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무문관: 서당고각(西堂鼓角)
신무문관: 서당고각(西堂鼓角)
  • 박영재 명예교수
  • 승인 2021.06.29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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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선도회 박영재 교수와 마음공부 47.

성찰배경: 바로 앞글에서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 선사의 뛰어난 세 출가(出家) 제자들 가운데 백장회해(百丈懷海, 720-814) 선사와 남전보원(南泉普願, 748-834) 선사에 대해 다루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마지막으로 서당지장(西堂智藏, 735-814) 선사에 대해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 <전등록(傳燈錄)>과 <벽암록(碧巖錄)>을 통해 <무문관(無門關)>에 없는 부분들을 상보적(相補的)으로 채우고자 합니다. 

이미 경계를 제시해드렸다[早箇呈了]

먼저 <전등록> 제7권에 수록되어있는 서당지장 선사의 면모를 잘 엿볼 수 있는 대목들을 두루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건화(虔化) 사람으로서 성(姓)은 요(廖)씨이다. 일찍이 8세 때 출가하였으며 25세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어떤 관상가(觀相家)가 그의 특이한 모습을 보고 ‘스님의 기골이 비범하니, 반드시 석가세존의 법을 널리 선양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마침내 불적암(佛迹巖)으로 가서 마조(大寂은 諡號) 선사께 참례(參禮)하고, 백장회해 선사와 함께 입실점검(入室點檢)을 받았는데, 모두 인가(印可)를 받았다.

하루는 (어려서 출가해 스승으로부터 총애를 받았던) 그에게 마조 선사께서 편지를 전해드리라고 해서 장안(長安)의 남양혜충(南陽慧忠, ?-775) 국사(國師)께 갔다. 국사께서 물었다. “그대의 스승은 어떤 법을 설하는가?” 그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서 섰다. 그러자 국사께서 “다만 그것뿐인가? 그밖에 또 있는가?” 이에 그는 다시 동쪽으로 가서 섰다. 국사가 다시 “그것은 마조 선사의 경계이다. 그대의 경계는 무엇인가?” 그러자 그는 당당하게 “이미 제 경계를 화상께 제시해드렸습니다.[早箇呈似和尚了.]”라고 응대했다.

마조 선사께서 어느 날 그에게 ‘그대는 왜 경전을 보지 않는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경전인들 어찌 다르겠습니까?’하고 답했다. 이에 마조 선사께서 ‘그렇기는 하지만 그대가 뒷날 후학을 지도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저는 병이 나서 아직 스스로를 돌보기도 급급한데, 감히 남을 위하라고 하십니까?’ 그러자 마조 선사께서 ‘자네는 훗날 반드시 세상에서 불법을 크게 일으킬 것이네.[子末年必興於世也.]’라고 단언하셨다.” 

마조 선사께서 열반에 든 뒤, 서당 선사는 덕종(德宗, 재위 779-805) 때인 791년에 마침내 대중의 청에 의하여 개당(開堂)하여 교화(敎化)를 시작하였다. 

서당고각(西堂鼓角)

이번에는 서당 선사의 트레이드마크라고도 할 수 있는 ‘서당고각(西堂鼓角)’을 제창하고자 합니다.  

“상서(尙書, 정부 부처의 최고 책임자)인 이고(李翱, 772~841)가 일찍이 어떤 스님에게 ‘마조 선사께서는 어떤 설법을 하셨는가?[馬大師有什麼言教.]’하고 물었다. 이 승려가 ‘대사께서는 어떤 때는 마음이 곧 부처라 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마음도 부처도 아니라고 하셨소.’라고 답했다. 그러자 이고가 ‘모두 이 정도 수준이군.[總過遮邊]’하고 평했다.

그리고 다시 서당 선사께 와서 ‘마조 선사께서는 무어라고 설법하셨습니까?’하고 여쭈었다. 즉시 서당 선사께서 ‘이고(李翱)야!’하고 부르자, 이고가 (얼떨결에) ‘예!’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서당 선사께서 ‘북과 고동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는구나.[鼓角動也.]’라고 평했다.

