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139. 신발
[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139. 신발
  • 전재민 시인
  • 승인 2023.11.27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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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될수록 편안한 친구 같고
새것일 땐 고무 향이 좋아
코대고 냄새 맡던
처음 신은 운동화처럼
처음과 끝을 함께할
신발 같은 친구 있으면 좋겠네.

발가락이 편안하듯
옹기종기 처마 밑에
모여 앉아 생각 없는
웃음 짓던 동무들
신발 속에 친구들이 놀다 가듯
가지런한 발가락.
 







#작가의 변
사람들이 줄 서서 기다리는 모습에 그들의 신발을 유심히 보게 됐다. 다양한 신발들을 보았다. 그중엔 대부분이 유명브랜드 신발이었으며 가죽으로 된 신발은 보기 힘들었다. 대부분 석유화학제품으로 만든 플라스틱 제품의 신발, 신발만 아니라 옷도 플라스틱으로 만들어 내는 옷이 대부분인 요즘, 플라스틱의 공포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플라스틱이 없었다면 인류가 모두 신발을 이렇게 신고 다닐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물론 지금도 플라스틱으로 만든 인조가죽의 신발이지만 명품 신발의 가격은 무척이나 비싸다. 사람은 꼭 필요한 것이 있다. 먹는 것과 입는 것 그리고 잠을 잘 수 있는 주택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두 신발을 제대로 신고 다닐 수 있었던 것은 불과 100년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내 할아버지나 아버지, 어머니도 신발을 제대로 신지 못하고 다닌 시절이 있었다. 짚신은 볏짚을 꼬아서 만들 신발인데 여름에 비가 오면 버선이 다 젖었을 것이다. 버선이라도 제대로 신고 다닌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비가 오면 다 젖고, 추운 겨울엔 추위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는 짚신. 사대부나 궁궐에서 사는 사람들은 가죽으로 만든 신발을 신고 다니고, 꽃신을 신고 시집을 가기도 했겠지만, 서민은 짚신을 신고 다녔다. 멀리 가려면 짚신 꾸러미를 봇짐에 매달고 다녔다. 내 어린 시절만 하더라도 짚신은 아니지만 타이어 고무로 만든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잘 벗겨지고 겨울엔 발이 시렸다. 그래서 겨울에 털신을 신고 다녔다. 고무신에 털을 신발 목에 댄 신발로 고무신보다는 훨씬 따뜻했다. 지금이야 목이 긴 부츠를 신고 다니는 사람들도 많으니, 털신이 따뜻하다고 하는 감을 모르는 이도 많을 것이다.

플라스틱이 흔하지 않던 시기엔 대부분이 짚으로 엮어서 만든 것이었다. 삼태기라고 농산물을 담거나 아궁이의 재를 퍼 나르거나 하는 용도로 쓰였다. 그리고 허리춤에 달고 다니던 짚으로 엮은 바구니나 망태기 짚으로 만든 방석, 멍석, 그리고 수수를 털고 그것으로 만든 빗자루, 사리대로 만든 빗자루, 짚으로 엮어 올린 지붕 이엉, 박을 키워서 만든 바가지, 똬리, 캐첩캔으로 만든 두레박, 기름 양철통으로 만든 물지게 물통, 쟁기와 소 입에 씌우는 주둥망, 나무를 깎아 만드는 코뚜레. 이젠 그 이름도 생소한 쓰지 않는 이름들이 대부분이고 플라스틱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들이 많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땐 옷이 없어서 장롱에 넣을 것도 없었다. 속옷이 없이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단벌 바지를 입고, 추운 겨울에 다리는 꽁꽁 얼고 ‘고추’가 쪼그라들어 안 보인다고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우리의 부엌은 구들을 놓아 아궁이에서 불을 피우는 구조라 방바닥이 따듯하긴 하지만 시간이 지나 새벽이 되면 추워진다. 게다가 방문 틈과 창호지 얇은 숨골로 찬바람이 방안으로 밀려들면 가족이 함께 덮던 이불로는 추위를 이기기도 힘들었다.

지금은 플라스틱으로 만든 이불과 옷, 신발 등 넘쳐나는 물건들, 창호지보다 두꺼운 유리창에다가 보일러가 돌아가 늘 따뜻함에도 추위를 더 많이 타게 된다. 두꺼운 오리털 잠바를 입고도 춥다고 한다. 양말도 부족해 명절에나 한 켤레 받으면 새것이라고 그리 좋았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은 모든 게 그 당시보다는 풍족하다. 플라스틱의 혜택이다. 프라스틱이 없고 가족만으로 신을 만들어 신는다면 모두가 다 가죽 신을 신지도 못할 뿐더라 가격도 만만하지 않았을 거다. 옷도 그렇다. 플라스틱이 없었다면 솜을 만드는 목화가 많이 생산되어야 하는데 인류는 아직도 헐벗고 못 입은 사람들 천지일 것 같다. 추위에 떠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은 물론이다. 전기가 없던 시절이었으니 당연히 전기를 쓰는 문화용품인 TV, 컴퓨터, 휴대전화 등 우리가 늘 우리 신체의 일부처럼 쓰면서 생활하고 있는 것들이 없던 황당한 세상에 우린 불과 50, 60년 전에 살고 있었다. 세탁기가 빨래를 해주기 전엔 개울에 나가서 빨래해야 했다. 내가 군 생활을 하던 때에도 부대엔 짤순이밖에 없어서 추운 겨울 빨래 비누가 잘 먹히지도 않는 찬물로 빨래하고 건조대에 널면 얼어서 뻣뻣해지기 일쑤였다.

분명 우린 100년 이래 아주 많은 변화를 겪는 세상에 살고 있다. 물론 2천년대생들은 낳자마자 셀폰과 티브는 물론 세탁기 등 모든 게 다 갖추어진 세상을 살았겠지만 지금도 개발도상국이나 저개발국은 내가 어린 시절에 겪은 상황과 비슷하게 생활하는 사람들도 분명있다.







