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세속화/탈종교 시대에서 한국 불교 개혁의 방향과 방안
포스트세속화/탈종교 시대에서 한국 불교 개혁의 방향과 방안
  • 이도흠 정의평화불교연대 상임대표
  • 승인 2018.10.17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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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이도흠 정의평화불교연대 상임대표, 불교개혁행동 워크숍 발제
▲ 이도흠 정의평화불교연대 상임대표(한양대 교수).
▲ 이도흠 정의평화불교연대 상임대표(한양대 교수).

포스트세속화/탈종교 시대에서 한국 불교 개혁의 방향과 방안

이도흠(정의평화불교연대 상임대표)

I. 머리말

진성은 참으로 깊고 지극히 미묘해 자성을 지키지 않고 연(緣)을 따라 이루더라.… 구세, 십세가 서로서로 부합하지만 뒤섞이는 일 없이 따로따로 이루었어라.

 

한 순간에 과거의 과거, 과거의 현재, 과거의 미래부터 현재의 현재는 물론 미래의 미래에 이르기까지 구세(九世)가 시간과 기억과 해석, 상상의 주름 속에 하나로 겹쳐있다. 공간은 텅빈 곳이 아니라 중력장과 다른 공간과 연기적 관계 속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결을 쌓고 채우려는 것들로 주름이 잡히다가 인간의 기억과 해석, 상상과 실천에 따라 주름이 풀어지며 비틀어지는 장이다. 21세기 오늘 한국 불교 또한 마찬가지다. 멀리로 조선조 불교와 일제 강점기의 잔재로부터 해방 직후, 94년 개혁 등의 모순들이 어우러져 현재 조계종단을 만들고 미래에 대한 상상에 따라 해석과 실천이 요동치며 조계사와 각 절들의 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포스트세속화/탈종교 시대를 맞아 종교는 전 시대와 분명히 구분되는 변화를 요청받고 있다. 지금 한국 불교는 중세, 근대, 탈근대적 모순이 중층적으로 결합되어 있어 일방의 해결이 어렵다. 예를 들어, 예전에 정의평화불교연대에서 합격발원기도를 반대하는 운동을 폈지만 단 한 곳의 절도 이에 호응하지 않았고 몇몇 신자들만 대체 방안으로 제시한 무료논술교실에 자녀들을 보냈다. 왜 그랬을까. 비합리적인 주술의 힘으로 소망을 실현하려는 것은 중세 봉건사회의 전재다. 『중아함』 17권의 『가미니경(伽彌尼經)』에서도 이런 행위를 바위를 물에 던지고 떠오르라고 기도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잘 아는 스님들도 응하지 않은 이유는 근대적 모순, 곧 자본주의/신자유주의 체제에 포섭되어 화폐 증식의 욕망, 무한한 소비와 향락 추구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자본주의적 탐욕을 내면화하였기 때문이다. 재가불자는 만인 사이의 투쟁에 의한 경쟁 확대로 인한 불안을 기도에 의존하여 치유하려 하고, 승려들은 이것이 교리적으로도 타당하지 않음을 잘 알면서도 사찰재정 증대를 위해 포기하지 못한다. 탈근대에 들어 종교가 3차 서비스 산업화하고 근대 자본이 미치지 못하던 마음의 영역까지 상품화하여 개인의 소외와 불안, 피로에 대해 비합리적인 방법으로 평온, 위로와 치유, 스트레스 해소, 행복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강해지고 스님들의 팬덤(fandom)현상이 유행하는 등 재주술화가 과도하게 진행되고 있다. 대다수 분야에서 한국 불교는 중세 봉건체제의 잔재인 기복성, 가부장적 질서, 농경사회에 부합하는 교육과 수행 시스템을 유지한 채 자본주의적 탐욕과 소비, 향락으로 병들고 있는데 근대적 합리성을 달성하고 시민사회로서 공론장을 확보하지 못한 채 재주술화의 파도에 휘청이고 있다.

현재 위의 세 가지 모순이 심화한 바탕에서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단은 적폐가 쌓이고 정당성과 신뢰의 위기에 놓이고, 이를 극복하자는 적폐청산과 종단개혁 운동이 MBC 피디수첩의 보도와 설조 스님의 목숨을 건 단식을 계기로 가열차게 진행되고 있다. 첫째, 은처, 도박, 공금횡령, 폭행, 성폭력 등 지도층 승려들의 범계 및 비리 행위가 임계점을 넘어섰음에도 이를 감시하고 견제하는 장치가 전혀 작동하지 않고 있다. 둘째, 스님들이 자기 돈으로 가사와 발우를 마련해야 하고 다른 절에 가면 숙식을 제공받지 못할 정도로 승가 공동체가 완전히 해체되고 각자도생하고 있다. 셋째, 전 총무원장 등 몇몇 권승들로 이루어진 카르텔이 권력과 재정을 독점한 채 당동벌이(黨同伐異)가 만연하고 있고, 사부대중은 이름뿐인 채 비구들이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질서에 의존한 독단과 배제와 폭력을 다반사로 행하고 있다. 여기에 탈종교화와 탈세속화의 흐름 속에서 종교의 사사화(私事化)화 경향이 보태지면서 300만 명의 불자가 절을 떠났으며 여러 요인들로 스님들의 재생산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상당수 신자들이 위빠사나와 초기 불교에 더 이끌리며 한국 불교의 정체성에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다. 이대로 가면 스님들은 문화재 관리인으로, 불교는 샤머니즘 수준으로 전락할 것이다. 이에 위기의 원인을 진단하면서 한국 불교 개혁의 방향과 방안에 대하여 종단의 질서 안과 밖으로 나누어 살펴본다.

Ⅱ. 종단 개혁의 방향과 방안

1. 수행과 재정의 분리 및 사찰운영위원회의 거버넌스 시스템 확보

종단의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풀뿌리 민주주의를 확고히 착근시키려면, 수행과 재정을 분리하여 권승들의 권력과 자본 독점과 전횡을 근본적으로 막고, 궁극적으로는 청정 승가 공동체를 회복하려면 사찰운영위원회의 거버넌스 시스템을 확고히 해야 한다.

지난 10년 사이에 승가에서 굳건하게 행해지던 삼의일발(三衣一鉢)과 객실문화가 사라졌다. 수많은 전각이 즐비함에도 행각을 할 때 바랑을 풀 절이 없고 모두가 개인 토굴 갖기를 희망하고 가사와 다비 비용마저 개인이 준비해야 한다.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자본주의 체제와 신자유주의 체제의 탐욕을 내면화하고 이것이 권력과 결합한 때문이다.

주지하듯, 불교는 욕망의 확장과 물질적 소비를 통해서는 행복해질 수 없다고 설한다. 불교는 개인의 깨달음과 공동체적 삶을 통하여 소외를 극복하라고, 무소유의 삶을 통해 화폐증식의 욕망을 없애라고, 무한한 소비와 향락의 욕망을 절제하는 삶을 살라 가르친다. 부처님께서는 출가수행자들이 ‘삼의일발(三衣一鉢)’이나 ‘육물(六物)’만 소유하는 무소유의 삶을 살라 일렀으며, 이 계율을 어기면 모든 소유물을 4인 이상의 도반들 앞에 내놓고 참회해야 했다. 달마대사는 ‘구함이 있으면 모든 것이 고통이지만 구함이 없으면 이 자리가 곧 극락’이라고 말하며 무소구행(無所求行)의 실천을 제시했다. 나아가 육조 혜능 역시 욕망을 줄이고 소박한 삶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소욕지족(少欲知足)을 설파했다.

그렇게 하더라도 딜레마는 남는다. 홀로 암자에서 수행하는 자는 자본주의의 욕망을 지멸하면 되지만, 그 밖의 영역에서는 이는 불가능하다. 설혹 자본주의 체제를 반대하는 운동을 하더라도 자본이 필요하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 『앙굿따라 니까야 Aṇguttara Nikāya』에 “비구들이여, 눈먼 사람이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 여기에 어떤 사람은 재산을 얻거나 늘리는 눈을 갖고 있지 않다. …… 비구들이여, 두 눈 가진 이는 어떤 종류의 사람들인가? 그는 재산을 얻거나 늘리는 눈을 갖고 있다. 그는 또한 선한 방법과 악한 방법, 비난받고 칭찬받는 방법, 천하고 고상한 방법, 떳떳하고 어두운 방법을 잘 분별하는 눈도 갖고 있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사람을 두 눈 가진 이라고 부른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 니까야에서는 재산의 획득과 증식을 하지 못하는 이를 눈 먼 사람으로, 재산의 획득과 증식은 행할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윤리적 정당성을 상실한 이를 한 눈만 있는 이로, 재산의 획득과 증식을 할 줄 알면서 이를 윤리적으로 정당하게 행하는 이를 두 눈이 있는 자로 분류하고 있다. 일정한 윤리규범에 따라 재산을 획득하고 증식하는 자야말로 세 부류의 인간 가운데 가장 바람직한 자다. 『증지부(增支部)』엔 다섯 가지로 재의 효용을 펼치고 있다. 부모, 아내, 자식, 하인, 일꾼을 즐겁고 행복하게 하기 위해, 우인(友人)과 동료를 즐겁고 행복하게 하기 위해, 가뭄과 홍수, 도적 등 재난에 대비하고 상속하기 위하여, 친족, 손님, 아귀, 왕, 신에 대한 다섯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인내와 겸손으로 자아를 성취한 성자들을 공양하기 위해 재화는 필요한 것이다.

이처럼 경전을 잘 살펴보면, 일정한 윤리규범에 부합하는 한, 재산의 획득과 증식은 정당한 것이며, 나와 주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고 성자에게 공양할 수 있는 길이다. 한 마디로 재정에 대한 부처님의 입장은 중도인 것이다.

중도의 입장에서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고 사찰을 운영하는 길은 명확하다. 출가 수행자는 계율에 따라 수행과 중생구제에만 전념하고, 재정의 운영은 재가불자에게 맡기며, 재산의 획득과 증식, 재정의 지출은 불교 교리와 계율, 윤리적인 목적에 부합하는 일에 한해서만 허용하는 것이다.

이의 구체적인 방법은 절마다 사찰운영위원회를 두고 여기에 사부대중이 공동으로 참여하고 거버넌스 시스템을 확립하는 것이다. 사찰 운영위원회에 모든 재정관련 사항에 대한 심의만이 아니라 의결을 행하고 절 안의 다양한 행사를 기획할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다. 중앙종회에서 재정과 권력을 분리하고 사찰운영위원회가 심의 및 의결기능을 갖도록 개정하고, 전문 인력을 통한 재정운영과 회계관리시스템을 통해 운영ㆍ관리되도록 사찰예산회계법을 제정한 것은 긍정적이다. 하지만, 여론에 밀려 형식만 갖춘 느낌이 강하다. 민주성과 지속성, 감시체계의 확립이 수반되어야 사찰운영위원회는 실질적으로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주지와 다른 운영위원, 스님과 재가불자 사이에 권력이 비대칭일 경우 사찰운영위원회는 큰스님이나 주지의 의사를 추인하는 형식 기구로 전락한다. 물론, 근본적으로는 주지와 스님에게 모든 권위와 권력이 집중된 지금의 문화가 바뀌어 사부대중의 공의를 민주적으로 모으고 실천하는 공동체 문화가 확립되어야 한다. 이렇게 되기까지 사찰운영위원회의 구성을 출가자와 재가자가 1:1이 되도록 구성하여야 한다. 주지에게 운영위원의 위촉과 해촉을 할 권한을 부여하고서 운영위원의 감시와 견제를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사부대중 모두가 참여하는 선거를 통하여 운영위원을 선출하되, 이 선거에는 각 사찰에 소속된 모든 신도가 참여해야 한다. 해촉의 권한 또한 운영위원의 합의를 통해서 행해야 한다. 당분간 사찰운영위원회에 주지의 추천권을 부여하는 것도 한 방편이다. 아울러 사찰운영위원회의 회의도 월별 및 회기별로 정기적으로 행할 것을 명시해야 한다. 이렇게 형식과 내용 모든 면에서 민주주의의 원칙을 준수하고 사부대중의 공의를 수렴하지 않는다면, 사찰운영위원회는 주지의 독점과 전횡을 견제하고 감시하는 기구가 아니라 외려 이를 정당화하는 기구로 전락한다.

재정과 회계에서는 전문화와 투명화, 상호견제의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 종단에서 포교, 교육, 사회적 실천에 대한 예산 배정의 최소 비율을 정하되, 각 사찰의 특성을 살려 그 안에서 융통성을 부여한다. 종단은 회계 관리를 할 전문 인력을 양성하고 이를 일정 규모 이상의 사찰에 파견한다. 종단에서 회계 관리 운영시스템에 관한 소프트웨어를 개발하여 각 사찰에 보급하고 이를 통합하여 중앙에서 관리한다. 각 사찰운영위원회는 회기별, 월별로 재정의 수입과 지출 현황을 사찰과 교구 홈페이지에 공개한다. 장부를 작성하여 종무실에 배치하고 감사 담당자 및 운영위원은 언제든 열람하게 한다. 모든 결제는 신용카드를 사용한다. 주지와 재정책임자를 분리하며, 재정책임자의 결제 없이 어떠한 지출도 허용하지 않는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란 말대로 돈을 다루면서 물욕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수행과 별도의 문제다. 지극히 높은 단계의 수행에 이르거나 무소유의 정신이 몸이 된 극히 일부의 사람을 제하면, 자본주의 체제에서 견물생심의 원리는 보편적이다. 흔들림이 없으리라고 본인과 타인 모두 인정하던 사람도 돈 앞에서 타락하는 예를 흔히 볼 수 있다. 그러기에 필요한 것이 공정한 감시체계의 확립과 시선의 공유다.

정부에 감사원이 있고, 각 공ㆍ사기업마다 감사실이 있는 것처럼, 일정 금액 이상의 예산을 집행하는 사찰의 경우 감시 및 감찰기구를 종단에서 사찰에 이르기까지 독립적으로 운영하여야 하며, 회계감사도 받아야 한다. 아울러 절에 소속된 신도는 소속 사찰에 대해, 재정 사고 및 관련 소송 당사자는 관련 사찰에 대해 재정 관련 자료를 요구하고 회람할 수 있도록 종법을 개정한다. 이들 사찰은 종회에 회계를 공개하고 관련 자료를 제출하며, 이를 거부할 경우, 혹은 재정에 관련된 문제가 발생하였을 경우 자동적으로 전문회계사를 통한 감사를 실시하는 것을 종법으로 규정한다. 이 기구는 재정의 비리를 경계하는 소극적인 감시만이 아니라 낭비성의 불사를 견제하여 사찰 재정을 튼실하게 하는 적극적인 감시 기능을 수행한다. 스님들은 재가불자로부터 감시를 받는 것을 꺼릴 필요가 없다. 그를 공심에 따른 시선으로, 더 나아가 내 안의 타락을 경계하는 부처님의 눈으로 보는 의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스님들의 사유재산도 공공화하여야 한다. 2007년 9월, 제174회 조계종 중앙종회는 승려법 제30조 2항에 ‘사유재산의 종단귀속’을 성문화했으며, 귀속된 사유재산을 스님들의 노후복지와 교육기금으로 사용하자는 합의도 하였다. 하지만, 막대한 재산과 권력을 가진 ‘큰스님’이 실행에 옮기지 않는 바람에 유명무실한 종법이 되었다. 이 기회에 총무원장을 비롯한 종단의 소임자, 큰스님과 본사 주지, 종회 의원들은 모든 사유재산을 공개하고, 최소한의 품위유지 비용을 제하고는 이를 종단에 헌납하여야 한다. 이렇게 해서 생긴 재산은 기금으로 조성하여 스님들의 노후 복지, 승려의 교육비 및 종립대학의 장학금, 사회적 약자들의 지원 비용만으로 사용한다. 몇몇 소문난 기도처의 경우 한 곳에서만 매년 수십억 원이 들어온다는데, 평생을 수행과 포교로 보낸 노스님들의 병원비조차 보태주지 못한다면 그 종단은 해체하는 것이 더 낫다.

재정의 분배에 따라 절을 특성화, 다양화하는 것도 필요하다. 절의 수입은 기도비, 불전함, 인등비, 재, 특별 불공, (문화재가 있는 사찰의 경우) 문화재 유지 및 보수 지원금, 입장료 등이다. 재정 수입을 거의 포기하고 수행에만 전념하는 ‘가난한 절’ 운동을 할 스님은 없을까. 대만 불교처럼, 수입의 절반 이상을 사회적 실천이나 전법에만 할당하는 ‘자비 실천의 절’, ‘전법의 절’이 곳곳에 세워진다면 불일은 다시 환하게 빛나리라.

