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122. 일과 삶
[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122. 일과 삶
  • 전재민 시인
  • 승인 2023.07.17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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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죽는 것이야 내 맘대로 할 수 없지만 일하는 것은 내 맘대로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젠 그조차 내 뜻대로 할 수 없음을 안다.

태양이 뜨거우면 더워서 태양이 없으면 추워서 못 살겠다고 말하면서

뜨거운 여름 그늘에서 바람 맞으니 시원해서 좋다.

한순간도 마음 놓지 못하는 정글 안 동물 가족처럼

고단하고 힘겨운 삶일지라도 살아 내려 몸부림치는 순간처럼./

 

#작가의 변
지난해 8곳에 입사하고 퇴사하기를 반복했다. 지나고 보면 그냥 남들처럼 참고 있었으면 괜찮았을 때도 있었는데, 부당함을 따지다가 해고되고 아무리 열심히 해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상사에게 해고되고, 각자 맡은 일을 알아서 하는 직장에서 나의 일을 가끔 하는 캐쥬얼 임시직 직장이 많아서 익숙해질 겨를이 없었던 곳도 있다. 그중에 가장 마음이 편했던 곳은 아웃라인만 해서 주고 혼자 알아서 음식을 만들어 놓고 청소하고 퇴근하는 곳이었다. 일하는 곳과 집의 거리가 걸어서 10분도 걸리지 않아 정말 좋다고 생각했지만, 일주일에 한 번 일하는 곳에서 오래 일할 수 없어 계속 일을 더 할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했다.

문제는 풀 타임 슈퍼바이저로 일하던 곳에서 부당하게 일자리를 잃고 임시직으로 일하게 됐다. 부당함에 다른 곳에 정규직으로 일을 하다 뇌경색이 왔던 4년 전부터 일자리는 불안정했다. 임시직 일자리는 있지만 정규직 일자리를 잡는 것은 힘들다. 게다가 건강 이상을 감지하고, 건강을 되찾았다고는 해도 마음속은 불안이 있었는데 지난해 건강이 회복된 듯해서 의욕적으로 정규직으로 일하고 싶기도 했고, 만약 사태에 대비해 세컨잡을 가지려고 하다 보니 무리한 부분도 있고, 해고되고 새로 직장을 구해 적응하는 것이 스트레스를 쾌 높인 것 같다. 젊을 때는 그럴 수 있었지만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잊고 마음만 젊었던 것은 아닌가 싶다.

병가 보험이 3달 만인 1월에 끝나고 정규 실업 보험으로 전환하려고 했더니 회사에서 해고하지 않아서 전환이 안 됐었는데, 정규 실업 보험이 끝나는 달이 되니 오늘 해고한다고 통보를 해왔다. 해고할 거 진즉 해줬으면 실업 보험이라도 타는데, 일은 못 하고 건강은 호전이 안 되고 정말 힘들었다.







어릴 때 집에 소를 길렀다. 시골에서 소는 논 갈고 밭 갈고 힘든 일은 모두 해내는 소위 경운기이자 트랙터였다. 집에 돈이 꼭 필요하면 팔아서 쓰기도 했으니, 소를 위해 풀을 베어다 먹이고 소 죽에 당겨 가루 조금 타 주는 것으로는 그 노고에 감사함을 다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늘 소와 싸웠다. 쟁기질할 때 멍에를 씌워도 소가 힘들어서 조금 서서 쉬면 이놈의 소XXX가를 연신 해댔다. 달리는 말이 “어뎌, 어뎌, 어뎌” 정도고 소고삐를 잡아당기기도 한다. 소 코뚜레를 다듬던 아버지의 모습과 소에게 곤 두레를 씌우던 모습도 기억난다. 사람들은 마취하는데, 소는 마취도 하지 않은 생살에 그 두꺼운 코뚜레로 뚫어서 소 고삐를 묶는다. 밭과 논에서 일할 때도 허기지고 물이 말라 힘들어하는 데도 멍에를 씌워 일을 재촉하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지금도 시골에서 소로 농사를 짓는 집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소는 가족같이 친구같이 늘 집에서 가장 가까이 있었고 가장 힘든 일을 하는 집에서 가장 힘이 센 동물이었다. 먹고 싸는 일이 생리적인 현상임에도 외양간에 묶어 놓고 똥 싸고 오줌싸서 치워야 할 때면 구박을 들어야 했다. 시간은 강물처럼 흘러 그 시간 속에 소도 그 시간 속에 아버지도 지금은 현실에 없다. 현재 사람들은 소를 고기로 만들기 위해서 키워간다. 닭도 당시에 길러서 집안에 곤충들도 먹고 곡식도 먹고 살았지만, 계란을 낳아 주니 고마운 존재였고 제사 때 제사상에 올릴 제물이 되어 주니 더할 나위 없는 희생이기도 했다.

