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불교계에서 관심 끌지 못한 선(禪)에 초점
당시 불교계에서 관심 끌지 못한 선(禪)에 초점
  • 선학원백년사편찬위원회
  • 승인 2023.07.11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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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원(禪苑)》의 면모

1) 집필진 분석

《선원》지는 선학원이 침체기를 극복하고 재건된 1931년 10월 6일에 창간되어 4호까지 간행되었다. 창간호와 2호(1932. 2. 1) 및 3호(1932. 8. 16)는 정상적으로 간행되었지만, 4호는 1935년 10월에 간행되었다.

선학원은 재단법인 인가를 받고 난 이후 조직개편이 있었고, 1935년 3월에는 조선불교선종수좌대회(朝鮮佛敎禪宗首座大會)를 개최하였다. 수좌들은 이 대회를 통해 선종의 종단을 표방하고 종정(宗正)을 추대했으며, 전국 선원의 중앙기관인 조선불교선종종무원이 성립되면서 간부진도 선출하였다.11) 때문에 4호 《선원》지의 간행 역시 늦었고, 확대된 조직 개편과 종단의 위상 역시 소개하고 있다.

《선원》지의 필진은 36명이다. 이 가운데 주요 집필진은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을 위시하여 석전 박한영(石顚 朴漢永), 백용성, 방한암(方漢岩), 김태흡(金泰洽), 권상로 등 당대의 고승이자 지식인들이었으며, 불교개혁론을 주장했던 인물들이기도 하였다. 이밖에 필명만을 표기한 사람은 마하사문, 속아(俗兒), RWH, 병납, 노파(老姿)12) 등으로 각 1편의 글을 게재하였다.

만해는 1913년 5월 《불교유신론(佛敎維新論)》 출간을 통해 불교개혁론을 전개하고 대중적 확산과 이념 형성에 진력하였다. 아울러 1918년 《유심(惟心)》을 창간하여 불교를 통한 중생구원과 불교사상의 계몽적인 글을 소개하였다.13) 그는 선학원 창설에 기여했으며, 선우공제회 발기인이자 수도부 이사, 재건 이후 일반 대중들에게 설법과 강화 등 선학원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한용운은 《선원》지 창간호의 권두언(卷頭言)과 “불리문자(不離文字)는 성(性)의 원성(圓成)인 동시에 도생(度生)의 대용(大用)이 되는 것”이라는 요지의 <문자비문자(文字非文字)>라는 비교적 간략한 글을 싣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자신이 이전에 적극적으로 강조했던 불교개혁론의 성격을 담은 글은 찾아볼 수 없다.

박한영 스님의 ‘不是禪’.



박한영은 ‘석전 사문(石顚 沙門)’이라는 이름으로 <불시선(不是禪)>14), <서진선(西震禪)의 동별(同別)>15) 두 편의 글을 게재하였다. 그는 1910년 이회광을 비롯한 불교계의 친일인사들이 불교계의 개혁을 일본 조동종과의 연합을 통해 진행하고자 했을 때 항거한 인물이다.

당시 조동종과의 맹약은 외형적으로는 연합이지만, 그 내용은 한국불교를 일본 조동종에 매종시킨 면이 내재되어 있었다.16) 박한영, 백용성, 진진응(陳震應) 등은 이회광의 매종행위를 비판하고 한국불교는 선종 중에서도 임제종 계통인데, 그 연합의 대상은 계파가 다른 조동종이라는 것에 비판의 논거를 마련하고, 한국불교의 연원은 임제종임을 천명하였다. 이들은 1911년 1월 15일 송광사 총회에서 임제종 임시 종무원을 송광사에 설치하고, 관장 임시대리로 한용운을 선출하였다. 동년 2월 6일 박한영을 비롯한 15명의 임제종 주도자들은 ‘임제종문(臨濟宗門)’을 일층 확장하기 위한 임시총회를 광주 증심사에서 개최하였다. 결국 임제종 운동은 사찰령 이후 불교계의 조직적인 항일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 정신은 선학원의 설립 정신에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쳐 계승으로까지 전개되었다.17)