모두가 밥을 먹는 것을 걱정해서 밥먹었냐고 인사하던 시절도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렇게 먼 옛날이야기도 아니다. 나의 아버지 세대는 더 어려운 식민지 시대와 전쟁을 겪으면서 살다가 갔지만 검정 고무신의 추억이 아직도 뇌리에 깊이 박혀있는 나로서는 유명브랜드나 너무 사치스러운 신발은 사실 부담이 간다. 신발은 발이 편해야 하고 발이 따스하면 된다. 하지만 요즘엔 멋으로 신발을 신는 경우도 많다. 옷도 마찬가지다. 옷이 따뜻해야 한다는 전제는 옛말. 이젠 멋스러움을 원해서 추운 날에도 짧은 스커트나 레깅스를 입는 젊은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면 분명 옷이 따뜻하거나 여름에 시원한 기능성만을 추구하지는 않는 것 같다.

군에 입대하고 옷을 주고 속옷과 신발을 주는데 군복은 대충 맞았다. 하지만 발 볼이 넓은 내가 신발이 작아서 안들어간다고 하니 아주 항공모함 사이즈인 11을 줘서 신었는데, 이건 신발을 끌고 다닌다는 게 맞는 표현으로 그런 신발을 신고 뛰고 총검술하고 그러니 체력 소모도 더 크고 피로도도 더 심했었다. 팬티는 까칠까칠해서 쓸려 알러지처럼 피부 트러블이 일기도 했다. 지금도 볼이 넓은 신발을 사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볼이 넓고 맞는 사이즈를 신으면 발이 정말 편안함을 느낀다. 그리고 신던 신발은 정말이지 더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분명 우리 세대가 지나고 나면 멍석이나 삼태기 망태기같은 언어는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 날 것이다. 그리고 컴퓨터게임과 관련된 신조어가 등장하듯이 많은 신조어가 또 등장할 것이다. 컴퓨터게임을 할 때 마음의 안정을 찾는 세대처럼 말이다.

짚, 왕겨, 당겨, 소꼴, 콩깍지, 디딜방아, 두레박, 물지게, 물동이, 똬리, 지게, 소쿠리, 답사리, 박바가지 같은 단어들이 이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듯이, 사람들이 신지 않는 고무신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리라. 지금은 역사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짚신처럼 말이다. 제사를 지내고 먹는 헛제삿밥이 한때 식당에서도 파는 음식이었다. 제사를 지내지 않아도 어릴 때 먹던 제삿밥이 그리운 마음이었는지 모른다. 두부와 동태, 무로 끓인 탕국이나 소금에 절여 쪄낸 조기 같은 제사음식도 제사를 지내지 않는 가정이 늘어나면서 점점 사라지는 음식이 되어 가고 있다. 어릴 때 그렇게 먹고 싶었던 제사상에 올라간 빨갛고 녹색이 나는 과자나 밤과자, 대추과자, 산자 등의 과자도 점점 잊혀지는 음식이 되듯이 말이다. 특히 외국에 이민 생활을 하는 우리는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떠나면 우리 아이들은 다른 백인들처럼 살아가진 않을까 하고 말이다.

먼 인생을 살아 가면서 우리가 신어야 할 신은 과연 무엇일까? 유명브랜드일까? 발이 편안한 신발일까? 사람들은 점점 높은 곳만을 쳐다보면서 동물과 식물도 하는 종족 번식의 기본도 하지 않는 경우가 늘고 있다. 그리고 어려운 환경에서 힘들게 키워도 고마워하지 않는 자녀도 늘어 간다. 아니 어려운 환경에서 왜 아이를 낳았냐고 원망하기도 한다. 저승 가는 데 노잣돈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 낸 관혼상제 때문이지 사실 자연적이라면 아무런 것도 필요 없다. 저승 가는 데 필요한 것은 모든 걸 비우고 편안하게 떠나는 마음 아닐까. 유명 브랜드를 천국에서도 알아줄 것 같지 않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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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될수록 편안한 친구 같고
새것일 땐 고무 향이 좋아
코대고 냄새 맡던
처음 신은 운동화처럼
처음과 끝을 함께할
신발 같은 친구 있으면 좋겠네.

발가락이 편안하듯
옹기종기 처마 밑에
모여 앉아 생각 없는
웃음 짓던 동무들
신발 속에 친구들이 놀다 가듯
가지런한 발가락.
 





 

오래될수록 편안한 친구 같고
새것일 땐 고무 향이 좋아
코대고 냄새 맡던
처음 신은 운동화처럼
처음과 끝을 함께할
신발 같은 친구 있으면 좋겠네.

발가락이 편안하듯
옹기종기 처마 밑에
모여 앉아 생각 없는
웃음 짓던 동무들
신발 속에 친구들이 놀다 가듯
가지런한 발가락.
 







#작가의 변
사람들이 줄 서서 기다리는 모습에 그들의 신발을 유심히 보게 됐다. 다양한 신발들을 보았다. 그중엔 대부분이 유명브랜드 신발이었으며 가죽으로 된 신발은 보기 힘들었다. 대부분 석유화학제품으로 만든 플라스틱 제품의 신발, 신발만 아니라 옷도 플라스틱으로 만들어 내는 옷이 대부분인 요즘, 플라스틱의 공포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플라스틱이 없었다면 인류가 모두 신발을 이렇게 신고 다닐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물론 지금도 플라스틱으로 만든 인조가죽의 신발이지만 명품 신발의 가격은 무척이나 비싸다. 사람은 꼭 필요한 것이 있다. 먹는 것과 입는 것 그리고 잠을 잘 수 있는 주택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두 신발을 제대로 신고 다닐 수 있었던 것은 불과 100년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내 할아버지나 아버지, 어머니도 신발을 제대로 신지 못하고 다닌 시절이 있었다. 짚신은 볏짚을 꼬아서 만들 신발인데 여름에 비가 오면 버선이 다 젖었을 것이다. 버선이라도 제대로 신고 다닌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비가 오면 다 젖고, 추운 겨울엔 추위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는 짚신. 사대부나 궁궐에서 사는 사람들은 가죽으로 만든 신발을 신고 다니고, 꽃신을 신고 시집을 가기도 했겠지만, 서민은 짚신을 신고 다녔다. 멀리 가려면 짚신 꾸러미를 봇짐에 매달고 다녔다. 내 어린 시절만 하더라도 짚신은 아니지만 타이어 고무로 만든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잘 벗겨지고 겨울엔 발이 시렸다. 그래서 겨울에 털신을 신고 다녔다. 고무신에 털을 신발 목에 댄 신발로 고무신보다는 훨씬 따뜻했다. 지금이야 목이 긴 부츠를 신고 다니는 사람들도 많으니, 털신이 따뜻하다고 하는 감을 모르는 이도 많을 것이다.

