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성냄·어리석음의 불로 세상이 타고 있는데”
“탐욕·성냄·어리석음의 불로 세상이 타고 있는데”
  • 이병욱/정의평화불교연대 사무총장
  • 승인 2018.07.03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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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과 함께한 인도성지순례] (4) 바라나시 불의 제사의식과 부처님의 불의 법문

불의 제사의식을 보기 위하여 강가로 향했습니다. 바라나시의 거리는 사람으로 가득해서 자칫 길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가이드 깃발을 이정표로 뭉쳐서 따라 갔습니다. 도중에 걸인들이 달라붙었습니다. 끊임없이 ‘원 달러’를 말합니다.

불의 제사의식 아르띠 뿌자(Arti-Puja)

인파를 뚫고, 걸인들을 뚫고 불의 제사의식을 행하고 있는 가트에 도착했습니다. 저편에서 한참 의식이 진행 되고 있습니다. 일곱 명의 제관 들이 불을 빙빙 돌리는 등 반복적인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제사에 참가하는 사람들과 제사를 구경하는 사람들로 열기가 후끈합니다.

▲ 바라나시 다샤스와메트 가트.

불의 제사의식을 ‘아르띠 뿌자(Arti-Puja)’라 합니다. 매일 밤 이곳 바라나시 갠지스 강가 ‘다샤스와메트’ 가트(메인 가트)에서 열립니다. 이 뿌자를 보기 위해서 관광객이 몰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 힌두교 단체에서 시작했던 행사인데 인기를 끌자 매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르띠 뿌자는 시바신에게 바치는 제사로 힌두교 의식입니다. 가이드 샌디에 따르면 불을 태워 그 연기가 하늘에 이르기를 바라는 것이라 합니다. 제사는 브라만들이 주관합니다. 이렇게 매일 제사를 올리는 것은 ‘잘 먹고 잘살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라 합니다.

아그니 호뜨라(Agni Hotra)제사

불의 제사의식은 역사가 오래 되었습니다. 초기경전에도 불의 제사와 관련된 것이 나옵니다. <상윳따니까야> ‘쑨다리까의 경(S7.9)’에 따르면, “그때 바라문 쑨다리까 바라드자와가 쑨다리까 강 언덕에서 불의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불의 제사를 준비하고 있었다.”(S7.9)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불의 신(aggi)에 제사하는 것에 대하여 ‘아그니 호뜨라(Agni Hotra)제사’라 합니다.

바라문은 불의 제사를 지낸 뒤 남은 공양물을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고자 했습니다. 마침 부처님이 저편에 있어서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러나 이내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박박 깎은 머리였기 때문입니다. 고대 인도에서 삭발자는 죄인이거나 천한 자의 상징과도 같았습니다. 부처님 교단에는 계급을 가리지 않고 받아 들였기 때문에 삭발자중에는 노예나 불가촉천민출신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 힌두교 불의 의식 아르띠뿌자

바라문 출신 중에도 머리 깍은 자가 있었습니다. 이에 쑨다리까는 “그대는 어떤 가문 출신입니까?”라며 물어 보았습니다. 바라문 출신이라면 공양물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습니다.

“출생을 묻지 말고 행위를 물어야 하리.
어떠한 땔감에도 불이 생겨나듯
비천한 가문에도 지혜로운 현자가 생겨나네.
부끄러움으로 자제하는 자가 고귀하네.”(S7.9)

불의 신에게 불의 제사를 지내는 바라문에게 불이 평등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고급 전단향 나무에서 붙는 불이나, 소똥을 말린 것에 붙는 불이나, 불의 화염과 광채와 빛깔에 있어서는 똑같습니다. 바라문이 출생을 묻는 것에 대하여 불가촉천민도 깨달으면 누구나 성자가 될 수 있음을 불의 비유로 설명한 것입니다.

팔일제(Aṭṭhaka)

불의 제사의식은 인도에서 매우 뿌리가 깊습니다. 율장대품에서 부처님이 깟싸빠 삼형제를 교화하는데 있어도 불의 제사의식이 나옵니다. 부처님이 바라나시 인근 우루벨라 지역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율장대품에 이렇게 기록 되어 있습니다.

