했는데 약도 26불이나 하네요.







#작가의 변

아내가 전에 다니던 기내식 회사에 일하는 한국 아줌마 이야기를 한다. 주 7일을 일하기도 하고 하루 14시간 일을 하기도 하는데 도무지 피곤하지가 않다면서 그 언니도 마찬가지여서 이곳저곳에서 일을 한단다. 은퇴해야 하는 나이가 지났지만 놀면 뭐 하냐고 70까지 일을 하겠다고 한다고 말하면서, 당신도 그런 여자가 부럽지 않냐고 한다. 남편은 둘 다 골프나 치고 놀고 먹는다면서 말이다.

오늘 친구에게 전화하니 나에게 아침은 뭘 먹었냐고 물어본다.

아침 아메리칸 스타일 블랙퍼스트를 먹었다고 했더니, 셀프로 해 먹었냐, 누가 해주었냐고 물어서 아내가 해주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내가 해주는 밥을 먹는 것은 행복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도 일도 못하고 집에서 있는 삼식이 주제에 밥을 챙겨 주는 아내가 있다는 것은 모두가 부러워하는 모습이라고 말했다.

그럼 우리 자리를 바꿀까? 했더니, 바꾸는 것도 힘들 것 같으니 그냥 살자고 한다. 그러지 말고 내 자리가 부러우면 스위치 오버하자고 했더니 극구 사양한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것을 안다.

아내에게 운전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는데 아내가 브레이크를 급하게 밟는다, 전방을 주시해라, 주위가 산만하다고 잔소리한다고 말했다. 어쩌면 나하고 그리 똑같을까? 나도 아내가 앞을 봐야지 먼 곳에 뭐가 있다고 먼 곳을 쳐다보냐고 잔소리한다. 그리고 브레이크를 살살 밟아도 상체가 움찔하면 운전이 과격하네, 와일드 턴이네 한다. 딸도 차를 타면 잔소리하는 것은 똑같다. 그래도 운전할 일이 생기면 내 차지다. 운전도 못 하면 정말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 버릴 것 같아 운전을 도맡아서 하지만 사실 전철 타거나 버스 타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

다운타운 같은 곳은 일방통행 도로가 많아 잘못 들어 가면 마주 보는 곳에서 차가 오기도 한다.

그리고 주차하기도 힘들고 주차비도 비싸다. 다운타운 갈 땐 차를 안 가지고 가려 하고 아내는 남들은 다 차를 가지고 가는데 유난스럽게 차를 안 가지고 간다고 불평한다.

이민 1세대로 영어를 아무리 오래 써오고 있어도 겨우 생활 영어 정도만 할 수 있지 법정에서 말하거나 변호사와 상담하거나 할 때는 아들이 도와주었으면 한다. 이런저런 신청 서류 등 서류 작성은 좀 도와주었으면 하고 말하게 된다. 아들한테 아쉬운 소리 해서 늘 퇴짜 맞고 딸한테 부탁해서 겨우 해내기도 하는데 딸은 딸대로 왜 항상 나한테만 부탁하냐며 아들에게 이야기하라고 하고 아들은 30년 동안 캐나다 살면서 영어 공부도 안 하고 뭐 했냐, 핀잔 아닌 핀잔을 준다. 먹고 사느라 그리되었다고 말하면 다른 아빠들은 영어 잘하는 사람도 많고 좋은 직장을 가진 사람도 많다면서 뭘 하나 도와주어도 쉽게 응하는 법이 없다.

가끔 관공서에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학생이 부모를 따라와서 통역을 해주는 것을 보면 부러울 때가 있다. 아이들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학부모 상담이 있어서 선생님하고 상담할 때면 사실 아이들이 도와주었으면 하기도 했지만 안 되는 영어로 주섬주섬 상담했던 기억이 있다. 물론 그때는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있었던 시절도 아니고 이민 온 지 얼마 안 돼 더욱 그랬다.

2년 한국식당에서 일을 하고 서양 회사인 기내식 회사에 입사해서 일을 하면서 직원회의 할 때 알아듣는 것이 반도 안 될 때는 정말 답답했다. 그때마다 나의 사수였던 홍콩 출신의 조리사가 따로 자세하게 이야기를 해주어 잘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오버타임을 했는데 오버타임을 쳐주지 않고 사수는 먼저 퇴근하고 그런 때에는 정말 억울해서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이제는 모두 은퇴한 회사 동료들이 보고 싶기도 하다. 대부분이 중국, 홍콩 출신이었던 그들과 함께한 젊은 날의 직장 생활은 희망이 가득한 젊은 청춘의 나날이어서 더욱 희망에 차 있었고 매니지먼트인 백인들에 대한 불만도 많았던 시기였다.

