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불교교류 비망록:이제, 다시 본다] 18. 2003년 3·1절 민족대회
[남북불교교류 비망록:이제, 다시 본다] 18. 2003년 3·1절 민족대회
  • 이지범 북한불교연구소장
  • 승인 2022.01.10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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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불교 독립의 함성으로”

삼일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일 민족의 자주독립을 주창한 세계 최초의 비폭력 저항운동이다. 제1차 세계대전 전승국인 일본의 식민지배에 저항하여 3월 1일을 기점으로 모든 민족이 일치단결하여 공동작전으로 펼친 항일 독립운동이다.

3.1 만세운동은 조선 고종황제의 인산일(발인날)에 맞춰 3월 3일로 처음 내정됐다. 장례일에 거사는 ‘황제에 대해 불경하다.’라는 천도교 측 의견과 3월 2일은 안식 예배(일요일)를 해야 한다는 기독교 측 주장으로 일정이 변경됐다. 2월 28일 오후 6시, 서울 가회동의 손병희 집에는 2월 26일 날인을 종결한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던 민족대표 23명과 함태영이 거사 계획에 대해 최종 회합을 가졌다. 이때 회합은 일제 총독부 헌병・순사들에게도 사전 탐지되지 않을 만큼 비밀리에 진행됐다. 유교는 유림이 있었으나 중심세력과 비밀리에 연결이 어려웠고, 최린이 불교 한용운에게 거사 계획을 전하자. 그는 “시일이 급하니, 백용성과 2인이 참가하겠다.”고 쾌락했다.

독립운동가 이병헌의 《삼일운동비사》(1959년)에 따르면, 3.1운동은 3월 1일에 선언서를 발표한 것에서 따왔다. ‘3.1’은 삼위일체의 뜻으로 ① 천도교와 기독교, 불교의 삼교단이 일체가 되어 일으킨 운동 의미다. ② 영토・국민・주권의 세 가지 요건으로써 하나의 국가가 성립한다는 의미다. ③ 33인은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정수가 된 것은 아니었지만, 3.1운동과 수리적으로 연관성이 있고, 3월 1일을 독립선언일로 정한 의미가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북한산 백운대 정상부의 바윗면에는 “독립선언 기록은 기미년 2월 10일 경성부 청진동에서 경인생인 육당 최남선이 작성했으며, 3월 1일 탑동공원에서 병술생인 해주 수양산 사람 정재용이 독립선언 만세를 선창했다.”고 새겨져 있다. 탁본으로 판독되는 한자의 암각문은 독립운동가 정재용이 1959년에 3.1 만세운동의 역사적 사실을 전하기 위해 해서체로 총 69자를 새긴 것이다.

해방된 지 58년 만에 자주독립의 새 기록이 만들어졌다. 2003년 3월 1일 서울에서 ‘3.1절 민족대회’가 남북공동 행사로 개최됐다. 3.1절 공동행사는 서울 한복판에서 본행사와 부문별로 열렸다. ‘사무라이의 칼’이 번뜩였던 1919년에 대한독립을 타는 목마름으로 외친 그날, 그다음 서울에서 열렸던 남북왕래 행사에 대해 다시 본다.

3.1만세운동이 일어난 때의 서울 시위군중들(1919.3.1. 서울 덕수궁길), 사진=미국인 선교사 스코필드, 《korea independence movement》 사진집(미국 컬럼비아대학 버크도서관 소장본)





민족대표 29인이 참석하고 독립선언식이 거행된 3.1만세운동의 발원지, 서울 인사동 태화관의 ‘별유천지’ 한옥과 마당. 출처=태화복지재단 홈페이지(2020.3.18.)



만해의 만세 함성을 잇다

삼일 만세운동에 배포된 독립선언서는 최남선이 직접 경영한 신문관에서 미리 조판하여 천도교가 설립하고 이종일이 경영한 보성사에서 2월 27일에 2만2,000장이 인쇄됐다. 서울에는 28일 저녁 7시부터 승동 예배당에 전문과 중등학교 대표들이 모여 지역별로 배포하고, 불교계에서도 중앙학림 생도 정병헌, 신상완, 김법린 등 9명을 통해 3,000장의 선언서가 그날 밤에 배포됐다.

