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141. 나 바람 되어
[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141. 나 바람 되어
  • 전재민 시인
  • 승인 2023.12.19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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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죽거든
아무런 흔적일랑
남기지 말고

자전거 탈 때 넘어지지 않으려
끝없이 밟아온 페달처럼
외줄타기 하듯 살아온 세월일랑
망각 차 한 잔으로 잊고
구름처럼 흘러
민들레 홀씨 되어
먼 길 떠나리니
가는 길에
보랏빛 도라지 꽃밭도
메밀꽃 양탄자도
유채꽃 향기도 지나

꿈꾸듯 잠든 듯
바람 되어.
 







#작가의 변
우리가 나고 살다가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생로병사라고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4고도 이 생로병사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 어머니에게 생애 최고의 고통을 안기고 태어난다. 요즘은 자연 분만이 아닌 제왕 절개 수술을 통해서 아이가 태어나지만, 그래도 고통이 없는 건 아니다. 열 달을 아기 집인 태중에서 아이를 기르고 그것도 모자라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아이를 낳는다. 아이는 자신이 엄마에게 고통을 주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두 팔을 하늘을 향해 뻗으며 힘차고 우렁차게 울음으로 세상에 나왔음을 알린다. 태어나서도 자신의 안위보다는 아이 염려에 늘 안절부절하는 엄마의 손길에서 자라지만 늘 아프고 늘 어딘가 불안한 인격체로 성장하는 것이 인간이다.

내 부모님 경우 3살 4살 어린 나이의 아이들을 7명을 잃었다. 막내 바로 위인 내가 장남이 됐다. 뭐 옛날 황가에서 태어나서 그렇게 되었다면 황위를 물려받을 수도 있었겠지만 내 부모님은 손톱이 다 닳도록 논밭에 다니면서 일만 하다가 돌아가셨다. 나도 평생을 객지로 떠돌며 열심히 살았다고 하지만 돌이켜 보면 잠자는 시간, 아팠던 시간이 꽤 큰 삶의 시간을 차지한다. 내가 아프면 어머니는 부엌이나 장독대에 물을 떠 놓고 빌었던 적이 많다. 병원은 멀고 약국도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감기가 심해져서 폐렴으로 전이가 되어 엑스레이 사진에 폐가 이상하게 보였던 기억도 있다. 건강한 아이로 태어나 들판을 열심히 뛰어다니면서 말썽이란 말썽은 다 피운 것 같지만 실상은 아파서 먹은 익모초나, 두더지 고기가 먹기 싫었지만, 약이니까 눈 딱 감고 먹으라면서 살을 발라 주던 어머니 모습이 떠오른다.

요즘 딸은 늙은 고양이를 봐주느라 친구 집에 출·퇴근한다. 친구가 아시아로 여행을 가면서 고양이 데이케어가 너무 비싸서 고민할 때, 선뜻 “내가 한 달 돌봐 줄게” 했다는 데, 나머지 한 달을 봐주기로 한 다른 친구는 마음을 바꿔 못 봐준다고 하니 딸이 두 달을 모두 봐주기로 했단다. 친구의 집은 상가 2층에 있는 주거지라 많이 시끄럽고 잠자기도 힘들다고 하면서도 친구의 의리로 친구의 고양이를 봐주면서 고양이나 강아지를 좋아하는 마음을 풀었으면 한다.그 고양이는 또 다른 친구가 이사를 가면서 버린 것을 친구가 키우고 있는데 나이가 12살이 넘어 늙은 고양이라 사진에도 늙은 것이 표시가 날 정도이다. 요즘은 애들을 낳지 않아도 애완동물은 기르는 사람들이 많다. 팻그루밍이라고 해서 털도 깎아 주고 미용도 하고 병원도 다니고 애완견이나 고양이의 먹이도 사다 먹이다 보니 비용도 만만치 않게 든다. 아프면 동물 병원에서 수천 불이 그냥 날아가기도 한다. 사람은 의료보험이 있어 돈이 많이 들지 않지만 동물은 청구하는 대로 내야 하니 부담이 많이 된다. 고통받는 것보다는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안락사를 시키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고양이나 개들이 원치 않는 임신을 해서 식구가 늘어나길 원치 않아서 불임 시술을 하기도 하고, 작은 개도 앙칼지게 짖어 대는 경우 이웃에서 불평이 많이 들어 오니 성대 수술을 해서 짖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마치 모든 걸 관장하는 신처럼 인간이 애견 동물을 아끼는 듯 대하지만 사실은 하루 종일 집안에 갇혀 지내거나 평생을 집안에서 갇혀 지내는 감옥과 같은 생활을 한다. 먹이를 주고 가끔 쓰다듬어 주고 이뻐해 주니 고양이도 만족할 거라는 자기 암시를 하면서 말이다.







어떤 유형의 사람은 자신에게 짖지 않고 물지 않는다고 공원에서 개 줄을 풀어 다른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기도 한다. 핏불 같은 싸움 견을 풀어 놓아서 갑자기 등 뒤에서 사나운 개가 짖어 놀랐는데 허허 웃던 개 주인의 얼굴이 잊히지 않는다. 나도 어릴 때 집에서 개를 기른 적이 있다. 내가 기른 게 아니라 어머니가 기른 것이지만 그래도 나를 잘 따르고 어디 나가면 꼭 데리고 나가고 하던, 눈빛까지 검은 검둥이는 성인으로 자라서는 쥐를 잡아 마당에 패대기를 치는 것을 즐겼다. 그러면 내가 잘했다고 칭찬하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기 때문이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똥을 보면 참지 못하고 혓바닥으로 핥아서 먹어 야단을 맞는 똥개였다. 요즘은 개의 품종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도 욕정을 참지 못하고 거사를 벌려 새끼들을 주렁주렁 낳는 그런 우리 이웃의 흔한 똥개 중 하나였던 검정색이어서 이름도 검둥이였던 그 개는 쥐약을 먹고 고통스러워하다가 마루 밑에서 죽어 갔다. 죽어 가는 개를 보면서 그 고통을 덜어 주지도 지켜 주지도 못했고, 그 후로는 개를 기르지 않았다.

사람은 사람을 통해서 배우기도 하지만 동물을 통해 배우기도 한다. 개미집에 자세히 내려다보고 있으면 얼마나 열심히 일들을 하고 있는지 땅속이 궁금해서 개미집을 파서 그들의 보금자리를 파괴하기도 했다. 그것은 내게는 순수한 궁금증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재앙이었으리라. 마차 인간 세상에 거인이 나타나 무지막지하게 집들을 부셔버린 것처럼 말이다.

