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보도지침', MB정권 때 다른 형태로 부활"
"30년 전 '보도지침', MB정권 때 다른 형태로 부활"
  • 지유석 기자(오마이뉴스)
  • 승인 2018.01.25 12:4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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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고발자, 이제는 사회가 감싸줄 때 ⑧] '내부고발 효시' 보도지침 폭로한 김주언 사무총장
<1986년 1월 22일>

* 노태우 대표 회견 관계
1) 꼭 1면 톱기사로 쓸 것.
2) 컷에는 '88년 후까지 정쟁 지양', '88올림픽 거국지원협의회' 등으로 크게 뽑을 것

* 김근태 공판 
그가 '고문당하고 변호인 접견을 차단당했다'는 등의 주장은 보도하지 말도록. 사진이나 스케치 기사 쓰지 말 것.

<1986년 2월 8일>

* 김대중 귀국 1주년
김영삼 초청 회합과 김대중 1주년 회고담은 1단 기사로 취급할 것. 김대중 '연금(자택)'이라 하지 말고 '보호조치'라고 표현할 것.

<1986년 6월 7일>
"대통령이 텔레비전 뉴스에 항상 나온다"는 비판은 쓰지 말 것. 

전두환 정권 당시 문화공보부 홍보정책실이 매일 언론사에 시달한, 이른바 '보도지침' 중 일부다. 보도지침은 일단 전두환 정권이 사회적 의제를 얼마나 세밀히 통제했는지를 여실히 드러낸다.
 

 1986년 보도지침을 제보한 김주언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총장
▲ 1986년 보도지침을 제보한 김주언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총장 ⓒ 지유석 관련사진보기

보도지침을 폭로한 <말>지는 1985년 10월부터 1986년 8월까지 10개월에 걸쳐 문공부 홍보정책실이 하달한 사항을 실었다. 이 시기는 정기국회 공전, 개헌 서명운동을 둘러싼 전두환 정권과 야당의 대립, 직선제 개헌, 학생들의 군사독재 비판 시위 등으로 점철된, 그야말로 격동의 시기였다. 정통성이 취약한 전두환 정권 입장에서는 불리한 여론은 어떤 식으로든 차단이 필요한 시기이기도 했다. 결국, 전두환 정권은 보도지침으로 언론을, 궁극적으로 사회적 논의의 의제를 통제한 셈이다.

이 보도지침 폭로는 당시 <한국일보> 편집부 김주언 기자가 친구이던 <말>지 김도연 편집장에게 전달한 게 발단이었다. 내부고발의 시선으로 볼 때, 김주언 기자의 행동은 내부고발의 효시라 할 기념비적 행동이었다. 김 기자는 지금은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총장과 내부제보실천운동 공동대표로 활동 중이다.

지난 19일 김 사무총장을 서울 서대문 모처에서 만나 폭로 막전 막후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 먼저 요즘 화제를 모으고 있는 영화 <1987> 이야기부터 끄집어내고자 한다. 영화에서 <동아일보> 편집장이 고문실태 집중취재를 지시하면서 "대학생 한 명이 고문 받다 죽었는데, 보도지침 따위가 무슨 상관이야! 무조건 들이 받아!"라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을 보면서 어떤 느낌이 들었나?
"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1987년 1월에 벌어진 일이었다. 난 당시 감옥에 있었기에 당시 상황은 자세히 알지 못한다. 대신 면회 온 지인을 통해 상황을 전해 들을 수는 있었다. <말>지가 폭로한 보도지침은 1986년 8월까지 있었는데, 폭로 이후에도 보도지침은 계속 하달됐다.

1986~1987년 그 시기는 전두환 정권 말기였다. 따라서 기자들이 적극적으로 저항하지는 않았지만, 일정수준 반발심리는 있었다. 이런 누적된 반발이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을 밝히게끔 했다.