이와 같이 박한영은 임제종 운동의 주도 인물이었으며18), 1913년 창간된 《해동불교》의 편집 겸 발행인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해동불교》는 1912년 창간된 《조선불교월보》의 개명(改名) 속간물로 불교진흥을 목적으로 국민 대중의 교화와 계몽적 목적을 구현코자 한 《조선불교월보》의 특색을 계승하고 있었다.19)

박한영은 권상로, 한용운과 함께 당시 불교개혁론의 대표 인물로 불교 근본정신의 진면목을 기초로 시대 변천과 문명 사조의 세례를 유의해야 한다는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선원》지에 게재한 두 편의 글에서는 기초적인 선 논설과 인도와 중국 선의 동이성(同異性)을 규명했을 뿐 개혁론과 관련된 논조의 글은 게재하지 않았다. 결국 1910년대와 20년대 사회진화론에 기초한 불교개혁론을 주장했고, 그 이론을 전개했던 위 사람들은 1930년대 《선원》지에서는 선에 관한 논설과 선종사 중심의 글을 게재했을 뿐 개혁과 유신의 성격을 띤 불교 이념을 전개하지는 않았다.

한편 백용성은 8편의 글을 게재했다. 화두의 개념과 참구의 방법을 소개했는데,20) 《선문염송(禪門拈頌)》을 중심으로 한 화두 풀이에 대한 강화(講話)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백용성 역시 일본 불교의 침투에 항거하여 임제종 운동을 주도하였고, 1926년 5월과 9월 127명의 비구승과 함께 조선 총독과 일본 내무성 앞으로 ‘파계생활 금지’에 관한 건백서(建白書)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그의 건백서는 재가 신자와 출가 대중의 구별이 엄연히 있는데, 근자 출가 대중 가운데 함부로 대처식육하는 마속들이 발생, 청정도량을 더럽히고 있으니 하루속히 시정토록 해달라는 탄원서였다. 비록 일제의 미온적인 태도로 그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백용성의 노력은 한국불교의 정통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일련의 움직임이었다.21)

백용성 역시 당시 불교계의 지도자답게 역경 및 출판사업을 통해 불교의 대중화 및 혁신을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다.22) 그는 오성월, 송만공, 김남전 등과 함께 선학원 창설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23) 선학원 재건 당시에는 송만공, 한용운 등과 함께 일반 대중에게 설법과 대승경전 강화 등의 행사를 거행하기도 하였다.24)

김태흡(金泰洽, 1899∼1989)은 법주사 출신으로서 고학으로 일본 대학에서 인도철학과 종교학을 공부하고 동경제국대학 사료편찬실에서 일한 경력이 있는 일제하의 대표적인 엘리트 승려다. 1928년 귀국하여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 최초의 포교사로 임용되어 활동하였다.


김태흡.
박한영 스님의 ‘不是禪’.

박한영은 ‘석전 사문(石顚 沙門)’이라는 이름으로 <불시선(不是禪)>14), <서진선(西震禪)의 동별(同別)>15) 두 편의 글을 게재하였다. 그는 1910년 이회광을 비롯한 불교계의 친일인사들이 불교계의 개혁을 일본 조동종과의 연합을 통해 진행하고자 했을 때 항거한 인물이다.

당시 조동종과의 맹약은 외형적으로는 연합이지만, 그 내용은 한국불교를 일본 조동종에 매종시킨 면이 내재되어 있었다.16) 박한영, 백용성, 진진응(陳震應) 등은 이회광의 매종행위를 비판하고 한국불교는 선종 중에서도 임제종 계통인데, 그 연합의 대상은 계파가 다른 조동종이라는 것에 비판의 논거를 마련하고, 한국불교의 연원은 임제종임을 천명하였다. 이들은 1911년 1월 15일 송광사 총회에서 임제종 임시 종무원을 송광사에 설치하고, 관장 임시대리로 한용운을 선출하였다. 동년 2월 6일 박한영을 비롯한 15명의 임제종 주도자들은 ‘임제종문(臨濟宗門)’을 일층 확장하기 위한 임시총회를 광주 증심사에서 개최하였다. 결국 임제종 운동은 사찰령 이후 불교계의 조직적인 항일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 정신은 선학원의 설립 정신에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쳐 계승으로까지 전개되었다.17)