요즘도 다큐멘터리를 보면 티베트나 네팔 등지에서는 아직도 집에서 기르는 양이나 소가 야생 동물의 공격에 희생되는 모습을 자주 본다. 하지만 한국은 야생 동물의 피해라고 해봐야 멧돼지 정도가 되어 버렸다. 내가 어릴 적엔 뒷산 홍골 골짜기에 호랑이가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픞래쉬 없이 어두운 밤에 아랫마을에 막걸리 심부름을 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멀리서 두 눈에 불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놀라서 잰걸음으로 집으로 달려 간 기억이 있다. 그리고 가장 두려웠던 것이 뱀이다. 가랑잎 아래 똬리를 틀고 있다가 머리를 쳐들고 있는 까치 독사는 논두렁을 깎을 때도 혹시나 하고 두려움을 갖게 한다. 그래서 독사를 만나면 잔인하게 낮으로 자르거나 지게 작대기에 달린 뾰족한 못으로 머리를 짓이기기도 했다. 두려워서였다. 두려워하지 않는 어른들은 순식간에 머리 뒷부분을 손으로 꼭 잡고 비료 포대에 담아서 팔러 갔다.

비료 포대는 겨울에는 보리 짚을 넣어 푹신하게 만들어 예배당 가는 산길에서 썰매를 타기 딱 좋았다. 그러고 나면 길은 빙판이 되어 어른들에게 욕먹기 딱 좋은 상황이기도 했다. 어릴 때 아버지의 일하는 모습을 보면 치열하게 하는 것 같지 않았다. 물론 나도 밭에서 쪼그리고 앉아 풀을 뽑고 김을 매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 그래서 일찌감치 농사는 내 직업이 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물론 만약 우리 집에 땅이 많아 농사를 지을 사람이 없었다면 농사를 지으러 다시 내려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작농인 시골에 남아서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부모님도 나도 원하는 일이 아니었다. 무작정 떠난 고향, 객지 생활을 하다가 서른쯤의 나이에 캐나다 이민을 오고 아들이 서른 살 이고 보면 아들과 나의 그 시절을 비교하게 된다. 나의 어린 시절보다는 훨씬 나은 유년 시절과 청소년기를 보낸 아들이 다른 잘사는 부모를 둔 친구들과 비교하면 열심히 살아 온 것이,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가고 민둥머리만 남은 것처럼 휑하니 느낌이 좋지 않다. 나는 나름 치열하게 살아왔는데도 남은 것이 없는 빈손이다. 그렇다고 내가 살아 온 강물에서 가만히 누워서 온 것은 결코 아니다. 협곡도 만나고 장마와 폭우도 만나고 가뭄도 만나고 뗏목이 다 부서져 힘겹게 허우적대며 목숨을 부지해온 삶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끄럽게 살아 오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모든 게 풍요로운 요즘, 가족이 함께 모여서 식사하는 것이 쉽지 않다. 다들 컴퓨터 앞에서 바쁘다. 삶이 변했다. 그래서 행복의 기준이 바뀌었는지도 모른다. 물질이 없으면 불행하다고 하는 기본 전제를 깔고 생각하는 세상이다. 부자들은 행복하냐고 하면, 그런 것 같지도 않다. 물론 하고 싶은 일들을 돈이 없는 사람보다는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물론 나도 돈이 있다면 여행도 더하고 책도 더 내고 하고 싶은 것들이 많다. 그렇다고 현재가 그렇게 불행하냐 그렇지만은 않다.

일을 해서 일을 통해 얻는 행복을 현재는 느끼지 못한다. 바람은 빨리 건강을 회복해서 일을 통한 행복을 다시 얻는 것이다. 시간이 많다고 행복한 게 아니다. 짧은 시간을 쪼개서 알차게 쓸 때 더욱 쾌감을 느끼게 된다. 돈이 없으면 시간이 많고 시간이 많으면 돈이 없다고 하지만 모든 것이 충족되는 경우는 드물다. 행복한 삶은 스스로가 만들어 가는 것이다. 우울증으로 고통이 심할 땐 물을 보면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 지배했다. 차가 달려오면 달려들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지금은 약물 치료 중이라 그런 느낌은 없다. 때때로 무념무상을 느끼기도 한다.

약물의 도움을 받았어도 마음이 점차 평화로움을 느끼는 시간이 늘어난다. 평화로움이 늘길 기대한다. 새끼를 낳고 새끼를 길러낸 철새가 먼 길을 떠날 때는 뼛속까지 비우고 바람길을 따라간다. 먼 길에 필요하다고 배낭 가득 짐을 지고 떠나면 라면 한 봉의 무게도 무거워 발걸음마다 짓누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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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죽는 것이야 내 맘대로 할 수 없지만 일하는 것은 내 맘대로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젠 그조차 내 뜻대로 할 수 없음을 안다.

