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132. 창작과 창조
[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132. 창작과 창조
  • 전재민 시인
  • 승인 2023.09.29 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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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은 또 다른 나의 표현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리게 하며

꿈에 서나 보았을 세상을 만든다

창작 또 다른 나를 꿈꾸며 또 다른 세상을 만든다.

 







#작가의 변

불교에 대해서 모를 때 즉 기독교 신자이었고, 가톨릭 신자였을 때는 불교란 어머니 아버지가 일년에 한 번씩 가는 절이 곧 불교였다. 일 년에 한 번씩 가던 절 골의 바위로 된 미륵불이 불교이고 대각사의 일주문 앞을 지나면서 그곳이 부처님의 땅이었던 것 같다.

제사를 지내면서 아버지가 중얼중얼 귀신과 말하는 것을 들었다. 아버지는 제사 전엔 늘 대문부터 문을 열어 놓고 귀신을 맞이했다. 어린 내 생각엔 조상이라 해도 죽은 사람은 귀신이었다.

농사를 지으면 해마다 밭에 거름을 내고 소로 밭을 갈고 열무 씨를 뿌리면 열무가 나고 고추씨를 뿌리면 고추가 나서 황금 같은 고추씨를 주렁주렁 붉은 마음 안에 담아 또 다른 세상을 준비하고는 했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불만도 참 많았다. 부잣집에 태어나서 도련님 소리를 들으면서, 번쩍이는 구두도 신고, 어린아이가 입은 양복은 또 얼마나 멋있는지 말이다. 그것은 아버지가 머슴을 살았던 심 노인이 나를 야단치는 모습에서 그 노인이 보기에 나는 그저 머슴의 아들이었다다. 그가 자식이 없어 먼 친척을 아들로 입양하고 재숙이가 그 집 손녀로 들어오면서 재숙이하고 놀고 싶어도 심 노인이 하도 호통을 치니 그 집에 아예 들어가는 것조차 싫었다.

내가 초등학교 소풍을 가서 보물찾기에서 보물을 하나도 못 찾아서 질질 짜고 울 때 이거 너 해 하면서 자기가 찾은 보물을 하나 주던 착한 아이였는데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찾는 것을 잘 못한다. 다른 아이들은 나뭇잎을 들추면 보물 적힌 종이가 나오고 돌을 들추면 나오는데 난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없더라. 한 학생이 몇 장씩 찾는데 한 장도 못 찾아서 억울하고 서러워서 울었다.

자식을 기르는 것도 농사라고 한다. 자식이 잘 커서 성공하면 자식 농사를 잘 지었다고 말한다. 우리 아버지도 나를 그렇게 자식 농사 잘 지었다고 생각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생각이 나와는 맞지 않았을 뿐이다. 상업 고등학교를 졸업한 동창 동기동창들의 현재 상황을 보면 고등학교 때는 전혀 발견하지 못했던 그들의 진짜 모습을 발견하고는 한다.

상고를 졸업하고 은행이나 농협에 취직하는 게 가장 성공한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해보니 책상에 딱 붙어 앉아서 사무직으로 일하는 것은 답답해 보였다. 그래서 나는 청주직업훈련원에 갔고 기능인으로 성공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길도 내 길이 아니었다. 그렇게 내가 헤매는 동안 다른 동창들은 경찰이 되고, 소방관이 되고, 보일러 기사가 되고, 가업을 이어 받은 친구도 있고, 은행에, 농협에 취직한 친구들도 있고 자동차 세일즈를 하는 친구도 있고, 전기 기사가 되어 전기 회사 임원이 된 친구도 있으며 비즈니스를 하는 친구도 있다. 우리는 새싹이 싹을 틔울 때 그 이쁜 모습을 보지만 그 새싹이 커서 어떻게 될지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미래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학관에 물어도 보고, 운세도 보고 하지만 누구도 뚜렷하게 미래를 보여 주지 못한다.

어제 아는 지인이 전화가 와서 지난번 글에 나온 지구 환경의 위기와 식량의 위기를 알래스카 크루즈를 다녀오면서 느끼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알래스카에도 빙하가 녹아서 아주 조금만 보이더라면서 별로 즐거운 여행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배에서 나오는 뷔페도 처음 며칠은 괜찮았지만 나중엔 별로였다고 하면서 대부분 노인들 인 승객들을 날마다 보는 것도 답답함을 더 느끼게 했다고 했다. 결국 코로나19가 걸려 와서 마중 나온 가족과 지인 친구들한테까지 옮겼다고 하면서 그 시간에 다른 것을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아무리 좋은 것도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성경>을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은 아주 깨끗하고 순결한 세상이었다. 어둠에서 빛을 창조하고 별을 창조하고 바다와 육지를 창조했으니, 그것은 마치 아무도 밟아 보지 않은 밀림의 처녀림 같은 곳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이 선악과를 먹었고 그로 인해 원죄가 생겨 세상은 죄악으로 물들었다고 말한다. 성경과 칼을 들고 세상을 정복해 나가던 가톨릭과 신대륙을 발견한 사람들도 사실은 인도에서 후추와 허브를 들여와서 유럽에 팔아 돈을 벌려는 욕심이었을 뿐 사명감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미 주인인 원주민이 있었음에도 그들을 모두 죽이고 땅을 차지한 도둑이다. 그럼에도 서양사에서는 그들의 개척 정신 청교도 정신을 가르친다. 문명사회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마치 원주민들은 원숭이 같은 존재고 자신들이 진짜 사람이었던 것처럼 말한다. 마치 중세 유럽에서 마녀사냥으로 수없이 많은 의술을 펼치고 있던 점성술사들을 산채로 불에 태우고 탄압했던 모습과 쇄국 정책으로 외세의 문물을 받아들이지 않던 조선에서 천주를 믿는 것은 마녀사냥의 표적과 같은 것이었다.

지금도 한 뿌리에서 나온 기독교와 유대교, 그리고 가톨릭, 동방 정교, 이슬람교 등 그 외 하나님을 믿는 종교는 서로가 정통 종교임을 내세우고 싸우고 전쟁을 일으키기도 한다. 종교가 인류에게 희망이 되기를 바랐지만 종교 전쟁은 아직도 지구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다. 누구 하나가 죽어야 끝나는 그런 전쟁은 수백 년을 계속 이어 오고 있다.