이제 절은 신자유주의체제 및 자본주의로부터 벗어나 확대재생산의 원리가 작동하지 않고 교환가치가 사용가치를 대체하지 않는 도량, 화폐 증식의 욕망으로부터 해탈된 성역, 시장의 원리와 물화와 소외로부터 지치고 병든 중생들을 치유하는 부처님의 품, 사회적 약자들을 보듬고 구제하는 대승의 도량으로 거듭나야 한다.

2. 전 원장의 멸빈 통한 권승 카르텔의 해체

지금 한국 불교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은처, 도박, 공금횡령, 폭행, 성폭력 등 총무원장을 비롯한 지도층 승려들의 범계 및 비리 행위가 임계점을 넘어섰음에도 이를 감시하고 견제하는 장치가 전혀 작동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전 총무원장을 핵심고리로 하는 권승카르텔이 과도하게 권력과 재정을 독점한 채 이를 감시하고 견제하는 사찰 안과 밖의 장치를 무력화하거나 포섭하였기 때문이다.

전 총무원장은 적광 스님 폭행, 용주사와 마곡사 사태, 해종언론, 명진스님 제적, 정교유착 등 조계종 적폐를 쌓은 장본인으로서, 설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이를 단행한 종단의 수장으로서 무한 책임이 있다. 전 총무원장은 은처, 억대 도박, 신밧드 룸쌀롱 출입 및 상습 성매매 의혹에 대해 아직 해명하지 않고 있다.

총무원장은 포섭과 배제의 전략을 극단적으로 추구한 정치인이다. 그는 불교광장으로 통합하여 종회를 장악하고 호법부, 호계원을 무력화하고 원로와 정부와 언론을 포섭하였다. 이용할 가치가 있는 스님과 재가불자, 언론인, 정치인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편으로 포섭하였으며, 자기 편은 무조건 두둔하고 자신에게 해가 되는 자는 단호하게 내쳤다. 그는 그와 가까운 동국대 총장, 용주사 주지, 마곡사 주지는 죄가 드러났는 데도 비호하여 조계종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인 종헌과 종법을 무력화하였으며, 종회와 호계원은 물론 교구본사를 자신의 의지 관철기관으로 전락시켰다. 그야말로 조계 종단을 마구니 소굴로 전락시킨 장본인이다. 촛불혁명의 동력이 작동하고 정권이 교체되고 불자들의 분노가 점차 상승하자 총무원장은 하수인인 설정 스님을 총무원장에 앉히고 상왕노릇을 하고 있다. 모든 적폐의 주도자 및 책임자로서 전 원장을 승려대회를 통하여 멸빈시키거나 사찰방재 시스템에 대한 수사를 올바로 하여 구속시켜서 권승 카르텔의 핵심 고리를 끊고 판을 새롭게 짜야만 청정 승가를 구현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3. 직선제와 불교 민주제의 정립

청정 승/재가 공동체의 필요조건은 민주화다. 종단과 절 등 모든 불자들이 모이는 곳에는 광장을 만들어 대중공의에 의한 민주제를 확립해야 한다. 불교는 일체 중생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불성의 잠재성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중생은 모두가 존엄하고 평등하다. 붓다는 “나의 제자는 종성(種姓)이 같지 않고 출신도 각각 다르지만 나의 가르침에 의지해서 출가하여 도를 닦고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대에게 종성(種姓)을 묻는다면, 그 사람에게 ‘나는 사문 석가모니 종성의 아들이다’라고 말해야 한다.”라고 말할 정도로 만민의 평등을 추구한다. 사람의 출신과 신분이 어떻든 중생은 모두 석가모니의 아들로 평등하다. 고귀한 사람은 신분이 아니라 마음과 행위에 의해 결정된다. 삼독을 멸하고 약자들에게 자비심을 갖고 베푸는 이들은 고귀한 자이고 권력과 돈과 탐욕에 물들어 전전하는 이들은 비천한 것이다.

붓다는 이를 몸소 실천하였다. “『중아함경』에 보면, 어느 날 아난다가 눈이 먼 아나율타 존자를 위하여 이 방, 저 방을 돌아다니며 그의 옷을 함께 지을 사람들을 구하였다. 이를 본 붓다는 “아난다야, 너는 왜 나에게만 아나율타 존자의 옷을 짓기를 청하지 않느냐?”라고 꾸짖으시고는 다른 비구들과 함께 아나율타의 옷을 손수 지으셨다. 『법구경』을 보면, 붓다는 소를 잃고서 밥때를 놓친 농부가 설법자리에 오자 집주인에게 밥을 청하여 농부가 밥을 다 먹은 연후에야 설법을 하셨다.

『디가 니까야』에 의하면, 강대국 마가다 왕이 밧지족을 침략하려 할 때 붓다는 제자 아난다에게 밧지족 사람들이 “① 밧지족 사람들은 자주 회의를 열고 회의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가. ② 밧지족 사람들은 함께 집합하고 함께 일을 시작하며 밧지족으로서 해야 할 것을 함께 행하는가. ③ 밧지족 사람들은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을 정하지 않고 이미 정해진 것을 깨뜨리지 않으며 옛날에 정해진 오래된 밧지족의 법에 따라 행동하는가. ④ 밧지족 사람들은 밧지족 중의 밧지 노인들을 존경하고 환대하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⑤ 밧지족 사람들은 종족의 부인이나 여자아이를 폭력으로 꾀어내거나 그것을 만류하지 않은 일은 없는가. ⑥ 밧지족 사람들은 내외(內外)의 밧지족 조상의 사당을 존중하고 공경하며 공양하고 그리고 이전에 바치고, 이전에 시행한 올바른 공양물을 버리지는 않는가. ⑦ 밧지족 사람들은 아라한에 대하여 올바로 보호하고 수호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또 아직 오지 않은 아라한이 이 땅에 오도록 하고 이미 오고 있는 아라한이 이 땅에서 편안히 머물 수 있도록 하는가.”를 물으셨다. 아난다가 밧지족 사이에 이러한 일곱 가지 사항이 그대로 행해지고 있다고 대답하자, 붓다는 밧지족 사람들이 이 일곱 가지 사항을 실행하는 한 그들은 영원히 번영하고 결코 마가다국에 의해 멸망되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셨다.

나아가 이 칠불퇴법(七不退法)을 불교승가에 적용시키셨다. ① 비구들이 자주 회의를 열고 회의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한 비구들에게는 틀림없이 번영이 기대되고 멸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② 비구들이 함께 집합하고 함께 일을 시작하고 함께 승가의 제반 행사를 치르는 한 비구들에게는 틀림없이 번영이 기대되고 멸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③ 비구들이 이전에 정해진 적이 없는 것을 정하지 않고 이미 정해진 것을 깨뜨리지 않으며 모든 학처(學處=戒本)에 따라 행동하는 한 비구들에게는 틀림없이 번영이 기대되고 멸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④ 비구들이 출가한 지 오래되어 경험이 풍부한 장로비구들, 승가의 어른들, 승가를 이끄는 사람들을 모두 존경하고 존중하며 공양하고,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비구들에게는 틀림없이 번영이 기대되고 멸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⑤ 비구들이 이미 생기(生起)해 있는 재생(再生)을 초래하는 갈애(渴愛)에 지배되지 않는 한 비구들에게는 틀림없이 번영이 기대되고 멸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⑥ 비구들이 숲속의 좌와소(坐臥所)에 있기를 원하는 한 비구들에게는 틀림없이 번영이 기대되고 멸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⑦ 비구들이 각자 자신의 마음을 단련하고 또 착한 수행자들을 거기에 오게 하고 또 거기에 오고 있는 수행자들을 편안하게 머물러 있게 하는 한 비구들에게는 틀림없이 번영이 기대되고 멸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원래 공화주의, 혹은 공화국의 정치형태인 부족국가를 뜻하는 승가(僧伽)는 모든 안건을 대중의 동의를 통하여 처리하는 민주주의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이렇게 승가의 찬성과 반대를 묻는 대중공사를 갈마(karma)라 한다. “이 갈마에는 단백갈마, 백이갈마, 백사갈마의 3종류가 있다. 단백갈마는 행사를 알리는 것이며, 백이갈마는 1회의 안건올림과 1회의 논의를 통하여 구성원 전원의 승인에 의하여 안건을 의결한다. 백사갈마는 1회의 안건올림과 3회의 논의를 통하여 의결한다.”

이제 갈마와 같은 불교적 민주제의 전통을 바탕으로 대의민주제에 숙의민주제와 참여민주제를 결합하여 대중의 공의를 모으고 이를 정책으로 수렴하는 것이 활성화하고 제도적으로 보장되어야 하고 사찰운영위원회 등을 중심으로 문화로 정착해야 한다.

이의 출발은 직선제다. 법랍 10년 이상의 스님들 가운데 80.5%가 압도적으로 직선제를 지지하고 있으며, 직선제에 선거공영제와 중앙관리제를 결합하고 법을 엄정히 집행하면 금권선거, 부정선거, 매관매직이 사라질 것이다. 무엇보다도 34대 총무원장 재선 시 ‘총무원장 직선제 도입’과 ‘비구니 참종권 확대’를 적극 검토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기존의 간선제는 금권선거와 권력 야합의 장이었다. 종단의 총무원장 선거 관행에 대해 명진 스님은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24개 교구 본사에서 240명, 중앙종회 의원 81명을 합해 321명이 투표로 총무원장을 뽑는다. 후보들은 본사 주지에게 2000만〜3000만원, 나머지 선거인단에게 500만 원 정도 뿌리는 것이 관행화돼 있다. 대략 30억 원을 쓰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다. 종회의원이나 주지 선거 때도 액수의 차이만 있을 뿐 돈이 오간다.”라고 말한 바 있다. 24개 교구본사별로 10명의 선거인단을 선출할 때 본사 주지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하여 늘 공정성 시비가 끊이지 않았으며, 선거 공고 전후부터 투표일에 이르기까지 계파 사이의 밀약과 금품살포에 의하여 늘 표심을 조작할 가능성이 농후하였고, 실제 그런 사례가 많았다.

다양한 선거방식이 있고 나름대로 장단점이 있지만, 인류는 여러 시행착오를 통하여 민주주의의 원칙과 절차를 따른 선거야말로 가장 합리적이며, 개개인의 합의를 도출할 수 있으며, 집단 지성에 따라 지혜를 도모할 수 있는 제도임을 깨달았다.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민주주의 선거는 보통선거, 비밀선거, 직접선거, 평등선거를 행한다. 이를 종단의 선거에 대입해 보자.

이제 흑인이나 여자라고, 혹은 신분이 낮다고 선거권을 주지 않는 나라는 없다. 하지만, 종단은 4부대중 가운데 일부에게만 이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종헌 제8조는 “본종은 승려(비구·비구니)와 신도(우파색·우파이)로써 구성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집단의 구성원이 그 수장의 선거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하다. 선거법 제12조의 중앙종회의원 제12조 선거권 조항을 보면 비구로 한정하고 있다. 참종권을 제한하는 것은 보통선거의 원칙에 위배된다. 당연히 비구니와 우바이, 우바새에게도 선거권을 부여해야 한다.

4부대중에게 선거권을 준다면, 비밀선거와 직접선거를 행하는 것은 당연하다. “지난해 조계종 총무원의 교구별 재적승 현황에 따르면 전체 1만 1487명의 스님(사미‧사미니 제외) 가운데 직할교구가 2857명으로 가장 많았고 뒤를 이어 해인사(1409명), 통도사(1072명), 범어사(690명), 수덕사(634명) 등의 순으로 집계됐다. 반면 신흥사(115명)와 대흥사(107명)는 100명을 간신히 넘었고, 관음사는 81명에 그쳤다. 직할교구와 해인사, 통도사, 범어사 재적승 수만 합쳐도 전체 스님의 절반(52%)을 훌쩍 넘는다. 이들 교구본사가 단합해 후보를 낼 경우 다른 교구를 모두 합쳐도 승산이 없다는 계산이다.” 스님들이 교구나 문중의 큰 스님의 의견을 무시하는 투표를 하기 어렵다. 교구끼리 단합할 경우 교구의 이해관계 관철이 총무원장 후보의 자질과 충돌할 것이며 전자가 후자를 이길 가능성이 농후하다. 하지만, 선거를 하는 순간 모두가 정치행위를 하는 것이며, 정치는 권력과 가치를 제도를 통해 배분하는 행위이자 다양한 이해관계와 의견이 권력을 갖고 펼쳐지는 장이다. 당원이 자기 정당의 후보에게 투표하는 것처럼 교구나 문중이 지지하는 후보를 찍는 것은 자연스런 정치행위다. 권력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다. 악용하는 것이 나쁜 것이다. 악용을 견제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선거 국면에서 누구도 특정 후보의 지지를 천명하지 않도록 청규로 정한다. 그리고 선거 당시는 물론, 선거 이후에도 누구도 이에 대해 묻지 않는 비밀투표의 원칙을 철저히 준수하도록 계율로 정하면 어느 정도는 자유로운 의지에 의한 투표를 보장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재가불자에게도 투표권을 주면, 실제 문중이나 주지의 통제력 하에 있는 불자는 아주 적기 때문에 교구별 단합문제는 상당히 상쇄될 것이다. 어찌 되었든, 현재 총선이나 대선 때처럼 비밀투표를 보장할 수 있도록 교구별, 지역별로 선거인단과 지리적 상황과 교통을 고려하여 투표소를 설치하고 관리한다.

문제는 평등선거다. 평등선거는 모든 유권자가 균등한 기회를 가지고 투표에 참여할 수 있도록 보장함과 동시에 각각의 표에 동일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을 뜻한다. 오계를 수지하고 등록된 지 일정 년도가 지났으며 일정 기간 동안 교무금을 납부한 재가불자에게도 선거권을 준다. 하지만, 삼보를 공경해야 하고 스님의 위의가 지켜져야 하는 불교 전통과 평등선거를 조화시키는 방안이 필요하다. 같은 스님인 비구와 비구니의 표는 1 대 1로 동일한 가치를 갖는다. 하지만, 재가불자의 표를 스님의 표와 똑같이 1 대 1로 대응시킬 수 없다. 대안은 스님 전체 표와 재가불자 전체의 표를 동일한 가치로 인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스님이 1만 명, 자격을 갖춘 재가 불자가 10만 명이라면, 재가불자는 1인 1표를 행사하지만, 10만 표가 1만 표와 1 대 1로 동등한 가치를 갖기에 실제 재가불자의 표의 가치는 스님의 1/10에 해당한다. 다시 말하여 재가자 10명의 표가 스님 1명의 표와 동등한 가치를 갖는 것이다.

총무원장 선거에서 반드시 수립해야 하는 것은 선거공영제와 중앙관리제다. 현재 구성되어 있는 중앙선거 관리위원회의 독립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중앙선거 관리위원회는 현재 중앙종회에서 선출되는 위원으로 구성되도록 되어 있어 중앙종회의 계파의 이해, 특히 다수파의 이해를 반영하여 중앙선거 관리위원들을 선출될 수밖에 없게 된다. 즉 중앙 선거관리위원회가 종단의 정치나 계파의 이해로부터 벗어나 선거를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관리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총무원장 선거 때마다 중앙선거 관리위원회의 활동에 대해 문제제기가 발생하는 것이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따라서 중앙선거 관리위원회의 위원 구성의 객관성을 담보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특히 선거법이나 선거절차 등 선거에 전문적이거나 사회적으로 신망있는 재가전문가의 참여를 통해 객관성과 전문성을 보완해야 한다. 총무원장으로부터 철저히 독립된 기구로 ‘조계종 중앙 선거관리위원회’(가칭)를 만들고, 당분간 불교시민단체의 인사들로 위원들을 구성한다. 이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 일정 기간 동안 국가의 중앙 선거관리위원회에 위탁하는 것이 오히려 선거의 공정성을 기할 수 있다.

선거공영제의 도입 또한 금권선거를 방지하는 방법이다. 선거공영제는 금권선거를 비롯하여 자유방임으로 인하여 야기되는 폐단을 방지하기 위하여 종단의 중앙 조직에서 선거를 관리하고 그에 소요되는 선거비용을 종단의 부담으로 하거나 후보자의 기탁금 중에서 공제함으로써 선거의 형평과 기회균등을 보장하고 선거비용을 경감하며 나아가 공명선거를 실현하려는 선거제도를 말한다. 총무원장선거에 소요되는 비용을 종단 예산으로 계상하고, 이를 중앙선거 관리위원회가 관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종단은 빠른 시일 안에 4부대중이 공히 참여하여 직접, 평등, 보통선거를 하는 것과 관련한 종헌과 종법을 만들어 통과시켜야 한다. 예를 들어, “본종은 승려(비구·비구니)와 신도(우파색·우파이)로써 구성한다.”라는 종헌 제8조 정신에 따라, 종헌에 “본종의 구성원은 선거권 및 피선거권이 있다.”를 명시하고, “선거에 관한 경비는 종법이 정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문중이나 계파, 후보자에게 부담시킬 수 없다.”, “총무원장은 승려(비구·비구니)와 신도(우파색·우파이)가 직접 참여하여 선출한다.” 등의 조항을 추가한다. 새로운 종헌과 종법에 따라 중앙선거 관리위원회는 종법에서 규정한 자격을 갖추어 선거권을 가진 비구와 비구니, 우바새와 우바이의 선거인단 명부를 작성하고, 최소한 보름 이상의 기간 동안 이를 종단, 각 교구 본사의 홈페이지에 올려 공람하여 피드백을 받는다. 선거인단 명부가 완성되면, 중앙선거 관리위원회는 총무원장 후보자들과 협의하여 휴일 가운데 선거일을 택일하며 이를 최소한 한 달 이전에 공지한다.

