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였던 이씨 부인은 일찌기 북청 산골의 친정집을 떠나 금강산 깊은 산속의 비구니 사찰에서 승려가 되었다.
그녀는 발가락 사이에 불붙인 심지를 끼눠 놓는 등 고문으로 반죽음이 됐다. 남편 홍범도를 전향시키라는 회유와 협박을 거절한 대가였다.
그때 이씨 부인은 스스로 혀를 끊어 고문에 맞섰다는 주장도 있다. 벙어리가 된 채 갑산 읍내로 이송돼 옥에 갇혔다. 고문의 여독을 이기지 못하고 머잖아 세상을 떴다. 그녀의 나이 30대 후반으로 추정된다.
금강산 신계사 지담 스님의 상좌였던 홍범도는 24살에 이씨 부인을 만난 곳도 금강산이었다. 평양주둔 조선군 친군서영 제1대대 군인출신으로, 제지 수공업자로 일하던 그는 산중 사찰에서 은신 중이었다. 부당한 대우와 체불임금에 항의해 공장주를 죽인 혐의로 쫓기고 있었다. 백범 김구가 일본군을 살해, 인천형무소에 투옥돼 사형선고를 받았다 탈옥해 마곡사에서 은거하며 원정이라는 법명을 받은 것 처럼.
두 사람은 승복을 벗고 하산했다. 이씨 부인의 친정 동네인 함경북도 안산사 노은리 인필골에 정착했다. 짧은 가정생활에서 큰아들 양순과 작은아들 용환을 낳았다.
이씨 부인의 협력을 얻어내지 못한 토벌대는 맏아들 양순을 이용하기로 했다. 이씨 부인인 남편에게 직접 쓴 듯이 꾸민 편지를 아들에게 줘 산속으로 올려보냈다. 이미 여덟차례 같은 공작을 펼쳤으나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한 상태였다.
양순을 마주한 홍범도는 격노하며 아들에게 방아쇠를 당겼다. "이놈아! 네가 전 달에는 내 자식이었지마는, 네가 일본 감옥에 서너 달 갇혀 있더니, 그놈들 말을 듣고 나에게 해를 끼치려는 놈이 됐구나. 너부터 쏘아 죽여야겠다!" 한쪽 귀가 떨어져나갔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17세의 양순은 그 길로 의병 대열에 합류했다. 함흥 신성리 등 여러곳의 전투에 참여했으나 중대장이던 양순은 1908년 6월 16일 정평 바맥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홍범도 귀순 공작은 한국 준둔 일본군 북청수비구 사령관 야마모토 대좌가 지휘했다. 예하 제3순사대 대장 임재덕(일진회 간부)과 김원흥(대한제국 고급장교 출신)이 홍범도 가족을 이용해 홍범도 장군의 귀순 공작에 앞장섰다. 결국 작전은 실패하고 가족은 몰락했다. 홍범도 장군에게 붙잡힌 일본군 토벌대 지휘자 임재덕과 김원흥도 그 자리에서 생을 마감했다.
승려에서 독립투사로 변신한 홍범도 장군은 의병활동으로 1900년대 초 비구니 출신의 아내와 큰아들을 잃었다. 2023년 육군사관학교와 국방부 앞에 설치됐던 흉상마저 윤석열 정부가 끌어내리겠다는 심산이다. 의병대장을 귀순시키려고 일제가 조선인을 시켜 아내를 고문하고 아들을 전장으로 내몬 상황이 흉상을 철거하려는 지금의 작태와 기시감이 든다.
*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가 <한겨레21>에 기고한 글을 참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