그중에서 가장 악랄한 종교가 있다. 바로 돈이다. 돈이면 뭐든 다 된다. 그래서 기업들은 돈을 위해 사업을 한다. 때론 정부에서 허가 하지 않은 마약 사업과 유흥 사업으로 돈을 많이 버는 갱단이 새로운 종교이자 새로운 권력이고 새로운 정부가 되어 버린 곳도 있다. 사람들을 피폐하게 만드는 검은 종교는 그 마수를 점점 더 뻗어 지구가 사과라면 이미 병들대로 병든 사과가 되어 버렸다. 민주주의의 주인은 국민이다. 누구나 한 표를 행사한다. 하지만 이론과 실제는 다르다. 돈 많고 권력이 있는 세력의 한편은 그 힘이 막강하다. 그 말 또한 강력한 힘을 가진다. 그래서 정의는 늘 그 권력 앞에 피투성이가 된다. 사람들은 자신이 노예가 되어 가는 줄도 모르고 세뇌되어 노예가 되어 간다.

세상의 주인은 오로지 나라는 생각, 아니 나조차도 내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저 눈에 보이는 돈과 권력에 집착하면서 인류가 살아 온 지구는 점점 병들어 있다. 농사를 지을 때 농사를 망치려고 농사를 짓지는 않는다. 하지만 지구가 병들고 가난한 자들이 굶어 죽어 가고 부자들은 음식을 마구 버리는 이 시대에도 다 하느님이 뜻이 있어서라고 말을 한다. 그런 하느님이면 나는 싫다. 천국이 죽어서 만 가는 곳이라면 그것도 싫다. 세상은 모두 우리가 마음먹기에 따라 지금도 천국이 될 수 있다.

한국에서도 전에는 바랑을 메고 다니며 걸식하던 스님들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동남아의 태국, 라오스 등에나 가야 걸식을 하는 스님들을 볼 수 있다. 걸식은 나를 위해 곡식을 쌓아 놓지 않는 것이다. 주면 먹고 못 얻으면 굶는 것이다. 아프리카에선 지금도 물이 없어 음식이 없어 굶고 물 때문에 총을 쏘는 생존 경쟁이 펼쳐지고 있다. 물론 동물의 세계에서는 늘 적자생존이라고 해서 그렇게 살고 있다. 하지만 만물의 영장이라면서 인간은 지구의 속살을 파먹고 자기를 위해 자식을 위해 쌓아 둘 뿐 지구를 위해 무엇을 창조하고 만들지를 생각하지 않고 있다. 그린피스가 아무리 나무를 자르지 말라고 바다에 오염수를 버리지 말라고 항의를 해도 법이란 이름으로 경찰이 잡아가면 끝이다. 사람들은 지구를 위하는 일은 그들의 일이라 미뤄버린다. 과연 그들만 이 지구에 살고 있을까? 사람이 지구상에 살면서 얼마나 많은 다툼과 전쟁이 개인의 욕심과 탐욕으로 인해 이루어지고 평화가 깨졌을까? 핍박받는 노동자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공산주의를 만든 마르크스의 본래 뜻과는 무관하게 레닌은 혼자만의 욕심을 위해 마르크스의 사상을 이용했을 뿐이다. 사람들이 참 나를 찾지 않으니, 들판의 산양 떼처럼 무리 지어 풀을 찾아 떠난다. 때로는 들개에 쫓기고 동료를 잃어도 그렇게 달린다. 그것이 자연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욕심에 작은 우리에 가두고 고기 생산을 하는 공장을 만들어 버렸다. 동물이 아닌 공장의 재료로. 사람도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날이 올까 두렵다. 사람이 아닌 사람을 닮은 로봇이 지배하는 세상에는 종교는 없고 탐욕만이 있는 세상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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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은 또 다른 나의 표현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리게 하며

꿈에 서나 보았을 세상을 만든다

창작 또 다른 나를 꿈꾸며 또 다른 세상을 만든다.

 





 

창작은 또 다른 나의 표현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리게 하며

꿈에 서나 보았을 세상을 만든다

창작 또 다른 나를 꿈꾸며 또 다른 세상을 만든다.

 







#작가의 변

불교에 대해서 모를 때 즉 기독교 신자이었고, 가톨릭 신자였을 때는 불교란 어머니 아버지가 일년에 한 번씩 가는 절이 곧 불교였다. 일 년에 한 번씩 가던 절 골의 바위로 된 미륵불이 불교이고 대각사의 일주문 앞을 지나면서 그곳이 부처님의 땅이었던 것 같다.

제사를 지내면서 아버지가 중얼중얼 귀신과 말하는 것을 들었다. 아버지는 제사 전엔 늘 대문부터 문을 열어 놓고 귀신을 맞이했다. 어린 내 생각엔 조상이라 해도 죽은 사람은 귀신이었다.

농사를 지으면 해마다 밭에 거름을 내고 소로 밭을 갈고 열무 씨를 뿌리면 열무가 나고 고추씨를 뿌리면 고추가 나서 황금 같은 고추씨를 주렁주렁 붉은 마음 안에 담아 또 다른 세상을 준비하고는 했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불만도 참 많았다. 부잣집에 태어나서 도련님 소리를 들으면서, 번쩍이는 구두도 신고, 어린아이가 입은 양복은 또 얼마나 멋있는지 말이다. 그것은 아버지가 머슴을 살았던 심 노인이 나를 야단치는 모습에서 그 노인이 보기에 나는 그저 머슴의 아들이었다다. 그가 자식이 없어 먼 친척을 아들로 입양하고 재숙이가 그 집 손녀로 들어오면서 재숙이하고 놀고 싶어도 심 노인이 하도 호통을 치니 그 집에 아예 들어가는 것조차 싫었다.

내가 초등학교 소풍을 가서 보물찾기에서 보물을 하나도 못 찾아서 질질 짜고 울 때 이거 너 해 하면서 자기가 찾은 보물을 하나 주던 착한 아이였는데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찾는 것을 잘 못한다. 다른 아이들은 나뭇잎을 들추면 보물 적힌 종이가 나오고 돌을 들추면 나오는데 난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없더라. 한 학생이 몇 장씩 찾는데 한 장도 못 찾아서 억울하고 서러워서 울었다.