이와 같이 박한영은 임제종 운동의 주도 인물이었으며18), 1913년 창간된 《해동불교》의 편집 겸 발행인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해동불교》는 1912년 창간된 《조선불교월보》의 개명(改名) 속간물로 불교진흥을 목적으로 국민 대중의 교화와 계몽적 목적을 구현코자 한 《조선불교월보》의 특색을 계승하고 있었다.19)

박한영은 권상로, 한용운과 함께 당시 불교개혁론의 대표 인물로 불교 근본정신의 진면목을 기초로 시대 변천과 문명 사조의 세례를 유의해야 한다는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선원》지에 게재한 두 편의 글에서는 기초적인 선 논설과 인도와 중국 선의 동이성(同異性)을 규명했을 뿐 개혁론과 관련된 논조의 글은 게재하지 않았다. 결국 1910년대와 20년대 사회진화론에 기초한 불교개혁론을 주장했고, 그 이론을 전개했던 위 사람들은 1930년대 《선원》지에서는 선에 관한 논설과 선종사 중심의 글을 게재했을 뿐 개혁과 유신의 성격을 띤 불교 이념을 전개하지는 않았다.

한편 백용성은 8편의 글을 게재했다. 화두의 개념과 참구의 방법을 소개했는데,20) 《선문염송(禪門拈頌)》을 중심으로 한 화두 풀이에 대한 강화(講話)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백용성 역시 일본 불교의 침투에 항거하여 임제종 운동을 주도하였고, 1926년 5월과 9월 127명의 비구승과 함께 조선 총독과 일본 내무성 앞으로 ‘파계생활 금지’에 관한 건백서(建白書)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그의 건백서는 재가 신자와 출가 대중의 구별이 엄연히 있는데, 근자 출가 대중 가운데 함부로 대처식육하는 마속들이 발생, 청정도량을 더럽히고 있으니 하루속히 시정토록 해달라는 탄원서였다. 비록 일제의 미온적인 태도로 그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백용성의 노력은 한국불교의 정통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일련의 움직임이었다.21)

백용성 역시 당시 불교계의 지도자답게 역경 및 출판사업을 통해 불교의 대중화 및 혁신을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다.22) 그는 오성월, 송만공, 김남전 등과 함께 선학원 창설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23) 선학원 재건 당시에는 송만공, 한용운 등과 함께 일반 대중에게 설법과 대승경전 강화 등의 행사를 거행하기도 하였다.24)

김태흡(金泰洽, 1899∼1989)은 법주사 출신으로서 고학으로 일본 대학에서 인도철학과 종교학을 공부하고 동경제국대학 사료편찬실에서 일한 경력이 있는 일제하의 대표적인 엘리트 승려다. 1928년 귀국하여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 최초의 포교사로 임용되어 활동하였다.

김태흡.
김태흡.

김태흡은 김대은(金大隱), 김소하(金素荷)라는 별명(別名)을 사용하여 <심즉시불(心卽是佛)>, <선(禪)의 인생관>과 같은 선에 대한 기초적인 논설을 게재하기도 했지만, 일제하 불교계의 선에 대한 인식과 수좌의 암울한 수행 생활 등을 소개하기도 하였다.25) 또한 《선원》 제4호에는 일제의 관제 운동이었던 심전개발(心田開發) 운동에 대한 글도 게재하였다.26) 조선 총독부가 심전개발 운동을 통해 달성하고자 한 목적은 조선인들로 하여금 정책에 순응하게 하고 천황에게 충성을 다하는 충량한 황국신민을 만드는 데 있었다. 김태흡은 572회의 심전개발 순회강연 가운데 157회의 강연을 하면서 심전개발 운동의 선전자로, 더욱이 그가 창간한 《불교시보》는 심전개발운동의 선전지를 자처하고 나섰다.