어머니 아버지가 늘 우리를 지켜 줄 줄만 알았다가 이웃 남자에게 부모님이 구타당해 병원에 입원하는 사건 이후 우리 가족도 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엄마들은 화장하고 젊고 이뻤지만, 엄마는 내가 어릴 때부터 치아가 없어 고기를 뜯는다든가 하는 것을 하지 못했다. 그냥 국에 밥 말아 김치 쭉 찢어 얹어서 먹는 것이 가장 많이 본 모습이다. 어릴 땐 동네 노인들이나 어른들을 보면서 나는 저렇게 늙지 않을 거야, 다짐하고는 했다. 그래서 다들 고향을 등지고 도시로 빛을 좇는 나방처럼 몰려들었지만 도시는 시골촌놈인 우리를 반기지 않았고 철저한 경쟁만이 있었다. 엄마가 중풍 맞을 나이가 돼서 내게도 스트로크 증세가 나타났고, 치매에 걸려 돌아가신 아버지 이야기를 하니 의사는 가족력이니 조심하라고 하지만 딱히 조심해야 할 것도 없다.

어제 모임에 갔다가 1여 년간 아팠던 지인의 병에 대해 들었다. 피가 생성되지 않는 병. 사람의 몸은 뼈와 살 그리고 피로 이루어졌는데 피가 생성되지 않다는 얘기에, 어떻게 사는 건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치료하고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이는 그의 모습과 나를 비교한다. 사람이 아프지 않고 행복하고 건강한 날만 계속된다면 그것은 복 받은 삶이다. 하지만 그런 삶은 자극받지 않는 삶이어서 무료할 수 있다. 일을 하지 않아도 쓸 돈을 주체하지 못하는 재산 상속을 받은 사람들을 볼 때, 뭐가 문제야 싶지만 그들은 마약에 손대거나 남들이 하지 않는 스포츠 등을 하다가 삶을 등지는 경우도 많다. 사실 행복도 불행이 있기에 더욱 빛나고 더욱 행복한 건 아닐까. 생로병사 희노애락을 끊고 깨달음을 얻는 것이 불교의 서방정토이기는 하지만 사람들은 희노애락도 생로병사도 끊지 못하고 그 굴레에서 벗어 나지 못하는 삶을 살다가 간다. 진시황제처럼 불사의 몸을 이루기 위해 세상에 진귀한 약재를 모두 먹어도 그는 이미 수천 년 전에 무덤에 갇힌 육체일 뿐이다. 생로병사 희노애락에서 자유롭게 산다는 것은 우리의 정신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몸이 병들어 병원에 누워 있으면 정신은 깨닫는다. 정상적인 삶이 얼마나 축복받은 삶이었는지 말이다. 아무것도 아닌 걷고 뛰는 일이 심장병을 앓는 아이에겐 평생에 꿈이듯이 병원 침상에 누워 있으면 평소에 자기 신체를 돌보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된다. 두 발로 서서 걷고 뛴다는 것은 뒤뚱거리는 덜 개발된 로봇에게는 꿈이자 희망이다.

나는 글을 써서 내 기록을 남기는 것에 행복을 느낀다. 우울하거나 슬프거나 괴로울 때도 글을 쓰다 보면 마음이 치유되는 걸 느낀다. 일기장처럼 아무도 보지 않아도 마음이 편안한데 글을 읽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다면 더욱 뜻깊은 일이 될 수 있다. 생로병사 정해 진 길이지만 어떻게 사느냐는 각자의 노력과 마음에 달렸다. 몸은 생로병사에 빠지지만, 정신만은 영원히 죽지 않는 깨달음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어둠에 빛이 내리듯이 작은 마음 불씨 하나가 평안을 찾는 빛이 되고 작은 물방울들이 모여서 빗줄기가 되어 강물이 되듯 조금씩 조금씩 날마다 이루어 놓은 공부가 깨달음의 씨앗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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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죽거든
아무런 흔적일랑
남기지 말고

자전거 탈 때 넘어지지 않으려
끝없이 밟아온 페달처럼
외줄타기 하듯 살아온 세월일랑
망각 차 한 잔으로 잊고
구름처럼 흘러
민들레 홀씨 되어
먼 길 떠나리니
가는 길에
보랏빛 도라지 꽃밭도
메밀꽃 양탄자도
유채꽃 향기도 지나

꿈꾸듯 잠든 듯
바람 되어.
 





나 죽거든
아무런 흔적일랑
남기지 말고

자전거 탈 때 넘어지지 않으려
끝없이 밟아온 페달처럼
외줄타기 하듯 살아온 세월일랑
망각 차 한 잔으로 잊고
구름처럼 흘러
민들레 홀씨 되어
먼 길 떠나리니
가는 길에
보랏빛 도라지 꽃밭도
메밀꽃 양탄자도
유채꽃 향기도 지나

꿈꾸듯 잠든 듯
바람 되어.
 







#작가의 변
우리가 나고 살다가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생로병사라고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4고도 이 생로병사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 어머니에게 생애 최고의 고통을 안기고 태어난다. 요즘은 자연 분만이 아닌 제왕 절개 수술을 통해서 아이가 태어나지만, 그래도 고통이 없는 건 아니다. 열 달을 아기 집인 태중에서 아이를 기르고 그것도 모자라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아이를 낳는다. 아이는 자신이 엄마에게 고통을 주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두 팔을 하늘을 향해 뻗으며 힘차고 우렁차게 울음으로 세상에 나왔음을 알린다. 태어나서도 자신의 안위보다는 아이 염려에 늘 안절부절하는 엄마의 손길에서 자라지만 늘 아프고 늘 어딘가 불안한 인격체로 성장하는 것이 인간이다.

내 부모님 경우 3살 4살 어린 나이의 아이들을 7명을 잃었다. 막내 바로 위인 내가 장남이 됐다. 뭐 옛날 황가에서 태어나서 그렇게 되었다면 황위를 물려받을 수도 있었겠지만 내 부모님은 손톱이 다 닳도록 논밭에 다니면서 일만 하다가 돌아가셨다. 나도 평생을 객지로 떠돌며 열심히 살았다고 하지만 돌이켜 보면 잠자는 시간, 아팠던 시간이 꽤 큰 삶의 시간을 차지한다. 내가 아프면 어머니는 부엌이나 장독대에 물을 떠 놓고 빌었던 적이 많다. 병원은 멀고 약국도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감기가 심해져서 폐렴으로 전이가 되어 엑스레이 사진에 폐가 이상하게 보였던 기억도 있다. 건강한 아이로 태어나 들판을 열심히 뛰어다니면서 말썽이란 말썽은 다 피운 것 같지만 실상은 아파서 먹은 익모초나, 두더지 고기가 먹기 싫었지만, 약이니까 눈 딱 감고 먹으라면서 살을 발라 주던 어머니 모습이 떠오른다.