플라스틱이 흔하지 않던 시기엔 대부분이 짚으로 엮어서 만든 것이었다. 삼태기라고 농산물을 담거나 아궁이의 재를 퍼 나르거나 하는 용도로 쓰였다. 그리고 허리춤에 달고 다니던 짚으로 엮은 바구니나 망태기 짚으로 만든 방석, 멍석, 그리고 수수를 털고 그것으로 만든 빗자루, 사리대로 만든 빗자루, 짚으로 엮어 올린 지붕 이엉, 박을 키워서 만든 바가지, 똬리, 캐첩캔으로 만든 두레박, 기름 양철통으로 만든 물지게 물통, 쟁기와 소 입에 씌우는 주둥망, 나무를 깎아 만드는 코뚜레. 이젠 그 이름도 생소한 쓰지 않는 이름들이 대부분이고 플라스틱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들이 많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땐 옷이 없어서 장롱에 넣을 것도 없었다. 속옷이 없이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단벌 바지를 입고, 추운 겨울에 다리는 꽁꽁 얼고 ‘고추’가 쪼그라들어 안 보인다고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우리의 부엌은 구들을 놓아 아궁이에서 불을 피우는 구조라 방바닥이 따듯하긴 하지만 시간이 지나 새벽이 되면 추워진다. 게다가 방문 틈과 창호지 얇은 숨골로 찬바람이 방안으로 밀려들면 가족이 함께 덮던 이불로는 추위를 이기기도 힘들었다.

지금은 플라스틱으로 만든 이불과 옷, 신발 등 넘쳐나는 물건들, 창호지보다 두꺼운 유리창에다가 보일러가 돌아가 늘 따뜻함에도 추위를 더 많이 타게 된다. 두꺼운 오리털 잠바를 입고도 춥다고 한다. 양말도 부족해 명절에나 한 켤레 받으면 새것이라고 그리 좋았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은 모든 게 그 당시보다는 풍족하다. 플라스틱의 혜택이다. 프라스틱이 없고 가족만으로 신을 만들어 신는다면 모두가 다 가죽 신을 신지도 못할 뿐더라 가격도 만만하지 않았을 거다. 옷도 그렇다. 플라스틱이 없었다면 솜을 만드는 목화가 많이 생산되어야 하는데 인류는 아직도 헐벗고 못 입은 사람들 천지일 것 같다. 추위에 떠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은 물론이다. 전기가 없던 시절이었으니 당연히 전기를 쓰는 문화용품인 TV, 컴퓨터, 휴대전화 등 우리가 늘 우리 신체의 일부처럼 쓰면서 생활하고 있는 것들이 없던 황당한 세상에 우린 불과 50, 60년 전에 살고 있었다. 세탁기가 빨래를 해주기 전엔 개울에 나가서 빨래해야 했다. 내가 군 생활을 하던 때에도 부대엔 짤순이밖에 없어서 추운 겨울 빨래 비누가 잘 먹히지도 않는 찬물로 빨래하고 건조대에 널면 얼어서 뻣뻣해지기 일쑤였다.

분명 우린 100년 이래 아주 많은 변화를 겪는 세상에 살고 있다. 물론 2천년대생들은 낳자마자 셀폰과 티브는 물론 세탁기 등 모든 게 다 갖추어진 세상을 살았겠지만 지금도 개발도상국이나 저개발국은 내가 어린 시절에 겪은 상황과 비슷하게 생활하는 사람들도 분명있다.







모두가 밥을 먹는 것을 걱정해서 밥먹었냐고 인사하던 시절도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렇게 먼 옛날이야기도 아니다. 나의 아버지 세대는 더 어려운 식민지 시대와 전쟁을 겪으면서 살다가 갔지만 검정 고무신의 추억이 아직도 뇌리에 깊이 박혀있는 나로서는 유명브랜드나 너무 사치스러운 신발은 사실 부담이 간다. 신발은 발이 편해야 하고 발이 따스하면 된다. 하지만 요즘엔 멋으로 신발을 신는 경우도 많다. 옷도 마찬가지다. 옷이 따뜻해야 한다는 전제는 옛말. 이젠 멋스러움을 원해서 추운 날에도 짧은 스커트나 레깅스를 입는 젊은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면 분명 옷이 따뜻하거나 여름에 시원한 기능성만을 추구하지는 않는 것 같다.

군에 입대하고 옷을 주고 속옷과 신발을 주는데 군복은 대충 맞았다. 하지만 발 볼이 넓은 내가 신발이 작아서 안들어간다고 하니 아주 항공모함 사이즈인 11을 줘서 신었는데, 이건 신발을 끌고 다닌다는 게 맞는 표현으로 그런 신발을 신고 뛰고 총검술하고 그러니 체력 소모도 더 크고 피로도도 더 심했었다. 팬티는 까칠까칠해서 쓸려 알러지처럼 피부 트러블이 일기도 했다. 지금도 볼이 넓은 신발을 사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볼이 넓고 맞는 사이즈를 신으면 발이 정말 편안함을 느낀다. 그리고 신던 신발은 정말이지 더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분명 우리 세대가 지나고 나면 멍석이나 삼태기 망태기같은 언어는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 날 것이다. 그리고 컴퓨터게임과 관련된 신조어가 등장하듯이 많은 신조어가 또 등장할 것이다. 컴퓨터게임을 할 때 마음의 안정을 찾는 세대처럼 말이다.