자식을 기르는 것도 농사라고 한다. 자식이 잘 커서 성공하면 자식 농사를 잘 지었다고 말한다. 우리 아버지도 나를 그렇게 자식 농사 잘 지었다고 생각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생각이 나와는 맞지 않았을 뿐이다. 상업 고등학교를 졸업한 동창 동기동창들의 현재 상황을 보면 고등학교 때는 전혀 발견하지 못했던 그들의 진짜 모습을 발견하고는 한다.

상고를 졸업하고 은행이나 농협에 취직하는 게 가장 성공한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해보니 책상에 딱 붙어 앉아서 사무직으로 일하는 것은 답답해 보였다. 그래서 나는 청주직업훈련원에 갔고 기능인으로 성공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길도 내 길이 아니었다. 그렇게 내가 헤매는 동안 다른 동창들은 경찰이 되고, 소방관이 되고, 보일러 기사가 되고, 가업을 이어 받은 친구도 있고, 은행에, 농협에 취직한 친구들도 있고 자동차 세일즈를 하는 친구도 있고, 전기 기사가 되어 전기 회사 임원이 된 친구도 있으며 비즈니스를 하는 친구도 있다. 우리는 새싹이 싹을 틔울 때 그 이쁜 모습을 보지만 그 새싹이 커서 어떻게 될지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미래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학관에 물어도 보고, 운세도 보고 하지만 누구도 뚜렷하게 미래를 보여 주지 못한다.

어제 아는 지인이 전화가 와서 지난번 글에 나온 지구 환경의 위기와 식량의 위기를 알래스카 크루즈를 다녀오면서 느끼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알래스카에도 빙하가 녹아서 아주 조금만 보이더라면서 별로 즐거운 여행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배에서 나오는 뷔페도 처음 며칠은 괜찮았지만 나중엔 별로였다고 하면서 대부분 노인들 인 승객들을 날마다 보는 것도 답답함을 더 느끼게 했다고 했다. 결국 코로나19가 걸려 와서 마중 나온 가족과 지인 친구들한테까지 옮겼다고 하면서 그 시간에 다른 것을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아무리 좋은 것도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성경>을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은 아주 깨끗하고 순결한 세상이었다. 어둠에서 빛을 창조하고 별을 창조하고 바다와 육지를 창조했으니, 그것은 마치 아무도 밟아 보지 않은 밀림의 처녀림 같은 곳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이 선악과를 먹었고 그로 인해 원죄가 생겨 세상은 죄악으로 물들었다고 말한다. 성경과 칼을 들고 세상을 정복해 나가던 가톨릭과 신대륙을 발견한 사람들도 사실은 인도에서 후추와 허브를 들여와서 유럽에 팔아 돈을 벌려는 욕심이었을 뿐 사명감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미 주인인 원주민이 있었음에도 그들을 모두 죽이고 땅을 차지한 도둑이다. 그럼에도 서양사에서는 그들의 개척 정신 청교도 정신을 가르친다. 문명사회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마치 원주민들은 원숭이 같은 존재고 자신들이 진짜 사람이었던 것처럼 말한다. 마치 중세 유럽에서 마녀사냥으로 수없이 많은 의술을 펼치고 있던 점성술사들을 산채로 불에 태우고 탄압했던 모습과 쇄국 정책으로 외세의 문물을 받아들이지 않던 조선에서 천주를 믿는 것은 마녀사냥의 표적과 같은 것이었다.

지금도 한 뿌리에서 나온 기독교와 유대교, 그리고 가톨릭, 동방 정교, 이슬람교 등 그 외 하나님을 믿는 종교는 서로가 정통 종교임을 내세우고 싸우고 전쟁을 일으키기도 한다. 종교가 인류에게 희망이 되기를 바랐지만 종교 전쟁은 아직도 지구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다. 누구 하나가 죽어야 끝나는 그런 전쟁은 수백 년을 계속 이어 오고 있다.







그중에서 가장 악랄한 종교가 있다. 바로 돈이다. 돈이면 뭐든 다 된다. 그래서 기업들은 돈을 위해 사업을 한다. 때론 정부에서 허가 하지 않은 마약 사업과 유흥 사업으로 돈을 많이 버는 갱단이 새로운 종교이자 새로운 권력이고 새로운 정부가 되어 버린 곳도 있다. 사람들을 피폐하게 만드는 검은 종교는 그 마수를 점점 더 뻗어 지구가 사과라면 이미 병들대로 병든 사과가 되어 버렸다. 민주주의의 주인은 국민이다. 누구나 한 표를 행사한다. 하지만 이론과 실제는 다르다. 돈 많고 권력이 있는 세력의 한편은 그 힘이 막강하다. 그 말 또한 강력한 힘을 가진다. 그래서 정의는 늘 그 권력 앞에 피투성이가 된다. 사람들은 자신이 노예가 되어 가는 줄도 모르고 세뇌되어 노예가 되어 간다.

세상의 주인은 오로지 나라는 생각, 아니 나조차도 내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저 눈에 보이는 돈과 권력에 집착하면서 인류가 살아 온 지구는 점점 병들어 있다. 농사를 지을 때 농사를 망치려고 농사를 짓지는 않는다. 하지만 지구가 병들고 가난한 자들이 굶어 죽어 가고 부자들은 음식을 마구 버리는 이 시대에도 다 하느님이 뜻이 있어서라고 말을 한다. 그런 하느님이면 나는 싫다. 천국이 죽어서 만 가는 곳이라면 그것도 싫다. 세상은 모두 우리가 마음먹기에 따라 지금도 천국이 될 수 있다.

