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불교교류 비망록: 이제, 다시 본다] 13. 1999년 북녘에 새바람 불다
[남북불교교류 비망록: 이제, 다시 본다] 13. 1999년 북녘에 새바람 불다
  • 이지범 북한불교연구소 소장
  • 승인 2021.10.18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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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불련, 다시 변모하다”

북측의 1993년 3월 핵확산금지조약(NPT)과 1994년 6월 국제원자력기구(IAEA) 탈퇴선언으로 지미 카터 전 미대통령이 그해 6월 15일 평양을 방문하는 등 긴박하게 돌아가던 한반도 정세에 전환점으로, 남북정상회담 분위기가 무르익던 시점에 ‘김일성 주석 서거’라는 중대 변수가 발생했다. 이어 남측의 조문 파동으로부터 남북관계는 모두 중단되고 말았다.

그 시기 북측에서는 또 다른 형태의 문화가 생겨났다. 이른바 삼년상 패러다임이다. 중국 공자의 《논어》 <양화편>에 “자식은 태어나 3년이 지나야 부모 품에서 벗어날 수 있으므로, 무릇 부모를 위해 3년 상을 치르는 것이 천하에 통하는 상례”이다. 또 <예기편>에서도 마찬가지로 삼년상이라는 것은 천하의 공통된 것이라 했다. 부모를 여의면, 자식은 사람 구실을 하게 해준 기간만큼은 적어도 잊지 않는 게 도리라는 것이다.

고구려 광개토왕릉 비문에서도 412년에 광개토대왕이 승하하고, 2년 후인 414년 9월 산에 능(陵)을 조성해 모셨다고 했다. 10세기 고려 광종 때부터 본격화된 삼년상은 조선 초기부터 사대부와 백성들의 모범을 강조하여 공식적으로 삼년상을 가례로 치른다고 했다. 20세기 초, 대한제국의 고종 이후 서구화의 영향으로 삼년상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고려와 조선 시대에 가례로 정착했던 삼년상은 상주로 사는 ‘거상(居喪)’과 제사를 지내는 ‘제향(祭享)’을 중시했다. 삼년상은 부모가 돌아가시면, 자식이 애도의 의미로 상복을 입고 3년간 거상생활을 한다는 의미인데, 만 2년 정도가 실제 기간이었다. 19세기 경주김씨의 삼년상 일지인 《거상잡의》에서도 36개월이 아닌 28개월의 삼년상이 치러졌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1백일로 줄었다가 요즈음에는 49일로 단축한 사례도 있다. 이스라엘에서도 근대 시기까지 가족과 가까운 친척이 죽었을 때 일정 기간 슬퍼하며, 집에 머무는 풍습이 있었다.

오늘날 국제사회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례가 있었다. 1994년 7월 8일 북측의 김일성 주석이 타계한 이후, 삼년상을 넘어 5년 동안의 추모 기간을 가졌다. 최고지도자는 3년 동안 말하지 않는 제도와 함께 전체 인민들이 애통한 마음과 함께 행동거지를 바르게 했다.

그로부터 북측의 전체 인민들은 1998년 9월 9일 조선로동당 창건일을 기해 “새마음 새 뜻으로 공화국 사회주의 건설에 복무하겠다.”라는 생활총화를 다지면서 스스로 새 이름을 가졌다고 전한다.

그 당시 북측의 조불련 등 종교계에서도 본래 이름에서 한 두 글자를 고쳤다. 바뀐 이름은 그 이듬해부터 본격적으로 사용했다. 이에 관해, 남측에서는 다른 사람으로 교체가 되었다거나 아니다 등으로 설왕설래 됐다. 더욱이 남북교류 관계의 특수성을 잘 모르는 학자와 기자들은 문헌자료로만 이해하고, 또 그 당시 교류 테이블에 처음 참가한 분들은 자신의 경험만을 강조함으로써 더 혼란을 부추겨 놓았다.

밀레니엄 시대를 앞둔 1999년부터 변화와 전진을 이룬 북측의 종교 모습과 불교적 전통으로 손님맞이를 준비했던 조불련의 이모저모를 다시 살펴본다.

