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145. 무엇 때문에 사는가
[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145. 무엇 때문에 사는가
  • 전재민 시인
  • 승인 2024.01.19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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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우면 채울수록 갈증은 더욱 심해지고
배우면 배울수록 배움은 끝이 없어지는데

일하면 할 수록 즐거움보단 불평만 늘어
비우면 비울수록 눈에 거슬리는 것들

잊으려 하면 할 수록 잊히지 않는 얼굴
그리움은 빈방 가득 채워지고

있어도 없는 사람처럼
없는 이의 얼굴만 뇌리에 가득 찼다. 

 







#작가의 변
우리는 살면서 왜 사는가? 무엇 때문에 사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열심히 일을 하면서 내 사생활이 없을 때 일하면 할수록 일이 더 늘어나고 일을 위해 일을 하는지 나를 위해 일하는지 모를 때도 있다. 이런 사람을 일중독이라고 말한다. 생각 없이 일에만 빠져 사는 일도 있다. 왜 일하는지, 무엇 때문에 일하는지도 모른 채 말이다.

이 세상에 우리가 태어났을 때만 해도 우리가 왜 사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없었다. 왜 태어났는지에 대한 궁금증도 없었다. 세상에 많은 동물과 식물이 태어나고 소멸한다. 그들은 왜 태어났는지 왜 사는지 궁금해하지 않고 저마다의 삶을 살다가 간다. 숙제를 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것처럼 봄이면 새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며, 녹음을 우거지게 하고, 열매를 맺고, 열매를 수확하고, 가을엔 죽는 생물도 있고, 긴 겨울잠을 자고 마치 세상에 다시 태어나듯이 다시 생명의 활동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자연에서 뛰어놀다 보니, 소는 왜 고기를 먹지 않는데도 나보다 힘이 셀까? 늘 풀밭인 소의 먹이와 겨울에 특식이라고 주는 소 죽은 짚이나 시래기 등은 물론 음식 찌꺼기와 콩깍지 그리고 소가 좋아하는 쌀겨라는 벼를 도정할 때 나오는 부산물을 넣어 주기도 한다. 소는 그렇게 물과 식물성 음식을 먹고서도 늘 힘이 사람보다 세다.

개가 주인을 알아보고 주인에게는 짖지 않고 외부인이 오면 죽으라고 짖어 대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했다. 토끼가 새끼 나올 때 외부인이 보면 부정을 타서 다 물어 죽이거나, 아예 먹어 버린다는 말에 잔인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설마 했지만 정말 토끼가 새끼를 모두 먹어 없애 버렸을 때 배신감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여름밤에 마당 멍석에 누워 하늘을 보고 있으면 별들이 총총하고 개구리 소리가 개굴거리는 그 광경이 당연하다고 느꼈고, 별을 가보겠다는 생각보다는 별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지가 궁금했었다. 후에 그런 환경이 얼마나 행복한 순간이었는지 알게 되었고, 그 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가족이 함께 마당 멍석에 누워 쑥을 태워 모기를 쫓고 모기장 안에서 잠들던 그 순간들이 그립기도 하다. 그 순간엔 나의 자녀들은 없었고 나의 돌아가신 나의 부모님이 있었기 때문에 그 순간이 더욱 그리운 것일 수도 있다.

어린이 때나 청소년기엔 어린이라서 청소년이라서 제약받고 간섭받는 것이 싫어 얼른 어른이 되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간섭받고 보호받던 그 순간이 인생에서 행복한 순간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때는 생각하지 못하던 것들을 지금에 와서야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들도 있다. 죽을 때까지 사람은 철들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하고 철들면 죽는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나이 들고 보니 젊어서 느끼지 못하던 감정을 느끼는 것도 많다. 우리 세대만 하더라도 과학의 발달로 인해 사는 모습이 많이 바뀌고 컴퓨터, 셀 폰, 냉장고, 가스레인지, 텔레비전, 에어컨은 물론 로봇까지 생활에 일상이 되어 가는 시대를 살고 있다. 어린 시절엔 짚신을 벗어나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니면서 운동화가 꿈이던 시절이 있었듯이, 동네에 한 대밖에 없던 TV가 우리 집에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다른 부잣집 아이들처럼 책상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지금은 그런 모든 걸 가지고 있음에도 나는 비교적 가난하고 비교적 가지지 못했으며 비교적 채우지 못한 것이 많아 불만은 여전히 크다.

어머니가 사 온 찐빵 하나에도 행복하고, 밥 위에 쪄준 감자 개떡에도 행복하던 시절과 아무리 맛있는 것을 먹어도 맛있는 줄을 모르는 입맛을 가진 지금, 그 시절 감자 개떡이 그리운 이유는 무얼까.