한국에서도 전에는 바랑을 메고 다니며 걸식하던 스님들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동남아의 태국, 라오스 등에나 가야 걸식을 하는 스님들을 볼 수 있다. 걸식은 나를 위해 곡식을 쌓아 놓지 않는 것이다. 주면 먹고 못 얻으면 굶는 것이다. 아프리카에선 지금도 물이 없어 음식이 없어 굶고 물 때문에 총을 쏘는 생존 경쟁이 펼쳐지고 있다. 물론 동물의 세계에서는 늘 적자생존이라고 해서 그렇게 살고 있다. 하지만 만물의 영장이라면서 인간은 지구의 속살을 파먹고 자기를 위해 자식을 위해 쌓아 둘 뿐 지구를 위해 무엇을 창조하고 만들지를 생각하지 않고 있다. 그린피스가 아무리 나무를 자르지 말라고 바다에 오염수를 버리지 말라고 항의를 해도 법이란 이름으로 경찰이 잡아가면 끝이다. 사람들은 지구를 위하는 일은 그들의 일이라 미뤄버린다. 과연 그들만 이 지구에 살고 있을까? 사람이 지구상에 살면서 얼마나 많은 다툼과 전쟁이 개인의 욕심과 탐욕으로 인해 이루어지고 평화가 깨졌을까? 핍박받는 노동자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공산주의를 만든 마르크스의 본래 뜻과는 무관하게 레닌은 혼자만의 욕심을 위해 마르크스의 사상을 이용했을 뿐이다. 사람들이 참 나를 찾지 않으니, 들판의 산양 떼처럼 무리 지어 풀을 찾아 떠난다. 때로는 들개에 쫓기고 동료를 잃어도 그렇게 달린다. 그것이 자연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욕심에 작은 우리에 가두고 고기 생산을 하는 공장을 만들어 버렸다. 동물이 아닌 공장의 재료로. 사람도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날이 올까 두렵다. 사람이 아닌 사람을 닮은 로봇이 지배하는 세상에는 종교는 없고 탐욕만이 있는 세상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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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변

불교에 대해서 모를 때 즉 기독교 신자이었고, 가톨릭 신자였을 때는 불교란 어머니 아버지가 일년에 한 번씩 가는 절이 곧 불교였다. 일 년에 한 번씩 가던 절 골의 바위로 된 미륵불이 불교이고 대각사의 일주문 앞을 지나면서 그곳이 부처님의 땅이었던 것 같다.

제사를 지내면서 아버지가 중얼중얼 귀신과 말하는 것을 들었다. 아버지는 제사 전엔 늘 대문부터 문을 열어 놓고 귀신을 맞이했다. 어린 내 생각엔 조상이라 해도 죽은 사람은 귀신이었다.

농사를 지으면 해마다 밭에 거름을 내고 소로 밭을 갈고 열무 씨를 뿌리면 열무가 나고 고추씨를 뿌리면 고추가 나서 황금 같은 고추씨를 주렁주렁 붉은 마음 안에 담아 또 다른 세상을 준비하고는 했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불만도 참 많았다. 부잣집에 태어나서 도련님 소리를 들으면서, 번쩍이는 구두도 신고, 어린아이가 입은 양복은 또 얼마나 멋있는지 말이다. 그것은 아버지가 머슴을 살았던 심 노인이 나를 야단치는 모습에서 그 노인이 보기에 나는 그저 머슴의 아들이었다다. 그가 자식이 없어 먼 친척을 아들로 입양하고 재숙이가 그 집 손녀로 들어오면서 재숙이하고 놀고 싶어도 심 노인이 하도 호통을 치니 그 집에 아예 들어가는 것조차 싫었다.

내가 초등학교 소풍을 가서 보물찾기에서 보물을 하나도 못 찾아서 질질 짜고 울 때 이거 너 해 하면서 자기가 찾은 보물을 하나 주던 착한 아이였는데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찾는 것을 잘 못한다. 다른 아이들은 나뭇잎을 들추면 보물 적힌 종이가 나오고 돌을 들추면 나오는데 난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없더라. 한 학생이 몇 장씩 찾는데 한 장도 못 찾아서 억울하고 서러워서 울었다.

자식을 기르는 것도 농사라고 한다. 자식이 잘 커서 성공하면 자식 농사를 잘 지었다고 말한다. 우리 아버지도 나를 그렇게 자식 농사 잘 지었다고 생각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생각이 나와는 맞지 않았을 뿐이다. 상업 고등학교를 졸업한 동창 동기동창들의 현재 상황을 보면 고등학교 때는 전혀 발견하지 못했던 그들의 진짜 모습을 발견하고는 한다.

상고를 졸업하고 은행이나 농협에 취직하는 게 가장 성공한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해보니 책상에 딱 붙어 앉아서 사무직으로 일하는 것은 답답해 보였다. 그래서 나는 청주직업훈련원에 갔고 기능인으로 성공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길도 내 길이 아니었다. 그렇게 내가 헤매는 동안 다른 동창들은 경찰이 되고, 소방관이 되고, 보일러 기사가 되고, 가업을 이어 받은 친구도 있고, 은행에, 농협에 취직한 친구들도 있고 자동차 세일즈를 하는 친구도 있고, 전기 기사가 되어 전기 회사 임원이 된 친구도 있으며 비즈니스를 하는 친구도 있다. 우리는 새싹이 싹을 틔울 때 그 이쁜 모습을 보지만 그 새싹이 커서 어떻게 될지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미래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학관에 물어도 보고, 운세도 보고 하지만 누구도 뚜렷하게 미래를 보여 주지 못한다.

어제 아는 지인이 전화가 와서 지난번 글에 나온 지구 환경의 위기와 식량의 위기를 알래스카 크루즈를 다녀오면서 느끼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알래스카에도 빙하가 녹아서 아주 조금만 보이더라면서 별로 즐거운 여행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배에서 나오는 뷔페도 처음 며칠은 괜찮았지만 나중엔 별로였다고 하면서 대부분 노인들 인 승객들을 날마다 보는 것도 답답함을 더 느끼게 했다고 했다. 결국 코로나19가 걸려 와서 마중 나온 가족과 지인 친구들한테까지 옮겼다고 하면서 그 시간에 다른 것을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아무리 좋은 것도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성경>을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은 아주 깨끗하고 순결한 세상이었다. 어둠에서 빛을 창조하고 별을 창조하고 바다와 육지를 창조했으니, 그것은 마치 아무도 밟아 보지 않은 밀림의 처녀림 같은 곳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이 선악과를 먹었고 그로 인해 원죄가 생겨 세상은 죄악으로 물들었다고 말한다. 성경과 칼을 들고 세상을 정복해 나가던 가톨릭과 신대륙을 발견한 사람들도 사실은 인도에서 후추와 허브를 들여와서 유럽에 팔아 돈을 벌려는 욕심이었을 뿐 사명감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미 주인인 원주민이 있었음에도 그들을 모두 죽이고 땅을 차지한 도둑이다. 그럼에도 서양사에서는 그들의 개척 정신 청교도 정신을 가르친다. 문명사회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마치 원주민들은 원숭이 같은 존재고 자신들이 진짜 사람이었던 것처럼 말한다. 마치 중세 유럽에서 마녀사냥으로 수없이 많은 의술을 펼치고 있던 점성술사들을 산채로 불에 태우고 탄압했던 모습과 쇄국 정책으로 외세의 문물을 받아들이지 않던 조선에서 천주를 믿는 것은 마녀사냥의 표적과 같은 것이었다.