조불련 김세률 초대위원장의 전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 토론연설 장면(1948.4.19. 평양 모란봉극장) 사진=《국가기록원》 해제자료.



조불련, 정신을 개조하다

북한불교를 대표하는 ‘조선불교도련맹 중앙위원회’(약칭 조불련)는 1945년 12월 26일 평양 영명사에서 창립한 종교단체이다. 조불련 초대 위원장은 1948년 4월, 1차 남북연석회의에서 토론 연설을 했던 김세률 위원장이 맡았다. 기독교의 경우는 1946년 11월 발족한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중앙위원회’(약칭 조그련)이고, 천도교는 1947년 2월 결성한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가 대표하고 있다. 가톨릭은 1988년 6월 발족한 ‘조선가톨릭교협회 중앙위원회’(약칭 조가협)이며, 1989년 5월에 결성한 ‘조선종교인협의회’(KCR)가 종교단체를 대표하고 있다.

북측의 종교단체는 10년 주기로 변화하는 양상을 보여 왔다. 1989년 7월 평양에서 열린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일명 평양축전)을 계기로 본격적인 조직사업과 대외 활동을 시작한 종교단체는 1998년 9월을 기해 한 단계 도약했다.

이 시기에 북측의 헌법 개정으로부터 종교사업의 확장성이 높아지고, 특히 1998년 11월 금강산관광 사업이 시작되면서 당(黨)으로부터 종교단체의 사업 범위가 재설정됐다. 또한 1989년에 신설된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과 종교학부 출신의 담당 일꾼(책임부원)들이 각 종교단체에 실무 배치되었다. 주로 종교교류 및 행사, 종교간 협력사업 등을 추진하는 업무를 맡았다.

1996년부터 본격적으로 배치된 종교단체 일꾼들은 주로 국내에서 활동하다가 1999년부터 국제무대에 참여하게 됐다. 같은 해 3월 28일~4월 3일까지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남북불교회의 실무진으로 참가했다. 심상진 조불련 서기장을 단장으로 류인명 책임부원과 리규룡 책임부원 등이 참여한 가운데, 조계종단과는 부처님오신날 공동발원문과 동시법회에 관해 합의를 가졌다. 여타 남측 불교종단과 단체들과 불교문화 교류사업과 인도적 지원에 관한 회의에 참여했다. 이때 조불련 주요 임원들의 이름이 고쳐졌다고 공식 확인되었다.

이런 사실은 1998년 9월 9일 조선로동당 창건일을 기해 처음 시작하여 1999년 1월부터 인민들이 바꾼 자신의 이름을 사용했다고 한다. 조불련 심상련 서기장은 심상진으로, 류인수 책임부원은 류인명으로 자신의 이름을 개명해 사용했다. 북측 종교단체를 대표하는 조선종교인협의회 회장과 조선적십자회 및 조선가톨릭협회 중앙위원회 장재철 위원장은 장재언으로 바꾸었다. 또 1995년 6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남북 쌀회담 북측대표로 참가했던 전금진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은 전금철로 그 이름을 바꾸어 사용했다. 또 조선기독교도련맹은 1999년 9월에 ‘조선그리스도교련맹’으로 단체 이름까지 바꾸었다.

일반적으로 국가 지명과 기관, 단체의 경우에는 북측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법령의 일종) 제호에 의해서만 조직의 이름을 바꿀 수 있다. 하지만, 북측의 인민들이 1998년 9월 9일 조선로동당 창건일로부터 자신의 이름을 바꾼 것은 “새마음 새 뜻으로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 사회주의 건설에 복무하겠다.”라는 생활 또는 조직총화를 통한 이행 사업으로 조불련 일꾼들의 정신을 재무장하고, 개조하기 위한 차원에서 실천됐다.

