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결 다비식 8일 오전 10시 원로회의장 엄수
조계종 명예 원로의원 미룡당 월탄 대종사가 4일(음력 7월 7일) 오전 10시 30분 주석처인 단양 대흥사에서 법납 68년, 세수 86세로 입적했다. 대종사의 영결다비식은 조계종 원로회의장으로 엄수된다. 영결식은 8월 8일 오전10시 미륵대흥사 대웅전 앞마당, 다비식은 경내 다비장에서 엄수된다. 대종사의 빈소가 단양 미륵대흥사에 마련됐으며, 스님의 입적을 애도하는 불자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월탄 대종사는 불교정화를 위해 1960년 11월 24일 대법원에서 할복한 육비구 중 한 명이다. 당시 언론은 ‘비구승 대법원 청사에 난입’으로 보도했지만, 청정한 승려들이 사찰에서 쫓겨나고 대처육식하는 일제 잔재인 대처승이 사찰을 장악하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청정교단을 수호하기 위해 청담 스님과 숭산 스님이 청년승려들을 모집했고, 월탄, 성각, 진정, 도명, 도헌, 성우스님 등 6명의 비구승이 대법원에 들어가 할복해 불교정화의 필요성을 국민에게 각인시켰다. 월탄 스님은 "당시 대법원장 방에서 ‘우리는 비구승인데 불법에는 대처승이 없다는 것을 죽음으로 증명하려고 합니다’라고 밝히고 할복을 단행했다."면서 "“불교를 위해 순교하겠다는 각오를 지닌 희망자를 모집하여 참여했다”고 회고했다.
월탄 스님 등 육비구의 ‘할복’ 사건은 불교정화의 당위성을 환기하면서 대법원이 이듬해 비구승 측에 승소 판결하면서 비구승 중심의 조계종이 출범하는 기틀이 됐다.
월탄 스님은 1937년 전북 완주군에서 태어나, 1955년 금오 스님을 은사로 화엄사에 출가해 1960년 해인사에서 자운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1960년 11월 24일 해인사 강원 사교과 수학 중 전국승려대회에 강원 대표로 참석했고, 1964년 3월 조계종 종비생 1기로 동국대학교에 입학했다. 1968년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을 졸업하고 1973년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조계종 4~6, 8~10대 중앙종회의원을 지냈으며, 8대 중앙종회의장을 역임했다. 조계사·전등사·법주사 주지와 총무원 총무부장, 초심호계위원장, 법계위원장, 동국대 승가총동문회장, 사단법인 불교발전연구원 이사장, 불교신문사 사장을 지냈다.
1980년 10·27 법난 때는 월하·서운·녹원·혜성 스님 등과 계엄사령부에 연행 구금돼 고초를 겪었다. 1988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훈했고, 1990년 법주사 주지를 하며 시멘트 미륵불을 ‘청동미륵불’로 대대적으로 중수했다. 1994년 종단개혁 당시 서의현 3선을 가결한 중앙종회에 불참하고, 불참 배경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1990년 제26대 총무원장 선거와 1994년 제28대 총무원장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고, 1998년 총무원장 3선 저지를 위한 대중의 뜻을 받아 ‘정화개혁회의’를 이끌기도 했다.
상무주암, 수도암, 무명암, 상원사, 봉암사, 대흥사, 법주사, 수덕사 등에서 31안거 이상 성만했고, 2010년 조계종 원로의원에 추대됐고, 이듬해 대종사 법계를 품수했다. 2010년 조계종 원로의원에 추대됐으며, 이듬해 해인사에서 대종사 법계를 품수했다. 2013년 단양 미륵대흥사에 은사 금오태전 스님과 사형 성림월산 스님의 이름을 딴 금성선원(金聖禪院)을 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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