지금도 한 뿌리에서 나온 기독교와 유대교, 그리고 가톨릭, 동방 정교, 이슬람교 등 그 외 하나님을 믿는 종교는 서로가 정통 종교임을 내세우고 싸우고 전쟁을 일으키기도 한다. 종교가 인류에게 희망이 되기를 바랐지만 종교 전쟁은 아직도 지구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다. 누구 하나가 죽어야 끝나는 그런 전쟁은 수백 년을 계속 이어 오고 있다.





 

창작은 또 다른 나의 표현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리게 하며

꿈에 서나 보았을 세상을 만든다

창작 또 다른 나를 꿈꾸며 또 다른 세상을 만든다.

 







#작가의 변

불교에 대해서 모를 때 즉 기독교 신자이었고, 가톨릭 신자였을 때는 불교란 어머니 아버지가 일년에 한 번씩 가는 절이 곧 불교였다. 일 년에 한 번씩 가던 절 골의 바위로 된 미륵불이 불교이고 대각사의 일주문 앞을 지나면서 그곳이 부처님의 땅이었던 것 같다.

제사를 지내면서 아버지가 중얼중얼 귀신과 말하는 것을 들었다. 아버지는 제사 전엔 늘 대문부터 문을 열어 놓고 귀신을 맞이했다. 어린 내 생각엔 조상이라 해도 죽은 사람은 귀신이었다.

농사를 지으면 해마다 밭에 거름을 내고 소로 밭을 갈고 열무 씨를 뿌리면 열무가 나고 고추씨를 뿌리면 고추가 나서 황금 같은 고추씨를 주렁주렁 붉은 마음 안에 담아 또 다른 세상을 준비하고는 했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불만도 참 많았다. 부잣집에 태어나서 도련님 소리를 들으면서, 번쩍이는 구두도 신고, 어린아이가 입은 양복은 또 얼마나 멋있는지 말이다. 그것은 아버지가 머슴을 살았던 심 노인이 나를 야단치는 모습에서 그 노인이 보기에 나는 그저 머슴의 아들이었다다. 그가 자식이 없어 먼 친척을 아들로 입양하고 재숙이가 그 집 손녀로 들어오면서 재숙이하고 놀고 싶어도 심 노인이 하도 호통을 치니 그 집에 아예 들어가는 것조차 싫었다.

내가 초등학교 소풍을 가서 보물찾기에서 보물을 하나도 못 찾아서 질질 짜고 울 때 이거 너 해 하면서 자기가 찾은 보물을 하나 주던 착한 아이였는데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찾는 것을 잘 못한다. 다른 아이들은 나뭇잎을 들추면 보물 적힌 종이가 나오고 돌을 들추면 나오는데 난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없더라. 한 학생이 몇 장씩 찾는데 한 장도 못 찾아서 억울하고 서러워서 울었다.

자식을 기르는 것도 농사라고 한다. 자식이 잘 커서 성공하면 자식 농사를 잘 지었다고 말한다. 우리 아버지도 나를 그렇게 자식 농사 잘 지었다고 생각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생각이 나와는 맞지 않았을 뿐이다. 상업 고등학교를 졸업한 동창 동기동창들의 현재 상황을 보면 고등학교 때는 전혀 발견하지 못했던 그들의 진짜 모습을 발견하고는 한다.

상고를 졸업하고 은행이나 농협에 취직하는 게 가장 성공한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해보니 책상에 딱 붙어 앉아서 사무직으로 일하는 것은 답답해 보였다. 그래서 나는 청주직업훈련원에 갔고 기능인으로 성공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길도 내 길이 아니었다. 그렇게 내가 헤매는 동안 다른 동창들은 경찰이 되고, 소방관이 되고, 보일러 기사가 되고, 가업을 이어 받은 친구도 있고, 은행에, 농협에 취직한 친구들도 있고 자동차 세일즈를 하는 친구도 있고, 전기 기사가 되어 전기 회사 임원이 된 친구도 있으며 비즈니스를 하는 친구도 있다. 우리는 새싹이 싹을 틔울 때 그 이쁜 모습을 보지만 그 새싹이 커서 어떻게 될지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미래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학관에 물어도 보고, 운세도 보고 하지만 누구도 뚜렷하게 미래를 보여 주지 못한다.

어제 아는 지인이 전화가 와서 지난번 글에 나온 지구 환경의 위기와 식량의 위기를 알래스카 크루즈를 다녀오면서 느끼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알래스카에도 빙하가 녹아서 아주 조금만 보이더라면서 별로 즐거운 여행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배에서 나오는 뷔페도 처음 며칠은 괜찮았지만 나중엔 별로였다고 하면서 대부분 노인들 인 승객들을 날마다 보는 것도 답답함을 더 느끼게 했다고 했다. 결국 코로나19가 걸려 와서 마중 나온 가족과 지인 친구들한테까지 옮겼다고 하면서 그 시간에 다른 것을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아무리 좋은 것도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성경>을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은 아주 깨끗하고 순결한 세상이었다. 어둠에서 빛을 창조하고 별을 창조하고 바다와 육지를 창조했으니, 그것은 마치 아무도 밟아 보지 않은 밀림의 처녀림 같은 곳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이 선악과를 먹었고 그로 인해 원죄가 생겨 세상은 죄악으로 물들었다고 말한다. 성경과 칼을 들고 세상을 정복해 나가던 가톨릭과 신대륙을 발견한 사람들도 사실은 인도에서 후추와 허브를 들여와서 유럽에 팔아 돈을 벌려는 욕심이었을 뿐 사명감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미 주인인 원주민이 있었음에도 그들을 모두 죽이고 땅을 차지한 도둑이다. 그럼에도 서양사에서는 그들의 개척 정신 청교도 정신을 가르친다. 문명사회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마치 원주민들은 원숭이 같은 존재고 자신들이 진짜 사람이었던 것처럼 말한다. 마치 중세 유럽에서 마녀사냥으로 수없이 많은 의술을 펼치고 있던 점성술사들을 산채로 불에 태우고 탄압했던 모습과 쇄국 정책으로 외세의 문물을 받아들이지 않던 조선에서 천주를 믿는 것은 마녀사냥의 표적과 같은 것이었다.