“그 결발행자들은 추운 겨울철에 팔일제 동안에 눈이 왔을 때에 네란자라 강에서 가라앉거나 뜨거나하는 부침을 계속했다.”(Vin.I.31)

여기서 팔일제를 앗타까(Aṭṭhaka)라 합니다. 주석에 따르면 “물과 불에 의해 정화하는 팔 일간의 축제를 말한다.”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인도에서 가장 추운 때 고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음력으로 1월 마지막 4일과 2월 처음 4일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8일간의 축제에서 결발행자들은 차가운 물속에 들어가 자맥질을 하는 등 물과 불로서 몸과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고행을 했습니다. 이런 사실은 오늘날 바라나시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물에 의한 청정은 없다

부처님은 물과 불로서 정화하는 것에 대하여 부정했습니다. <우다나> ‘결발행자의 경’에 따르면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 때 많은 결발행자들이 팔일 간의 눈 내리는 차가운 겨울날씨에 ‘이것으로 청정해진다.’라고 생각하여 가야 나루터에서 물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면서 자맥질도 하고 물을 몸에 쏟아 붓기도 하고 화신에게 헌공도 하고 있었다.”(Ud.6)

율장대품에 실려 있는 우루벨라 깟싸빠 형제들 이야기와 동일합니다. 가장 추운 날 8일 동안 물과 불로서 정화의식 하는 것을 앗타까, 팔일제라 합니다. 이와 같은 팔일제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렇게 게송으로 말씀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 속에서 목욕하는
그 물로 청정해지지 않는다.
진실과 원리가 있다면,
청정해지니, 그가 거룩한 임이다.”(Ud.9)

강물에서 목욕하는 것으로 업이 정화 되지 않음을 말합니다. 추운 강물에 자맥질을 하는 등 고행을 하여 청정해지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더러운 업이 결코 청정해질 수 없음을 말합니다. 오늘날 인도 갠지스 강에서 목욕하는 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강물에서 목욕하여 청정해진다면 강 속의 물고기들이나 물소들도 모두 해탈했을 것입니다. 만일 누군가 죄를 짓고 강물에서 목욕하는 것으로 죄가 씻겨 나간다면 이 세상에서는 범죄가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일주일동안 죄를 짓고 단 한번 회개 하는 것으로 면죄부가 주어진다면 업과 업의 과보에도 맞지 않습니다.

목욕으로 청정해지지 않습니다. 세례로 죄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목욕이나 세례는 악의 근원과 반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석에 따르면 “어둠의 반대가 빛이고 무지의 반대가 앎인 것과 같은 식으로 목욕이 악의 반대는 아니다. 그러므로 결론은 ‘물에 의한 청정은 없다.’에 도달한다.” (UdA.76)라 했습니다.

내면으로 목욕하여 청정해진 자

부처님은 물에 의해 청정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부처님은 진실(sacca)과 원리 (dhamma)에 의해서 청정해진다고 했습니다. 사성제와 같은 궁극적 진리와 팔정도와 같은 고귀한 원리에 의해서 청정해짐을 말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목욕이나 세례가 필요 없습니다. 부처님은 몸을 물에 적시지 않고도 저 언덕으로 건너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목욕을 한다면 내면으로 할 것입니다. 그래서 “고행과 청정한 삶은 물이 필요 없는 목욕이네.” (S1.58)라 했습니다. 부처님은 극단적인 고행은 번뇌를 부술 수 없다고 부정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고행은 인정했습니다. 외도들이 추운 겨울날 목욕함으로 인해 고행으로 정화하고자 하지만 극단적인 고행은 목욕으로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 감관의 수호, 두타행, 정진과 같은 고행은 목욕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부처님은 내면으로 목욕한 자가 진정한 수행자라 했습니다. <맛지마니까야> ‘옷감의 비유의 경(M7)’에 이런 게송이 있습니다.

