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136. 숲
[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136. 숲
  • 전재민 시인
  • 승인 2023.10.30 12: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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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 나무가 나고 자라듯이
풀도 나고 자라 꽃을 피우고
씨앗을 떨구고 시들고 메말라 간다.

나무는 죽어서도 서 있지도 못해
허리가 꺾이고 바닥 위에 눕는다.

젊은 나무가 날마다 고목을 보며 자란다
숲속 주인은 나무인데
인간들이 자꾸만 나무를 베고
풀을 베어 숲을 없앤다.

마치 세상을 창조한 창조주처럼
천상천하 유아 유아독존을 외친다.
 

#작가의 변

맨발 걷기를 하다 노인 둘을 만났다. 난 운동화에 끼인 돌도 불편해서 빼냈다면서 왜 베어 풋을 하느냐고 한다. 베어 풋 즉, 맨발 걷기를 해서 지팡이를 짚지 않아도 될 정도가 됐다가 다시 걸음이 흔들려 지팡이를 다시 짚고 다닌다.

날마다 비가 오니 베어 풋은 언감생심이다.

어제 쇼핑하면서 윈닥스를 산다고 해서 노 네임 브랜드도 같은 성능이고 저렴하다고 사라 그랬더니 성능이 떨어진다며 내가 하는 일이 늘 그렇다며 내 탓을 하는 아내. 한두 번도 아니고 늘 내 탓을 하고 15년 전에 아파트 팔아서 집도 절도 없는 노후 거지가 됐다고 노래한다. 스트레스 지수가 쭉쭉 올라간다.

오랜만에 비도 안 오고 일주일 넘게 괴롭히던 감기도 좀 나은 듯 해서 맨발 걷기를 하려 했다. 아내는 아스팔트나 콘크리트는 차서 감기 걸릴 것 같으니 우리 가던 곳을 걸어 보라 한다. 프랜시스와 넘버4 로드로 와서 주차하고 맨발로 걷는 순간 고문이 따로 없었다. 자잘한 돌을 깔아 놓아서 더 아픈 듯하다. 한 발 한 발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고통이 발바닥을 파고든다. 처음엔 그러다 말겠지 생각했지만 그러다 마는 게 아니다. 가면 갈수록 고통이 심해진다. 다른 때 같으면 슬리퍼를 손에 들고 다니다 신고는 했는데 오늘은 운동화만 가져와서 차에 두고 걷기로 했다. 차에 운동화를 둔 덕분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고통을 줄이기 위해 심호흡에 집중하기로 한다. 그래도 고통은 밀려들어 심호흡을 흐트려 놓는다. 주사 맞을 때 주사기를 외면하면 갑작스럽게 주사를 놓는 바람에 그 두려움이 덜하다. 그래서 주변 경치를 보면서 아픔을 외면하려 했더니 한 발도 못 가서 통증이 나의 시선을 불러들인다. 그러면서 사람은 왜 이렇게 부드러운 발바닥을 가졌을까 생각해 본다. 소나 말, 양은 굽을 가졌다. 그것도 길 위에서 마구 일을 시키려면 약하다고 생각해서 말에게는 쇠로 만든 징을 박는다. 말굽 말이다. 그것은 이미 아주 오래전에 행해진 습관이다. 요즘은 말굽을 해서 박는지 알 수 없다. 소도 일소는 일을 열심히 해서 근육질 몸매를 만든다. 한때 아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운동할 때 근육 만들려면 단백질을 먹어야 한다고 단백질을 물에 타서 먹었는데 그것이 별로 좋은 단백질이 아닌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그리고 소는 풀만 먹고 근육을 키우고 코끼리도 풀만 먹고 덩치를 키운다. 사자가 근육질이긴 하지만 고기를 먹는다고 그것이 근육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소화를 시키면 살로 가기도 하고 근육으로도 가겠지만 똥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많을 것이다.

삶은 고통의 연속이다. 고통과 욕심을 끊으면 대각견성해서 부처님과 비슷해질 수 있는데 작은 발바닥의 고통도 참지 못하고 마치 유리 조각 위를 걷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사람들은 고통을 끊으려고 노력하기보다는 피하려 노력했다고 볼 수 있다. 신발을 신는 것은 고통을 끊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외면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신발에 조그만 돌 조각 하나가 들어오면 불편해서 죽을 것만 같아 당장 신발을 벗어 털어 낸다.