지금도 한 뿌리에서 나온 기독교와 유대교, 그리고 가톨릭, 동방 정교, 이슬람교 등 그 외 하나님을 믿는 종교는 서로가 정통 종교임을 내세우고 싸우고 전쟁을 일으키기도 한다. 종교가 인류에게 희망이 되기를 바랐지만 종교 전쟁은 아직도 지구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다. 누구 하나가 죽어야 끝나는 그런 전쟁은 수백 년을 계속 이어 오고 있다.







그중에서 가장 악랄한 종교가 있다. 바로 돈이다. 돈이면 뭐든 다 된다. 그래서 기업들은 돈을 위해 사업을 한다. 때론 정부에서 허가 하지 않은 마약 사업과 유흥 사업으로 돈을 많이 버는 갱단이 새로운 종교이자 새로운 권력이고 새로운 정부가 되어 버린 곳도 있다. 사람들을 피폐하게 만드는 검은 종교는 그 마수를 점점 더 뻗어 지구가 사과라면 이미 병들대로 병든 사과가 되어 버렸다. 민주주의의 주인은 국민이다. 누구나 한 표를 행사한다. 하지만 이론과 실제는 다르다. 돈 많고 권력이 있는 세력의 한편은 그 힘이 막강하다. 그 말 또한 강력한 힘을 가진다. 그래서 정의는 늘 그 권력 앞에 피투성이가 된다. 사람들은 자신이 노예가 되어 가는 줄도 모르고 세뇌되어 노예가 되어 간다.

세상의 주인은 오로지 나라는 생각, 아니 나조차도 내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저 눈에 보이는 돈과 권력에 집착하면서 인류가 살아 온 지구는 점점 병들어 있다. 농사를 지을 때 농사를 망치려고 농사를 짓지는 않는다. 하지만 지구가 병들고 가난한 자들이 굶어 죽어 가고 부자들은 음식을 마구 버리는 이 시대에도 다 하느님이 뜻이 있어서라고 말을 한다. 그런 하느님이면 나는 싫다. 천국이 죽어서 만 가는 곳이라면 그것도 싫다. 세상은 모두 우리가 마음먹기에 따라 지금도 천국이 될 수 있다.

한국에서도 전에는 바랑을 메고 다니며 걸식하던 스님들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동남아의 태국, 라오스 등에나 가야 걸식을 하는 스님들을 볼 수 있다. 걸식은 나를 위해 곡식을 쌓아 놓지 않는 것이다. 주면 먹고 못 얻으면 굶는 것이다. 아프리카에선 지금도 물이 없어 음식이 없어 굶고 물 때문에 총을 쏘는 생존 경쟁이 펼쳐지고 있다. 물론 동물의 세계에서는 늘 적자생존이라고 해서 그렇게 살고 있다. 하지만 만물의 영장이라면서 인간은 지구의 속살을 파먹고 자기를 위해 자식을 위해 쌓아 둘 뿐 지구를 위해 무엇을 창조하고 만들지를 생각하지 않고 있다. 그린피스가 아무리 나무를 자르지 말라고 바다에 오염수를 버리지 말라고 항의를 해도 법이란 이름으로 경찰이 잡아가면 끝이다. 사람들은 지구를 위하는 일은 그들의 일이라 미뤄버린다. 과연 그들만 이 지구에 살고 있을까? 사람이 지구상에 살면서 얼마나 많은 다툼과 전쟁이 개인의 욕심과 탐욕으로 인해 이루어지고 평화가 깨졌을까? 핍박받는 노동자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공산주의를 만든 마르크스의 본래 뜻과는 무관하게 레닌은 혼자만의 욕심을 위해 마르크스의 사상을 이용했을 뿐이다. 사람들이 참 나를 찾지 않으니, 들판의 산양 떼처럼 무리 지어 풀을 찾아 떠난다. 때로는 들개에 쫓기고 동료를 잃어도 그렇게 달린다. 그것이 자연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욕심에 작은 우리에 가두고 고기 생산을 하는 공장을 만들어 버렸다. 동물이 아닌 공장의 재료로. 사람도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날이 올까 두렵다. 사람이 아닌 사람을 닮은 로봇이 지배하는 세상에는 종교는 없고 탐욕만이 있는 세상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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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서 가장 악랄한 종교가 있다. 바로 돈이다. 돈이면 뭐든 다 된다. 그래서 기업들은 돈을 위해 사업을 한다. 때론 정부에서 허가 하지 않은 마약 사업과 유흥 사업으로 돈을 많이 버는 갱단이 새로운 종교이자 새로운 권력이고 새로운 정부가 되어 버린 곳도 있다. 사람들을 피폐하게 만드는 검은 종교는 그 마수를 점점 더 뻗어 지구가 사과라면 이미 병들대로 병든 사과가 되어 버렸다. 민주주의의 주인은 국민이다. 누구나 한 표를 행사한다. 하지만 이론과 실제는 다르다. 돈 많고 권력이 있는 세력의 한편은 그 힘이 막강하다. 그 말 또한 강력한 힘을 가진다. 그래서 정의는 늘 그 권력 앞에 피투성이가 된다. 사람들은 자신이 노예가 되어 가는 줄도 모르고 세뇌되어 노예가 되어 간다.