또 최근에 그 시절 <동아일보> 사회부장을 지냈던 정구종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었는데, 영화에서처럼 데스크가 들이받거나 한 건 아니었다. 보도지침이 칠판에 적혀 있는 것도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보도지침이 하달되면 정치, 사회, 경제 등 각 데스크에 배포됐다. 부장들은 이걸 참고해 기사를 고쳐 쓰거나 했다.

그런데 <동아일보> 같이 당시 야당 성향이 강했던 신문들은 보도지침을 다 지키지는 않았다. 한 연구발표에 따르면 제목은 대게 보도지침을 따랐다. 그러나 크게 쓰라는 거나 쓰지 말라는 걸 1단에 쓴다든지, 제목을 살짝 바꾼다든지 하는 식으로 저항했다. 물론 신문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말이다. 방송의 경우는 전혀 저항이 없었다."

- 그 시절과 지금의 <동아일보>는 천양지차 같다. 
"지금과 1980년대 <동아일보>는 확연히 다르다.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은 <중앙일보>가 1987년 1월15일 치를 통해 가장 먼저 보도했다. 다음 날인 1월 16일 <동아일보>는 고 박종철 열사가 고문당한 정황을 보다 구체적으로 보도했다. 이때 이를 보도하지 말라고 지시가 내려왔을 것이다.

당시 기자들이 보도지침을 어기고, 보도하려고 했던 건 실로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그런데 기자뿐만 아니라, 데스크, 편집국장의 승낙이 없으면 보도하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당시 <동아일보>는 타 신문사와 달랐다고 본다.

김대중 정부 출범 이전까지 <동아일보>는 독보적인 야당지로 명성이 자자했다.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야당 성향이 강해졌다. 그러다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많이 바뀌었고, 최근 들어 더 바뀌었다. 의식 있고 비판 정신 강한 기자들이 지속해서 떠난 결과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 내부고발의 시선으로 볼 때, 보도지침 폭로는 내부고발의 효시라고 보아도 무리는 없다는 판단이다. 보도지침을 제보했다는 이유로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간 것으로 안다. 지금도 내부비리를 폭로한 공익제보자들은 고통을 당하는데, 당시는 말도 못할 정도 아니었나?
"많은 사람들이 보도지침을 폭로한 동기를 궁금해한다. 대학 시절 학생운동을 했던 친구들이 주위에 많았는데, 졸업 후 이들은 변변한 직업도 가지지 못한 채 재야에서 운동을 이어나갔다.

한편 신문은 제 역할을 못 했다. 당시엔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었고, 그래서 신문은 제도언론이라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 스스로 제도화됐다기보다 폭압적인 통제에 따른 불가항력이었다.

보도지침 내용 속엔 전두환 정권의 반민주적·반민족적·반인권적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사실 언론을 통해 민주화해보자 하는 생각이 강했는데, 제대로 실행에 옮기지 못해 늘 부채의식이 있었다. 이런 이유로 보도지침을 알리자고 마음먹었다."

보도지침, 이명박 전 정권 때 다양한 방식으로 부활 
 

 영화 <1987>에서 <동아일보> 편집국장은 보도지침을 지우며 '들이 받아'라고 외친다.
▲ 영화 <1987>에서 <동아일보> 편집국장은 보도지침을 지우며 '들이 받아'라고 외친다. ⓒ CJ엔터테인먼트 관련사진보기

- 대공분실에서 고초를 당하면서 후회는 없었는가?  
"사실 당시에 학생운동이나 재야운동 하다 잡히면 대공분실 가서 고문당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아마 저들은 나의 행동이 기분 나쁘고 싫었을 것이다. 고초를 당할 거라는 생각 갖고 폭로한 건 아니었다.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후회는 없다. 다만 가족들에게는 미안했다. 그러나 폭로 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과 인권운동가들이 연대해줘서 외롭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특히 재판을 받으면서 고 한승헌 변호사, 고 조영래 변호사, 황인철 변호사, 조준희 변호사, 홍성우 변호사, 김상철 변호사, 고영구 변호사(전 국정원장), 황정호 변호사, 이상수 변호사, 신기하 변호사 등 쟁쟁한 변호사들이 변호를 맡아줬다. 요샛말로 법조 드림팀이 나선 셈이다."