요즘 딸은 늙은 고양이를 봐주느라 친구 집에 출·퇴근한다. 친구가 아시아로 여행을 가면서 고양이 데이케어가 너무 비싸서 고민할 때, 선뜻 “내가 한 달 돌봐 줄게” 했다는 데, 나머지 한 달을 봐주기로 한 다른 친구는 마음을 바꿔 못 봐준다고 하니 딸이 두 달을 모두 봐주기로 했단다. 친구의 집은 상가 2층에 있는 주거지라 많이 시끄럽고 잠자기도 힘들다고 하면서도 친구의 의리로 친구의 고양이를 봐주면서 고양이나 강아지를 좋아하는 마음을 풀었으면 한다.그 고양이는 또 다른 친구가 이사를 가면서 버린 것을 친구가 키우고 있는데 나이가 12살이 넘어 늙은 고양이라 사진에도 늙은 것이 표시가 날 정도이다. 요즘은 애들을 낳지 않아도 애완동물은 기르는 사람들이 많다. 팻그루밍이라고 해서 털도 깎아 주고 미용도 하고 병원도 다니고 애완견이나 고양이의 먹이도 사다 먹이다 보니 비용도 만만치 않게 든다. 아프면 동물 병원에서 수천 불이 그냥 날아가기도 한다. 사람은 의료보험이 있어 돈이 많이 들지 않지만 동물은 청구하는 대로 내야 하니 부담이 많이 된다. 고통받는 것보다는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안락사를 시키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고양이나 개들이 원치 않는 임신을 해서 식구가 늘어나길 원치 않아서 불임 시술을 하기도 하고, 작은 개도 앙칼지게 짖어 대는 경우 이웃에서 불평이 많이 들어 오니 성대 수술을 해서 짖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마치 모든 걸 관장하는 신처럼 인간이 애견 동물을 아끼는 듯 대하지만 사실은 하루 종일 집안에 갇혀 지내거나 평생을 집안에서 갇혀 지내는 감옥과 같은 생활을 한다. 먹이를 주고 가끔 쓰다듬어 주고 이뻐해 주니 고양이도 만족할 거라는 자기 암시를 하면서 말이다.







어떤 유형의 사람은 자신에게 짖지 않고 물지 않는다고 공원에서 개 줄을 풀어 다른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기도 한다. 핏불 같은 싸움 견을 풀어 놓아서 갑자기 등 뒤에서 사나운 개가 짖어 놀랐는데 허허 웃던 개 주인의 얼굴이 잊히지 않는다. 나도 어릴 때 집에서 개를 기른 적이 있다. 내가 기른 게 아니라 어머니가 기른 것이지만 그래도 나를 잘 따르고 어디 나가면 꼭 데리고 나가고 하던, 눈빛까지 검은 검둥이는 성인으로 자라서는 쥐를 잡아 마당에 패대기를 치는 것을 즐겼다. 그러면 내가 잘했다고 칭찬하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기 때문이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똥을 보면 참지 못하고 혓바닥으로 핥아서 먹어 야단을 맞는 똥개였다. 요즘은 개의 품종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도 욕정을 참지 못하고 거사를 벌려 새끼들을 주렁주렁 낳는 그런 우리 이웃의 흔한 똥개 중 하나였던 검정색이어서 이름도 검둥이였던 그 개는 쥐약을 먹고 고통스러워하다가 마루 밑에서 죽어 갔다. 죽어 가는 개를 보면서 그 고통을 덜어 주지도 지켜 주지도 못했고, 그 후로는 개를 기르지 않았다.

사람은 사람을 통해서 배우기도 하지만 동물을 통해 배우기도 한다. 개미집에 자세히 내려다보고 있으면 얼마나 열심히 일들을 하고 있는지 땅속이 궁금해서 개미집을 파서 그들의 보금자리를 파괴하기도 했다. 그것은 내게는 순수한 궁금증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재앙이었으리라. 마차 인간 세상에 거인이 나타나 무지막지하게 집들을 부셔버린 것처럼 말이다.

어머니 아버지가 늘 우리를 지켜 줄 줄만 알았다가 이웃 남자에게 부모님이 구타당해 병원에 입원하는 사건 이후 우리 가족도 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엄마들은 화장하고 젊고 이뻤지만, 엄마는 내가 어릴 때부터 치아가 없어 고기를 뜯는다든가 하는 것을 하지 못했다. 그냥 국에 밥 말아 김치 쭉 찢어 얹어서 먹는 것이 가장 많이 본 모습이다. 어릴 땐 동네 노인들이나 어른들을 보면서 나는 저렇게 늙지 않을 거야, 다짐하고는 했다. 그래서 다들 고향을 등지고 도시로 빛을 좇는 나방처럼 몰려들었지만 도시는 시골촌놈인 우리를 반기지 않았고 철저한 경쟁만이 있었다. 엄마가 중풍 맞을 나이가 돼서 내게도 스트로크 증세가 나타났고, 치매에 걸려 돌아가신 아버지 이야기를 하니 의사는 가족력이니 조심하라고 하지만 딱히 조심해야 할 것도 없다.

