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조스님과의 대화 2편 3부, 미륵교도 비판
설조스님과의 대화 2편 3부, 미륵교도 비판
  • 운판(雲版)
  • 승인 2023.07.15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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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단 초창기의 미륵교도 문제
삿된 주장을 비판하지 않는 조계종단의 풍토 비판
제1대 중앙종회 회의록





제1대 중앙종회 회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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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조스님은 조계종단 초창기에 종단에 들어온 미륵교도 문제를 다시 짚었다. 미륵이라는 용어 때문에 불교의 한 분파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불교의 미륵신앙과는 전혀 다르다. 설조스님은 이에 대해 간단하게 정리했다. “재림예수 주장이 모두 사기꾼이듯, 스스로 미륵, 제석천이라 주장하는 이는 악의 꽃” 이라고 했다.

1960년대 중반, 조계종단은 정보기관의 조언을 받아 사도위원회를 구성하여 종단에 스며든 미륵교도들을 색출하여 축출했다. 무려 수천명에 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설조스님은 이 때 완벽하게 처리하지 못하여 아직도 많은 이들이 종단에 남아 이제는 원로로 대접받고 있다고 말했다.

삿된 무리들이 종단에 남아있는 것보다 삿된 무리나 견해를 비판하지 않는 교단의 풍토가 더 문제라고 설조스님은 지적했다.

설조스님이 말하는 미륵교도는 강일순(姜一淳: 호는 증산甑山)의 증산교로부터 이어진 추종자들이다. 증산의 제자였던 차경석은 자신의 이종사촌 누이인 고판례를 강일순의 부인으로 추천할 정도로 착실한 제자였다. 강일순의 사망 뒤 차경석은 고판례를 중심으로 증산교도를 다시 모아 보천교를 창시했다. 신도들이 크게 늘어나게 되자 스스로 교권을 장악하고 신도들과 고판례와의 접촉을 차단하였다. 이에 고판례는 그를 떠나 별개의 종단을 설립하였다.

민간에서 차경석을 차천자(車天子)라 부르고 보천교의 세력이 커지자 일제는 교단에 대한 탄압을 가하는 한편 회유하기 시작하였다. 보천교의 친일행각이 두드러지는 가운데 보천교는 신현철(申鉉喆)의 태을교를 비롯하여 동화교·삼성교·수산교·보화교·선도교·무을교·임무교·서상근파·금산사미륵불교포정소·인천교·원군교 등으로 분화되었다. 1936년 차경석이 죽고 이어 조선총독부가 <유사종교해산령>을 선포함에 따라 교단은 해체되고 말았다. (정읍에 있던 차경석의 궁전을 불교가 낙찰받아 옮겨 지은 것이 현 조계사 대웅전이다.)

광복후에 교도들이 각각 분파를 만들었으며 그 가운데 서백일의 용화교가 유명했다. 서백일(1893-1966)은 증산교단의 한 분파인 용화교(龍華敎)의 창시자로서 교세가 급성장하며 금품 사취와 부녀자 농락 등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1961년에는 여신도들의 고발로, 보호자 간음죄로 1년 6개월의 선고를 받고 복역하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결국 그는 소윤하라는 젊은 신도의 칼에 맞아 1966년 3월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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