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화]망우당 봉주 대선사 숨겨진 일화들
[일화]망우당 봉주 대선사 숨겨진 일화들
  • 서현욱 기자
  • 승인 2020.01.23 17: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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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당 봉주 대선사 숨겨진 일화들


 

#홍도여관 부지를 환수하다.

성철 스님 사리탑은 원래 홍도여관 자리에 세워졌다. 음식을 참 잘했고, 당시에는 해인사까지 들어오는 시간이 오래 걸렸기에 해인사에 오려면 꼭 하루를 자고 가야 했다. 해인사 아래에는 마을이 있기는 하지만 아래까지 내려가기보다는 해인사와 가까이에 있는 홍도여관에서 자는 사람이 많았다. 음식을 잘했고 더군다나 길목이었기에 손님이 많이 들어왔다. 해인사 주변으로 대부분이 해인사에 속한 땅이었지만 유일하게 홍도여관 터만은 개인 소유의 땅이었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 이승만 대통령의 조카가 불하를 받아서 여관을 지은 것이다.

사찰 정화가 한창일 때다. 봉주 스님은 사찰 주변에 고기를 굽는 여관이 있는 것이 못마땅했다. 그래서 홍도여관을 내보내기로 결정하고 몇날 며칠을 찾아가서 빌다시피 사정을 했다. 그런 노력으로 홍도여관 부지를 환수한 것이다.

해인사에는 부도가 사방에 널려 있다. 각 암자에는 물론이고 숲 속에도 부도가 이끼를 덮고 조용히 잠자고 있다. 봉주 스님은 환수한 홍도여관 부지를 흩어진 비(碑)들을 모아서 비림(碑林)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남겨놓았다. 하지만 성철 스님이 입적한 뒤에 성철 스님의 상좌 스님들은 그 자리를 다른 용도로 사용했다. 바로 성철 스님의 사리탑을 세운 것이다.

#국립공원 지정을 반대하다.

학성 스님은 1973년도 가을에 해인사로 들어왔다. 그 시절은 정치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1차 5개년 개발을 마치고 2차 5개년 개발에 들어갈 시기다. 1차 5개년 개발에는 기간산업을 구축했다면 2차 5개년 개발 때에는 문화개발로 눈을 조금씩 돌리던 때였다. 문화가 바로 돈이 된다는 것을 처음 눈 뜨던 시기다. 외국 사람을 많이 불러들여서 외화를 획득하겠다고 목표를 세웠다. 그래서 관광대국이 되려고 박차를 가했고 더불어 새마을 운동을 벌였다.

관광을 활성화하기 위해서 전국 산을 국립공원으로 만들어갔다. 국립공원으로 지정할 만한 산에는 모두 큰 사찰이 있었다. 속리산, 가야산, 토함산, 설악산, 지리산. 국립공원으로 정했지만 스님들에게는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국립공원 내에서는 무슨 건물을 지으려고 하면 산림법에 걸려서 산림청에 인․허가를 받아야만 하고 또한 문화재가 있으니 문화재 보호법에 걸리게 된 것이다. 산림과와 국립공원 관리공단이 사법기관이 아니면서 ‘고발권’을 행사하며 사법권을 행사하게 된 것이다. 사찰 땅이지만 스님들이 마음대로 못 하게 하는 독소조항이었다.

다른 사찰에서는 국립공원 법에 모두 동의했다. 개발독재 앞에서는 누구도 반대를 못하던 시기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해인사만은 끝까지 버틴다. 가야산 주변은 해인사 땅이 많고 국립공원으로 지정을 하기 위해서는 사찰의 허락을 반드시 받아야 한다. 그러나 해인사가 협상을 계속 거부하자 정부에서 압력을 넣는다. 봉주 스님이 주지를 할 때 압력이 계속 들어온 것이다. 봉주 스님은 관광객은 필요 없다며 다음 같은 말로 반대를 했다.

“해인사는 팔만대장경이 모셔진 법보 사찰이고, 참선하는 곳이고, 스님들이 공부하는 곳이지 관광객들을 위해 만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관광이라는 명목의 개발은 반대합니다.”