짚, 왕겨, 당겨, 소꼴, 콩깍지, 디딜방아, 두레박, 물지게, 물동이, 똬리, 지게, 소쿠리, 답사리, 박바가지 같은 단어들이 이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듯이, 사람들이 신지 않는 고무신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리라. 지금은 역사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짚신처럼 말이다. 제사를 지내고 먹는 헛제삿밥이 한때 식당에서도 파는 음식이었다. 제사를 지내지 않아도 어릴 때 먹던 제삿밥이 그리운 마음이었는지 모른다. 두부와 동태, 무로 끓인 탕국이나 소금에 절여 쪄낸 조기 같은 제사음식도 제사를 지내지 않는 가정이 늘어나면서 점점 사라지는 음식이 되어 가고 있다. 어릴 때 그렇게 먹고 싶었던 제사상에 올라간 빨갛고 녹색이 나는 과자나 밤과자, 대추과자, 산자 등의 과자도 점점 잊혀지는 음식이 되듯이 말이다. 특히 외국에 이민 생활을 하는 우리는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떠나면 우리 아이들은 다른 백인들처럼 살아가진 않을까 하고 말이다.

먼 인생을 살아 가면서 우리가 신어야 할 신은 과연 무엇일까? 유명브랜드일까? 발이 편안한 신발일까? 사람들은 점점 높은 곳만을 쳐다보면서 동물과 식물도 하는 종족 번식의 기본도 하지 않는 경우가 늘고 있다. 그리고 어려운 환경에서 힘들게 키워도 고마워하지 않는 자녀도 늘어 간다. 아니 어려운 환경에서 왜 아이를 낳았냐고 원망하기도 한다. 저승 가는 데 노잣돈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 낸 관혼상제 때문이지 사실 자연적이라면 아무런 것도 필요 없다. 저승 가는 데 필요한 것은 모든 걸 비우고 편안하게 떠나는 마음 아닐까. 유명 브랜드를 천국에서도 알아줄 것 같지 않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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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변
사람들이 줄 서서 기다리는 모습에 그들의 신발을 유심히 보게 됐다. 다양한 신발들을 보았다. 그중엔 대부분이 유명브랜드 신발이었으며 가죽으로 된 신발은 보기 힘들었다. 대부분 석유화학제품으로 만든 플라스틱 제품의 신발, 신발만 아니라 옷도 플라스틱으로 만들어 내는 옷이 대부분인 요즘, 플라스틱의 공포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플라스틱이 없었다면 인류가 모두 신발을 이렇게 신고 다닐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물론 지금도 플라스틱으로 만든 인조가죽의 신발이지만 명품 신발의 가격은 무척이나 비싸다. 사람은 꼭 필요한 것이 있다. 먹는 것과 입는 것 그리고 잠을 잘 수 있는 주택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두 신발을 제대로 신고 다닐 수 있었던 것은 불과 100년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내 할아버지나 아버지, 어머니도 신발을 제대로 신지 못하고 다닌 시절이 있었다. 짚신은 볏짚을 꼬아서 만들 신발인데 여름에 비가 오면 버선이 다 젖었을 것이다. 버선이라도 제대로 신고 다닌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비가 오면 다 젖고, 추운 겨울엔 추위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는 짚신. 사대부나 궁궐에서 사는 사람들은 가죽으로 만든 신발을 신고 다니고, 꽃신을 신고 시집을 가기도 했겠지만, 서민은 짚신을 신고 다녔다. 멀리 가려면 짚신 꾸러미를 봇짐에 매달고 다녔다. 내 어린 시절만 하더라도 짚신은 아니지만 타이어 고무로 만든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잘 벗겨지고 겨울엔 발이 시렸다. 그래서 겨울에 털신을 신고 다녔다. 고무신에 털을 신발 목에 댄 신발로 고무신보다는 훨씬 따뜻했다. 지금이야 목이 긴 부츠를 신고 다니는 사람들도 많으니, 털신이 따뜻하다고 하는 감을 모르는 이도 많을 것이다.

플라스틱이 흔하지 않던 시기엔 대부분이 짚으로 엮어서 만든 것이었다. 삼태기라고 농산물을 담거나 아궁이의 재를 퍼 나르거나 하는 용도로 쓰였다. 그리고 허리춤에 달고 다니던 짚으로 엮은 바구니나 망태기 짚으로 만든 방석, 멍석, 그리고 수수를 털고 그것으로 만든 빗자루, 사리대로 만든 빗자루, 짚으로 엮어 올린 지붕 이엉, 박을 키워서 만든 바가지, 똬리, 캐첩캔으로 만든 두레박, 기름 양철통으로 만든 물지게 물통, 쟁기와 소 입에 씌우는 주둥망, 나무를 깎아 만드는 코뚜레. 이젠 그 이름도 생소한 쓰지 않는 이름들이 대부분이고 플라스틱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들이 많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땐 옷이 없어서 장롱에 넣을 것도 없었다. 속옷이 없이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단벌 바지를 입고, 추운 겨울에 다리는 꽁꽁 얼고 ‘고추’가 쪼그라들어 안 보인다고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우리의 부엌은 구들을 놓아 아궁이에서 불을 피우는 구조라 방바닥이 따듯하긴 하지만 시간이 지나 새벽이 되면 추워진다. 게다가 방문 틈과 창호지 얇은 숨골로 찬바람이 방안으로 밀려들면 가족이 함께 덮던 이불로는 추위를 이기기도 힘들었다.

지금은 플라스틱으로 만든 이불과 옷, 신발 등 넘쳐나는 물건들, 창호지보다 두꺼운 유리창에다가 보일러가 돌아가 늘 따뜻함에도 추위를 더 많이 타게 된다. 두꺼운 오리털 잠바를 입고도 춥다고 한다. 양말도 부족해 명절에나 한 켤레 받으면 새것이라고 그리 좋았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은 모든 게 그 당시보다는 풍족하다. 플라스틱의 혜택이다. 프라스틱이 없고 가족만으로 신을 만들어 신는다면 모두가 다 가죽 신을 신지도 못할 뿐더라 가격도 만만하지 않았을 거다. 옷도 그렇다. 플라스틱이 없었다면 솜을 만드는 목화가 많이 생산되어야 하는데 인류는 아직도 헐벗고 못 입은 사람들 천지일 것 같다. 추위에 떠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은 물론이다. 전기가 없던 시절이었으니 당연히 전기를 쓰는 문화용품인 TV, 컴퓨터, 휴대전화 등 우리가 늘 우리 신체의 일부처럼 쓰면서 생활하고 있는 것들이 없던 황당한 세상에 우린 불과 50, 60년 전에 살고 있었다. 세탁기가 빨래를 해주기 전엔 개울에 나가서 빨래해야 했다. 내가 군 생활을 하던 때에도 부대엔 짤순이밖에 없어서 추운 겨울 빨래 비누가 잘 먹히지도 않는 찬물로 빨래하고 건조대에 널면 얼어서 뻣뻣해지기 일쑤였다.