제창: 사실 스승이 부르고 제자가 답하는 이 문답은 필자가 <불교닷컴> 36번째 기고에서 밝혔던 <무문관> 제22칙 ‘가섭찰간(迦葉刹竿)’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즉 금란가사를 물려받으며 석가세존의 법이 이은 사형인 가섭 존자께 아직 깨치지 못해 결집에도 참석할 자격이 없었던 아난이, 그밖에 무언가 은밀히 물려받은 것은 없는지 궁금해하며 묻자, 가섭 존자께서 ‘아난아!’하고 불렀고, 이에 아난은 (얼떨결에) ‘예!’하고 대답한 데서 유래했다고 사료됩니다. 한편 이고 역시 마조 선사의 명성을 듣고 그 가르침을 궁금해하며 제자들에게 묻다가, 마침내 이 일화 관련해 당시 수제자로 널리 알려진 서당 선사와의 마지막 문답을 끝으로 의문이 사라진 것으로 사료됩니다. 

덧붙여 가섭 존자는 즉시 ‘문 앞의 찰간을 내리거라!’라고 평했고, 서당 선사는 즉시 ‘북과 고동 소리가 진동하는구나!’라고 평했습니다. 그런데 두 경우 모두 이름을 부르고 똑같이 ‘예!’하고 응답한 것에 대해 가섭 존자와 서당 선사가 각기 다른 평들을 했는데 이들의 경계는 같을까요 다를까요?[同耶別耶.] 만일 같다면 가섭과 서당의 평을 바꾸어 평해도 될 것이고, 다르다면 바꿀 경우 동문서답이 되겠지요. 자! 여러분 ‘동별불이(同別不二)’의 견해를 세워보시면 어떨지요? 사실 이런 문답 가풍은 <무문관>에 등장하는 후대 선사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이어졌는데 해당 대목에 가서 다시 인용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조사구백비(馬祖四句百非)
이번에는 우열(優劣) 시비(是非)가 끊이지 않는 <벽암록> 제73칙인 ‘마조사구백비(馬祖四句百非)’를 살피고자 합니다. 먼저 본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스님이 마조 선사께 ‘청컨대 화상께서 사구四句를 여의고 백비百非를 끊은 채, (즉 온갖 분별을 일으키지 않고)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을 곧바로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여쭈었다. 마조 선사께 ‘나는 오늘 별다른 견해가 없으니, 자네는 지장 스님에게 가서 물어보아라.’라고 응대했다.

그 승려가 지장 스님에게 와서 똑같이 물었다. 지장 스님이 ‘그대는 왜 마조 선사께 묻지 않는가?’하고 반문했다. 그러자 그 승려가 ‘화상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상좌(上坐)에게 물어보게 하셨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지장 스님이 손으로 머리를 어루만지면서 ‘오늘은 머리가 쿡쿡 쑤시니, 회해 사형에게 가서 물어보아라.’라고 응대했다. 
그 승려가 다시 회해 스님에게 가서 물었다. 그러자 회해 스님이 ‘나는 그러한 것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不會.]’라고 응대했다. 
그 승려가 마조 선사께 다시 돌아가서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다. 그러자 마조 선사께서 ‘지장 스님의 머리(에 쓴 두건)는 희고, 회해 스님의 머리(에 쓴 두건)는 검구나.[藏頭白 海頭黑.]’라고 평評하셨다.”

군더더기: 온몸으로 체득하려 하지 않고 머리로만 따지는 의학도(疑學徒)들의 전형적인 물음인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에 대해 마조 선사와 그 제자들 모두 표면상 각기 다르게 응대했습니다. 그리고 이 의학도가 다시 마조 선사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자, 마조 선사께서 두 수제자에 대해 뛰는 놈의 대명사인 흰 두건(頭巾)을 썼던 후백(侯白)이란 도적이 나는 놈의 대명사인 검은 두건을 쓴 후흑(侯黑)이란 도적에게 당한 옛 일화를 끌어다가 총평(總評)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를 두고 ‘백장이 서당보다 뛰어났다.’라는 등 오늘날까지도 논란이 이어져 오고 있는데 냉철히 살펴보면 둘 다 ‘흑백불이(黑白不二)’인 삿된 도둑들입니다. 그러니 진정한 수행자라면 우열 시비의 분별에서 벗어나 인간인 이상 부족한 점들을 늘 뼛속 깊이 참회하며 통찰과 나눔이 둘이 아닌 ‘통보불이(洞布不二)’의 삶을 더욱 치열하게 이어가야겠지요. 