합리적인 이유를 댄 것이다. 요즈음에 들어서야 개발이 능사가 아니라 자연을 제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생각이 늘고 있지만 그 시절에는 개발하면 관광객을 많이 수용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뒀다. 해인사 초입에서 일주문까지 모노레일을 깔고, 셔틀버스를 운행하겠다는 계획만 보더라도 얼마나 관광 위주의 정책이었는지 알 수 있다. 스님네들은 혜안이 있었다. 사람과 자연이 공존할 수 있는 보존이 우선되어야지 관광을 위한 개발은 결국 자연을 피폐하게 할 것이란 걸 그 시기에 벌써 알고 있었다.

계획에 따라 도로를 포장했다. 일미 스님은 불가항력이었는지 개발에 동조를 했다. 그러나 봉주 스님은 끝까지 반대를 한다. 그래도 자꾸 개발의 손길을 뻗자 봉주 스님은 금난방(禁亂榜)을 내걸었다. 그리고 관광객을 들이지 않은 것이다. 해인사 한 군데에서 관광객을 들이지 않는 것이 대수겠는가 하겠지만 외국인 관광객이 많았던 그곳을 막아두자 나라 전체가 떠들썩했다. 관광객들은 해인사에 왔다가 그냥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각계에서 압력이 들어왔다. 주지 실에서는 도청장치가 발견됐다. 안기부에서 비리를 캐서 주지를 누르려는 속셈으로 은밀히 엿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스님들은 그런 상황을 미리 예견하고 회의를 하는 장소를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 또한 주지를 다섯 명이나 뽑았다. 총무, 교무를 다섯 팀을 만들어서 한 사람이 잡혀가면 다른 사람이 바로 대처를 할 수 있도록 치밀하게 진을 짠 것이다.

그렇게 해도 안 되자 결국은 5부 장관이 헬기를 타고 해인사로 왔다. 내무장관, 정무제일수석, 교통부장관, 경상남도지사 등이 해인초등학교 위에 있는 헬기장에 내렸다. 학성 스님은 봉주 스님 상좌였기에 시자를 했다. 그래서 그때 상황을 누구보다 생생히 기억한다. 현당에 5부 장관이 현당에 쭉 앉았고, 맞은편에는 해인사 대표들이 앉아 연석회의를 열었다. 정무수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해주십시오. 주지스님께서 허락만 해주시면 전기도 넣어드리고, 포장도 해드리고, 숙원하시는 사업도 이루어드리겠습니다.”

공무원들이 흔히 쓰는 뀀이었다. 봉주 스님은 가만히 듣고 있다가 대답은 않고 되물었다.

“그 돈은 무슨 돈으로 해줄라고 합니까?”

개발이 마음에 들지 않는데 공약으로 내거는 것이 개발을 해주겠다는 이야기다. 이야기가 오고간다.

“나랏돈으로 해주겠습니다.”

“그럼 정무수석 월급으로 하는 게 아니라 나랏돈으로 하는 건데, 나랏돈이라면 쓰는 데 우선순위가 있잖습니까? 그 우선순위를 맞춰서 쓰면 되는 거지 왜 여기 와서 인심을 쓰십니까?”

봉주 스님은 지혜롭게 대답했다. 봉주 스님의 지략이 원체 뛰어났다고 한다. 이어서 강하게 거절한다.

“저도 나라에 세금을 냅니다. 저도 우동을 사먹어도 세금을 내고, 자동차를 타도 세금을 냈고, 뭘 하나 사먹어도 세금을 냈습니다. 저도 납세자다. 그렇다면 납세의 의무에 따라서 정부가 돈을 걷었다면 순서대로 쓰는 게 맞는 거지, 당신 인심 쓰듯이 여기에다 돈을 쓰는 게 맞습니까? 납세자 앞에서 그런 말을 해도 되는 것입니까?”

강하게 거절을 한 것이다. 가만히 듣고 있던 정무수석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협상은 그렇게 무산되고 모두 돌아갔다. 그 뒤로 봉주 스님은 나쁜 중으로 리스트에 올라간다. 그 영향으로 심불악으로 기독교 교인을 내보냈던 일을 빌미로 전두환 대통령 시절 10.27법난에 걸려든다. 봉주 스님을 붙잡으러 해인사로 온 것이다. 그러다 봉주 스님은 마침 가야에 다녀오다가 법난 이야기를 듣고 지리산으로 몸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해인성지를 지키려고 버티고 버텼지만 결국은 공권력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대적광전을 기준으로 4킬로미터 이외로 국립공원을 빼낸다. 십리면 산내 암자까지 다 포함할 수 있는 거리다. 그 시절 봉주 스님을 주축으로 해인사를 개발에서부터 지켜낸 것이다. 공권력이 시퍼렇던 시절, 목숨을 걸지 않았으면 지켜낼 수 없었으리라.