그런데도 그 당시, 남측의 대학과 언론사 등 일부 인사들은 1998년 9월을 기해 북측 사람들이 이름을 바꾼 사실을 꼼꼼히 점검하거나 인지하지 못하고, 이때부터 중복 또는 시기를 구분하여 표기한 것에 대해서 이름 표기가 틀렸다거나 비전문적 내용이라고까지 치부하는 해프닝을 벌이곤 했다. 또 2000년대부터 교류와 협력에 참여한 분들은 북측 교류 인사들의 원래 이름이라고 알고 있기도 하다.

1990년대 조불련 변화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는 그 당시 주요 임원들의 현황은 <표>와 같다.



1990년대 조불련 변화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는 그 당시 주요 임원들의 현황표.(이지범 작성)





조불련과 민족화합불교추진위원회 합동법회(1999.6.12. 묘향산 보현사). 사진=평불협 《하나로》(2001년).



조불련, 손님맞이를 준비하다

북녘 사찰의 손님맞이는 “그 자상한 접대나 배려, 행동거지의 온후함은 산사에서의 일반적인 문화로 불교에 원천을 두고 있다.”라고, 이 광경을 1894년 초여름에 목도했던 영국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금강산으로의 여정》에서 풀어 놓은 이야기다.

그 전통은 1990년대에 북녘 사찰들이 재단장하면서 되살아났다. 여기에다 1998년 한 해 동안 북녘 절들을 순례한 평양 윤이상음악연구소 이수자 고문의 조력이 컸다는 후문이다. 그때 여러 곳의 절을 순례하면서 접했던 현지의 애로와 건의사항을 당국에 전달하는 등 북녘 사찰들의 보존과 보호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일신하게 된 종교단체처럼 조불련에서도 1999년 한 해 동안 평양으로 들어오는 남측 불교계 인사들을 맞이했다. ‘오는 사람이나 물건을 예의로 받아들인다.’라는 손님맞이의 예행 연습처럼 시작됐다. 그 물꼬는 그해 6월 8일~15일 남측 민족화합불교추진위원회(약칭 불추위) 지선 상임추진위원장과 성조 조계종 사회부장 등이 처음 방문하여 묘향산 보현사 합동법회와 지원사업 협의로 출발했다. 또 9월 19일~23일까지 성초 진각종 통리원장, 휴명 종회의장, 회정 국제불교연구소장, 장용철 진각복지재단 사무처장 등 대한불교진각종 대표단이 처음 방문하여 중형버스 기증 및 지원사업을 협의했다. 같은 해 11월 4일 평양 광법사에서 방북한 남측 평불협과 윤이상음악연구소 공동으로 ‘청공윤이상선생천도법회’를 개최했다. 11월 23일~30일에는 남측 불교추진위원회의 명진 추진위원장 등 2명이 방북하여 박태화 조불련 위원장과의 면담을 통해 향후. 교류 및 지원 사업에 대해 협의했다. 평불협 미주본부는 그해 12월 7일~14일 방북하여 황북 사리원의 금강국수공장 운영에 대해 모니터링했다.

국외에서의 남북불교 교류는 아시아종교인평화회의(ACRP) 주관으로 1999년 4월 25일~27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남북및일본종교인평화모임’에 오고산 조계종 총무원장과 함께 황병준 조불련 부위원장이 대표로 참가했다. 같은 해 11월 25일~29일 베이징 해당화식당 등에서 황병준 부위원장 등은 조계종을 비롯한 4개 남측 종단과 3개 불교단체와 연속 교류회의를 가졌다.

연이은 자연재해와 국가적 추모 분위기가 점차 해소되면서 1999년에 불기 시작한 샛바람(東風)처럼 북측 조불련의 새로운 변모는 진각종이 종단차원에서, 지원과 교류사업에 앞장선 불교추진위원회의 방북과 함께 합동법회, 윤이상 선생 천도재 개최 등 종교적인 변화로 이어졌다.

# 다음 편은 ‘2000년 역사적 사변이 일어나다’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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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불련 김세률 초대위원장의 전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 토론연설 장면(1948.4.19. 평양 모란봉극장) 사진=《국가기록원》 해제자료.