총무원장 후보는 약력, 종책 등을 중앙선거 관리위원회에 제출하고, 중앙선거 관리위원회는 이를 기본자료로 만들어 투표 안내문과 함께 등록된 선거인단 모두에게 우편으로 발송한다. 종책 토론회 또한 종법으로 규정하여 각 후보자는 불교방송의 토론을 3회 이상 한다. 선거운동은 24개 교구 본사 별로 순회하면서 종책설명회 형식으로 공동으로 수행한다. 24개 교구 본사별 종책 설명회는 후보자들이 협의하여 그 횟수를 제한할 수 있다.

투표일에 선거인단에 등록된 모든 4부대중이 교구본사와 소속사찰 별로 마련한 투표소에 직접 참여하여 1인 1표를 행사한다. 물론 비밀투표로 한다. 24개 교구본사별로 개표를 하며, 개표작업에는 중앙선거 관리위원회 위원과 이 위원회가 임명한 개표위원, 각 후보자가 추천한 참관단이 참여한다.

선거 직후 후보자들은 모든 선거비용에 관한 회계자료를 제출한다. 단 돈 1만원이라도 부정하게 쓰인 것이 확인되면 당선자는 자격을 상실하며, 선거법에서 정한 바와 같이 그 10배로 배상함은 물론 10년 동안 선거 및 피선거권을 박탈한다. 종단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승가의 전통에 부합한 직선제에 관련한 종헌과 종법을 만들어 통과시키고 중앙선거 관리위원회 조직과 선거명부작성 등 직선제를 실시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

4. 고령화 사회와 승려복지체계 수립

스님들이 수행에 전념하지 못하고 중생구제와 종단개혁에 나서지 못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노후복지가 보장되지 않아 주지나 문중 어른 스님의 눈치를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고령인구(65세 이상)는 2015년 인구센서스 결과 13.2%(657만 명)으로, 2010년 11.0%(536만명)에서 5년 만에 121만 명 증가하였다. 노령화지수(0~14세 인구에 대한 65세 이상 인구 비율)는 2010년 68.0%에서 5년 만에 95.1%로 증가, 저출산 현상과 고령화가 겹친 결과다.”

고령화 사회를 맞아 스님과 재가불자도 고령화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가장 큰 문제는 노스님들의 복지다. 나름대로 수많은 대중들에게 훌륭하게 포교하고 수행에서도 명성을 날린 스님조차 늙고 병들면 말 그대로 한 몸을 뉘울 집도, 절도 없다. 소임을 맡고 있거나 탄탄한 문중의 뒷배를 받지 못하거나, 힘 있는 제자를 두지 못한 스님은 의지할 곳이 없다. 찾다, 찾다 끝내 찾지 못한 스님은 개인적으로 사암을 짓거나, 토굴을 얻기도 한다. 사암도, 토굴도 얻지 못한 스님은 이리 저리 유랑하며 걸식이 아닌 걸식을 한다. 아무리 삶이 곤고해도 바라볼 별이 있고 기댈 언덕이 있으면 그나마 생을 영위할 수 있는 법인데, 한국불교는 힘도 연고도 없는 스님들에게서 별도, 기댈 언덕도 빼앗았다. 노후가 걱정이 되니 수행을 제대로 할 수 없다. 노후를 대비하여 나름대로 준비를 한 스님은 괜찮지만, 그렇지 못한 스님은 속가를 기웃거리거나 삼보정재에 손을 뻗치기도 한다. 늙지 않는 스님은 없다. 희망이 없는 미래는 현재를 구속한다. 노스님들을 책임지지 못하는 한, 종단의 미래는 물론 현재 또한 어두울 수밖에 없다.

병도 마찬가지다. 몸이 병들면 수행이나 포교뿐만 아니라 도반이나 대중들에게 자비심을 내는 데도 제한을 받는다. 그런데 적지 않은 스님들이 제 때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다. 노스님 가운데 기댈 언덕조차 없어서 유랑을 하다가 병을 얻으면 제주도 밤배를 타기도 한단다. 제주도를 향한 배가 아니라 물고기에 육보시를 하는 배란다. 이것은 정녕 구조적 폭력이다. ‘구조적 폭력’이란 “(인간이) 지금 처해 있는 상태와 지금과 다른 상태로 될 수 있는 것, 잠재적인 것과 실제적인 것 사이의 차이를 형성하는 요인”이다. 위암으로 병원에 가서 수술 실패로 죽는 것은 자연사이지만, 제때 수술하면 살릴 수 있는데 수술비가 없다는 이유로 치료를 받지 못하여 죽는다면 이것은 구조적 폭력이다. 인간답게 존엄하게 살려 하고 모든 구속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인간에게 ‘피할 수 있는 모독’을 가하는 것이다. 종단은 언제까지 올곧게 수행과 포교를 한 스님들에게 구조적 폭력을 가할 것인가.

전국선원수좌회에서는 수좌 스님들의 열악한 수행 환경을 개선하기 위하여 자구책을 마련하고 있다. 앞으로 불교계 의료기관과 의료지원체계를 구축하고 불교노인요양원과 연계해 입소를 지원하는 등 다양한 복지 서비스를 제공할 계획이라지만, 종단 산하에 복지원을 설립하고 종단 차원에서 복지책을 강구해야 한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적극적 복지와 구조적 폭력을 제거하는 적극적 평화 개념을 불교에 맞게 전환하여 종단의 복지이념을 정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빈곤, 질병 등 좋지 않은 것을 해소하는 것에 대처하는 소극적 복지는 이를 야기하는 구조를 존속시킨다. 요한 갈퉁이 말한 대로, 평화란 싸움과 폭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구조적 폭력을 제거한 상태를 뜻한다.

2011년 4월에 ‘승가복지법’이 제정되고서 10월부터 65세 이상 노스님들에게 요양비와 입원치료비의 일부를 지원하고 있지만, 이는 말 그대로 새발의 모기 피다. 교구별로 다양한 복지가 행해지고 있기는 하지만, 천차만별이다. 승가의 복지는 스님들의 위상에 관계없이 출가에서 입적까지 모든 스님들에게 의료, 교육, 주택 등의 사회서비스를 제공하는 보편적 복지를 행하여야 한다. 이제 종단 안에 복지원을 설립하고 그 산하에 정책기획 및 재정부, 주택, 의료, 연금 지원부 등을 둔다. 종단 차원에서 마스터플랜을 짜고, 요양비, 치료비, 연금 등 수요를 추산하고 이에 맞게 안정적 재정을 확보한다.

복지를 반대할 스님은 없을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재정이다. 이번 기회에 ‘사유재산의 종단귀속’을 단행하여 이를 종자돈으로 삼아 종단 차원의 요양원과 병원을 짓고 수익사업을 한다. 노스님들이 대부분 교구 본사에서 머물며 수행하기를 원하는 만큼, 교구 본사와 협력하여 교구 본사 안에 공동주거 및 수행처를 짓는다. 남는 돈은 적립하여 이자를 복지비용으로 전용한다.

매년 소요되는 재정의 경우 종단 전체 예산에서 일정 정도 비율을 복지예산으로 배정하자는 합의를 한다. 특히, 문화재사찰 관람료는 53%는 문화재관리를 위한 사찰의 경상운영비로, 17%는 중앙분담금(이중 5%는 교육분담금)으로, 30%는 사찰 목적사업비로 사용되게 되어 있다. 이중 53%의 경상운영비 중의 일부를 소속 교구의 승려복지비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필요하다.

복지는 승려의 미래다. 복지를 간과하는 것은 불교의 미래를 무시하는 것이다. 노스님일수록 더욱 존경받고 위의가 빛나야 한다. 종단에서 파악한 승려복지예산은 요양에 10억 원, 치료에 50억 원, 건강보험료에 150억 원, 연금보험료에 25억 원 등 235억 원이다. 앞의 글대로 하면, 그 정도의 재정확보는 가능하다.

재정을 확보한 후 이에 맞게 복지 마스터플랜을 짠다. 스웨덴의 복지 구호가 “요람에서 무덤까지”였다. 이를 차용하면, “출가에서 다비”까지 스님들에 대한 복지를 확립할 필요가 있다. 종단의 복지원에서 이를 추진하되, 복지 전문가와 스님이 공동으로 기획한다.

기존의 연구 및 조사를 보면, 강원과 선방 수좌 수님들의 70% 이상이 주거할 공간이 없다. 65.4%의 스님들이 노후문제를 염려하고, 생활거처가 준비되지 않았다는 스님들이 68%다. 32.1%가 사설암자에 거주한다. 노스님들 가운데 만성질환과 퇴행성질환은 22.5%, 위장질환은 20.0%, 치과질환은 17.5%, 심혈관질환은 7.5%가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복지의 방향은 분명하다. 우선 질병 치료비는 무조건 전액 지원하는 체계를 확립한다. 거주문제의 경우 스님들이 거처할 주거 및 수행공간을 마련한다. 여기엔 간단한 진료와 요양을 겸할 수 있도록 시설과 인력을 확보한다. 기존에 이미 설립된 곳은 증축 및 시설의 현대화를 지원한다. 덕숭문중은 수덕사, 범어문중은 해인사, 백파문중은 백양사, 탄허문중은 월정사 식으로 배정하면 문중과 교구, 지역별 안배가 가능할 것이다. 아울러, 모든 스님들에게 일정액의 수행보조금을 매달 지급한다.

이미 복지를 잘 시행하고 있는 곳도 많다. 용주사의 경우 전강문도회를 중심으로 승가노후복지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승랍, 20년, 25년, 30년 이상의 스님들에게 매달 30만 원, 40만 원, 50만 원의 수행연금을 지급한다. 병이 들면 입원비 전액을 지원한다. 20명의 문중 스님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한다. 재정은 말사에서 소임을 맡은 스님들이 갹출하여 충당하는 데 약 3억 원의 기금을 조성한다. 월정사도 2억 4천만 원의 수행연금과 8억 원의 장학금을 지급한다. 종단에서 각 문중과 사찰별로 자구적인 복지책을 조사하고, 이를 통합하되, 상호협력시스템을 확보하여 중앙의 복지와 각 문중 및 지역 사찰의 복지를 원활하게 결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장기적으로 볼 때, 기능주의 복지 이념보다는 협동주의 이념에 부합하는 ‘공제조합 방식’의 제도로 발전시켜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조계종 전체 스님들을 회원(조합원)으로 하는 사단법인 형식의 공제회로 발전시켜서 장기적으로는 직능별 공제회와 같이 안정적인 운영을 통해 승가복지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 달에 3만 내외의 조합비를 내면 누구나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아울러 개인의 노력도 수반되어야 한다. 큰스님이 입적하면 30년 먹을 것 지고 간다는 말이 회자된다. 호화장례를 치르느라 엄청난 재정이 소요된다는 말이다. 그런 장례문화를 일소하고 그 비용을 생전에 스님들이 위의를 갖추고 수행할 수 있도록 복지비용으로 충당하는 것이 옳다. 공양은 평등하게 하는 것이 승단이 정신과 부합한다. 스님들에 대한 기본 소득제도 바람직한 대안이다.

5. 스님의 범계에 대한 진상조사와 엄정한 집행 및 계율의 현대화

홍주종의 흥선유관(興善惟寬)의 말처럼, 무상보리란 것은 몸에 걸치면 계율이요, 입으로 말하면 법이요, 마음으로 행하면 선이 된다. 즉 계율이 바로 법이요, 법은 선정을 떠나지 않으니 계, 정, 혜를 따로 분리하여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갈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계율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라는 점이다. 윤리는 교리와 달리 보편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맥락 위에서 형성된다. 윤리는 사회ㆍ문화적 맥락이 변하면 같이 변해야 한다. 변하지 못하면 윤리를 통한 자유는 사라지고 속박이 된다.

그러기에 윤리와 계율을 논하려면 먼저 사회문화적 맥락을 살펴야 한다. 필자는 문화를 연기론적으로 정의한다. E.B. Tylor에서 C. Geertz에 이르기까지 서구 학자들의 문화 정의는 실체론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동쪽이 있어 서쪽이 있고, 나무가 풀과 관계 속에서 목질의 줄기를 가진 다년생의 식물이란 의미를 갖듯, 문화 또한 타자를 자연이나 야만으로 설정하고 이것과 상호관계를 맺고 있는 세계에서 빚어지고 해석되는 상대적 개념이다. 이에 “문화란 자연이나 야만과 구분되는 세계에서 구성원들이 세계를 나름의 체계와 코드로 해석하고 대응하면서 세계관과 상징을 형성하고 그 세계관 - 주동적, 잔존적, 부상적 세계관 - 의 구조와 상징체계 속에서 자신과 자연과 세계와 타인, 사회에 대해 이해하고 설명하고 해석하고 소통하며 끊임없이 의미의 상호작용을 하고 이 의미의 망 안에서 서로가 자신과 집단의 삶의 지향성에 부합하는 의미를 중심으로 실천하고 기억하고 전승하면서 생성하는 역동적인 총체”로 정의한다.

이 정의처럼, 문화는 상대적이자 연기적이다. 승단의 문화는 비승가문화를 전제로 하며, 이것은 상호 조건의 관계에 놓인다. 디지털 사회로 이행하면서 승단과 비승단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도박사태의 근본 원인 또한 개인의 문제라기보다 문화와 계율 사이의 괴리에서 빚어진 것이다. 특정 집단에서 어떤 것이 문화로 자리를 잡으면, 규범은 그 문화를 규제하는 장애로 인식되며, 결국 문화에 맞추어 규범이 변할 때까지 문화와 규범 사이에 괴리가 생긴다.

아무도 보지 않는 망망대해에서 어부가 기준치 이하의 생선을 놓아주면서 주체의 자유로움에서 오는 황홀감에 취하듯, 수행을 통하여 자유로운 주체는 계율을 지키는 행위를 통하여 환희심에 젖는다. 하지만, 그 단계에까지 이르지 못한 수행자들은 자아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자성불의 목소리, 감시의 시선과 범계에 따른 벌이 두려워서 계율을 지키게 된다.

가장 아래 단계의 수행자들은 벌 때문에 계율을 지키려 하는데, 그 벌이 공정하고 엄정하게 집행되지 않으면 두려움을 상실하고 범계 행위를 하게 된다. 그 동안 호법부는 공정하지도 엄정하지도 않았다. 권력을 가진 이, 문중의 도반처럼 인적인 관계에 있는 자들에게 너그럽기는 사회와 마찬가지였다. 호법부를 별도의 독립기관으로 정하여 총무원장으로부터 자율성을 확보하고, 양형기준을 적시하여 사적인 감정이 자리할 여지를 없애야 한다.

대다수의 수행자에게 벌보다도 계율을 지키도록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은 자성불의 목소리와 감시의 시선이다. 하지만, 계율에서 어긋난 것이 문화가 될 때 부처님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감시의 시선은 전도된다. 예를 들어, 거마비가 이미 승가의 문화로 관례화한 곳에서 이를 받지 않으려 하는 자가 외려 그 집단의 눈총을 받고 왕따를 당한다. 문화와 관례에 의하여 감시의 시선이 전도되면, 그를 어기는 자 사이에 ‘공범의 연대’가 성립하여 죄책감을 갖지 않게 되고 지키는 자를 타자로 설정하여 그를 감시하고 배제하면서 연대를 강화하려는 속성을 갖는다. 이 경우 그 시선에 맞서서 계율을 지키는 것에 용기가 필요하며, 때로는 그 집단으로부터 추방도 각오해야 한다.

종단은 차제에 승단의 문화와 계율 및 청규, 사회법 사이에 괴리를 빚고 있는 것에 대해 면밀히 조사하고 이 괴리를 메워야 한다. 문화에 따라 다르지만, 어떤 경우에는 문화를 계율에 맞추어 바꾸어야 할 것이고, 다른 경우에는 계율을 바꾸는 경우도 있어야 할 것이며, 양자 모두 조정해야 할 경우도 있을 것이다.

