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인 인가와 선종 선포, 한국불교 정체성 회복 노력·성과
법인 인가와 선종 선포, 한국불교 정체성 회복 노력·성과
  • 선학원백년사편찬위원회
  • 승인 2023.11.16 16: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 재단법인의 탄생

1) 재단법인의 발기 및 허가

불기(佛紀) 2960년(소화 8) 3월 21일에 선우공제회(禪友共濟會)를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朝鮮佛敎中央禪理參究院)으로 개칭(改稱)하고 재단법인으로 하기 위하야 임시발기회를 조직하였다.

불기(佛紀) 2961년(소화 9) 12월 5일에 조선총독부로부터 재단법인 설립이 허가된 바 신입재산총액(申込財産總額)은 약 9만여 원이며 실선량(實禪粮)은 정조(正租) 600여 석.

정조(正租) 170석 정혜사 선원定慧寺禪院)
정조(正租) 30석 직지사 선원直指寺禪院)
정조(正租) 200석 범어사 선원梵魚寺禪院)
정조(正租) 100석 대승사 선원大乘寺禪院)
정조(正租) 100석 선학원禪學院)
40)

선종수좌대회는 만공이 개회사에서 말한 바와 같이 “재단법인(財團法人)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朝鮮佛敎中央禪理參究院)을 완성하고 재단의 확장과 시행세칙급선원법규(施行細則及禪院法規)를 제정하고 이 기회에 전선수좌대회(全鮮首座大會)를 소집하고 선종의 근본적 자립발전책을 토의 결정하자는 발의로”41) 개최된 것이다. 때문에 재단법인 인가 이후 현안 처리와 선종의 자주적 발전을 위한 논의는 선종수좌대회의 핵심사항이었다. 즉 선학원은 1934년 12월 23일 제5회 이사회에서 법인정관시행세칙기초 및 수좌대회 준비를 의결하고, 1935년 3월 24일 시행세칙을 기초하였다. 당시 기초위원은 기석호(奇昔湖), 정운봉(鄭雲峰), 황용음(黃龍吟), 박대치(朴大治), 박고봉朴古峯), 김적음(金寂音), 하용봉(河龍峯), 김일옹(金一翁), 이탄옹(李炭翁), 김익곤(金翊坤)이었다.

수좌대회 당시에는 이미 마련했던 재단법인 정관을 소개했으며, 하용봉이 선리참구원 정관 수정과 시행세칙안을 낭독 통과하여 주무관청의 인가를 받기로 결의하였다.42) 그리고 둘째 날인 3월 8일은 재단법인 기성회(期成會)를 조직하였으며, 김적음, 이올연(청담), 오성월, 김경산, 이백우(李白牛), 이춘성(李春城) 등이 기성회조직위원에 피선되었다.

이와 같이 수좌대회는 체계적인 선종 발전을 위해 재단법인 운영을 논의했을 뿐만 아니라 중앙에 모범선원 설치를 논의하고 중앙선원청규(中央禪院淸規)를 제정하였다.43) 뿐만 아니라 의제(衣製)와 의식을 제정하였으며, 기관지를 발행하기로 하였다. 기관지는 이미 1931년 적음 스님이 선학원을 중흥시키고 선의 대중화를 위해 《선원(禪苑)》을 창간한 바 있다.44) 선종수좌대회 역시 기관지 발행을 통해 “조사선(祖師禪)을 선포하고 수좌(首座)를 훈도(訓導)함에는 기관지를 발행함이 긴절(緊切)하다.”는 적음 스님의 뜻에 동의하였다.45)

한편 선종수좌대회는 종정을 비롯한 임원을 선출하였으며, 종단의 크고 작은 현안을 다루는 종회인 선회(禪會)의 조직과 권한을 규정한 선회법(禪會法)을 마련했는데, 총 11장 37조로 구성되어 있다. 조직, 의장(議長), 서기(書記), 사제(司祭), 선회원 선거 및 임기, 선회의 권한, 위원회, 심사위원 등이다. 또한 선회를 대표하는 선의원회는 15인을 구성하였는데, 종정회에서 7인을 선출하고, 선회에서 8인을 무기명 투표로 선출하도록 하였다. 선의원회는 제반 법규와 선회의 특별 권한에 속하지 않은 일체 사항을 제정·의결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이밖에 8개 조의 중앙선원청규(中央禪院淸規)를 마련하여 수행의 정체성을 뚜렷이 하였으며, 승려 법규, 포교 법규, 신도 법규, 의제(衣製)와 의식에 관한 문제 등을 논의하여 결정하였다. 이와 같은 여러 법규와 선회와 선의원 구성 등은 근대 불교계에서 선학원의 이념과 수행 체계가 지닌 독자성을 살필 수 있어 주목할 만하다.