- 보도지침 폭로는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95년 12월 무죄판결을 받을 때까지 오랫동안 법정 다툼을 해야 했다. 법적 판단이 미뤄진 것도 일종의 보복조치 아니었나? 
"내 사건은 노태우 정권을 거쳐 김영삼 정부 시절 최종 판단이 내려졌다. 이 과정에서 판사들이 판단을 계속 미뤘다. 재판부가 대여섯 번 바뀌었고, 그 사이 9년의 시간이 흘러갔다. 사회가 민주화됐다고는 하지만 사법부는 민주화가 덜 됐었다. 그런데 지금도 사법부는 별반 달라지지 않아 보인다."

-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거치면서 언론은 수난을 당했다. 당시엔 보도지침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지금은 굴종적인 태도로 일관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이명박 전 정권에서 당시 수준까지는 아니어도 보도지침은 다른 형태로 부활했다. 사실 전두환 정권 시절 보도지침을 어기면 안기부로 끌고 가 고문 등 물리적 제재를 가했다. 또 언론사에 대해선 문공부 장관이 언론기본법에 따라 등록을 취소할 수도 있었다. 이런 이유로 언론이 꼼짝 못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기자들은 조금이라도 보도하고 싶어 했다. 이런 갈망이 크게 나타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1980년 언론통폐합으로 1200여 명의 언론인이 쫓겨났다. 이런 이유로 저항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명박·박근혜 보수 정권에서 기자들은 직업인이 된 듯한 경향이 강해 보였다. 최순실 국정개입 사건을 계기로 바뀌기는 했지만 말이다. 공영방송 KBS·MBC의 경우 자기 진영 사람을 사장으로 임명해 간접적으로 통제했다. 다시 말하자면 권력이 대리인을 내세워 통제했다는 의미다. 이 과정에서 반발하는 기자와 PD들은 쫓겨났다.

공영방송을 제외한 다른 매체에서는 친분이나 이해관계 등을 통해 주고받기식 보도행태가 이뤄진 건 아닌가 한다. 일부 언론인들은 출세를 노리고 자발적으로 협력한 측면이 강했다. 또 이명박 정권 당시 청와대 홍보수석을 맡았던 이동관, 김두우 같은 사람들은 언론과 접촉했고. 이들은 언론을 통제하지 않았다고 강변하지만, 권력기관에 있는 사람의 한 마디는 큰 위협으로 받아들여지기 마련이다."

세상이 조금은 나아졌다, 그러나 아직 부족해

- 본인의 제보로 세상이 나아졌다고 여기는가? 또다시 그 상황으로 돌아간다면 폭로할 것인가?
"과거, 특히 1987년 6월 항쟁 이후 언론자유가 확보된 건 사실이다. 확실히 과거보다는 나아졌다. 그리고 폭로라기보다, 앞서 말했던 과거 젊은 시절 민주화운동 하던 동료들에 대한 부채의식이 남아 있다. 언론 현장을 떠난 지 오래됐다. 따라서 현재 언론 상황을 잘 모르지만, 보도지침을 폭로할 당시와 비슷한 상황과 맞닥뜨린다면 다시 행동에 나설 것이다."
 

 김주언 사무총장은 동료에 대한 부채의식으로 보도지침 고발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 김주언 사무총장은 동료에 대한 부채의식으로 보도지침 고발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 지유석 관련사진보기

- 내부고발자 혹은 공익제보자들을 괴롭히는 관행은 여전한 것 같다. 국가가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줘야 한다고 본다. 지금 인터뷰를 진행하는 취지도 바로 여기에 있다. 어떤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보는가? 
"내가 보도지침을 폭로하던 시점이 1980년대 중반이었는데, 당시엔 내부고발이나 '휘슬블로어' 같은 개념이 아예 없었다. 그저 양심선언이라고 했었다. 이후 윤석양 이병의 보안사 사찰문건, 이문옥 감사관의 감사원과 정·관계-재벌 기업 사이의 유착 등을 폭로하면서 내부고발이 공론화됐다.