세상의 주인은 오로지 나라는 생각, 아니 나조차도 내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저 눈에 보이는 돈과 권력에 집착하면서 인류가 살아 온 지구는 점점 병들어 있다. 농사를 지을 때 농사를 망치려고 농사를 짓지는 않는다. 하지만 지구가 병들고 가난한 자들이 굶어 죽어 가고 부자들은 음식을 마구 버리는 이 시대에도 다 하느님이 뜻이 있어서라고 말을 한다. 그런 하느님이면 나는 싫다. 천국이 죽어서 만 가는 곳이라면 그것도 싫다. 세상은 모두 우리가 마음먹기에 따라 지금도 천국이 될 수 있다.

한국에서도 전에는 바랑을 메고 다니며 걸식하던 스님들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동남아의 태국, 라오스 등에나 가야 걸식을 하는 스님들을 볼 수 있다. 걸식은 나를 위해 곡식을 쌓아 놓지 않는 것이다. 주면 먹고 못 얻으면 굶는 것이다. 아프리카에선 지금도 물이 없어 음식이 없어 굶고 물 때문에 총을 쏘는 생존 경쟁이 펼쳐지고 있다. 물론 동물의 세계에서는 늘 적자생존이라고 해서 그렇게 살고 있다. 하지만 만물의 영장이라면서 인간은 지구의 속살을 파먹고 자기를 위해 자식을 위해 쌓아 둘 뿐 지구를 위해 무엇을 창조하고 만들지를 생각하지 않고 있다. 그린피스가 아무리 나무를 자르지 말라고 바다에 오염수를 버리지 말라고 항의를 해도 법이란 이름으로 경찰이 잡아가면 끝이다. 사람들은 지구를 위하는 일은 그들의 일이라 미뤄버린다. 과연 그들만 이 지구에 살고 있을까? 사람이 지구상에 살면서 얼마나 많은 다툼과 전쟁이 개인의 욕심과 탐욕으로 인해 이루어지고 평화가 깨졌을까? 핍박받는 노동자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공산주의를 만든 마르크스의 본래 뜻과는 무관하게 레닌은 혼자만의 욕심을 위해 마르크스의 사상을 이용했을 뿐이다. 사람들이 참 나를 찾지 않으니, 들판의 산양 떼처럼 무리 지어 풀을 찾아 떠난다. 때로는 들개에 쫓기고 동료를 잃어도 그렇게 달린다. 그것이 자연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욕심에 작은 우리에 가두고 고기 생산을 하는 공장을 만들어 버렸다. 동물이 아닌 공장의 재료로. 사람도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날이 올까 두렵다. 사람이 아닌 사람을 닮은 로봇이 지배하는 세상에는 종교는 없고 탐욕만이 있는 세상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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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은 또 다른 나의 표현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리게 하며

꿈에 서나 보았을 세상을 만든다

창작 또 다른 나를 꿈꾸며 또 다른 세상을 만든다.

 







#작가의 변

불교에 대해서 모를 때 즉 기독교 신자이었고, 가톨릭 신자였을 때는 불교란 어머니 아버지가 일년에 한 번씩 가는 절이 곧 불교였다. 일 년에 한 번씩 가던 절 골의 바위로 된 미륵불이 불교이고 대각사의 일주문 앞을 지나면서 그곳이 부처님의 땅이었던 것 같다.

제사를 지내면서 아버지가 중얼중얼 귀신과 말하는 것을 들었다. 아버지는 제사 전엔 늘 대문부터 문을 열어 놓고 귀신을 맞이했다. 어린 내 생각엔 조상이라 해도 죽은 사람은 귀신이었다.

농사를 지으면 해마다 밭에 거름을 내고 소로 밭을 갈고 열무 씨를 뿌리면 열무가 나고 고추씨를 뿌리면 고추가 나서 황금 같은 고추씨를 주렁주렁 붉은 마음 안에 담아 또 다른 세상을 준비하고는 했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불만도 참 많았다. 부잣집에 태어나서 도련님 소리를 들으면서, 번쩍이는 구두도 신고, 어린아이가 입은 양복은 또 얼마나 멋있는지 말이다. 그것은 아버지가 머슴을 살았던 심 노인이 나를 야단치는 모습에서 그 노인이 보기에 나는 그저 머슴의 아들이었다다. 그가 자식이 없어 먼 친척을 아들로 입양하고 재숙이가 그 집 손녀로 들어오면서 재숙이하고 놀고 싶어도 심 노인이 하도 호통을 치니 그 집에 아예 들어가는 것조차 싫었다.

내가 초등학교 소풍을 가서 보물찾기에서 보물을 하나도 못 찾아서 질질 짜고 울 때 이거 너 해 하면서 자기가 찾은 보물을 하나 주던 착한 아이였는데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찾는 것을 잘 못한다. 다른 아이들은 나뭇잎을 들추면 보물 적힌 종이가 나오고 돌을 들추면 나오는데 난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없더라. 한 학생이 몇 장씩 찾는데 한 장도 못 찾아서 억울하고 서러워서 울었다.

자식을 기르는 것도 농사라고 한다. 자식이 잘 커서 성공하면 자식 농사를 잘 지었다고 말한다. 우리 아버지도 나를 그렇게 자식 농사 잘 지었다고 생각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생각이 나와는 맞지 않았을 뿐이다. 상업 고등학교를 졸업한 동창 동기동창들의 현재 상황을 보면 고등학교 때는 전혀 발견하지 못했던 그들의 진짜 모습을 발견하고는 한다.

상고를 졸업하고 은행이나 농협에 취직하는 게 가장 성공한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해보니 책상에 딱 붙어 앉아서 사무직으로 일하는 것은 답답해 보였다. 그래서 나는 청주직업훈련원에 갔고 기능인으로 성공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길도 내 길이 아니었다. 그렇게 내가 헤매는 동안 다른 동창들은 경찰이 되고, 소방관이 되고, 보일러 기사가 되고, 가업을 이어 받은 친구도 있고, 은행에, 농협에 취직한 친구들도 있고 자동차 세일즈를 하는 친구도 있고, 전기 기사가 되어 전기 회사 임원이 된 친구도 있으며 비즈니스를 하는 친구도 있다. 우리는 새싹이 싹을 틔울 때 그 이쁜 모습을 보지만 그 새싹이 커서 어떻게 될지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미래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학관에 물어도 보고, 운세도 보고 하지만 누구도 뚜렷하게 미래를 보여 주지 못한다.