분명 우린 100년 이래 아주 많은 변화를 겪는 세상에 살고 있다. 물론 2천년대생들은 낳자마자 셀폰과 티브는 물론 세탁기 등 모든 게 다 갖추어진 세상을 살았겠지만 지금도 개발도상국이나 저개발국은 내가 어린 시절에 겪은 상황과 비슷하게 생활하는 사람들도 분명있다.





 

오래될수록 편안한 친구 같고
새것일 땐 고무 향이 좋아
코대고 냄새 맡던
처음 신은 운동화처럼
처음과 끝을 함께할
신발 같은 친구 있으면 좋겠네.

발가락이 편안하듯
옹기종기 처마 밑에
모여 앉아 생각 없는
웃음 짓던 동무들
신발 속에 친구들이 놀다 가듯
가지런한 발가락.
 







#작가의 변
사람들이 줄 서서 기다리는 모습에 그들의 신발을 유심히 보게 됐다. 다양한 신발들을 보았다. 그중엔 대부분이 유명브랜드 신발이었으며 가죽으로 된 신발은 보기 힘들었다. 대부분 석유화학제품으로 만든 플라스틱 제품의 신발, 신발만 아니라 옷도 플라스틱으로 만들어 내는 옷이 대부분인 요즘, 플라스틱의 공포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플라스틱이 없었다면 인류가 모두 신발을 이렇게 신고 다닐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물론 지금도 플라스틱으로 만든 인조가죽의 신발이지만 명품 신발의 가격은 무척이나 비싸다. 사람은 꼭 필요한 것이 있다. 먹는 것과 입는 것 그리고 잠을 잘 수 있는 주택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두 신발을 제대로 신고 다닐 수 있었던 것은 불과 100년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내 할아버지나 아버지, 어머니도 신발을 제대로 신지 못하고 다닌 시절이 있었다. 짚신은 볏짚을 꼬아서 만들 신발인데 여름에 비가 오면 버선이 다 젖었을 것이다. 버선이라도 제대로 신고 다닌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비가 오면 다 젖고, 추운 겨울엔 추위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는 짚신. 사대부나 궁궐에서 사는 사람들은 가죽으로 만든 신발을 신고 다니고, 꽃신을 신고 시집을 가기도 했겠지만, 서민은 짚신을 신고 다녔다. 멀리 가려면 짚신 꾸러미를 봇짐에 매달고 다녔다. 내 어린 시절만 하더라도 짚신은 아니지만 타이어 고무로 만든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잘 벗겨지고 겨울엔 발이 시렸다. 그래서 겨울에 털신을 신고 다녔다. 고무신에 털을 신발 목에 댄 신발로 고무신보다는 훨씬 따뜻했다. 지금이야 목이 긴 부츠를 신고 다니는 사람들도 많으니, 털신이 따뜻하다고 하는 감을 모르는 이도 많을 것이다.

플라스틱이 흔하지 않던 시기엔 대부분이 짚으로 엮어서 만든 것이었다. 삼태기라고 농산물을 담거나 아궁이의 재를 퍼 나르거나 하는 용도로 쓰였다. 그리고 허리춤에 달고 다니던 짚으로 엮은 바구니나 망태기 짚으로 만든 방석, 멍석, 그리고 수수를 털고 그것으로 만든 빗자루, 사리대로 만든 빗자루, 짚으로 엮어 올린 지붕 이엉, 박을 키워서 만든 바가지, 똬리, 캐첩캔으로 만든 두레박, 기름 양철통으로 만든 물지게 물통, 쟁기와 소 입에 씌우는 주둥망, 나무를 깎아 만드는 코뚜레. 이젠 그 이름도 생소한 쓰지 않는 이름들이 대부분이고 플라스틱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들이 많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땐 옷이 없어서 장롱에 넣을 것도 없었다. 속옷이 없이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단벌 바지를 입고, 추운 겨울에 다리는 꽁꽁 얼고 ‘고추’가 쪼그라들어 안 보인다고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우리의 부엌은 구들을 놓아 아궁이에서 불을 피우는 구조라 방바닥이 따듯하긴 하지만 시간이 지나 새벽이 되면 추워진다. 게다가 방문 틈과 창호지 얇은 숨골로 찬바람이 방안으로 밀려들면 가족이 함께 덮던 이불로는 추위를 이기기도 힘들었다.

지금은 플라스틱으로 만든 이불과 옷, 신발 등 넘쳐나는 물건들, 창호지보다 두꺼운 유리창에다가 보일러가 돌아가 늘 따뜻함에도 추위를 더 많이 타게 된다. 두꺼운 오리털 잠바를 입고도 춥다고 한다. 양말도 부족해 명절에나 한 켤레 받으면 새것이라고 그리 좋았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은 모든 게 그 당시보다는 풍족하다. 플라스틱의 혜택이다. 프라스틱이 없고 가족만으로 신을 만들어 신는다면 모두가 다 가죽 신을 신지도 못할 뿐더라 가격도 만만하지 않았을 거다. 옷도 그렇다. 플라스틱이 없었다면 솜을 만드는 목화가 많이 생산되어야 하는데 인류는 아직도 헐벗고 못 입은 사람들 천지일 것 같다. 추위에 떠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은 물론이다. 전기가 없던 시절이었으니 당연히 전기를 쓰는 문화용품인 TV, 컴퓨터, 휴대전화 등 우리가 늘 우리 신체의 일부처럼 쓰면서 생활하고 있는 것들이 없던 황당한 세상에 우린 불과 50, 60년 전에 살고 있었다. 세탁기가 빨래를 해주기 전엔 개울에 나가서 빨래해야 했다. 내가 군 생활을 하던 때에도 부대엔 짤순이밖에 없어서 추운 겨울 빨래 비누가 잘 먹히지도 않는 찬물로 빨래하고 건조대에 널면 얼어서 뻣뻣해지기 일쑤였다.