욕심은 어떨까? 사람들의 욕심은 한이 없다. 사람도 처음엔 다른 동물들처럼 동굴에 살거나 풀이나 나무 등으로 집을 지어 살았다. 그러다가 돌을 깎고 큰 나무를 깎아 고래 등 같은 집을 짓고 산다. 그럼에도 ‘순살자이’처럼 순두부같이 힘없이 무너지는 아파트를 짓는다. 한때 바닷모래로 지어진 삼풍 백화점이 무너지면서 서울 시내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 날 수 있느냐고 사람들은 정부를 원망하고 건축 업자를 지구상의 최고 악인처럼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 자리엔 또 다른 명품 아파트가 들어서고 대통령의 사가도 있는 아파트 단지가 됐다. 성수대교 붕괴 때도 어떻게 다리가 속절없이 무너질 수 있느냐며 사람들은 울분에 가득 찼었다. 그래도 아파트 가격이 올라가고 너도나도 억 소리 나는 아파트를 가진 서울에서 사람들은 이제 나도 기득권층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하지만 사람들의 욕심이 크고 자랄수록 그만큼 사람들에게 고통은 더욱 커진다. 끝없이 이어지는 욕심이 핵 오염수를 바다에 버려 바다 생물의 미래를 파괴하고 인류의 미래를 파괴한다. 그럼에도 괜찮다고 광고만 늘리는 정부는 또 하나의 욕심 덩어리일 뿐이다.

사람도 지구 상에 살아 가는 한 종류의 동물일 뿐인데 사람들은 지구가 인류를 위해 존재한다고 착각한다. 그래서 지구의 화석 연료란 화석 연료를 다 퍼서 쓰고 이젠 원자력밖에 없다거나 태양열을 쓴다고 하지만 그 전력량이 상대적으로 적다. 전기 차는 전기가 있어야 굴러다니는데 지구를 살린다면서 전기 차로 모두 바꾸려고 한다. 인류를 위한 것이지 지구를 위한 건 아니다. 지구를 위한다면 다른 동물들처럼 쉽게 부서지는 나무로 만든 새집이나 흙으로 만든 집, 아니면 풀로 지은 집에서 살고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게 해야 한다. 그것이 자연에 순응하는 삶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석유로 비닐을 만들고 화학 섬유를 만들어 수백 년 썩지 않을 플라스틱은 태평양에 거대한 섬을 만들었다. 사람들이 고통보다 편리와 편안을 추구하면 할수록 지구는 점점 병들고 사람들도 병들어 고통받게 된다. 아니 지구상에서 인류가 살아갈 수 없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지진이나 화산 활동에 아직도 인류는 속수무책이다. 그러니 땅이 갈라지거나 꺼지거나 솟아올라 인류가 멸망하거나 인류가 만든 원자폭탄으로 스스로 자멸을 할지도 모를 일이다. 욕심과 고통을 외면한 결과다.







걷는 것보다는 탈 것을 이용하는 것이 편하고 빠르다. 그러니 말을 타고, 가마를 타다가 이젠 승용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타고, 새처럼 날고 싶다고 쇠로 비행기를 만들어 하늘을 날아다닌다. 날개를 젓는 고통 하나 없이 연료를 소비하면서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서 하늘을 난다.

산책길에서 좀 더 가면 나아지겠지하고 생각하면서 걸어 보지만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시에서 일부러 질척인다고 작은 조약돌을 깔지 않고 자연 상태 그대로의 그냥 흙이면 더 부드러울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지난 번에 시청 담당자가 이곳에 추천해 줄 때 만해도 난 이곳이 자연 상태의 흙길이라고 생각했었다.

블루베리가 붉게 단풍이 들어 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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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 나무가 나고 자라듯이
풀도 나고 자라 꽃을 피우고
씨앗을 떨구고 시들고 메말라 간다.

나무는 죽어서도 서 있지도 못해
허리가 꺾이고 바닥 위에 눕는다.

젊은 나무가 날마다 고목을 보며 자란다
숲속 주인은 나무인데
인간들이 자꾸만 나무를 베고
풀을 베어 숲을 없앤다.

마치 세상을 창조한 창조주처럼
천상천하 유아 유아독존을 외친다.
 

#작가의 변

맨발 걷기를 하다 노인 둘을 만났다. 난 운동화에 끼인 돌도 불편해서 빼냈다면서 왜 베어 풋을 하느냐고 한다. 베어 풋 즉, 맨발 걷기를 해서 지팡이를 짚지 않아도 될 정도가 됐다가 다시 걸음이 흔들려 지팡이를 다시 짚고 다닌다.

날마다 비가 오니 베어 풋은 언감생심이다.

어제 쇼핑하면서 윈닥스를 산다고 해서 노 네임 브랜드도 같은 성능이고 저렴하다고 사라 그랬더니 성능이 떨어진다며 내가 하는 일이 늘 그렇다며 내 탓을 하는 아내. 한두 번도 아니고 늘 내 탓을 하고 15년 전에 아파트 팔아서 집도 절도 없는 노후 거지가 됐다고 노래한다. 스트레스 지수가 쭉쭉 올라간다.