꽃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듯이, 돼지가 우리에 갇혀서도 10마리가 넘는 새끼를 낳아 기르듯이, 사람들도 그때는 대여섯 명씩 낳아 길렀다. 그리고 아이들이 먹을 것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말했다. 아이들의 교육이나 아이들의 미래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녀가 1명이나 2명만 가지게 되면서 자녀에 과잉 관심과 자녀가 나의 꿈을 대신해야 한다는 생각에 더욱 아이들의 교육과 미래에 집착하게 된다.

우리는 세상에 올 때 왜 왔는지 몰랐듯이 갈 때도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종교적으로 야 천국이나 지옥에 가고 하느님의 품으로 간다거나 서방정토 부처님 곁으로 간다는 생각을 하지만, 누구도 겪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수학적이나 과학적 증명은 하지 못하고 있다.







<성경>의 내용을 과학보다도 더 믿고 숭상하면서 삶의 중심에 놓고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듯이 불경도 수천 년 동안 많은 사람이 믿고 의지하면서 이어져 오고 있다. 동양인 중국, 한국, 일본 같은 경우 하느님을 믿는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온 건 오래되지 않다. 동양 3국의 조상들은 불교를 세상에서 가장 신성한 종교로 믿었다. 서양에서 기독교가 십자군 전쟁으로 바이블과 칼로 정복 전쟁을 할 때도 불교는 침략하지 않고 외세에 맞서 국가를 지키려 노력했을 뿐이다. 그러면서 수많은 선사와 깨달은 조상들은 우리에게 종교의 가르침을 주었다. 성경이 인간중심의 종교라면 불교는 만물의 종교인 셈이다. 만물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말한다. 윤회를 통해 인간이 벌레나 맹독류로 태어날 수 있다는 교리는 사람들에게 선하게 살라고 말하고, 욕심을 부리거나 나쁜 행위를 하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가르치는 것은 물론 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윤회를 벗어나는 길, 대각견성 부처가 되는 길이다. 서양의 수도원에서도 일하고 기도하면서 깨닫기도 하지만 종교적 한계가 분명 존재한다. 우리가 왜 이 세상에 왔는지 생각하기보다는 얼마나 바르게 삶을 살고 흔적도 남기지 않고 흙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가 우리가 생각해야 할 일이다. 인간은 분명 지구상에서 뛰어난 존재인 것은 맞지만 지구가 인간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지구는 인류가 모든 생명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다. 인간이 가는 곳마다 지구는 파괴되는 현실 속에서 인간이 지구에서 사라져야 지구가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즉 사람은 지구의 한 존재일 뿐인데 사람들은 자꾸만 인간을 위한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다. 사실은 바닷속에 지구 맨틀 안에 들어갈 수도 없으면서 자꾸만 지구 밖 세상을 정복하려고 한다. 우주에는 지구와 같은 별이 존재할 수 있다. 불경에 나와 있는 삼천대천 세계를 보면 우리는 안다. 모래알보다 많은 별이 우주에 존재한다. 그리고 지구엔 인간이 보지 못하는 바이러스에 의해 병들고 죽어 간다. 아직도 인간이 삶에 겸손해야 할 이유이다. 욕심은 끝이 없다. 욕망은 채울 수 없는 깊은 우물과 같다. 그래서 비우는 일조차 쉽지 않은 것이다.

--------------------

채우면 채울수록 갈증은 더욱 심해지고
배우면 배울수록 배움은 끝이 없어지는데

일하면 할 수록 즐거움보단 불평만 늘어
비우면 비울수록 눈에 거슬리는 것들

잊으려 하면 할 수록 잊히지 않는 얼굴
그리움은 빈방 가득 채워지고

있어도 없는 사람처럼
없는 이의 얼굴만 뇌리에 가득 찼다. 

 





채우면 채울수록 갈증은 더욱 심해지고
배우면 배울수록 배움은 끝이 없어지는데

일하면 할 수록 즐거움보단 불평만 늘어
비우면 비울수록 눈에 거슬리는 것들

잊으려 하면 할 수록 잊히지 않는 얼굴
그리움은 빈방 가득 채워지고

있어도 없는 사람처럼
없는 이의 얼굴만 뇌리에 가득 찼다. 

 







#작가의 변
우리는 살면서 왜 사는가? 무엇 때문에 사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열심히 일을 하면서 내 사생활이 없을 때 일하면 할수록 일이 더 늘어나고 일을 위해 일을 하는지 나를 위해 일하는지 모를 때도 있다. 이런 사람을 일중독이라고 말한다. 생각 없이 일에만 빠져 사는 일도 있다. 왜 일하는지, 무엇 때문에 일하는지도 모른 채 말이다.