어제 모임에 갔다가 1여 년간 아팠던 지인의 병에 대해 들었다. 피가 생성되지 않는 병. 사람의 몸은 뼈와 살 그리고 피로 이루어졌는데 피가 생성되지 않다는 얘기에, 어떻게 사는 건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치료하고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이는 그의 모습과 나를 비교한다. 사람이 아프지 않고 행복하고 건강한 날만 계속된다면 그것은 복 받은 삶이다. 하지만 그런 삶은 자극받지 않는 삶이어서 무료할 수 있다. 일을 하지 않아도 쓸 돈을 주체하지 못하는 재산 상속을 받은 사람들을 볼 때, 뭐가 문제야 싶지만 그들은 마약에 손대거나 남들이 하지 않는 스포츠 등을 하다가 삶을 등지는 경우도 많다. 사실 행복도 불행이 있기에 더욱 빛나고 더욱 행복한 건 아닐까. 생로병사 희노애락을 끊고 깨달음을 얻는 것이 불교의 서방정토이기는 하지만 사람들은 희노애락도 생로병사도 끊지 못하고 그 굴레에서 벗어 나지 못하는 삶을 살다가 간다. 진시황제처럼 불사의 몸을 이루기 위해 세상에 진귀한 약재를 모두 먹어도 그는 이미 수천 년 전에 무덤에 갇힌 육체일 뿐이다. 생로병사 희노애락에서 자유롭게 산다는 것은 우리의 정신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몸이 병들어 병원에 누워 있으면 정신은 깨닫는다. 정상적인 삶이 얼마나 축복받은 삶이었는지 말이다. 아무것도 아닌 걷고 뛰는 일이 심장병을 앓는 아이에겐 평생에 꿈이듯이 병원 침상에 누워 있으면 평소에 자기 신체를 돌보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된다. 두 발로 서서 걷고 뛴다는 것은 뒤뚱거리는 덜 개발된 로봇에게는 꿈이자 희망이다.

나는 글을 써서 내 기록을 남기는 것에 행복을 느낀다. 우울하거나 슬프거나 괴로울 때도 글을 쓰다 보면 마음이 치유되는 걸 느낀다. 일기장처럼 아무도 보지 않아도 마음이 편안한데 글을 읽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다면 더욱 뜻깊은 일이 될 수 있다. 생로병사 정해 진 길이지만 어떻게 사느냐는 각자의 노력과 마음에 달렸다. 몸은 생로병사에 빠지지만, 정신만은 영원히 죽지 않는 깨달음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어둠에 빛이 내리듯이 작은 마음 불씨 하나가 평안을 찾는 빛이 되고 작은 물방울들이 모여서 빗줄기가 되어 강물이 되듯 조금씩 조금씩 날마다 이루어 놓은 공부가 깨달음의 씨앗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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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변
우리가 나고 살다가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생로병사라고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4고도 이 생로병사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 어머니에게 생애 최고의 고통을 안기고 태어난다. 요즘은 자연 분만이 아닌 제왕 절개 수술을 통해서 아이가 태어나지만, 그래도 고통이 없는 건 아니다. 열 달을 아기 집인 태중에서 아이를 기르고 그것도 모자라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아이를 낳는다. 아이는 자신이 엄마에게 고통을 주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두 팔을 하늘을 향해 뻗으며 힘차고 우렁차게 울음으로 세상에 나왔음을 알린다. 태어나서도 자신의 안위보다는 아이 염려에 늘 안절부절하는 엄마의 손길에서 자라지만 늘 아프고 늘 어딘가 불안한 인격체로 성장하는 것이 인간이다.

내 부모님 경우 3살 4살 어린 나이의 아이들을 7명을 잃었다. 막내 바로 위인 내가 장남이 됐다. 뭐 옛날 황가에서 태어나서 그렇게 되었다면 황위를 물려받을 수도 있었겠지만 내 부모님은 손톱이 다 닳도록 논밭에 다니면서 일만 하다가 돌아가셨다. 나도 평생을 객지로 떠돌며 열심히 살았다고 하지만 돌이켜 보면 잠자는 시간, 아팠던 시간이 꽤 큰 삶의 시간을 차지한다. 내가 아프면 어머니는 부엌이나 장독대에 물을 떠 놓고 빌었던 적이 많다. 병원은 멀고 약국도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감기가 심해져서 폐렴으로 전이가 되어 엑스레이 사진에 폐가 이상하게 보였던 기억도 있다. 건강한 아이로 태어나 들판을 열심히 뛰어다니면서 말썽이란 말썽은 다 피운 것 같지만 실상은 아파서 먹은 익모초나, 두더지 고기가 먹기 싫었지만, 약이니까 눈 딱 감고 먹으라면서 살을 발라 주던 어머니 모습이 떠오른다.

요즘 딸은 늙은 고양이를 봐주느라 친구 집에 출·퇴근한다. 친구가 아시아로 여행을 가면서 고양이 데이케어가 너무 비싸서 고민할 때, 선뜻 “내가 한 달 돌봐 줄게” 했다는 데, 나머지 한 달을 봐주기로 한 다른 친구는 마음을 바꿔 못 봐준다고 하니 딸이 두 달을 모두 봐주기로 했단다. 친구의 집은 상가 2층에 있는 주거지라 많이 시끄럽고 잠자기도 힘들다고 하면서도 친구의 의리로 친구의 고양이를 봐주면서 고양이나 강아지를 좋아하는 마음을 풀었으면 한다.그 고양이는 또 다른 친구가 이사를 가면서 버린 것을 친구가 키우고 있는데 나이가 12살이 넘어 늙은 고양이라 사진에도 늙은 것이 표시가 날 정도이다. 요즘은 애들을 낳지 않아도 애완동물은 기르는 사람들이 많다. 팻그루밍이라고 해서 털도 깎아 주고 미용도 하고 병원도 다니고 애완견이나 고양이의 먹이도 사다 먹이다 보니 비용도 만만치 않게 든다. 아프면 동물 병원에서 수천 불이 그냥 날아가기도 한다. 사람은 의료보험이 있어 돈이 많이 들지 않지만 동물은 청구하는 대로 내야 하니 부담이 많이 된다. 고통받는 것보다는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안락사를 시키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고양이나 개들이 원치 않는 임신을 해서 식구가 늘어나길 원치 않아서 불임 시술을 하기도 하고, 작은 개도 앙칼지게 짖어 대는 경우 이웃에서 불평이 많이 들어 오니 성대 수술을 해서 짖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마치 모든 걸 관장하는 신처럼 인간이 애견 동물을 아끼는 듯 대하지만 사실은 하루 종일 집안에 갇혀 지내거나 평생을 집안에서 갇혀 지내는 감옥과 같은 생활을 한다. 먹이를 주고 가끔 쓰다듬어 주고 이뻐해 주니 고양이도 만족할 거라는 자기 암시를 하면서 말이다.





나 죽거든
아무런 흔적일랑
남기지 말고

자전거 탈 때 넘어지지 않으려
끝없이 밟아온 페달처럼
외줄타기 하듯 살아온 세월일랑
망각 차 한 잔으로 잊고
구름처럼 흘러
민들레 홀씨 되어
먼 길 떠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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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랏빛 도라지 꽃밭도
메밀꽃 양탄자도
유채꽃 향기도 지나

꿈꾸듯 잠든 듯
바람 되어.
 