문화적 맥락을 고려하여 다소 수정해야 할 계율도 있다. 스님들이 계율을 지키고 수행과 포교에만 전념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스님들도 재미있게 생활하고,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 계율과 청규를 현대화하여 지키지 못할 계율과 청규는 개정하는 한편, 스님들도 재미있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문화 창조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도박이나 음주를 대체할 스님들의 놀이문화 개발, 족구, 축구 등 스님들의 체육 활동을 보장하고, 신도나 마을주민과 함께 하는 체육ㆍ문화 활동도 필요하다.

스님들의 취향과 능력에 따라 시, 노래, 악기 연주, 그림, 등산 등의 취미활동도 보장하고, 그런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사찰이나 교구 안에 동아리를 만들고 지원하는 것도 고려해 볼 사안이다.

아울러 스님들도 이원화 하여, 이판승의 경우 더욱 수행에 전념할 수 있는 수행 비구승 -사자상승- 지원 체제를 확립하고 사판승의 경우 교화승(포교승)으로 구분하여 결혼과 공인된 재산의 사유를 인정하되 상좌를 두지 않고 일정 정도 이하의 소임만 갖도록 제한하는 것도 이 시대에 필요한 연구 과제다.

이처럼 문화와 계율 사이의 괴리를 메우는 작업을 해야 하지만, 이런 사유로 지금까지 저지른 범계 행위에 대해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스님들의 범계 행위가 불교를 쇠망하게 할 만큼 극단의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모든 성찰과 쇄신은 진실의 조사와 공표로부터 시작한다. 신뢰받는 출가자와 재가자 공동으로 “청정승가 정립을 위한 범계 행위 진상조사위원회(가칭)”를 구성하여 빠른 시일 내에 모든 진실을 조사하여 보고서 형식으로 발표하여야 한다. 조사한 후 드러난 허물이 개인적인 것은 참회하고, 드러난 문제가 구조적, 제도적인 것은 제도를 개혁하여야 한다. 일부 불자들은 진상이 드러날 경우 종단의 혼란과 불교의 위상 전락을 우려한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진상을 철저히 조사하고 성찰하지 않으면, 범계 행위는 계속될 것이며 결국 불교는 대중의 지지를 상실하여 사라질 것이다. 약간의 혼란과 대중의 충격, 위상 전락이 따르겠지만 재빨리 성찰하고 제도개혁을 해나간다면 그를 중심으로 불자들이 하나가 되고, 잃었던 신뢰와 지지를 되찾을 것이며, 위상도 다시 회복될 것이다.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심정으로 진실을 낱낱이 조사하고, 공표하고 함께 성찰하고 모든 삿된 것을 몰아낼 수 있는 제도 개혁을 단행해야 할 것이다.

6. 국가 제도화의 해체와 삼권분립과 권력 견제 기능 강화

전 총무원장체제에 와서 삼권분립은 형해화하였다. 총무원장이 중앙종회의원, 호계원, 호법부는 물론, 동국대 총장, 정부 내 종교관련 직책에 자기 사람을 심어놓고 전횡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이에 중앙종회는 종도가 아니라 총무원장의 의사를 대변하고, 호계원은 서의현의 재심을 결정하고 외려 종단에 대해 올바른 비판을 한 스님을 쫓아내거나 제재를 가하는 등 권력의 하수인 구실을 하고 있다. 수행과 교화의 수장이 되어야 할 주지소임이 신심과 원력 없이 세속적 출세의 도구로 전락하였다.

궁극적 대안은 중앙의 총무원과 지방의 교구 본사제를 해체하고 지역에 기반한 자율적인 승가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이다. 총무원과 교구본사제는 일제의 식민지적 근대의 잔재이자 국가가 종교를 제도 안으로 편입하여 관리하자는 근대적 유산이다. 승가는 자율적인 공동체이어야 한다. 이러기 위해서는 각 절별로 역사와 능력, 승려들에 맞게 수행중심, 전법과 포교 중심, 중생 구제 중심 등으로 특성화하여 자율적인 공동체로 만들어야 한다.

개량적 방안으로는 총무원장을 직선제로 선출하고 중앙종회와 호계원의 종헌에 규정한 실질적 역할 수행을 통한 삼권분립을 구현하며, 수행과 재정의 분리 등 제도개혁을 단행하여야 한다. 중앙종회의원 또한 해당 교구의 비구니를 포함한 모든 종도들이 참여하여 선출할 수 있도록 한다. 중앙종회는 상임분과위원회를 중심으로 종도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제도를 만들고 법제화를 하여야 하며, 종단의 행정은 물론, 수행, 포교, 교육 등의 문제가 발생할 경우 중앙종회가 먼저 나서서 개선책을 마련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이번 기회를 통하여 모든 일과 행사에 사부대중이 함께 하는 평등하게 참여하는 공의제를 정착시키고 구체화, 활성화하여야 한다. 원로원만이 아니라 중앙종회를 근본적으로 양원제로 나누어, 상원은 계율대로 대덕 이상의 출가자로 자격을 한정하고, 하원은 출가자와 재가자들을 함께 구성하여 상호견제와 균형이 이루어지도록 한다.

호계원의 독립성을 강화하기 위해 호계위원은 도덕성, 경력 등에서 일정한 자격기준을 부여하고 이에 합당하는 자 가운데 중앙종회에서 선출하되, 중앙종회의 일반 의결이 아닌 중앙종회의원 3분의 2 이상의 동의를 얻도록 하여 권위를 부여해야 한다. 일정 부분(최소한 1/3)은 불자 법조인으로 구성하거나 배심제도를 도입하여 심판은 호계위원이 하고 유죄/무죄의 판단은 배심에서 결정하도록 한다. 호법부는 중앙종회 직속으로 독립시키며, 호법부는 사전예방과 진상조사의 업무에 주력하고 호계원은 심판에 주력하도록 기능을 분할한다. 원로원에 사회의 헌법재판소와 같은 역할을 부여하여 총무원장이 종헌을 위반하였다고 판단하였을 경우 바로 탄핵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

7. 호국불교 이데올로기와 정교유착의 해체

총무원와 교구본사제와 함께 정교유착을 정당화하는 논리인 호국불교 이데올로기를 해체해야 한다. 호국불교 이데올로기는 정교유착을 심화하고, 불자 대다수가 아니라 일부 권승과 이들과 야합한 지배층의 이해관계에 철저히 복무한다. 이는 대중들이 겪고 있는 사회적 모순이나 종단의 모순을 은폐하고 이를 애국으로 대체하는 허위의식이다. 원래 중국에서든 한국에서든, 호국불교사상은 정법을 전제로 한 것이고 호국(護國)이 아니라 호법(護法)하자는 것이고 그 목적은 왕권이나 신권이 아니라 백성들의 안락이었다.

하지만, 일제와 독재정권에 와서 호국불교는 정권의 권력을 강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전락하였다. 이 이데올로기는 화랑과 의승과 같은 애국시민의 삶과 실천이라는 상상관계를 재현할 뿐만 아니라 종단, 사찰과 같은 이데올로기 국가기구 안의 실천을 규정한다. “모든 이데올로기는 주체의 범주의 기능에 의해 구체적인 개인을 구체적인 주체로 부르거나 호명(interpellation)한다.” 호국불교 이데올로기는 스님과 재가불자들을 사찰과 종단이라는 이데올로기 국가기구를 통해 국가와 정부를 정당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주체로, 화랑이나 의승(義僧)을 존경하고 자랑스러워하며 조금이라도 그들처럼 애국을 하고 싶은 주체로 호명한다.

“모든 이데올로기는 그것의 필연적인 상상적 왜곡 속에 생산의 실존하는 관계(그리고 그로부터 유래한 다른 관계들)가 아니라, 특히 생산 단계에 대한 개인들의 (상상적) 관계와 그로부터 유래한 다른 관계들을 재현한다. 그러므로 이데올로기 속에 재현된 것은 개인들의 존재를 지배하는 실제 관계의 조직이 아니라 그들이 살고 있는 실제 관계에 대한 개인들의 상상적 관계이다.” 부처님의 정치에 대한 가르침은 정교분리다. 불교는 깨달음조차 집착이라고 할 정도로 대자유를 지향한다. 그럼에도 권승들은 전통사찰의 보존 및 지원에 관한 법률, 문화재보호법, 자연공원법을 매개로 정교유착, 더 나아가 불교, 종단/사찰의 국가 종속을 수용한다. 이들은 국가가 위임한 권력과 분배한 재정을 바탕으로 권력을 행사하고 소유와 탐욕을 증대하면서 그러는 한, 무소유와 삼독의 지멸을 추구하는 불자에서 멀어짐에도 종단과 사찰에서 큰스님으로 군림하고 있다.

그럼, 대안은 무엇인가. 우선 모든 것을 정법에 근거하여 현실을 직시하고 비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에 대해서는 단호히 비판하고 저항해야 한다. 원래 호국불교사상이 호국이 아니라 호법이며 그 목표는 지배층의 수호가 아니라 백성의 안락임을 명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이번 촛불혁명이 주권자로서 각성한 시민들이 주체가 된 것처럼, 호국불교가 정법에 근거하여 나라를 다스리고 그 목적은 국가가 아닌 국민의 안락이라고 할 때 기존 체제의 균열을 내고 변혁으로 가는 지평을 열 수 있다. 지금까지 일제와 독재 정권에 의해 왜곡된 호국불교에 대한 기술과 논리는 모조리 폐기하거나 수정해야 한다.

종단은 오로지 부처님의 뜻, 정법에 따라 호법을 위하여 여법하게 권력과 ‘타협적 평형’을 도모하고 ‘창조적 긴장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권력의 비호를 받아 심한 범계행위를 은폐한 모든 권승들은 절절하게 참회하고 모든 소임을 내려놓아야 한다.

돈을 주고 표를 사는 것처럼 표를 매개로 부처님을 파는 것은 중죄이자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주범이다. 중앙이든 지방이든 선거를 매개로 정교유착이 강화하므로, 표를 매개로 종단과 절이 특정 후보를 지지하고 권력이 이에 대한 보답으로 지원금을 늘리는 행위를 금품선거나 뇌물을 주는 것에 준하는 처벌을 할 수 있도록 공직선거법과 정치자금법을 개정해야 한다.

8. 승려 교육의 혁신

“출가자는 재생산의 위기에 있다. 행자 수료자는 2005년 정점(319명)에서 지속 하락, 2012년 212명으로 최저점을 찍고, 2015년에 205명으로 10년 전인 2005년 대비 1년 배출 총 수가 114명 감소, 특히 여행자 수료자 수가 2010년 84명으로 61% 정도 하락하였다.” 이에 대한 대안은 승려 교육을 혁신하고 기본소득제를 포함하여 승려들의 보편적 복지책을 마련하고 실행하고 사부대중이 함께 하는 것이다.

종단의 <교육법> 제1조는 “종단교육은 부처의 혜명을 잇고 법을 전해 중생을 제도하는 근본이념 아래 모든 종도에게 깨달음을 성취하고 보살도를 실천함에 필요한 교육을 시행하여 불국토 실현에 이바지할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한다.”이다. 이는 상구보리 하화중생, 혹은 원효가 말한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 중생을 넉넉하고 이롭게 한다(歸一心之源 饒益衆生)”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한국의 승가교육의 목표는 불법의 진리를 깨달아 하화중생의 이타적 보살도를 실천하여 현실세계를 불국토로 전환시킬 수 있는 인재를 기르는 데 있다. 더 줄이면, 깨달음과 보살행을 행하는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다.

계정혜의 삼학을 바탕으로 지혜를 닦는 해와 계율선정을 행하는 행을 종합하는 전통적인 방식이 계승되어야 함은 자명하다. 하지만, 21세기 오늘 이것만으로 부족하다. 우선 깨달음의 개념이 올바로 정립되어야 한다. 물론, 깨달음에 대해 함부로 정의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에 대한 합의된 개념을 도출하여야 교육과정과 방식을 결정할 수 있다.

깨달음을 설명을 위하여 굳이 분별하면, 나에 대한 깨달음, 세계에 대한 깨달음, 중생에 대한 깨달음으로 나눌 수 있다. 나에 대한 깨달음은 나의 몸과 마음에 대한 깨달음으로, 세계에 대한 깨달음은 진리에 대한 깨달음으로, 중생에 대한 깨달음은 사회에 대한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교육은 말 그대로 백년지대계다. 스님의 교육은 한국불교의 미래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중세 시대의 방식이 별다른 성찰과 개선이 없이 답습되고 교과목도 구태를 전통이라 간주하며 집착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스님들의 법문이 들을 것이 없다며 기피하는 불자들이 늘어나고, 스님들이 불자들과 대화하다가 무지를 드러내는 일도 종종 발생하였다. 이에 스님들의 위의는 전락하고, 스님 스스로도 무명에 휘둘려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교육원은 이런 폐단을 척결하고자 어느 정도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동안 한문을 공부하다가 정작 경전의 의미나 진리는 놓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이에 한문 교재를 한글화하였다. 기존의 강원에서는 치문, 선요, 절요, 서장, 전등록, 염송 등 주로 선과 관련된 교과목에 집중하였다. 물론 부처님의 가르침과 말씀 너머의 진리를 깨우쳐야 하지만, 교의 사다리 없이 선으로 도약하는 것은 쉽지도 않거니와, 부처님의 가르침에 무지하게 만든다. 치문경훈, 선요 등의 선 관련 교과목에 금강경, 화엄경 등의 경전도 한문불전강독의 교과목으로 들어갔으며, 어학, 불교사회경제학, 불교생태학, 비교종교학 등의 교과목도 새로 추가되었다.

이것만 해도 진일보한 것이지만, 더욱 혁신적일 필요가 있다. 나를 깨닫기 위한 심리학과 정신분석학과 인지공학, 세계와 진리를 깨닫기 위한 서양 인문학, 중생을 깨닫기 위한 사회학과 대중문화 등의 강좌도 수용할 필요가 있다. 서양에서 수십만 명을 대상으로 임상실험을 하였거나 과학적으로 입증한 마음과 심리, 두뇌에 대한 이해 없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가. 지금 중생들이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탐욕에 물들어 고통 속에 있는데 이에 대한 이해가 없이 어찌 이들을 구제할 것인가. 이밖에 불교미학, 인류학, 과학사, 과학철학 등도 교양 선택과목으로 선정할 필요가 있다. 이럴 경우 너무 많은 교과목으로 학인의 부담을 가중시킬 우려가 있는데, 각 단계별로 체계화하고 과목을 통합하여 학인의 부담을 덜어줄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하여 교육원 산하에 ‘교육개발연구소’ 및 ‘교재연구 및 교과목 개편위원회’를 둘 필요가 있다.

이번 기회에 기본교육기관도 정리하여 체계화한다. 강원이 난립한 가운데 강원과 강원의 유기적이고 횡적인 연계가 없었다. 강사 스님이나 교수들도 통일된 교수법이나 교재 없이 다른 교수들과 교류도 없이 스승으로부터 도제식으로 교육받은 것을 그대로 답습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또한 ‘승가대학 운영에 관한 령’이 학년별 정원을 10인 이상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현재 출가자 감소로 인한 정원 미달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 가능하면 승가대학 통합, 다른 교육기관으로의 전환 등도 적극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강의의 질적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하여 교육원에서 동영상 강좌를 마련하고 연수교육을 시행한 것은 잘한 일이다. 교재를 통일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각 교과목별로 표준 교안을 만든다. 교과목에 따라 다양한 교수법을 개발하고 보급한다. 경전에 대한 해석도 통일한다. 교수도 자격고사를 보게 하며, 공통교재에 대한 연수 등을 종단 차원에서 시행한다.

9. 언론 자유의 보장

붓다는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 비판에 귀를 열었다. 붓다는 『장아함경』에서 “말과 뜻이 다른 어떤 이에 대해 자신의 뜻을 밝히고 이를 수용하지 않을 경우 ① 충고하고, ② 듣지 않으면 꾸짖고, ③ 듣지 않으면 꾸짖기를 멈추고 ④ 다 같은 여래의 제자로서 각자의 판단에 따라 함께 올바른 말과 뜻을 추구해야 한다”라고 했다. 부처를 만나고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서까지 지존의 권위와 지위마저 해체하고 진리라 생각한 것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고 이를 깨야만 진정한 진리에 다다른다는 것이 불교의 진리관이다. 원효성사는 진리라고 단정하는 것에도 일말의 허위가 있으니 그를 골라내고 허위라고 규정한 것에도 일말의 진리가 있으니 그를 추려내야 하니, 어떤 주장이든 받아들인 다음 그를 따르는 동시에 따르지 않는 순이불순(順而不順)의 화쟁(和諍)을 통하여 진리로 다가가는 방편을 알려주었다. 승가(僧伽)는 모든 안건을 찬성과 반대를 묻는 대중공사인 갈마(kamma)를 통하여 처리하는 민주주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만장일치에 이를 때까지 토론을 거듭하되, 이것이 불가능하면 다수결로 표결하여 정하였다. 이렇듯 불교는 교리적으로나 전통으로나 강렬하게 민주주의와 ‘언로(言路)의 열림’을 지지하고 추구하였다. 그러니, 종단의 언론탄압이야말로 부처님의 뜻을 어기는 훼불행위다.