사회가 청렴해지려면 내부고발 관련 제도 확립이 필요하다. 이래야 은밀하게 불법을 저지르기 어려워진다. 그간 추이를 보면 관련법이 마련되기 전에 총리실 산하에 부패방지위원회가 생겼고, 당시 기자협회장이던 난 이 위원회에서 위원을 지냈다. 이명박 전 정부 당시엔 청렴위와 소청심사위원회 등 몇 가지 위원회를 한데 묶어 국민권익위원회를 꾸렸다. 내부고발자 관련 법령도 정비됐다.

그럼에도 여전히 부족하다. 국민권익위의 지위가 다소 모호하고, 현행법으로 내부제보자를 보호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또 내부고발 시 국민권익위를 통해야 한다. 일일이 따질 수는 없지만, 관련 법령을 벗어난 내부고발에 대해선 이렇다 할 보호장치가 없다. 고발자의 신원도 쉽게 노출되기 일쑤다. 그러니 내부고발자들이 여러 불이익을 당하는 것이다.

내부고발은 불의한 일에 개입했던 내부자가 양심을 걸고 고발에 나서는 일이다. 내부고발자가 불법행위에 가담한 데 대해선 면책조항이 있어야 한다. 면책이 어렵다면 검찰이 사전형량조정제도(플리 바게닝 : 검찰이 수사 편의상 관련자나 피의자에 대해 유죄를 인정하거나 증언을 하는 대가로 형량을 낮추거나 조정하는 협상제도 - 글쓴이) 등을 통해 내부고발자를 보호해줘야 한다. 이 같은 제도적 뒷받침이 없다면 내부고발하기 힘들어진다.

또 내부고발로 직장을 잃었거나 복직해도 업무에서 배제되는 이들도 있는데, 이들에겐 관련 기구에서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만약 사학비리를 고발한 이들에겐 교육청에 일자리를 마련해 주는 식이다."

- 현행법이 언론 제보를 막고 있다는 지적이 줄곧 있어왔다. 현행 공익신고자보호법은 언론과 시민단체를 통한 고발을 보호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다. 
"그렇다. 현행법이 언론 제보를 내부 제보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언론에 알리고 싶어도 못한다. 이 점 역시 보완이 필요하다.

미국도 완벽하지는 않다. 미 국가안보국(NSA)의 무차별 통신정보 수집 실태를 폭로한 에드워드 스노든은 러시아에 망명해 있으니까. 그러나 과거 <뉴욕타임스>에 '펜타곤 페이퍼'를 건넨 대니얼 엘스버그의 신원은 그가 사망하기 직전에야 신원이 공개됐다. 반면 윤석양 이병 같은 이들은 고발 이후 평생을 정서적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사실 '내부고발'이란 낱말에 배신자라는 이미지가 강하다는 이유로 공익제보로 바꾸자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난 내부고발이란 낱말을 더 선호한다. 무엇보다 내부고발이 떳떳하다는 인식을 만들어줘야 한다."

- 공익제보를 마음먹고 있는 이들에게 조언해준다면? 
"사실 우리 사회 곳곳에 조금의 비리도 참지 못하는 의인들이 많다. 내부고발은 자기 양심을 지키는 일이다. 다소 고초를 당하더라도 양심을 지키고, 투명하고 정의로운 사회, 공정한 사회로 나가도록 인도하는 중요한 일이다. 따라서 이런 사회를 만드는데 약간이라도 기여할 수 있다면 주저 없이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변에서 배신자란 비난을 듣더라도 말이다. 자기 양심에 거리낄 게 없다면, 이보다 훌륭한 일은 없으리라고 본다." 
 

* 이 기사는 제휴매체인 <오마이뉴스>에도 게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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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의 2018-01-25 13:17:37
좋은 글입니다.
조계종 권승들이 읽고 양심을 회복하고
옆에서 아부로 먹고사는 이들도 권승들과 함께 참회하여
양심을 회복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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