오랜만에 비도 안 오고 일주일 넘게 괴롭히던 감기도 좀 나은 듯 해서 맨발 걷기를 하려 했다. 아내는 아스팔트나 콘크리트는 차서 감기 걸릴 것 같으니 우리 가던 곳을 걸어 보라 한다. 프랜시스와 넘버4 로드로 와서 주차하고 맨발로 걷는 순간 고문이 따로 없었다. 자잘한 돌을 깔아 놓아서 더 아픈 듯하다. 한 발 한 발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고통이 발바닥을 파고든다. 처음엔 그러다 말겠지 생각했지만 그러다 마는 게 아니다. 가면 갈수록 고통이 심해진다. 다른 때 같으면 슬리퍼를 손에 들고 다니다 신고는 했는데 오늘은 운동화만 가져와서 차에 두고 걷기로 했다. 차에 운동화를 둔 덕분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숲에 나무가 나고 자라듯이
풀도 나고 자라 꽃을 피우고
씨앗을 떨구고 시들고 메말라 간다.

나무는 죽어서도 서 있지도 못해
허리가 꺾이고 바닥 위에 눕는다.

젊은 나무가 날마다 고목을 보며 자란다
숲속 주인은 나무인데
인간들이 자꾸만 나무를 베고
풀을 베어 숲을 없앤다.

마치 세상을 창조한 창조주처럼
천상천하 유아 유아독존을 외친다.
 

#작가의 변

맨발 걷기를 하다 노인 둘을 만났다. 난 운동화에 끼인 돌도 불편해서 빼냈다면서 왜 베어 풋을 하느냐고 한다. 베어 풋 즉, 맨발 걷기를 해서 지팡이를 짚지 않아도 될 정도가 됐다가 다시 걸음이 흔들려 지팡이를 다시 짚고 다닌다.

날마다 비가 오니 베어 풋은 언감생심이다.

어제 쇼핑하면서 윈닥스를 산다고 해서 노 네임 브랜드도 같은 성능이고 저렴하다고 사라 그랬더니 성능이 떨어진다며 내가 하는 일이 늘 그렇다며 내 탓을 하는 아내. 한두 번도 아니고 늘 내 탓을 하고 15년 전에 아파트 팔아서 집도 절도 없는 노후 거지가 됐다고 노래한다. 스트레스 지수가 쭉쭉 올라간다.

오랜만에 비도 안 오고 일주일 넘게 괴롭히던 감기도 좀 나은 듯 해서 맨발 걷기를 하려 했다. 아내는 아스팔트나 콘크리트는 차서 감기 걸릴 것 같으니 우리 가던 곳을 걸어 보라 한다. 프랜시스와 넘버4 로드로 와서 주차하고 맨발로 걷는 순간 고문이 따로 없었다. 자잘한 돌을 깔아 놓아서 더 아픈 듯하다. 한 발 한 발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고통이 발바닥을 파고든다. 처음엔 그러다 말겠지 생각했지만 그러다 마는 게 아니다. 가면 갈수록 고통이 심해진다. 다른 때 같으면 슬리퍼를 손에 들고 다니다 신고는 했는데 오늘은 운동화만 가져와서 차에 두고 걷기로 했다. 차에 운동화를 둔 덕분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고통을 줄이기 위해 심호흡에 집중하기로 한다. 그래도 고통은 밀려들어 심호흡을 흐트려 놓는다. 주사 맞을 때 주사기를 외면하면 갑작스럽게 주사를 놓는 바람에 그 두려움이 덜하다. 그래서 주변 경치를 보면서 아픔을 외면하려 했더니 한 발도 못 가서 통증이 나의 시선을 불러들인다. 그러면서 사람은 왜 이렇게 부드러운 발바닥을 가졌을까 생각해 본다. 소나 말, 양은 굽을 가졌다. 그것도 길 위에서 마구 일을 시키려면 약하다고 생각해서 말에게는 쇠로 만든 징을 박는다. 말굽 말이다. 그것은 이미 아주 오래전에 행해진 습관이다. 요즘은 말굽을 해서 박는지 알 수 없다. 소도 일소는 일을 열심히 해서 근육질 몸매를 만든다. 한때 아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운동할 때 근육 만들려면 단백질을 먹어야 한다고 단백질을 물에 타서 먹었는데 그것이 별로 좋은 단백질이 아닌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그리고 소는 풀만 먹고 근육을 키우고 코끼리도 풀만 먹고 덩치를 키운다. 사자가 근육질이긴 하지만 고기를 먹는다고 그것이 근육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소화를 시키면 살로 가기도 하고 근육으로도 가겠지만 똥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많을 것이다.

삶은 고통의 연속이다. 고통과 욕심을 끊으면 대각견성해서 부처님과 비슷해질 수 있는데 작은 발바닥의 고통도 참지 못하고 마치 유리 조각 위를 걷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사람들은 고통을 끊으려고 노력하기보다는 피하려 노력했다고 볼 수 있다. 신발을 신는 것은 고통을 끊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외면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신발에 조그만 돌 조각 하나가 들어오면 불편해서 죽을 것만 같아 당장 신발을 벗어 털어 낸다.