백보를 양보하여 불교에 민주적 교리와 전통이 없다 하더라도 지금은 21세기다. 스님과 종단 또한 근대 국가의 틀 안에 있다. 근대국가는 언론의 자유를 근간으로 한다. 존 밀턴이 1644년에 『아레오파기티카(Areopagitica)』에서 언론과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였고, 존 스튜어트 밀은 1859년에 『자유론(On Liberty)』에서 “전 인류 가운데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동일한 의견을 갖고 있고 한 사람만이 그에 반대되는 의견을 갖고 있을 경우, 인류에겐 그 한 사람을 침묵시킬 권리가 없다. 한 사람이 인류 전체를 침묵시킬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가 인류를 침묵시킬 권리가 없는 것과 같다.”라고 말하였다. 밀은 이어진 문장에서 그 이유에 대하여 말한다. “만약 의견이란 것이 그 당사자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개인적 소유물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그 의견의 향유를 방해한다는 것은 개인적인 손해이며, 그 손해가 소수자에 미치는가, 다수자에 미치는가에 따라서 약간의 차이점이 생긴다. 하지만, 의견의 표현을 침묵시키는 데 대한 폐해는 그것이 인간의 권리를 탈취하며 그 의견의 당사자들보다도 그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권리마저 박탈한다는 데 있다. 만약 그 의견이 정당한 경우 반대자들은 과오를 버리고 진리를 따를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한다. 만약 그 의견이 그릇된 경우, 그들은 과오와의 충돌에서 야기된 진리의 좀 더 명료한 지각과 선명한 인상 - 이것은 과오를 버리고 진리에 따르는 이익과 거의 동일한 규모의 이익 - 을 잃어버린다.”

밀턴과 밀의 이론을 바탕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언론의 자유를 위하여 피를 흘린 결과, 언론과 사상의 자유는 인류의 보편원칙이 되었으며, 이로 인류는 중세의 ‘주술의 정원’에서 벗어나 진리를 올바로 구현하는 지평에 놓였다. 실제에서 괴리가 있지만, 지구상의 거의 모든 국가들이 헌법을 통하여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언론 또한 권력자들이 통제하고 검열하는 권위주의 단계에서 벗어나 진리와 사상을 마음껏 표현하는 자유주의 단계로 도약하였다.

밀의 인용문에 적절하게 부합하는 사건이 <데일리메일>지의 사례다. 세계 제1차 대전 발발 이듬해인 1915년 5월에 다른 언론이 영국의 연전연승을 보도하는 상황에서 <데일리메일> 신문만은 영국군이 실은 연전연패하고 있으며 그 원인은 포탄과 병기들이 너무 낡았고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 사이에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보도한다. 아스키스(Asquith) 내각과 육군 장관 키치너(Kitchener) 원수 및 군부의 보도협조 요청을 받아들인 다른 신문들은 일제히 <데일리메일>의 보도를 매국노의 짓으로 매도한다. 이에 시민들도 이 논조에 동조하여 <데일리메일>지를 불태우고 불매운동을 벌인다. 광고주도 외면하자 이 신문은 심각한 경영위기에 놓이고 문을 닫으려 한다. 이때 비스카운트 노스클리프(Viscount Northcliffe) 사장의 동생이 자신의 재산을 투여하여 돕는다. 이후 새로 들어선 로이드 조지(Lloyd George) 내각은 병기를 개선하는 등 패전 요인들을 바로잡아 나갔고 결국 전쟁은 연합군의 승리로 끝난다. 패전한 독일의 황제 빌헬름 2세는 “노스클리프의 신문 때문에 전쟁에서 졌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지금 두 언론사는 17개월 동안 취재와 광고탄압을 받으면서 <데일리메일>처럼 문을 닫을 위기에 있다. 밀이 잘 묘사한 대로, 두 언론사의 의견이 정당한 경우 종단은 과오를 버리고 진리를 따를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한다. 설혹 두 언론사의 의견이 그릇되었다 하더라도 종단은 허위와 삿됨과 싸움에서 진리를 좀 더 선명하게 드러내고 전파할 수 있는 이익을 상실한 것이다. 언론의 자유를 불편하게 생각하는 이들이나 집단은 그것으로 드러날 비리와 허위, 망상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대로 “등에가 쏘지 않는다면 누가 게으른 말을 깨우겠는가.” 열쇠구멍으로 방안을 훔쳐보던 아이가 계단의 발자국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도망가는 것처럼, 타자의 응시가 없다면 인간은 마음대로 타락할 것이다. ‘방일한 스님을 깨우는 등에’로서, ‘범계의 유혹을 견제하는 타자의 응시’로서 언론의 자유는 철저히 보장되어야 한다.

미국 예일대학의 토마스 에머슨(Thomas I. Emerson) 교수는 『표현 자유의 체계(The System of Freedom of Express』라는 책에서 표현의 자유가 네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고 보았다. 표현의 자유는 개인의 자기실현(self-fulfillment)을 도모하고, 진리를 발견하는 데 기여하며(truth-seeking enlightment),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여 사회 결정, 더 나아가 사회발전에 이바지하며(self-government), 다양한 의사를 표현하여 사회의 급격한 변화와 안정 사이에서 균형(safety valve)을 취하게 한다. 필자가 더 추가하면, 표현의 자유는 정부와 소속집단의 부패와 비리를 견제하고 정화하는 기능을 수행하며, 현재와 같은 디지털시대에서는 브리태니카 백과사전보다 위키피디아가 더 정확한 지식과 정보를 담고 있는 데서 잘 드러나듯, 집단지성을 통해 지혜에 이르게 한다. 그러기에 한 사람을 침묵하게 하는 것은 인류를 침묵하게 하는 것이자 인류가 기억과 성찰을 통해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봉쇄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종단이 승려들의 범계와 비리를 비판한 언론사를 탄압하는 것은 역사를 17세기 이전의 야만의 시대로 퇴행시키는 것이자 헌법을 부정하는 위헌 행위이다. 종단은 두 언론사에 대한 모든 탄압을 즉시 중단해야 한다. 부처님의 뜻을 따라 모든 언론의 자유를 철저히 보장하고 언론사와 어떤 밀실협상도 하지 않겠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천명해야 한다. 아울러, 표현의 자유와 정보의 접근권 등을 철저히 보장하고 이를 탄압하지 못하도록 종헌과 종법에 구체적으로 분명하게 명시해야 하며, 원로원은 이를 어겼을 시 바로 탄핵해야 한다.

그럴 때 종단은 다시 위의와 권위, 정당성을 획득하며, 승가는 청정성을 회복하기 시작할 것이며, 절을 떠난 신도들도 발길을 돌릴 것이다. 그의 이름을 딴 법학대학원이 있을 정도로 권위가 있는 미국의 연방대법관인 벤저민 카도조((Benjamin N. Cardozo)가 1937년 팔코 대 코네티컷 재판에서 판결한 대로 “표현의 자유는 다른 모든 자유의 모체이자 절대 필요한 조건”이다.

Ⅲ. 종단을 넘어, 한국 불교의 개혁 방향과 방안

1. 불교적 수행과 공론장의 종합

지금 두통이 걸린 사람에게 악마가 깃들었기 때문이라며 면죄부를 판매하거나 악마가 나가도록 머리에 구멍을 뚫는 행위가 효력을 상실하였듯, 근대는 계몽의 빛에 의하여 ‘주술의 정원’에서 벗어나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근대가 완성되기 전에 기독교를 비롯하여 여러 종교에서 근본주의 종교의 확대, 주술적 기도의 성행, IS의 테러에서 보듯 재주술화도 상당한 세를 얻고 있다.

지금 전체로서의 삶은 분열되었다. 대중들은 계몽의 빛이었던 합리성에 회의적인 시선을 보이고 있으며, 자본주의화와 산업화, 도시화로 인하여 공동체는 해체되고 의미와 연대적 삶을 상실한 채 각자도생의 무의미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생활 세계가 제도와 체계에 철저히 식민화함으로써, 권력(주권권력, 훈육권력, 생명권력)과 시장에 의해 의식은 물론 무의식마저 억압당하고 관리당하면서 대중들은 전체와 의미를 상실한 채 실존보다 소유를 지향하고 타자에 대한 공감과 연대보다 경쟁에 내몰리며 서로를 ‘주변인’으로 만들거나 ‘악마화’하고 있다.

탈종교화와 포스트 세속화 시대를 맞아 주류 종교에서 나름대로 대안을 모색하고 있지만, 대다수가 퇴행적이거나 종교의 본질을 망각하고 있다. 첫째, 근본주의의 심화다.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한 집단은 신앙의 위기를 맞아 종교의 교리에 더 집착하면서 이 교리에 어긋나는 이들을 타자로 철저히 배제하면서 동일성을 강화하고 신앙의례를 통하여 구심력을 확보하고 있다. 이것이 개신교가 탈종교의 흐름에서도 신도가 증가한 원인이다. 하지만, 이는 기독교가 근대화하면서, 다시 말해 세속화, 합리성, 시민사회, 과학화와 결합하면서 획득한 근대성을 상실하여 ‘재주술화’의 경향을 보이며, 특히 동일성을 강화하면서 이웃종교, 다른 민족, 여성에 대한 배제와 혐오, 폭력을 심화한다.

둘째, 영성종교화다. ‘사회적 영성’과 같은 경우는 예외이지만, 영성은 맥락을 제거하여 현실을 소거시키며, 깨달음과 구원을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며, 근대적이고 과학적인 영역마저 신비화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셋째, 포스트 세속화 시대를 맞아 종교는 3차 서비스산업으로 전락하여 명상과 치유 또한 상품이나 개인적 치유의 방편으로 이용되고 있다. 명상과 치유, 연등회, 수련회 등 종교 의례와 수행의 대중화는 대중들에게 종교의 저변을 넓히는 것 같지만, 이는 대중들이 종교를 이미지나 상품으로 소비하게 하여 불평등 등 대중들이 겪고 있는 진정한 고통을 임시방편으로 해소하게 하여 더욱 고착시킨다. 이는 종교의 저변을 넓히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종교의 본질이 아니라 피상적인 이미지로 소비하도록 이끌고 ‘종교적인 것’을 상품화하여 시장체제로 편입한다. 이에 종교는 의미와 실존, 공동체와 연대, 구원/구제라는 본래의 가치를 상실하였다.

이에 세속화로부터 상실한 것을 복원하고 치유하는 포스트세속화, 종교와 공론장 사이의 변증법적 종합이 필요하다. 이에 재가불자 지도자는 종교를 공론장에서 억압만 할 것이 아니라 의미의 원천으로서 시민사회의 담론으로 구성하고, 대신 종교는 공론장으로 들어와서 ‘이성적’이기 위해서는 “타인의 종교를 인정하고, 세계와 관련된 지식에 관한 한 과학의 권위를 인정하고, 세속적 권위에 기초하고 있는 헌법국가를 인정하는 삼중의 반성을 수행하고”, 더 나아가 자본주의/신자유주의 체제에 포섭되거나 그 탐욕과 경쟁심, 이기심을 내면화한 삶을 성찰하고 이를 극복하는 지향을 해야 한다.

이에 승/재가 모두 내재적 초월과 입전수수(入廛垂手)의 화쟁이 필요하다. 승려들은 절 안에서 삼독을 지멸하는 수행을 통하여 내재적 초월, 깨달음, 열반을 지향해야 하며, 절 밖의 중생의 고통을 외면하지 말고 이에 공감하여 입전수수라는 말대로 다시 사회로 들어와 중생구제를 수행하여야 하며, 이럴 때 시민으로서 각성이 필요하다. 재가불자 또한 공공영역에서 시민주체로서 삶을 영위하되, 깨달음과 열반을 지향해야 한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절이나 모이는 광장이나 마당을 시장과 신자유주의 체제가 포섭하지 못하는 의미와 지혜, 윤리와 덕성의 원천으로서 수행 공동체인 동시에 공론장으로 만들어야 한다. 승/재가자들은 절이나 마당에서 자신의 탐욕과 경쟁심, 이기심을 지멸하는 성찰과 수행을 행하고 깨달음과 열반을 지향하며, 동시에 타인에 대한 공감/자비와 연대를 바탕으로 탐욕스런 세계에 저항하는 공론장을 형성해야 한다.

우리는 근대의 종점에 서서 이를 성찰하며 탈근대의 길찾기를 행하고 있다. 길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길이 있다. 중세, 근대, 탈근대의 실타래들은 서로 얽혀 있다. 그럼에도 그 주체가 각성한 시민이어야 함은 명확하다. 어느 한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모든 대립과 갈등을 아우르며 대대적으로 새로운 지평을 여는 화쟁의 방편이야 함도 분명하다.

필자는 개인의 도덕적 자율성과 주체성을 억압하고 신의 복종을 강요하는 신앙, “신자의 마음이 아니라 외부의 명령에서 온 신앙”, 돈의 힘에 굴복한 물신 종교, 권력과 유착관계를 맺은 정치 종교, 성직자와 수행자가 모든 것을 독점한 권위 종교, 세상과 소통하지 않는 자폐 종교, 주술의 정원에 머물고 있는 퇴행 종교, 이웃종교의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 독단 종교를 성찰하고 거부한다. 대신, 우리는 사랑과 자비가 모든 사고와 신행, 사회적 실천의 동력이 되는 자비와 사랑의 종교, 자본/권력과 창조적 긴장관계를 유지하는 자율 종교, 돈과 권력보다 가르침과 깨달음을 더 앞세우는 깨달음의 종교, 시민사회 및 공론장과 결합한 합리성의 종교, 구성원 모두가 평등하고 긴밀하게 연대하는 공동체의 종교, 이웃 종교의 진리를 인정하고 늘 새로운 해석을 허용하는 열린 종교를 추구하며 이를 구현하기 위한 길에 나선다.

과학과 대량학살, 인공지능과 생명복제가 신을 회의하게 만드는 탈종교화와 포스트세속화의 시대에서도 ‘내재적 초월’로서, ‘타자성과 의미의 원천과 힘’으로서 불교는 필요하다. 소욕지족의 눈부처-주체들이 서로를 자유롭게 하고 깨닫게 하는 연대와 공동체를 구성하여 내 안의 탐진치와 탐욕스런 세계를 모두 혁파하는 마당으로서 절은 필요하다.

2. 시민사회의 형성

아직도 한국 불교는 중세적 봉건성과 주술성이 극복되지 않았다. 미신적인 점복과 기복적 신앙이 자리하고, 절집은 전근대적이고 가부장적인 권위와 질서, 전통이 지배한다. 시민사회는 절의 안과 밖 모두에서 조직되지 않았다. 주권자로서 각성한 시민들이 촛불을 들 때 스님들 절대 다수가 침묵하거나 방관하였다. 폭행을 당한 비구니 스님이 증언하려 하지 않아 비구 스님의 폭력을 고발하지 못하는 사례가 9할이 넘는다.

반면에, 유럽에서 근대는 신성과 교회에서 벗어나 공공영역을 형성하고 이곳에서 공론을 형성하며 시민사회를 구성하고 조직화하는 과정이었다. “세속화는 초시간적인 것에 의존하는 종교와 연관된 이전의 신앙 중심의 삶의 양식을 해체하고 세계 내 존재인 인간 이성에 기초한 삶으로의 변화를 의미하게 되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국가와 종교의 분리, 공적 담론에서 신성보다 이성과 과학에 의한 검증과 논증, 종교적 상징과 교리의 초월성의 박탈과 세계 내적 문화현상으로의 해석, 예술에서 신(성)의 종속에서 탈출, 부당하고 부조리한 것에 대한 비판과 저항을 의미하였다. 기독교는 근대의 주요 흐름-세속화, 합리성, 시민사회, 과학화-과 결합하여 중세보다는 못하지만 나름의 영역과 위상을 누리고 있고 헤게모니를 형성하고 있다. 종교의 권위와 권력을 국가에 양도하고 교회를 시장 바깥에 자리매김하였으며, 합리성과 결합하여 교리를 ‘근대적으로’ 재해석하였으며, 시민사회의 공공영역을 끌어와 교회를 민주화하고 공공화하였으며, 과학과 부합하지 않는 교리를 폐기하거나 주변화하였다.