태양이 뜨거우면 더워서 태양이 없으면 추워서 못 살겠다고 말하면서

뜨거운 여름 그늘에서 바람 맞으니 시원해서 좋다.

한순간도 마음 놓지 못하는 정글 안 동물 가족처럼

고단하고 힘겨운 삶일지라도 살아 내려 몸부림치는 순간처럼./

 

#작가의 변
지난해 8곳에 입사하고 퇴사하기를 반복했다. 지나고 보면 그냥 남들처럼 참고 있었으면 괜찮았을 때도 있었는데, 부당함을 따지다가 해고되고 아무리 열심히 해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상사에게 해고되고, 각자 맡은 일을 알아서 하는 직장에서 나의 일을 가끔 하는 캐쥬얼 임시직 직장이 많아서 익숙해질 겨를이 없었던 곳도 있다. 그중에 가장 마음이 편했던 곳은 아웃라인만 해서 주고 혼자 알아서 음식을 만들어 놓고 청소하고 퇴근하는 곳이었다. 일하는 곳과 집의 거리가 걸어서 10분도 걸리지 않아 정말 좋다고 생각했지만, 일주일에 한 번 일하는 곳에서 오래 일할 수 없어 계속 일을 더 할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했다.

문제는 풀 타임 슈퍼바이저로 일하던 곳에서 부당하게 일자리를 잃고 임시직으로 일하게 됐다. 부당함에 다른 곳에 정규직으로 일을 하다 뇌경색이 왔던 4년 전부터 일자리는 불안정했다. 임시직 일자리는 있지만 정규직 일자리를 잡는 것은 힘들다. 게다가 건강 이상을 감지하고, 건강을 되찾았다고는 해도 마음속은 불안이 있었는데 지난해 건강이 회복된 듯해서 의욕적으로 정규직으로 일하고 싶기도 했고, 만약 사태에 대비해 세컨잡을 가지려고 하다 보니 무리한 부분도 있고, 해고되고 새로 직장을 구해 적응하는 것이 스트레스를 쾌 높인 것 같다. 젊을 때는 그럴 수 있었지만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잊고 마음만 젊었던 것은 아닌가 싶다.

병가 보험이 3달 만인 1월에 끝나고 정규 실업 보험으로 전환하려고 했더니 회사에서 해고하지 않아서 전환이 안 됐었는데, 정규 실업 보험이 끝나는 달이 되니 오늘 해고한다고 통보를 해왔다. 해고할 거 진즉 해줬으면 실업 보험이라도 타는데, 일은 못 하고 건강은 호전이 안 되고 정말 힘들었다.





살고 죽는 것이야 내 맘대로 할 수 없지만 일하는 것은 내 맘대로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젠 그조차 내 뜻대로 할 수 없음을 안다.

태양이 뜨거우면 더워서 태양이 없으면 추워서 못 살겠다고 말하면서

뜨거운 여름 그늘에서 바람 맞으니 시원해서 좋다.

한순간도 마음 놓지 못하는 정글 안 동물 가족처럼

고단하고 힘겨운 삶일지라도 살아 내려 몸부림치는 순간처럼./

 

#작가의 변
지난해 8곳에 입사하고 퇴사하기를 반복했다. 지나고 보면 그냥 남들처럼 참고 있었으면 괜찮았을 때도 있었는데, 부당함을 따지다가 해고되고 아무리 열심히 해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상사에게 해고되고, 각자 맡은 일을 알아서 하는 직장에서 나의 일을 가끔 하는 캐쥬얼 임시직 직장이 많아서 익숙해질 겨를이 없었던 곳도 있다. 그중에 가장 마음이 편했던 곳은 아웃라인만 해서 주고 혼자 알아서 음식을 만들어 놓고 청소하고 퇴근하는 곳이었다. 일하는 곳과 집의 거리가 걸어서 10분도 걸리지 않아 정말 좋다고 생각했지만, 일주일에 한 번 일하는 곳에서 오래 일할 수 없어 계속 일을 더 할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했다.

문제는 풀 타임 슈퍼바이저로 일하던 곳에서 부당하게 일자리를 잃고 임시직으로 일하게 됐다. 부당함에 다른 곳에 정규직으로 일을 하다 뇌경색이 왔던 4년 전부터 일자리는 불안정했다. 임시직 일자리는 있지만 정규직 일자리를 잡는 것은 힘들다. 게다가 건강 이상을 감지하고, 건강을 되찾았다고는 해도 마음속은 불안이 있었는데 지난해 건강이 회복된 듯해서 의욕적으로 정규직으로 일하고 싶기도 했고, 만약 사태에 대비해 세컨잡을 가지려고 하다 보니 무리한 부분도 있고, 해고되고 새로 직장을 구해 적응하는 것이 스트레스를 쾌 높인 것 같다. 젊을 때는 그럴 수 있었지만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잊고 마음만 젊었던 것은 아닌가 싶다.