욕심은 어떨까? 사람들의 욕심은 한이 없다. 사람도 처음엔 다른 동물들처럼 동굴에 살거나 풀이나 나무 등으로 집을 지어 살았다. 그러다가 돌을 깎고 큰 나무를 깎아 고래 등 같은 집을 짓고 산다. 그럼에도 ‘순살자이’처럼 순두부같이 힘없이 무너지는 아파트를 짓는다. 한때 바닷모래로 지어진 삼풍 백화점이 무너지면서 서울 시내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 날 수 있느냐고 사람들은 정부를 원망하고 건축 업자를 지구상의 최고 악인처럼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 자리엔 또 다른 명품 아파트가 들어서고 대통령의 사가도 있는 아파트 단지가 됐다. 성수대교 붕괴 때도 어떻게 다리가 속절없이 무너질 수 있느냐며 사람들은 울분에 가득 찼었다. 그래도 아파트 가격이 올라가고 너도나도 억 소리 나는 아파트를 가진 서울에서 사람들은 이제 나도 기득권층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하지만 사람들의 욕심이 크고 자랄수록 그만큼 사람들에게 고통은 더욱 커진다. 끝없이 이어지는 욕심이 핵 오염수를 바다에 버려 바다 생물의 미래를 파괴하고 인류의 미래를 파괴한다. 그럼에도 괜찮다고 광고만 늘리는 정부는 또 하나의 욕심 덩어리일 뿐이다.

사람도 지구 상에 살아 가는 한 종류의 동물일 뿐인데 사람들은 지구가 인류를 위해 존재한다고 착각한다. 그래서 지구의 화석 연료란 화석 연료를 다 퍼서 쓰고 이젠 원자력밖에 없다거나 태양열을 쓴다고 하지만 그 전력량이 상대적으로 적다. 전기 차는 전기가 있어야 굴러다니는데 지구를 살린다면서 전기 차로 모두 바꾸려고 한다. 인류를 위한 것이지 지구를 위한 건 아니다. 지구를 위한다면 다른 동물들처럼 쉽게 부서지는 나무로 만든 새집이나 흙으로 만든 집, 아니면 풀로 지은 집에서 살고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게 해야 한다. 그것이 자연에 순응하는 삶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석유로 비닐을 만들고 화학 섬유를 만들어 수백 년 썩지 않을 플라스틱은 태평양에 거대한 섬을 만들었다. 사람들이 고통보다 편리와 편안을 추구하면 할수록 지구는 점점 병들고 사람들도 병들어 고통받게 된다. 아니 지구상에서 인류가 살아갈 수 없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지진이나 화산 활동에 아직도 인류는 속수무책이다. 그러니 땅이 갈라지거나 꺼지거나 솟아올라 인류가 멸망하거나 인류가 만든 원자폭탄으로 스스로 자멸을 할지도 모를 일이다. 욕심과 고통을 외면한 결과다.







걷는 것보다는 탈 것을 이용하는 것이 편하고 빠르다. 그러니 말을 타고, 가마를 타다가 이젠 승용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타고, 새처럼 날고 싶다고 쇠로 비행기를 만들어 하늘을 날아다닌다. 날개를 젓는 고통 하나 없이 연료를 소비하면서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서 하늘을 난다.

산책길에서 좀 더 가면 나아지겠지하고 생각하면서 걸어 보지만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시에서 일부러 질척인다고 작은 조약돌을 깔지 않고 자연 상태 그대로의 그냥 흙이면 더 부드러울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지난 번에 시청 담당자가 이곳에 추천해 줄 때 만해도 난 이곳이 자연 상태의 흙길이라고 생각했었다.

블루베리가 붉게 단풍이 들어 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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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줄이기 위해 심호흡에 집중하기로 한다. 그래도 고통은 밀려들어 심호흡을 흐트려 놓는다. 주사 맞을 때 주사기를 외면하면 갑작스럽게 주사를 놓는 바람에 그 두려움이 덜하다. 그래서 주변 경치를 보면서 아픔을 외면하려 했더니 한 발도 못 가서 통증이 나의 시선을 불러들인다. 그러면서 사람은 왜 이렇게 부드러운 발바닥을 가졌을까 생각해 본다. 소나 말, 양은 굽을 가졌다. 그것도 길 위에서 마구 일을 시키려면 약하다고 생각해서 말에게는 쇠로 만든 징을 박는다. 말굽 말이다. 그것은 이미 아주 오래전에 행해진 습관이다. 요즘은 말굽을 해서 박는지 알 수 없다. 소도 일소는 일을 열심히 해서 근육질 몸매를 만든다. 한때 아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운동할 때 근육 만들려면 단백질을 먹어야 한다고 단백질을 물에 타서 먹었는데 그것이 별로 좋은 단백질이 아닌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그리고 소는 풀만 먹고 근육을 키우고 코끼리도 풀만 먹고 덩치를 키운다. 사자가 근육질이긴 하지만 고기를 먹는다고 그것이 근육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소화를 시키면 살로 가기도 하고 근육으로도 가겠지만 똥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많을 것이다.