당시 선종수좌대회에는 적지 않은 규모의 대중들도 참여하였다. (아래 도표 선종수좌대회 참여 사찰 및 인물46) 참고)

[표] 선종수좌대회 참여 사찰 및 인물.
[표] 선종수좌대회 참여 사찰 및 인물.

당시 수좌대회에 참석했던 대중은 범어사, 통도사, 직지사 등 36개 사찰에서 성월(惺月), 적음(寂音)을 비롯한 비구승 69명, 비구니 6명, 총 75명이 참석하였다. 신도와 기타 참관자 또한 약 300여 명의 대중이 모였다.47) 이때 선출된 종정은 신혜월(申慧月), 송만공(宋滿空), 방한암(方漢岩) 등이며, 원장은 오성월이 선출되었는데, 이들은 1911년 굴욕적인 조동종 맹약에 항거하여 임제종운동을 주도했으며, 1921년 선학원 설립 당시부터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인물들이었다. 기석호, 김적음, 김경봉을 비롯해 설립 조사인 만해 한용운의 제자 이춘성(李春城) 또한 선리참구원과 조선불교선종의 핵심 인사로 참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수좌들은 선학원 설립 이후 침체와 중흥의 변화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불교 중흥의 의지를 조선불교선종에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용봉(동산), 기석호, 이올연(청담)은 종규, 종정회 규칙, 종무원 규칙, 선회 규칙, 선의원회 규칙 등의 기초위원으로 수좌대회와 창종 작업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하용봉과 이올연은 해방 이후 불교정화운동을 주도하여 한국 불교 전통을 수호하고자 했던 현대 불교사의 상징적 인물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선종수좌대회는 선학원의 숙원이었던 재단법인 인가에 따른 후속 조치와 조선불교선종 선포를 통해 선불교의 자주적인 발전을 천명하고 수행과 운영을 위한 실제적인 체계를 갖추었다.

2) 재단법인의 성격과 가치

선학원의 재단법인 인가와 조선불교선종 선포는 단순히 선학원의 역사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선우공제회를 계승해서 법적 보호를 받고 선원 수를 증가시키고 수행 여건을 향상시킨 일은 일제 강점기 불교계의 열악한 상황을 반증함과 동시에 전통 불교가 구심점을 잃고 심각하게 왜곡되어 가는 것을 바로잡고자 한 의도이다. 때문에 선학원의 재단법인 인가와 ‘조선불교선종’ 선포는 한국 근대 불교사에서 한 획을 그을 정도로 한국 불교의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었고 그 성과를 얻었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선학원은 재단법인 인가와 선종 선포 이후 변화를 주도했다.

아직은 창설기이므로 완전한 활동에 들어가지 못하였지만, 현재 주로 하는 사업은 지방 각 선원의 연락과 통제, 본 기관지를 통하여 선리를 참구하는 건전한 신앙의 확립, 법의 포양 각 본산을 권면하야 선방 증설 및 수좌 대우 개선, 포교사를 각 지방에 보내 설법포교를 하는 등 선종의 독립 발전을 적극적으로 확장하고 잇습니다.48)

현재 재단법인 기본금이 설립 당시에는 구만여 원이던 것이 그간 수개월에 새로 기부하는 사람이 각 곳에서 나와서 벌써 약 십사만 원에 이르게 되었으며, 본 법인에서 전적으로 경영하는 선방이 5개소나 됩니다. 장차도 전선(全鮮) 31본산에서 모두 찬조금을 몇 천 원씩이라도 찬조할 의향을 보이며 신도와 승려 가운데에서도 토지와 현금을 가지신 이는 정재(淨財)를 수좌(首座)들이 공부하게 만드는 재단법인에 넣되 생전은 자기가 타작하야 먹고 쓰고 열반 후는 제위답(祭位畓)으로 하여 달라고 찬조하는 이들이 여하간 중앙선리참구원이라는 재단법인은 남의 토지관리기관, 제도에 향하야 주는 기관, 사업기관 여러 가지 직능을 겸무발휘하게 되엿습니다.49)

인용문은 1935년 선종수좌대회 직후에 간행된 《선원》 4월호에 실린 선종 종무원과 재단법인의 동향을 소개한 내용이다. 우선 종무원(宗務院)은 ‘조선불교선종’ 선포 이후 선리참구를 통한 건전한 신앙을 확립하고 선방 증설과 수좌 대우 개선 등을 독려하여 선불교의 자주적인 발전과 대중교화를 위해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법인 역시 설립 당시보다 재정이 증가했으며, 선리참구원이 직접 경영하는 선방 또한 5개소나 된다고 하였다. 이밖에 31본산의 찬조 의향이 있었고, 신도와 승려의 토지와 현금 찬조가 늘어났다고 하였다. 《선원》은 기부 찬조와 운영상의 개선 등 보다 구체적인 사항을 소개하였다.