하지만, 한국사회는 서구화와 기독교화가 근대화로 대체되었으며, 불교는 ‘일제에 의하여 만들어진 전통’을 실제 전통으로 착각하며 이에서 탈피하지 못한 채 중세적이고 가부장적인 봉건성과 권위적인 질서를 답습하고 있으며, 승려와 재가불자는 시민적 주체를 형성하지 못하였다. 촛불에서도 주권자로 각성한 시민이 있었지만 시민사회의 조직화나 정치적 주체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붓다는 마지막에서 세 번 째 가르침으로 “아난아, 너 스스로를 너의 섬으로 삼고, 또 그 누구도 아닌 너 자신을 너의 의지처로 삼아서 살아라. 법을 너의 섬으로 삼고, 법을 너의 의지처로 삼아라. 그밖의 어느 것도 너의 의지처가 아니다.”라 했다. 임제 선사는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을 외쳤다. 이의 뜻은 더 심오하지만, 이를 근대적 주체와 연관하여 해석하는 것도 그리 비약은 아니다.

재가불자 지도자들은 시민으로서 절과 일터, 마을과 학교에서 공론장으로서 광장을 건설해야 한다. 그곳에서 “성찰이 없는 과거는 미래가 된다”라는 생각으로 종단의 차원에서 자기가 소속한 집단의 차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잘못된 전통과 적폐를 조사하고 이를 청산하는 방안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 역사와 전통으로서, 소망실현으로서 기복 불교까지 부정할 것은 없다. 하지만, 혹세무민과 중세적 주술성은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 권력 및 자본과 창조적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과학 및 합리성과 결합하지 못하는 불교 교리는 과감히 폐기하거나 수정하여야 하며, 시민사회의 공공영역을 끌어와 절을 민주화하고 공공화하여야 한다. 모든 갑들은 권력을 부리지 말고 아랫사람을 섬기고 모든 을들은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는 것을 삶의 지표로 삼고 실천하고 그럴 수 있도록 제도화하여야 한다. 곳곳에 사찰운영위원회 등 시민자치 조직을 구성하여 아래로부터 협치(governance)를 통하여 권력을 견제하고 정책을 결정하고 가치를 분배하는 데 참여하는 정치적 주체로 나서야 한다. 주지나 비구 독점체제를 깨고 4부대중이 모두 평등한 청정 승가 공동체를 구현하는 제도와 청규, 삶과 문화를 만드는 데 앞장서야 한다.

3. 눈부처 주체로서 시민보살

시민보살이란 자등명 법등명(自燈明法燈明)과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을 21세기의 맥락과 부합하여 해석하고 실천하는 자로 유마거사처럼 중생의 고통을 자신의 병처럼 아파하고 이에 동체대비심으로 공감하고 연대하는 자이자 시민주체로서 자기 앞의 실상을 직시하고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자세로 그 모순을 비판하고 이에 맞서서 저항하며 자신의 세계를 창조하며 스스로도 거듭나는 자이다.

시민보살은 자신의 의지대로 세계를 해석하고 실천하는 주체성만 확보해서는 안 된다. “주체가 동일성에 사로잡히면, 타자를 배제하고 폭력을 강화하며 동일성을 강화하려는 속성을 지닌다. 근대가 이성과 상식이 가장 증대된 사회임에도 대량학살이 끊임이 없이 일어난 것은, 한나 아렌트의 ‘평범한 악’이나 스탠리 밀그램의 ‘권위에 대한 복종’만이 아니다. 백인 아이에게는 자비로운 유럽인이 마야나 잉카족의 아이는 별 죄책감이 없이 죽이고 대량학살 이전에는 대상자들을 타자로 구분하는 혐오발언(hate speech)이 선행하는 데서 잘 나타나듯, 근본 이유는 ‘유색인, 이교도, 장애인’ 등으로 타자를 설정하고 이를 배제하고 폭력을 가하면서 동일성을 강화한 때문이다. 이에 주체의 동일성을 해체하는 차이와 타자성의 사유가 필요하며, 이를 매개하는 것이 바로 공감과 자비다.”

필자는 21세기의 맥락에 부합하고 동일성을 해체하는 새로운 불자상으로 눈부처-주체를 내세운다. 이 세계의 의미를 올바로 파악하고 그 모순과 부조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성과 주체가 필요하다. 하지만, 20세기에 주체는 동일성에 포섭되어 타자에 대한 배제와 폭력을 자행하였으며, 이성은 도구화하였다. 이에 비판적이고 계몽적인 이성을 가지고 사고하고 실천하는 주체인 동시에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여 상생하고 연대하며 그의 구원을 통하여 주체를 완성하는 ‘눈부처-주체’를 대안의 사유로 제시한다.

눈부처는 원효의 화쟁사상을 중심으로 들뢰즈의 차이(difference)와 레비나스의 타자성(alterity)을 종합하여 필자가 창안한 개념이다. 눈부처의 사전적 의미는 두 사람이 서로 똑바로 마주 볼 때 상대방의 눈동자에 맺힌 내 모습을 가리킨다. 이의 심층 의미는 첫째, 주/객의 이분법을 해체하는 대대(待對)다. 눈부처는 상대방의 몸에 새겨진 내 이미지다. 상대방의 눈부처를 보는 순간에 내 눈동자에도 상대방이 담겨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를 서로 바라보는 순간 주체와 객체, 너와 나의 이분법이 해체되고 상대방을 내 안에 서로 모시는 대대적 관계를 형성한다.

둘째, 내 안의 불성(佛性)과 타인 안의 불성의 서로 드러남이다. 인간은 세계의 의미를 해석하고 실천하고 세계의 부조리에 맞서서 세계내존재나 단독자로서 실존하는 존재이자 서로 영향을 미치고 조건과 인과를 형성하면서 서로를 생성하는 상호 생성자(inter-becoming)다. 상대방에게 폭력을 행하러 간 사람이라 할지라도 눈부처를 보는 순간 멈출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처럼 눈부처는 내 마음 속에서 타인과 공존하고 섬기려는 불성이 드러난 것이다.

셋째, 동일성에 포획되거나 환원되지 않는 ‘차이 그 자체’다. 내가 동남아 노동자를 타자로 설정하고 차별하는 것이 동일성의 사유와 실천이라면, 그들을 한국인과 똑같이 존엄한 존재로 포용하고 똘레랑스로 대하는 것은 차이의 사유와 실천이다. 하지만, 이것이 눈부처의 차이, 혹은 차이 그 자체는 아니다. 그들에게서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가 죽은 내 삼촌을 발견하고, 나 자신에게서 일하다 손가락을 잘렸는데도 불법체류 외국인으로 신고하여 한 푼도 보상하지 않고 추방한 한국의 악덕 기업주를 발견하여 동체대비심이 일어나는 순간에 그 차이에 이르는 것이다. 이처럼 나와 타자 사이의 진정한 차이와 내 안의 타자, 타자 안의 나를 발견하고서 자신의 동일성을 완전히 버리고 타자와 공감과 자비, 더 나아가 타자와 연대와 구원을 통해 나를 완성하는 것이 눈부처의 차이다. 눈부처의 차이의 사유로 바라보면, 이것과 저것의 구분이 무너지며 그 사이에 내재하는 권력, 타자에 대한 배제와 폭력의 담론은 서서히 힘을 상실한다. 타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타자와 내가 깊은 연관관계 속에 있음을 깨닫고 타자를 보듬고 그를 자신의 몸과 마음에 품는 길이 바로 자신이 완성되는 길임을 깨닫는다. 그처럼 진정으로 타자를 사랑하는 이는 그에게서 신의 모습을 발견하며, 그 순간 그도 신이 된다.

눈부처-주체는 세 가지 자유를 구현한다. 눈부처주체는 세 가지 자유, 곧 소극적 자유, 적극적 자유, 대자적 자유를 추구한다. 소극적 자유(freedom from)는 모든 구속과 억압, 무명(無明), 탐욕, 화에서 벗어나 외부의 장애나 제약을 받지 않은 채 생명으로서 생의 환희를 몸과 마음이 가는 대로 누리면서 자신의 목적을 구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적극적 자유(freedom to)는 수행과 노동, 학문도야를 통하여 자기 앞의 세계를 올바로 인식하고 판단하고 해석하면서 모든 장애와 소외를 극복하고 세계의 부조리에 맞서며 자신의 의지와 목적대로 개조하고 팔정도를 실천하면서 진정한 자기를 발견하는 동시에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을 뜻한다. 대자적 자유(freedom for)는 자신이 타자와 사회관계 속에서 밀접하게 관련된 사회적이고 연기적인 존재임을 깨닫고 타자의 아픔에 공감하고 연대하여 타자를 더 자유롭게 하여 내 자신이 자유로워질 때 환희심에 이르는 경지이다.

이처럼, 눈부처-주체는 이 세계를 올바로 인식하고 판단하고, 자신의 지향성에 따라 의미를 구성하고 이 의미를 따라 실천하며 결단하는 자이자, 내 안의 탐진치를 지멸할 뿐 아니라 타자와 나의 연기를 깨닫고 그의 아픔에 공감하고 연대하여 그를 자유롭게 하여 자신의 본성과 자유를 완성하는 존재를 뜻한다. 재가불자 지도자들은 눈부처-주체가 되어 중생은 물론 이웃종교인 까지도 동체대비의 자비심을 가지고 대하고, 그들을 구제하는 그 순간에 자신도 본래면목과 불성을 보는 자로 거듭나야 한다.

4.지역의 마을공동체로서 절

21세기 오늘 ‘출가(出家)’란 무엇인가. 스님들이 집을 떠나 절에 머물지만, 끊임없이 신도를 만나 대중과 다름 없는 일상을 영위하고 절 안에 가족적이고 가부장적인 위계질서와 권력관계를 만들고 문중이라는 새로운 가족질서로 들어간다. 오프-라인으로 세속을 떠났다 하더라도 온라인으로는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매개로 세속에 있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구제해야 할 대중들은 물화와 소외, 경쟁과 이기심, 기복과 입신양명, 개인의 쾌락과 행복만을 추구하며 탐진치의 삼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승려의 생활세계 또한 신자유주의 체제에 포섭되어 승려 또한 신자유주의적 탐욕과 경쟁심을 내면화하면서 승가공동체는 붕괴되고 각자도생이 만연하고 있다. “탈근대에 종교의 사사화와 함께 승려/신도의 관계가 스타/팬 또는 서비스 제공자/소비자의 관계로 전환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승려들이 예외적 초월자로 세계 바깥에서 수행에만 전념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지금 한국의 절은 대다수가 지역사회로부터 고립되어 있다. 한국의 절은 지역사회와 소통하지 않는 자폐 종교, 주술의 정원에 머물고 있는 퇴행 종교를 답습하고 있다. 지역의 신도가 온다고 하더라도 중세 사회의 잔재인 의례와 법문만을 되풀이하여 지역의 주민들이 ‘지금 여기에서’ 겪고 있는 고통에 응답하지 못하고 있다.

절은 지역의 주민들이 언제든 와서 쉬고 명상과 수행을 하는 쉼터와 수행처가 되어야 한다. 스님은 지역주민들로부터 존경받는 지도자의 위상을 가져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그들의 무지를 깨고 지혜를 불어넣어 주고 분노와 한을 어루만져주고 탐욕을 절제하는 가르침과 수행을 이끌어야 하며, 더 나아가 그들의 내적 고통만이 아니라 외적 고통을 없애는 실천가여야 한다. 승/재가불자들은 돈과 권력보다 가르침과 깨달음을 더 앞세우고 지역주민의 내적/외적 고통을 내 것처럼 아파하고 연대하며 중생구제를 실천하며, 절은 시민단체와 마을 공동체를 겸한 마당이 되어야 한다.

5. 네 바퀴로 가는 불교

지금 한국 불교는 외바퀴로 달리고 있다. 만해와 같은 큰스님이 있을 때는 외바퀴 질주도 볼만 했지만, 제대로 달리는 스님은 볼 수 없다. 목적지도 깨달음이나 열반이 아니라 룸쌀롱과 도박장인 외바퀴도 많다. 그나마 행자 수료자는 한 해 200여 명에 그쳐 외바퀴 운전자는 자연스레 사라질 위기에 있다. 이제 비구 독점 체제를 깨고 사부대중이 함께 해야 한다. 절의 운영, 재정, 교육, 수행에 사부대중이 공히 함께 해야 하며, 법사에게 승려들의 권한과 직무를 상당 부분 위임해야 한다.

6. 교리의 재해석

불교 교리는 아직도 붓다의 시대에 맞추어져 있으며 텍스트 해석과 논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제 21세기 오늘의 맥락에서 재해석되어야 한다.

불교 경전은 여러 시대에 걸쳐 각기 다른 관점과 주체에 의해 기록되거나 편찬되고 붓다가 상대방의 근기(根機)에 맞추어 가르침을 달리 하는 대기설법(對機說法)을 취하였기에 경전끼리도 견해가 맞서며, 2500년 전 인도의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21세기 오늘 중생들이 마주친 현실에 어긋나는 것도 많다. 필자는 세 가지 원칙-첫째, 연기의 원리에 부합되는가, 둘째, 과학적 원리 및 사실과 마주치지 않는가, 셋째,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의 목표와 합치하는가-에 따르되, 맥락화와 재맥락화, 곧 경전을 텍스트화하는 것을 지양하여 붓다가 말씀을 설하던 맥락에서 해석한 후에 이를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맥락으로 대체하여 양자의 해석을 오고가면서 재해석하는 방식을 택한다.

1) 깨달음 지상주의에서 사회적 깨달음과 보살행으로

주지하듯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다. 깨달아서 부처가 되는 것이 불교적 인간관의 목표이기도 하다. 붓다를 따르는 이로서 이보다 더 중요한 담론은 없을 것이다. 더구나 조계종은 간화선을 종지로 한다.

깨달음의 가장 원초적인 모습을 보기 위해 초기경전을 보면, <전법륜경>에서 붓다는 (사성제라는 진리를 통해)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眼]이 생겼다. 지혜[智]가 생겼다. 통찰지[慧]가 생겼다.”라고 말한다. 마성스님이 지적한 대로, 석가는 “앗삿타(assattha) 나무 아래에서 명상하다가 드디어 ‘위없는 바른 깨달음’(anuttara sammāsambodhi, 無上正等覺)을 얻어 붓다, 즉 각자(覺者)가 되었으며, 이 사성제를 실현해 나가는 과정은 사다리를 타고 위로 올라가는 것에 비유하고 있다.” 이에 임승택 교수는 “사성제를 내용으로 하는 깨달음의 경지는 결코 현실과 유리된 초월적 상태가 아니다. 이것은 붓다의 가르침과 행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붓다가 이룬 사성제의 깨달음이란 일상에서 출발하여 한 걸음 한 걸음 실현하여 완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결코 단박에 성취하였던 것이 아니며 또한 성취하고 나면 그만인 그러한 경지도 아니다. 그것은 탐욕과 집착이 남아있는 한에서 끊임없이 닦아나가야 할 과제로 제시되는 그러한 경지라고 할 수 있다.”라고 지적한다.

『마하박가』에서 묘사하고 있는 아라한의 깨달음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비구들이여, 여래가 원만히 잘 깨달았고, 눈을 뜨게 하고 앎을 일으키고, 고요함과 수승한 앎과 바른 깨달음과 열반에 도움이 되는 중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八正道]를 말하는 것이니,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다. … 비구들이여, 여기에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성스러운 도제(道諦)가 있다. 곧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을 말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것이 성스러운 고제이다’라는 예전에 결코 들어보지 못한 법에 눈을 떴고 지혜가 일어났고 앎이 일어났고 광명이 일어났다.”

『디가 니까야』의 「대반열반경(Mahāparinibbāna-sutta)」에 의하면, “계(戒)가 실천되었을 때, 정(定)의 큰 이익과 과보가 있다. 정이 실천되었을 때, 혜(慧)의 큰 이익과 과보가 있다. 혜가 실천되었을 때, 마음은 번뇌, 즉 욕루(欲漏, kammāsava)․유루(有漏, bhavāsavā)․견루(見漏, diṭṭhāsavā)․무명루(無明漏, avijāsavā)로부터 해탈하게 된다.”고 했다. 그러니, 계율을 지키고 팔정도를 행해야만 깨달음에 이를 수 있으며, 설혹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삼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깨달은 것이 아니다. 깨달은 자의 궁극의 목적은 열반의 증득에 있기 때문이다.

우선 지혜로써 모든 경계를 파악하여 온갖 사념과 망상을 떨쳐버리고 나쁜 욕망을 멈추는 지행(止行), 세계와 타자와 나 사이의 관계를 통찰하는 관행(觀行)을 쌍으로 부려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전제다. 지와 관을 통하여, 임계치 이상의 물리적 충격을 받은 물질이 배열 구조가 바뀌어 화학변화를 일으키는 것처럼, 나의 마음과 몸이 임계점을 넘어 재배열되어 전혀 다른 체계로 거듭나야 깨달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소승의 깨달음이란 원래 깨달을 수 있는 바탕을 지니고 있는 인간이 어떤 계기를 통해 연기(緣起)와 무아(無我), 공(空)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고 탐욕과 어리석음과 성냄을 완전히 소멸시키고 자신의 두뇌의 신경세포와 몸 안에 간직된 온갖 경험과 기억과 의식, 마나스식과 알라야식에 있는 모든 종자와 인자를 찰나적으로 재배열하여 자신의 존재를 전혀 다른 존재로 거듭나게 하고, 악의 종자(種子)를 모두 거두어내고 선의 종자만이 의식과 실천으로 작용하게 하면서 업(業)에서 벗어나고, 이 존재가 새로운 지평에서 진여실제(眞如實際)에 다가가는 것으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자유롭고 평안한 상태에 이른 경지다.