삶은 고통의 연속이다. 고통과 욕심을 끊으면 대각견성해서 부처님과 비슷해질 수 있는데 작은 발바닥의 고통도 참지 못하고 마치 유리 조각 위를 걷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사람들은 고통을 끊으려고 노력하기보다는 피하려 노력했다고 볼 수 있다. 신발을 신는 것은 고통을 끊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외면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신발에 조그만 돌 조각 하나가 들어오면 불편해서 죽을 것만 같아 당장 신발을 벗어 털어 낸다.

욕심은 어떨까? 사람들의 욕심은 한이 없다. 사람도 처음엔 다른 동물들처럼 동굴에 살거나 풀이나 나무 등으로 집을 지어 살았다. 그러다가 돌을 깎고 큰 나무를 깎아 고래 등 같은 집을 짓고 산다. 그럼에도 ‘순살자이’처럼 순두부같이 힘없이 무너지는 아파트를 짓는다. 한때 바닷모래로 지어진 삼풍 백화점이 무너지면서 서울 시내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 날 수 있느냐고 사람들은 정부를 원망하고 건축 업자를 지구상의 최고 악인처럼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 자리엔 또 다른 명품 아파트가 들어서고 대통령의 사가도 있는 아파트 단지가 됐다. 성수대교 붕괴 때도 어떻게 다리가 속절없이 무너질 수 있느냐며 사람들은 울분에 가득 찼었다. 그래도 아파트 가격이 올라가고 너도나도 억 소리 나는 아파트를 가진 서울에서 사람들은 이제 나도 기득권층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하지만 사람들의 욕심이 크고 자랄수록 그만큼 사람들에게 고통은 더욱 커진다. 끝없이 이어지는 욕심이 핵 오염수를 바다에 버려 바다 생물의 미래를 파괴하고 인류의 미래를 파괴한다. 그럼에도 괜찮다고 광고만 늘리는 정부는 또 하나의 욕심 덩어리일 뿐이다.

사람도 지구 상에 살아 가는 한 종류의 동물일 뿐인데 사람들은 지구가 인류를 위해 존재한다고 착각한다. 그래서 지구의 화석 연료란 화석 연료를 다 퍼서 쓰고 이젠 원자력밖에 없다거나 태양열을 쓴다고 하지만 그 전력량이 상대적으로 적다. 전기 차는 전기가 있어야 굴러다니는데 지구를 살린다면서 전기 차로 모두 바꾸려고 한다. 인류를 위한 것이지 지구를 위한 건 아니다. 지구를 위한다면 다른 동물들처럼 쉽게 부서지는 나무로 만든 새집이나 흙으로 만든 집, 아니면 풀로 지은 집에서 살고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게 해야 한다. 그것이 자연에 순응하는 삶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석유로 비닐을 만들고 화학 섬유를 만들어 수백 년 썩지 않을 플라스틱은 태평양에 거대한 섬을 만들었다. 사람들이 고통보다 편리와 편안을 추구하면 할수록 지구는 점점 병들고 사람들도 병들어 고통받게 된다. 아니 지구상에서 인류가 살아갈 수 없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지진이나 화산 활동에 아직도 인류는 속수무책이다. 그러니 땅이 갈라지거나 꺼지거나 솟아올라 인류가 멸망하거나 인류가 만든 원자폭탄으로 스스로 자멸을 할지도 모를 일이다. 욕심과 고통을 외면한 결과다.





숲에 나무가 나고 자라듯이
풀도 나고 자라 꽃을 피우고
씨앗을 떨구고 시들고 메말라 간다.

나무는 죽어서도 서 있지도 못해
허리가 꺾이고 바닥 위에 눕는다.

젊은 나무가 날마다 고목을 보며 자란다
숲속 주인은 나무인데
인간들이 자꾸만 나무를 베고
풀을 베어 숲을 없앤다.

마치 세상을 창조한 창조주처럼
천상천하 유아 유아독존을 외친다.
 

#작가의 변

맨발 걷기를 하다 노인 둘을 만났다. 난 운동화에 끼인 돌도 불편해서 빼냈다면서 왜 베어 풋을 하느냐고 한다. 베어 풋 즉, 맨발 걷기를 해서 지팡이를 짚지 않아도 될 정도가 됐다가 다시 걸음이 흔들려 지팡이를 다시 짚고 다닌다.

날마다 비가 오니 베어 풋은 언감생심이다.

어제 쇼핑하면서 윈닥스를 산다고 해서 노 네임 브랜드도 같은 성능이고 저렴하다고 사라 그랬더니 성능이 떨어진다며 내가 하는 일이 늘 그렇다며 내 탓을 하는 아내. 한두 번도 아니고 늘 내 탓을 하고 15년 전에 아파트 팔아서 집도 절도 없는 노후 거지가 됐다고 노래한다. 스트레스 지수가 쭉쭉 올라간다.