3월 1일 아침, 의암 손병희는 “나는 지금, 독립의 종자(種子)를 심으러 간다. 너희들은 세 가지 원칙(비폭력, 대중화, 일원화)을 끝까지 지켜라.”라는 훈유를 남겼다. 이날 정오부터 민족대표들은 인사동 태화관 남측의 별유천지 6호실에서 회합했다. 을사늑약, 강제 병합 등이 모의된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식을 거행함으로써 매국적인 ‘모든 조약을 무효화 한다.’라는 의지를 표방했다. 길선주・김병조・유여대・정춘수 4인을 제외한 29명이 참여한 가운데, 선언서를 발표한다는 것을 경성부청의 경무총감부에 통지하는 한편, 총독부와 종로경찰서에 각기 선언서가 보내졌다.

이때 태화관과 부속 건물은 일본군 경비대와 헌병 80여 명에 의해 포위됐다. 그날 오후 2시에 모이기로 했던 민족대표 29인은 오후 1시 어름, 탑동공원에 집결한 학생대표 강기덕, 김원벽 등 10여 명이 식장으로 달려와 격앙된 목소리로 “왜. 공원으로 오지 않는가.”라는 항의를 받았다. 또 오후 2시 이후 탑동공원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의 우렁찬 함성이 들리게 된다. 오후 3시쯤, 별유천지의 동쪽 처마에 단 태극기를 향해 경례하면서 선언식이 거행됐다. 손병희의 지시에 따라 이종일은 독립선언서의 일부 오자를 수정하며 읽었다. 이어 만해 한용운은 “최후의 1인까지 독립 쟁취를 위해 투쟁하자.”는 인사말을 한 다음, 선창으로 민족대표들과 대한독립만세 삼창을 우렁차게 외치고 함께 축배를 들었다고, 위창 오세창의 경성감옥 ‘신문조서’와 이종일의 일기 《묵암비망록》, 백암 박은식이 쓴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전한다. 오후 4시 무렵, 태화관을 포위한 일본군 경비대와 헌병들이 민족대표의 머리에 대나무 고깔을 씌운 채 5명씩 줄줄이 연행했다.

학생과 일반인들의 뭇 희생을 고려한 민족대표가 장소를 태화관으로 변경한 것과 달리 오후 2시 30분쯤 탑골(塔洞)공원에서는 독자적인 독립선언식이 열렸다. 민족대표가 나타나지 않게 되자. 신원을 밝히지 않은 한 청년(정재용 혹은 한위건)이 공원의 육각당 계단에 올라서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이때 모인 학생 5천여 명은 “흡사 하늘을 뒤덮은 까마귀 떼가 날아오르는 것 같았다.”고 기록될 만큼 학생모를 하늘에 던지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고, 종로 거리에 가두 행진을 나섰다. 보성여학교 학생 60여 명과 신성학교 학생 수백 명이 ‘조선독립단’이라 쓴 깃발을 앞세우고, 출발한 시위는 날이 저물도록 계속됐다. 고종의 인산 배관을 위해 상경했던 지방 사람까지 합세한 시위 대열이 대한문 앞에 이르렀을 때, 온 장안은 군중과 만세 소리로 들끓었다. 이날 서울을 비롯해 평안남도 평양・진남포・안주, 평안북도 선천・의주, 함경남도 원산 등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3월 2일부터 경기 개성, 충청남도 예산, 전라북도 옥구, 경상북도 대구, 전라남도 광주 등 전국에 들불처럼 번져갔다.

3월 21일 제주와 조천리 시위로까지 번진 만세운동은 전국 13도에서 시위 대열이 일어나면서 역사상 최대의 민족운동으로 발전했다. 이를 계기로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1920년 상하이 유신사에서 발간된 최초의 3.1운동사인 《혈사(血史)》에서 백암은 “독립운동은 최근 30년간 중단된 일이 없었고, 또 우리 역사상의 정신에서 발생하는 동력”이라고 적었다. 또 1919년 11월 15일 한국불교도연합회는 오만광・김취산・최경파 등 12명의 이름으로 ‘한국불교도 선언서’를 처음 발표하고, 3.1운동 참가를 결의했다. 2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한 3.1운동은 지역과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종교와 이념을 초월한 민족 총화의 광장에 조선 민중들이 나셨던 역사이다.