#장경각을 지키다.

학성 스님은 봉주 스님을 해인사의 호국신장과 같은 분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만큼 봉주 스님은 뚝심 있게 주지 소임을 맡았다. 봉주 스님은 거친 풍파를 몇 번 거쳤다. 그 중에 해인사 장경각을 지켜낸 이야기는 아직도 잊은 사람이 없다. 먼저 봉주 스님의 인물 됨됨이를 들어보자.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 듣는 것보다 걸레 스님으로 유명한 중광 스님의 책 《허튼소리》에서 옮겨와 본다. 봉주 스님과 중광 스님과는 친하게 지낸 사형 지간이었다고 한다. 책제목이 허튼소리지만 미사여구로 꾸미지 않은 보고 느낀 그대로를 적어 놓았다.

“태산부동, 지구가 무너져도 눈만 껌벅껌벅할 모습. 체구는 헤비급 중 헤비급. 스타린 후궁, 누가 지었는지 별명도 명 별명. 그 육중한 심중에 명석한 두뇌는 손자병법이 다 녹아난다. 그리고 점잖다. 그리고 시주물을 아끼며 돈 같은 것은 절대 낭비없는 검소한 자에 속한다. 해인사 주지 당시 문공부에서 장경각 대피소를 만들어 현 장경각판을 옮기려는 것을 목숨 걸고 결사적으로 현 장경각을 잘 보호한 장본인.

그때 만일 장경각 뒤를 파헤쳐 장경각을 옮겼더라면 해인사는 성지가 완전히 파괴되어 오늘의 해인사를 찾지 못하고 해인사는 참모습이 없어졌을 것이다. 불교사에 길이 남을 불법 수호신 책임만 맡으면 성실하게 완수하는 실력 있고 성실한 자이다. … 행정, 여행, 참선을 겸비해서 동진 출가해서 우리 불교계의 가장 큰 기둥감이다. 저쪽에서 황소처럼 둠벅둠벅 힘 있게 걸어오는 모습 눈에 훤히 보인다. 오 육중한 몸, 밤에 절대 잠을 적게 자며 가만히 정진하는 모습 눈에 훤하다. 내가 제일 친하게 산 스님 미남인데 호남이지요. … 고집 한번 부리면 나무가 꺾이면 꺾이었지 버드나무처럼 휘어지지 않는다. 병이 있다면 너무 인정이 있어서 어떤 일이든 부탁하면 해주고 자기 자신을 아끼지 않고 일을 해주면 비난 받는 일도 많다. 그러나 자기 위치는 분명하게 처신하는 자, 정열과 신심과 맵시로 뭉쳐진 불굴의 사나이다. 어떤 일이든 손을 댔다 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성공하고 마는 성공자. 현재의 해인사, 송광사, 용주사 총림을 만들 때 주역 중 주역이었다.…”

해인사에 장경각을 새로 짓겠다고 할 때는 유신독재의 칼날이 시퍼런 시기였다. 10.27법난을 한국불교 역사상 최대의 치옥의 날로 정하듯이, 정치와 종교가 공존하기란 힘들다. 정치에 잘 빌붙어야만 살아남는 것이 현실 종교계이다. 봉주 스님은 그런 시절에 해인사를 지켜냈다. 정부는 국보인 팔만대장경을 관광자원으로 개발하면서 장경각을 새로 짓기로 결정한다. 지금 장경각이 있는 자리 바로 위에다가 시멘트 집을 짓겠다는 것이다. 지금 나무로 된 장경각은 언제 불이 날지 모르니 팔만대장경 보호를 위해서는 꼭 필요하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현대과학으로도 선조들의 건축기술을 따라가지 못 한다. 요즈음의 건축술로는 5층 이상의 목조 건물을 지을 수 없다는데 통일신라시대에 황룡사 구층 목탑을 올렸다. 과학적으로 해명을 못 하고 있는 부분인데 팔만대장경 장경각도 마찬가지였다.