“바후까 강과 아디학까 강,
가야 강과 쑨다리까 강
싸라싸띠 강과 빠야가 강,
또한 바후마띠 강이 있네.
어리석은 자 항상 뛰어들어 목욕해도
언제나 검은 행위를 씻을 수 없네.
쑨다리까 강이 무슨 소용인가?
빠야가 강이, 바후까 강이 무슨 소용인가?
강들은 악업을 저지르는 자를 씻지 못하네
그 잔인하고 죄 많은 사람들을.
청정한 자에게는 항상 정화일이 있고
청정한 자에게는 항상 포살이 있네
마음이 청정하고 행위가 맑은 자는
항상 자신의 계행을 원만히 하네
바라문이여, 여기에 참으로 목욕하라
그러면 모든 존재들이 그대에게서 안녕을 얻으리.
거짓을 말하지 않고 생명을 죽이지 않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앗지 않고
믿음을 가지고 인색하지 않으면
가야 강으로 갈 필요가 있을 것인가?
가야 강은 그대에게 우물에 지나지 않네.”(M7)

부처님은 내면으로 목욕하여 청정해진 자가 진정한 수행승이라 했습니다. 계행을 지키는 자, 포살일을 지키는 자가 진정한 목욕임을 말합니다. 만약 외도들처럼 강물에 씻는 것으로 정화된다면 누구나 다 해탈할 것입니다. 우루벨라 깟싸빠 삼형제도 그랬습니다.

불을 섬기는 제화당에서

부처님은 육십 명의 아라한이 생겨났을 때 우르벨라 쎄나니가마로 떠났습니다. 부처님은 우루벨라에 도착하여 그때 당시 큰 세력을 떨치고 있었던 세 결발행자들을 교화 했습니다. 오백 명이 따르는 우르벨라 깟싸빠, 삼백 명이 따르는 나디 깟싸빠, 이백 명이 따르는 가야 깟싸빠입니다. 이 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큰 우루벨라 깟싸빠를 신통으로 교화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마지막 단계가 바로 팔일제(Aṭṭhaka)에 대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물에 의한 정화를 하는 자들에게 오백 개의 화로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추운 겨울날 물 밖에 나와서 몸을 데우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또 사방으로 물을 물러나게 하여 가운데 흙먼지의 땅위에서 경행을 하는 신통을 보여 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깟싸빠여, 그대는 거룩한 임이 아닐 뿐만 아니라 거룩한 길에도 들어서지 못했습니다. 그대가 거룩한 임이 되게 하던가 그대가 거룩한 길에 들어서게 하는 그러한 그대의 길은 없습니다.” (Vin.I.32)

이것이 결정적 말입니다. 부처님은 온갖 신통으로 우루벨라 깟싸빠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루벨라에게 ‘거룩한 자(arahā)’도 가 아니고, 또한 물과 불에 의한 정화에 대하여 ‘거룩한 길(arahattamagga)’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에 우루벨라 깟싸빠는 부처님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부처님 제자가 되기로 했습니다. 자연스럽게 나디 깟싸빠와 가야 깟싸빠도 따랐습니다. 이렇게 부처님은 단기간에 천명의 제자를 새로 가지게 되었습니다. 불을 섬기는 제화당에서 삼형제를 교화한 것입니다.

세상이 불타고 있다는데

<율장대품> 세 번째 송출품 ‘우루벨라의 신통변화’를 보면 온갖 신통으로 가득합니다. 만약 이런 신통이야기만 전해져 왔다면 불교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나 하는 것으로 인식될 것입니다. 그러나 율장에서 무려 18페이지 걸친 신통이야기는 결국 ‘연소의 법문’을 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연소의 법문은 매우 유명합니다. 주석에 따르면 부처님의 세 번째 법문이라 합니다. 첫 번째 법문은 꼰당냐 등 5비구에서 설한 ‘가르침의 수레바퀴에 대한 경(初轉法輪經, S56.11)’이고, 두 번째 법문은 5비구를 모두 아라한으로 만든 ‘다섯 명의 경(無我相經, S22.89)’입니다. 세 번째는 불을 숭배하는 깟싸빠 삼형제와 그들을 따랐던 천 명의 수행승들을 위한 ‘연소에 대한 경(S35.28)’입니다.