이밖에 《선원》지의 주요 집필진은 조선불교선리참구원 부이사장이자 초대 종정을 역임한 방한암,27) 《조선불교월보》의 편집 겸 발행인이자 일제하 불교개혁론의 대표적 인물 권상로,28) 그리고 조종현(趙宗玄), 이광수(李光洙), 최남선(崔南善) 등이다.

요컨대 《선원》지에 글을 게재했던 인물들은 일제하 불교계의 개혁과 유신을 강조했던 인물들을 위시하여 친일행위로 비판을 받은 인물도 있다. 아울러 선학원 설립을 전후로 한국불교의 정체성 수호와 항일활동을 전개했던 인물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선원》지는 집필진 각자의 성향과는 상관없이 그동안 불교계에서 관심을 끌지 못했던 선(禪)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주] -----

11) 法眞(2007), <禪學院 中央禪院 芳啣錄과 禪宗復興>, 《選佛場》-安居芳啣錄과 首座大會會錄-, 한국불교선리연구원, 26쪽.

12) 姿는 婆의 오류로 보인다.

13) 白淳在(1977), <韓國佛敎雜誌書誌考>, 《法輪》中① 7월, 月刊法輪社, 93∼96쪽.

14) 石顚沙門〔昭和 6年(1931)〕, <不是禪>, 《禪苑》 創刊號, 禪學院, 4∼5쪽.

15) 石顚沙門〔昭和 7年(1932)〕, <西震禪의 同別>, 《禪苑》 2號, 禪學院, 8∼10쪽.

16) 金光植(1996), <1910년대 佛敎界의 曹洞宗 盟約과 臨濟宗 運動>, 《韓國近代佛敎史硏究》, 민족사, 67쪽.

17) 오경후(2006), <선학원운동의 정신사적 기초>, 《선문화연구》 창간호, 한국불교선리연구원, 348∼355쪽.

18) 그러나 박한영은 1912년 7월 이회광이 과거사는 잊고 불교 발전을 위해 공동으로 노력하자는 제의를 받고 노선의 전환을 단행했다고 한다. 예컨대 일제가 인정하는 교단에 협조하여 불교발전을 기하겠다는 노선을 택한 것이다.〔김광식(1998), <근대불교개혁론의 배경과 성격>, 《종교교육학연구》 제7권, 한국종교교육학회, 59쪽.〕

19) 백순재, 앞의 글, 127∼130쪽.

20) 백용성〔昭和 7年, 1932), <화두법이라>, 《선원》 3호, 선학원, 31쪽.

21) 오경후, 앞의 글, 351∼352쪽.

22) 백용성은 三藏譯會를 통해 역경사업을 추진하였다.〔김광식(2006), <일제하의 불교출판>, 《대각사상》 제9집, 대각사상연구원, 16∼19쪽.〕

23) 선학원(1986), <朝鮮佛敎禪學院本部創建上樑文>, 《禪學院略史》, 선학원, 7쪽.

24) 老婆〔昭和 6年(1931)〕, <禪學院日記抄要>, 《禪苑》創刊號, 禪學院, 28∼29쪽.

25) 金泰洽〔昭和 7年(1932)〕, <護禪論>, 《禪苑》 2號, 禪學院, 2∼7쪽.

26) 金泰洽〔昭和 10年(1935)〕, <心田開發과 禪의 大衆化>, 《禪苑》 4號, 禪學院, 10∼13쪽.

27) 저자〔昭和10年(1935)〕, 《朝鮮佛敎禪宗首座大會會錄》, 禪宗中央宗務院, 17쪽.

28) 권상노는 《선원》지에 우리나라 선종사를 중심으로 총 4편의 글을 게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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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 2023-07-12 06:32:20
선학원이 일제치하 종일범계세력에 맞서 어떻게 항일청정수행운동을 이끄셨는지 알려주는 매우 중요한 자료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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