이 세상에 우리가 태어났을 때만 해도 우리가 왜 사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없었다. 왜 태어났는지에 대한 궁금증도 없었다. 세상에 많은 동물과 식물이 태어나고 소멸한다. 그들은 왜 태어났는지 왜 사는지 궁금해하지 않고 저마다의 삶을 살다가 간다. 숙제를 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것처럼 봄이면 새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며, 녹음을 우거지게 하고, 열매를 맺고, 열매를 수확하고, 가을엔 죽는 생물도 있고, 긴 겨울잠을 자고 마치 세상에 다시 태어나듯이 다시 생명의 활동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자연에서 뛰어놀다 보니, 소는 왜 고기를 먹지 않는데도 나보다 힘이 셀까? 늘 풀밭인 소의 먹이와 겨울에 특식이라고 주는 소 죽은 짚이나 시래기 등은 물론 음식 찌꺼기와 콩깍지 그리고 소가 좋아하는 쌀겨라는 벼를 도정할 때 나오는 부산물을 넣어 주기도 한다. 소는 그렇게 물과 식물성 음식을 먹고서도 늘 힘이 사람보다 세다.

개가 주인을 알아보고 주인에게는 짖지 않고 외부인이 오면 죽으라고 짖어 대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했다. 토끼가 새끼 나올 때 외부인이 보면 부정을 타서 다 물어 죽이거나, 아예 먹어 버린다는 말에 잔인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설마 했지만 정말 토끼가 새끼를 모두 먹어 없애 버렸을 때 배신감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여름밤에 마당 멍석에 누워 하늘을 보고 있으면 별들이 총총하고 개구리 소리가 개굴거리는 그 광경이 당연하다고 느꼈고, 별을 가보겠다는 생각보다는 별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지가 궁금했었다. 후에 그런 환경이 얼마나 행복한 순간이었는지 알게 되었고, 그 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가족이 함께 마당 멍석에 누워 쑥을 태워 모기를 쫓고 모기장 안에서 잠들던 그 순간들이 그립기도 하다. 그 순간엔 나의 자녀들은 없었고 나의 돌아가신 나의 부모님이 있었기 때문에 그 순간이 더욱 그리운 것일 수도 있다.

어린이 때나 청소년기엔 어린이라서 청소년이라서 제약받고 간섭받는 것이 싫어 얼른 어른이 되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간섭받고 보호받던 그 순간이 인생에서 행복한 순간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때는 생각하지 못하던 것들을 지금에 와서야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들도 있다. 죽을 때까지 사람은 철들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하고 철들면 죽는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나이 들고 보니 젊어서 느끼지 못하던 감정을 느끼는 것도 많다. 우리 세대만 하더라도 과학의 발달로 인해 사는 모습이 많이 바뀌고 컴퓨터, 셀 폰, 냉장고, 가스레인지, 텔레비전, 에어컨은 물론 로봇까지 생활에 일상이 되어 가는 시대를 살고 있다. 어린 시절엔 짚신을 벗어나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니면서 운동화가 꿈이던 시절이 있었듯이, 동네에 한 대밖에 없던 TV가 우리 집에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다른 부잣집 아이들처럼 책상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지금은 그런 모든 걸 가지고 있음에도 나는 비교적 가난하고 비교적 가지지 못했으며 비교적 채우지 못한 것이 많아 불만은 여전히 크다.

어머니가 사 온 찐빵 하나에도 행복하고, 밥 위에 쪄준 감자 개떡에도 행복하던 시절과 아무리 맛있는 것을 먹어도 맛있는 줄을 모르는 입맛을 가진 지금, 그 시절 감자 개떡이 그리운 이유는 무얼까.

꽃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듯이, 돼지가 우리에 갇혀서도 10마리가 넘는 새끼를 낳아 기르듯이, 사람들도 그때는 대여섯 명씩 낳아 길렀다. 그리고 아이들이 먹을 것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말했다. 아이들의 교육이나 아이들의 미래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녀가 1명이나 2명만 가지게 되면서 자녀에 과잉 관심과 자녀가 나의 꿈을 대신해야 한다는 생각에 더욱 아이들의 교육과 미래에 집착하게 된다.

우리는 세상에 올 때 왜 왔는지 몰랐듯이 갈 때도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종교적으로 야 천국이나 지옥에 가고 하느님의 품으로 간다거나 서방정토 부처님 곁으로 간다는 생각을 하지만, 누구도 겪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수학적이나 과학적 증명은 하지 못하고 있다.