#작가의 변
우리가 나고 살다가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생로병사라고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4고도 이 생로병사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 어머니에게 생애 최고의 고통을 안기고 태어난다. 요즘은 자연 분만이 아닌 제왕 절개 수술을 통해서 아이가 태어나지만, 그래도 고통이 없는 건 아니다. 열 달을 아기 집인 태중에서 아이를 기르고 그것도 모자라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아이를 낳는다. 아이는 자신이 엄마에게 고통을 주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두 팔을 하늘을 향해 뻗으며 힘차고 우렁차게 울음으로 세상에 나왔음을 알린다. 태어나서도 자신의 안위보다는 아이 염려에 늘 안절부절하는 엄마의 손길에서 자라지만 늘 아프고 늘 어딘가 불안한 인격체로 성장하는 것이 인간이다.

내 부모님 경우 3살 4살 어린 나이의 아이들을 7명을 잃었다. 막내 바로 위인 내가 장남이 됐다. 뭐 옛날 황가에서 태어나서 그렇게 되었다면 황위를 물려받을 수도 있었겠지만 내 부모님은 손톱이 다 닳도록 논밭에 다니면서 일만 하다가 돌아가셨다. 나도 평생을 객지로 떠돌며 열심히 살았다고 하지만 돌이켜 보면 잠자는 시간, 아팠던 시간이 꽤 큰 삶의 시간을 차지한다. 내가 아프면 어머니는 부엌이나 장독대에 물을 떠 놓고 빌었던 적이 많다. 병원은 멀고 약국도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감기가 심해져서 폐렴으로 전이가 되어 엑스레이 사진에 폐가 이상하게 보였던 기억도 있다. 건강한 아이로 태어나 들판을 열심히 뛰어다니면서 말썽이란 말썽은 다 피운 것 같지만 실상은 아파서 먹은 익모초나, 두더지 고기가 먹기 싫었지만, 약이니까 눈 딱 감고 먹으라면서 살을 발라 주던 어머니 모습이 떠오른다.

요즘 딸은 늙은 고양이를 봐주느라 친구 집에 출·퇴근한다. 친구가 아시아로 여행을 가면서 고양이 데이케어가 너무 비싸서 고민할 때, 선뜻 “내가 한 달 돌봐 줄게” 했다는 데, 나머지 한 달을 봐주기로 한 다른 친구는 마음을 바꿔 못 봐준다고 하니 딸이 두 달을 모두 봐주기로 했단다. 친구의 집은 상가 2층에 있는 주거지라 많이 시끄럽고 잠자기도 힘들다고 하면서도 친구의 의리로 친구의 고양이를 봐주면서 고양이나 강아지를 좋아하는 마음을 풀었으면 한다.그 고양이는 또 다른 친구가 이사를 가면서 버린 것을 친구가 키우고 있는데 나이가 12살이 넘어 늙은 고양이라 사진에도 늙은 것이 표시가 날 정도이다. 요즘은 애들을 낳지 않아도 애완동물은 기르는 사람들이 많다. 팻그루밍이라고 해서 털도 깎아 주고 미용도 하고 병원도 다니고 애완견이나 고양이의 먹이도 사다 먹이다 보니 비용도 만만치 않게 든다. 아프면 동물 병원에서 수천 불이 그냥 날아가기도 한다. 사람은 의료보험이 있어 돈이 많이 들지 않지만 동물은 청구하는 대로 내야 하니 부담이 많이 된다. 고통받는 것보다는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안락사를 시키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고양이나 개들이 원치 않는 임신을 해서 식구가 늘어나길 원치 않아서 불임 시술을 하기도 하고, 작은 개도 앙칼지게 짖어 대는 경우 이웃에서 불평이 많이 들어 오니 성대 수술을 해서 짖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마치 모든 걸 관장하는 신처럼 인간이 애견 동물을 아끼는 듯 대하지만 사실은 하루 종일 집안에 갇혀 지내거나 평생을 집안에서 갇혀 지내는 감옥과 같은 생활을 한다. 먹이를 주고 가끔 쓰다듬어 주고 이뻐해 주니 고양이도 만족할 거라는 자기 암시를 하면서 말이다.







어떤 유형의 사람은 자신에게 짖지 않고 물지 않는다고 공원에서 개 줄을 풀어 다른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기도 한다. 핏불 같은 싸움 견을 풀어 놓아서 갑자기 등 뒤에서 사나운 개가 짖어 놀랐는데 허허 웃던 개 주인의 얼굴이 잊히지 않는다. 나도 어릴 때 집에서 개를 기른 적이 있다. 내가 기른 게 아니라 어머니가 기른 것이지만 그래도 나를 잘 따르고 어디 나가면 꼭 데리고 나가고 하던, 눈빛까지 검은 검둥이는 성인으로 자라서는 쥐를 잡아 마당에 패대기를 치는 것을 즐겼다. 그러면 내가 잘했다고 칭찬하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기 때문이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똥을 보면 참지 못하고 혓바닥으로 핥아서 먹어 야단을 맞는 똥개였다. 요즘은 개의 품종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도 욕정을 참지 못하고 거사를 벌려 새끼들을 주렁주렁 낳는 그런 우리 이웃의 흔한 똥개 중 하나였던 검정색이어서 이름도 검둥이였던 그 개는 쥐약을 먹고 고통스러워하다가 마루 밑에서 죽어 갔다. 죽어 가는 개를 보면서 그 고통을 덜어 주지도 지켜 주지도 못했고, 그 후로는 개를 기르지 않았다.

사람은 사람을 통해서 배우기도 하지만 동물을 통해 배우기도 한다. 개미집에 자세히 내려다보고 있으면 얼마나 열심히 일들을 하고 있는지 땅속이 궁금해서 개미집을 파서 그들의 보금자리를 파괴하기도 했다. 그것은 내게는 순수한 궁금증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재앙이었으리라. 마차 인간 세상에 거인이 나타나 무지막지하게 집들을 부셔버린 것처럼 말이다.