하지만, 연기를 아는 것이 바로 지혜다. 연기론은 나와 타인이 서로 원인과 조건으로 작용하고 의존하면서 서로 생성하는 존재로 인식하도록 이끈다. “서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서로를 말미암아 생명이 활동한다는 연기의 법칙이 ‘사실의 판단’이라면, 필연적으로 ‘사이좋게’ 지내야 하는 것은 ‘가치의 판단이다.” 한 개인만 생각하면 삼독을 멸하는 것으로 깨달음에 이를 수 있지만, 고통 받는 중생에 대한 자비심은 중생의 삼독을 멸하고 함께 깨달음에 이르라고 말한다.

불교를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 곧 위로는 깨달음을 얻어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다. 세친보살은 『불성론(佛性論)』에서 “지혜로 말미암아 나에 대한 애착은 버리고 큰 자비로 말미암아 타인에 대한 사랑은 일어나게 한다. 지혜로 말미암아 범부의 집착은 버리고, 큰 자비로 말미암아 이승(二乘)의 집착을 버린다. 지혜로 말미암아 열반을 버리지 않고, 자비로 말미암아 생사를 버리지 않는다. 지혜로 말미암아 불법을 이루며, 큰 자비로 말미암아 중생을 성숙하게 한다.”라고 하였다. 지혜가 있기에 모든 집착과 삼독의 원인인 나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만, 고통 받는 중생에 대한 자비로 말미암아 중생에 대한 사랑은 늘 솟아나게 한다. 범부가 갖는 집착이 모든 고통의 원인이므로 이를 지멸(止滅)하지만, 큰 자비가 있기에 이승(二乘)만을 방편으로 삼는 집착 또한 버린다. 열반은 탐욕과 어리석음과 분노를 없애야 달성되는 것이다. 하지만, 열반에 이르려는 마음 또한 욕망이다. 이 모순을 해결하는 길은 중생을 구제할 때까지는 방편으로서 삼독(三毒)을 인정하는 것이다. 지혜가 있기에 모든 번민에서 벗어나 불법을 이루려 하지만, 자비가 있기에 설혹 불법을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이를 미루고 중생을 깨닫게 하는 일에 머문다.

『유마경』의 「문수사리의 병문안품」은 “‘어리석음과 집착과 탐심으로부터 저의 병이 생겼습니다. 모든 중생이 아프다면, 저 역시 아픕니다. … 왜냐 하면, 보살은 중생을 위해 생사(生死)에 들어섰으니, 생사가 있는 곳에 병이 있기 마련입니다.’ ‘제가 아픈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셨지요? 보살이 아픈 것은 큰 자비[大悲]로 인하여 생긴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아픔의 원인은 어리석음과 집착과 탐심, 그리고 대비 때문이다. 중생은 어리석음과 집착과 탐심으로 인하여 병을 얻지만, 보살은 중생의 아픔에 대한 대비 때문에 병이 생긴다. 보살은 중생이 아프면, 보살은 외아들처럼 중생을 사랑하기에 마치 자신의 외아들이 아픈 것과 같이 아프다. 이 아픔 때문에 열반에 이르렀어도 이를 미루고 생사에 머물 수밖에 없다. 그가 병이 나아야 자신도 모든 아픔에서 벗어난다.

불교는 지금 여기에서 고통 받는 중생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수행의 목적은 깨달음이 아니라 열반이다. “불교의 수행은 깨달은 내용을 실천하기 위한 수행이고, 부처로서 살기 위한 수행이고, 열반을 완성하기 위한 수행이어야 하”며,. 그 열반은 나만의 열반을 의미하지 않는다. 중생들이 화탕지옥과 같은 세상에서 무진장의 고통을 겪고 있는데, 선방에서 나홀로 정진하며 평안하면 깨달은 것인가.

원효는 진속불이(眞俗不二)론을 편다. 유리창의 먼지만 닦아내면 맑고 푸른 하늘이 드러나듯, 모든 사람의 미혹하고 망령된 마음만 닦아내면 그들 마음속에 있는 부처가 저절로 드러난다. 깨달음과 해탈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원래 깨달을 수 있는 바탕을 지니고 있는 인간이 어떤 계기로 세계를 새롭게 인식하고 자신을 전혀 다른 존재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리 깨달아 부처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중생이 고통에 있는 한 나는 아직 부처가 아니다. 고통과 무명 속에 있는 중생을 열반으로 이끄는 그 순간에 나 또한 열반에 이르러 진정 부처가 된다.

중생이 고통 속에 있는 한, 설령 깨달았더라도 나는 아직 부처가 아니니, 먼저 깨달은 자는 항상 큰 자비로써 고통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중생의 의혹을 제거하고 삿된 집착을 버리게 하여 그들을 깨달음에 이르도록 한다. 그럴 때 나 또한 진정한 깨달음의 세계에 이를 수 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우주 삼라만상의 모든 존재가 나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지혜이고 그를 위하여 그리로 가 그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고통을 없애주는 것이 바로 자비행이다.

티베트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교과서인 <보리도차제론>을 보면, “수행에는 3단계가 있다. 그것은 하사도 중사도 상사도(下士道 中士道 上士道)인데, 마치 3층 건물을 짓는 것과도 같다. 1층이 보시 지계 인욕 정진이고, 2층이 선정이고, 3층이 반야지혜와 보살행이다.” 1층이 없이는 2층이 있을 수 없는데 지계를 하지 않은 사람이 선정에 이를 수 없다. 또 깨달음에 이르렀더라도 그것은 2층에 머무는 것이다. 보살행을 하여야 완성에 이르는 것이다. 계율을 지키지 않고 자비의 보살행을 행하지 않는 곳에 깨달음은 없다. 있다면 그것은 망상일 뿐이다.

결론적으로, 지혜를 통하여 모든 존재의 공성과 연기성, 인무아와 법무아를 깨닫는다 하더라도 자비의 방편으로 중생의 고통에 공감하고 자비행을 행하면서 계율을 지키고 팔정도를 행하며 삼독을 멸하여 열반에 이르며, 삼독을 멸하여 열반에 이르고 중생에 대한 자비행을 행한다 하더라도 모든 존재의 공성, 연기성, 인무아와 법무아에 대한 지혜를 잃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부처답게 사는 길이다.

그러니 대승의 깨달음이란, 연기와 공, 무아에 대해 전혀 다른 차원으로 새롭게 깨달아 거듭난 존재가 세상과 자연과 뭇 생명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인식하고 그들의 고통을 덜기 위하여 자신의 욕망을 자발적으로 절제하고 선한 욕망과 자유의지, 깨달음의 지향성 등을 억압하거나 왜곡하는 것에 대해서는 저항하면서 알라야식의 종자들을 마음대로 부려 청정한 불성으로 돌아가서 선한 종자들이 타인의 마음 속에서도 싹을 틔우게 하여 그들을 부처로 만들고 그로 인해 내가 부처가 되는 것이다. 타자를 구원하거나 계몽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 속에 숨어 있는 불성을 드러내며, 이 순간 나 또한 부처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기에 참된 깨달음이란 내가 그리로 가 그를 완성시키고 그를 통해 다시 나를 완성하는 행위다. 이때 이 행위가 윤리적인 당위를 넘어서려면 자기를 비우고 중생을 붓다처럼 섬기며 중생의 삶에 전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그들과 뒹굴며 그들과 함께 슬퍼하고 기뻐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붓다의 삶이자 자타가 열반에 이르는 진정한 깨달음의 길이다.

한마디로 말하여, “부처로 살면 부처이다.(佛行是佛)” 참된 깨달음이란 이 세계의 연기와 공성에 대해 전적으로 이해한 바탕에서, 자신의 두뇌의 신경세포와 몸 안에 간직된 온갖 경험과 기억과 의식, 마나스식과 알라야식에 있는 모든 종자와 인자를 찰나적으로 재배열하여 자신의 존재를 전혀 다른 존재로 거듭나게 하여 악의 종자(種子)를 모두 거두어내고 선의 종자만이 의식과 실천으로 작용하게 하면서 업(業)에서 벗어나고, 이 존재가 새로운 지평에서 진여실제(眞如實際)에 다가가는 것으로, 모든 집착과 탐욕을 멸하고 모든 억압과 구속에서 벗어나는 소극적 해탈, 노동과 창조를 통하여 진정한 자기실현을 하거나 수행을 통하여 연기와 공성을 이해하고 인무아(pudgala-nairātmya, 人無我)와 법무아(dharma-nairātmya, 法無我)를 성취하는 적극적 해탈, 타자를 구제하여 내가 해탈이 되는 대자적 해탈을 모두 쟁취하고 종합하는 것이자 타자를 깨닫게/자유롭게 하여 내가 깨닫는/자유롭게 되어 열반의 환희심에 이르는 것이다.

생명이 집단적으로 죽어가고 불평등이 극심해진 현 상황에서는 ‘가난한 자를 위한 편애적 선택(the preferential option for the poor)’(가톨릭 사회교리서)에 더하여 ‘가난한 생명을 위한 편애적 해석과 자비적 실천(the preferential interpretation and compassionate practice for the poor lives)’이 필요하다. 엘리 위젤(Elie Wiesel)의 지적대로, 아픈 곳이 내 몸의 중심이자 세상의 중심이다. 우리 몸의 중심은 배꼽도, 머리도, 심장도 아니다. 가장 아픈 곳이다. 손가락을 조금만 다쳐도 온 정신이 그리 쏠리고, 백혈구와 산소와 영양분과 복원 세포가 그리로 모여 세균을 퇴치하고 새살이 돋게 하고 결국 몸을 치유한다. 그렇듯,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세월호 유가족, 이주노동자가 있는 자리가 내 몸과 이 나라의 중심이다. 그들을 구원할 때 이 나라 또한 건전한 세상으로 바뀌는 것이다. “목자가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설 때 나머지 아흔 아홉 마리의 양들이 서운해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도 길을 잃으면 그러리라 생각하고 안도감과 고마움을 느끼는 것처럼, 고통 속에 있는 한 사람을 ‘우선적’으로 사랑할 때 아흔 아홉 사람의 ‘보편적’ 사랑도 받게 되는 것이다. … 그러므로 모든 종교인이 붙들고 씨름해야 할 가장 ‘중헌’ 화두는 하나다. “우리가 우선적으로 사랑해야 할 이 시대의 잃은 양은 누구인가”

2) 삼독의 지멸에서 자비로운 분노로

분노는 삼독의 하나로 지멸의 대상이다. “분노가 분노에 의해 사라지지 않으며 오로지 자비에 의해서만 사라진다는 것이 영원한 진리”라는 『법구경』의 가르침은 원칙적으로 타당하며 지켜져야 한다. 하지만, 테러리스트가 무고한 어린이를 무참히 살해하는 그 상황에서도 우리는 분노하지 않은 채 기도를 해야 하는가. 이에 대한 화쟁적 대안은 가능한가.

『대방편경』에서는 500명의 선원 중의 한 사람이 나머지 499명을 죽이고 그들이 가진 것을 빼앗으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선장이 세 차례나 그러지 말라고 그 선원을 설득했지만 실패하자 선장은 499명을 살리기 위하여 무기를 들고 그 선원을 죽인다, 그 선장이 바로 전생의 부처다.

이 경전의 가르침대로, 죽어가는 생명, 억압받고 수탈당하는 중생에 대한 자비심의 연장으로 발생하는 분노, 생명을 살리고 구성원의 분노를 줄이기 위하여 구조적 폭력이나 잘못된 국가와 세계 체제에 대한 분노는 정당하다. 단, ‘정의로운 분노’ 또한 상대편에서 보면 이데올로기일 수 있고 화쟁의 방편이 아니므로 자제해야 하며, 그 분노의 표출은 설득과 협상 등 평화적 방법이 무망한 상황에서 증오와 폭력이 없이 약자들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자비심이 동기인 경우에 한정하여 행해야 한다.

3) 개인적 고(苦)와 별업(別業) 중심에서 사회적 고(苦)와 공업(共業)의 종합으로

많은 이들이 불교를 개인적 치유와 해탈의 종교로 간주한다. 그동안 고(苦)를 개인적 고로만 국한하여 지멸의 대상으로 삼았다. 하지만, 『장아함경』에서 “때에 왕은 곧 좌우에 명령하여 그(도둑)를 묶게 하고 북을 치고 소리로 외쳐 모든 거리를 돌린 뒤 그를 싣고 성을 나가 넓은 들에서 죽였다.…이때부터 비로소 빈궁이 생기고 빈궁이 있은 끝에 비로소 강도가 생기고, 강도가 생긴 뒤에 비로소 무기가 생기고 무기가 생긴 끝에 비로소 살해가 생기고, 살해가 생긴 끝에 곧 안색이 초췌해지고 (사람의) 수명이 짧아졌다.”라고 말한다. 전륜성왕은 도둑을 잡아 가난 때문에 생긴 것이라며 창고의 물품을 내주었지만 이를 이용한 도둑이 생기자 그를 죽여 경계로 삼는다. 그 후에 가난 때문에 절도와 살해가 일어난다고 말하고 있다.

전륜성왕수행경은 이어서 말한다. “때에 성왕은 그 보당(寶幢)을 부수어 사문, 바라문과 온 나라 안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시하고 그런 후에 수염과 머리를 깎고 세 가지 법의(法衣)를 입고 집을 떠나 도를 닦고 위없는 행[無上行]을 닦아 현세에서 스스로 진리를 깨달아 나고 죽음을 이미 다하고 범행(梵行)이 이미 서고 해야 할 일을 이미 다 갖추어 후생의 목숨[後有]을 받지 않을 것이다.”

물론, 경전의 전체 내용의 핵심은 “汝等當勤修善行”, 곧 선행을 부지런히 닦으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가난이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회의 구조적 문제이고 이로 도둑, 살해 등이 일어난다는 인식이 깔려 있으며 전륜성왕이 보당을 부수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시하고 수행을 하여 열반에 이르고 있다고 끝맺고 있다. 이는 불교가 개인의 고(苦)만이 아니라 사회적 고(苦)에도 관심을 두었으며 열반이 개인의 수행만이 아니라 가난한 자에 대한 보시와 같은 선행을 종합하여야 한다고 해석할 여지가 있는 대목이다. 개인의 마음과 사회구조, 개인의 업[別業]과 공동의 업[共業], 개인의 윤리와 공동체 윤리는 서로 의존하며 작용한다. 이처럼 개인의 빈부가 별업에 따른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백성 가운데 가난하고 부유한 차이는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구조적 요인과 공업에 의한 것이다. 설혹 별업에 따른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가난한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열반에 이르는 길이다. 그러기에, “승가의 상호부조는 일정한 공양물을 함께 나누는 발우공양 사례에서 보듯이 그 실천이 수행의 방편이기 보다는 수행 그 자체다.”

“불교는 권력을 위한 파괴적인 투쟁을 단념한 사회, 평안과 평화가 정복과 패배를 극복한 사회, 무고한자에 대한 박해가 맹렬하게 비난받는 사회, 홀로 자기 정복을 한 자가 군사적·경제적 힘으로 수백만 명을 정복한 사람보다 더욱 존경받는 사회, 친절이 증오를, 선이 악을 정복하는 사회, 원한, 질투, 악의와 탐욕이 사람의 마음을 물들이지 않는 사회, 자비가 행동의 추진력이 되는 사회, 가장 작은 생명을 포함해서 모든 생명을 공정과 배려와 사랑으로 대하는 사회, 물질적으로 만족한 세계에 있으면서도 평화와 조화로운 삶이 가장 높고 고결한 목표인 궁극적인 진리, 니르바나의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사회를 창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4) 개체적 불살생에서 연기적 생명 구제의 길로

38억 년 동안 공존하며 진화해 온 생명체는 전례 없는 위기를 맞고 있다. 2017년 지금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위기에 있다. “1초 동안 0.6헥타아르의 열대우림이 파괴되고”, “하루에만 100여 종의 생물이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진다.” 국제자연보존연맹은 전 세계 과학자 1,700명이 참가하여 조사한 끝에 “44,838종의 대상 동식물 가운데 1.94%인 869종이 멸종되었으며, 38%인 16,928종이 멸종 위기에 놓였다고 발표했다.” 상당수 학자들은 오르도비스기-실루리아기 5차 대멸종에 이어서 6차 대멸종이 진행되고 있다고 경고한다.