병가 보험이 3달 만인 1월에 끝나고 정규 실업 보험으로 전환하려고 했더니 회사에서 해고하지 않아서 전환이 안 됐었는데, 정규 실업 보험이 끝나는 달이 되니 오늘 해고한다고 통보를 해왔다. 해고할 거 진즉 해줬으면 실업 보험이라도 타는데, 일은 못 하고 건강은 호전이 안 되고 정말 힘들었다.







어릴 때 집에 소를 길렀다. 시골에서 소는 논 갈고 밭 갈고 힘든 일은 모두 해내는 소위 경운기이자 트랙터였다. 집에 돈이 꼭 필요하면 팔아서 쓰기도 했으니, 소를 위해 풀을 베어다 먹이고 소 죽에 당겨 가루 조금 타 주는 것으로는 그 노고에 감사함을 다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늘 소와 싸웠다. 쟁기질할 때 멍에를 씌워도 소가 힘들어서 조금 서서 쉬면 이놈의 소XXX가를 연신 해댔다. 달리는 말이 “어뎌, 어뎌, 어뎌” 정도고 소고삐를 잡아당기기도 한다. 소 코뚜레를 다듬던 아버지의 모습과 소에게 곤 두레를 씌우던 모습도 기억난다. 사람들은 마취하는데, 소는 마취도 하지 않은 생살에 그 두꺼운 코뚜레로 뚫어서 소 고삐를 묶는다. 밭과 논에서 일할 때도 허기지고 물이 말라 힘들어하는 데도 멍에를 씌워 일을 재촉하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지금도 시골에서 소로 농사를 짓는 집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소는 가족같이 친구같이 늘 집에서 가장 가까이 있었고 가장 힘든 일을 하는 집에서 가장 힘이 센 동물이었다. 먹고 싸는 일이 생리적인 현상임에도 외양간에 묶어 놓고 똥 싸고 오줌싸서 치워야 할 때면 구박을 들어야 했다. 시간은 강물처럼 흘러 그 시간 속에 소도 그 시간 속에 아버지도 지금은 현실에 없다. 현재 사람들은 소를 고기로 만들기 위해서 키워간다. 닭도 당시에 길러서 집안에 곤충들도 먹고 곡식도 먹고 살았지만, 계란을 낳아 주니 고마운 존재였고 제사 때 제사상에 올릴 제물이 되어 주니 더할 나위 없는 희생이기도 했다.

요즘도 다큐멘터리를 보면 티베트나 네팔 등지에서는 아직도 집에서 기르는 양이나 소가 야생 동물의 공격에 희생되는 모습을 자주 본다. 하지만 한국은 야생 동물의 피해라고 해봐야 멧돼지 정도가 되어 버렸다. 내가 어릴 적엔 뒷산 홍골 골짜기에 호랑이가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픞래쉬 없이 어두운 밤에 아랫마을에 막걸리 심부름을 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멀리서 두 눈에 불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놀라서 잰걸음으로 집으로 달려 간 기억이 있다. 그리고 가장 두려웠던 것이 뱀이다. 가랑잎 아래 똬리를 틀고 있다가 머리를 쳐들고 있는 까치 독사는 논두렁을 깎을 때도 혹시나 하고 두려움을 갖게 한다. 그래서 독사를 만나면 잔인하게 낮으로 자르거나 지게 작대기에 달린 뾰족한 못으로 머리를 짓이기기도 했다. 두려워서였다. 두려워하지 않는 어른들은 순식간에 머리 뒷부분을 손으로 꼭 잡고 비료 포대에 담아서 팔러 갔다.