<성경>의 내용을 과학보다도 더 믿고 숭상하면서 삶의 중심에 놓고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듯이 불경도 수천 년 동안 많은 사람이 믿고 의지하면서 이어져 오고 있다. 동양인 중국, 한국, 일본 같은 경우 하느님을 믿는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온 건 오래되지 않다. 동양 3국의 조상들은 불교를 세상에서 가장 신성한 종교로 믿었다. 서양에서 기독교가 십자군 전쟁으로 바이블과 칼로 정복 전쟁을 할 때도 불교는 침략하지 않고 외세에 맞서 국가를 지키려 노력했을 뿐이다. 그러면서 수많은 선사와 깨달은 조상들은 우리에게 종교의 가르침을 주었다. 성경이 인간중심의 종교라면 불교는 만물의 종교인 셈이다. 만물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말한다. 윤회를 통해 인간이 벌레나 맹독류로 태어날 수 있다는 교리는 사람들에게 선하게 살라고 말하고, 욕심을 부리거나 나쁜 행위를 하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가르치는 것은 물론 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윤회를 벗어나는 길, 대각견성 부처가 되는 길이다. 서양의 수도원에서도 일하고 기도하면서 깨닫기도 하지만 종교적 한계가 분명 존재한다. 우리가 왜 이 세상에 왔는지 생각하기보다는 얼마나 바르게 삶을 살고 흔적도 남기지 않고 흙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가 우리가 생각해야 할 일이다. 인간은 분명 지구상에서 뛰어난 존재인 것은 맞지만 지구가 인간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지구는 인류가 모든 생명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다. 인간이 가는 곳마다 지구는 파괴되는 현실 속에서 인간이 지구에서 사라져야 지구가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즉 사람은 지구의 한 존재일 뿐인데 사람들은 자꾸만 인간을 위한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다. 사실은 바닷속에 지구 맨틀 안에 들어갈 수도 없으면서 자꾸만 지구 밖 세상을 정복하려고 한다. 우주에는 지구와 같은 별이 존재할 수 있다. 불경에 나와 있는 삼천대천 세계를 보면 우리는 안다. 모래알보다 많은 별이 우주에 존재한다. 그리고 지구엔 인간이 보지 못하는 바이러스에 의해 병들고 죽어 간다. 아직도 인간이 삶에 겸손해야 할 이유이다. 욕심은 끝이 없다. 욕망은 채울 수 없는 깊은 우물과 같다. 그래서 비우는 일조차 쉽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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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변
우리는 살면서 왜 사는가? 무엇 때문에 사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열심히 일을 하면서 내 사생활이 없을 때 일하면 할수록 일이 더 늘어나고 일을 위해 일을 하는지 나를 위해 일하는지 모를 때도 있다. 이런 사람을 일중독이라고 말한다. 생각 없이 일에만 빠져 사는 일도 있다. 왜 일하는지, 무엇 때문에 일하는지도 모른 채 말이다.

이 세상에 우리가 태어났을 때만 해도 우리가 왜 사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없었다. 왜 태어났는지에 대한 궁금증도 없었다. 세상에 많은 동물과 식물이 태어나고 소멸한다. 그들은 왜 태어났는지 왜 사는지 궁금해하지 않고 저마다의 삶을 살다가 간다. 숙제를 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것처럼 봄이면 새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며, 녹음을 우거지게 하고, 열매를 맺고, 열매를 수확하고, 가을엔 죽는 생물도 있고, 긴 겨울잠을 자고 마치 세상에 다시 태어나듯이 다시 생명의 활동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자연에서 뛰어놀다 보니, 소는 왜 고기를 먹지 않는데도 나보다 힘이 셀까? 늘 풀밭인 소의 먹이와 겨울에 특식이라고 주는 소 죽은 짚이나 시래기 등은 물론 음식 찌꺼기와 콩깍지 그리고 소가 좋아하는 쌀겨라는 벼를 도정할 때 나오는 부산물을 넣어 주기도 한다. 소는 그렇게 물과 식물성 음식을 먹고서도 늘 힘이 사람보다 세다.

개가 주인을 알아보고 주인에게는 짖지 않고 외부인이 오면 죽으라고 짖어 대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했다. 토끼가 새끼 나올 때 외부인이 보면 부정을 타서 다 물어 죽이거나, 아예 먹어 버린다는 말에 잔인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설마 했지만 정말 토끼가 새끼를 모두 먹어 없애 버렸을 때 배신감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여름밤에 마당 멍석에 누워 하늘을 보고 있으면 별들이 총총하고 개구리 소리가 개굴거리는 그 광경이 당연하다고 느꼈고, 별을 가보겠다는 생각보다는 별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지가 궁금했었다. 후에 그런 환경이 얼마나 행복한 순간이었는지 알게 되었고, 그 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가족이 함께 마당 멍석에 누워 쑥을 태워 모기를 쫓고 모기장 안에서 잠들던 그 순간들이 그립기도 하다. 그 순간엔 나의 자녀들은 없었고 나의 돌아가신 나의 부모님이 있었기 때문에 그 순간이 더욱 그리운 것일 수도 있다.

어린이 때나 청소년기엔 어린이라서 청소년이라서 제약받고 간섭받는 것이 싫어 얼른 어른이 되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간섭받고 보호받던 그 순간이 인생에서 행복한 순간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때는 생각하지 못하던 것들을 지금에 와서야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들도 있다. 죽을 때까지 사람은 철들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하고 철들면 죽는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나이 들고 보니 젊어서 느끼지 못하던 감정을 느끼는 것도 많다. 우리 세대만 하더라도 과학의 발달로 인해 사는 모습이 많이 바뀌고 컴퓨터, 셀 폰, 냉장고, 가스레인지, 텔레비전, 에어컨은 물론 로봇까지 생활에 일상이 되어 가는 시대를 살고 있다. 어린 시절엔 짚신을 벗어나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니면서 운동화가 꿈이던 시절이 있었듯이, 동네에 한 대밖에 없던 TV가 우리 집에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다른 부잣집 아이들처럼 책상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지금은 그런 모든 걸 가지고 있음에도 나는 비교적 가난하고 비교적 가지지 못했으며 비교적 채우지 못한 것이 많아 불만은 여전히 크다.