오랜만에 비도 안 오고 일주일 넘게 괴롭히던 감기도 좀 나은 듯 해서 맨발 걷기를 하려 했다. 아내는 아스팔트나 콘크리트는 차서 감기 걸릴 것 같으니 우리 가던 곳을 걸어 보라 한다. 프랜시스와 넘버4 로드로 와서 주차하고 맨발로 걷는 순간 고문이 따로 없었다. 자잘한 돌을 깔아 놓아서 더 아픈 듯하다. 한 발 한 발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고통이 발바닥을 파고든다. 처음엔 그러다 말겠지 생각했지만 그러다 마는 게 아니다. 가면 갈수록 고통이 심해진다. 다른 때 같으면 슬리퍼를 손에 들고 다니다 신고는 했는데 오늘은 운동화만 가져와서 차에 두고 걷기로 했다. 차에 운동화를 둔 덕분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고통을 줄이기 위해 심호흡에 집중하기로 한다. 그래도 고통은 밀려들어 심호흡을 흐트려 놓는다. 주사 맞을 때 주사기를 외면하면 갑작스럽게 주사를 놓는 바람에 그 두려움이 덜하다. 그래서 주변 경치를 보면서 아픔을 외면하려 했더니 한 발도 못 가서 통증이 나의 시선을 불러들인다. 그러면서 사람은 왜 이렇게 부드러운 발바닥을 가졌을까 생각해 본다. 소나 말, 양은 굽을 가졌다. 그것도 길 위에서 마구 일을 시키려면 약하다고 생각해서 말에게는 쇠로 만든 징을 박는다. 말굽 말이다. 그것은 이미 아주 오래전에 행해진 습관이다. 요즘은 말굽을 해서 박는지 알 수 없다. 소도 일소는 일을 열심히 해서 근육질 몸매를 만든다. 한때 아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운동할 때 근육 만들려면 단백질을 먹어야 한다고 단백질을 물에 타서 먹었는데 그것이 별로 좋은 단백질이 아닌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그리고 소는 풀만 먹고 근육을 키우고 코끼리도 풀만 먹고 덩치를 키운다. 사자가 근육질이긴 하지만 고기를 먹는다고 그것이 근육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소화를 시키면 살로 가기도 하고 근육으로도 가겠지만 똥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많을 것이다.

삶은 고통의 연속이다. 고통과 욕심을 끊으면 대각견성해서 부처님과 비슷해질 수 있는데 작은 발바닥의 고통도 참지 못하고 마치 유리 조각 위를 걷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사람들은 고통을 끊으려고 노력하기보다는 피하려 노력했다고 볼 수 있다. 신발을 신는 것은 고통을 끊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외면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신발에 조그만 돌 조각 하나가 들어오면 불편해서 죽을 것만 같아 당장 신발을 벗어 털어 낸다.

욕심은 어떨까? 사람들의 욕심은 한이 없다. 사람도 처음엔 다른 동물들처럼 동굴에 살거나 풀이나 나무 등으로 집을 지어 살았다. 그러다가 돌을 깎고 큰 나무를 깎아 고래 등 같은 집을 짓고 산다. 그럼에도 ‘순살자이’처럼 순두부같이 힘없이 무너지는 아파트를 짓는다. 한때 바닷모래로 지어진 삼풍 백화점이 무너지면서 서울 시내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 날 수 있느냐고 사람들은 정부를 원망하고 건축 업자를 지구상의 최고 악인처럼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 자리엔 또 다른 명품 아파트가 들어서고 대통령의 사가도 있는 아파트 단지가 됐다. 성수대교 붕괴 때도 어떻게 다리가 속절없이 무너질 수 있느냐며 사람들은 울분에 가득 찼었다. 그래도 아파트 가격이 올라가고 너도나도 억 소리 나는 아파트를 가진 서울에서 사람들은 이제 나도 기득권층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하지만 사람들의 욕심이 크고 자랄수록 그만큼 사람들에게 고통은 더욱 커진다. 끝없이 이어지는 욕심이 핵 오염수를 바다에 버려 바다 생물의 미래를 파괴하고 인류의 미래를 파괴한다. 그럼에도 괜찮다고 광고만 늘리는 정부는 또 하나의 욕심 덩어리일 뿐이다.

사람도 지구 상에 살아 가는 한 종류의 동물일 뿐인데 사람들은 지구가 인류를 위해 존재한다고 착각한다. 그래서 지구의 화석 연료란 화석 연료를 다 퍼서 쓰고 이젠 원자력밖에 없다거나 태양열을 쓴다고 하지만 그 전력량이 상대적으로 적다. 전기 차는 전기가 있어야 굴러다니는데 지구를 살린다면서 전기 차로 모두 바꾸려고 한다. 인류를 위한 것이지 지구를 위한 건 아니다. 지구를 위한다면 다른 동물들처럼 쉽게 부서지는 나무로 만든 새집이나 흙으로 만든 집, 아니면 풀로 지은 집에서 살고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게 해야 한다. 그것이 자연에 순응하는 삶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석유로 비닐을 만들고 화학 섬유를 만들어 수백 년 썩지 않을 플라스틱은 태평양에 거대한 섬을 만들었다. 사람들이 고통보다 편리와 편안을 추구하면 할수록 지구는 점점 병들고 사람들도 병들어 고통받게 된다. 아니 지구상에서 인류가 살아갈 수 없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지진이나 화산 활동에 아직도 인류는 속수무책이다. 그러니 땅이 갈라지거나 꺼지거나 솟아올라 인류가 멸망하거나 인류가 만든 원자폭탄으로 스스로 자멸을 할지도 모를 일이다. 욕심과 고통을 외면한 결과다.