그로부터 84년 만에 국가와 지역, 이념과 종교를 넘어선 3.1절 민족대회가 그 출발점이던 서울에서 열렸다. 삼일 만세운동이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것은 해방 이래 처음이었다. ‘민중혁명’이라 불린 3.1운동의 첫 함성인 ‘독립만세’를 다시 외치고, 그 뜻을 잇기 위해 남북 사람들이 함께했다.



삼일절 기념 조국통일기원 남북불교도 합동법회(2003.3.2. 서울 봉은사). 사진 =평불협 창립 20돌 자료집(2012년)





삼일절 남북불교도 합동법회 타종식(2003.3.2. 서울 봉은사). 사진=3.1민족대회 사진공동취재단.



남북한이 독립을 외치다

삼일 만세운동 이후, 첫 기념행사는 1920년 3월 1일 오전 10시, 중국 상하이 올림픽 대극장에서 ‘독립선언 기념 대축하회’의 이름으로 개최됐다. 정부 차원의 첫 경축식은 상해민단 주최로 이동휘 국무총리와 국무위원, 임시의정원, 대의원, 인성학교 학생이 모인 가운데 선언서 낭독식, 국기상기식 등으로 진행됐다. 같은 해 그날에는 ‘해삼위’라고 불렀던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도 1901년 대한제국 초대 러시아 상주 공사로 부임한 이범진에 의해 독립선언 1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그 후, 27년 만에 우리나라에서 3.1절 기념식이 처음 열렸다. 1946년 3월 1일 서울 보신각 앞에서 3.1절 27주년 기념식이 개최됐다. 김구 주석의 축사와 김규식 부주석이 만세 선창을 했다. 김구 주석은 “3월 1일 날의 독립선언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일제한테 나라를 빼앗겨서 식민지배를 받고 있지만, 우리 한민족은 일제의 식민지배를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독립국이다.’라고 선언한 것을 말한다.”고 정의했다. 북측에서도 1946년 3월 1일 평양역 광장에서 ‘3.1봉기 27돌 경축대회’가 처음 열렸다. 이때 김일성 주석이 경축 연설을 한 이후, 3.1운동을 ‘3.1인민봉기’라고 부른다. “자주독립을 염원하며, 식민통치하에서 쌓이고 쌓인 인민의 원한과 분노가 폭발한 사건”으로 규정하는 가운데, ‘3.1인민봉기 기념보고회’를 매년 개최했다. 삼일 만세운동은 1917년 러시아 10월 붉은혁명의 영향을 받은 서울, 평양시민들이 시작한 반일 투쟁이라 묘사하는 등 남북한의 해석이 다르다.

이런 틈새를 좁히고 기념하기 위한 첫 만남이 2003년 ‘3,1절 민족대회’였다. 해방과 분단 이후, 58년 만에 처음으로 열린 남북공동 행사였다. 그해 3월 1일 오전 9시 인천공항을 통해 서울에 온 북측 대표단은 단장 장재언(조선종교인협회 회장과 조선카톨릭교협회 중앙위원장) 등 105명의 종교・사회단체 인사들로 구성됐다. 강지영 조선카톨릭교협회 부위원장, 오경우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서기장, 황병준 조선불교도련맹 부위원장 등과 라기환 천도교 중앙위원회 부부장 등 50명의 종교계 임원과 교인들이 참가했다. 특히 종교단체별 예식 행사에 참석할 장충성당 성가대 13명, 칠골교회 성가대 5명 등도 포함됐다. 또 직업총동맹, 민주여성동맹, 학생위원회, 청년중앙회관 등 근로단체 관계자 20여 명과 같이 대표단에는 허혁필 민족화해협의회(민화협) 부회장 등 관계자 20여 명, 허종호 조선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연구사, 장혜명 통일문학 편집국장, 조선중앙통신・노동신문・통일신보 기자 등이 방한했다.