비료 포대는 겨울에는 보리 짚을 넣어 푹신하게 만들어 예배당 가는 산길에서 썰매를 타기 딱 좋았다. 그러고 나면 길은 빙판이 되어 어른들에게 욕먹기 딱 좋은 상황이기도 했다. 어릴 때 아버지의 일하는 모습을 보면 치열하게 하는 것 같지 않았다. 물론 나도 밭에서 쪼그리고 앉아 풀을 뽑고 김을 매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 그래서 일찌감치 농사는 내 직업이 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물론 만약 우리 집에 땅이 많아 농사를 지을 사람이 없었다면 농사를 지으러 다시 내려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작농인 시골에 남아서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부모님도 나도 원하는 일이 아니었다. 무작정 떠난 고향, 객지 생활을 하다가 서른쯤의 나이에 캐나다 이민을 오고 아들이 서른 살 이고 보면 아들과 나의 그 시절을 비교하게 된다. 나의 어린 시절보다는 훨씬 나은 유년 시절과 청소년기를 보낸 아들이 다른 잘사는 부모를 둔 친구들과 비교하면 열심히 살아 온 것이,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가고 민둥머리만 남은 것처럼 휑하니 느낌이 좋지 않다. 나는 나름 치열하게 살아왔는데도 남은 것이 없는 빈손이다. 그렇다고 내가 살아 온 강물에서 가만히 누워서 온 것은 결코 아니다. 협곡도 만나고 장마와 폭우도 만나고 가뭄도 만나고 뗏목이 다 부서져 힘겹게 허우적대며 목숨을 부지해온 삶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끄럽게 살아 오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모든 게 풍요로운 요즘, 가족이 함께 모여서 식사하는 것이 쉽지 않다. 다들 컴퓨터 앞에서 바쁘다. 삶이 변했다. 그래서 행복의 기준이 바뀌었는지도 모른다. 물질이 없으면 불행하다고 하는 기본 전제를 깔고 생각하는 세상이다. 부자들은 행복하냐고 하면, 그런 것 같지도 않다. 물론 하고 싶은 일들을 돈이 없는 사람보다는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물론 나도 돈이 있다면 여행도 더하고 책도 더 내고 하고 싶은 것들이 많다. 그렇다고 현재가 그렇게 불행하냐 그렇지만은 않다.

일을 해서 일을 통해 얻는 행복을 현재는 느끼지 못한다. 바람은 빨리 건강을 회복해서 일을 통한 행복을 다시 얻는 것이다. 시간이 많다고 행복한 게 아니다. 짧은 시간을 쪼개서 알차게 쓸 때 더욱 쾌감을 느끼게 된다. 돈이 없으면 시간이 많고 시간이 많으면 돈이 없다고 하지만 모든 것이 충족되는 경우는 드물다. 행복한 삶은 스스로가 만들어 가는 것이다. 우울증으로 고통이 심할 땐 물을 보면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 지배했다. 차가 달려오면 달려들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지금은 약물 치료 중이라 그런 느낌은 없다. 때때로 무념무상을 느끼기도 한다.

약물의 도움을 받았어도 마음이 점차 평화로움을 느끼는 시간이 늘어난다. 평화로움이 늘길 기대한다. 새끼를 낳고 새끼를 길러낸 철새가 먼 길을 떠날 때는 뼛속까지 비우고 바람길을 따라간다. 먼 길에 필요하다고 배낭 가득 짐을 지고 떠나면 라면 한 봉의 무게도 무거워 발걸음마다 짓누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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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집에 소를 길렀다. 시골에서 소는 논 갈고 밭 갈고 힘든 일은 모두 해내는 소위 경운기이자 트랙터였다. 집에 돈이 꼭 필요하면 팔아서 쓰기도 했으니, 소를 위해 풀을 베어다 먹이고 소 죽에 당겨 가루 조금 타 주는 것으로는 그 노고에 감사함을 다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늘 소와 싸웠다. 쟁기질할 때 멍에를 씌워도 소가 힘들어서 조금 서서 쉬면 이놈의 소XXX가를 연신 해댔다. 달리는 말이 “어뎌, 어뎌, 어뎌” 정도고 소고삐를 잡아당기기도 한다. 소 코뚜레를 다듬던 아버지의 모습과 소에게 곤 두레를 씌우던 모습도 기억난다. 사람들은 마취하는데, 소는 마취도 하지 않은 생살에 그 두꺼운 코뚜레로 뚫어서 소 고삐를 묶는다. 밭과 논에서 일할 때도 허기지고 물이 말라 힘들어하는 데도 멍에를 씌워 일을 재촉하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지금도 시골에서 소로 농사를 짓는 집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소는 가족같이 친구같이 늘 집에서 가장 가까이 있었고 가장 힘든 일을 하는 집에서 가장 힘이 센 동물이었다. 먹고 싸는 일이 생리적인 현상임에도 외양간에 묶어 놓고 똥 싸고 오줌싸서 치워야 할 때면 구박을 들어야 했다. 시간은 강물처럼 흘러 그 시간 속에 소도 그 시간 속에 아버지도 지금은 현실에 없다. 현재 사람들은 소를 고기로 만들기 위해서 키워간다. 닭도 당시에 길러서 집안에 곤충들도 먹고 곡식도 먹고 살았지만, 계란을 낳아 주니 고마운 존재였고 제사 때 제사상에 올릴 제물이 되어 주니 더할 나위 없는 희생이기도 했다.