한국에서 학교에 다니다 온 아이들은 캐나다에서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리고 영어도 힘들어하는 아이들도 있다. 하지만 끈기는 캐나다에서 자란 아이들보다 높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나중에 와서 힘든 환경을 이겨내고 좋은 직장을 가진 이민 1.5세대도 많다.

아들은 이민 온 지 똑같이 30여 년인데 왜 우리만큼 아빠는 영어를 못하냐는 거였는데, 어릴 때 와서 배우는 영어와 나이 들어 와서 배우는 영어는 차이가 많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러면 너는 한국말을 못 하지 않느냐면서 반발해 보지만, 사실 영어 쓰는 국가에 와서 마음대로 언어를 구사해야 원하는 직장을 얻기 쉬운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캐나다에서 학교에 다니지 않으면 아무리 오래되었어도 대학에 들어가려면 외국에서 온 학생들처럼 영어 토플을 보고 영어 테스트를 하고 해야 직업 학교라도 갈 수 있다. 그러니 나이 들어 이민 오면 자식들에게도 늘 지적을 받고 배우자에게도 지적받는다.

그래도 일을 하러 다닐 때는 가장의 의무를 경제적으로 하는 중이니 상관없지만 직장이 없고 병들거나 퇴직하고 하루 세 끼 식사를 집에서 먹는 삼식이가 되고 나면 천덕꾸러기도 그런 천덕꾸러기가 없다.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산다고 젊어서는 죽을 듯 일을 해서 가족을 부양하다 나이 들어 병들고 은퇴한 몸이 되면 구박을 받는 것이 가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경제적인 여유가 있고 자식들에게 물려 줄게있는 가장은 대우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가진 거 없고 병들면 아무도 반기지 않는 존재가 된다. 그래서 서글픔이 한꺼번에 몰려들기도 한다.







캐나다는 연금 제도가 한국보다는 잘되어 있어서 자식들에게 버림을 받아도 어쨌든 살아 갈 수는 있다. 하지만 한국은 은퇴와 동시에 새로운 직장을 찾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연금으로 살아 갈 수 없으니 죽을 때까지 일해야 한다는 뉴스도 종종 본다. 아니면 부모의 재산을 상속받고는 부모를 제주도 같은 곳을 여행하고 버리고 자기들만 돌아가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병들지 않고 건강하다면 나이 들어서도 적당히 취미 활동도 하고 적당히 일도 할 수 있다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좋다. 캐나다의 많은 요양원과 시니어 홈에 보면 움직이지 못하고 삼시세끼 만들어 주는 음식에 즐거움을 느끼면서 사는 노인들이 많다. 그만큼 운동량이 떨어지고 정신적으로도 갇혀 있다는 느낌을 받으니 건강하기는 힘들다.

조그만 돈이라고 벌고 행복할 수 있다면 노인 건강에 그만한 게 없다. 삼식이로 살아가고 싶지 않은 많은 가장이 홀로 공원을 떠도는 이유도 어찌 보면 조금의 해방구를 만들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함께 나이 들어 가면서 서로를 위하면서 살아도 부족한데 당신 때문에 돈 없는 부모 때문에 내가 우리가 이렇게 힘들게 산다고 원망하면 원망할수록 삶은 힘들어진다.

우리가 이 땅에 온 이유는 즐겁게 살기 위해서 오지도 슬프게 살기 위해서 오지도 않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처럼 계절의 순환같이 우리의 삶도 윤회를 통해 우리의 업을 갚아 나가고 있을 뿐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얻어먹은 것이 많으면 후생에 우리는 그 업을 갚아야 하는 운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일을 시키고 손가락 까딱하지 않았다면 후생에 소나 말로 태어나 누군가를 위해 일하거나 노비가 되어 수발을 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번 생에 내가 부자라고 내가 지위가 높다고 누군가를 막 부리고 막 대하는 것은 미래에 올 나의 삶에 검은 먹구름을 부르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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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사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 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 학원에 다니며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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