어제 아는 지인이 전화가 와서 지난번 글에 나온 지구 환경의 위기와 식량의 위기를 알래스카 크루즈를 다녀오면서 느끼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알래스카에도 빙하가 녹아서 아주 조금만 보이더라면서 별로 즐거운 여행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배에서 나오는 뷔페도 처음 며칠은 괜찮았지만 나중엔 별로였다고 하면서 대부분 노인들 인 승객들을 날마다 보는 것도 답답함을 더 느끼게 했다고 했다. 결국 코로나19가 걸려 와서 마중 나온 가족과 지인 친구들한테까지 옮겼다고 하면서 그 시간에 다른 것을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아무리 좋은 것도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성경>을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은 아주 깨끗하고 순결한 세상이었다. 어둠에서 빛을 창조하고 별을 창조하고 바다와 육지를 창조했으니, 그것은 마치 아무도 밟아 보지 않은 밀림의 처녀림 같은 곳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이 선악과를 먹었고 그로 인해 원죄가 생겨 세상은 죄악으로 물들었다고 말한다. 성경과 칼을 들고 세상을 정복해 나가던 가톨릭과 신대륙을 발견한 사람들도 사실은 인도에서 후추와 허브를 들여와서 유럽에 팔아 돈을 벌려는 욕심이었을 뿐 사명감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미 주인인 원주민이 있었음에도 그들을 모두 죽이고 땅을 차지한 도둑이다. 그럼에도 서양사에서는 그들의 개척 정신 청교도 정신을 가르친다. 문명사회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마치 원주민들은 원숭이 같은 존재고 자신들이 진짜 사람이었던 것처럼 말한다. 마치 중세 유럽에서 마녀사냥으로 수없이 많은 의술을 펼치고 있던 점성술사들을 산채로 불에 태우고 탄압했던 모습과 쇄국 정책으로 외세의 문물을 받아들이지 않던 조선에서 천주를 믿는 것은 마녀사냥의 표적과 같은 것이었다.

지금도 한 뿌리에서 나온 기독교와 유대교, 그리고 가톨릭, 동방 정교, 이슬람교 등 그 외 하나님을 믿는 종교는 서로가 정통 종교임을 내세우고 싸우고 전쟁을 일으키기도 한다. 종교가 인류에게 희망이 되기를 바랐지만 종교 전쟁은 아직도 지구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다. 누구 하나가 죽어야 끝나는 그런 전쟁은 수백 년을 계속 이어 오고 있다.







그중에서 가장 악랄한 종교가 있다. 바로 돈이다. 돈이면 뭐든 다 된다. 그래서 기업들은 돈을 위해 사업을 한다. 때론 정부에서 허가 하지 않은 마약 사업과 유흥 사업으로 돈을 많이 버는 갱단이 새로운 종교이자 새로운 권력이고 새로운 정부가 되어 버린 곳도 있다. 사람들을 피폐하게 만드는 검은 종교는 그 마수를 점점 더 뻗어 지구가 사과라면 이미 병들대로 병든 사과가 되어 버렸다. 민주주의의 주인은 국민이다. 누구나 한 표를 행사한다. 하지만 이론과 실제는 다르다. 돈 많고 권력이 있는 세력의 한편은 그 힘이 막강하다. 그 말 또한 강력한 힘을 가진다. 그래서 정의는 늘 그 권력 앞에 피투성이가 된다. 사람들은 자신이 노예가 되어 가는 줄도 모르고 세뇌되어 노예가 되어 간다.

세상의 주인은 오로지 나라는 생각, 아니 나조차도 내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저 눈에 보이는 돈과 권력에 집착하면서 인류가 살아 온 지구는 점점 병들어 있다. 농사를 지을 때 농사를 망치려고 농사를 짓지는 않는다. 하지만 지구가 병들고 가난한 자들이 굶어 죽어 가고 부자들은 음식을 마구 버리는 이 시대에도 다 하느님이 뜻이 있어서라고 말을 한다. 그런 하느님이면 나는 싫다. 천국이 죽어서 만 가는 곳이라면 그것도 싫다. 세상은 모두 우리가 마음먹기에 따라 지금도 천국이 될 수 있다.

한국에서도 전에는 바랑을 메고 다니며 걸식하던 스님들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동남아의 태국, 라오스 등에나 가야 걸식을 하는 스님들을 볼 수 있다. 걸식은 나를 위해 곡식을 쌓아 놓지 않는 것이다. 주면 먹고 못 얻으면 굶는 것이다. 아프리카에선 지금도 물이 없어 음식이 없어 굶고 물 때문에 총을 쏘는 생존 경쟁이 펼쳐지고 있다. 물론 동물의 세계에서는 늘 적자생존이라고 해서 그렇게 살고 있다. 하지만 만물의 영장이라면서 인간은 지구의 속살을 파먹고 자기를 위해 자식을 위해 쌓아 둘 뿐 지구를 위해 무엇을 창조하고 만들지를 생각하지 않고 있다. 그린피스가 아무리 나무를 자르지 말라고 바다에 오염수를 버리지 말라고 항의를 해도 법이란 이름으로 경찰이 잡아가면 끝이다. 사람들은 지구를 위하는 일은 그들의 일이라 미뤄버린다. 과연 그들만 이 지구에 살고 있을까? 사람이 지구상에 살면서 얼마나 많은 다툼과 전쟁이 개인의 욕심과 탐욕으로 인해 이루어지고 평화가 깨졌을까? 핍박받는 노동자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공산주의를 만든 마르크스의 본래 뜻과는 무관하게 레닌은 혼자만의 욕심을 위해 마르크스의 사상을 이용했을 뿐이다. 사람들이 참 나를 찾지 않으니, 들판의 산양 떼처럼 무리 지어 풀을 찾아 떠난다. 때로는 들개에 쫓기고 동료를 잃어도 그렇게 달린다. 그것이 자연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욕심에 작은 우리에 가두고 고기 생산을 하는 공장을 만들어 버렸다. 동물이 아닌 공장의 재료로. 사람도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날이 올까 두렵다. 사람이 아닌 사람을 닮은 로봇이 지배하는 세상에는 종교는 없고 탐욕만이 있는 세상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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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사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 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 학원에 다니며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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