분명 우린 100년 이래 아주 많은 변화를 겪는 세상에 살고 있다. 물론 2천년대생들은 낳자마자 셀폰과 티브는 물론 세탁기 등 모든 게 다 갖추어진 세상을 살았겠지만 지금도 개발도상국이나 저개발국은 내가 어린 시절에 겪은 상황과 비슷하게 생활하는 사람들도 분명있다.







모두가 밥을 먹는 것을 걱정해서 밥먹었냐고 인사하던 시절도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렇게 먼 옛날이야기도 아니다. 나의 아버지 세대는 더 어려운 식민지 시대와 전쟁을 겪으면서 살다가 갔지만 검정 고무신의 추억이 아직도 뇌리에 깊이 박혀있는 나로서는 유명브랜드나 너무 사치스러운 신발은 사실 부담이 간다. 신발은 발이 편해야 하고 발이 따스하면 된다. 하지만 요즘엔 멋으로 신발을 신는 경우도 많다. 옷도 마찬가지다. 옷이 따뜻해야 한다는 전제는 옛말. 이젠 멋스러움을 원해서 추운 날에도 짧은 스커트나 레깅스를 입는 젊은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면 분명 옷이 따뜻하거나 여름에 시원한 기능성만을 추구하지는 않는 것 같다.

군에 입대하고 옷을 주고 속옷과 신발을 주는데 군복은 대충 맞았다. 하지만 발 볼이 넓은 내가 신발이 작아서 안들어간다고 하니 아주 항공모함 사이즈인 11을 줘서 신었는데, 이건 신발을 끌고 다닌다는 게 맞는 표현으로 그런 신발을 신고 뛰고 총검술하고 그러니 체력 소모도 더 크고 피로도도 더 심했었다. 팬티는 까칠까칠해서 쓸려 알러지처럼 피부 트러블이 일기도 했다. 지금도 볼이 넓은 신발을 사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볼이 넓고 맞는 사이즈를 신으면 발이 정말 편안함을 느낀다. 그리고 신던 신발은 정말이지 더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분명 우리 세대가 지나고 나면 멍석이나 삼태기 망태기같은 언어는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 날 것이다. 그리고 컴퓨터게임과 관련된 신조어가 등장하듯이 많은 신조어가 또 등장할 것이다. 컴퓨터게임을 할 때 마음의 안정을 찾는 세대처럼 말이다.

짚, 왕겨, 당겨, 소꼴, 콩깍지, 디딜방아, 두레박, 물지게, 물동이, 똬리, 지게, 소쿠리, 답사리, 박바가지 같은 단어들이 이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듯이, 사람들이 신지 않는 고무신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리라. 지금은 역사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짚신처럼 말이다. 제사를 지내고 먹는 헛제삿밥이 한때 식당에서도 파는 음식이었다. 제사를 지내지 않아도 어릴 때 먹던 제삿밥이 그리운 마음이었는지 모른다. 두부와 동태, 무로 끓인 탕국이나 소금에 절여 쪄낸 조기 같은 제사음식도 제사를 지내지 않는 가정이 늘어나면서 점점 사라지는 음식이 되어 가고 있다. 어릴 때 그렇게 먹고 싶었던 제사상에 올라간 빨갛고 녹색이 나는 과자나 밤과자, 대추과자, 산자 등의 과자도 점점 잊혀지는 음식이 되듯이 말이다. 특히 외국에 이민 생활을 하는 우리는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떠나면 우리 아이들은 다른 백인들처럼 살아가진 않을까 하고 말이다.

먼 인생을 살아 가면서 우리가 신어야 할 신은 과연 무엇일까? 유명브랜드일까? 발이 편안한 신발일까? 사람들은 점점 높은 곳만을 쳐다보면서 동물과 식물도 하는 종족 번식의 기본도 하지 않는 경우가 늘고 있다. 그리고 어려운 환경에서 힘들게 키워도 고마워하지 않는 자녀도 늘어 간다. 아니 어려운 환경에서 왜 아이를 낳았냐고 원망하기도 한다. 저승 가는 데 노잣돈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 낸 관혼상제 때문이지 사실 자연적이라면 아무런 것도 필요 없다. 저승 가는 데 필요한 것은 모든 걸 비우고 편안하게 떠나는 마음 아닐까. 유명 브랜드를 천국에서도 알아줄 것 같지 않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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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밥을 먹는 것을 걱정해서 밥먹었냐고 인사하던 시절도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렇게 먼 옛날이야기도 아니다. 나의 아버지 세대는 더 어려운 식민지 시대와 전쟁을 겪으면서 살다가 갔지만 검정 고무신의 추억이 아직도 뇌리에 깊이 박혀있는 나로서는 유명브랜드나 너무 사치스러운 신발은 사실 부담이 간다. 신발은 발이 편해야 하고 발이 따스하면 된다. 하지만 요즘엔 멋으로 신발을 신는 경우도 많다. 옷도 마찬가지다. 옷이 따뜻해야 한다는 전제는 옛말. 이젠 멋스러움을 원해서 추운 날에도 짧은 스커트나 레깅스를 입는 젊은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면 분명 옷이 따뜻하거나 여름에 시원한 기능성만을 추구하지는 않는 것 같다.

군에 입대하고 옷을 주고 속옷과 신발을 주는데 군복은 대충 맞았다. 하지만 발 볼이 넓은 내가 신발이 작아서 안들어간다고 하니 아주 항공모함 사이즈인 11을 줘서 신었는데, 이건 신발을 끌고 다닌다는 게 맞는 표현으로 그런 신발을 신고 뛰고 총검술하고 그러니 체력 소모도 더 크고 피로도도 더 심했었다. 팬티는 까칠까칠해서 쓸려 알러지처럼 피부 트러블이 일기도 했다. 지금도 볼이 넓은 신발을 사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볼이 넓고 맞는 사이즈를 신으면 발이 정말 편안함을 느낀다. 그리고 신던 신발은 정말이지 더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분명 우리 세대가 지나고 나면 멍석이나 삼태기 망태기같은 언어는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 날 것이다. 그리고 컴퓨터게임과 관련된 신조어가 등장하듯이 많은 신조어가 또 등장할 것이다. 컴퓨터게임을 할 때 마음의 안정을 찾는 세대처럼 말이다.