부처님의 불의 법문을 중학교 때 접했습니다. 그때 당시 종로5가 부근 연지동에 있었던 동대부중 다닐 때 입니다. 일주일에 한번 불교시간이 있었는데 얄팍한 교재가 있었습니다. 학년은 기억나지 않지만 부처님이 석양의 산상에서 제자에게 설법하는 장면이 삽화로 그려져 있었습니다.

무엇이든지 처음 경험은 생생합니다. 처음으로 접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나이 어린 중학생의 머리에 저항 없이 밀려들어 왔습니다. 삽화에서 부처님은 마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세상이 불타고 있다.”라고 했습니다. 탐욕의 불로, 성냄의 불로, 어리석음의 불로 붙타고 있다고 했습니다.

왜 세상이 불타고 있다고 했을까? 그때 당시에는 몰랐습니다. 세상은 잘 돌아 가고 있는데 세상이 불타고 있다니! 그때 당시 중학생의 머리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의문은 항상 화두처럼 남아 있었습니다.

윤회의 땔감

불교를 다시 접했습니다. 중학교 이후 수 십년만입니다. 여전히 ‘세상은 불타고 있다’라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초기경전을 접하고 나서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2013년 보통불자가 주제넘게 번역 비교하다가 <상윳따니까야> 1권 ‘기뻐함의 경(S1.12)’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경에 “사람의 슬픔은 집착의 대상에서 생겨나니 집착하지 않는 자는 기뻐할 것도 없으리” (S1.12)라는 게송이 있습니다. 여기서 ‘집착의 대상’ 빠알리어 우빠디(Upadhī)를 번역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석을 보니 ‘재생의 토대가 되는 집착’이라 설명되어 있었습니다. 또 우빠디에 대하여 “삶에 필요한 토대나 소지품이나 설비 등을 뜻한다”라 설명되어 있었습니다. 우빠디가 집착을 뜻하는 말이긴 하지만 재생을 불러 오는 땔감 같은 것입니다.

불은 땔감이 있어야 계속 타오를 수 있습니다. 땔감이 없으면 더 이상 불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재생을 불러 오는 윤회의 땔감은 다름 아닌 집착입니다. 이를 우빠디라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집착을 뜻하는 우빠디는 윤회의 땔감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불의 법문

부처님은 세상이 불타고 있다고 했습니다. 부처님의 불의 법문, 연소의 법문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일체가 불타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일체가 불타고 있는가? 수행승들이여, 시각도 불타고 있고 형상도 불타고 있고 시각의식도 불타고 있고 시각접촉도 불타고 있고 시각접촉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도 불타고 있다. 어떻게 불타고 있는가? 탐욕의 불로, 성냄의 불로, 어리석음의 불로 불타고 있고 태어남, 늙음,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으로 불타고 있다고 나는 말한다.”(S35.28)

부처님이 불타고 있다고 한 것은 여섯 가지 감각능력에 대한 것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세상은 여섯 감역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각도 불타고 있고 형상도 불타고 있고 시각의식도 불타고 있고 시각접촉도 불타고 있고”라 했습니다.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정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느낌도 불타고 있다고 했습니다. 구체적으로 탐욕, 성냄, 어리석음입니다.

부처님은 이 세상이 ‘탐욕의 불로, 성냄의 불로, 어리석음의 불로 불타고 있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은 땔감입니다. 탐욕을 부리면 부릴수록, 분노하면 분노할수록, 어리석으면 어리석을수록 불은 더욱 더 거세게 타오를 것입니다.