정부에서는 석굴암을 보수했듯이 공조실을 만들고 에어컨을 설치하고, 습도 조절장치를 설치해서 장경각을 현대적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예산을 수십억 책정했다. 그럴 듯한 계획이었으나 봉주 스님은 장경각을 새로 짓는 일을 처음부터 반대했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장경각을 옮기게 되면 해인사라는 도량의 형국이 무너진다는 것이다. 해인사 도량은 용화세계로 가는 범선 모양으로 가람 설계가 됐다. 그중 장경각 자리는 뱃머리 부분이다. 그런데 그 자리에 시멘트로 만든 건축물을 지으면 뱃머리가 무거워 해인사가 침몰한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만으로는 개발의 폭압과 맞서기는 역부족이었다. 봉주 스님은 그 문제로 깊은 병을 앓는다. 중광 스님의 일대기를 그린 책 《걸레스님 중광》(밀알출판사, 휴정 지음)에서 당시 상황을 되짚어본다.

“1974년, 그러니까 봉주 스님 계실 때지. 나는 극락전 특별선원에 방 하나를 얻어서 쉬고 있었지. 그런데 봉주 스님이 식음을 전폐하고 피골이 상접할 지경에 이르렀어. 앙상한 뼈대가 살갗을 뚫고 나올 거 같았어. 누구보다 거대한 육체를 가지고 짐승처럼 씩씩거리던 건장한 모습이 서서히 붕괴되고 있었지. 약을 써도 소용없었고 병원에 가서 진찰을 해 보았지만 병명조차 확인되지 않았어. 마치 입적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처럼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었지. 그러나 해인사 역대 주지 중에서 봉주 스님만큼 주체성이 강한 주지도 없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고집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위험을 뛰어 넘고 있었다. 당시 문공부에 국보를 장기적으로 보호하고 재난에 있어 사전에 예방한다는 명목으로 장경각을 새로이 현 장경각 옆에 지으라는 행정지시를 내려 주지 스님에게 음으로 양으로 압력을 가했어. 이때 봉주 스님은 자신이 주지로 있는 동안은 새로이 장경각을 지을 수 없다고 완강히 거절했지. 고독한 투쟁과 고행이 시작되었어. 그러나 그는 조금도 좌절하지 않았어.

다만 훗날 역사적 죄인이 되고 싶지 않아 백척간두의 절망을 안으면서 극락전을 헐고 장경각을 그곳에 새로 지을 것을 제안했지. 그러나 그 제안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상당한 시간을 낭비했지. 그 후 극적인 타결을 보았지만 그는 병을 얻은 거야.……”

조계종 종정 청담 스님의 결재도 났고 총무원장 경산 스님의 결재도 떨어졌다. 해인사 방장이었던 성철 스님도 어쩔 수 없이 사인을 했다. 그러나 봉주 스님만이 끝까지 고집불통의 성미를 꺾지 않은 것이다. 방장 스님의 사인이 있다고 하지만 실질적인 토지 사용을 하려면 행정 관리자인 주지의 사인이 꼭 필요했다.

“원장 아니라, 종정 아니라, 방장 성철 스님 허락이 왔다고 하더라도, 여기에 와서 공사를 한다면 내가 휘발유를 확 부어버릴 테야. 내가 각 기자들을 찾아다닐 시간은 없고, 취재를 오면 누가 잘했는지 보자고.”

어느 스님이 이와 같이 강단 있게 버텼을까. 봉주 스님은 그렇게 버티고 버티다 병을 얻었고, 오랜 시간을 끌다가 결국은 봉주 스님이 냈던 중재 안대로 극락전을 아래로 내리고 그 자리에 장경각을 짓기로 합의가 이뤄졌다. 그러나 결과는 봉주 스님의 예견대로였다. 아무리 습기 방지를 잘했다손 치더라도 시멘트로 된 집에 나무를 집어넣으니 습기가 생겼다. 장경각을 옮기려는 계획은 그렇게 실패했다. 새로 지은 장경각을 지금은 스님들 선방으로 사용하고 있다. 원래 있던 장경각과 모양이 비슷하여서 선방으로 쓰기에는 구조가 잘 맞지 않지만 푸른 눈의 납자들에게 그곳만큼 큰 교훈을 주는 곳이 따로 있을까.

봉주 스님은 주지를 3년 6개월 동안 하다가 임기를 6개월 남겨 두고 물러나야 했다. 첨예한 시기였기에 온갖 욕을 몸으로 다 받으며 지냈기에 성철 스님도 ‘이제 그만큼 했으면 됐다’며 종용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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