어머니 아버지가 늘 우리를 지켜 줄 줄만 알았다가 이웃 남자에게 부모님이 구타당해 병원에 입원하는 사건 이후 우리 가족도 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엄마들은 화장하고 젊고 이뻤지만, 엄마는 내가 어릴 때부터 치아가 없어 고기를 뜯는다든가 하는 것을 하지 못했다. 그냥 국에 밥 말아 김치 쭉 찢어 얹어서 먹는 것이 가장 많이 본 모습이다. 어릴 땐 동네 노인들이나 어른들을 보면서 나는 저렇게 늙지 않을 거야, 다짐하고는 했다. 그래서 다들 고향을 등지고 도시로 빛을 좇는 나방처럼 몰려들었지만 도시는 시골촌놈인 우리를 반기지 않았고 철저한 경쟁만이 있었다. 엄마가 중풍 맞을 나이가 돼서 내게도 스트로크 증세가 나타났고, 치매에 걸려 돌아가신 아버지 이야기를 하니 의사는 가족력이니 조심하라고 하지만 딱히 조심해야 할 것도 없다.

어제 모임에 갔다가 1여 년간 아팠던 지인의 병에 대해 들었다. 피가 생성되지 않는 병. 사람의 몸은 뼈와 살 그리고 피로 이루어졌는데 피가 생성되지 않다는 얘기에, 어떻게 사는 건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치료하고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이는 그의 모습과 나를 비교한다. 사람이 아프지 않고 행복하고 건강한 날만 계속된다면 그것은 복 받은 삶이다. 하지만 그런 삶은 자극받지 않는 삶이어서 무료할 수 있다. 일을 하지 않아도 쓸 돈을 주체하지 못하는 재산 상속을 받은 사람들을 볼 때, 뭐가 문제야 싶지만 그들은 마약에 손대거나 남들이 하지 않는 스포츠 등을 하다가 삶을 등지는 경우도 많다. 사실 행복도 불행이 있기에 더욱 빛나고 더욱 행복한 건 아닐까. 생로병사 희노애락을 끊고 깨달음을 얻는 것이 불교의 서방정토이기는 하지만 사람들은 희노애락도 생로병사도 끊지 못하고 그 굴레에서 벗어 나지 못하는 삶을 살다가 간다. 진시황제처럼 불사의 몸을 이루기 위해 세상에 진귀한 약재를 모두 먹어도 그는 이미 수천 년 전에 무덤에 갇힌 육체일 뿐이다. 생로병사 희노애락에서 자유롭게 산다는 것은 우리의 정신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몸이 병들어 병원에 누워 있으면 정신은 깨닫는다. 정상적인 삶이 얼마나 축복받은 삶이었는지 말이다. 아무것도 아닌 걷고 뛰는 일이 심장병을 앓는 아이에겐 평생에 꿈이듯이 병원 침상에 누워 있으면 평소에 자기 신체를 돌보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된다. 두 발로 서서 걷고 뛴다는 것은 뒤뚱거리는 덜 개발된 로봇에게는 꿈이자 희망이다.

나는 글을 써서 내 기록을 남기는 것에 행복을 느낀다. 우울하거나 슬프거나 괴로울 때도 글을 쓰다 보면 마음이 치유되는 걸 느낀다. 일기장처럼 아무도 보지 않아도 마음이 편안한데 글을 읽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다면 더욱 뜻깊은 일이 될 수 있다. 생로병사 정해 진 길이지만 어떻게 사느냐는 각자의 노력과 마음에 달렸다. 몸은 생로병사에 빠지지만, 정신만은 영원히 죽지 않는 깨달음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어둠에 빛이 내리듯이 작은 마음 불씨 하나가 평안을 찾는 빛이 되고 작은 물방울들이 모여서 빗줄기가 되어 강물이 되듯 조금씩 조금씩 날마다 이루어 놓은 공부가 깨달음의 씨앗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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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유형의 사람은 자신에게 짖지 않고 물지 않는다고 공원에서 개 줄을 풀어 다른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기도 한다. 핏불 같은 싸움 견을 풀어 놓아서 갑자기 등 뒤에서 사나운 개가 짖어 놀랐는데 허허 웃던 개 주인의 얼굴이 잊히지 않는다. 나도 어릴 때 집에서 개를 기른 적이 있다. 내가 기른 게 아니라 어머니가 기른 것이지만 그래도 나를 잘 따르고 어디 나가면 꼭 데리고 나가고 하던, 눈빛까지 검은 검둥이는 성인으로 자라서는 쥐를 잡아 마당에 패대기를 치는 것을 즐겼다. 그러면 내가 잘했다고 칭찬하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기 때문이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똥을 보면 참지 못하고 혓바닥으로 핥아서 먹어 야단을 맞는 똥개였다. 요즘은 개의 품종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도 욕정을 참지 못하고 거사를 벌려 새끼들을 주렁주렁 낳는 그런 우리 이웃의 흔한 똥개 중 하나였던 검정색이어서 이름도 검둥이였던 그 개는 쥐약을 먹고 고통스러워하다가 마루 밑에서 죽어 갔다. 죽어 가는 개를 보면서 그 고통을 덜어 주지도 지켜 주지도 못했고, 그 후로는 개를 기르지 않았다.

사람은 사람을 통해서 배우기도 하지만 동물을 통해 배우기도 한다. 개미집에 자세히 내려다보고 있으면 얼마나 열심히 일들을 하고 있는지 땅속이 궁금해서 개미집을 파서 그들의 보금자리를 파괴하기도 했다. 그것은 내게는 순수한 궁금증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재앙이었으리라. 마차 인간 세상에 거인이 나타나 무지막지하게 집들을 부셔버린 것처럼 말이다.

어머니 아버지가 늘 우리를 지켜 줄 줄만 알았다가 이웃 남자에게 부모님이 구타당해 병원에 입원하는 사건 이후 우리 가족도 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엄마들은 화장하고 젊고 이뻤지만, 엄마는 내가 어릴 때부터 치아가 없어 고기를 뜯는다든가 하는 것을 하지 못했다. 그냥 국에 밥 말아 김치 쭉 찢어 얹어서 먹는 것이 가장 많이 본 모습이다. 어릴 땐 동네 노인들이나 어른들을 보면서 나는 저렇게 늙지 않을 거야, 다짐하고는 했다. 그래서 다들 고향을 등지고 도시로 빛을 좇는 나방처럼 몰려들었지만 도시는 시골촌놈인 우리를 반기지 않았고 철저한 경쟁만이 있었다. 엄마가 중풍 맞을 나이가 돼서 내게도 스트로크 증세가 나타났고, 치매에 걸려 돌아가신 아버지 이야기를 하니 의사는 가족력이니 조심하라고 하지만 딱히 조심해야 할 것도 없다.

