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관이나 총무원부터도 제대로 나서지 못하고 지들 몰릴대는 조선일보 구독거부 하더니만 불사중 가장 큰 불사가 인재불사인데 지관이 학장시절 20억에 달하는 돈을 받고 학생부정입학시켜 동대 망쳐 놓고 관음사 뺐기에는 폭력승.폭력배.공권력까지 사용하여 불교와 관음사를 망쳐놓고 불교계에 헌신한 변실장까지 매장시켜 노았으니 변실장 같은 분만 있었어도 이런 꼴은 당하지 않았다.
숭례문을 세운 대목 각희의 꿈
특별기고 김상현 동국대 교수
모르는 사람이 없다. 남대문은 그 정식 명칭이 숭례문이고 6백년의 역사를 간직한 국보 1호라는 것을. 양녕대군이 제액의 글씨를 썼다는 설이 있음을 아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정작 이 건물을 세운 건축가의 이름을 아는 경우는 드문 것 같으니, 역시 등잔 밑은 어두운 것 같다.
태조 5년(1396)에 시작된 숭례문 건설은 1398년 2월에 완공되었다. 1448년과 1479년 두 차례의 중수를 거치기는 했지만, 해체․수리를 했던 1962년까지 이 건물은 세월의 풍상을 굳건히 이겨냈다. 해체 시에 발견된 1396년 10월 6일자의 상량문은 당시의 대목이 법륜사의 각희(覺希)였음을 명기하고 있다. 대목이 설계로부터 시공에 이르기까지 건설 현장의 총체적인 지휘와 감독을 맡았던 점에 유의하면, 각희는 뛰어난 건축 기술을 가진 승장(僧匠)이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설계도 한 장 가지지 않은 채 한 치의 착오 없이 거대한 건물을 세워 낸 뛰어난 장인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에 관한 자세한 자료는 없고, 다만 그는 고려 말의 고승 나옹의 문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