요즘도 다큐멘터리를 보면 티베트나 네팔 등지에서는 아직도 집에서 기르는 양이나 소가 야생 동물의 공격에 희생되는 모습을 자주 본다. 하지만 한국은 야생 동물의 피해라고 해봐야 멧돼지 정도가 되어 버렸다. 내가 어릴 적엔 뒷산 홍골 골짜기에 호랑이가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픞래쉬 없이 어두운 밤에 아랫마을에 막걸리 심부름을 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멀리서 두 눈에 불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놀라서 잰걸음으로 집으로 달려 간 기억이 있다. 그리고 가장 두려웠던 것이 뱀이다. 가랑잎 아래 똬리를 틀고 있다가 머리를 쳐들고 있는 까치 독사는 논두렁을 깎을 때도 혹시나 하고 두려움을 갖게 한다. 그래서 독사를 만나면 잔인하게 낮으로 자르거나 지게 작대기에 달린 뾰족한 못으로 머리를 짓이기기도 했다. 두려워서였다. 두려워하지 않는 어른들은 순식간에 머리 뒷부분을 손으로 꼭 잡고 비료 포대에 담아서 팔러 갔다.

비료 포대는 겨울에는 보리 짚을 넣어 푹신하게 만들어 예배당 가는 산길에서 썰매를 타기 딱 좋았다. 그러고 나면 길은 빙판이 되어 어른들에게 욕먹기 딱 좋은 상황이기도 했다. 어릴 때 아버지의 일하는 모습을 보면 치열하게 하는 것 같지 않았다. 물론 나도 밭에서 쪼그리고 앉아 풀을 뽑고 김을 매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 그래서 일찌감치 농사는 내 직업이 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물론 만약 우리 집에 땅이 많아 농사를 지을 사람이 없었다면 농사를 지으러 다시 내려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작농인 시골에 남아서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부모님도 나도 원하는 일이 아니었다. 무작정 떠난 고향, 객지 생활을 하다가 서른쯤의 나이에 캐나다 이민을 오고 아들이 서른 살 이고 보면 아들과 나의 그 시절을 비교하게 된다. 나의 어린 시절보다는 훨씬 나은 유년 시절과 청소년기를 보낸 아들이 다른 잘사는 부모를 둔 친구들과 비교하면 열심히 살아 온 것이,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가고 민둥머리만 남은 것처럼 휑하니 느낌이 좋지 않다. 나는 나름 치열하게 살아왔는데도 남은 것이 없는 빈손이다. 그렇다고 내가 살아 온 강물에서 가만히 누워서 온 것은 결코 아니다. 협곡도 만나고 장마와 폭우도 만나고 가뭄도 만나고 뗏목이 다 부서져 힘겹게 허우적대며 목숨을 부지해온 삶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끄럽게 살아 오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모든 게 풍요로운 요즘, 가족이 함께 모여서 식사하는 것이 쉽지 않다. 다들 컴퓨터 앞에서 바쁘다. 삶이 변했다. 그래서 행복의 기준이 바뀌었는지도 모른다. 물질이 없으면 불행하다고 하는 기본 전제를 깔고 생각하는 세상이다. 부자들은 행복하냐고 하면, 그런 것 같지도 않다. 물론 하고 싶은 일들을 돈이 없는 사람보다는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물론 나도 돈이 있다면 여행도 더하고 책도 더 내고 하고 싶은 것들이 많다. 그렇다고 현재가 그렇게 불행하냐 그렇지만은 않다.

일을 해서 일을 통해 얻는 행복을 현재는 느끼지 못한다. 바람은 빨리 건강을 회복해서 일을 통한 행복을 다시 얻는 것이다. 시간이 많다고 행복한 게 아니다. 짧은 시간을 쪼개서 알차게 쓸 때 더욱 쾌감을 느끼게 된다. 돈이 없으면 시간이 많고 시간이 많으면 돈이 없다고 하지만 모든 것이 충족되는 경우는 드물다. 행복한 삶은 스스로가 만들어 가는 것이다. 우울증으로 고통이 심할 땐 물을 보면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 지배했다. 차가 달려오면 달려들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지금은 약물 치료 중이라 그런 느낌은 없다. 때때로 무념무상을 느끼기도 한다.

약물의 도움을 받았어도 마음이 점차 평화로움을 느끼는 시간이 늘어난다. 평화로움이 늘길 기대한다. 새끼를 낳고 새끼를 길러낸 철새가 먼 길을 떠날 때는 뼛속까지 비우고 바람길을 따라간다. 먼 길에 필요하다고 배낭 가득 짐을 지고 떠나면 라면 한 봉의 무게도 무거워 발걸음마다 짓누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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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죽는 것이야 내 맘대로 할 수 없지만 일하는 것은 내 맘대로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젠 그조차 내 뜻대로 할 수 없음을 안다.