어제 모임에 갔다가 1여 년간 아팠던 지인의 병에 대해 들었다. 피가 생성되지 않는 병. 사람의 몸은 뼈와 살 그리고 피로 이루어졌는데 피가 생성되지 않다는 얘기에, 어떻게 사는 건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치료하고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이는 그의 모습과 나를 비교한다. 사람이 아프지 않고 행복하고 건강한 날만 계속된다면 그것은 복 받은 삶이다. 하지만 그런 삶은 자극받지 않는 삶이어서 무료할 수 있다. 일을 하지 않아도 쓸 돈을 주체하지 못하는 재산 상속을 받은 사람들을 볼 때, 뭐가 문제야 싶지만 그들은 마약에 손대거나 남들이 하지 않는 스포츠 등을 하다가 삶을 등지는 경우도 많다. 사실 행복도 불행이 있기에 더욱 빛나고 더욱 행복한 건 아닐까. 생로병사 희노애락을 끊고 깨달음을 얻는 것이 불교의 서방정토이기는 하지만 사람들은 희노애락도 생로병사도 끊지 못하고 그 굴레에서 벗어 나지 못하는 삶을 살다가 간다. 진시황제처럼 불사의 몸을 이루기 위해 세상에 진귀한 약재를 모두 먹어도 그는 이미 수천 년 전에 무덤에 갇힌 육체일 뿐이다. 생로병사 희노애락에서 자유롭게 산다는 것은 우리의 정신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몸이 병들어 병원에 누워 있으면 정신은 깨닫는다. 정상적인 삶이 얼마나 축복받은 삶이었는지 말이다. 아무것도 아닌 걷고 뛰는 일이 심장병을 앓는 아이에겐 평생에 꿈이듯이 병원 침상에 누워 있으면 평소에 자기 신체를 돌보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된다. 두 발로 서서 걷고 뛴다는 것은 뒤뚱거리는 덜 개발된 로봇에게는 꿈이자 희망이다.

나는 글을 써서 내 기록을 남기는 것에 행복을 느낀다. 우울하거나 슬프거나 괴로울 때도 글을 쓰다 보면 마음이 치유되는 걸 느낀다. 일기장처럼 아무도 보지 않아도 마음이 편안한데 글을 읽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다면 더욱 뜻깊은 일이 될 수 있다. 생로병사 정해 진 길이지만 어떻게 사느냐는 각자의 노력과 마음에 달렸다. 몸은 생로병사에 빠지지만, 정신만은 영원히 죽지 않는 깨달음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어둠에 빛이 내리듯이 작은 마음 불씨 하나가 평안을 찾는 빛이 되고 작은 물방울들이 모여서 빗줄기가 되어 강물이 되듯 조금씩 조금씩 날마다 이루어 놓은 공부가 깨달음의 씨앗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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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죽거든
아무런 흔적일랑
남기지 말고

자전거 탈 때 넘어지지 않으려
끝없이 밟아온 페달처럼
외줄타기 하듯 살아온 세월일랑
망각 차 한 잔으로 잊고
구름처럼 흘러
민들레 홀씨 되어
먼 길 떠나리니
가는 길에
보랏빛 도라지 꽃밭도
메밀꽃 양탄자도
유채꽃 향기도 지나

꿈꾸듯 잠든 듯
바람 되어.
 







#작가의 변
우리가 나고 살다가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생로병사라고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4고도 이 생로병사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 어머니에게 생애 최고의 고통을 안기고 태어난다. 요즘은 자연 분만이 아닌 제왕 절개 수술을 통해서 아이가 태어나지만, 그래도 고통이 없는 건 아니다. 열 달을 아기 집인 태중에서 아이를 기르고 그것도 모자라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아이를 낳는다. 아이는 자신이 엄마에게 고통을 주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두 팔을 하늘을 향해 뻗으며 힘차고 우렁차게 울음으로 세상에 나왔음을 알린다. 태어나서도 자신의 안위보다는 아이 염려에 늘 안절부절하는 엄마의 손길에서 자라지만 늘 아프고 늘 어딘가 불안한 인격체로 성장하는 것이 인간이다.

내 부모님 경우 3살 4살 어린 나이의 아이들을 7명을 잃었다. 막내 바로 위인 내가 장남이 됐다. 뭐 옛날 황가에서 태어나서 그렇게 되었다면 황위를 물려받을 수도 있었겠지만 내 부모님은 손톱이 다 닳도록 논밭에 다니면서 일만 하다가 돌아가셨다. 나도 평생을 객지로 떠돌며 열심히 살았다고 하지만 돌이켜 보면 잠자는 시간, 아팠던 시간이 꽤 큰 삶의 시간을 차지한다. 내가 아프면 어머니는 부엌이나 장독대에 물을 떠 놓고 빌었던 적이 많다. 병원은 멀고 약국도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감기가 심해져서 폐렴으로 전이가 되어 엑스레이 사진에 폐가 이상하게 보였던 기억도 있다. 건강한 아이로 태어나 들판을 열심히 뛰어다니면서 말썽이란 말썽은 다 피운 것 같지만 실상은 아파서 먹은 익모초나, 두더지 고기가 먹기 싫었지만, 약이니까 눈 딱 감고 먹으라면서 살을 발라 주던 어머니 모습이 떠오른다.

요즘 딸은 늙은 고양이를 봐주느라 친구 집에 출·퇴근한다. 친구가 아시아로 여행을 가면서 고양이 데이케어가 너무 비싸서 고민할 때, 선뜻 “내가 한 달 돌봐 줄게” 했다는 데, 나머지 한 달을 봐주기로 한 다른 친구는 마음을 바꿔 못 봐준다고 하니 딸이 두 달을 모두 봐주기로 했단다. 친구의 집은 상가 2층에 있는 주거지라 많이 시끄럽고 잠자기도 힘들다고 하면서도 친구의 의리로 친구의 고양이를 봐주면서 고양이나 강아지를 좋아하는 마음을 풀었으면 한다.그 고양이는 또 다른 친구가 이사를 가면서 버린 것을 친구가 키우고 있는데 나이가 12살이 넘어 늙은 고양이라 사진에도 늙은 것이 표시가 날 정도이다. 요즘은 애들을 낳지 않아도 애완동물은 기르는 사람들이 많다. 팻그루밍이라고 해서 털도 깎아 주고 미용도 하고 병원도 다니고 애완견이나 고양이의 먹이도 사다 먹이다 보니 비용도 만만치 않게 든다. 아프면 동물 병원에서 수천 불이 그냥 날아가기도 한다. 사람은 의료보험이 있어 돈이 많이 들지 않지만 동물은 청구하는 대로 내야 하니 부담이 많이 된다. 고통받는 것보다는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안락사를 시키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고양이나 개들이 원치 않는 임신을 해서 식구가 늘어나길 원치 않아서 불임 시술을 하기도 하고, 작은 개도 앙칼지게 짖어 대는 경우 이웃에서 불평이 많이 들어 오니 성대 수술을 해서 짖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마치 모든 걸 관장하는 신처럼 인간이 애견 동물을 아끼는 듯 대하지만 사실은 하루 종일 집안에 갇혀 지내거나 평생을 집안에서 갇혀 지내는 감옥과 같은 생활을 한다. 먹이를 주고 가끔 쓰다듬어 주고 이뻐해 주니 고양이도 만족할 거라는 자기 암시를 하면서 말이다.