애당초 예상과 달리 2002년 서울 8.15공동행사에 참가했던 고위급 인사들은 불참했다. 종교적 색채를 띤 공동행사였음에도 류미영 천도교청우당 위원장, 박태화 조선불교도련맹 중앙위원장, 강영섭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중앙위원장 등 북측의 종교계 수장들이 참가하지 않았다. 장재언 단장을 제외한 실무급 종교인사들과 성가대 등이 참가함으로써 내실 있는 공동행사로 꾸려졌다.

3월 1일 오후 5시, 서울 워커힐호텔 제이드가든에서 열린 2003년 ‘평화와 통일을 위한 3.1민족대회’는 남측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와 북측 조선종교인협회가 공동 주관했다. ‘조국통일’을 외치며 단일기를 흔드는 남측 인사들의 환영을 받으며 행사장에 들어선 북측 대표단은 ‘우리민족끼리’가 적힌 손 깃발을 흔들며, 남측 대표단의 환영에 화답했다. 황병준 조불련 부위원장과 변진흥 KCRP 사무총장의 사회로 진행된 3.1민족대회에는 북측 105명과 남측 대표단 300명, 참관단 4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단일기 게양과 함께 시작됐다. 공동사회를 맡은 황병준 부위원장은 통일연대 한상렬 목사를 ‘목사선생’이라 소개하면서 큰 웃음을 자아냈다.

“자주만이 살길이고, 자주는 민족 공조에 있다.”라는 북측 장재언 단장의 첫 대표연설에 이어 남측 대표연설은 천도교 김철 교령이 했다. 이날 남북대표단은 4개 항의 ‘3・1민족선언문’을 채택하고, 남측 한병관 천주교 신부와 북측 리성숙 조그련 책임부원이 함께 낭독했다. 선언문 낭독을 마친 후, 강지영 조선카톨릭교협회 부위원장과 한양원 한국민족종교협의회 회장의 선창으로 3・1민족자주통일 만세, 6・15공동선언 만세,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 만세를 힘껏 외쳤다. 이날 오후 7시에는 환영연회가 열렸다. 양측 대표의 간략한 환영사에 이어 원불교 인사가 “자비, 자주, 평화의 정신이 담긴 남북과 북남의 합환주를 들며 통일을 염원하자.”는 축배 제의로 모두가 건배를 외치는 등 반전과 자주, 조국의 평화통일을 다짐하는 시간을 가졌다.

3・1절 민족대회 본행사에 이어 3월 2일에는 오전 9시 30분부터 천주교, 개신교, 불교, 천도교 등 4개 종교별로 명동성당, 소망교회, 봉은사, 천도교 대교당에서 행사를 갖고, 오후에 학술토론회를 열었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남북한 학자들이 일제의 식민통치 문제점에 초점을 맞춰 각기 연구성과를 발표했으며, 마지막 날인 3일에는 경복궁 관람과 코엑스에서 열린 ‘고구려전’을 참관한 뒤, 오후 4시 인천공항을 통해 출국하면서 공식 일정이 마무리됐다.

평양에서 온 성가대 등이 참가한 기독교와 가톨릭 측과 달리 그해 3월 2일 서울 강남 봉은사에서 열린 ‘3.1절 기념 조국통일기원 남북불교도 합동법회’가 더 주목을 받았다. 집회와 불법시위 등 경찰의 경호 문제로 불교의 1번지 서울 조계사가 아닌 봉은사에서 개최된 조국통일기원법회는 1991년 10월 미국LA 이후, 서울 봉은사에 황병준 조불련 부위원장, 리규룡・리영호・류인명・차금철 책임부원과 김명조 조불련중앙위원회 부부장 6명이 내방하면서 시작됐다.