걷는 것보다는 탈 것을 이용하는 것이 편하고 빠르다. 그러니 말을 타고, 가마를 타다가 이젠 승용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타고, 새처럼 날고 싶다고 쇠로 비행기를 만들어 하늘을 날아다닌다. 날개를 젓는 고통 하나 없이 연료를 소비하면서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서 하늘을 난다.

산책길에서 좀 더 가면 나아지겠지하고 생각하면서 걸어 보지만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시에서 일부러 질척인다고 작은 조약돌을 깔지 않고 자연 상태 그대로의 그냥 흙이면 더 부드러울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지난 번에 시청 담당자가 이곳에 추천해 줄 때 만해도 난 이곳이 자연 상태의 흙길이라고 생각했었다.

블루베리가 붉게 단풍이 들어 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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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것보다는 탈 것을 이용하는 것이 편하고 빠르다. 그러니 말을 타고, 가마를 타다가 이젠 승용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타고, 새처럼 날고 싶다고 쇠로 비행기를 만들어 하늘을 날아다닌다. 날개를 젓는 고통 하나 없이 연료를 소비하면서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서 하늘을 난다.

산책길에서 좀 더 가면 나아지겠지하고 생각하면서 걸어 보지만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시에서 일부러 질척인다고 작은 조약돌을 깔지 않고 자연 상태 그대로의 그냥 흙이면 더 부드러울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지난 번에 시청 담당자가 이곳에 추천해 줄 때 만해도 난 이곳이 자연 상태의 흙길이라고 생각했었다.

블루베리가 붉게 단풍이 들어 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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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 나무가 나고 자라듯이
풀도 나고 자라 꽃을 피우고
씨앗을 떨구고 시들고 메말라 간다.

나무는 죽어서도 서 있지도 못해
허리가 꺾이고 바닥 위에 눕는다.

젊은 나무가 날마다 고목을 보며 자란다
숲속 주인은 나무인데
인간들이 자꾸만 나무를 베고
풀을 베어 숲을 없앤다.

마치 세상을 창조한 창조주처럼
천상천하 유아 유아독존을 외친다.
 

#작가의 변

맨발 걷기를 하다 노인 둘을 만났다. 난 운동화에 끼인 돌도 불편해서 빼냈다면서 왜 베어 풋을 하느냐고 한다. 베어 풋 즉, 맨발 걷기를 해서 지팡이를 짚지 않아도 될 정도가 됐다가 다시 걸음이 흔들려 지팡이를 다시 짚고 다닌다.

날마다 비가 오니 베어 풋은 언감생심이다.

어제 쇼핑하면서 윈닥스를 산다고 해서 노 네임 브랜드도 같은 성능이고 저렴하다고 사라 그랬더니 성능이 떨어진다며 내가 하는 일이 늘 그렇다며 내 탓을 하는 아내. 한두 번도 아니고 늘 내 탓을 하고 15년 전에 아파트 팔아서 집도 절도 없는 노후 거지가 됐다고 노래한다. 스트레스 지수가 쭉쭉 올라간다.

오랜만에 비도 안 오고 일주일 넘게 괴롭히던 감기도 좀 나은 듯 해서 맨발 걷기를 하려 했다. 아내는 아스팔트나 콘크리트는 차서 감기 걸릴 것 같으니 우리 가던 곳을 걸어 보라 한다. 프랜시스와 넘버4 로드로 와서 주차하고 맨발로 걷는 순간 고문이 따로 없었다. 자잘한 돌을 깔아 놓아서 더 아픈 듯하다. 한 발 한 발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고통이 발바닥을 파고든다. 처음엔 그러다 말겠지 생각했지만 그러다 마는 게 아니다. 가면 갈수록 고통이 심해진다. 다른 때 같으면 슬리퍼를 손에 들고 다니다 신고는 했는데 오늘은 운동화만 가져와서 차에 두고 걷기로 했다. 차에 운동화를 둔 덕분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고통을 줄이기 위해 심호흡에 집중하기로 한다. 그래도 고통은 밀려들어 심호흡을 흐트려 놓는다. 주사 맞을 때 주사기를 외면하면 갑작스럽게 주사를 놓는 바람에 그 두려움이 덜하다. 그래서 주변 경치를 보면서 아픔을 외면하려 했더니 한 발도 못 가서 통증이 나의 시선을 불러들인다. 그러면서 사람은 왜 이렇게 부드러운 발바닥을 가졌을까 생각해 본다. 소나 말, 양은 굽을 가졌다. 그것도 길 위에서 마구 일을 시키려면 약하다고 생각해서 말에게는 쇠로 만든 징을 박는다. 말굽 말이다. 그것은 이미 아주 오래전에 행해진 습관이다. 요즘은 말굽을 해서 박는지 알 수 없다. 소도 일소는 일을 열심히 해서 근육질 몸매를 만든다. 한때 아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운동할 때 근육 만들려면 단백질을 먹어야 한다고 단백질을 물에 타서 먹었는데 그것이 별로 좋은 단백질이 아닌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그리고 소는 풀만 먹고 근육을 키우고 코끼리도 풀만 먹고 덩치를 키운다. 사자가 근육질이긴 하지만 고기를 먹는다고 그것이 근육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소화를 시키면 살로 가기도 하고 근육으로도 가겠지만 똥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많을 것이다.