어머니가 사 온 찐빵 하나에도 행복하고, 밥 위에 쪄준 감자 개떡에도 행복하던 시절과 아무리 맛있는 것을 먹어도 맛있는 줄을 모르는 입맛을 가진 지금, 그 시절 감자 개떡이 그리운 이유는 무얼까.

꽃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듯이, 돼지가 우리에 갇혀서도 10마리가 넘는 새끼를 낳아 기르듯이, 사람들도 그때는 대여섯 명씩 낳아 길렀다. 그리고 아이들이 먹을 것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말했다. 아이들의 교육이나 아이들의 미래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녀가 1명이나 2명만 가지게 되면서 자녀에 과잉 관심과 자녀가 나의 꿈을 대신해야 한다는 생각에 더욱 아이들의 교육과 미래에 집착하게 된다.

우리는 세상에 올 때 왜 왔는지 몰랐듯이 갈 때도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종교적으로 야 천국이나 지옥에 가고 하느님의 품으로 간다거나 서방정토 부처님 곁으로 간다는 생각을 하지만, 누구도 겪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수학적이나 과학적 증명은 하지 못하고 있다.





채우면 채울수록 갈증은 더욱 심해지고
배우면 배울수록 배움은 끝이 없어지는데

일하면 할 수록 즐거움보단 불평만 늘어
비우면 비울수록 눈에 거슬리는 것들

잊으려 하면 할 수록 잊히지 않는 얼굴
그리움은 빈방 가득 채워지고

있어도 없는 사람처럼
없는 이의 얼굴만 뇌리에 가득 찼다. 

 







#작가의 변
우리는 살면서 왜 사는가? 무엇 때문에 사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열심히 일을 하면서 내 사생활이 없을 때 일하면 할수록 일이 더 늘어나고 일을 위해 일을 하는지 나를 위해 일하는지 모를 때도 있다. 이런 사람을 일중독이라고 말한다. 생각 없이 일에만 빠져 사는 일도 있다. 왜 일하는지, 무엇 때문에 일하는지도 모른 채 말이다.

이 세상에 우리가 태어났을 때만 해도 우리가 왜 사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없었다. 왜 태어났는지에 대한 궁금증도 없었다. 세상에 많은 동물과 식물이 태어나고 소멸한다. 그들은 왜 태어났는지 왜 사는지 궁금해하지 않고 저마다의 삶을 살다가 간다. 숙제를 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것처럼 봄이면 새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며, 녹음을 우거지게 하고, 열매를 맺고, 열매를 수확하고, 가을엔 죽는 생물도 있고, 긴 겨울잠을 자고 마치 세상에 다시 태어나듯이 다시 생명의 활동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자연에서 뛰어놀다 보니, 소는 왜 고기를 먹지 않는데도 나보다 힘이 셀까? 늘 풀밭인 소의 먹이와 겨울에 특식이라고 주는 소 죽은 짚이나 시래기 등은 물론 음식 찌꺼기와 콩깍지 그리고 소가 좋아하는 쌀겨라는 벼를 도정할 때 나오는 부산물을 넣어 주기도 한다. 소는 그렇게 물과 식물성 음식을 먹고서도 늘 힘이 사람보다 세다.

개가 주인을 알아보고 주인에게는 짖지 않고 외부인이 오면 죽으라고 짖어 대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했다. 토끼가 새끼 나올 때 외부인이 보면 부정을 타서 다 물어 죽이거나, 아예 먹어 버린다는 말에 잔인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설마 했지만 정말 토끼가 새끼를 모두 먹어 없애 버렸을 때 배신감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여름밤에 마당 멍석에 누워 하늘을 보고 있으면 별들이 총총하고 개구리 소리가 개굴거리는 그 광경이 당연하다고 느꼈고, 별을 가보겠다는 생각보다는 별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지가 궁금했었다. 후에 그런 환경이 얼마나 행복한 순간이었는지 알게 되었고, 그 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가족이 함께 마당 멍석에 누워 쑥을 태워 모기를 쫓고 모기장 안에서 잠들던 그 순간들이 그립기도 하다. 그 순간엔 나의 자녀들은 없었고 나의 돌아가신 나의 부모님이 있었기 때문에 그 순간이 더욱 그리운 것일 수도 있다.