태양이 뜨거우면 더워서 태양이 없으면 추워서 못 살겠다고 말하면서

뜨거운 여름 그늘에서 바람 맞으니 시원해서 좋다.

한순간도 마음 놓지 못하는 정글 안 동물 가족처럼

고단하고 힘겨운 삶일지라도 살아 내려 몸부림치는 순간처럼./

 

#작가의 변
지난해 8곳에 입사하고 퇴사하기를 반복했다. 지나고 보면 그냥 남들처럼 참고 있었으면 괜찮았을 때도 있었는데, 부당함을 따지다가 해고되고 아무리 열심히 해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상사에게 해고되고, 각자 맡은 일을 알아서 하는 직장에서 나의 일을 가끔 하는 캐쥬얼 임시직 직장이 많아서 익숙해질 겨를이 없었던 곳도 있다. 그중에 가장 마음이 편했던 곳은 아웃라인만 해서 주고 혼자 알아서 음식을 만들어 놓고 청소하고 퇴근하는 곳이었다. 일하는 곳과 집의 거리가 걸어서 10분도 걸리지 않아 정말 좋다고 생각했지만, 일주일에 한 번 일하는 곳에서 오래 일할 수 없어 계속 일을 더 할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했다.

문제는 풀 타임 슈퍼바이저로 일하던 곳에서 부당하게 일자리를 잃고 임시직으로 일하게 됐다. 부당함에 다른 곳에 정규직으로 일을 하다 뇌경색이 왔던 4년 전부터 일자리는 불안정했다. 임시직 일자리는 있지만 정규직 일자리를 잡는 것은 힘들다. 게다가 건강 이상을 감지하고, 건강을 되찾았다고는 해도 마음속은 불안이 있었는데 지난해 건강이 회복된 듯해서 의욕적으로 정규직으로 일하고 싶기도 했고, 만약 사태에 대비해 세컨잡을 가지려고 하다 보니 무리한 부분도 있고, 해고되고 새로 직장을 구해 적응하는 것이 스트레스를 쾌 높인 것 같다. 젊을 때는 그럴 수 있었지만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잊고 마음만 젊었던 것은 아닌가 싶다.

병가 보험이 3달 만인 1월에 끝나고 정규 실업 보험으로 전환하려고 했더니 회사에서 해고하지 않아서 전환이 안 됐었는데, 정규 실업 보험이 끝나는 달이 되니 오늘 해고한다고 통보를 해왔다. 해고할 거 진즉 해줬으면 실업 보험이라도 타는데, 일은 못 하고 건강은 호전이 안 되고 정말 힘들었다.







어릴 때 집에 소를 길렀다. 시골에서 소는 논 갈고 밭 갈고 힘든 일은 모두 해내는 소위 경운기이자 트랙터였다. 집에 돈이 꼭 필요하면 팔아서 쓰기도 했으니, 소를 위해 풀을 베어다 먹이고 소 죽에 당겨 가루 조금 타 주는 것으로는 그 노고에 감사함을 다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늘 소와 싸웠다. 쟁기질할 때 멍에를 씌워도 소가 힘들어서 조금 서서 쉬면 이놈의 소XXX가를 연신 해댔다. 달리는 말이 “어뎌, 어뎌, 어뎌” 정도고 소고삐를 잡아당기기도 한다. 소 코뚜레를 다듬던 아버지의 모습과 소에게 곤 두레를 씌우던 모습도 기억난다. 사람들은 마취하는데, 소는 마취도 하지 않은 생살에 그 두꺼운 코뚜레로 뚫어서 소 고삐를 묶는다. 밭과 논에서 일할 때도 허기지고 물이 말라 힘들어하는 데도 멍에를 씌워 일을 재촉하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지금도 시골에서 소로 농사를 짓는 집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소는 가족같이 친구같이 늘 집에서 가장 가까이 있었고 가장 힘든 일을 하는 집에서 가장 힘이 센 동물이었다. 먹고 싸는 일이 생리적인 현상임에도 외양간에 묶어 놓고 똥 싸고 오줌싸서 치워야 할 때면 구박을 들어야 했다. 시간은 강물처럼 흘러 그 시간 속에 소도 그 시간 속에 아버지도 지금은 현실에 없다. 현재 사람들은 소를 고기로 만들기 위해서 키워간다. 닭도 당시에 길러서 집안에 곤충들도 먹고 곡식도 먹고 살았지만, 계란을 낳아 주니 고마운 존재였고 제사 때 제사상에 올릴 제물이 되어 주니 더할 나위 없는 희생이기도 했다.