오전 9시 25분경 봉은사에 도착한 조불련 대표단은 원혜 봉은사 주지와 양산 조계종 사회부장 등과 남녀 화동들이 꽃다발로 영접했다. 봉은사 법왕루 입구에서 황병준 단장은 “북과 남의 불자들이 화합하고 단합하여 6·15공동선언 리행에 더욱 분발 정진합시다.”라는 방명을 남겼다. 대웅전에서 반야심경을 봉독한 후, 다래헌으로 자리를 옮겨 김법장 한국불교종단협의회 회장을 비롯한 강석주 봉은사 조실, 방지하 조계종 종회의장과 효암 진각종 통리원장, 법공 총지종 통리원장, 이홍파 관음종 총무원장 등과 첫 환담을 했다. 이어 오전 10시 남북대표단은 범종각에서 21세기 희망을 상징하는 21번의 타종을 가졌다. 이날 법왕루에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합동법회는 육법공양에 이어 차금철 조불련 책임부원과 김무원 천태종 사회부장의 사회로 삼귀의례, 남북 공동의 반야심경 집전과 헌향 헌화, 조불련 대표단 소개와 황병준 부위원장의 대표연설, 법장 조계종 총무원장의 봉행사 순으로 진행됐다. 봉은사 합창단의 축가와 공동발원문 낭독, 만세 삼창 등으로 성료됐다.

이처럼 북측 붉은 승려들의 서울 봉은사 방문은 16세기 전쟁 영웅인 서산대사의 행로(行路)에 대한 또 다른 여정이었으며, 전례가 되었다. 또 3.1절 민족대회는 노무현 참여정부에서 처음으로 열린 대규모 민간교류였다.

# 다음 편은 ‘2003년 북녘사찰 단청불사’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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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만세운동이 일어난 때의 서울 시위군중들(1919.3.1. 서울 덕수궁길), 사진=미국인 선교사 스코필드, 《korea independence movement》 사진집(미국 컬럼비아대학 버크도서관 소장본)
민족대표 29인이 참석하고 독립선언식이 거행된 3.1만세운동의 발원지, 서울 인사동 태화관의 ‘별유천지’ 한옥과 마당. 출처=태화복지재단 홈페이지(2020.3.18.)
민족대표 29인이 참석하고 독립선언식이 거행된 3.1만세운동의 발원지, 서울 인사동 태화관의 ‘별유천지’ 한옥과 마당. 출처=태화복지재단 홈페이지(2020.3.18.)

만해의 만세 함성을 잇다

삼일 만세운동에 배포된 독립선언서는 최남선이 직접 경영한 신문관에서 미리 조판하여 천도교가 설립하고 이종일이 경영한 보성사에서 2월 27일에 2만2,000장이 인쇄됐다. 서울에는 28일 저녁 7시부터 승동 예배당에 전문과 중등학교 대표들이 모여 지역별로 배포하고, 불교계에서도 중앙학림 생도 정병헌, 신상완, 김법린 등 9명을 통해 3,000장의 선언서가 그날 밤에 배포됐다.

3월 1일 아침, 의암 손병희는 “나는 지금, 독립의 종자(種子)를 심으러 간다. 너희들은 세 가지 원칙(비폭력, 대중화, 일원화)을 끝까지 지켜라.”라는 훈유를 남겼다. 이날 정오부터 민족대표들은 인사동 태화관 남측의 별유천지 6호실에서 회합했다. 을사늑약, 강제 병합 등이 모의된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식을 거행함으로써 매국적인 ‘모든 조약을 무효화 한다.’라는 의지를 표방했다. 길선주・김병조・유여대・정춘수 4인을 제외한 29명이 참여한 가운데, 선언서를 발표한다는 것을 경성부청의 경무총감부에 통지하는 한편, 총독부와 종로경찰서에 각기 선언서가 보내졌다.

이때 태화관과 부속 건물은 일본군 경비대와 헌병 80여 명에 의해 포위됐다. 그날 오후 2시에 모이기로 했던 민족대표 29인은 오후 1시 어름, 탑동공원에 집결한 학생대표 강기덕, 김원벽 등 10여 명이 식장으로 달려와 격앙된 목소리로 “왜. 공원으로 오지 않는가.”라는 항의를 받았다. 또 오후 2시 이후 탑동공원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의 우렁찬 함성이 들리게 된다. 오후 3시쯤, 별유천지의 동쪽 처마에 단 태극기를 향해 경례하면서 선언식이 거행됐다. 손병희의 지시에 따라 이종일은 독립선언서의 일부 오자를 수정하며 읽었다. 이어 만해 한용운은 “최후의 1인까지 독립 쟁취를 위해 투쟁하자.”는 인사말을 한 다음, 선창으로 민족대표들과 대한독립만세 삼창을 우렁차게 외치고 함께 축배를 들었다고, 위창 오세창의 경성감옥 ‘신문조서’와 이종일의 일기 《묵암비망록》, 백암 박은식이 쓴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전한다. 오후 4시 무렵, 태화관을 포위한 일본군 경비대와 헌병들이 민족대표의 머리에 대나무 고깔을 씌운 채 5명씩 줄줄이 연행했다.