불은 연료가 공급되는 한 계속 타오릅니다. 여기서 연료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입니다. 그래서 탐욕의 불, 성냄의 불, 어리석음의 불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땔감은 자가 공급(自家供給)된다는 사실입니다. 땔감이 떨어졌다고 하여 외부에서 들여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자가발전(自家發電) 되는 것과 같습니다. 욕심 부리면 부릴수록, 분노하면 할수록 땔감은 늘어납니다. 세세생생 타고도 남을 땔감을 만들어 왔습니다. 오온에 대하여 집착하면 할수록 땔감은 더욱 더 많이 만들어집니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세상은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입니다. 부처님이 ‘세상은 불타고 있다.’라 했을 때 중학생 머리로 이해 할 수 없었던 것은 일체, 즉 오온십이처십팔계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초기경전을 접하고 나서 모든 의문이

초기경전을 접하고 나서 모든 의문이 풀렸습니다. 부처님이 초기경전에서 말씀 하신 세상은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입니다. 이 세상이 불타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탐욕의 불로, 성냄의 불로, 어리석음의 불로”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불은 결국 집착에 따른 것입니다. 자아에 대한 집착이라는 땔감이 있어서 계속 불타는 것입니다. 오온에 대한 집착이 남아 있는 한 세세생생 불타게 될 것입니다.

땔감이 없으면 불은 자연스럽게 꺼질 것입니다. 더 이상 탐욕의 땔감, 성냄의 땔감, 어리석음의 땔감을 공급하지 않는다면 불은 꺼지고 말 것입니다. 열반입니다. 따라서 괴로움과 윤회의 원인이 되는 오온에 대한 집착이라는 땔감이 더 이상 공급되지 않았을 때 불은 꺼질 것입니다.

<율장대품>에서는 불의 가르침을 설명하기 위하여 긴 신통이야기가 전개 되었습니다. 부처님이 물과 불에 의한 정화를 행하는 외도들에 대하여 때로는 물의 가르침으로, 때로는 불의 가르침으로 교화 했습니다. 그럼에도 바라나시 강가에는 여전히 목욕을 하면 해탈한다는 믿음이 있고, 또한 불의 제사의식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바라나시에서의 몽환적 경험

불의 제사의식을 관람한 순례자들은 또다시 릭샤를 타고 바라나시 시내를 질주했습니다. 혼돈의 도가니이지만 나름대로 질서가 유지되고 있습니다. 거리에는 주인 없는 소와 개가 유유히 걸어 다니고 있습니다.

소와 개와 사람이 엉켜 사는 곳이 바라나시, 인도대륙입니다. 한국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인도에서는 발생합니다. 그것도 부처님 당시부터 전해 오던 것입니다. 초기경전을 보면 “뿍꾸싸띠가 발우와 법복을 구하러 다니는 동안 돌아다니던 황소가 그의 목숨을 빼앗았다.”(M140)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부처님 당시에도 지금처럼 주인 없는 소가 돌아다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가난 빈궁한 바라나시는 종교적으로 활력이 넘치는 곳입니다. 곳곳마다 걸인이 있어서 “원 달러”를 말합니다. 어느 여인은 돌도 안 되는 아기를 안고 구걸합니다. 또 어떤 이는 바라나시 사진첩을 판매합니다. 2달러에 팔아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계속 달라붙습니다.

▲ 군중 속을 헤집고 다니는 자건거 릭샤

릭샤가 약 30분가량 시내를 달려 호텔에 도착했습니다. 가이드는 1불씩 해서 2인이므로 2불만 주라고 합니다. 그렇게 했더니 “원 달러”를 외치며 따라 붙습니다. 생계를 위하여 죽도록 페달을 밟아야 하는 그들에게 너무 야박하게 한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늘도 내일도 관광객을 상대로 “원 달러”라 할 것입니다.

바라나시에서 경험은 몽환적입니다. 마치 다른 세계에 와 있는 듯 했습니다. 다른 세계에 와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책으로 보아도 아무리 다큐프로로 보아도 느낄 수 없었던 것을 보고 듣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감으로 느낀 것입니다. 또한 지수화풍으로 느낀 것입니다.

바라나시의 공기는 탁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퀴퀴한 냄새가 납니다. 더구나 끊임없이 경적이 울립니다. 그럼에도 한사람도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을 생각해서 마스크를 자제 했습니다. 그 대신 바라나시의 열기를 그대로 들이 마셨습니다.

일정에 없던 바라나시 불의 제사의식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카오스의 바라나시 시내를 걸어 다녔습니다. 이런 경험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가이드 샌디는 “아침에 가면 이런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라 말했습니다.

이병욱/정의평화불교연대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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