제자들의 시호 하사에 대하여
먼저 <전등록>에 수록된 마조 선사의 수제자 세 분들의 열반(涅槃) 관련 기록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서당 선사께서 814년 4월 8일에 열반에 드니, 수명(壽命)은 80세이고 법랍(法臘)은 55세였다. 헌종(憲宗, 재위 805-820)이 대선교(大宣敎) 선사라는 시호(諡號)를 하사(下賜)하고, 탑호(塔號)를 원화증진(元和證眞)이라 하였다. 그 뒤 목종(穆宗, 재위 820-824) 때에 이르러 거듭 대각(大覺) 선사라는 시호를 하사하였다.

한편 백장 선사께서는 역시 같은 해인 814년 1월 17일 열반에 드니, 수명은 95세였다. 목종 822년 대지(大智) 선사라는 시호를 하사하고, 탑호를 대보승륜(大寶勝輪)이라 하였다. 

그리고 남전 선사께서는 문종(文宗, 재위 827-840) 시절인 834년 12월 25일 열반에 드니 수명은 87세이고 법랍 58세였다. 이듬해 봄 유골을 탑(塔)에 모셨다.”

군더더기: 사람은 사실 세상을 떠난 후 제대로 평가를 받는다고 사료됩니다. 먼저 마조 선사의 세 제자들 가운데 8살 때 출가한 서당은 비록 나이는 백장보다 어렸지만 다음과 같은 결정적인 두 가지 점에서 서당이 마조 선사의 상수제자(上首弟子)였다고 사료됩니다. 

첫 번째 이유로는 비록 같은 해인 814년에 백장이 열반하고 이어 서당이 3개월 후 열반했으나 서당이 헌종 때 가장 먼저 시호와 탑호를 하사받았다는 점입니다. 그후 백장은 목종 때 가서야 시호와 탑호를 하사받았습니다. 그런데 더욱 주목할 점은 서당은 목종 때 또다시 시호를 하사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당시 국가 차원에서 마조 선사의 수제자가 두 사람임을 인증했다고 여겨집니다. 한편으로는 이 무렵 백장 문하의 세력이 그만큼 커졌다는 것을 뜻하기도 하겠지요. 그리고 남전 선사의 경우는 시호나 탑호를 받았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세속적인 직함에 초연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두 번째 이유로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당대 최고의 선승이었던 남양 국사께 마조의 문하생 가운데 선발되어 서신을 전하고 당당하게 문답을 했던 것으로 미루어 마조 선사의 기대에 부응하며 가장 먼저 두각을 나타내며 성장했다고 여겨집니다. 또한 오늘날 미국에 유학을 갈 경우 명문대를 선호하듯이, 통일신라 시대 때 당나라 유학승으로 구산선문을 일으킨 스님들 가운데 중국의 남종선을 최초로 신라에 전한 도의(道義, ?-825) 선사와 혜철(慧徹, 785-861) 및 홍척(洪陟, ?-?) 선사가 서당 선사의 제자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그 명성이 신라까지 자자했다고 봅니다. 

한편 마조 선사 당시 상수제자였던 서당의 명성이 중국에서 후대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단명한 결정적인 이유는 그의 문하에서 걸출한 제자들이 끊임없이 이어지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반면에 백장은 황벽(黃檗, ?-850)과 임제(臨濟, ?-867)를 배출했으며, 남전은 현재 전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참구되고 있는 ‘조주무자(趙州無字)’ 공안의 주인공인 조주(趙州, 778-863)를 길러냈기 때문이겠지요. 

끝으로 사실 세밀히 살펴보면 당대에는 명성이 높다가 입적 후 내부적으로 세속적인 다툼 등을 통해 그 문중이 해체되는 경우가 오늘날에도 비일비재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 스승의 가풍을 빛나게 하는 지름길은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에 중독된 채 우열을 논하며 스승 띄우기에 열을 올릴 것이 아니라 제자 스스로 스승을 능가하는 향상(向上)의 여정(旅程)을 온몸을 던져 치열하게 이어가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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