짚, 왕겨, 당겨, 소꼴, 콩깍지, 디딜방아, 두레박, 물지게, 물동이, 똬리, 지게, 소쿠리, 답사리, 박바가지 같은 단어들이 이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듯이, 사람들이 신지 않는 고무신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리라. 지금은 역사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짚신처럼 말이다. 제사를 지내고 먹는 헛제삿밥이 한때 식당에서도 파는 음식이었다. 제사를 지내지 않아도 어릴 때 먹던 제삿밥이 그리운 마음이었는지 모른다. 두부와 동태, 무로 끓인 탕국이나 소금에 절여 쪄낸 조기 같은 제사음식도 제사를 지내지 않는 가정이 늘어나면서 점점 사라지는 음식이 되어 가고 있다. 어릴 때 그렇게 먹고 싶었던 제사상에 올라간 빨갛고 녹색이 나는 과자나 밤과자, 대추과자, 산자 등의 과자도 점점 잊혀지는 음식이 되듯이 말이다. 특히 외국에 이민 생활을 하는 우리는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떠나면 우리 아이들은 다른 백인들처럼 살아가진 않을까 하고 말이다.

먼 인생을 살아 가면서 우리가 신어야 할 신은 과연 무엇일까? 유명브랜드일까? 발이 편안한 신발일까? 사람들은 점점 높은 곳만을 쳐다보면서 동물과 식물도 하는 종족 번식의 기본도 하지 않는 경우가 늘고 있다. 그리고 어려운 환경에서 힘들게 키워도 고마워하지 않는 자녀도 늘어 간다. 아니 어려운 환경에서 왜 아이를 낳았냐고 원망하기도 한다. 저승 가는 데 노잣돈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 낸 관혼상제 때문이지 사실 자연적이라면 아무런 것도 필요 없다. 저승 가는 데 필요한 것은 모든 걸 비우고 편안하게 떠나는 마음 아닐까. 유명 브랜드를 천국에서도 알아줄 것 같지 않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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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될수록 편안한 친구 같고
새것일 땐 고무 향이 좋아
코대고 냄새 맡던
처음 신은 운동화처럼
처음과 끝을 함께할
신발 같은 친구 있으면 좋겠네.

발가락이 편안하듯
옹기종기 처마 밑에
모여 앉아 생각 없는
웃음 짓던 동무들
신발 속에 친구들이 놀다 가듯
가지런한 발가락.
 







#작가의 변
사람들이 줄 서서 기다리는 모습에 그들의 신발을 유심히 보게 됐다. 다양한 신발들을 보았다. 그중엔 대부분이 유명브랜드 신발이었으며 가죽으로 된 신발은 보기 힘들었다. 대부분 석유화학제품으로 만든 플라스틱 제품의 신발, 신발만 아니라 옷도 플라스틱으로 만들어 내는 옷이 대부분인 요즘, 플라스틱의 공포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플라스틱이 없었다면 인류가 모두 신발을 이렇게 신고 다닐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물론 지금도 플라스틱으로 만든 인조가죽의 신발이지만 명품 신발의 가격은 무척이나 비싸다. 사람은 꼭 필요한 것이 있다. 먹는 것과 입는 것 그리고 잠을 잘 수 있는 주택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두 신발을 제대로 신고 다닐 수 있었던 것은 불과 100년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내 할아버지나 아버지, 어머니도 신발을 제대로 신지 못하고 다닌 시절이 있었다. 짚신은 볏짚을 꼬아서 만들 신발인데 여름에 비가 오면 버선이 다 젖었을 것이다. 버선이라도 제대로 신고 다닌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비가 오면 다 젖고, 추운 겨울엔 추위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는 짚신. 사대부나 궁궐에서 사는 사람들은 가죽으로 만든 신발을 신고 다니고, 꽃신을 신고 시집을 가기도 했겠지만, 서민은 짚신을 신고 다녔다. 멀리 가려면 짚신 꾸러미를 봇짐에 매달고 다녔다. 내 어린 시절만 하더라도 짚신은 아니지만 타이어 고무로 만든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잘 벗겨지고 겨울엔 발이 시렸다. 그래서 겨울에 털신을 신고 다녔다. 고무신에 털을 신발 목에 댄 신발로 고무신보다는 훨씬 따뜻했다. 지금이야 목이 긴 부츠를 신고 다니는 사람들도 많으니, 털신이 따뜻하다고 하는 감을 모르는 이도 많을 것이다.

플라스틱이 흔하지 않던 시기엔 대부분이 짚으로 엮어서 만든 것이었다. 삼태기라고 농산물을 담거나 아궁이의 재를 퍼 나르거나 하는 용도로 쓰였다. 그리고 허리춤에 달고 다니던 짚으로 엮은 바구니나 망태기 짚으로 만든 방석, 멍석, 그리고 수수를 털고 그것으로 만든 빗자루, 사리대로 만든 빗자루, 짚으로 엮어 올린 지붕 이엉, 박을 키워서 만든 바가지, 똬리, 캐첩캔으로 만든 두레박, 기름 양철통으로 만든 물지게 물통, 쟁기와 소 입에 씌우는 주둥망, 나무를 깎아 만드는 코뚜레. 이젠 그 이름도 생소한 쓰지 않는 이름들이 대부분이고 플라스틱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들이 많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땐 옷이 없어서 장롱에 넣을 것도 없었다. 속옷이 없이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단벌 바지를 입고, 추운 겨울에 다리는 꽁꽁 얼고 ‘고추’가 쪼그라들어 안 보인다고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우리의 부엌은 구들을 놓아 아궁이에서 불을 피우는 구조라 방바닥이 따듯하긴 하지만 시간이 지나 새벽이 되면 추워진다. 게다가 방문 틈과 창호지 얇은 숨골로 찬바람이 방안으로 밀려들면 가족이 함께 덮던 이불로는 추위를 이기기도 힘들었다.