한국 불교는 지극한 생명 존중의 전통과 역사를 가지고 있다. 승려들은 물속의 작은 생물도 죽이지 않고자 이를 거르는 여수낭을 가지고 다니며 물을 걸러 마셨다. 한국의 신라 시대의 법흥왕(재위: 514년∼540년), 성덕왕(재위: 702년∼737년), 백제 시대의 법왕(재위: 599년∼600년)은 모든 생명, 가축까지도 죽이지 말라는 교서를 내렸다.

미생물마저 죽이지 않으려는 이 정신은 지극히 숭고한 것으로 철저히 계승해야 한다. 하지만, 무조건적인 불살생은 가능하지 않으며 때에 따라 더 큰 죽음을 낳는다. 이에 필자는 자비심을 유지하는 조건에서 ‘개체적 불살생’에서 ‘연기적 불살생’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 모든 동물은 다른 생명체를 먹이로 취하여 물질대사를 통하여 이를 에너지로 전환해야만 삶이 유지되기에, 물질대사는 생명의 조건이므로 이를 거부하는 것은 생명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식물 또한 뇌는 아니지만, 죽음에 대해 나름대로 인지하고 반응하며 동물의 생존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우리는 실제 호흡하고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찰나의 순간에도 수 억의 미생물을 죽이고 있기 때문이다. 넷째, 한 마리의 딱정벌레가 죽으면 이를 다른 동물이 이를 먹고 알을 낳고 그 껍질에도 수 억 마리의 미생물이 깃들 듯, 자연의 순환 속에서 한 생명의 죽음은 다른 생명의 탄생과 생존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다섯째, 무엇보다도 모든 생명체는 자연 및 다른 생명체와 깊은 연관관계 속에 있기에 개별적 생명을 보존하려는 것이 더 많은 생명을 죽이는 ‘카이바브(Kaibab)의 역설’이 언제 어디서든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한 포기 풀에서 미생물로 가득한 바람에 이르기까지 생명성이 발현되는 소리와 움직임에 온몸의 감각을 활짝 열고 모든 생명이 나의 삶과 깊은 연관관계에 있으면서 역동적으로 서로 생성하고 있음을 깨닫고 자신과 생명의 본성에 대해 성찰하면서 다른 생명의 고통을 자신의 아픔처럼 아파하는 자비심을 가지고 연기적 공존을 깨지 않는 범위에서 다른 생명들의 삶과 죽음에 관여해야 한다.

Ⅵ. 불교개혁행동의 향후 운동 방향 -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수많은 종도들의 발원에도 불구하고 선거는 치러졌고 새로운 총무원장이 선출되었다. 설조스님이 40여 일을 단식하고 수많은 불자들이 그 더운 여름에 거리에서 종단개혁을 외쳤지만 요지부동이다. 지금 이 자리에 부처님께서 계신다면 무엇이라 하실까. 아마 “온 세상이 불타고 있다.”라고 말씀하셨으리라.

부처님께서 우루웰라 가야, 나디 등 까사빠 형제와 이들의 제자 천여 명을 교화하시고는 그들 모두와 함께 왕사성으로 가다가 가야시사에서 “수행자들이여, 온 세상이 불타고 있다. 온 세상이 불타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눈이 불타고 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불타고 있다.(…중략…) 무엇 때문에 불타고 있는가? 탐욕의 불이 타오르고 있다. 분노의 불이 타오르고 있다. 어리석음의 불이 타오르고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잡아함경』을 비롯하여 여러 경전에 나오는 말씀이다.

지금 조계종단은 활활 불타오르고 있는 화택(火宅)이다. 탐욕, 분노, 어리석음의 삼독(三毒)이 이 불의 연료다. 그럼에도 권승들은 삼독에 휩싸여 불난 집에서 뛰쳐나올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절이 자본주의의 탐욕에 맞서는 무소유과 공동체의 성지가 되어야 하거늘, 그들은 돈을 부처님보다 더 섬기며 더 많은 돈을 갖기 위하여 범계행위를 다반사로 한다. 사부대중의 평등함이 샹카의 바탕이거늘, 권력이 있어야 더 많은 돈을 획득한다며 더 큰 권력자에게 아부하고 약한 도반들은 깔아뭉갠다. 그리 얻은 돈으로 여인을 탐하고 수시로 도박을 한다. 그리고는 이를 지적하는 이들은 ‘해종’으로 낙인을 찍고 물리적, 구조적, 문화적 폭력을 행하며 ‘적반하장의 성냄’을 표출하고, 자기 편은 무조건 감싸고 다른 편은 철저히 배제하는 당동벌이(黨同伐異)에 몰두한다. 무엇보다도 종단의 가장 큰 위기의 핵심은 은처, 도박, 공금횡령, 폭행, 성폭력 등 권승들의 범계 및 비리 행위가 임계점을 넘어섰음에도 이를 감시하고 견제하는 장치가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설혹 오염물질이 들어온다 하더라도 물은 흐르면서 이온 작용, 미생물의 물질대사, 식물의 흡수 등으로 자연정화를 하여 맑음을 유지하거늘, 지금 종단에는 정화하는 시스템도, 사람도, 문화도 없다. 권승들은 진리와 허위,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은커녕, 극심한 범계를 해도, 불난 집 안에 있어도 모르는 심각한 어리석음에 빠져 있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맑은 불자들의 앞에는 크게 세 가지 길이 있다.

첫째, 종단 바깥에 청정한 불교, 청정한 승/재가 불자들로 이루어진 상카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이다. 재가종이든, 청정한 스님과 함께 하든 각각 단체의 이념에 따라 대안의 개혁불교를 세우는 것이다. 이것이 성공하려면 21세기의 포스트세속화 시대에 부합하는 교리의 재해석과 계율의 현대화를 수행함은 물론, 위로는 깨달음과 열반에 이르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하면서 청정함을 유지할 수 있는 수행법과 청규, 의례, 교육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이 노선에서 경계해야 할 것은 종단이탈주의에 기울어 분파로 귀결되는 것이다. 이는 종단의 권승들이 가장 바라는 바다. 이를 지양하려면 대만이 거사불교운동을 통하여 승려마저 청정하게 하고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불교를 수행하고 있는 점을 벤치마킹해야 한다.

둘째, 인디언들이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 기우제의 성공률이 100%인 것처럼, 종단이 어떻게 하든 관계없이 꾸준히 개혁운동을 전개하는 것이다. 이때 운동의 목표는 두 가지다. 하나는 전 총무원장을 정점으로 한 권승 카르텔의 해체다. 전 총무원장의 퇴출이 없는 한 권승 카르텔의 유지와 이들에 의한 범계와 비리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이를 위해 반선을 확고히 구축하고 반연대를 꾸려나가야 한다. 다른 하나는 수행과 재정의 분리, 직선제 등 종단을 근본적으로 개혁할 수 있는 개혁책을 제도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불교개혁행동에 들어온 단체와 회원 중심으로 대중을 기반으로 한 (가칭) 불교개혁신도회를 조직하고 청정한 승려, 시민사회단체와 연대한다. 지금의 한국 현실에서 냉철하게 돌아보아야 하는 것은 대다수의 승려들이 범계와 타락을 다반사로 하여 청정한 스님들이 극소수이며 승려들의 위의, 의식수준, 개혁에 대한 의지와 실천력이 바닥이어서 재가불자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실망감을 주지만 그들을 대안세력으로 만들지 않고서는 종단의 개혁이 불가능하다는 딜레마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려면 청정한 승려들을 교육하고 조직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계속 청정한 승려들과 소통하면서 함께 연대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가운데 공론장을 형성하여 개혁에 대한 공유, 교육, 조직화 방안, 운동의 전략과 전술에 대한 합의 등을 추진해야 한다. 아울러, 민변, 참여연대, 진보연대, 민교협, 전교조 등 시민단체와 연대를 더욱 돈독히 하여 종단개혁을 공론화하고 이들의 힘으로 종단을 압박하고 권승카르텔을 해체하고 전 총무원장을 비롯한 범계승려 퇴출운동을 지속적으로 수행한다.

불교개혁행동은 존속시키되, 정치운동, 언론 및 홍보운동, 담론운동, 교육운동 등 기능별로 체계화한다. 정치운동팀은 시민단체와 연대하여 청와대, 국회를 압박하여 사찰법 개정 등을 추진하고 안으로는 종회와 종단을 압박하여 종헌과 종법의 개정을 추진한다. 언론 및 홍보 운동팀은 교계신문과 일반 신문과 방송, SNS를 대상으로 끊임없이 종단의 적폐와 개혁방안에 대해 홍보, 잇슈투쟁, 아젠다셋팅 등을 전개한다. 담론운동팀은 불교개혁 씽크탱크를 만들고 불교개혁에 관련된 담론을 생산하고 이를 구체화하기 위한 정기 포럼을 수행한다. 교육운동팀은 종단과 별도로 청정한 불자, 시민보살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프로그램, 교과과정, 교재를 마련하고, 교육공간을 확보하여 교육을 수행한다. 이를 위한 전제는 각자 각 단체의 역사와 이념에 맞게 차이를 인정한 바탕 위에서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연대를 모색해야 하며, 승/재가 모두 공론장을 통해 주체로서 각성한 시민보살로 거듭나야 한다. 아울러 각 단체의 법회, 교육, 문화행사들을 불교개혁행동 전체 회원이 서로 공유하고 서로 참여하면서 공동의 법회를 추진한다.

셋째, 각 절 안에서 청정한 불자들이 연대하여 ‘내 절 청정하게 바꾸기 운동’을 수행하는 것이다. 상카의 전통인 갈마제를 풀뿌리 민주제와 결합하여 사부대중이 평등한 협치(協治, governance) 시스템을 정립하여, 절 안의 온갖 적폐를 청산하고 수행과 재정의 분리, 사방승가 정신에 부합한 승려 복지 체제 수립 등의 운동을 벌인다. 이를 위해 미투운동처럼 각성한 신자들이 단 두 명이라도 모이는 것부터 시작하여 ‘을들의 민주주의’ 깃발을 드는 것이 필요하다.

각자 자신의 신념과 근기에 맞게 이 세 운동을 수행하면서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하고 필요에 따라 연대한다면, 한국 불교의 개혁은 꿈에서 현실로 변할 것이다. 어느 운동을 하든 명심할 것은 내 안과 밖의 불을 모두 끄는 물은 바로 팔정도라는 점이다.

Ⅶ. 맺음말

스님이든 재가불자든, 지금 이 상황에서 침묵하거나 방관하는 것 또한 적폐다. 이제라도 각자도생을 일소하고 승가 공동체를 복원하고 맑고 향기로운 종단을 일으켜 세우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 역사의 죄인으로 남을 것이다. 반면에 지금 한국불교만을 놓고 볼 때 절체절명의 위기임은 분명하지만, 성찰과 혁신, 그리고 연대가 있을 때 위기는 기회로 전환한다. 봉암사 결사와 1994년 종단 개혁의 초발심으로 돌아가서 승가 본연의 청정한 가풍을 일으켜 교단의 온갖 구조적 병폐, 제도적 모순을 척결하고 이 땅을 부처님의 올바른 가르침과 보살의 향기로 물결치게 하여야 한다. ‘성찰하지 못한 과거는 우리의 미래’라는 마음으로 불교계의 적폐를 청산하고 ‘현재는 미래의 앞당긴 실천’이라는 의지로 우리가 살고 싶은 절과 맑고 향기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동참하여야 한다. 희망은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으로 쟁취하는 것이다.

재가불자가 수행하고 실천해야 할 강령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 불자 본연의 길

1. 삼보에 귀의합니다.

2. 오계를 수지합니다.

3. 육바라밀을 실천합니다.

4. 나의 깨달음/열반과 타자의 깨달음/열반을 이루는 데 게을리하지 않겠습니다.

5. 고통 받는 중생에 대한 자비심을 가지고 그들을 구제하는 일을 우선하겠습니다.

* 진리에 대한 헌신과 개방성

6. 늘 부처님의 진정한 가르침이 무엇인가 물으며 오직 진리에 부합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7. 세상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자비심이 진리와 하나임을 확신하며 살겠습니다.

8. 이웃 종교의 진리도 인정하며 살겠습니다.

* 개인의 존엄과 공동체성의 실현

9. 모든 중생에 불성이 있음을 믿으며 모든 중생의 선한 의지를 존중하며 살겠습니다.

10. 모든 생명이 서로 연기 속에 있는 상호생성자임을 인식하여 다른 사람과 생명을 섬기는 삶을 살겠습니다.

11. 내 안의 악과 폭력성과 무지를 진리와 사랑의 힘으로 끊임없이 정화/극복하며 살겠습니다.

12. 사부대중을 신분과 처지와 위상을 떠나 다같이 평등하게 바라보고 섬기겠습니다.

* 생태적 삶의 실현

12. 풀 한 포기와 먼지 한 알갱이도 우리와 연기 속에 있음을 깨달아 자연과 공존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13. 자연이 그 원리대로 순환하며 존재할 수 있도록 소욕지족(少欲知足)의 삶을 살겠습니다.

14. 고통을 느끼는 모든 생명의 이익을 동등하게 고려한 이익평등 고려의 원리를 따름은 물론 더 나아가 모든 죽어가는 생명의 고통을 내 자식의 병처럼 아파하며 연대하겠습니다.

* 종교의 본래 가치 회복과 사회적 책임

15. 제도 종교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충실하고 스님들이 모두 청정해질 때까지 불교 개혁운동을 하겠습니다.

16. 권승들의 독점과 범계에 저항하며 평등하고 청정하고 향기로운 상카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동참합니다.

17. 사찰의 사유화를 거부하고 불교 본연의 청빈과 무소유의 가치를 추구하며 나누는 삶을 살겠습니다.

18. 주술성에 의존하고 이기적 욕망을 부추기는 기복성을 거부하고, 과학과 합리성에 바탕을 둔 불교를 추구하겠습니다.

* 시민사회 형성과 민주적 가치 실현

19. 절을 공론장으로서 시민사회로 구성하고 모든 불자가 시민으로서 깨어 있고 비판하며 성찰하고 실천하는 주체가 되도록 늘 노력하겠습니다.

20. 자신의 이익을 위하거나 무지로 인하여 가진 자의 편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온 죄를 참회하겠습니다.

21. 내 업장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범한 공업(共業)을 풀기 위하여 구조적 폭력에 맞서서 정의롭고 평등한 세상을 지향하겠습니다.

22. 교단 안이든 밖이든 을의 입장에서는 모든 갑질에 대해 저항하고 갑의 입장에서는 권력을 포기하고 자비로서 바라보고 행하겠습니다.

* 한반도의 평화실현

23. 휴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바뀌고 한반도 평화체제가 수립되는 그날까지 분단모순의 극복을 위하여 노력하겠습니다.

24. 남북한 사이의 모든 적대행위에 반대하며, 개성공단 재개, 금강산 관광, 이산가족 상봉 등 대화와 협력을 지지합니다.

25. 남북 종교간 대화와 협력에 노력하며 이를 통해 통일을 돕고 한민족의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일을 추진하겠습니다. .

26. 한반도가 전쟁터로 변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핵무기 개발은 물론 신종무기 반입을 붓다의 이름으로 단호히 거부하고 평화운동에 매진하겠습니다.

27. 남북한의 평화와 통일이 강자만이 아니라 약자들의 삶이 더 나아지는 방향으로 이루어지도록 행동하겠습니다.

* 4차 산업혁명을 비롯한 과학기술 혁명에 대한 대응과 인류의 미래를 위한 결단

28. 생명을 조작하고 변형하는 생명정치와 과학기술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하여 생명을 살리고 섬기는 생명정치와 과학기술을 지지하겠습니다.

29.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을 대체하고 이에 대한 이익과 통제를 소수가 독점하는 것을 반대하며, 이른바 4차 산업혁명으로 이루어지는 성과들을 인류가 고루 누리는 길을 지지하겠습니다.

30. 과학에서 밝혀진 진리를 수용하되, 과학기술이 야기하는 역기능을 극복하기 위하여 기꺼이 느리고 불편한 삶을 살겠습니다.

31. 서로 갈등하고 대립할 때 가난하고 배제된 자들에 대한 편애적 선택을 하겠습니다.

32. 배제되고 추방당한 자들이 있을 때 그들의 눈부처를 바라보며 동일성이 범한 모든 혐오와 폭력에 저항하며, 약자들이 심한 고통에 있을 때 침묵하거나 방관하지 않고 자비로운 분노를 행하겠습니다.

33. 타자를 위하여 나의 욕망을 자발적으로 절제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이 기사에 대한 반론 및 기사제보 mytrea7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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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심 2018-10-20 09:33:08
이대로만 된다면 중생들이 모두 기뻐서 춤을 추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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