어린이 때나 청소년기엔 어린이라서 청소년이라서 제약받고 간섭받는 것이 싫어 얼른 어른이 되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간섭받고 보호받던 그 순간이 인생에서 행복한 순간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때는 생각하지 못하던 것들을 지금에 와서야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들도 있다. 죽을 때까지 사람은 철들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하고 철들면 죽는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나이 들고 보니 젊어서 느끼지 못하던 감정을 느끼는 것도 많다. 우리 세대만 하더라도 과학의 발달로 인해 사는 모습이 많이 바뀌고 컴퓨터, 셀 폰, 냉장고, 가스레인지, 텔레비전, 에어컨은 물론 로봇까지 생활에 일상이 되어 가는 시대를 살고 있다. 어린 시절엔 짚신을 벗어나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니면서 운동화가 꿈이던 시절이 있었듯이, 동네에 한 대밖에 없던 TV가 우리 집에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다른 부잣집 아이들처럼 책상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지금은 그런 모든 걸 가지고 있음에도 나는 비교적 가난하고 비교적 가지지 못했으며 비교적 채우지 못한 것이 많아 불만은 여전히 크다.

어머니가 사 온 찐빵 하나에도 행복하고, 밥 위에 쪄준 감자 개떡에도 행복하던 시절과 아무리 맛있는 것을 먹어도 맛있는 줄을 모르는 입맛을 가진 지금, 그 시절 감자 개떡이 그리운 이유는 무얼까.

꽃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듯이, 돼지가 우리에 갇혀서도 10마리가 넘는 새끼를 낳아 기르듯이, 사람들도 그때는 대여섯 명씩 낳아 길렀다. 그리고 아이들이 먹을 것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말했다. 아이들의 교육이나 아이들의 미래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녀가 1명이나 2명만 가지게 되면서 자녀에 과잉 관심과 자녀가 나의 꿈을 대신해야 한다는 생각에 더욱 아이들의 교육과 미래에 집착하게 된다.

우리는 세상에 올 때 왜 왔는지 몰랐듯이 갈 때도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종교적으로 야 천국이나 지옥에 가고 하느님의 품으로 간다거나 서방정토 부처님 곁으로 간다는 생각을 하지만, 누구도 겪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수학적이나 과학적 증명은 하지 못하고 있다.







<성경>의 내용을 과학보다도 더 믿고 숭상하면서 삶의 중심에 놓고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듯이 불경도 수천 년 동안 많은 사람이 믿고 의지하면서 이어져 오고 있다. 동양인 중국, 한국, 일본 같은 경우 하느님을 믿는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온 건 오래되지 않다. 동양 3국의 조상들은 불교를 세상에서 가장 신성한 종교로 믿었다. 서양에서 기독교가 십자군 전쟁으로 바이블과 칼로 정복 전쟁을 할 때도 불교는 침략하지 않고 외세에 맞서 국가를 지키려 노력했을 뿐이다. 그러면서 수많은 선사와 깨달은 조상들은 우리에게 종교의 가르침을 주었다. 성경이 인간중심의 종교라면 불교는 만물의 종교인 셈이다. 만물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말한다. 윤회를 통해 인간이 벌레나 맹독류로 태어날 수 있다는 교리는 사람들에게 선하게 살라고 말하고, 욕심을 부리거나 나쁜 행위를 하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가르치는 것은 물론 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윤회를 벗어나는 길, 대각견성 부처가 되는 길이다. 서양의 수도원에서도 일하고 기도하면서 깨닫기도 하지만 종교적 한계가 분명 존재한다. 우리가 왜 이 세상에 왔는지 생각하기보다는 얼마나 바르게 삶을 살고 흔적도 남기지 않고 흙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가 우리가 생각해야 할 일이다. 인간은 분명 지구상에서 뛰어난 존재인 것은 맞지만 지구가 인간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지구는 인류가 모든 생명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다. 인간이 가는 곳마다 지구는 파괴되는 현실 속에서 인간이 지구에서 사라져야 지구가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즉 사람은 지구의 한 존재일 뿐인데 사람들은 자꾸만 인간을 위한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다. 사실은 바닷속에 지구 맨틀 안에 들어갈 수도 없으면서 자꾸만 지구 밖 세상을 정복하려고 한다. 우주에는 지구와 같은 별이 존재할 수 있다. 불경에 나와 있는 삼천대천 세계를 보면 우리는 안다. 모래알보다 많은 별이 우주에 존재한다. 그리고 지구엔 인간이 보지 못하는 바이러스에 의해 병들고 죽어 간다. 아직도 인간이 삶에 겸손해야 할 이유이다. 욕심은 끝이 없다. 욕망은 채울 수 없는 깊은 우물과 같다. 그래서 비우는 일조차 쉽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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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내용을 과학보다도 더 믿고 숭상하면서 삶의 중심에 놓고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듯이 불경도 수천 년 동안 많은 사람이 믿고 의지하면서 이어져 오고 있다. 동양인 중국, 한국, 일본 같은 경우 하느님을 믿는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온 건 오래되지 않다. 동양 3국의 조상들은 불교를 세상에서 가장 신성한 종교로 믿었다. 서양에서 기독교가 십자군 전쟁으로 바이블과 칼로 정복 전쟁을 할 때도 불교는 침략하지 않고 외세에 맞서 국가를 지키려 노력했을 뿐이다. 그러면서 수많은 선사와 깨달은 조상들은 우리에게 종교의 가르침을 주었다. 성경이 인간중심의 종교라면 불교는 만물의 종교인 셈이다. 만물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말한다. 윤회를 통해 인간이 벌레나 맹독류로 태어날 수 있다는 교리는 사람들에게 선하게 살라고 말하고, 욕심을 부리거나 나쁜 행위를 하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가르치는 것은 물론 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윤회를 벗어나는 길, 대각견성 부처가 되는 길이다. 서양의 수도원에서도 일하고 기도하면서 깨닫기도 하지만 종교적 한계가 분명 존재한다. 우리가 왜 이 세상에 왔는지 생각하기보다는 얼마나 바르게 삶을 살고 흔적도 남기지 않고 흙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가 우리가 생각해야 할 일이다. 인간은 분명 지구상에서 뛰어난 존재인 것은 맞지만 지구가 인간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지구는 인류가 모든 생명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다. 인간이 가는 곳마다 지구는 파괴되는 현실 속에서 인간이 지구에서 사라져야 지구가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즉 사람은 지구의 한 존재일 뿐인데 사람들은 자꾸만 인간을 위한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다. 사실은 바닷속에 지구 맨틀 안에 들어갈 수도 없으면서 자꾸만 지구 밖 세상을 정복하려고 한다. 우주에는 지구와 같은 별이 존재할 수 있다. 불경에 나와 있는 삼천대천 세계를 보면 우리는 안다. 모래알보다 많은 별이 우주에 존재한다. 그리고 지구엔 인간이 보지 못하는 바이러스에 의해 병들고 죽어 간다. 아직도 인간이 삶에 겸손해야 할 이유이다. 욕심은 끝이 없다. 욕망은 채울 수 없는 깊은 우물과 같다. 그래서 비우는 일조차 쉽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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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우면 채울수록 갈증은 더욱 심해지고
배우면 배울수록 배움은 끝이 없어지는데