요즘도 다큐멘터리를 보면 티베트나 네팔 등지에서는 아직도 집에서 기르는 양이나 소가 야생 동물의 공격에 희생되는 모습을 자주 본다. 하지만 한국은 야생 동물의 피해라고 해봐야 멧돼지 정도가 되어 버렸다. 내가 어릴 적엔 뒷산 홍골 골짜기에 호랑이가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픞래쉬 없이 어두운 밤에 아랫마을에 막걸리 심부름을 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멀리서 두 눈에 불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놀라서 잰걸음으로 집으로 달려 간 기억이 있다. 그리고 가장 두려웠던 것이 뱀이다. 가랑잎 아래 똬리를 틀고 있다가 머리를 쳐들고 있는 까치 독사는 논두렁을 깎을 때도 혹시나 하고 두려움을 갖게 한다. 그래서 독사를 만나면 잔인하게 낮으로 자르거나 지게 작대기에 달린 뾰족한 못으로 머리를 짓이기기도 했다. 두려워서였다. 두려워하지 않는 어른들은 순식간에 머리 뒷부분을 손으로 꼭 잡고 비료 포대에 담아서 팔러 갔다.

비료 포대는 겨울에는 보리 짚을 넣어 푹신하게 만들어 예배당 가는 산길에서 썰매를 타기 딱 좋았다. 그러고 나면 길은 빙판이 되어 어른들에게 욕먹기 딱 좋은 상황이기도 했다. 어릴 때 아버지의 일하는 모습을 보면 치열하게 하는 것 같지 않았다. 물론 나도 밭에서 쪼그리고 앉아 풀을 뽑고 김을 매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 그래서 일찌감치 농사는 내 직업이 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물론 만약 우리 집에 땅이 많아 농사를 지을 사람이 없었다면 농사를 지으러 다시 내려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작농인 시골에 남아서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부모님도 나도 원하는 일이 아니었다. 무작정 떠난 고향, 객지 생활을 하다가 서른쯤의 나이에 캐나다 이민을 오고 아들이 서른 살 이고 보면 아들과 나의 그 시절을 비교하게 된다. 나의 어린 시절보다는 훨씬 나은 유년 시절과 청소년기를 보낸 아들이 다른 잘사는 부모를 둔 친구들과 비교하면 열심히 살아 온 것이,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가고 민둥머리만 남은 것처럼 휑하니 느낌이 좋지 않다. 나는 나름 치열하게 살아왔는데도 남은 것이 없는 빈손이다. 그렇다고 내가 살아 온 강물에서 가만히 누워서 온 것은 결코 아니다. 협곡도 만나고 장마와 폭우도 만나고 가뭄도 만나고 뗏목이 다 부서져 힘겹게 허우적대며 목숨을 부지해온 삶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끄럽게 살아 오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모든 게 풍요로운 요즘, 가족이 함께 모여서 식사하는 것이 쉽지 않다. 다들 컴퓨터 앞에서 바쁘다. 삶이 변했다. 그래서 행복의 기준이 바뀌었는지도 모른다. 물질이 없으면 불행하다고 하는 기본 전제를 깔고 생각하는 세상이다. 부자들은 행복하냐고 하면, 그런 것 같지도 않다. 물론 하고 싶은 일들을 돈이 없는 사람보다는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물론 나도 돈이 있다면 여행도 더하고 책도 더 내고 하고 싶은 것들이 많다. 그렇다고 현재가 그렇게 불행하냐 그렇지만은 않다.

일을 해서 일을 통해 얻는 행복을 현재는 느끼지 못한다. 바람은 빨리 건강을 회복해서 일을 통한 행복을 다시 얻는 것이다. 시간이 많다고 행복한 게 아니다. 짧은 시간을 쪼개서 알차게 쓸 때 더욱 쾌감을 느끼게 된다. 돈이 없으면 시간이 많고 시간이 많으면 돈이 없다고 하지만 모든 것이 충족되는 경우는 드물다. 행복한 삶은 스스로가 만들어 가는 것이다. 우울증으로 고통이 심할 땐 물을 보면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 지배했다. 차가 달려오면 달려들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지금은 약물 치료 중이라 그런 느낌은 없다. 때때로 무념무상을 느끼기도 한다.

약물의 도움을 받았어도 마음이 점차 평화로움을 느끼는 시간이 늘어난다. 평화로움이 늘길 기대한다. 새끼를 낳고 새끼를 길러낸 철새가 먼 길을 떠날 때는 뼛속까지 비우고 바람길을 따라간다. 먼 길에 필요하다고 배낭 가득 짐을 지고 떠나면 라면 한 봉의 무게도 무거워 발걸음마다 짓누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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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사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 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 학원에 다니며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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