조불련, 정신을 개조하다

북한불교를 대표하는 ‘조선불교도련맹 중앙위원회’(약칭 조불련)는 1945년 12월 26일 평양 영명사에서 창립한 종교단체이다. 조불련 초대 위원장은 1948년 4월, 1차 남북연석회의에서 토론 연설을 했던 김세률 위원장이 맡았다. 기독교의 경우는 1946년 11월 발족한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중앙위원회’(약칭 조그련)이고, 천도교는 1947년 2월 결성한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가 대표하고 있다. 가톨릭은 1988년 6월 발족한 ‘조선가톨릭교협회 중앙위원회’(약칭 조가협)이며, 1989년 5월에 결성한 ‘조선종교인협의회’(KCR)가 종교단체를 대표하고 있다.

북측의 종교단체는 10년 주기로 변화하는 양상을 보여 왔다. 1989년 7월 평양에서 열린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일명 평양축전)을 계기로 본격적인 조직사업과 대외 활동을 시작한 종교단체는 1998년 9월을 기해 한 단계 도약했다.

이 시기에 북측의 헌법 개정으로부터 종교사업의 확장성이 높아지고, 특히 1998년 11월 금강산관광 사업이 시작되면서 당(黨)으로부터 종교단체의 사업 범위가 재설정됐다. 또한 1989년에 신설된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과 종교학부 출신의 담당 일꾼(책임부원)들이 각 종교단체에 실무 배치되었다. 주로 종교교류 및 행사, 종교간 협력사업 등을 추진하는 업무를 맡았다.

1996년부터 본격적으로 배치된 종교단체 일꾼들은 주로 국내에서 활동하다가 1999년부터 국제무대에 참여하게 됐다. 같은 해 3월 28일~4월 3일까지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남북불교회의 실무진으로 참가했다. 심상진 조불련 서기장을 단장으로 류인명 책임부원과 리규룡 책임부원 등이 참여한 가운데, 조계종단과는 부처님오신날 공동발원문과 동시법회에 관해 합의를 가졌다. 여타 남측 불교종단과 단체들과 불교문화 교류사업과 인도적 지원에 관한 회의에 참여했다. 이때 조불련 주요 임원들의 이름이 고쳐졌다고 공식 확인되었다.

이런 사실은 1998년 9월 9일 조선로동당 창건일을 기해 처음 시작하여 1999년 1월부터 인민들이 바꾼 자신의 이름을 사용했다고 한다. 조불련 심상련 서기장은 심상진으로, 류인수 책임부원은 류인명으로 자신의 이름을 개명해 사용했다. 북측 종교단체를 대표하는 조선종교인협의회 회장과 조선적십자회 및 조선가톨릭협회 중앙위원회 장재철 위원장은 장재언으로 바꾸었다. 또 1995년 6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남북 쌀회담 북측대표로 참가했던 전금진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은 전금철로 그 이름을 바꾸어 사용했다. 또 조선기독교도련맹은 1999년 9월에 ‘조선그리스도교련맹’으로 단체 이름까지 바꾸었다.

일반적으로 국가 지명과 기관, 단체의 경우에는 북측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법령의 일종) 제호에 의해서만 조직의 이름을 바꿀 수 있다. 하지만, 북측의 인민들이 1998년 9월 9일 조선로동당 창건일로부터 자신의 이름을 바꾼 것은 “새마음 새 뜻으로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 사회주의 건설에 복무하겠다.”라는 생활 또는 조직총화를 통한 이행 사업으로 조불련 일꾼들의 정신을 재무장하고, 개조하기 위한 차원에서 실천됐다.

그런데도 그 당시, 남측의 대학과 언론사 등 일부 인사들은 1998년 9월을 기해 북측 사람들이 이름을 바꾼 사실을 꼼꼼히 점검하거나 인지하지 못하고, 이때부터 중복 또는 시기를 구분하여 표기한 것에 대해서 이름 표기가 틀렸다거나 비전문적 내용이라고까지 치부하는 해프닝을 벌이곤 했다. 또 2000년대부터 교류와 협력에 참여한 분들은 북측 교류 인사들의 원래 이름이라고 알고 있기도 하다.

1990년대 조불련 변화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는 그 당시 주요 임원들의 현황은 <표>와 같다.