일하면 할 수록 즐거움보단 불평만 늘어
비우면 비울수록 눈에 거슬리는 것들

잊으려 하면 할 수록 잊히지 않는 얼굴
그리움은 빈방 가득 채워지고

있어도 없는 사람처럼
없는 이의 얼굴만 뇌리에 가득 찼다. 

 







#작가의 변
우리는 살면서 왜 사는가? 무엇 때문에 사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열심히 일을 하면서 내 사생활이 없을 때 일하면 할수록 일이 더 늘어나고 일을 위해 일을 하는지 나를 위해 일하는지 모를 때도 있다. 이런 사람을 일중독이라고 말한다. 생각 없이 일에만 빠져 사는 일도 있다. 왜 일하는지, 무엇 때문에 일하는지도 모른 채 말이다.

이 세상에 우리가 태어났을 때만 해도 우리가 왜 사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없었다. 왜 태어났는지에 대한 궁금증도 없었다. 세상에 많은 동물과 식물이 태어나고 소멸한다. 그들은 왜 태어났는지 왜 사는지 궁금해하지 않고 저마다의 삶을 살다가 간다. 숙제를 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것처럼 봄이면 새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며, 녹음을 우거지게 하고, 열매를 맺고, 열매를 수확하고, 가을엔 죽는 생물도 있고, 긴 겨울잠을 자고 마치 세상에 다시 태어나듯이 다시 생명의 활동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자연에서 뛰어놀다 보니, 소는 왜 고기를 먹지 않는데도 나보다 힘이 셀까? 늘 풀밭인 소의 먹이와 겨울에 특식이라고 주는 소 죽은 짚이나 시래기 등은 물론 음식 찌꺼기와 콩깍지 그리고 소가 좋아하는 쌀겨라는 벼를 도정할 때 나오는 부산물을 넣어 주기도 한다. 소는 그렇게 물과 식물성 음식을 먹고서도 늘 힘이 사람보다 세다.

개가 주인을 알아보고 주인에게는 짖지 않고 외부인이 오면 죽으라고 짖어 대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했다. 토끼가 새끼 나올 때 외부인이 보면 부정을 타서 다 물어 죽이거나, 아예 먹어 버린다는 말에 잔인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설마 했지만 정말 토끼가 새끼를 모두 먹어 없애 버렸을 때 배신감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여름밤에 마당 멍석에 누워 하늘을 보고 있으면 별들이 총총하고 개구리 소리가 개굴거리는 그 광경이 당연하다고 느꼈고, 별을 가보겠다는 생각보다는 별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지가 궁금했었다. 후에 그런 환경이 얼마나 행복한 순간이었는지 알게 되었고, 그 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가족이 함께 마당 멍석에 누워 쑥을 태워 모기를 쫓고 모기장 안에서 잠들던 그 순간들이 그립기도 하다. 그 순간엔 나의 자녀들은 없었고 나의 돌아가신 나의 부모님이 있었기 때문에 그 순간이 더욱 그리운 것일 수도 있다.