지금은 플라스틱으로 만든 이불과 옷, 신발 등 넘쳐나는 물건들, 창호지보다 두꺼운 유리창에다가 보일러가 돌아가 늘 따뜻함에도 추위를 더 많이 타게 된다. 두꺼운 오리털 잠바를 입고도 춥다고 한다. 양말도 부족해 명절에나 한 켤레 받으면 새것이라고 그리 좋았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은 모든 게 그 당시보다는 풍족하다. 플라스틱의 혜택이다. 프라스틱이 없고 가족만으로 신을 만들어 신는다면 모두가 다 가죽 신을 신지도 못할 뿐더라 가격도 만만하지 않았을 거다. 옷도 그렇다. 플라스틱이 없었다면 솜을 만드는 목화가 많이 생산되어야 하는데 인류는 아직도 헐벗고 못 입은 사람들 천지일 것 같다. 추위에 떠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은 물론이다. 전기가 없던 시절이었으니 당연히 전기를 쓰는 문화용품인 TV, 컴퓨터, 휴대전화 등 우리가 늘 우리 신체의 일부처럼 쓰면서 생활하고 있는 것들이 없던 황당한 세상에 우린 불과 50, 60년 전에 살고 있었다. 세탁기가 빨래를 해주기 전엔 개울에 나가서 빨래해야 했다. 내가 군 생활을 하던 때에도 부대엔 짤순이밖에 없어서 추운 겨울 빨래 비누가 잘 먹히지도 않는 찬물로 빨래하고 건조대에 널면 얼어서 뻣뻣해지기 일쑤였다.

분명 우린 100년 이래 아주 많은 변화를 겪는 세상에 살고 있다. 물론 2천년대생들은 낳자마자 셀폰과 티브는 물론 세탁기 등 모든 게 다 갖추어진 세상을 살았겠지만 지금도 개발도상국이나 저개발국은 내가 어린 시절에 겪은 상황과 비슷하게 생활하는 사람들도 분명있다.







모두가 밥을 먹는 것을 걱정해서 밥먹었냐고 인사하던 시절도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렇게 먼 옛날이야기도 아니다. 나의 아버지 세대는 더 어려운 식민지 시대와 전쟁을 겪으면서 살다가 갔지만 검정 고무신의 추억이 아직도 뇌리에 깊이 박혀있는 나로서는 유명브랜드나 너무 사치스러운 신발은 사실 부담이 간다. 신발은 발이 편해야 하고 발이 따스하면 된다. 하지만 요즘엔 멋으로 신발을 신는 경우도 많다. 옷도 마찬가지다. 옷이 따뜻해야 한다는 전제는 옛말. 이젠 멋스러움을 원해서 추운 날에도 짧은 스커트나 레깅스를 입는 젊은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면 분명 옷이 따뜻하거나 여름에 시원한 기능성만을 추구하지는 않는 것 같다.

군에 입대하고 옷을 주고 속옷과 신발을 주는데 군복은 대충 맞았다. 하지만 발 볼이 넓은 내가 신발이 작아서 안들어간다고 하니 아주 항공모함 사이즈인 11을 줘서 신었는데, 이건 신발을 끌고 다닌다는 게 맞는 표현으로 그런 신발을 신고 뛰고 총검술하고 그러니 체력 소모도 더 크고 피로도도 더 심했었다. 팬티는 까칠까칠해서 쓸려 알러지처럼 피부 트러블이 일기도 했다. 지금도 볼이 넓은 신발을 사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볼이 넓고 맞는 사이즈를 신으면 발이 정말 편안함을 느낀다. 그리고 신던 신발은 정말이지 더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분명 우리 세대가 지나고 나면 멍석이나 삼태기 망태기같은 언어는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 날 것이다. 그리고 컴퓨터게임과 관련된 신조어가 등장하듯이 많은 신조어가 또 등장할 것이다. 컴퓨터게임을 할 때 마음의 안정을 찾는 세대처럼 말이다.

짚, 왕겨, 당겨, 소꼴, 콩깍지, 디딜방아, 두레박, 물지게, 물동이, 똬리, 지게, 소쿠리, 답사리, 박바가지 같은 단어들이 이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듯이, 사람들이 신지 않는 고무신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리라. 지금은 역사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짚신처럼 말이다. 제사를 지내고 먹는 헛제삿밥이 한때 식당에서도 파는 음식이었다. 제사를 지내지 않아도 어릴 때 먹던 제삿밥이 그리운 마음이었는지 모른다. 두부와 동태, 무로 끓인 탕국이나 소금에 절여 쪄낸 조기 같은 제사음식도 제사를 지내지 않는 가정이 늘어나면서 점점 사라지는 음식이 되어 가고 있다. 어릴 때 그렇게 먹고 싶었던 제사상에 올라간 빨갛고 녹색이 나는 과자나 밤과자, 대추과자, 산자 등의 과자도 점점 잊혀지는 음식이 되듯이 말이다. 특히 외국에 이민 생활을 하는 우리는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떠나면 우리 아이들은 다른 백인들처럼 살아가진 않을까 하고 말이다.

먼 인생을 살아 가면서 우리가 신어야 할 신은 과연 무엇일까? 유명브랜드일까? 발이 편안한 신발일까? 사람들은 점점 높은 곳만을 쳐다보면서 동물과 식물도 하는 종족 번식의 기본도 하지 않는 경우가 늘고 있다. 그리고 어려운 환경에서 힘들게 키워도 고마워하지 않는 자녀도 늘어 간다. 아니 어려운 환경에서 왜 아이를 낳았냐고 원망하기도 한다. 저승 가는 데 노잣돈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 낸 관혼상제 때문이지 사실 자연적이라면 아무런 것도 필요 없다. 저승 가는 데 필요한 것은 모든 걸 비우고 편안하게 떠나는 마음 아닐까. 유명 브랜드를 천국에서도 알아줄 것 같지 않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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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사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 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 학원에 다니며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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