재단법인 작년도 예산과 결산에 대하야는 본 법인이 이상에서 말한 바와 같이 작년(1934) 12월 5일부로 인가되어 그후 사무실 설비와 직원정리 각 이사회의 등으로 자연 분주하였으며 여러 가지 사정으로 말미암아 작년도는 예산에 대하서는 하등의 정한 금액이 없고 다만 동래 범어사에서 기부 토지 소작료 도조 매각 대금 중으로 동년 12월 6일에 본원에 수입된 금액 오백오십 원과 소화 십년 1월 14일에 안성 토지(구택희, 리정숙량시의 기부토지)소작료 도조 매각 대금 수입 금오백십사 원 팔십 전과 동년 삼월 십일일 범어사 소작료 수입 금 삼백 원과 동년 동월 동일 안성 소작료 수입 금육십이 원 사십칠 전 합게금 일천사백이십칠 원 이십칠 전인데, 이 금액 중에서 소화 구년 십이월 오일 이후로 사무소 설비와 기타 사무비와 여비 지세 토지 이전 수속비 등 모든 비용을 지출하고 작년도 결산 시기를 당하여 결산서를 작성한 결과 총 지출액이 합계금 일천사백이십칠원이십칠전 인데 수입금과 지출금이 확실히 수지가 맞았음으로 하등의 착오가 없습니다. 금년도 예산에 대하여는 소작료 수입금과 과년도 미수 수입금 희사금 수입 예산액 전부를 합하야 합계금 육천이백으로 편성되어 지금까지 지출되고 있습니다.50)

재단법인의 수입과 지출을 알려주고 있는 자료이다. 결론적으로 수입과 지출이 1427원 27전으로 수지가 맞았다는 것이다. 1935년의 수입금은 6200원으로 계산되었다. 1924년 선우공제회의 예산 상황이 수입 563원 38전, 지출 300원 3전이었음을51) 고려한다면 법인인가 직후여서 미미하지만, 확연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주] -----

40) 禪宗中央宗務院(1935), <二. 參究院成立經過報告>, 《朝鮮佛敎禪宗首座大會會錄》, 경성: 중앙인쇄소, 12쪽.

41) 禪宗中央宗務院(1935), <開會辭>, 앞의 자료, 6쪽.

42) 禪宗中央宗務院(1935), <八. 參究院定款修正及施行細則制定의件>, 앞의 자료, 15쪽.

43) 禪宗中央宗務院(1935), <八. 參究院定款修正及施行細則制定의件>, 앞의 자료, 21쪽.

44) 오경후(2008), <日帝下 《禪苑》誌의 創刊과 그 性格>, 《한국사상과 문화》 44, 한국사상과문화학회.

45) 禪宗中央宗務院(1935), <八. 參究院定款修正及施行細則制定의件>, 앞의 자료, 17쪽.

46) 禪宗宗務院(1935), <會員點考>, 앞의 자료, 7~9쪽.

47) 禪宗宗務院, <準備經過報告>, 앞의 자료, 10~12쪽.

48) 선학원(1935), 《禪苑》 4호, 경성: 선학원, 29~30쪽.

49) 선학원(1935), 위의 책, 30쪽.

50) 선학원(1935), 위의 책, 30~32쪽.

51) 김광식(1996), 《韓國近代佛敎史硏究》, 民族社, 112쪽에서 재인용.

"이 기사를 응원합니다." 불교닷컴 자발적 유료화 신청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11길 16 대형빌딩 4층
  • 대표전화 : (02) 734-7336
  • 팩스 : (02) 6280-2551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석만
  • 대표 : 이석만
  • 사업자번호 : 101-11-47022
  • 법인명 : 불교닷컴
  • 제호 : 불교닷컴
  • 등록번호 : 서울, 아05082
  • 등록일 : 2007-09-17
  • 발행일 : 2006-01-21
  • 발행인 : 이석만
  • 편집인 : 이석만
  • 불교닷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불교닷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asan2580@gmail.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