학생과 일반인들의 뭇 희생을 고려한 민족대표가 장소를 태화관으로 변경한 것과 달리 오후 2시 30분쯤 탑골(塔洞)공원에서는 독자적인 독립선언식이 열렸다. 민족대표가 나타나지 않게 되자. 신원을 밝히지 않은 한 청년(정재용 혹은 한위건)이 공원의 육각당 계단에 올라서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이때 모인 학생 5천여 명은 “흡사 하늘을 뒤덮은 까마귀 떼가 날아오르는 것 같았다.”고 기록될 만큼 학생모를 하늘에 던지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고, 종로 거리에 가두 행진을 나섰다. 보성여학교 학생 60여 명과 신성학교 학생 수백 명이 ‘조선독립단’이라 쓴 깃발을 앞세우고, 출발한 시위는 날이 저물도록 계속됐다. 고종의 인산 배관을 위해 상경했던 지방 사람까지 합세한 시위 대열이 대한문 앞에 이르렀을 때, 온 장안은 군중과 만세 소리로 들끓었다. 이날 서울을 비롯해 평안남도 평양・진남포・안주, 평안북도 선천・의주, 함경남도 원산 등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3월 2일부터 경기 개성, 충청남도 예산, 전라북도 옥구, 경상북도 대구, 전라남도 광주 등 전국에 들불처럼 번져갔다.

3월 21일 제주와 조천리 시위로까지 번진 만세운동은 전국 13도에서 시위 대열이 일어나면서 역사상 최대의 민족운동으로 발전했다. 이를 계기로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1920년 상하이 유신사에서 발간된 최초의 3.1운동사인 《혈사(血史)》에서 백암은 “독립운동은 최근 30년간 중단된 일이 없었고, 또 우리 역사상의 정신에서 발생하는 동력”이라고 적었다. 또 1919년 11월 15일 한국불교도연합회는 오만광・김취산・최경파 등 12명의 이름으로 ‘한국불교도 선언서’를 처음 발표하고, 3.1운동 참가를 결의했다. 2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한 3.1운동은 지역과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종교와 이념을 초월한 민족 총화의 광장에 조선 민중들이 나셨던 역사이다.

그로부터 84년 만에 국가와 지역, 이념과 종교를 넘어선 3.1절 민족대회가 그 출발점이던 서울에서 열렸다. 삼일 만세운동이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것은 해방 이래 처음이었다. ‘민중혁명’이라 불린 3.1운동의 첫 함성인 ‘독립만세’를 다시 외치고, 그 뜻을 잇기 위해 남북 사람들이 함께했다.

삼일절 기념 조국통일기원 남북불교도 합동법회(2003.3.2. 서울 봉은사). 사진 =평불협 창립 20돌 자료집(2012년)
삼일절 기념 조국통일기원 남북불교도 합동법회(2003.3.2. 서울 봉은사). 사진 =평불협 창립 20돌 자료집(2012년)
삼일절 남북불교도 합동법회 타종식(2003.3.2. 서울 봉은사). 사진=3.1민족대회 사진공동취재단.
삼일절 남북불교도 합동법회 타종식(2003.3.2. 서울 봉은사). 사진=3.1민족대회 사진공동취재단.

