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랏말싸미’를 대하는 자세
영화 ‘나랏말싸미’를 대하는 자세
  • 김형남 변호사
  • 승인 2019.08.01 15:46
  • 댓글 2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언로의 왜곡에 시민으로서 일침 놓아야”

모든 법과 제도는 당시 기득권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집니다. 기득권의 우월적 지위를 위하든, 기득권에 대한 기층의 불만을 희석화시키기 위해서든, 권력투쟁에서의 승리를 위하든 지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집니다,

그러나 아주 가끔은 위민의식과 민본사상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을 접합니다. 이는 역사발전의 계가가 되는 위대한 자각의 산물입니다.

일반 민중이 똑똑해야 한다는 한글창제의 역사발전 논리는 당대의 성리학으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습니다. 당시 도덕적 실천과 책임의식의 주체는 지배계급이었고, 일반 민중은 명분론적 질서에 따를 것을 요구받는 대상이었습니다.

일반 민중을 적극적인 정치적 주체로 이해하고 일반화시키려 했던 학자는 그로부터 수백년이나 흐른 정약용 시대에나 탄생합니다.

왕조시대의 군주가 하나부터 열까지를 알아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문화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문화적 영향력은 한 사람이 아니라 그 시대를 변화시킬 수 있는 철학을 담고 있는 일정한 사조일 수밖에 없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이태리 영주들이 그러했듯이. 그러나 한글창제에 영향을 준 사조에 대한 미싱링크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 미싱링크에 대한 다각도의 설명과 이해는 한글창제의 역사적 의미를 인식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을 위하여 긴요한 일입니다.

▲ 영화 나랏말싸미 포스터

한글창제는 일반 민중에게 있어서 지식의 독점으로 인한 정신적 지배로부터의 해방, 언로의 왜곡으로 인한 막연한 공포감에서 벗어난 평화를 가져다줄 수단을 얻게 하였습니다.

따라서 한글창제와 그 기초를 같이하는, 정신적 해방을 목적으로 한 불교적 가치관으로 미싱링크를 설명하려는 시도가 나타난다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민중을 자각시키고자 한 한글창제의 의미는 후세에 꾸준히 철학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일제 침략이후 일제는 토지조사사업 등을 통해 한반도를 無主空山(무주공산)으로 만들고 일본인과 친일세력의 사적 지배의 대상으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임야를 公山(공산)으로 이해하여 공동으로 사용하였고, 최소한 소작권을 보장받았던 민중들의 식민체제에 대한 불만은 임시정부의 수립과 항일운동이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앎과 삶을 교묘하게 지배하려는 자들에게 당하지만 않았던 그 연원은 한글창제로 시작된 민중의 자각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글창제의 철학적 배경을 무엇일까요?

한글창제의 역사적 의미에 비추어 그 철학적 배경에 궁금증을 여전히 가질 수밖에 없음에도, 역사왜곡 논란은 어이가 없습니다. 지배계급인 성리학자들이 기록한 왕조실록을 언제부터 그렇게 신봉했다고, 역사 왜곡이라니.

역사에 대한 앎을 위한 노력은 정형화된 결론으로 끝을 맺을 수 없습니다. 픽션인 영화를 통한 상상력과 가설을 얹고 철학과 종교 그리고 역사를 이해하려는 시도가 이런 봉변을 당하다니.

불자라는 이유만으로 집단적으로 대응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나 지성의 발전과정에 대한 아픈 상채기를 나은 언로의 왜곡에 대하여는 시민으로서 힘차게 일침을 놓아 주시길요. 그래야 일본제품 불매운동도 쇼비니즘으로 빠지지 아니하고, 왜곡된 역사를 바로 펼 수 있는 운동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습니다.

/ 김형남 변호사 법무법인 신아

* 이 글은 SNS에서 있던 대화를 글쓴이의 동의를 얻어 게재한 것입니다. <편집자 주>

[불교중심 불교닷컴. 이 기사에 대한 반론 및 기사제보 dasan2580@gmail.com]

"이 기사를 응원합니다." 불교닷컴 자발적 유료화 신청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2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훈민정음 창제의 주역 신미대사 2019-08-20 03:13:45
1449년 12월 세종대왕께서 신미대사께서 주석하고 계셨던 속리산 복천사를 중수 불사를 하시기 위하여 세종께서 직접 중수권선문을 남기십니다, 그리고 세종께서 1450년 세종 32년 1월 26일 신미(信眉)를 불러 침실 안으로 맞아들여 높은 예절로써 대우하시고 법사(法事)를 베풀고 신미에게 시호를 제수를 하시게 됩니다, 시호 내용은 선교종 도총섭(禪敎宗都摠攝) 밀전정법(密傳正法) 비지쌍운(悲智雙運) 우국이세(祐國利世) 원융무애(圓融無

훈민정음 창제의 주역 신미대사 2019-08-20 03:02:42
훈민정음 창제역사에 가장 미스테리는 조선 조정은 문자 보급을 어떤 방식으로 하였는가? 하는 점입니다, 조사에 의하면 세종시대부터 세조시대까지 악 25종의 불경이 우리말로 언해되여 배포가 되여진 것으로 보여 지고 있습니다, 불경을 언문으로 번역한 이들이 바로 신미대사와 제자이신 학조스님이 주역입니다, 그리고 언문으로 번역하여 인쇄를 간인 한곳은 서울 원각사입니다, 세조는 1461년 세조 7년 6월 16일 원각사에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불경을 본격적으로 언해를 하는데 간경도감을 설치하고 처음으로 언해한 불경이 능엄경으로 세조,신미가 서문

훈민정음 창제의 주역 신미대사 2019-08-20 02:51:20
훈민정음의 핵심이라고 할 수있는 훈민정음 해례본과 월인석보를 인쇄 할 수있는 판각전이 1946까지 안동 광흥사에 존재하고 있어는데 화재로 소실이 되어으며 훈민정음 언해본, 월인석보를 인쇄 할 수있는 판각전이 영주 희방사에 존재하다가 1951년 동란

훈민정음 창제의 주역 신미대사 2019-08-20 02:39:42
훈민정음은 자음과 모음으로 문자를 이루는 원리는 실담문자(산스크리트)에서 착안을 하셨습니다, 신미대사께서 정음을 창제시에 참고한 범본 도표인 홍무운자모지도(洪武韻字母之圖), 언본십육자모(諺本十六字母), 범본오십자모실담장(梵本五十字母悉曇章) 진언집목록(眞言集目錄) 결수문 49칙(結手文 49則) 지반문 35칙(志磐文 35則) 자기문 46칙(仔夔文 46則) 점안문 31則(點眼文 31則) 정본능엄주(正本楞嚴呪)등이 인쇄를 할 수있는 판각으로 만들어져 도봉산 망월사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훈민정음 창제의 주역 신미대사 2019-08-20 02:31:48
내가 법주사 대중으로 살때 탬플스테이에 참가한 일반인을 상대로 신미대사 일대기를 강의좀 하자고 여려번 부탁을 하여도 법주사 중놈들에게 퇴자를 맞고 도리어 쫏겨났다,
조선왕조실록 기록에 신미대사 관련 기록이 1446년 세종28년 5월 28일부터 1497년 연산 3년 7월17일까지 걸쳐서 7대 국왕에 걸쳐 51년간 67회 기록이 기재되여 있습니다, 또한 신미의 제자인신 학조, 학열, 수미선사와 관련된 기록 100여회 합하면 조선 5백년 불교승려 기록으로서는 파격적이라고 할 수있을 것입니다, 특히 신미대사와 관련된 첫번째 기록은 파격적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