삶은 고통의 연속이다. 고통과 욕심을 끊으면 대각견성해서 부처님과 비슷해질 수 있는데 작은 발바닥의 고통도 참지 못하고 마치 유리 조각 위를 걷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사람들은 고통을 끊으려고 노력하기보다는 피하려 노력했다고 볼 수 있다. 신발을 신는 것은 고통을 끊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외면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신발에 조그만 돌 조각 하나가 들어오면 불편해서 죽을 것만 같아 당장 신발을 벗어 털어 낸다.

욕심은 어떨까? 사람들의 욕심은 한이 없다. 사람도 처음엔 다른 동물들처럼 동굴에 살거나 풀이나 나무 등으로 집을 지어 살았다. 그러다가 돌을 깎고 큰 나무를 깎아 고래 등 같은 집을 짓고 산다. 그럼에도 ‘순살자이’처럼 순두부같이 힘없이 무너지는 아파트를 짓는다. 한때 바닷모래로 지어진 삼풍 백화점이 무너지면서 서울 시내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 날 수 있느냐고 사람들은 정부를 원망하고 건축 업자를 지구상의 최고 악인처럼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 자리엔 또 다른 명품 아파트가 들어서고 대통령의 사가도 있는 아파트 단지가 됐다. 성수대교 붕괴 때도 어떻게 다리가 속절없이 무너질 수 있느냐며 사람들은 울분에 가득 찼었다. 그래도 아파트 가격이 올라가고 너도나도 억 소리 나는 아파트를 가진 서울에서 사람들은 이제 나도 기득권층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하지만 사람들의 욕심이 크고 자랄수록 그만큼 사람들에게 고통은 더욱 커진다. 끝없이 이어지는 욕심이 핵 오염수를 바다에 버려 바다 생물의 미래를 파괴하고 인류의 미래를 파괴한다. 그럼에도 괜찮다고 광고만 늘리는 정부는 또 하나의 욕심 덩어리일 뿐이다.

사람도 지구 상에 살아 가는 한 종류의 동물일 뿐인데 사람들은 지구가 인류를 위해 존재한다고 착각한다. 그래서 지구의 화석 연료란 화석 연료를 다 퍼서 쓰고 이젠 원자력밖에 없다거나 태양열을 쓴다고 하지만 그 전력량이 상대적으로 적다. 전기 차는 전기가 있어야 굴러다니는데 지구를 살린다면서 전기 차로 모두 바꾸려고 한다. 인류를 위한 것이지 지구를 위한 건 아니다. 지구를 위한다면 다른 동물들처럼 쉽게 부서지는 나무로 만든 새집이나 흙으로 만든 집, 아니면 풀로 지은 집에서 살고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게 해야 한다. 그것이 자연에 순응하는 삶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석유로 비닐을 만들고 화학 섬유를 만들어 수백 년 썩지 않을 플라스틱은 태평양에 거대한 섬을 만들었다. 사람들이 고통보다 편리와 편안을 추구하면 할수록 지구는 점점 병들고 사람들도 병들어 고통받게 된다. 아니 지구상에서 인류가 살아갈 수 없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지진이나 화산 활동에 아직도 인류는 속수무책이다. 그러니 땅이 갈라지거나 꺼지거나 솟아올라 인류가 멸망하거나 인류가 만든 원자폭탄으로 스스로 자멸을 할지도 모를 일이다. 욕심과 고통을 외면한 결과다.







걷는 것보다는 탈 것을 이용하는 것이 편하고 빠르다. 그러니 말을 타고, 가마를 타다가 이젠 승용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타고, 새처럼 날고 싶다고 쇠로 비행기를 만들어 하늘을 날아다닌다. 날개를 젓는 고통 하나 없이 연료를 소비하면서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서 하늘을 난다.

산책길에서 좀 더 가면 나아지겠지하고 생각하면서 걸어 보지만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시에서 일부러 질척인다고 작은 조약돌을 깔지 않고 자연 상태 그대로의 그냥 흙이면 더 부드러울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지난 번에 시청 담당자가 이곳에 추천해 줄 때 만해도 난 이곳이 자연 상태의 흙길이라고 생각했었다.

블루베리가 붉게 단풍이 들어 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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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사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 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 학원에 다니며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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