남북한이 독립을 외치다

삼일 만세운동 이후, 첫 기념행사는 1920년 3월 1일 오전 10시, 중국 상하이 올림픽 대극장에서 ‘독립선언 기념 대축하회’의 이름으로 개최됐다. 정부 차원의 첫 경축식은 상해민단 주최로 이동휘 국무총리와 국무위원, 임시의정원, 대의원, 인성학교 학생이 모인 가운데 선언서 낭독식, 국기상기식 등으로 진행됐다. 같은 해 그날에는 ‘해삼위’라고 불렀던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도 1901년 대한제국 초대 러시아 상주 공사로 부임한 이범진에 의해 독립선언 1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그 후, 27년 만에 우리나라에서 3.1절 기념식이 처음 열렸다. 1946년 3월 1일 서울 보신각 앞에서 3.1절 27주년 기념식이 개최됐다. 김구 주석의 축사와 김규식 부주석이 만세 선창을 했다. 김구 주석은 “3월 1일 날의 독립선언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일제한테 나라를 빼앗겨서 식민지배를 받고 있지만, 우리 한민족은 일제의 식민지배를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독립국이다.’라고 선언한 것을 말한다.”고 정의했다. 북측에서도 1946년 3월 1일 평양역 광장에서 ‘3.1봉기 27돌 경축대회’가 처음 열렸다. 이때 김일성 주석이 경축 연설을 한 이후, 3.1운동을 ‘3.1인민봉기’라고 부른다. “자주독립을 염원하며, 식민통치하에서 쌓이고 쌓인 인민의 원한과 분노가 폭발한 사건”으로 규정하는 가운데, ‘3.1인민봉기 기념보고회’를 매년 개최했다. 삼일 만세운동은 1917년 러시아 10월 붉은혁명의 영향을 받은 서울, 평양시민들이 시작한 반일 투쟁이라 묘사하는 등 남북한의 해석이 다르다.

이런 틈새를 좁히고 기념하기 위한 첫 만남이 2003년 ‘3,1절 민족대회’였다. 해방과 분단 이후, 58년 만에 처음으로 열린 남북공동 행사였다. 그해 3월 1일 오전 9시 인천공항을 통해 서울에 온 북측 대표단은 단장 장재언(조선종교인협회 회장과 조선카톨릭교협회 중앙위원장) 등 105명의 종교・사회단체 인사들로 구성됐다. 강지영 조선카톨릭교협회 부위원장, 오경우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서기장, 황병준 조선불교도련맹 부위원장 등과 라기환 천도교 중앙위원회 부부장 등 50명의 종교계 임원과 교인들이 참가했다. 특히 종교단체별 예식 행사에 참석할 장충성당 성가대 13명, 칠골교회 성가대 5명 등도 포함됐다. 또 직업총동맹, 민주여성동맹, 학생위원회, 청년중앙회관 등 근로단체 관계자 20여 명과 같이 대표단에는 허혁필 민족화해협의회(민화협) 부회장 등 관계자 20여 명, 허종호 조선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연구사, 장혜명 통일문학 편집국장, 조선중앙통신・노동신문・통일신보 기자 등이 방한했다.

애당초 예상과 달리 2002년 서울 8.15공동행사에 참가했던 고위급 인사들은 불참했다. 종교적 색채를 띤 공동행사였음에도 류미영 천도교청우당 위원장, 박태화 조선불교도련맹 중앙위원장, 강영섭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중앙위원장 등 북측의 종교계 수장들이 참가하지 않았다. 장재언 단장을 제외한 실무급 종교인사들과 성가대 등이 참가함으로써 내실 있는 공동행사로 꾸려졌다.

3월 1일 오후 5시, 서울 워커힐호텔 제이드가든에서 열린 2003년 ‘평화와 통일을 위한 3.1민족대회’는 남측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와 북측 조선종교인협회가 공동 주관했다. ‘조국통일’을 외치며 단일기를 흔드는 남측 인사들의 환영을 받으며 행사장에 들어선 북측 대표단은 ‘우리민족끼리’가 적힌 손 깃발을 흔들며, 남측 대표단의 환영에 화답했다. 황병준 조불련 부위원장과 변진흥 KCRP 사무총장의 사회로 진행된 3.1민족대회에는 북측 105명과 남측 대표단 300명, 참관단 4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단일기 게양과 함께 시작됐다. 공동사회를 맡은 황병준 부위원장은 통일연대 한상렬 목사를 ‘목사선생’이라 소개하면서 큰 웃음을 자아냈다.