1990년대 조불련 변화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는 그 당시 주요 임원들의 현황표.(이지범 작성)
1990년대 조불련 변화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는 그 당시 주요 임원들의 현황표.(이지범 작성)
조불련과 민족화합불교추진위원회 합동법회(1999.6.12. 묘향산 보현사). 사진=평불협 《하나로》(2001년).
조불련과 민족화합불교추진위원회 합동법회(1999.6.12. 묘향산 보현사). 사진=평불협 《하나로》(2001년).

조불련, 손님맞이를 준비하다

북녘 사찰의 손님맞이는 “그 자상한 접대나 배려, 행동거지의 온후함은 산사에서의 일반적인 문화로 불교에 원천을 두고 있다.”라고, 이 광경을 1894년 초여름에 목도했던 영국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금강산으로의 여정》에서 풀어 놓은 이야기다.

그 전통은 1990년대에 북녘 사찰들이 재단장하면서 되살아났다. 여기에다 1998년 한 해 동안 북녘 절들을 순례한 평양 윤이상음악연구소 이수자 고문의 조력이 컸다는 후문이다. 그때 여러 곳의 절을 순례하면서 접했던 현지의 애로와 건의사항을 당국에 전달하는 등 북녘 사찰들의 보존과 보호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일신하게 된 종교단체처럼 조불련에서도 1999년 한 해 동안 평양으로 들어오는 남측 불교계 인사들을 맞이했다. ‘오는 사람이나 물건을 예의로 받아들인다.’라는 손님맞이의 예행 연습처럼 시작됐다. 그 물꼬는 그해 6월 8일~15일 남측 민족화합불교추진위원회(약칭 불추위) 지선 상임추진위원장과 성조 조계종 사회부장 등이 처음 방문하여 묘향산 보현사 합동법회와 지원사업 협의로 출발했다. 또 9월 19일~23일까지 성초 진각종 통리원장, 휴명 종회의장, 회정 국제불교연구소장, 장용철 진각복지재단 사무처장 등 대한불교진각종 대표단이 처음 방문하여 중형버스 기증 및 지원사업을 협의했다. 같은 해 11월 4일 평양 광법사에서 방북한 남측 평불협과 윤이상음악연구소 공동으로 ‘청공윤이상선생천도법회’를 개최했다. 11월 23일~30일에는 남측 불교추진위원회의 명진 추진위원장 등 2명이 방북하여 박태화 조불련 위원장과의 면담을 통해 향후. 교류 및 지원 사업에 대해 협의했다. 평불협 미주본부는 그해 12월 7일~14일 방북하여 황북 사리원의 금강국수공장 운영에 대해 모니터링했다.

국외에서의 남북불교 교류는 아시아종교인평화회의(ACRP) 주관으로 1999년 4월 25일~27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남북및일본종교인평화모임’에 오고산 조계종 총무원장과 함께 황병준 조불련 부위원장이 대표로 참가했다. 같은 해 11월 25일~29일 베이징 해당화식당 등에서 황병준 부위원장 등은 조계종을 비롯한 4개 남측 종단과 3개 불교단체와 연속 교류회의를 가졌다.

연이은 자연재해와 국가적 추모 분위기가 점차 해소되면서 1999년에 불기 시작한 샛바람(東風)처럼 북측 조불련의 새로운 변모는 진각종이 종단차원에서, 지원과 교류사업에 앞장선 불교추진위원회의 방북과 함께 합동법회, 윤이상 선생 천도재 개최 등 종교적인 변화로 이어졌다.

# 다음 편은 ‘2000년 역사적 사변이 일어나다’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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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범
경북 경주 출생으로 1984년부터 불교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참여하다가 1990년 초, 법보종찰 해인사에 입산 환속했다. 1994년부터 남북불교 교류의 현장 실무자로 2000년부터 평양과 개성・금강산 등지를 다녀왔으며, 현재는 평화통일불교연대 운영위원장과 북한불교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남북불교 교류 60년사’ 등과 논문으로 ‘북한 주민들의 종교적 심성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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