어떤 유형의 사람은 자신에게 짖지 않고 물지 않는다고 공원에서 개 줄을 풀어 다른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기도 한다. 핏불 같은 싸움 견을 풀어 놓아서 갑자기 등 뒤에서 사나운 개가 짖어 놀랐는데 허허 웃던 개 주인의 얼굴이 잊히지 않는다. 나도 어릴 때 집에서 개를 기른 적이 있다. 내가 기른 게 아니라 어머니가 기른 것이지만 그래도 나를 잘 따르고 어디 나가면 꼭 데리고 나가고 하던, 눈빛까지 검은 검둥이는 성인으로 자라서는 쥐를 잡아 마당에 패대기를 치는 것을 즐겼다. 그러면 내가 잘했다고 칭찬하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기 때문이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똥을 보면 참지 못하고 혓바닥으로 핥아서 먹어 야단을 맞는 똥개였다. 요즘은 개의 품종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도 욕정을 참지 못하고 거사를 벌려 새끼들을 주렁주렁 낳는 그런 우리 이웃의 흔한 똥개 중 하나였던 검정색이어서 이름도 검둥이였던 그 개는 쥐약을 먹고 고통스러워하다가 마루 밑에서 죽어 갔다. 죽어 가는 개를 보면서 그 고통을 덜어 주지도 지켜 주지도 못했고, 그 후로는 개를 기르지 않았다.

사람은 사람을 통해서 배우기도 하지만 동물을 통해 배우기도 한다. 개미집에 자세히 내려다보고 있으면 얼마나 열심히 일들을 하고 있는지 땅속이 궁금해서 개미집을 파서 그들의 보금자리를 파괴하기도 했다. 그것은 내게는 순수한 궁금증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재앙이었으리라. 마차 인간 세상에 거인이 나타나 무지막지하게 집들을 부셔버린 것처럼 말이다.

어머니 아버지가 늘 우리를 지켜 줄 줄만 알았다가 이웃 남자에게 부모님이 구타당해 병원에 입원하는 사건 이후 우리 가족도 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엄마들은 화장하고 젊고 이뻤지만, 엄마는 내가 어릴 때부터 치아가 없어 고기를 뜯는다든가 하는 것을 하지 못했다. 그냥 국에 밥 말아 김치 쭉 찢어 얹어서 먹는 것이 가장 많이 본 모습이다. 어릴 땐 동네 노인들이나 어른들을 보면서 나는 저렇게 늙지 않을 거야, 다짐하고는 했다. 그래서 다들 고향을 등지고 도시로 빛을 좇는 나방처럼 몰려들었지만 도시는 시골촌놈인 우리를 반기지 않았고 철저한 경쟁만이 있었다. 엄마가 중풍 맞을 나이가 돼서 내게도 스트로크 증세가 나타났고, 치매에 걸려 돌아가신 아버지 이야기를 하니 의사는 가족력이니 조심하라고 하지만 딱히 조심해야 할 것도 없다.

어제 모임에 갔다가 1여 년간 아팠던 지인의 병에 대해 들었다. 피가 생성되지 않는 병. 사람의 몸은 뼈와 살 그리고 피로 이루어졌는데 피가 생성되지 않다는 얘기에, 어떻게 사는 건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치료하고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이는 그의 모습과 나를 비교한다. 사람이 아프지 않고 행복하고 건강한 날만 계속된다면 그것은 복 받은 삶이다. 하지만 그런 삶은 자극받지 않는 삶이어서 무료할 수 있다. 일을 하지 않아도 쓸 돈을 주체하지 못하는 재산 상속을 받은 사람들을 볼 때, 뭐가 문제야 싶지만 그들은 마약에 손대거나 남들이 하지 않는 스포츠 등을 하다가 삶을 등지는 경우도 많다. 사실 행복도 불행이 있기에 더욱 빛나고 더욱 행복한 건 아닐까. 생로병사 희노애락을 끊고 깨달음을 얻는 것이 불교의 서방정토이기는 하지만 사람들은 희노애락도 생로병사도 끊지 못하고 그 굴레에서 벗어 나지 못하는 삶을 살다가 간다. 진시황제처럼 불사의 몸을 이루기 위해 세상에 진귀한 약재를 모두 먹어도 그는 이미 수천 년 전에 무덤에 갇힌 육체일 뿐이다. 생로병사 희노애락에서 자유롭게 산다는 것은 우리의 정신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몸이 병들어 병원에 누워 있으면 정신은 깨닫는다. 정상적인 삶이 얼마나 축복받은 삶이었는지 말이다. 아무것도 아닌 걷고 뛰는 일이 심장병을 앓는 아이에겐 평생에 꿈이듯이 병원 침상에 누워 있으면 평소에 자기 신체를 돌보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된다. 두 발로 서서 걷고 뛴다는 것은 뒤뚱거리는 덜 개발된 로봇에게는 꿈이자 희망이다.

나는 글을 써서 내 기록을 남기는 것에 행복을 느낀다. 우울하거나 슬프거나 괴로울 때도 글을 쓰다 보면 마음이 치유되는 걸 느낀다. 일기장처럼 아무도 보지 않아도 마음이 편안한데 글을 읽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다면 더욱 뜻깊은 일이 될 수 있다. 생로병사 정해 진 길이지만 어떻게 사느냐는 각자의 노력과 마음에 달렸다. 몸은 생로병사에 빠지지만, 정신만은 영원히 죽지 않는 깨달음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어둠에 빛이 내리듯이 작은 마음 불씨 하나가 평안을 찾는 빛이 되고 작은 물방울들이 모여서 빗줄기가 되어 강물이 되듯 조금씩 조금씩 날마다 이루어 놓은 공부가 깨달음의 씨앗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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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사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 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 학원에 다니며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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