“자주만이 살길이고, 자주는 민족 공조에 있다.”라는 북측 장재언 단장의 첫 대표연설에 이어 남측 대표연설은 천도교 김철 교령이 했다. 이날 남북대표단은 4개 항의 ‘3・1민족선언문’을 채택하고, 남측 한병관 천주교 신부와 북측 리성숙 조그련 책임부원이 함께 낭독했다. 선언문 낭독을 마친 후, 강지영 조선카톨릭교협회 부위원장과 한양원 한국민족종교협의회 회장의 선창으로 3・1민족자주통일 만세, 6・15공동선언 만세,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 만세를 힘껏 외쳤다. 이날 오후 7시에는 환영연회가 열렸다. 양측 대표의 간략한 환영사에 이어 원불교 인사가 “자비, 자주, 평화의 정신이 담긴 남북과 북남의 합환주를 들며 통일을 염원하자.”는 축배 제의로 모두가 건배를 외치는 등 반전과 자주, 조국의 평화통일을 다짐하는 시간을 가졌다.

3・1절 민족대회 본행사에 이어 3월 2일에는 오전 9시 30분부터 천주교, 개신교, 불교, 천도교 등 4개 종교별로 명동성당, 소망교회, 봉은사, 천도교 대교당에서 행사를 갖고, 오후에 학술토론회를 열었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남북한 학자들이 일제의 식민통치 문제점에 초점을 맞춰 각기 연구성과를 발표했으며, 마지막 날인 3일에는 경복궁 관람과 코엑스에서 열린 ‘고구려전’을 참관한 뒤, 오후 4시 인천공항을 통해 출국하면서 공식 일정이 마무리됐다.

평양에서 온 성가대 등이 참가한 기독교와 가톨릭 측과 달리 그해 3월 2일 서울 강남 봉은사에서 열린 ‘3.1절 기념 조국통일기원 남북불교도 합동법회’가 더 주목을 받았다. 집회와 불법시위 등 경찰의 경호 문제로 불교의 1번지 서울 조계사가 아닌 봉은사에서 개최된 조국통일기원법회는 1991년 10월 미국LA 이후, 서울 봉은사에 황병준 조불련 부위원장, 리규룡・리영호・류인명・차금철 책임부원과 김명조 조불련중앙위원회 부부장 6명이 내방하면서 시작됐다.

오전 9시 25분경 봉은사에 도착한 조불련 대표단은 원혜 봉은사 주지와 양산 조계종 사회부장 등과 남녀 화동들이 꽃다발로 영접했다. 봉은사 법왕루 입구에서 황병준 단장은 “북과 남의 불자들이 화합하고 단합하여 6·15공동선언 리행에 더욱 분발 정진합시다.”라는 방명을 남겼다. 대웅전에서 반야심경을 봉독한 후, 다래헌으로 자리를 옮겨 김법장 한국불교종단협의회 회장을 비롯한 강석주 봉은사 조실, 방지하 조계종 종회의장과 효암 진각종 통리원장, 법공 총지종 통리원장, 이홍파 관음종 총무원장 등과 첫 환담을 했다. 이어 오전 10시 남북대표단은 범종각에서 21세기 희망을 상징하는 21번의 타종을 가졌다. 이날 법왕루에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합동법회는 육법공양에 이어 차금철 조불련 책임부원과 김무원 천태종 사회부장의 사회로 삼귀의례, 남북 공동의 반야심경 집전과 헌향 헌화, 조불련 대표단 소개와 황병준 부위원장의 대표연설, 법장 조계종 총무원장의 봉행사 순으로 진행됐다. 봉은사 합창단의 축가와 공동발원문 낭독, 만세 삼창 등으로 성료됐다.

이처럼 북측 붉은 승려들의 서울 봉은사 방문은 16세기 전쟁 영웅인 서산대사의 행로(行路)에 대한 또 다른 여정이었으며, 전례가 되었다. 또 3.1절 민족대회는 노무현 참여정부에서 처음으로 열린 대규모 민간교류였다.

# 다음 편은 ‘2003년 북녘사찰 단청불사’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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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범
경북 경주 출생으로 1984년부터 불교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참여하다가 1990년 초, 법보종찰 해인사에 입산 환속했다. 1994년부터 남북불교 교류의 현장 실무자로 2000년부터 평양과 개성·금강산 등지를 다녀왔으며, 현재는 평화통일불교연대 운영위원장과 북한불교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남북불교 교류 60년사’ 등과 논문으로 ‘북한 주민들의 종교적 심성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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