어린이 때나 청소년기엔 어린이라서 청소년이라서 제약받고 간섭받는 것이 싫어 얼른 어른이 되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간섭받고 보호받던 그 순간이 인생에서 행복한 순간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때는 생각하지 못하던 것들을 지금에 와서야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들도 있다. 죽을 때까지 사람은 철들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하고 철들면 죽는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나이 들고 보니 젊어서 느끼지 못하던 감정을 느끼는 것도 많다. 우리 세대만 하더라도 과학의 발달로 인해 사는 모습이 많이 바뀌고 컴퓨터, 셀 폰, 냉장고, 가스레인지, 텔레비전, 에어컨은 물론 로봇까지 생활에 일상이 되어 가는 시대를 살고 있다. 어린 시절엔 짚신을 벗어나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니면서 운동화가 꿈이던 시절이 있었듯이, 동네에 한 대밖에 없던 TV가 우리 집에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다른 부잣집 아이들처럼 책상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지금은 그런 모든 걸 가지고 있음에도 나는 비교적 가난하고 비교적 가지지 못했으며 비교적 채우지 못한 것이 많아 불만은 여전히 크다.

어머니가 사 온 찐빵 하나에도 행복하고, 밥 위에 쪄준 감자 개떡에도 행복하던 시절과 아무리 맛있는 것을 먹어도 맛있는 줄을 모르는 입맛을 가진 지금, 그 시절 감자 개떡이 그리운 이유는 무얼까.

꽃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듯이, 돼지가 우리에 갇혀서도 10마리가 넘는 새끼를 낳아 기르듯이, 사람들도 그때는 대여섯 명씩 낳아 길렀다. 그리고 아이들이 먹을 것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말했다. 아이들의 교육이나 아이들의 미래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녀가 1명이나 2명만 가지게 되면서 자녀에 과잉 관심과 자녀가 나의 꿈을 대신해야 한다는 생각에 더욱 아이들의 교육과 미래에 집착하게 된다.

우리는 세상에 올 때 왜 왔는지 몰랐듯이 갈 때도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종교적으로 야 천국이나 지옥에 가고 하느님의 품으로 간다거나 서방정토 부처님 곁으로 간다는 생각을 하지만, 누구도 겪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수학적이나 과학적 증명은 하지 못하고 있다.







<성경>의 내용을 과학보다도 더 믿고 숭상하면서 삶의 중심에 놓고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듯이 불경도 수천 년 동안 많은 사람이 믿고 의지하면서 이어져 오고 있다. 동양인 중국, 한국, 일본 같은 경우 하느님을 믿는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온 건 오래되지 않다. 동양 3국의 조상들은 불교를 세상에서 가장 신성한 종교로 믿었다. 서양에서 기독교가 십자군 전쟁으로 바이블과 칼로 정복 전쟁을 할 때도 불교는 침략하지 않고 외세에 맞서 국가를 지키려 노력했을 뿐이다. 그러면서 수많은 선사와 깨달은 조상들은 우리에게 종교의 가르침을 주었다. 성경이 인간중심의 종교라면 불교는 만물의 종교인 셈이다. 만물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말한다. 윤회를 통해 인간이 벌레나 맹독류로 태어날 수 있다는 교리는 사람들에게 선하게 살라고 말하고, 욕심을 부리거나 나쁜 행위를 하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가르치는 것은 물론 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윤회를 벗어나는 길, 대각견성 부처가 되는 길이다. 서양의 수도원에서도 일하고 기도하면서 깨닫기도 하지만 종교적 한계가 분명 존재한다. 우리가 왜 이 세상에 왔는지 생각하기보다는 얼마나 바르게 삶을 살고 흔적도 남기지 않고 흙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가 우리가 생각해야 할 일이다. 인간은 분명 지구상에서 뛰어난 존재인 것은 맞지만 지구가 인간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지구는 인류가 모든 생명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다. 인간이 가는 곳마다 지구는 파괴되는 현실 속에서 인간이 지구에서 사라져야 지구가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즉 사람은 지구의 한 존재일 뿐인데 사람들은 자꾸만 인간을 위한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다. 사실은 바닷속에 지구 맨틀 안에 들어갈 수도 없으면서 자꾸만 지구 밖 세상을 정복하려고 한다. 우주에는 지구와 같은 별이 존재할 수 있다. 불경에 나와 있는 삼천대천 세계를 보면 우리는 안다. 모래알보다 많은 별이 우주에 존재한다. 그리고 지구엔 인간이 보지 못하는 바이러스에 의해 병들고 죽어 간다. 아직도 인간이 삶에 겸손해야 할 이유이다. 욕심은 끝이 없다. 욕망은 채울 수 없는 깊은 우물과 같다. 그래서 비우는 일조차 쉽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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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사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 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 학원에 다니며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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